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일곱 개의 카테고리에서 2장까지, 105페이지까지 읽고 쓰는 리뷰이다.( 다음에 최종 서평을 올릴 예정 )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의 인생 이야기가 놀라움과 숙연함을 주면서 글이 시작되었다. 고든 마리노는 하버드와 예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고 지금은 미네소타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곧 70세를 앞둔 작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한 젊은 날에 약물에 의존하고 중독의 시기를 거쳤다. 가족들의 보살핌, 그리고 유능한 심리치료사 등 주변인들의 도움에 힘입어서 어두운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고백하는 작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의무적인 노력, 외부의 도움으로 삶을 추스린 작가. 그러나 역시 자신 내면에서 우러나는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는 것임을 작가는 깨달았다. 그렇게 피폐함에서 막 벗어난 때에, 서점에서 책 하나를 발견했고, 표지나 모양새가 낡았던 그 책이 작가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책은 키르케고르의 저서 중 하나였다. 이를 계기로 고든 마리오는 키르케고르에 심취하였고, 이 철학자에 대해 깊은 식견을 갖춘 전문적인 학자가 되었다. 1장에서 ‘불안’을 다룬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어떤 질병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불안을 겪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정신 spirit’이 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한다. 불안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생각에서 그가 실존주의의 시초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고든 마리노는 현대의 정신의학에서 약물 치료에 의존하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는 저자 스스로 약물 치료를 받아본 경험이 있기에 설득력을 더욱 가졌다. 또한, 삶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면 불안이 극복된다고 말하는 자기계발 이론들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노하우는 본질이 아니며, 본질은 불안에 대한 자신의 태도라고 말한다. 이를 키르케고르 철학을 통해서 고찰해 나간다.
불안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고든 마리노는 말한다. 당신의 과제는 진실한 인간이 되는 것 이라고. 진실한 인간이 되고자 추구한다면 불안이란 필수불가결한 체험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안 때문에 고통을 겪을 필요는 없다.
물론,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도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 그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 신앙이 작용하게 된다.
불안은 독특한 방식으로,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좌우하는 중심축은 진정하고 진실한 자아가 되려는 원대한 계획이어야 한다. (73쪽)
2장 우울과 절망. 타이틀 활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뭔가 가라앉는 것 같다. 하지만 앞장에서처럼 고든 마리노는 우울과 절망에 대해서도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 스스로 젊었을 때 우울증을 혹독하게 겪은 바 있다. 마리노는 우울의 폐해를 절대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그는, 우울증의 날카로운 이빨에 좋은 것을 많이 잃었음을 고백한다. 반면에 주체감 sense of agency 라는 소중한 정체성을 얻었다고도 한다.
우울의 터널에서 막 빠져나온 후 작가는, 키르케고르에게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의 삶에 밝은 빛을 비추는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다시 말하면, 우울과 절망, 심리적 장애와 영적인 장애의 관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많은 미국인이 영적인 것에 대해 태평스레 말하지만, 대부분이 영적인 질병과 심리적 질병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83쪽)
건강을 평가하려면 먼저 건강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영적인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실제로는 깊은 절망 상태에 있으면서도 좋은 상황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행복은 절망의 가장 적합한 은신처’라고 했다.
요컨대 행복은 영적인 안녕을 판정하기에 적절한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는 우리의 상황이나, 성취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아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하느님 안에서 진실한 평안을 얻는 자아’이다.
당신이 실제로, 여기에 존재하는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잊고 있다면, 성공의 지고한 행복도 배설물에 불과하다. (95쪽)
고든 마리노는 절망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님을 역설한다. 절망은 분명 암울하고, 고루한 시간이지만 이 시간이 반드시 절망적인 시간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우울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기도 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항상 잘못된 존재이고 죄인’이라 생각하며 경계심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 우울이 일조 하였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는 구원받았다는 믿음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데 당대에는 센세이셔널한 표현이었으리라.
당신은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겠는가? (105쪽) 우리에게 우울하고 절망적인 압박감이 밀려오면,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유혹적이지만 얼빠진 생각에 맞서 조심스레 싸워야 한다. 또한, 세상에는 우리와 똑같거나 비슷한 걱정을 견뎌야 하는 수많은 동료가 있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 스스로 겪은 혹독한 어둠, 그 터널에서 발견한 빛 같았던 키르케고르를 빌려서 조심스럽지만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있다.
고든 마리노는 강조한다.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그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은 별개의 것이라고.
고통의 울타리에 혼자 갇혔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퍼렇게 멍든 마음을 비집어 열고, 세상 방방곡곡에서 자학하는 형제자매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울이 절망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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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피상적인 친구와, 깊고 절친한 친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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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말한다. 책 한 권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말이다. 이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이 말이 뜻하는 바를, 그리고 책이 가진 영향력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술과 마약, 우울증과 자살충동 등 자기파괴적인 삶을 보내던 저자는 심리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른 커피숍에서 우연히 키르케고르의 서적을 읽는다.
지금도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르지만, 위의 구절은 나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다..(중략)..키르케고르가 나열한 단어들이 나를 완전히 감쌌다. p.44
이후의 변화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이전과는 달라진 시간을 지나 현재는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가 고백한 이전의 삶에 대비되어 너무 극적이라 여길 수도, 그리고 당시 저자에게 '키르케고르'의 책 말고도 다른 상황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상황들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변화의 기폭제가 된 것이 ‘키르케고르’임에는 의심이 없다.
책은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그리고 사랑의 7가지 주제에 대해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데 다행히 각각의 주제는 관념적으로 다뤄지기 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어렵지 않게 읽힌다(철학을 주제로 하고 있어 책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긴장했던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시샘은 우리 삶을 방해하는 가시덤불 중 하나이고, 비교는 시샘의 토양이다. 성실한 사람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므로, 이런저런 감정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타인과 비교해서 평가하지 않는다. p.99
제2장 '우울과 절망'에서 정작 내 눈에 들어온 대목은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글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은, 그리고 머리로는, 나와 타인과의 비교가 무의미 함을 잘 알면서도 왜 순간순간 그 무의미한 행위를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일까? 내 삶을 방해하는 가시덤불을 없애기 위해 온전한 나를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깨닫는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체이다. 이 땅에서 존재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 및 주변 상황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p.144
진정성에 대한 챕터에서는 ‘관계’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흔히 ‘관계’를 언급할 때 타인과의 관계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누구와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가 말한 진정성과 자아에 대한 언급 역시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먼저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결국 진정한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자아’를 알아야 할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진정성은 가식적 행위의 자제를 넘어 진정한 자아가 되려는 노력이다. p.151
마지막으로 다소 무거울 수 있으나, 관심이 가는 주제는 ‘죽음’이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하기야 누군들 그 이야기를 즐겁게 꺼낼 수 있겠는가만은). 하지만 웰빙과 함께 웰다잉에 대해 논하는 글들을 심심찮게 접하거나 요즘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자신의 장례식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가 예전보다는 좀 더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느낀다.
모두가 죽음에 대한 자각을 억누르려 하지만, 죽음을 자각해야만 가족과의 친밀함을 되찾을 수 있다. p.118
저자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한다. 위의 문장은 그 이야기의 끝에 달아놓은 글이다. 글을 읽으며, 가족과의 친밀함 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유한함으로 인해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죽음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한다는 저자의 말에 인간의 유한함과 함께 나의 우선순위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려 보기도 했다.
죽음은 해방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한다. 전에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 이제는 새로운 중요성을 띤다. p.127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잊는 것 같다. 때로는 자신에 대한 고민보다 타인이 보는 '나'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은 듯도 싶다. 그래서일까? '나로 존재하는 용기'라는 책 제목이 주는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게 된다.
*나에게 적용하기 '나로 존재'하기 위해 타인과 비교하지 말기(적용기한 : 지속)
*기억에 남는 문장 실존주의자들은 철학을 삶의 한 방식으로 보았다. p.26
건강을 평가하려면 먼저 건강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물론 영적인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p.88
살아온 날수는 모르더라도 우리는 삶이 하루하루 헤아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중략)..죽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확실한 불확실성이다. 요컨대 죽음이 닥치는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닥칠지는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p.111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때가 되면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에서 한 문장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p.124
키르케고르는 기도를 신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마음가짐에 비유하며 “기도는 하느님을 바꾸지 않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바꾼다”라고 발했다. p.185
삶의 주된 목적이 관광객처럼 재밌고 성취감을 주는 경험을 최대한 많이 즐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애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하다. p.247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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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던가? 사랑에 빠지는 데는 3초면 충분하다고. 책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는 책의 첫문장을 읽었을 때, 혹은 책 표지를 접했을 때 바로 알 수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나를 3초 안에 매료시킨 첫문장은 바로 "실존주의는 진정한 신경증 환자이다."라는 구절이었다. 나름 예민함에 대해 스스로를 괴롭혀도 봤고 질책도 받아보았고 수시로 파고드는 불안감에 약을 먹을 정도까지 불안증에 시달려보았던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이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여러 철학자들에게서 논해져왔다는 사실에 이미 매혹당했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한줄한줄 아껴가며 읽을 수 있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그들은 한순간 한순간을 그냥 지나쳐 보내지 않고 의미를 둔다. 실존주의는 요즘 대두하는 힐링프로그램인 요가나 마음챙김이 다루지 못하는 부분을 다룬다. 부적절한 감정들에 대응하기 위한 단계적인 계획이나 피해야 할 행동목록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 우울한 기분이 나를 덮칠 때, 내가 영적인 태도를 가지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요즘은 불안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많다. 저성장에 빠진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지만 유독 경쟁이 심화된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 더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문제이다.
요즘은 불안의 심리를 '뇌'의 문제에 국한시켜 심호흡이나 명상으로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시도가 많은데 사실 극도의 불안함이 찾아올 땐 그렇게 명상이 쉽게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가운데 보게 된 이 책은 한 줄기 빛 같았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처방은 그런 불안정한 감정들과 공존하는 능력을 함양하고 두려움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내면성의 거장에 따르면 '불안해지는 방법을 올바로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셈'이기 때문이다. (중략) 요약하면 키르케고르와 그 이후의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불안이라는 악마적인 기분 혹은 감정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처방한다. 불안은 그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불안에 떨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불안은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을 좌우하는 중심축이 진정하고 진실한 자아가 되려는 원대한 계획이 아니라 불안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될 수 있다. "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반복해서 읽으면 키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불안은 쉽게 말하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어떤 가능성에 대한 선택과 후회를 맞이하며 사는 것이 현대인인만큼 불안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자아를 찾기 위해 침잠하고 불안의 본질과 맞닥뜨릴 때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키르케고르의 말.
삶은 낭만적인 여정이 아니라 힘겨운 고행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실존주의자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불안에서 탈피하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그래도 괜찮다며 하릴없는 위로를 건네지 않고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조금은 어렵지만 곱씹을수록 나에게 양분을 만들어주는 책인 것 같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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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모순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들을 빌려 인간의 실존을 고찰한다. 철학책이라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고풍스러운 책 디자인에 넘어가서 선택한 책이다.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이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때때로 우리를 잠식해오는 불안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세속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에서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어들의 개념 자체가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어렵다. 등장하는 철학자들마다 각자의 정의를 내리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우리의 불안은 질병이 될 수도, 마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질병이라 해도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는 키르케고르 뿐만 아니라 니체, 사르트르, 헤겔, 아리스토텔레스, 카뮈, 루터, 토마스 아퀴나스 등 몇백년에 거쳐 있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뛰어넘으며 우리의 감정들에 대해 설명한다.
"죽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확실한 불확실성이다.(111p)" "죽음이 명확해지면, 순간이 영원처럼 지속될 수 있다. (125p)" 3장에서 톨스토이는 진정성과 형제애가 없는 삶은 영적인 죽음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유행할 정도로 죽음은 인간 실존 그 끝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문제다. 구체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를 넘어선 나의 세번째 자아는 어떤 것이며 나는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 죽음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같은 장에서 언급된 '죽음을 상상하는 훈련'이라는 말에서 나는 갑자기 영화 <어바웃 타임>을 떠올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만 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지내기 위해서만 그 능력(?)을 이용했던 엔딩이. 심지어 중간에 아버지도 죽었고(...). 사랑까지 제대로 쟁취한 이 사람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실존주의자 아닐까. 신앙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는 키르케고르의 설명을 저자는 약간은 세속적으로 이끌어낸다. 죽음이 두려움보다 슬픔이 되는 삶의 끝을 맞고 싶다.
몇몇 흥미로운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면, 두려움은 명확한 대상을 갖지만 불안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정의했다는 점과 우울과 절망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 개념들을 혼동한다. 이러한 혼란은 때로 아주 위험할 수 있다. 우울을 절망으로, 병리적인 것으로 착각해버리고 감정에 또다른 의미들을 부여하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그것이 나를 압도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어 나태와 소극적인 수용의 위험성을 2장에서 경고한다. 심지어 4장에서는 '타락'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상당히 뜨끔하다. 어딜내놔도 나태함으로 뒤지지 않는 나로써는 그것에서 오는 어떤 무력함과 우울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어떤 것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어떻게(150p)' 실행하는가가 핵심이다. 그러나 스스로 진정성이라고 믿는 것에는 자아도취적 위험성도 동반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것과 강력히 유대해야 하지만 이 또한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인간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동물이다(머리아픔)
물론 고든 마리노는 책 전반에 걸쳐 개인의 통제력과 감정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항우울제 복용 등도 우울의 감정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핵심은 스스로가 유약한 인간이라는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통제하려는 욕심을 버리되, 스스로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수단으로 우울을 생각할 줄 아는 어떤 내공(?)을 살면서 좀 키워야 하지 않을까. 철학이 목표로 하는 지혜의 수단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 연민을 보내라는 말이 약간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야기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 삶을 살아야하니.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진정성authenticity란 무엇일까. 4장에서 아주 명확한 해답을 뚜렷하게 내리지는 않지만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삶의 태도가 결국 그것이겠지. 5장에서 언급한 신의 존재조차 신앙의 상실은 우리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신뢰의 방식과 욕망 또한 우리의 선택이라고 하기 때문에. 6장이 다루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의미도 진정성의 수단이자 목표라고 생각한다. '지식을 끌어내는'과정.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지만 동시에 가짜후회가 아닌 '도덕적 후회'를 가슴 깊이 간직한다. "회한으로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다(228p)."
그럼에도 마지막 장은 결국 '사랑'이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레기네와의 사랑에서 찌질한(...) 모습과 씁쓸한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또한 인간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처럼 우리는 때로 온유함과 거리도 멀고 어색한 결과를 만드는 행동을 하지만 우리의 '사랑의 의무'는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논의하는 개념들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쉬울 수도 있겠다. 저자도 그들이 가지는 모순이나 허점을 지적하지만 여기서 어떤 교훈들을 끌어내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수많은 저서들과 말을 남긴 이들의 논리는 어느 지점에서는 부딪히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한 편이 된다는 점이다. 그 중 한가지, 삶은고통인 동시에 선물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책의 첫머리에서 그들의 생각조차 변덕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저자의 솔직하고 담백한 자기고백적 조언들은 분명 어떤 용기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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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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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어린 시절 전혀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불량학생이었고 경찰서도 자주 드나들었다. 운동에 재능이 있어 대학에 스카우트됐지만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녔고, 강의는 거의 듣지 않으며 권투에만 열중했다. 대학원을 자퇴하고 약물과 음주에 의존하던 그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저자는 정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카페 겸 중고서점에서 키르케고르와 만났고 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키르케고르의 무엇이 저자를 바꿔 놓았을까? 저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안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리던 키르케고르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의 글들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비슷한 내면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나 철학자에게 더 끌리는 것은 본능에 가까우니까.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철학자이고, 북유럽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책을 읽기 전까지 키르케고르에 대해 알던 전부였다. 사실 실존주의라는 말은 어디서든 자주 접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 실존주의 문학, 실존주의 심리치료……. 하지만 나는 앞에서 말한 소위 실존주의 문학을 읽어보고, 대학교 강의시간에 실존주의 심리치료에 대해 배우고, 실존주의 철학을 수박 겉핥기 식이라도 자주 접해도 결국 실존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실존주의란 것이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실존주의에 대해서 내 나름으로 생각한 정의는 ‘존재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끝없이 탐구하고 고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주체적으로’가 아닐까 싶다. (또한 나는 학문적으로 어렵고 복잡하게 분류를 해서 그렇지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의 철학을 갖고 사는 철학자라고 믿는다.) 이 책을 보면서 내내 이 책이 소위 말하는 ‘자기계발서’라는 분류에 포함되는 책인지 의문을 품었다. 쉽게 쓰여진 책은 분명히 아니다. 끝없이 고찰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또한 주제가 정해진 각 장이 그 주제에 대해서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책의 서술방식은 주제와 관련된 접근(주로 저자의 경험 등의 사례를 통해)으로 시작해서 키르케고르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다른 사상가나 작가의 견해, 종합적인 결론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이렇게 돌고 돌아 탐구해오는 과정에서 읽는 내가 다른 길로 새거나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기에 책을 제대로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불안, 우울과 정말,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 이 항목들이 저자가 각 장의 주제로 잡은 것들이다. 결론을 내린다는 게 이런 책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존주의에도 맞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계발서들이 흔히 범하는, 어떠한 길이 옳다며 그 길로 독자들을 이끄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는 우리가 실존주의적으로 성찰하도록 이끈다. 길을 걷는 법을 알려주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키르케고르의 신앙과 사랑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공감하지 못했다. 특히 사랑의 경우, 키르케고르가 결혼을 자신의 이상한 사명감 때문에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떠난 것을 어떤 경우에도 긍정하지 않는다. 특히 그렇게 떠나서 아예 연을 끊은 것도 아니라 계속 그 여인에게 미련을 보였다는 것에서 더더욱. 이것에 대해서 저자가 어떻게 변호하고 연결시키려 해도 키르케고르에서 반면교사 이상을 찾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렇게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유하고 자신만의 태도를 가지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충고하고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
![]() 삶을 자극하려는 사상의 전시장,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나에게는 걱정할 것이 항상 있다. 걱정거리가 없으면, 걱정할 구실을 찾아 나서거나 만들어낸다. _52 이 한 문장을 통해 나를 보았고,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받고 보니 "나는 철학책이다!" 하는 포스가 강해 잠시 당황했다. 좀 가볍게 읽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일단 저자의 서문(머리말)을 읽고 시작하자 싶어서 책을 펼치니...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한국어판 서문과 머리말이 있었는데, 머리말이 무려 14페이지에서 48페이지까지 이어진다. 처음엔 '뭐지?' 싶었는데, 저자의 긴 머리말 덕분에 이 책을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긴 머리말이 나에게 신의 한수였다. 거짓된 세계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법 저자 고든 마리노는 학창 시절 항상 불량 학생이었고 경찰서를 드나들었다. 미식축구와 야구에서 재능을 보여 주립대학교에 스카우트되고 잠시 철학에 매료되지만, 알코올과 마약에 흥분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권투 체육관에서 자신의 몸을 학대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자해를 하는 니키와 결혼하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니키도 치료를 받아 깨끗해져 교육학 석사과정에 도전했다. 그들은 이제 거의 정상적인 삶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첫 수업에서 자격이 없는 엉터리 학생임을 꺠닫고 수업이 끝나고 충동적으로 자퇴서를 제출한다. 그런 그에게 실망한 니키는 떠나고, 그후 2년 동안 과도한 음주와 약물 남용,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어느 날, 심리치료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들어간 중고 서적을 파는 커피숍에서 눈에 띈 책을 뽑아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키르케고르의 <사랑의 역사> 그는 '키르케고르'를 만났고, 그의 삶은 달라진다. 현재 그는 세인트올라프 칼리지의 철학 교수이자 키르케고르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인 홍 키르케고르 도서관의 관장이다. 고든 마리노의 삶과 키르케고르의 만남, 그 서사가 머리말에 담겨 있다. 불안과 우울을 겪은 저자가 그의 경험과 고백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그의 삶을 변화시킨 키르케고르가 궁금해졌다.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이론이 아닌, 삶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주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철학, 신학, 심리학,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주요 저서로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 있다.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는 저자 고든 마리노가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킨 키르케고르의 삶과 저서를 통해 진정한 나로 존재하기 위한 내면의 일곱 가지 빛과 그림자, 즉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에 관한 실존주의 처방이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불안과 우울, 절망과 죽음으로 제기되는 시련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실존주의적 통찰을 살펴보고, 후반부에서는 실존의 긍정적인 면, 즉 진정성과 신앙, 도덕성과 사랑에 대해 다룬다. 불안 _불안해지는 방법을 올바로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셈이다. _<불안의 개념> _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어떤 특정한 물리적 현상, 예컨대 땀에 젖은 손바닥이나 빨라진 심장박동에 빗대지 않았지만, '자유의 현기증'이라 묘사했다. 불안을 통해 우리가 자유롭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면에서 가능성으로 가득한 피조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_키르케고르와 그 이후이 실존주의자들은 윌에게 불안이라는 악마적인 기분 혹은 감정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처방한다. 우울과 절망 _우울은 나의 가장 충실한 애인이다. 그러니 내가 우울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_<이것이냐 저것이냐> _키르케고르는 우울이 그 시대의 결함, 즉 "우리에게서 명령하는 용기와 순종하는 용기, 행동하는 힘과 희망하는 자신감을 빼앗아간" 결함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주장했다. _절망의 주된 징후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제거하려는 욕망이다. 대체로 이 욕망은 혼신을 다해 다른 사람이 되려는 바람의 형태를 띤다. _우울이 절망으로 전이되는 이유는 우울에 빠진 사람이 자신과 우울 증세를 부정적으로 관련시키기 때문이다. _우울은 절망이 아니다. 그러나 우울이 언제라도 절망으로 추락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절망을 피하려면, 제3의 눈으로 내면의 삶을 계속 들여다봐야 한다. 또 진흙탕 같고 해묵은 침울한 기분에 짓눌린 내면의 바깥에 당신의 일부를 두어야 한다. _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그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은 별개의 것이다. 죽음 _죽음에 대해 묵상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_<묘지에서> _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일인칭 내부자적 관점에서 삶을 생각하라고 촉구했다. ... 불안과 마찬가지로 죽음에도 교훈이 담겨 있는 게 분명하다며,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그 교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_키르케고르는 죽음에 대한 갈망을 '공허함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그 현기증에서 최후의 기분 전환을 모색하려는 우울의 소심한 바람'이라고 호되게 나무란다. _키르케고르는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성실한 사람은 희귀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결과로, 그의 삶에서 하루하루가 무한한 가치를 간게 되나"라고 덧붙였다. 진정성 _위대함은 이러저러한 존재가 되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만약 그가 원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 _<이것이냐 저것이냐> _진정성이 버킷리스트나 자아실현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_진정성은 가식적 행위의 자제를 넘어 진정한 자아가 되려는 노력이다. 신앙 _위험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없다. _<철학적 단편에 부치는 비학문적인 해설문> _신앙의 상실은 의도가 개입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도덕성 _어떤 사람이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앎의 가치는 떨어진다. _<죽음에 이르는 병> _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는 자유와 불안과 책임 사이의 관련성을 강조한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불안이 생기는 것이고, 또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불안하다. 두 사상가는 이런 부담스러운 자유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인 충동을 인정한다. _사라트르는 우리의 급진적 자유가 불안을 야기하고, 우리는 자유를 부인함으로써 자기기만의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성향이 있다는 걸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_니체는 우리에게 우리의 도덕적 가치관은 신성한 것도 아니고 위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님을 인정하라고 충고한다. _키르케고르는 올바른 삶을 방해하는 주된 장애물은 우리의 자기기만적 성향이라고 꼬집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행복과 만족의 감소를 각오해야 하는 희생이 필요할 때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라 얼버무리며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사랑 _우리가 총명함을 자만하며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어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의기양양해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랑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_<사랑의 역사> 앞서 언급했지만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 표현했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라고. 또한 키르케고르는 우울에 대해 “우울은 나의 가장 충실한 애인이다. 그러니 내가 우울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불안과 우울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정의와 표현이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불안과 우울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대면하고 이겨낼 용기, 우리에겐 자유의 현기증이 있으므로...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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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크기로 보면 한없이 작은, 마치 없는 존재와 같은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는 종교의 역할이 컸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현생의 선행을 강조한다. 불교는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하는 게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근대 철학으로 넘어와서는 인간의 의미를 이성으로 규정한다. 데카르트는 합리적 의심을 통해 존재하는 나를 증명했다. 칸트는 자기 자신의 도덕 준칙을 만들어 그에 따르는 것이 인간의 덕성이라고 강조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근대 철학의 이성을 넘어 감성에 접근한다. 합리적 판단보다 존재하는 나의 상태에 집중하는 게 실존주의 철학의 근간이다.
이 책은 실존주의의 시작을 알렸다고 볼 수 있는 키르케고르를 중점으로 실존주의 전반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이전에 읽은 키르케고르의 서적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을 때의 난해함이 이 책에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저자 자체의 개인적 삶을 토대로 풀이했기에 이해가 쉽게 되는 편이다.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절망이다. 대게 절망은 부정적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느끼는 우울과 절망은 나를 망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키르케고르는 다르게 보았다. 절망은 내가 원하는 상태가 되지 못한 자신을 보고 좌절한 것이라 말한다. 쉽게 말해 난 연예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크지만 지망생으로 계속 머물고 있을 때 절망하게 된다.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계다.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자아라고 말한다. 삶에서 생기는 고통은 결국 관계의 어긋남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한다. 저자와 키르케고르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합리적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게 신앙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생각난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 죽은 자들은 모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따르면 실존의 원동력이 살아가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허구의 산물을 믿을 수 있는 인지 혁명을 통해 사회를 구성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인지 혁명이 삶의 의미랑 연관된다. 확실한 참이라 말할 수 없어도,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게 우리 뇌에 있고 그 자체가 삶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신앙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 뇌는 그것을 믿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실존주의란 말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필자 역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난해함을 생각하면 거리를 두고 싶을 정도이다.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는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자기계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난해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저자 자신의 삶으로 해설해 이해가 쉽다. 다만 실존주의 자체가 난해한 철학이기에 일독으로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울 수 있다. 천천히 여러 번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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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이다. 키르케고르. '철학'이란 말에 난 움츠러든다. 낯선 철학자의 이름을 보고 있으면 어렵고 딱딱한 관념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스쳤다. 나에게 철학이란, 남들과 달리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적이란 말을 보고 현실적이란 뜻으로 생각하기보다 형이상학적이란 뜻을 떠올리는 사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철학자를 말하는 사람들과 사뭇 다른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고든 마리노는 현재 미네소타주 노스필드에 있는 세인트 올라프 칼리지의 철학 교수다. 그는 어렸을 때 "경찰서를 드나드는 불량학생"이었고, "럭비와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대학에 들어간 후, 술과 마약에 열을 올리며 강의실보다 권투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졸업이 다가왔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그는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만약 그리고 철학과 운명적으로 만나 철학과 교수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첫 수업이 안겨준 열패감에 수업이 끝나고 자퇴서를 제출"한다. 이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그는 작은 서점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키르케고르였다.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시인이다. 고든 마리노는 키르케고르가 "우리에게 내적인 삶에 대해 성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가이드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키르케고르와 만나 삶이 바뀌었듯이 많은 사람들이 키르케고르와 만나길 바라며 책을 썼다. 현대인이 한 번쯤 마주하는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의 순서로 삶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철학적 고민을 키르케고르의 철학으로 하나씩 짚어나간다. 키르케고르는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에서 중요한 철학자다. 하지만 그 외에도 키르케고르의 생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실존주의 철학자와 실존주의의 지적 토대 속에 소설을 쓴 작가의 저작도 함께 다룬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은 삶의 질을 높여주는 실존주의자들의 통찰력을 명확히 소개"하는 데 있으며, 독자가 책을 통해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썼다.
생각에 잠기며 책을 덮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