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4)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67%
  • 리뷰 총점8 27%
  • 리뷰 총점6 7%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10.0
  • 30대 9.0
  • 40대 9.0
  • 50대 9.0

포토/동영상 (5)

리뷰 총점 종이책
나로 존재하는 용기, 키에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키에르케고르" 내용보기
총 일곱 개의 카테고리에서 2장까지, 105페이지까지 읽고 쓰는 리뷰이다.   ( 다음에 최종 서평을 올릴 예정 )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의 인생 이야기가 놀라움과 숙연함을 주면서 글이 시작되었다.고든 마리노는 하버드와 예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고 지금은 미네소타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곧 70세를 앞둔 작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한 젊은 날
"나로 존재하는 용기, 키에르케고르" 내용보기
총 일곱 개의 카테고리에서 2장까지, 105페이지까지 읽고 쓰는 리뷰이다.

   ( 다음에 최종 서평을 올릴 예정 )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의 인생 이야기가 놀라움과 숙연함을 주면서 글이 시작되었다.

고든 마리노는 하버드와 예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고 지금은 미네소타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곧 70세를 앞둔 작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한 젊은 날에 약물에 의존하고 중독의 시기를 거쳤다.

가족들의 보살핌그리고 유능한 심리치료사 등 주변인들의 도움에 힘입어서 어두운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고백하는 작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의무적인 노력외부의 도움으로 삶을 추스린 작가.

그러나 역시 자신 내면에서 우러나는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는 것임을 작가는 깨달았다.

그렇게 피폐함에서 막 벗어난 때에서점에서 책 하나를 발견했고표지나 모양새가 낡았던 그 책이 작가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책은 키르케고르의 저서 중 하나였다.

이를 계기로 고든 마리오는 키르케고르에 심취하였고이 철학자에 대해 깊은 식견을 갖춘 전문적인 학자가 되었다.


1장에서 불안을 다룬다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어떤 질병이 결코 아니다오히려 불안을 겪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정신 spirit’이 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한다.

불안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생각에서 그가 실존주의의 시초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고든 마리노는 현대의 정신의학에서 약물 치료에 의존하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는 저자 스스로 약물 치료를 받아본 경험이 있기에 설득력을 더욱 가졌다.

또한삶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면 불안이 극복된다고 말하는 자기계발 이론들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노하우는 본질이 아니며본질은 불안에 대한 자신의 태도라고 말한다.

이를 키르케고르 철학을 통해서 고찰해 나간다.

 

불안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고든 마리노는 말한다당신의 과제는 진실한 인간이 되는 것 이라고.

진실한 인간이 되고자 추구한다면 불안이란 필수불가결한 체험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안 때문에 고통을 겪을 필요는 없다.

 

물론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도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 그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신앙이 작용하게 된다.

 

불안은 독특한 방식으로근본적인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좌우하는 중심축은 진정하고 진실한 자아가 되려는 원대한 계획이어야 한다.

(73)

 

    2장 우울과 절망.

타이틀 활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뭔가 가라앉는 것 같다.

하지만 앞장에서처럼 고든 마리노는 우울과 절망에 대해서도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 스스로 젊었을 때 우울증을 혹독하게 겪은 바 있다마리노는 우울의 폐해를 절대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그는우울증의 날카로운 이빨에 좋은 것을 많이 잃었음을 고백한다.

반면에 주체감 sense of agency 라는 소중한 정체성을 얻었다고도 한다.

 

우울의 터널에서 막 빠져나온 후 작가는키르케고르에게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의 삶에 밝은 빛을 비추는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다시 말하면우울과 절망심리적 장애와 영적인 장애의 관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많은 미국인이 영적인 것에 대해 태평스레 말하지만대부분이 영적인 질병과 심리적 질병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83)

 

건강을 평가하려면 먼저 건강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영적인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실제로는 깊은 절망 상태에 있으면서도 좋은 상황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행복은 절망의 가장 적합한 은신처라고 했다.

 

요컨대 행복은 영적인 안녕을 판정하기에 적절한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는 우리의 상황이나성취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아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하느님 안에서 진실한 평안을 얻는 자아이다.

 

당신이 실제로여기에 존재하는 (진짜목적이 무엇인지 잊고 있다면성공의 지고한 행복도 배설물에 불과하다. (95)

 

고든 마리노는 절망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님을 역설한다.

절망은 분명 암울하고고루한 시간이지만 이 시간이 반드시 절망적인 시간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우울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기도 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항상 잘못된 존재이고 죄인이라 생각하며 경계심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 우울이 일조 하였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는 구원받았다는 믿음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데 당대에는 센세이셔널한 표현이었으리라.

 

당신은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겠는가? (105)

우리에게 우울하고 절망적인 압박감이 밀려오면세상이 미쳐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유혹적이지만 얼빠진 생각에 맞서 조심스레 싸워야 한다.

또한세상에는 우리와 똑같거나 비슷한 걱정을 견뎌야 하는 수많은 동료가 있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 스스로 겪은 혹독한 어둠그 터널에서 발견한 빛 같았던 키르케고르를 빌려서 조심스럽지만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있다.

 

고든 마리노는 강조한다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느끼는 감정과우리가 그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은 별개의 것이라고.

 

 

고통의 울타리에 혼자 갇혔다고 생각하지 말고시퍼렇게 멍든 마음을 비집어 열고,

세상 방방곡곡에서 자학하는 형제자매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울이 절망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105)

 

YES마니아 : 로얄 b********5 2024.11.10. 신고 공감 6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실존주의자, 키르케고르 를 만나는 용기
"실존주의자, 키르케고르 를 만나는 용기" 내용보기
가볍고 피상적인 친구와, 깊고 절친한 친구의 차이는 무엇일까.그것은 대화의 내용과 질에 있는 것 같다.지인과는 유쾌하고 일반적인 화제만을 이야기 나누지만,절친과는 묵직하고 어두운 주제, 삶의 태도까지 이야기의 폭이 넓고 깊을 것이다.철학책을 읽는 것은 가깝고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흡사하다.그런데 주제가 진지하다고 해서 책의 가독성도 훌륭하다는 보장은 없다
"실존주의자, 키르케고르 를 만나는 용기" 내용보기

가볍고 피상적인 친구와, 깊고 절친한 친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화의 내용과 질에 있는 것 같다.
지인과는 유쾌하고 일반적인 화제만을 이야기 나누지만,
절친과는 묵직하고 어두운 주제, 삶의 태도까지 이야기의 폭이 넓고 깊을 것이다.

철학책을 읽는 것은 가깝고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흡사하다.

그런데 주제가 진지하다고 해서 책의 가독성도 훌륭하다는 보장은 없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바 있듯이 ‘단순히 설명할 수 없다면 충분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의 전문학자의 고든 마리노의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그의 글은 처음부터 가독성과 몰입도가 높았기에 철학책으로서 합격점을 준수했다.

지난 번 리뷰에서 다룬 1장 불안, 2장 우울과 절망처럼
이토록 무겁고 성가신 주제를 철학을 통해 독자에게 안내하는 언어능력이 뛰어났다.
( http://blog.yes24.com/document/11323149 )
3장 「죽음」을 통해서, 저자는 키르케고르와 실존주의자들이 죽음의 문제를 깊이 고찰하였음을 논파한다.
현대의 시대에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확실한 불확실성이다.』
(111쪽)

책을 통해서 대문호 톨스토이도 실존주의자에 소속됨을 처음 알았다. 얼마전에 톨스토이를 다룬 책을 읽어서 더욱 반가우면서도 이해가 잘 되게 읽었다.
크림전쟁에 장교로 참전한 톨스토이에게 죽음, 심지어 학살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30대 초반에 형 니콜라이를 잃었을 때 톨스토이는 충격에 빠지고 우울을 앓았다.

좋아하고 관심있어 하는 인물들이 서로 연결을 가짐을 알게될 때 꽤 짜릿함이 있다.
톨스토이에게 덴마크인 친구가 있었고 그가 작가에게 키르케고르를 알려줬다는 걸 알았다.
또한 톨스토이는 블레즈 파스칼의 열렬한 독자였다고 한다. 나도 파스칼에 관심이 있어서 좋았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조용히 앉아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온 세상이 평화로울 것’이라는 파스칼의 생각에 동의했다.
톨스토이와 키르케고르의 정신은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들은 이성과 신앙이 충돌한다는 걸 인정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중재하는 교회라는 제도적 기관과 개인의 관계보다는,
개인과 하느님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면에서도 그들은 일치했다.

『톨스토이와 키르케고르는 똑같은 도덕적 이유에서,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118쪽)

무한히 중요한 주제, 특히 윤리와 종교를 사심 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게 실존주의자의 믿음이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신성 神性이란 문제를 허튼소리로 일축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조건 중 하나이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의 판사만큼이나 공명정대한 제3자인 것처럼 실존적 선택에 대응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왜곡이다.』 (119쪽)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지식과, 개인적인 깨달음은 현격히 차이가 난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하였다.
한편, 통찰과 지혜는 뜻밖의 곳에서 예상못한 순간에 스며드는 경우도 많다고 고든 마리노는 설파한다.

죽음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한다. 전에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 이제는 새로운 중요성을 띈다. 우선순위는 사소하고 외적인 것에서 중요하고 지속적인 삶의 과제로 재정립된다.

예컨대 때때로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품을 수 있다.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비상한 노력을 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그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는가?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인간관계를 등한시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으르렁거릴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진실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슬픔의 모든 무게를 받아들이고 견디는 능력이다. 이렇게 고든 마리오는 3장을 정리한다.

4장은 「진정성」이다. 이 표현은 아주 흔하지는 않으나 실생활에서 자주 거론되는 단어이다. 그것은 진정성이 있는가.
우리는 겉으로 섣불리 표현하지는 않아도 진정성 이라는 기준으로 어떤 일과 사람의 신뢰도를 결정한다.

고든 마리노가 보기에 현 시대는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이 많이 퇴색되었다.
오늘날의 구호는 “당신의 열정을 따르라. 무조건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이다.

이러한 열정과 꿈이 당신의 본질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 꿈을 추구하며 매진하는 것이 곧 진정성 이라고 여겨진다.
예컨대 화가 폴 고갱이 가족을 떠나 타히티 섬에서 그림을 그렸던 것은 무책임하긴 해도 그 자신은 진실하게 행동한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현대에는 이러한 돌발 행동이 진정성처럼 떠받들여지기도 한다.

진정성을 리트머스 시험처럼 판가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자신의 모습 간의 차이가 그 하나이다.
소설가이면서 실존주의자였던 알베르 카뮈는 ‘작가 수첩’에서 이렇게 썼다.
『진실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거짓으로 꾸미지 말라』.


나는 최근에 ‘카모메 식당’ 영화를 다시 보았다. 역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점이 있는데 이번에는 이 대사가 울림이 있었다.
극중 인물이 사치에 씨에게 “원하는 것을 하고 살아서 좋으시겠어요”라고 하자
사치에는 곧바로 단호하면서 정중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원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여기에 진정성의 핵심적인 자세가 있었다.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체이다. 이 땅에서 존재하려면 개인은 자신과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 및 주변 상황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또 많은 이들이 신과 관계하며 존재한다고 믿거나, 그렇게 믿으려고 애쓴다.
따라서 관계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을 고려하면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는 참된(진실한) 관계와 거짓된(가식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참된 관계가 열려 있고 정직한 관계를 뜻한다면, 거짓된 관계는 가장하고 꾸미는 관계를 뜻한다.』
(145쪽)

진정성이 진실한 삶의 중요 포인트이다.
참되고 진정한 삶을 살아갈 때 『한결같음』 이라는 미덕도 획득할 수 있다.
한결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진실한 삶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 고든 마리노는 준엄하게 이같이 말한다.
버킷리스트나 자아실현하고 진정성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예컨대 당신은 잠재력을 발휘해서 피카소 같은 화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잠재력이나 재능을 발현한다고 당신이 진실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때 진실한 존재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의미하며, 신이 당신에게 의도한 자아를 뜻한다.

한편 키르케고르는 진정성에 대한 다른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전통적으로 지식이란 ‘옳은 것으로 입증된 믿음’으로 정의된다.
키르케고르에게는 옳고 그름과 입증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어원적으로 말하면 라틴어와 독일어에서 ‘진정성’이란 개념은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뜻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우리는 페이스북에 어떤 글에 좋아요를 누름으로써가 아니라
그 의견을 적극적으로 자신과 관련짓고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간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 진정성이 왜곡되거나 오용된 사례들이 있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진실된 것이, 자신의 타락이나 죄악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다.
수백만명의 나치가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수십만명의 미국인이 노예제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성경 속 예수는 자신이 선택한 제자, 가나 출신의 나다나엘에 대해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라고 평가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간교한 속임수가 없는 사람, 겉으로 보이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 사람,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지’는 물론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고 저자는 부연한다.
즉 우리는 비진정성, 즉 가식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을 뿐이라는 거다.
앞서 영화에서 사치에가 ‘그저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뿐’이라고 대꾸한 것처럼.


허위, 가식, 거짓을 피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자신에게 진실하면서 진정성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5장은 신앙 편이다. 키르케고르가 루터교도에 속하며 독실한 신앙인이었음을 고려할 때 5장에서의 등장은 의외기도 했다.
앞에서 실존주의의 핵심 키워드로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을 다루고 이 챕터에 이르었기에 더욱 깊이가 느껴졌다.

알베르 카뮈는 키르케고르만큼 실존의 공허함을 인식하고 철저하게 파악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너무도 바빠서 차분하게 일상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한 오늘날에 경종을 울린다고 보았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두려움과 떨림’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거대해서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모든 것의 밑바닥에 숨어 있다면, 우리 삶이 절망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만약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신성한 끈이 없다면, 만약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또 사막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한 세대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은 채 세상을 살아간다면,
만약 어떠한 망각이 항상 굶주린 채 먹잇감을 노리고 있지만 그 먹잇감을 구해낼 충분히 강력한 권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지독히 공허하고, 어떤 위안도 없을 것이다.』

이 뒤를 잇는 문장을 통해서 키르케고르는 “그러나 정확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덧붙인다.
우리를 보호하는 신이 있고 그러므로 삶은 공허가 아닌 좋은 것이란 뜻이다. (167쪽)

철학자이며 신학자, 시인이던 키르케고르가 떠난지 150년이 넘었지만 이 사람은 여전히 고든 마리노의 심리 치료사였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사상이나 글로써 뿐이 아닌 실질적인 치료를 받아 작가는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유복하게 성장한 유년기를 거쳐 젊은 한 때에 방황과 타락한 생활을 전전했다.
그러다 회심한 이후 철학자이며 작가로, 신앙에 기초한 뛰어나고 빛나는 저작들을 발표했다.
그의 글은 덴마크 국교를 비판하기도 했고, 기득권과 주류의 위선을 까발렸다. 그랬기에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음은 물론이고, 외면을 받으면서 삶을 쓸쓸히 마쳤다.


키르케고르는 앞서서 실존주의를 간파한 개척자였다. 그의 사상과 글이 오로지 신앙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앙을 빼놓고 키르케고르를 이야기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고 마리노는 말한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지 않고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면서 형성이 됐다.

『때때로 키르케고르는 곁눈질만으로도 현대인이 생각하고 존재하는 방법에 내재된 허울과 무력함을 드러내며, 내 마음에 작은 불씨를 댕겼다.』
(171쪽)

키르케고르는, 충실한 신앙인이 되려는 노력이 어떤 의미인지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에게 성경은 호의적으로 보면 ‘재밌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준 현인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지식이 가장 중요하고, 하느님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하다.

오늘날에 우리는 자율성을 흠모하고 숭상한다. 얼마전까지도 2차 대전 직후 즈음까지는 순종은 항상 존경받는 미덕의 하나인 태도였다. 그러나 고든 마리노가 보기에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자율성은 사람의 독립의 증표이다.
『오늘날 모욕적인 것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 (176쪽)

실존주의의 대제사장인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권위가 없는 곳에는 순종이 없고, 순종이 없는 곳에는 진지함이 없다고 피력했다.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주장들을 종교와 담을 쌓은 독자로서는 쉽게 허튼소리라고 치부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의 표현들은 시적이고 은유적인 기법들도 많았기에, 강력한 종교 색채와 더불어서 자아도취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든 마리노는 이런 점까지 유의미하게 바라보고, 오히려 그래서 가치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저자가 키르케고르의 신앙에서 발견한 가치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게 해주는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키르케고르가 주장했다.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타락한 존재인가를 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아는가? 이 앎은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고 마리노는 역설한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이 없으면 자기 투명성 self-transparency 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자기 투명성, 즉 자신에게 정직하기 위해서, 또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대로 자신을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적절한 관점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내면의 섬뜩한 목소리들은 분노한 권위자들의 내면화된 목소리로 해석한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는, 똑같은 자기희생 과정이 나의 세로토닌 저장고가 바닥난 증거로 읽힌다.
마르크스주의 에서는, 나의 내부 지향적 분노는 착취와 계급의 차이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나 자신에 대한 야만적인 태도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용서를 거부하는 오만한 자존심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데이비드 흄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은 자아 라는 개념을 허구에 가깝다고 여겼다.
반면에 키르케고르는 자아를 하나의 독립된 실체이자, 목표로 삼아야 할 과제라고 믿었다.

따라서 ‘진정한 자아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정해진 신성한 의무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 의무를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 즉 정신이 되는 것과 동일시 하였다.

키르케고르가 옳다면, 우리는 자아에 대한 간단 정확한 정의를 기다릴 것이 없이 당장
우리 자신이 되려는 과제를 시작해야 한다.
이때 첫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개개의 인간이므로, 개개의 인간이 되겠다고 의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까다로운 숙제도 남겼다. 당신이 신과의 관계를 배제한다면 당신의 진정한 자아도 배제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한편 키르케고르에게 신앙을 포함에 모든 것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열정 그리고 실천이다.

《철학적 단편에 부치는 비학문적인 해설문》에서 키르케고르는 “확실성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다르게 말하면, 확실성이 있는 곳에는 위험이 없고, “위험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없다.”

키르케고르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겠다는 건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이다. 또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려고 노력하겠다는 뜻이며, 세계의 월계관과 쾌락에 대한 애착을 버리겠다는 뜻이다.
기독교는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많은 환희와 쾌락에 찬물을 끼얹는다. (181쪽)

기독교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마음챙김이라는 수련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내면의 평화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이 있다는 믿음 faith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주장은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 있고 무척 위험한 주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는, 위험을 회피하는 것만큼 영적으로 중대한 위험은 없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신앙에 대한 결정적인 질문은 우리가 확신과 느낌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앙에 대한 걱정이 신앙이라고 가르쳤고, 키르케고르는 기도를 신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마음가짐에 비유했다.
“기도는 하느님을 바꾸지 않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바꾼다.”

고든 마리노가 신앙에 대하여 최선으로 결론지은 정의는 이렇다.
신앙은 신뢰이다. 구체적으로 비유하면 우리가 친구, 사랑하는 사람에게 갖는 신뢰와 같은 것으로 마리노는 생각한다.
신앙을 잃게 될 때, 신앙을 상실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185쪽)

고든 마리노를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차근히, 하나씩 따라왔다.
저자는 6장 도덕성을 통해서 실존주의와 도덕성의 관련을 살핀다.

앞서 언급했듯이 키르케고르는 기도가 신을 바꾸지는 않지만, 사람을 바꾸고 발전시킨다고 했다.

도덕적인 후회와 뉘우침도 마찬가지라고 작가는 말한다.
내가 과거의 행동을 되돌리고 지울 수는 없지만, 회한으로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그대의 후회를 최대한 활용하라. 그대의 슬픔을 억누르지 말고, 소중히 돌보고 보살피라. 슬픔이 독자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관심사가 될 때까지,
깊이 후회한다는 것은 새롭게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새롭게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마리노는 단언한다.

도덕성 발달에 관련해서 사르트르, 키르케고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방법론을 제시했다.
사르트르는 우리의 급진적 자유가 불안을 야기하고 우리는 자유를 부인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학대하지 말고 도덕적인 죄를 범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도덕적 감수성을 은밀히 심어주는 감정과 권력 관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인다.

키르케고르는, 올바른 삶을 방해하는 주된 장애물은 우리의 자기 기만적 성향이라고 외쳤다.
구체적으로 다시 말하면 이와 같다.
우리는 행복과 만족의 감소를 각오해야 하는 희생이 필요할 때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얼버무리면서,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228쪽)


고든 마리노의 진지한 사유와 해석을 통해 실존주의를 살피는 책의 마지막 장에 다다랐다.
7장 사랑 편이다.
어떻게 해야 사랑을 주고 발견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는 실존적인 질문에 해당하는 질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성애와 우애, 가족애 같은 다양한 감정을 사랑이라 칭한다.
그리스인들은 에로스 eros, 아가페 agape, 필로스 philos를 구분했다.

키르케고르에게 사랑, 더 정확히 말해서 사랑하라는 명령은 기독교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낭만적인 소설들에서 사랑을 정의할 만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당신의 동반자를 찾는 것은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는 전제에 근거해 운영되는 결혼 중매 웹사이트는 얼마나 많은가?
예컨대 외로운 사람 아무개씨는 매력적이고 총명하며 상냥하고, 취미는 스키이며 많은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는 식으로 홍보하면 어떻게 될까?

실존주의자들은 사랑에 대해 결코 감상적이지 않다고 마리노는 단언한다.
그들 철학자들은 특유의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해 사랑을 분석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희곡에서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썼다.
삶은, 똑같이 행동하려는 타인들의 틈에서 주체로서 자리잡으려는 끝없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 관점으로 해석하면, 우리는 권력을 차지하고 타인의 심판을 피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지내기 때문에, 자기애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카뮈가 소설에서 그린 인물들에서, 인간이 사랑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작품 「전락」의 주인공 장바티스트 클라망스는 말한다.
“물론 진정한 사랑은 예외적인 것이라 한 세기에 두서넛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밖의 경우에는 허영, 아니면 권태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우리는 목격하곤 한다.
즉, 보통 사람이 타인, 낯선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실제 이야기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의심 많은 이들은 이타주의는 불가능하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이기심에서 동기를 얻는다고 단정한다.
예를 들어 남수단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메인주의 편안한 의사 생활을 포기한 의사가 있다. 그에게도 이기적인 동기가 있을 수 있다.
그 동기는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영웅 심리일 수도 있다고 간주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의 행동은 여러 가지 동기가 복합된 결과에서 비롯된다.

과연 진정한 사랑이 정말로 존재할까? 그런 사랑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이 애석하게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충실한 경험주의자라면, 장바티스트 클라망스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삶의 비전을 기존의 시야 너머로 확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우리가 총명함을 자만하며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어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의기양양해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랑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실리적이어서 확률을 따지며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겠다는 사람이다. (240쪽)

“우리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 사랑을 빼앗긴다면,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결과여서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보상받지 못할 영원한 상실이다.”

키르케고르는 약혼이 파혼으로 끝나며 결실을 맺지 못했다.

실존주의라는 획기적인 철학을 주창하고 불멸의 학문을 정립하며, 의미있는 저술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짧은 생으로 삶을 마쳤고 죽기 직전에 가족, 친구와 멀어졌다.
쓸쓸하고 비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생의 엔딩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진정한 은둔자가 된 사람에게서 사랑의 지혜를 구하려는 것일까?
키르케고르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이유가, 친구들과 덴마크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까닭에 그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 때문이 아니었을까?』
(242쪽)

그는, 점점 세속화되던 덴마크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다시 상기 시켜 주었다.
인간이라면 ‘사랑은 의무’라는 이상한 명령을 결코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이므로, 사랑은 의무라는 관념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키르케고르는 인정한다.
결국 그러한 생각을 해낸 주역은 하느님일 수밖에 없음이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키르케고르는 편애적인 사랑을 비판했다.
편애적 사랑이란 누군가 보유한 특징 (몸매, 지성)이나 혈연적 관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자기애의 한 형태라는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저서 《사랑의 역사 役事》에서 사랑의 책무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한 의무도 사랑의 책무이다.
사르트르, 카뮈, 니체와 달리 키르케고르는 누구나 사랑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우리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만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우리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하느님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썼다.

『차이는 인간 하나하나를 다르게 표시하는 세속 세계의 혼란스러운 방법이지만, 이웃은 모든 인간에게 찍힌 영원한 표식이다.
종이를 잔뜩 준비하고 종이마다 다른 것을 써보라. 그럼 어떤 종이도 다른 종이와 비슷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종이를 하나씩 집어 들고, 거기에 쓰인 것에는 신경쓰지 말고
빛에 비추어 보라. 그럼 똑같은 워터마크가 모든 종이에서 확인될 것이다.
이웃도 이런 워터마크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타락했다는 한 증거는 다름을 추구하는 중독적 현상이다.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지나치게 차이와 비교에 집착하는 까닭에 그런 차이를 공동묘지까지 끌고 간다고 말했다. 대단한 인물들은 묘지도 웅장하고 영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작은 철망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

삶의 주된 목적이 관광객처럼 재밌고 성취감을 주는 경험을 최대한 많이 즐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애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하다.

『전쟁터에서 무사히 귀환한 아빠를 환영하는 어린 딸을 뺨에 홍조도 띠지 않고 똑바로 서서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물건을 팔고 싶은 마음에 눈보라에도 양손에 보따리를 쥐고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허리가 굽은 노파를 보고 발길을 멈춘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떻게 해야 저녁식사 후에 업무를 끝내고 <왕좌의 게임> 다음 편을 시청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걷는 사람보다 정신적으로 더 건강할 수 있다.』
(248쪽)

플라톤은 <향연>에서 여사제 디오티마를 통해 사랑을 언급했다.
디오티마에 따르면, 우리는 처음에 물리적 형체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지만, 성숙해지고 분별력을 갖추면 고결한 영혼의 사랑스러움과, 영혼을 보살피는 법의 아름다움에 차례로 빠져든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이런 논증을 담았다. 어떤 면에서, 어떤 정치·경제·사회 공학도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다는 것.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해 실존주의 전통을 계승한 작가들은, 신을 믿는 신앙 없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느냐는 문제에 전념했다.

내면의 의혹과 목소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의 하나로 우리는 주변의 동경을 갈망한다.
우린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열망한다.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사랑받기를 원한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리자의 자비와 용서를 거절한 지하생활자는 메시지를 준다.
우리 자존심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방해한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를 위대한 심리학자로 여겼다.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을 하나만 꼽자면 용서받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에 대한 예수의 명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려면은 무엇보다도 순수한 자기애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예수의 말씀에서는 자아를 배려하는 관계가 결코 자아도취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애와 동일시하는 자만심, 자기 집착과는 다르다.

고든 마리노는 마지막으로 고백을 추가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작가는 끝없는 자기혐오에 시달렸다고 한다. 혐오가 극심하던 때도 작가는 곁에서 그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적절한 감사와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마리노는 그들의 사랑에 진실로 고마워하지 않았고, 진실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저 사람이 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저들이 나와 얽히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순수한 자기애가 없었기 때문에, 우울증이라는 용광로에서 부글부글 끓는 분노가 치밀었다.
『근본적으로 나는 저열한 지하 생활자이고, 주변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예전에 알았더라면 한 명도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주었다.』 (261쪽)


다시 강조하면,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사랑이 필요하다.
또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그 사랑을 넉넉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정치사회적인 예시인지 모르지만, 인종차별과 억압은 그런 사랑을 방해한다.
요컨대 인종차별과 억압은 자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을 크게 훼손하는 죄다.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다룬 안내서는 아니다.
책에서 언급한 실존주의자들의 기저에는 진실한 삶의 영위는 여전히 고행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저자가 실존주의자들에게 끌린 이유는, 어떤 학파보다 그들이 ‘삶은 낭만적인 여정이 아니라 힘겨운 고행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끗이 인정하고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카뮈는 근대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한겨울에야 나는 내 안에 여름이 계속 도사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키르케고르부터 카뮈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자들은 삶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이며,
그 선물이 도전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깨달았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의 많은 장애물을 찾아내서 기록했다. 예컨대 사랑이 없는 삶은 생명이 없는 죽은 삶에 다르지 않다.

본 책의 부제는 실존주의자들의 생존 지침서 Survival Guide 이다.
이 가이드는 우리가 이런저런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쓰였다.

철학은 실존주의와 고대의 철학들, 윤리학까지 다양한 영역을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그리고 키르케고르까지.
지금처럼 확확 변하는 시대, 인공지능이 각광받는 시대에 언틋 고루해 보이는 철학을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이나 공연처럼 멋스럽지 않고, 오락처럼 짜릿한 재미가 있지 않다.
자연과학처럼 쉽게 답을 제공해주는 편리함도 전무하다.

허나 이 책을 읽으면서 실존주의와 키르케고르를 중심으로, 키워드를 매개로 하여 철학을 읽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철학 교수가 하는 일은 답을 주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같이 고민하는 역할이 더 커 보였다.
신기하면서도 귀해 보였던 건, 미국의 젊은이들이 철학과에 진학하고 진지하게 배우는 모습이었다. 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철학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거라는 생각은 철저히 편견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자신과 관계를 맺는 피조물이다. (267쪽)

우리는 지금 불편한 생각과 기분과 감정을 병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앞서 자세하게 고찰했듯이, 불안은 어떤 메시지가 담긴 감정, 즉 인지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내포된 감정에 해당한다.

키르케고르는, 적절한 쟁점에 대해 적절한 방법으로 ‘걱정’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필요한 궁극적인 교훈을 배우는 거라고 했다.
한발 나아가 신에 대한 신앙도 ‘위험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없다’고 파격적으로 주장한 철학자.

불안, 우울, 근심을 핸드폰 음소거 하듯이 제거해 버리려는 자세를, 이제는 숙고해 보지 않겠는가.
키르케고르가 안 궁금하다면 강제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D

키르케고르 자신은 책들을 통해서 단호하고, 에두르지 않으며 돌직구로 의견을 개진했다.

다행히도 고든 마리노는, 철학과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한결 친절하게, 때로 유머러스하고 위트를 담아서 독자에게 키르케고르를 전달했다.
한번쯤은 진지하게, 가볍지 않게, 절실하게 생각해 볼 내용들이었다.

『불안해지는 방법을 올바로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셈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책 에서)

진성성 Authenticity 은 성실성 Sincerity 이란 개념의 자손이다.
성실성은 정직함에 더하여, 오래전부터 자신의 과제와 의무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진정성이란 개념의 의미는 부침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기계와 과학기술과 달러의 패권주의가 은밀히 파고드는 세계에 적대적이고 유기적인 것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진성성은 ‘소유 having’가 아니라 ‘존재 being’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당연한 생각이겠지만, 진정성의 반대에는 가식이 있다.
실존주의자들은 진정성을 진정한 자아가 되는 것과 관련지었다. 그런데 ‘진정한 자아’는 창조되는 것일까, 아니면 발견되는 것일까?
요컨대 우리가 발견해서 드러내야 할 자아가 더 깊은 내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아가 된다는 것은 예술품을 창작하듯이 교양과 재능과 감정을 재료로 삼아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는 작업과 비슷한 것일까?

물론 키르케고르가 진실하다고 평할 만한 자신과의 관계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믿음의 크고 작은 도약, 결국에는 어떤 경우에나 그렇듯이 믿음의 거대한 도약이 필요하다.
(277쪽)







YES마니아 : 로얄 b********5 2019.05.21. 신고 공감 5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서평] '나'로 존재하기_046 (나로 존재하는 용기)
"[서평] '나'로 존재하기_046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우리는 종종 말한다. 책 한 권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말이다. 이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이 말이 뜻하는 바를, 그리고 책이 가진 영향력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술과 마약, 우울증과 자살충동 등 자기파괴적인 삶을 보내던 저자는 심리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른 커피숍에서 우연히 키르케고르의 서적을 읽는다. 지금도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르
"[서평] '나'로 존재하기_046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우리는 종종 말한다. 책 한 권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말이다. 이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이 말이 뜻하는 바를, 그리고 책이 가진 영향력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술과 마약, 우울증과 자살충동 등 자기파괴적인 삶을 보내던 저자는 심리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른 커피숍에서 우연히 키르케고르의 서적을 읽는다.

 

지금도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르지만, 위의 구절은 나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다..(중략)..키르케고르가 나열한 단어들이 나를 완전히 감쌌다. p.44

 

이후의 변화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이전과는 달라진 시간을 지나 현재는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가 고백한 이전의 삶에 대비되어 너무 극적이라 여길 수도, 그리고 당시 저자에게 '키르케고르'의 책 말고도 다른 상황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상황들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변화의 기폭제가 된 것이 키르케고르임에는 의심이 없다.

 

책은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그리고 사랑7가지 주제에 대해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데 다행히 각각의 주제는 관념적으로 다뤄지기 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어렵지 않게 읽힌다(철학을 주제로 하고 있어 책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긴장했던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시샘은 우리 삶을 방해하는 가시덤불 중 하나이고, 비교는 시샘의 토양이다. 성실한 사람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므로, 이런저런 감정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타인과 비교해서 평가하지 않는다. p.99

 

2장 '우울과 절망'에서 정작 내 눈에 들어온 대목은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글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은, 그리고 머리로는, 나와 타인과의 비교가 무의미 함을 잘 알면서도 왜 순간순간 그 무의미한 행위를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일까? 내 삶을 방해하는 가시덤불을 없애기 위해 온전한 나를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깨닫는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하는 개체이다. 이 땅에서 존재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 및 주변 상황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p.144

 

진정성에 대한 챕터에서는 관계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흔히 관계를 언급할 때 타인과의 관계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누구와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가 말한 진정성과 자아에 대한 언급 역시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먼저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결국 진정한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자아를 알아야 할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진정성은 가식적 행위의 자제를 넘어 진정한 자아가 되려는 노력이다. p.151

 

마지막으로 다소 무거울 수 있으나, 관심이 가는 주제는 죽음이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하기야 누군들 그 이야기를 즐겁게 꺼낼 수 있겠는가만은). 하지만 웰빙과 함께 웰다잉에 대해 논하는 글들을 심심찮게 접하거나 요즘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자신의 장례식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가 예전보다는 좀 더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느낀다.

 

모두가 죽음에 대한 자각을 억누르려 하지만, 죽음을 자각해야만 가족과의 친밀함을 되찾을 수 있다. p.118

 

저자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한다. 위의 문장은 그 이야기의 끝에 달아놓은 글이다. 글을 읽으며, 가족과의 친밀함 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유한함으로 인해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죽음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한다는 저자의 말에 인간의 유한함과 함께 나의 우선순위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려 보기도 했다.

 

죽음은 해방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한다. 전에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 이제는 새로운 중요성을 띤다. p.127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잊는 것 같다. 때로는 자신에 대한 고민보다 타인이 보는 '나'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은 듯도 싶다.

그래서일까? '나로 존재하는 용기'라는 책 제목이 주는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게 된다.

 

*나에게 적용하기

'나로 존재'하기 위해 타인과 비교하지 말기(적용기한 : 지속)

 

*기억에 남는 문장

실존주의자들은 철학을 삶의 한 방식으로 보았다. p.26

 

건강을 평가하려면 먼저 건강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물론 영적인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p.88

 

살아온 날수는 모르더라도 우리는 삶이 하루하루 헤아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중략)..죽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확실한 불확실성이다. 요컨대 죽음이 닥치는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닥칠지는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p.111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때가 되면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에서 한 문장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p.124

 

키르케고르는 기도를 신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마음가짐에 비유하며 기도는 하느님을 바꾸지 않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바꾼다라고 발했다. p.185

 

삶의 주된 목적이 관광객처럼 재밌고 성취감을 주는 경험을 최대한 많이 즐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애로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하다. p.247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로얄 w*****y 2019.05.29. 신고 공감 4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누가 그랬던가? 사랑에 빠지는 데는 3초면 충분하다고.책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는 책의 첫문장을 읽었을 때, 혹은 책 표지를 접했을 때 바로 알 수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나를 3초 안에 매료시킨 첫문장은 바로"실존주의는 진정한 신경증 환자이다."라는 구절이었다. 나름 예민함에 대해 스스로를 괴롭혀도 봤고 질책도 받아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누가 그랬던가? 사랑에 빠지는 데는 3초면 충분하다고.

책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는 책의 첫문장을 읽었을 때, 혹은 책 표지를 접했을 때

바로 알 수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나를 3초 안에 매료시킨 첫문장은 바로

"실존주의는 진정한 신경증 환자이다."라는 구절이었다.

나름 예민함에 대해 스스로를 괴롭혀도 봤고 질책도 받아보았고

수시로 파고드는 불안감에 약을 먹을 정도까지 불안증에 시달려보았던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이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여러 철학자들에게서 논해져왔다는 사실에 이미 매혹당했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한줄한줄 아껴가며 읽을 수 있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그들은 한순간 한순간을 그냥 지나쳐 보내지 않고

의미를 둔다.

실존주의는 요즘 대두하는 힐링프로그램인 요가나 마음챙김이 다루지 못하는 부분을 다룬다.

부적절한 감정들에 대응하기 위한 단계적인 계획이나 피해야 할 행동목록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

우울한 기분이 나를 덮칠 때, 내가 영적인 태도를 가지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요즘은 불안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많다.

저성장에 빠진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지만 

유독 경쟁이 심화된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 더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문제이다.

 

요즘은 불안의 심리를 '뇌'의 문제에 국한시켜 심호흡이나 명상으로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시도가 많은데 사실 극도의 불안함이 찾아올 땐 그렇게 명상이 쉽게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가운데

보게 된 이 책은 한 줄기 빛 같았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처방은 그런 불안정한 감정들과 공존하는 능력을 함양하고 두려움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내면성의 거장에 따르면 '불안해지는 방법을 올바로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셈'이기 때문이다.

(중략)

요약하면 키르케고르와 그 이후의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불안이라는 악마적인 기분 혹은 감정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처방한다. 불안은 그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불안에 떨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불안은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을 좌우하는 중심축이 진정하고 진실한 자아가 되려는 원대한 계획이 아니라 불안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될 수 있다. "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반복해서 읽으면 키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불안은 쉽게 말하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어떤 가능성에 대한 선택과

후회를 맞이하며 사는 것이 현대인인만큼 불안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자아를 찾기 위해 침잠하고 불안의 본질과 맞닥뜨릴 때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키르케고르의 말.

 

삶은 낭만적인 여정이 아니라 힘겨운 고행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실존주의자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불안에서 탈피하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그래도 괜찮다며 하릴없는 위로를 건네지 않고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조금은 어렵지만 곱씹을수록 나에게 양분을 만들어주는 책인 것 같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n***h 2019.05.20.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나를 압도하던 것들이 삶이 된다는 것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나를 압도하던 것들이 삶이 된다는 것" 내용보기
나는 많은 축복을 받은 존재이지만, 상대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다.삶의 스팩트럼에서 나는 불행한 쪽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임상적으로 말하면, 나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이다. 나 자신을 두둔하자면, 나는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거의 범죄자가 될 뻔했던 날들 이후로는 학생들과 지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애썼지만,나는 현명한 도덕군자도 아니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나를 압도하던 것들이 삶이 된다는 것" 내용보기




나는 많은 축복을 받은 존재이지만, 상대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삶의 스팩트럼에서 나는 불행한 쪽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임상적으로 말하면, 나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이다.

나 자신을 두둔하자면, 나는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거의 범죄자가 될 뻔했던 날들 이후로는 학생들과 지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애썼지만,

나는 현명한 도덕군자도 아니고, 밤에는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나

그날의 약속들을 원활하게 처리하는 유능한 사람도 아니다.

15p

인간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모순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들을 빌려 인간의 실존을 고찰한다. 철학책이라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고풍스러운 책 디자인에 넘어가서 선택한 책이다.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이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때때로 우리를 잠식해오는 불안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자유, 즉 끊임없이 어떤 가능성을 선택해서 실현하려 애쓰며

다른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 필연성은 불안의 근원이다.

사르트르는 낭떠러지 끝에 선 사람을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했다.

천길만길의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머리가 아찔하고 뱃속이 뒤틀리며 불안감이 몰려온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언제라도 뛰어내릴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61p

세속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에서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어들의 개념 자체가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어렵다. 등장하는 철학자들마다 각자의 정의를 내리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우리의 불안은 질병이 될 수도, 마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질병이라 해도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는 키르케고르 뿐만 아니라 니체, 사르트르, 헤겔, 아리스토텔레스, 카뮈, 루터, 토마스 아퀴나스 등 몇백년에 거쳐 있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뛰어넘으며 우리의 감정들에 대해 설명한다.

 

 

반대로 암울하고 우울한 고투의 시간이 반드시 절망적인 시간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인정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건강한 편이라고 판단했다.

1846년의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진실로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광기에 가까운 이런저런 고통에 사로잡혔다.

그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 마음과 육신 사이의 잘못된 관계에 있다.

그 고통은 내 정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은 무척 놀라운 사실이며, 여기에서 나는 무한한 용기를 얻는다.

96p

당신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힘든 훈련이다.

키르케고르도 이런 상상에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 생각은 현재의 심리 상태를 투영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생각은 지나치게 무겁거나 지나치게 경박할 수 있고,

지나치게 명랑하거나 지나치게 음울할 수 있다.

엽기적인 환상이든 기막히게 멋진 공상이든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모든 것이 끝나고 더는 시간이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관점에 대해 깊이 감추어둔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가 된다.

121p

 

"죽음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확실한 불확실성이다.(111p)"

"죽음이 명확해지면, 순간이 영원처럼 지속될 수 있다. (125p)"

3장에서 톨스토이는 진정성과 형제애가 없는 삶은 영적인 죽음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유행할 정도로 죽음은 인간 실존 그 끝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문제다. 구체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를 넘어선 나의 세번째 자아는 어떤 것이며 나는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 죽음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같은 장에서 언급된 '죽음을 상상하는 훈련'이라는 말에서 나는 갑자기 영화 <어바웃 타임>을 떠올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만 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지내기 위해서만 그 능력(?)을 이용했던 엔딩이. 심지어 중간에 아버지도 죽었고(...). 사랑까지 제대로 쟁취한 이 사람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실존주의자 아닐까. 신앙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는 키르케고르의 설명을 저자는 약간은 세속적으로 이끌어낸다. 죽음이 두려움보다 슬픔이 되는 삶의 끝을 맞고 싶다.

 

 

 

따라서 친절에 대한 내 확신은 나 자신에 대해 나에게 말하는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달리 말하면, 내가 항상 친절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내가 상상하고 싶어하는 것만큼 내 진심에 가깝지 않다는 뜻이다.

실존주의에서 언급되는 미덕들은 자신에 대해 정직함을 요구한다.

따라서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진정성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생각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물음에 솔직하기를 바란다.

149p

몇몇 흥미로운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자면, 두려움은 명확한 대상을 갖지만 불안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정의했다는 점과 우울과 절망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 개념들을 혼동한다. 이러한 혼란은 때로 아주 위험할 수 있다. 우울을 절망으로, 병리적인 것으로 착각해버리고 감정에 또다른 의미들을 부여하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그것이 나를 압도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어 나태와 소극적인 수용의 위험성을 2장에서 경고한다. 심지어 4장에서는 '타락'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상당히 뜨끔하다. 어딜내놔도 나태함으로 뒤지지 않는 나로써는 그것에서 오는 어떤 무력함과 우울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어떤 것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어떻게(150p)' 실행하는가가 핵심이다. 그러나 스스로 진정성이라고 믿는 것에는 자아도취적 위험성도 동반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것과 강력히 유대해야 하지만 이 또한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인간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동물이다(머리아픔)

 

 

누구도 애초부터 겁쟁이로 태어나지 않는다.

또 누구도 처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믿고 싶겠지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도덕적인 전환은 가능하다.

사르트르가 성경 이야기에 감동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재로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부인했을 때,

당신은 베드로가 가롯 유다의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용기를 되찾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197p

도덕적으로 말하면, 유혹은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택하는 동시에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의 주체감을 약화시키면, 우리의 도덕적 이해력도 조금씩 떨어진다.

키르케고르였다면 '변증법적'이라고 칭했을 이런 역학 관계 때문에,

우리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듯이 내려다보며

'너희가 지금은 이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겠지만 머잖아 알게 될 거다'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이상적 생각들을 어떻게 끊어낸다는 것일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당신이 발성하면 냉대를 받거나 승진에서 탈락하게 될지도 모를 진실의 폭로를 늦춤으로써

당신의 도덕적 이해를 은근히 덮어버리게 된다는 말일까?

출세제일주의, 성공으로 보장되는 물리적 안락함과 소속감 등은 희생이 요구될 때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나는 알았어야 했다.

222p

 

물론 고든 마리노는 책 전반에 걸쳐 개인의 통제력과 감정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항우울제 복용 등도 우울의 감정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핵심은 스스로가 유약한 인간이라는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통제하려는 욕심을 버리되, 스스로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수단으로 우울을 생각할 줄 아는 어떤 내공(?)을 살면서 좀 키워야 하지 않을까. 철학이 목표로 하는 지혜의 수단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 연민을 보내라는 말이 약간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야기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 삶을 살아야하니.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진정성authenticity란 무엇일까. 4장에서 아주 명확한 해답을 뚜렷하게 내리지는 않지만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삶의 태도가 결국 그것이겠지. 5장에서 언급한 신의 존재조차 신앙의 상실은 우리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신뢰의 방식과 욕망 또한 우리의 선택이라고 하기 때문에. 6장이 다루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의미도 진정성의 수단이자 목표라고 생각한다. '지식을 끌어내는'과정.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지만 동시에 가짜후회가 아닌 '도덕적 후회'를 가슴 깊이 간직한다. "회한으로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다(228p)."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한 의무도 사랑의 책무 중 하나이다.

달리 말하면, 사르트르와 카뮈와 니체와 달리 키르케고르는

누구나 사랑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우리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만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우리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244p

 

그럼에도 마지막 장은 결국 '사랑'이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레기네와의 사랑에서 찌질한(...) 모습과 씁쓸한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또한 인간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처럼 우리는 때로 온유함과 거리도 멀고 어색한 결과를 만드는 행동을 하지만 우리의 '사랑의 의무'는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논의하는 개념들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쉬울 수도 있겠다. 저자도 그들이 가지는 모순이나 허점을 지적하지만 여기서 어떤 교훈들을 끌어내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수많은 저서들과 말을 남긴 이들의 논리는 어느 지점에서는 부딪히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한 편이 된다는 점이다. 그 중 한가지, 삶은고통인 동시에 선물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책의 첫머리에서 그들의 생각조차 변덕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저자의 솔직하고 담백한 자기고백적 조언들은 분명 어떤 용기를 줄 것이다.

 

 


y****7 2019.05.10.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철학과 심리를 논리적으로 엮은 책
"철학과 심리를 논리적으로 엮은 책" 내용보기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표면적으로 다가오기에 "잘 살기 위해서 이 세상을 버리라"는 말은 외톨이가 되라는 말로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 문장 속에는 실증주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바로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본능, 비교강박에서 벗어나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비교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은 실재와
"철학과 심리를 논리적으로 엮은 책" 내용보기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
표면적으로 다가오기에 "잘 살기 위해서 이 세상을 버리라"는 말은 외톨이가 되라는 말로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 문장 속에는 실증주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바로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본능, 비교강박에서 벗어나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비교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은 실재와 현상을 구분해야한다는 저의를 담고도 있다.
?
니체,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등 유럽의 여러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를 지향해야한다고 이야기했다.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 또한 비슷한 류의 철학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서양철학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에서도 나타나는데, 예컨대 '윤회'로 대표되는 불교의 사상과 <도덕경>에서 노자가 역설한 "유무상생, 유무상통"과 같은 말들이 서양의 실존주의와 그 맥락을 함께 함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게 됐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아마도 우연적 현상에 대한 탐착은 탐욕을 이끌어 냈을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비교강박을 내재시키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나면 인간의 내면 속 강박은 우울과 불안으로 연결됐을 것이 분명함을 확신하게 된다.
?
이 책의 작가 고든 마리노는 위와 같은 인간의 불안, 우울의 근원과 그것의 해결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과 큰 범주로의 분석철학을 인간의 정서와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책들을 읽어봐도 직접적으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심리를 설명하는 책은 드물었다. 그래서 심리학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m*****o 2020.03.0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어린 시절 전혀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불량학생이었고 경찰서도 자주 드나들었다. 운동에 재능이 있어 대학에 스카우트됐지만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녔고, 강의는 거의 듣지 않으며 권투에만 열중했다. 대학원을 자퇴하고 약물과 음주에 의존하던 그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저자는 정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카페 겸 중고서점에서 키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어린 시절 전혀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불량학생이었고 경찰서도 자주 드나들었다. 운동에 재능이 있어 대학에 스카우트됐지만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녔고, 강의는 거의 듣지 않으며 권투에만 열중했다. 대학원을 자퇴하고 약물과 음주에 의존하던 그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저자는 정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카페 겸 중고서점에서 키르케고르와 만났고 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키르케고르의 무엇이 저자를 바꿔 놓았을까? 저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안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리던 키르케고르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의 글들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비슷한 내면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나 철학자에게 더 끌리는 것은 본능에 가까우니까.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철학자이고, 북유럽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책을 읽기 전까지 키르케고르에 대해 알던 전부였다. 

 사실 실존주의라는 말은 어디서든 자주 접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 실존주의 문학, 실존주의 심리치료……. 하지만 나는 앞에서 말한 소위 실존주의 문학을 읽어보고, 대학교 강의시간에 실존주의 심리치료에 대해 배우고, 실존주의 철학을 수박 겉핥기 식이라도 자주 접해도 결국 실존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실존주의란 것이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실존주의에 대해서 내 나름으로 생각한 정의는 ‘존재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끝없이 탐구하고 고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주체적으로’가 아닐까 싶다. (또한 나는 학문적으로 어렵고 복잡하게 분류를 해서 그렇지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의 철학을 갖고 사는 철학자라고 믿는다.)


 이 책을 보면서 내내 이 책이 소위 말하는 ‘자기계발서’라는 분류에 포함되는 책인지 의문을 품었다. 쉽게 쓰여진 책은 분명히 아니다. 끝없이 고찰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또한 주제가 정해진 각 장이 그 주제에 대해서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책의 서술방식은 주제와 관련된 접근(주로 저자의 경험 등의 사례를 통해)으로 시작해서 키르케고르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다른 사상가나 작가의 견해, 종합적인 결론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이렇게 돌고 돌아 탐구해오는 과정에서 읽는 내가 다른 길로 새거나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기에 책을 제대로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불안, 우울과 정말,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 이 항목들이 저자가 각 장의 주제로 잡은 것들이다. 결론을 내린다는 게 이런 책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존주의에도 맞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계발서들이 흔히 범하는, 어떠한 길이 옳다며 그 길로 독자들을 이끄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는 우리가 실존주의적으로 성찰하도록 이끈다. 길을 걷는 법을 알려주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키르케고르의 신앙과 사랑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공감하지 못했다. 특히 사랑의 경우, 키르케고르가 결혼을 자신의 이상한 사명감 때문에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떠난 것을 어떤 경우에도 긍정하지 않는다. 특히 그렇게 떠나서 아예 연을 끊은 것도 아니라 계속 그 여인에게 미련을 보였다는 것에서 더더욱. 이것에 대해서 저자가 어떻게 변호하고 연결시키려 해도 키르케고르에서 반면교사 이상을 찾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렇게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유하고 자신만의 태도를 가지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충고하고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e*****r 2019.05.3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고든 마리노_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고든 마리노_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삶을 자극하려는 사상의 전시장,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나에게는 걱정할 것이 항상 있다. 걱정거리가 없으면, 걱정할 구실을 찾아 나서거나 만들어낸다. _52이 한 문장을 통해 나를 보았고,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받고 보니 "나는 철학책이다!" 하는 포스가 강해 잠시 당황했다. 좀 가볍게 읽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
"고든 마리노_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내용보기


삶을 자극하려는 사상의 전시장,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나에게는 걱정할 것이 항상 있다. 걱정거리가 없으면, 걱정할 구실을 찾아 나서거나 만들어낸다. _52


이 한 문장을 통해 나를 보았고,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받고 보니 "나는 철학책이다!" 하는 포스가 강해 잠시 당황했다. 좀 가볍게 읽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일단 저자의 서문(머리말)을 읽고 시작하자 싶어서 책을 펼치니...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한국어판 서문과 머리말이 있었는데, 머리말이 무려 14페이지에서 48페이지까지 이어진다. 처음엔 '뭐지?' 싶었는데, 저자의 긴 머리말 덕분에 이 책을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긴 머리말이 나에게 신의 한수였다.  


거짓된 세계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법


저자 고든 마리노는 학창 시절 항상 불량 학생이었고 경찰서를 드나들었다. 미식축구와 야구에서 재능을 보여 주립대학교에 스카우트되고 잠시 철학에 매료되지만, 알코올과 마약에 흥분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권투 체육관에서 자신의 몸을 학대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자해를 하는 니키와 결혼하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니키도 치료를 받아 깨끗해져 교육학 석사과정에 도전했다. 그들은 이제 거의 정상적인 삶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첫 수업에서 자격이 없는 엉터리 학생임을 꺠닫고 수업이 끝나고 충동적으로 자퇴서를 제출한다. 그런 그에게 실망한 니키는 떠나고, 그후 2년 동안 과도한 음주와 약물 남용,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어느 날, 심리치료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들어간 중고 서적을 파는 커피숍에서 눈에 띈 책을 뽑아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키르케고르의 <사랑의 역사> 그는 '키르케고르'를 만났고, 그의 삶은 달라진다. 현재 그는 세인트올라프 칼리지의 철학 교수이자 키르케고르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인 홍 키르케고르 도서관의 관장이다. 


고든 마리노의 삶과 키르케고르의 만남, 그 서사가 머리말에 담겨 있다. 불안과 우울을 겪은 저자가 그의 경험과 고백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그의 삶을 변화시킨 키르케고르가 궁금해졌다.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이론이 아닌, 삶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주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철학, 신학, 심리학,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주요 저서로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 있다.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는 저자 고든 마리노가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킨 키르케고르의 삶과 저서를 통해 진정한 나로 존재하기 위한 내면의 일곱 가지 빛과 그림자, 즉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에 관한 실존주의 처방이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불안과 우울, 절망과 죽음으로 제기되는 시련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실존주의적 통찰을 살펴보고, 후반부에서는 실존의 긍정적인 면, 즉 진정성과 신앙, 도덕성과 사랑에 대해 다룬다.  


불안 

_불안해지는 방법을 올바로 배운 사람은 최고의 것을 배운 셈이다. _<불안의 개념>

_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어떤 특정한 물리적 현상, 예컨대 땀에 젖은 손바닥이나 빨라진 심장박동에 빗대지 않았지만, '자유의 현기증'이라 묘사했다. 불안을 통해 우리가 자유롭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면에서 가능성으로 가득한 피조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_키르케고르와 그 이후이 실존주의자들은 윌에게 불안이라는 악마적인 기분 혹은 감정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처방한다. 


우울과 절망 

_우울은 나의 가장 충실한 애인이다. 그러니 내가 우울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_<이것이냐 저것이냐> 

_키르케고르는 우울이 그 시대의 결함, 즉 "우리에게서 명령하는 용기와 순종하는 용기, 행동하는 힘과 희망하는 자신감을 빼앗아간" 결함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주장했다. 

_절망의 주된 징후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제거하려는 욕망이다. 대체로 이 욕망은 혼신을 다해 다른 사람이 되려는 바람의 형태를 띤다.

_우울이 절망으로 전이되는 이유는 우울에 빠진 사람이 자신과 우울 증세를 부정적으로 관련시키기 때문이다. 

_우울은 절망이 아니다. 그러나 우울이 언제라도 절망으로 추락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절망을 피하려면, 제3의 눈으로 내면의 삶을 계속 들여다봐야 한다. 또 진흙탕 같고 해묵은 침울한 기분에 짓눌린 내면의 바깥에 당신의 일부를 두어야 한다.

_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그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은 별개의 것이다.


죽음 

_죽음에 대해 묵상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_<묘지에서> 

_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일인칭 내부자적 관점에서 삶을 생각하라고 촉구했다. ... 불안과 마찬가지로 죽음에도 교훈이 담겨 있는 게 분명하다며,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그 교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_키르케고르는 죽음에 대한 갈망을 '공허함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그 현기증에서 최후의 기분 전환을 모색하려는 우울의 소심한 바람'이라고 호되게 나무란다. 

_키르케고르는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성실한 사람은 희귀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결과로, 그의 삶에서 하루하루가 무한한 가치를 간게 되나"라고 덧붙였다. 


진정성 

_위대함은 이러저러한 존재가 되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만약 그가 원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  _<이것이냐 저것이냐>

_진정성이 버킷리스트나 자아실현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_진정성은 가식적 행위의 자제를 넘어 진정한 자아가 되려는 노력이다. 


신앙

_위험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없다. _<철학적 단편에 부치는 비학문적인 해설문>

_신앙의 상실은 의도가 개입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도덕성

_어떤 사람이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앎의 가치는 떨어진다. _<죽음에 이르는 병>

_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는 자유와 불안과 책임 사이의 관련성을 강조한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불안이 생기는 것이고, 또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불안하다. 두 사상가는 이런 부담스러운 자유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인 충동을 인정한다. 

_사라트르는 우리의 급진적 자유가 불안을 야기하고, 우리는 자유를 부인함으로써 자기기만의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성향이 있다는 걸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_니체는 우리에게 우리의 도덕적 가치관은 신성한 것도 아니고 위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님을 인정하라고 충고한다. 

_키르케고르는 올바른 삶을 방해하는 주된 장애물은 우리의 자기기만적 성향이라고 꼬집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행복과 만족의 감소를 각오해야 하는 희생이 필요할 때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라 얼버무리며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사랑

_우리가 총명함을 자만하며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어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의기양양해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랑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_<사랑의 역사>


앞서 언급했지만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 표현했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라고. 또한 키르케고르는 우울에 대해 “우울은 나의 가장 충실한 애인이다. 그러니 내가 우울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불안과 우울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정의와 표현이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불안과 우울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대면하고 이겨낼 용기, 우리에겐 자유의 현기증이 있으므로...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c******y 2019.05.3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현대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실존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서평)
"현대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실존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서평)" 내용보기
우주의 크기로 보면 한없이 작은, 마치 없는 존재와 같은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는 종교의 역할이 컸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현생의 선행을 강조한다. 불교는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하는 게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근대 철학으로 넘어와서는 인간의 의미를 이성으로 규정한다. 데카르트는
"현대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실존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서평)" 내용보기


 

우주의 크기로 보면 한없이 작은, 마치 없는 존재와 같은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는 종교의 역할이 컸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현생의 선행을 강조한다. 불교는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하는 게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근대 철학으로 넘어와서는 인간의 의미를 이성으로 규정한다. 데카르트는 합리적 의심을 통해 존재하는 나를 증명했다. 칸트는 자기 자신의 도덕 준칙을 만들어 그에 따르는 것이 인간의 덕성이라고 강조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근대 철학의 이성을 넘어 감성에 접근한다. 합리적 판단보다 존재하는 나의 상태에 집중하는 게 실존주의 철학의 근간이다.

 

 

이 책은 실존주의의 시작을 알렸다고 볼 수 있는 키르케고르를 중점으로 실존주의 전반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이전에 읽은 키르케고르의 서적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을 때의 난해함이 이 책에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저자 자체의 개인적 삶을 토대로 풀이했기에 이해가 쉽게 되는 편이다.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절망이다. 대게 절망은 부정적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느끼는 우울과 절망은 나를 망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키르케고르는 다르게 보았다. 절망은 내가 원하는 상태가 되지 못한 자신을 보고 좌절한 것이라 말한다. 쉽게 말해 난 연예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크지만 지망생으로 계속 머물고 있을 때 절망하게 된다.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계다.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자아라고 말한다. 삶에서 생기는 고통은 결국 관계의 어긋남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한다. 저자와 키르케고르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합리적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게 신앙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생각난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 죽은 자들은 모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따르면 실존의 원동력이 살아가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허구의 산물을 믿을 수 있는 인지 혁명을 통해 사회를 구성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인지 혁명이 삶의 의미랑 연관된다. 확실한 참이라 말할 수 없어도,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게 우리 뇌에 있고 그 자체가 삶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신앙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 뇌는 그것을 믿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실존주의란 말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필자 역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난해함을 생각하면 거리를 두고 싶을 정도이다.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는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자기계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난해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저자 자신의 삶으로 해설해 이해가 쉽다. 다만 실존주의 자체가 난해한 철학이기에 일독으로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울 수 있다. 천천히 여러 번 읽기를 권한다.

 


g****d 2019.05.1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책 ::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_ 나를 이해하는 시간
"책 ::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_ 나를 이해하는 시간" 내용보기
낯선 이름이다. 키르케고르.'철학'이란 말에 난 움츠러든다. 낯선 철학자의 이름을 보고 있으면 어렵고 딱딱한 관념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스쳤다. 나에게 철학이란, 남들과 달리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적이란 말을 보고 현실적이란 뜻으로 생각하기보다 형이상학적이란 뜻을 떠올리는 사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
"책 ::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_ 나를 이해하는 시간" 내용보기



낯선 이름이다. 키르케고르.

'철학'이란 말에 난 움츠러든다. 낯선 철학자의 이름을 보고 있으면 어렵고 딱딱한 관념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스쳤다. 나에게 철학이란, 남들과 달리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적이란 말을 보고 현실적이란 뜻으로 생각하기보다 형이상학적이란 뜻을 떠올리는 사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철학자를 말하는 사람들과 사뭇 다른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고든 마리노는 현재 미네소타주 노스필드에 있는 세인트 올라프 칼리지의 철학 교수다. 그는 어렸을 때 "경찰서를 드나드는 불량학생"이었고, "럭비와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대학에 들어간 후, 술과 마약에 열을 올리며 강의실보다 권투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졸업이 다가왔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그는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만약 그리고 철학과 운명적으로 만나 철학과 교수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첫 수업이 안겨준 열패감에 수업이 끝나고 자퇴서를 제출"한다. 이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그는 작은 서점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키르케고르였다.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시인이다. 고든 마리노는 키르케고르가 "우리에게 내적인 삶에 대해 성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가이드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키르케고르와 만나 삶이 바뀌었듯이 많은 사람들이 키르케고르와 만나길 바라며 책을 썼다. 현대인이 한 번쯤 마주하는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의 순서로 삶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철학적 고민을 키르케고르의 철학으로 하나씩 짚어나간다.

키르케고르는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에서 중요한 철학자다. 하지만 그 외에도 키르케고르의 생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실존주의 철학자와 실존주의의 지적 토대 속에 소설을 쓴 작가의 저작도 함께 다룬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은 삶의 질을 높여주는 실존주의자들의 통찰력을 명확히 소개"하는 데 있으며, 독자가 책을 통해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썼다.


"앞으로도 반복해서 말하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그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은 별개의 것이다. 초드론이 말했듯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초대하지 않은 느낌이 무작정 밀려오면 내가 애꿎게 희생양으로 선택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의 울타리에 혼자 갇혔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퍼렇게 멍든 마음을 비집어 열고, 세상 방방곡곡에서 자학하는 형제자매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내야 한다. 쉽게 말하면, 그렇게 할 때 우울이 절망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이다. 힘들 때,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 보이고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우울에 빠지면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서 밀려나와, 과거의 실수를 곱씹으며 곧이어 닥칠 두려움을 염려"하기 바쁘다. 나도 그랬다. 힘들 때 그 힘듦을 핑계 삼아, 끊어내야 함을 알지만 끊어내지 않고서 슬픔과 우울에 나를 맡긴 적이 있었다. "키르케고르는 올바른 삶을 방해하는 주된 장애물은 우리의 자기기만적 성향"이라고 한다. "우리는 행복과 만족의 감소를 각오해야 하는 희생이 필요할 때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라 얼버무리며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경향"을 말한다.


"한 사람이 불안한 마음과 건전한 정신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요즘에 거의 없을 것이다. 또 항상 웃는 얼굴인 사람이 절망에 빠진 사람일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건강해서 겉으로는 최고의 상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울과 불안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인간이기에 때때로 불안과 우울 혹은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지배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스스로에게 비밀이 없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꾸밈없이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가식적인 행위의 자제를 넘어 진정한 자아가 되기 위한 노력"을 쏟으며 "겉으로 보이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문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기로 결심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더라도 나에게만큼은 거짓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를 다 읽은 후에도 "자아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고, 이를 굳이 달리 말해서 "관계가 그 자신과 관계를 맺는 관계에 있는 것이 자아"라는 문장은 여전히 마음에 닿지 않는다. 어려운 문장도 더러 있지만, 어려움은 쉬어가듯 넘어가며 키르케고르와 함께 나 자신과 조금 더 끈끈한 관계를 이루어내기 위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비밀을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 그것이 조금 더 용기 있는 나를 만들어줄까?

생각에 잠기며 책을 덮었다.


g*****9 2019.05.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