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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래스의 비극 작품들을 읽고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다. 이전에 구입하고 계속 미루었던 ‘아이스퀼로스 비극’도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몇 권 더 읽자는 생각으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몇 개 읽지 않은 비극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완성도는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작품들도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을 충실히 옮긴 번역서 덕분에 아이스퀼로스의 의도를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에 대해서도 그렇게 박식하지도 않고 인명, 지명, 그리고 신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해박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데 조금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무식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아가멤논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의 아들의 복수, 그리고 재판을 통한 구원을 그린 삼부작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따로 말할 것은 없을 것 같지만, 읽다보면 소포클래스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해설에서도 지적되고 있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이야기의 흐름을 전반부에는 느슨하게 진행시키고 후반부에 빠른 전개를 보이는 방식이어서 초반에는 조금은 지루하게 읽혀지는 단점이 없지 않고 후반부는 지나치게 빠른 이야기 완결을 보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과 중요한 사건이 너무 빨리 지나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당시에는 어떤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연구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지만... 비극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일종의 복수극이라고 보는 것이 더 쉽게 다가올 것 같은 ‘아가멤논’과 ‘코에포로이’는 자신들의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것에 비극적인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어머니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점에서 당당함을 보이고 있는 ‘자비로운 여신들’의 경우도 ‘숙명’과 그로인한 비극이라는 아이스퀼로스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미래와 형벌을 알면서도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을 담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보다 흥미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운명과 괴로운 고통을 작품의 인물들은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내려 한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삶을 살아가며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는 우리의 삶에 고대 그리스 인들의 비극은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잠시 선사해줄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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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캔자스大 L모 교수가 쓴 책을 읽었다. 참 내용이 좋아서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책이었다.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격조 높은 표현에 적실한 맥락, 치밀한 구조 안에 그런 명언들을 모양 좋게, 기능성 있게 삽입하는 건 예사 내공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그 감정적 코드가 내 개인적 선호와 그 접점(接點)이, 점점(點點)이 일치하기까지 한다면, 그 독서는 참으로 고마운 체험이다. 그 책에 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틈이 날 때마다 호머(호메로스)를 읽습니다.... 고전의 위대한 점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흥을, 전에 받았던 강렬한 정신적 고양의 기반 위에 새로운 더께로 덧입히고, 참신한 영감을 불러일으켜, 현재 직면한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 베스테르만의 저서 <뭉크, 그 추방된 영혼의 기록>을 읽고 쓴 리뷰에서도 그런 말을 했었는데, 추상화의 매력은, 그것을 볼 때마다 예전에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새로운 실상이 하나씩 드러나고, 보는 사람이 세월을 두고 이를 살펴도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전은 이런 현대 미술의 대가들의 작품에 비한다면야 대단히 '구상적이며', 내러티브를 갖춘 시간 예술이므로 직접 비교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 주제의 포괄성, 장악의 심층성으로 인해 고전이 고전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이며, '볼 때마다 새로우며 물을 때마다 다른 답을 해 주'는 점에서는 둘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 더 빼놓지 말아야 할 조건이 있다. 고전은, 특히 그 첫 만남과 사귐을 반드시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에 넉넉하고 안온한 지점으로 두뇌와 가슴에 마련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예의 향유(더 나아가 창작까지는 아예 논외로 하고)에 있어 늦깎이란 없다. 그것은 마치 이성과의 교접이 주는 쾌감과도 같아서, 때가 지난 후에 보는 맛은 말 그대로 상한 음식을 두고 벌이는 억지 저작(咀嚼), 혹은 기만적 자위, 아니면 환관이 느끼는 오르가즘과도 비슷하다. 한용운의 말처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란, 그게 장노년의 시점에 대상(代償)적 체험으로 겪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생을 두고 그 한 번의 시점에, 단 한 번의 촉각, 공감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처녀성 상실의 슬픔과 쾌감을 복수(複數)로 지닐 수 없듯, 고전으로 받는 세례 역시 유년의 정서 그 순백의 미세하고 여린 틈에 단 한 번의 삽입으로 만나는 류이며, 이 시기에 곱게 아로새겨진 tatoo는, 설사 자연의 이치로 그 피부가 필연의 노화로 시들어가는 중이라 해도, 오로지 그 부분의 채색 염료만큼은 항아(姮娥)의 아미(蛾眉)마냥 회춘에 재생을 거듭하는 것이다. 내가 천병희 선생의 이 책 텍스트 일부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자, 이 책의 초판이 1998년에 나왔다고 하니(이런 시장성 없는 책이 재판을 찍을 리 없으니 불필요한 말이겠으나), 맥시멈으로 잡아서 그럼 내 나이가 26, 7 정도란 말인가? 사실 알고 보면 지금도 파릇파릇 사춘기였던 나는(....), 여튼 이 책의 텍스트, 그 일부를 초등학생 시절에 읽었다는 그 점만큼은 진실이다. 이 천병희 선생이, 대중에게야 '서양 고전 번역의 대가' 정도로 알려진 건 근래의 일이라고는 하나, 이 양반이 그 심오한 내공, 혁혁한 (해당 학계, 그리고 출판계 내에서의) 명망을 쌓으신 건 내가 초딩 때도 그 순도에 변함이 없는 진실이었다는 말이다. 천병희 선생의 헬라 고전 희곡 번역, 그리고 무시무시한 정교함과 자상함 돋는 '주석 + 텍스트'를 완성한 건 오래 전의 일이었던 것으로 안다. 내가 초딩 때 이 텍스트는, 근래 와서 공격적인 마케팅 덕에 갑자기 공짜책 사냥꾼들에게 인지도가 높아진, 그러나 알고 보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예출판사에서 낸 판으로 이미 시장에 선을 보였다. 그 책에는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코에포로이',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실려 있었다. 千丙熙라는 함자가, 책 표지에 한글병기도 없어 저리 한자로만 버젓이 노출되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문고판치고는 값이 비싼 편이었는데, 책을 일단 펼치고 나서 내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전이라는 게 아무리 보편적 성질을 띤다 해도, 이국의 정신과 문화적 배경이란 어지간한 교양인에게도 맥락으로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배경 지식 없이 밀고 나가는 고전의 독해란, 장님이 완상하는 모나리자의 감동이나 마찬가지로, 요란한 허위와 서글픈 자기 만족의 촌극에 불과하다. 이 千丙熙 저자는, 헬라 고유명사나 생소한 풍습에 대고 일일이 친절한, (비록 많이 똑똑했다고는 하나) 초등학생도 알아 먹을 수 있는, 아니 그로부터 무한한 상상과 학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단계을 마련해 줄 법한, 질적으로 완벽하고 양적으로 좀 차고 넘친다 싶은(당시에도 나는, 아니 이런 것에까지 뭐하러 해설을 다시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석을 통해, '니가 지금까지 본 건 다 부실한 짝퉁이다, 오리지널의 세계란 이런 것이여!'하고 벽력 같은 깨우침과 기절할 듯한 달콤한 애무로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사실 이 때 받은 충격 때문에 이후 문학작품의 탐독을 중단했는데(그리고 학교 공부만 했음), 그 번역의 완성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를 접하고 나서는, 다른 저자들의 서양 고전의 한국어 번역은 모두 쓰레기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도 다양한 외국어, 고전어에 대해 각별한 애정과, 그 결과인 상당한 내공을 갖추게 된 건 이때가 계기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님의 책 한 권은, 그저 헬라 고전에 대해 초딩의 눈을 틔워 준 게 아니라(그것만 해도 어디겠냐만), 한 인생이 세계 문화를 보는 시각 자체를 개조해 놓은 것이다. '니 눈에 보이는 것, 니 주변의 멍청한 야만인들이 얄팍한 계산으로 우가우가 떠들어대는 게 진실의 전부가 결코 아니다!'저 바깥에는 얼마나 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좁아터진 뮈시아에 고립되어 저것들처럼 테이레시아스의 시력, 퀴클롭스의 흉한 꼴로 한 세상을 마치겠나 하는 크나큰 각성,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어린 나이에 총체적 깨달음으로 다가온 체험이 그 시절에 있었다는 거다. 저작권 문제는 개인들 간의 계약이므로 내가 알 수 없으나, 예컨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제임스 조이스 전문가 고대 김종건 교수의 번역은, 범우사와 생각의나무 두 군데에서, (비록 후자의 텍스트가 확장 改譯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동시에 나오고 있다(유효기간이 있겠지만). 선생님의 책도 문예출판사, 마지막에 몸담으신 기관인 단대의 출판부, 그리고 숲출판사에서 동일한 텍스트로 나와 있고, 적어도 두 군데로부터 동시에 팔리고 있다. 현재 바로 이 책은, 이번 예스 이벤트 때문에라도 일부러 찾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느 온라인 서점에서나 '품절' 상태이다. 사실상 절판으로 봐도 되는데, 저 위에 적은 숲출판사에서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이란 제목으로 나온 상품이 있으므로, 아쉬운 분은 그 책을 사서 소장할 수 있겠다. (나도 조만간 주문 예정) 아이스퀼로스 희곡의 특징은, 코러스가 극 진행의 보조나 추임새 역에 그치는 게 아니라, 獨自의 목소리로 분명한 정서와 의지의 표현을 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또 하게 되는데, 내가 어려서 읽은 그 때도 참 신기했던 게, 방송에서도 PD가 도중에 끼어들면 '나서기 피디'라 해서 고깝게, 혹은 신기하게 보는 게 보통이지만, 코러스는 코러스일 뿐인데 어떻게 이처럼 뚜렷한 존재감과 '액션'을 보일까 하는 점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머리 한켠에 보존된 그 상큼한 충격감이 다시 상기되니, 그러지않아도 반가운 고전이 더 감회어린 포옹으로 다가온다. 참고로, 내가 예전에 읽은 책(문예출판사판)의 '코러스'는 이 단국대판에서는 '코로스'로 표기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어가 χορ??이니 이게 정확하고 또 당연한 일이다. 저자의 태도나 지론이 어떠하건, 출판사(특히 전통 있는 메이저라면)는 자체 매뉴얼에 따라 교정을 하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예출판사의 경우 제작측의 입장이 더 강하게 반영되었을 테고, 단대출판부야 대원로가 시키면 그대로 따라했을 뿐 아니었겠나 짐작이 가능하다. 이런 건 예를 들어 '로스벨트(루스벨트)', '맑스(마르크스)', '케인스(케인즈)' 따위가 있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이야기는 다음에 시간이 나면 해 주겠다. 일류 학자들의 옆에서 시다 노릇 꽤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사연이 많고도 많다. 작품에 대한 감상은 따로 적지 않는다. 그런 건 웹 어디를 찾아 봐도 흔한 이야기고, 정평이 난 고전에 대고 새삼스레 참신한 평이 나올 턱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내 리뷰에 남들 안 하는 말만 적을 생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선생님의 솜씨는 역시, 미려하고 정확하게 이어지는 본문도 본문이지만, 그 각주의 경이로운 완성도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좀 과장하자면, 선생님의 책은 본문보다 각주를 보는 맛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고전이 삼류 장르물이 아닌 이상 뭔가 책에서 싸구려 감상 이상의 공부를 하려 든다면 바로 이 각주를 보고 뭘 배워도 배워야 한다. 또 하나, 이 책에는 내내 그 캐릭터의 이름이 '클뤼타이메스트라'로 나오는데, 선생이 역주에서도 밝히고 있지만(15쪽 17번 각주), 우리에게 익숙한 '클뤼타임네스트라'가 표준이며 이 꼴은 古形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선생님은 고집스럽게(죄송합니다), 이 책의 11쪽 각주, 또 저 뒤 282쪽 밑에서 10째 줄에서처럼, 스파르타를 굳이 '스파르테(Sparte)'로 쓰고 계시다. 이는 다른 이유가 없다. 호메로스와는 달리, 아이스퀼로스는 아테네 인이었으며, 이 당시의 아티카 방언은 '~아' 어미를, 상당한 경우 '~에'로 치환하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이것도 그 자체로 확실한 관습이고 문법이다. 내가 예전에 쓴 포스트에서 밑의 지도 참조). 그런데, 물론 이게 다름 아닌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니 그의 활동기 아티카 방언이 표준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런 태도는 작품의 텍스트 속에서 그쳐도 충분한 것 아닐까? 메타적 맥락에서는 좀 피해야 할 표기가 아닐까 하는 뜻이다. 선생님은 더군다나 '스파르타(Sparta)는 라틴형'이라고 일일이, 매번, 설명을 부기하고 계신데, 만약 '스파르타(Sparta)'가 라틴형이기만 하다면 정말 이런 표기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마치 '일리아드' 같은 영어식 표기가 바람직하지 않고, 헬라어 오리지널로 '일리아스( λι??)'라고 불러 줘야 맞는 것처럼- 천 선생님의 제자 교수님들은 입버릇처럼 이구동성으로 이 말을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파르타'는 라틴형이기만 한 게 아니라, Σπ?ρτα라고, 도리아 방언의 형태로도 역시 스파르'타'였던 것이다(모음 강세 장단 무시하고 철자로만 따진다면). 스파르타인들이 자신을 스파르타라 불렀다면, 다른 반론이 끼어들기 힘든 것 아닐까? 또, 이후에 형성된 코이네(아티카 방언의 후신)에서도, 스파르타는 그저 스파르타일 뿐이다(제 모습을 찾아 온 것). 스파르테! 왠지 파리 어느 뒷골목에서 파는 야매 크로와상의 브랜드로 무식한 귀에 들릴 것만 같은 이 울림은, 따지고보면 문헌의 시계열적 정확성의 면에서도 그리 확고한 위치는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자신 없는 이야기는 안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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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이의 공주인 카산드라는 10년 동안의 전쟁 동안 수많은 혈육과 국토가 유린되는 걸 지켜봐야 했고, 패전한 조국이 폐허가 되는 걸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데다가 적장의 전리품 신세가 되어 이국까지 끌려와서 암살당했다. 그녀는 신의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예언은 할 수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고도 하고, 신이 모든 예언을 가르쳐준 후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신뢰를 앗아갔다고도 한다. 클뤼타임넥스트라는 지상 최고의 미인이라는 헬레네의 자매이다. 자신의 자매로 인해 10년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서의 무운을 위해 자신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는 신 앞에 제물로 받쳐져야 했다. 그 한으로 인해 남편을 죽이지만, 그 죄가 돌아와 아들의 손에 죽임 당한다. 그리스 비극을 읽다 보면 '고전 비극 속의 인물'이라는 익숙한 관용구의 의미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신들이 늘어놓은 장기판도 아니고, 신들조차 휘말려있는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하고 비극 속을 떠돌아야 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말이다. 어저면 대신인 제우스조차 관여하지 못 한다는 세 자매의 손만이 이 모든 것들을 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