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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지배 아래 놓여있지만, 티베트는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종교적 수장이자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며, 그들의 종교인 라마교 승려들에 대한 깊은 신뢰가 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소승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부처가 되어 ‘성불(性佛)’할 수 있다는 관념이라고 한다. 대체로 티베트의 불교를 소승불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이라 평가하며, 그들은 수행 방법 중의 하나로 지속적으로 ‘진언’을 외우며 성불을 추구한다고 한다. 저자가 티베트 문화의 대표적인 것으로 ‘소리’를 적시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라 여겨진다.
저자는 대만 유학 중 티베트 수업을 받으면서, 한 학기 내내 교재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단어의 의미나 문법을 따지기보다 그저 한 학기 내내 교재의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던 수업 내용을 통해, 뒤늦게 암송과 그 ‘소리’가 주는 효과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티베트에서 생활하면서 ‘소리’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를 ‘티베트어 수업이 들려준 삶과 죽음의 끝없는 속삭임’이라고 붙였을 것이다. 수업을 통해 티베트 문화를 접하고,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관념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 역시 티베트에 대한 막연한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밀교(密敎), 달라이 라마,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투쟁, 독특한 장례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은 이의 주검을 새가 먹도록 한다는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 등등. 이 책은 그 가운데 티베트인들의 조장 풍습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경전을 외우는 행위가 삶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라는 예증의 사례로 ‘프롤로그’를 통해서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 정부의 최고 책임자에 의해서 불경낭송을 금지 당했을 때 사람들이 활력을 잃고 무기력하게 지냈지만, 책임자가 바뀌어 다시 불경낭송이 허용되었을 때 활기차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대비시켜 서술하는 것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그들의 신앙의 힘이자, 또한 ‘소리’가 지닌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 ‘1부 소리는 고독하지 않다’에서는 티베크 종교와 문화에서 ‘소리’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이론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모든 자연 여건이 풍족하지 못한 고산지대에 살면서, 그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의 삶의 문제를 신의 의지로 해석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문제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이고, 신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끊임없이 진언을 외운다고 한다.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에 산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들의 시신은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독수리의 먹이로 바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티베트의 천장 혹은 조장 풍습인 것이다. 다소 단편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티베트 문화의 자세한 내용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1부의 내용을 통해서 그들의 생사관은 물론 종교에 대한 관념, 그리고 특히 그들이 ‘소리’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티베트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알 수 있는 ‘2부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에 소개되었던 내용들이었다. 이 부분은 저자가 티베트에서 직접 듣고 겪었던 내용들을 재구성한 8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짧은 이야기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각의 내용들을 통해서 그들이 느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아마도 저자가 이러한 내용들을 재창작할 수 있기까지에는, 티베트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과 교류하였던 적지 않은 시간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이해된다. 티베트인들이 이러한 속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것은 저자를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곱사등이'로 살아야 했던 소녀 ‘다와’의 이야기로부터 독수리의 시선을 따라 인간의 관념들을 서술하고, 마지막 죽은 이의 시신을 해부하는 역할을 맡은 ‘해부마스터’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각자의 문화에서 유래된 풍속일 뿐이라 하겠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서해의 일부 섬 지방에서는 시신을 자연에 방치했던 ‘풍장(風葬)’의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육지에 비해 매장할 땅이 한정되었기에, 오랫동안 시신을 자연에 방치했다가 뼈를 추려 장사를 지냈던 풍속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고원지대인 티베트에서도 역시 자신들이 처한 자연 환경을 고려하여 천장이 주로 행해졌고, 때로는 시신을 물에 빠뜨리는 수장(水葬)도 행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공동체의 문화는 그들이 살아온 환경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절대적인 기준으로 그것의 의미를 따지는 것은 자칫 선입관에 의한 그릇된 평가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이 전통적으로 ‘소리’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 역시 문맹률이 높아 전언을 낭송하는 수행 방법을 중시했던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글보다는 소리에 의해서 문화가 전승되던 시절에 그 ‘소리’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의식이 담겨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한 전승을 통해서 저자가 접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고, 그 이야기들이 새로운 ‘이야기꾼’으로서 저자를 만나 우리에게 그들의 낯선 풍습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티베트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싶다.(차니)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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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 - 심혁주, 『소리와 그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지은이는 살아 있다는 것의 본질을 ‘소리’와 ‘냄새’에서 찾고 있다. 감각기관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눈’이다. 근대문명은 시각으로 이루어진 문명이다. 쉴 사이 없이 흘러가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보라. 보이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자기의 본성을 잃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지은이가 살아 있음의 본질을 소리와 냄새에서 찾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밝은 세상에서 눈을 뜨고 있으면 희미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한밤중이 되어 주변이 고요해져야 비로소 조금씩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두운 방안에 잠을 자려고 눕는다. 잠깐 사이 주변은 조용해지고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밝은 세상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지은이는 살아 있음을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관 짓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자(死者)의 귀에 주문을 읊는다고 한다. 다음 세상으로 무사히 보내기 위한 주문이다. 죽은 사람은 청각으로 산 사람의 주문 소리를 느낀다고 한다. 시각보다 청각이 다음 세상과 이어진 감각이라는 얘기겠다.
지은이는 소리의 탄생 이라는 항목에서 ‘옴Om’이라는 거룩한 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옴’은 우주를 울리는 소리이다. 입으로 옴 소리를 내보자. 온몸을 천천히 감도는 소리를 느낄 수 있다. 옴은 생명을 치는 소리가 아니라 생명을 보듬는 소리이다. ‘옴’을 길게 발음하면 ‘엄마’와 비슷한 소리가 나온다. ‘오옴’은 ‘엄마’와 연결되어 있다. 처음으로 말을 터뜨리는 아기의 입에서는 ‘엄마’라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 ‘엄마’라는 소리는 가슴을 울리고 세상을 울리고 우주를 울린다. ‘옴’이라는 거룩한 소리는 이 우주를 사는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지은이 말마따나 최초의 세상에서 인간과 동물은 소리로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면서 인간과 동물은 분리되었고, 인간은 언어=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도구로 삼는 데 이르렀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에 황제의 음성이, 투사의 음성이, 황소의 음성이, 밤새의 음성이, 산모의 음성이, 탄식하는 자의 음성이 들어 있다. 생명은 소리로 모든 생명이 여럿이면서 하나라는 걸 보여준다.
귀는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열려 있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귀는 다른 어떤 감각기관보다도 일찍 완성된다. 이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식은 귀가 듣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귀를 통해, 소리를 통해 최초로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의 존재는 공기와 비슷해 보인다. 숨을 쉬면서도 공기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해서 소리는 자기 영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존재를 감싼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이 점을 알려주는 책이다.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의 존재의 본질이 삶과 죽음을 거듭하며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인간 존재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것은 바로 귀로 듣는 소리와 그것에 의한 의식의 각성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낮과 밤, 황혼의 사이에 일어나는 이야기로 말이다. (53~54쪽)
문명인들은 화려한 이미지에 매혹되어 있다. 외모지상주의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외모는 눈으로 봤을 때 아름다운 모습을 가리킨다. 소비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모’는 자본을 증식하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등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외모를 꾸미는 데 바쁘다. 얼굴에 주름이 생기면 보톡스를 맞아 없애려고 한다. 매끄러운 피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얼굴에 투자한다. 사회는 외모가 경쟁력이라면서 이러한 상황을 부추긴다. 지은이는 외모를 중시하는 세태와 관련하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이야기한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소리를 보는 것을 말한다. 소리를 본다고? 화려한 이미지에 물든 문명인들은 소리를 보는 방법을 모른다. 소리를 보려면 자기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기 마음에 집중할 수 있을까? 화려한 이미지에 집착하는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관(觀)’이라는 말은 정확히 이 맥락에 걸려 있다. 문명인들은 화려한 이미지를 관(觀)하지 못한다. 보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이미지가 내보이는 소리에는 아주 무심하다. 남이 하는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사람들이 바로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문명인들이다.
지은이는 귀로 듣는 소리를 공기에 비유한다.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숨이 막히는 상황을 경험해야 비로소 우리는 공기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는 귀로 엄마가 내는 소리를 듣는다. 태아가 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귀를 통해 이 세상과 교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귀는 홀대를 받다가 죽어서야 다시 산 사람들이 외우는 주문(呪文)을 듣는 귀로 돌아온다. 귀에 들려오는 주문을 듣지 못하면 죽은 자는 다음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없다. 소리는 그러니까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신비한 감각이다. 그래서일까, 티베트 승려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리를 내어 경전을 읽는다. 경전을 읽으며 소리를 내는 게 그들에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련과정이다. 지은이는 티베트 활불인 숨마추제와 인터뷰를 하면서 소리의 매력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에 대해 숨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귀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귀는 눈과 혀보다도 더욱 소중한 감각입니다. 눈과 혀가 욕망과 감각을 선호한다면 귀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89쪽)
눈은 매혹적인 이미지만 좋아한다. 잘 생긴 얼굴과 예쁜 얼굴만 좋아하는 눈을 생각해 보라. 혀도 그렇다. 혀는 일반적으로 단맛을 좋아한다. 짠맛과 신맛과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쓴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눈과 혀는 자꾸만 이미지와 맛을 분별하려고 한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쁜 시비심(是非心)이 일어나면, 우리네 마음은 이런저런 갈등으로 들끓는다. 시비심은 스스로를 외부와 차단하는 마음이다. 시비를 가리는 사람은 자기를 중심에 세우고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판단한다. 애초부터 그(녀)가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을 기반으로 자신을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을 자기가 만들고 싶은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조금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산을 관통하는 도로를 내는 게 인간이다. 눈과 혀에 현혹된 인간은 멀쩡히 살아 있는 귀로 자연이 내는 비명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지은이가 왜 ‘소리’에 주목하는지 이만하면 이해되지 않는가?
이 책 2부에 실린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에 나타나는 대로, 소리에는 생명의 아픔을 치유하는 묘한 능력이 들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곱사등이 다와’( 곱사등이, 다와 )는 소리를 내어 경전을 읽음으로써 아픈 몸을 치유하는 힘을 얻는다. 물론 ‘곱사등이’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소리 수련을 통해 다와는 자기 몸과 대화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등이 굽어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다와가 나무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한밤중에 나무를 향해 뛰어가는 장면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무가 서 있던 곳에서 다와는 사원도 아니고 집도 아닌 곳을 발견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서 내려진 밧줄이 보인다. 줄에 귀를 갖다대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알 수 없는 소리. 다와는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한다. 줄 끝자락에서 똑똑 물이 떨어진다. 다와는 줄을 타고 내려오는 물을 쪽쪽 빨아 마신다. 몸이 아프지 않다. 온몸으로 평안한 느낌이 퍼지는 순간 문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다와야, 이제 세상에 나오렴.”(133쪽) 자기를 내려놓고 온몸으로 소리와 하나가 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티베트에서 죽은 시신의 몸을 발라내는 해부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해부마스터 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한 사람이 시체 해부를 한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이다. “칼과 도끼로 발라낸 인간의 뼈, 살, 피부 그리고 뭉텅거리는 신경과 근육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매일 그런 생명의 원형질을 마주하는 사람, 그것이 그의 업(業)이라면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17쪽)라는 지은이의 말을 들어보라. 시신의 몸을 발라내 독수리에게 주는 것을 천장(天葬)이라고 한다. 천장을 하는 이유는 시신의 몸에서 ‘영혼’을 꺼내 다른 새로운 몸속으로 옮기기 위해서이다. 이곳에서 독수리는 신조(神鳥)다. 누구도 독수리를 만질 수도, 쳐다볼 수도 없다. 숨이 멎는다고 죽은 게 아니라 신조의 뱃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죽은 것인 셈이다. 티베트에서 내려온 풍습이니 우리 풍습에 맞춰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일과 천장 풍습이 무에 다를 것인가?
죽은 사람은 신조에게 몸을 바치고 영혼으로 남아 새로운 몸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스스로 제 몸을 잘라 신조를 먹일 수 없으니 해부마스터가 필요한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의 몸을 발라내는 일이니 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해부마스터야 달리 말할 게 있겠는가? 그런 고통을 온몸으로 겪으며 해부마스터는 천장 의식을 거행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 시신을 단지 시신으로 보는 사람이 어떻게 시신을 해부할 수 있을까? “공기를 삼키듯 시신의 몸속으로 칼을 디밀면서 자신의 생살을 자르는 훈련을 하고 있다.”(18쪽)라고 지은이는 쓰고 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의 몸에서는 아기 냄새가 난다. 자기를 내려놓은 사람만이 해부마스터를 할 수 있다는 얘기겠다.
우리가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이야기가 어쩌면 인간이 지닌 생명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일는지도 모른다. 문명이 외면한 수많은 감각 속에 우리가 잃어버린 진실이 있다. 그 감각과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논리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런 감각과 만날 수 없다. 생명이라는 거대한 그물망으로 보면 인간은 아주 작은 생명체에 불과하다. 이성의 힘으로 인간은 생명의 중심에 스스로 올라섰지만, 그것은 다른 생명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오만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지은이는 문명인이 잃은 ‘소리’로 생명으로서 인간을 다시 그리고 있다. 인간은 결코 홀로 살 수 없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그물망이 우선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여러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이성의 힘을 넘어서는 이 운명을 거부하면 인간은 멸종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눈을 감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오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문제는 우리 인간인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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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가 나를 알아주는 것인가? 소유와 물질을 과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뜨거운 피인가? 큰소리로 지식을 파는 것인가? 그런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의 본질을 ‘소리’와 ‘냄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움직이고, 움직이기 때문에 소리를 내고, 소리를 내기 때문에 냄새를 발산하고 그리고 타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소리와 냄새를 가지고 말이다. ---p.5~6 ![]() 이 책의 글의 내용은 팔딱거리는 인간과 감탄스런 자연을 묘사하는 현재가 아니라 지난날로 돌아가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은 사람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를 둘러싼 관계를 끌어올리고 싶었다. 글 속의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리와 냄새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해서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티베트의 초원과 야크를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선함, 평화로움, 사랑, 진실, 유머, 노래, 춤 등의 일상과 거기서 나오는 소리와 냄새를 내내 생각했다. 설령 아픔과 상처의 소리와 냄새가 난다 할지라도 말이다. ---P.7
저자 심혁주는 대만 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에서 독수리의 밥으로 사람의 시신을 공양한다는 티베트 조장(鳥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굉장히 특이한 이력이다. 유학시절 100년 만에 왔다는 대지진을 경험하고 50년 만에 왔다는 홍수에 휩쓸리고 나서 ‘죽음과 내일 중에 어느 것이 더 빨리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티베트 속담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시(詩)를 좋아하고 시인(詩人)을 존경한다. 물질과 소유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기와 같은 발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쏟아낸 글을 보고 있으면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질투하고 화난 상판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티베트에는 시인과 시집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마음, 소리, 냄새, 죽음, 사랑, 영혼, 환생, 시신, 뼈, 피 이런 것들을 평생 시어(詩語)로 부리는 사람들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은 시집(경전)이 항상 바람에 휘날린다. 그들은 자연을 쪼개어 살지 않고 바람이 부는 자연에 들어가 산다고 한다. 저자는 그들의 시가 그리워 거의 매년 티베트에 간다. 그곳에서 걷고, 웃고, 울고, 고독하고, 우울해하면서 피와 살을 고르는 시인들을 만나고 그들이 사는 집에 머물며 글을 썼다. 티베트의 활불 제도와 아시아의 죽음문화 등의 책을 저술한 조금은 독특한 이력의 교수님이다.
1부 소리는 고독하지 않다에서는 디지털의 세상 눈과 혀과 대접받는 세상에서 소홀해진 귀에 대한,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라마승을 초빙하여 사자를 위한 의식을 한다. 라마승 : 먼저 귀를 씻어야 합니다. 유족 : 귀요? 라마승 : 귀에 댁 말을 해야 합니다. 유족 : 무슨 말이죠? 라마승 : 진언입니다. 유족 : 죽었잖아요. 라마승 : 아닙니다. 살아있어요. 유족 : (...) 라마승 : 귀는 혀와 같지 않습니다.
라마승이 유족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바르도 퇴돌> 때문이다.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라고도 불리는 이 경전은 사자의 혼이 환생하기까지 49일 동안 사후의 길을 안내하면서 '듣기'를 강조한다. 사람이 죽으면 몸에서 이탈한 영혼이 영계로 가서 49일 동안 머무르게 되는데 이 때 속세에서 하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눈이 감기고 혀가 늘어지는 것과 다르게 귀는 여전히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책에서 알려준다. ---P.53~54
물질과 소유, 속도와 빛나는 것을 향해서만 박수를 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티베트 인들이 소중히 하는 귀와 소리에 관한 세상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조금은 신비롭기도 했는데 굉장히 특이한 주제의 이야기였다. 귀는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열려 있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귀는 다른 어떤 감각기관보다도 일찍 완성된다고 한다. 즉, 가장 먼저 열리고, 죽어서도 귀는 남아있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이다. ![]() (티베트인은 귀,눈,혀,불알 중에 귀를 선택한다고 한다, 귀는 티베트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체의 일부다)
2부는 소리에 관한 귀이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티베트를 하나의 소리 덩어리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여기서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이야기와 그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있던 상상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곱사등이, 다와'는 해발 4천 미터 초원에서 만난 한 엄마가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딸을 잃고 우는 모습을 기억했다가 풀어낸 이야기이고, ‘동물의 소리를 알아듣는 소년’은 저자가 산책길에 만난 뱀에게 혼잣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티베트의 민간고사를 떠올리며 쓴 이야기라고 한다. '할머니늬 죽음', '아빠의 울음'까지 모두 조금의 사실에 상상을 더해 재탄생한 이야기이다.
나는 문학시간에 이야기의 힘과, 그 상상력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지만, 아직 정서가 메말랐는지...저자의 이 2편이 조금은 길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에겐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는 조금은 읽는 것이 더뎠음을 고백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무언가 마음이 침잠해지고, 조용하면서 소리를 촉감, 시각, 공감각이 다 어우러진 신비한 이야기처럼 알려주는 조금은 특이한 특별한 책이기는 했다.
티베트는 결핍된 공간이라고 한다. 산소가 부족하고 먹을 것이 없고, 연료가 다양하지 않은 하늘 아래 고원이다. 그들은 중국 정부에서 핍박받고, 그들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록 중국정부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그들을 더욱 결핍의 공간에 가두고 몰아간다. 그곳에서 결핍된 존재들이 어떻게 하루를 견디고 무엇을 믿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티베트를 눈으로만이 아닌 소리로 누비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를 가보고 싶어하고 나또한 버킷 리스트에 이 티베트를 가고 싶다고 써놨는데, 사실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으로 무언가 느낀 것이 있다. 티베트에 대한 하나의 허상을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조금은 티베트를 알고 가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티베트 인들은 경전의 전승을 문자에만,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로 내밀한 영혼의 전통은 구전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간에 오로지 소리와 듣기로만 스승의 정신을 그리고 스승의 스승을 찾아가는 교학방법을 알아가는 것, 그것이 티베트 정신 천년의 비밀이라고 한다. 소리를 통한 구전의 힘은 정확하고, 비밀스럽고 안전하며 영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소리의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전해준 책이었다.
이 책은 조금은 특별한 독서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티베트인과 티베트어가 들려준 삶과 죽음의 끝없는 속삭임을 통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아름답게, 다양하게 돌아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무언가 영혼을 치유해주는 그런 잔잔한 이야기이다. ![]()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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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설렘과 걱정이 공존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것저것 알수 없는 소음들이 뒤섞인 세상에 살면서 명상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던 내가 진지하게 명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p.44 스승이 말한다. 소리를 명상하고 진언을 암송하고 경전을 낭송하라! 그것이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길이며 신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다.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하고, 갸우뚱 거리기도했다. 그래도, 조용히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 건 확실하다. 눈과 혀가 대접받는 세상에서 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p.83 제가 생각하기에 수행의 처음이자 끝은 '소리내어' 불경을 읽는 겁니다. 소리와 소음은 확연히 다릅니다. 소리는 따뜻하고 정이 있지만 소음은 들을수록 불쾌하죠. 소음을 듣노라면 몸의 균형이 흩어집니다. 우리가 소리내어 경전을 읽는 이유입니다. 몸과 정신의 균형 찾기랄까요. 난 답답할 때 좋아하는 시나 책을 소리내어 읽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 잡생각이 없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책에서말하는 수행하고는 다른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나름의 효과가 있다고 본다. 시끄러운 세상의 스위치를 끄고, 나만의 스위치를 켜보면 좋겠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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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마스터
나무 옆에서 물을 마시는 숨마추제가 보인다. 손짓으로 공구함을 가져오게 했다. 공구함을 열어 도구를 살펴본다. 큰 도기, 작은 도끼, 칼, 망치, 톱, 드라이버, 자, 가위, 나팔, 주걱, 노끈, 성냥 등이 정렬되어 있다. 도끼의 날은 역시 좀 갈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상태로 뼈를 내리치면 어긋나기 쉽다. 삐끗하면 손과 다리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나도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무딘 도끼로 시신의 갈비뼈를 손질하다가 내 발등을 찍은 일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에 방어할 만한 순발력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새끼발가락 하나가 잘려 나갔다. 팔자형의 가위는 주로 머리카락과 몸의 털을 제거할 때 쓰고, 날카로운 삼각형 주걱은 내장을 긁어낼 때 사용한다. 작은 손도끼는 팔, 다리, 엉덩이와 골반을 분리할 때, 그보다 작고 단단한 해머는 뼈를 균등하게 부술 때 유용하다. (251)
매우 사실적으로 서술되었다. 주검을 자르고, 분리하고, 부수고,긁어내고, 제거하는 모습을 담담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섬뜩하기보다 진지하고 엄숙한 순간이 펼쳐지고 있다. 해부마스터는 오늘 세 구 시신을 해부한다. 우선 마른 할아버지 몸을 발라낸다. 마른 몸은 발라내기 어럽지 않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치여 얼굴은 반 정도가 뭉개졌고 코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여인을 해부한다. 보라색을 띠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 고통과 통증의 시간조차 느끼지 못한 채 즉사한 얼굴이다. 세 번째 시신은 소녀다. 혀가 오그라들어 목구멍 방향으로 말려 있다. 벙어리였나? 혀는 이미 굳은 지 오래 된 상태다.
꽃무늬가 엉겨 있는 노란 보자기 사이로 희고 투명한 발가락이 삐죽 나와 있다. 발목을 견인해주던 뼈는 으스러졌는지 발가락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다. 다듬지 못한 발톱 사이로 갈색의 피가 엉겨 붙어 있다. 차가운 발가락은 햇빛을 받아 따뜻해진다. 발가락이 나 아직 안 죽었어요, 하고 꿈틀거릴 것 같다. 보자기를 걷어 내니 오그라든 소녀의 몸이 눈에 들어온다. 목말라하는 아기 새 같다. 검붉은 보라색 멍이 온몸에 간격을 두고 번져 있다. 그 검붉은 문양이 나에게 무언가를 하소연하고 있는 것 같다. 소녀의 눈은 감겨 있는데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마음이 일렁인다.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다. 시신을 바닥에 엎어놓고 자리를 떴다. 차가운 물을 한잔 마셔야겠다. 앞치마를 새것으로 갈아 입고 다시 섰다. 그 사이 소녀의 몸은 더 오그라들었다. 소녀의 보라색 입이 움직이며 말한다.
아저씨, 난 괜찮아요. 새의 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요.
비틀거리지 않도록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왼손은 목덜미를 잡고, 칼을 잡은 오른손으로 양 어깨를 먼저 가른다. 칼끝이 뼈와 살점 사이의 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하얀 살에서 보라색 피가 꿀룩 나온다. 당황하면 안 된다. 손은 리듬과 호흡을 따라가야 한다. 칼이 뼈에 걸리면 내 손이 다친다. 도끼로 척추뼈를 칠 때마다 반동으로 내 몸이 뒤로 밀린다. 소녀의 형체는 점점 인간의 모습을 잃어간다. 속이 또 울렁거린다. 입을 다물고 참는다. 손을 움직이는 만큼 아이의 몸은 줄어든다. 머리카락과 손톱, 이빨을 따로 보관해 둔다. 아이의 부모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소녀의 몸은 작아 해부는 금방 끝났다. 잘려나간 귀가 흙에 누워 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도끼를 바닥에 던지며 언덕을 쳐다본다. 독수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참을 수 없다는 몸짓이다. 땀에 젖은 모자를 벗어 공중에서 세 번 돌렸다. (258~259)
몸도 영혼도 죽은 내가 해부된다.
나는 무엇으로 있다가 사라졌나?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못한다.
오래 전에 사라진 작은 나를 오늘은 꿈에서나 보려나,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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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어 수업이 들려준 삶과 죽음의 끝없는 속삭임
왜, 읽기만 하는 거죠? 1998년 봄에 시작된 첫 수업부터 그해 6월의 마지막 수업까지 오로지 듣기와 낭송만 하다가 끝난 수업을 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퍽이나 오래된 일이지만 그때의 교실과 수업, 선생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수업시간 내내 큰 소리로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재미없고 배고팠던 그 수업이 왜 잊혀지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강한 경험은 뇌에 스치는 것이 아니라 뼈에 각인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저자 후기'에서.)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디지털 시대는 눈과 혀의 감각적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다. 요란하게 빛을 내는 온갖 음식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차지하고 있다. 『소리와 그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에서 저자 심혁주는 눈과 혀가 대접받는 세상에서 소리[聽]가 우리 몸의 본질임을 깨닫자며, 자기 만족 위주의 이기적 욕망에서 벗어나 몸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요하게 침잠하자고 권한다.
저자는 티베트의 시인들은 마음, 소리, 냄새, 죽음, 사랑, 영혼, 환생, 시신, 뼈, 피 이런 시어로 시를 쓴다고 소개하면서 '나는 그들의 시가 그리워 거의 매년 티베트에 간다'고 했다. 우리가 고요히 귀를 열면 작은 것들의 소리가 들리고 온갖 냄새들을 맡을 수 있다고. 원초적으로 생명체는 움직이고 소리를 내고 냄새를 발산한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만의 소리와 냄새로 타인과 소통한다. 그 소리와 냄새의 원형을 저자는 티베트에서 배웠고 찾았다.
3년 전, 티베트에서 기운이 없는 노을을 바라보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떠오르더니 좀처럼 가라앉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구신가요? 하고 물었다. 그 떠오른 무엇은 대답을 하지 않고 빙빙 돌더니 오히려 나에게 묻는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가득한가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티베트. 그건 아마도 티베트일 거예요. (5-6)
『소리와 그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는 2부로 구성되었다. 1부 「소리는 고독하지 않다」에서는 귀의 세상에서 사는 티베트 라마승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티베트 라마승들은 '밥'과 '잠'보다 아침부터 밤까지 낭송하고 소리를 들으며 산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면 그들은 미친다.
관음보살은 왜 듣기를 깨달음의 방편으로 이야기한 것일까? 그것은 귀(청각)가 인간의 감각 기관 중에서 집착으로부터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다. 귀는 스스로의 의지로 닫기와 열기가 불가능한 감각기관이다. (...) 귀는 개방적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오든 사계절이 변화하든 귀는 언제든 열려 있다. 타자(他者)에 언제든 반응한다. (...) 그 사람이 내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 어떤 오장육부(五臟六腑)와 뼈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발성, 노래, 낭송,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몸과 정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소리는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62~63)
2부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에서는 저자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상상하여 풀어냈다. 마치 티베트의 신화를 읽는 느낌이 든다. "티베트는 하나의 '소리' 덩어리다"며 '곱사등이, 다와', '동물의 소리를 알아듣는 소년', '할머니의 춤' 등 여덟 꼭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 옴 - 마 - 니 - 밧 - 메 - 훔! - 옴 - 마 - 니 - 밧 - 메 - 훔! - 옴 - 마 - 니 - 밧 - 메 - 훔!
'옴마니밧메훔'은 '연꽃 속의 보주'란 뜻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티베트불교의 진언이다. 이 진언을 낭송하면 윤회의 길을 막아 참자아[眞如實相]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