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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고 여러 학사학자들의 가설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거나 혹은 실전되어 지금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역사가 다른 시대보다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은 현재와 가까운 시기의 역사인 탓도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기록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역사서의 존재는 그 나라의 문화유산을 넘어 현재를 규정하는 원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우리역사가 아닌 중국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대의 동아시아 질서체제에서 중국은 우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기에 중국역사를 통해 우리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 21세기들어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는 중국에 대해 보다 잘 알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중국역사에 나타나는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는 가히 인물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동양고전으로써 그러한 역사서들을 읽으면서 현재의 우리 현실과 비교하며 난관을 타개할 통찰을 얻기도 한다. 우리가 읽는 중국역사서가 대부분 춘추전국시대를 다루고 있는 [사기], [춘추좌전], [국어], [전국책] 등에 국한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삼국지]는 한나라 이후 삼국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위, 촉, 오 삼국이 패권을 놓고 대립하던 시기의 역사인지라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부류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 [십팔사략]은 우리가 읽어오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와는 조금 다르다. 크게는 범위의 문제인데 춘추전국시대를 다룬 역사서와 달리 [십팔사략]은 선사시대인 삼황오제부터 시작하여 원나라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작게는 역사의 정통성을 어느 나라가 가지고 있었는가의 문제인데, 이는 언제 누가 썼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십팔사략]은 남송 말기의 인물로 원나라 출사를 거부한 증선지가 썼다. [십팔사략]이란 명칭은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다룬 정사가운데 18종의 정사를 선정하여 시기별로 요점이 되는 내용을 축약해 썼다는 취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을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에서 발췌했고, [자치통감]이 다루지 않은 송원대의 역사만 다른 정사에서 발췌했다. 증선지가 살았던 송나라시대는 성리학이 나타날 정도로 유학이 어느 시대보다도 강했던 시대이다. 증선지가 원나라에 출사하지 않은 이유도 아마 유학과 관계가 있지 싶고, 그러다 보니 [십팔사략] 역시 유가의 관점에서 쓰여 지지 않았나 싶다.
신동준 선생의 번역으로 인간사랑에서 상하 두 권으로 펴낸 [십팔사략]의 상편에는 상황오제부터 남북조시대까지 다루고 있다. 삼황오제로 표현되는 선사시대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인 역사이전의 시대로 인류사에서 보면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사람들은 구전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기억속에 남겨놓았고, 문자가 발명되면서 이런 구전은 신화형식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신화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삼황은 여전히 신화로 보았지만 오제는 [사기]의 맨처음에 [오제본기]를 배치함으로써 역사속에 편입시켰다. 이어 당나라의 사마정은 [삼황본기]를 지어 삼황마저도 역사속으로 편입시키고, 이후 삼황오제는 성인의 표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세계사시간에 배운 ‘요-순-우-탕-문-무-주공’이라는 성인의 계열이 이렇게 탄생했지 싶다. 요,순은 오제 중 마지막 두 사람이고, 우는 하나라를 세웠다. 하나라는 마지막 왕인 걸이 미인 말희를 총애하여 경궁과 요대를 짓고 술로 세월을 보내자 탕이 이를 멸하기까지 17세(世)에 걸쳐 432년동안 이어졌다. 은나라는 탕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왕인 주가 미인 달기와 주지육림에 빠져 주 무왕 희발이 멸망시키기까지 629년동안 이어졌다. 은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뒤 천자가 된 희발은(후에 무왕으로 불림) 부친인 희창을 문왕으로 추존하였다. 주 무왕 사후 주 성왕이 보위를 이었지만 나이가 어려 숙부인 주공 단이 섭정을 하였다. 주 성왕이 장성하자 주공 단은 정사를 돌려줌으로써 성인의 마지막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주나라는 주 무왕이 천자가 된 후부터 주 난왕이 기원전 256년 제후들과 약속한 뒤 서쪽 진(秦)나라를 쳤으나, 진 소양왕의 역공으로 주황실의 모든 땅을 진 소양왕에 바칠 때까지 37세(世), 750여년 동안 이어졌다. 주대(周代)는 흔히 서주와 동주시대로 구분된다. 주 무왕이 주나라를 세운 이래, 주 유왕이 견융의 침공으로 살해되기 전까지 호경에 도읍을 정하고 250여년간 계속된 시기를 서주시대라 하고(기원전 1027-771), 이후 주 평왕이 동도인 낙읍으로 천도한 후, 진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500여년간을 동주시대라고(기원전 770-256) 칭한다. 춘추시대란 동주시대의 전반기, 그리고 전국시대란 동주시대의 후반기에 해당되지만, 이는 후세의 사가들이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것일 뿐이다.
춘추전국시대의 각 나라는 주왕실에서 임명한 제후국으로 비록 명목상으로는 주왕실에 매여 있기는 했으나, 제각기 서로 다른 정사인 이정을 펼친 까닭에 실제로는 주왕실에 매어 있은 적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들 제후국들의 역사를 주왕실의 역사와 연계시켜 모두 기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춘추시대만을 다룬 [춘추좌전]이나 [국어], 전국시대를 다룬 [전국책]과 같은 역사서가 등장했다. 그러나 증선지는 [십팔사략]에서 이들의 역사를 다룬 [춘추좌전], [국어], [전국책]과 같은 역사서를 18정사에 포함시키지도 않았고, 단지 간략한 역사만을 주나라 아래에 차례로 부기해 놓았다. 이는 주왕실을 정통으로 보는 유가적인 역사관에 따른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노나라의 역사에 등장한 공자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서 치고 왕이 아닌 개인에 대한 분량 할애가 많은 것도 특이한데, 이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秦)나라의 선조는 오제 중 한사람인 전욱의 후예이다. 진 효공 때 구현령을 선포하여 위나라에서 진으로 온 공손앙(상앙)의 도움으로 변법을 시행하여 부국강병의 기초를 닦고, 진 소양왕 대에 이르러서는 주나라를 멸망시킨다. 진은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병탄하면서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까지의 진을 역사서에서는 서진(西秦)이라 부른다. 진시황은 흉노를 토벌한 뒤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분서갱유를 일으키기도 한다. 시황제가 출유 중 사망하자 조고와 이사가 모의해 호해를 후사로 내세우니 바로 진이세이다. 호해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형벌을 혹독하게 하자 민심이 이반되고, 진승과 오광이 기 땅에서 기병하면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유방과 항우도 기병하고 유방이 관중에 선입하여 그곳의 왕이 되자 진왕 자영이 항복을 함으로써 진은 멸망하게 된다. 천하를 병탄하고 황제라 칭한 후 15년만에 진은 패망한 것이다.
항우와 천하를 놓고 겨루던 유방이 마침내 기원전 202년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한고제이다. 한(漢)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한 무제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역사에도 등장한다. 바로 요동 땅에 설치한 한사군이 그것이다. 한 무제는 요동의 한사군 외에도 하서주랑에 하서사군을 설치하고 지금의 베트남 땅에 한구군을 설치하는 등 정복군주로서 영토확장 뿐만 아니라, 유가사상을 유일한 통치이념으로 인정하여 독존유술을 선포하기도 한다. 한 평제에 이르러 왕망이 황제를 독살하 후, 2살인 유영을 황태자로 삼고 자신이 섭정의 신분으로 보위에 올라 가황제라 칭한다. 기원후 9년 왕망은 가황제에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면서 국호를 신(新)으로 바꾼다. 기원후 22년 한나라 종실 유연과 유수가 기병하여 왕망을 몰아내고 24년 유수가 황제에 오르니 한 세조이다. 사서(史書)는 한 세조 이전을 서한(西漢), 그리고 그 이후를 동한(東漢)이라 기록한다. 한 영제에 이르러 장각의 황건적난이 일어났으며, 동탁은 한 소제를 폐하고 한 헌제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하였으니 바로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한나라는 한 고조가 황제가 된 기원전 202년부터 한 헌제에 이르기까지 24세(世)에 걸쳐 426년동안 존속되었다.
진수의 [삼국지]는 증선지가 [십팔사략]을 쓰면서 정한 18정사 목록에 포함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첫 장은 ‘합 한지 오래면 반드시 나뉜다’는 합구필분(合久必分)으로 시작된다. 또한 마지막 장은 ‘나뉜 지 오래면 반드시 합한다’는 분구필합(分久必合)으로 끝난다. 아마 중국역사만의 궤적을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진시황에 의해 합해졌지만 15년 만에 다시 나뉘었고, 서한과 동한의 통일왕조는 400년동안 유지되었지만 동한말기 환관과 외척의 발호, 탐관오리의 탐욕과 전횡에 백성들이 고통받자 다시 합구필분의 시대로 접어든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중국은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황건적의 토벌을 기치로 기병을 한 영웅들이 셋으로 갈린다. 형주에 자리잡고 한중왕을 자칭한 유비, 강동에 웅거하는 손권, 천자인 한 헌제를 끼고 허현에 자리잡은 조조가 그들이다. 삼국이 겨루는 가운데 220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한 헌제로부터 선위 받아 위나라 초대 황제에 즉위한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는 어느 나라를 정통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서술이 달라진다. 한 헌제에게 선위 받은 위를 정통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한중왕을 자처한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볼 것인지가 그것이다. 진수와 증선지는 위를 정통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증선지의 [십팔사략]은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해 제로 칭하고, 유비가 세운 촉한과 손권이 세운 동오를 부수된 기록처럼 처리하고 있다. 위나라 초대 황제인 위 문제, 그리고 조비의 아들인 위 명제가 죽자 권력은 황제가 아닌 사마사에게로 집중된다. 사마사와 그의 동생 사마소는 녹상서사가 되어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한다. 위 원제 때인 263년 촉한의 후주 유선이 항복을 한다. 265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위 원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의 보위에 오른다. 바로 서진(西晉)의 세조 진 무제이다. 진 무제 사마염은 280년 오나라를 쳐서 멸망시키면서 진시황, 한 고제에 이어 세번째로 천하를 통일한다.
전쟁은 언젠가는 끝나며 결국 또 다시 하나로 합해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역사 역시 예전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위,촉,오 삼국은 사마염에 의해 진으로 합해졌다. 한(漢)왕조는 400년이 지난 후 나뉘었지만, 삼국은 나뉜 지 몇 십년만에 바로 합해졌다. 그러나 그 합(合)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진 무제 사후 그의 아들 25명이 서로 죽고 죽이는 골육상쟁이 15년에 걸쳐 일어났다. 이틈을 타 북쪽의 이민족들이 사방에서 흥기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5호16국시대, 즉 남북조시대가 시작된다. 다시 분(分)의 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서진의 마지막 황제는 진 민제이다. 서진(西晉)은 265년 진 무제로부터 시작하여 고작 4세(世) 52년 동안 존속했다. 317년 진 민제가 죽자 낭야왕 사마여가 지금의 남경인 건업에서 진나라를 세웠다. 그가 동진(東晉)의 창업주인 진원제이다.
오호십육국은 흉노, 선비, 저, 갈, 강 등의 이민족이 세운 16개의 국가를 말한다. 전조, 후조, 전진(前秦), 후진(後秦), 전연, 후연 등 이름도 헷갈리는 나라들이 난립하지만 차츰 남북조시대로 접어든다. 증선지는 [십팔사략]에서 이들 오호십육국에 대해 별도로 시대구분을 하지 않고 남북조시대에 포함시켜 서술하고 있다. 남조는 사마씨의 동진(東晉), 유유의 송(宋)나라, 소씨의 제나라(南齊), 다른 소씨의 양(梁)나라, 진시의 진(陳)나라로 이어진다. 북조는 여러 나라가 탁발씨의 북위(北魏)로 통합된 뒤 다시 서위와 동위로 나뉜다. 이후 서위는 북주(北周), 동위는 북제(北齊)로 이어지다 577년 북주가 북제를 병탄한다. [십팔사략]에서는 이 시대에도 남조를 정통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동진을 비롯한 남조의 역사를 앞에 기술하면서 북조의 역사를 병기한다. 동진의 진 공제는 420년 송 무제 유유에게, 송 순제 유순은 479년 제왕 소도성에게, 제 화제는 502년 양왕 소연에게, 그리고 양 경제는 557년 진 무제에게 선위 한다. 250년 넘게 이어지던 분(分)의 시대는 다시 합(合)의 시대로 접어든다. 수나라가 581년 북조의 북주를 병탄하고 589년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하나의 왕조로 통합한 것이다.
이후 수당시대부터 송원에 이르기까지는 [십팔사략 (하)]권에서 다루고 있다. 바로 하권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기 전 역자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많은 동양고전을 역자의 번역으로 읽었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안타깝기만 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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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十八史略)]은 중국 남송 말에서 원나라 초에 걸쳐서 증선지가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다룬 정사 가운데 18종을 선정해 시기별로 중요한 내용을 축약하여 만든 역사서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라 한다면 기전체의 형식으로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편년체로 쓰여진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역사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팔사략(十八史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증선지가 [사기(史記)]가 상고시대의 '오제(五帝)'부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초반기까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후 역사에 대한 부분을 추가하고, 주(周)의 위열왕(威烈王)부터 5대10국(五代十國)을 다루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해서는 축약을 함으로써 우리는 [십팔사략(十八史略)]을 통하여 이 두 역사서를 비롯한 중국의 다양한 역사서의 내용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또한 단순히 기존의 역사서에 대한 축약에 머무르지 않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포함되지 않은 송나라의 역사는 물론 잘 다뤄지지 않는 요(遼 )나라와 금(金)나라 및 원(元)나라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인간사랑의 [십팔사략(十八史略)]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上)권에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상고시대부터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까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 [십팔사략(十八史略)]의 국내 완역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기존의 국내 완역본의 오류에 대한 수정과 더불어 신동준 선생의 보설(補說)을 통하여 축약된 [십팔사략(十八史略)]의 내용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십팔사략(十八史略)]의 방대한 분량 속에서 신동준 선생의 보설(補說)은 역사에 남다른 깊이를 바탕으로 기존에 알려져 있던 사실과는 다른 주장과 더불어 배워야 할 다양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상고시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로부터 시작된다. '천황(天皇)씨, 지황(地皇)씨, 인황(人皇)씨'(또는 복희, 신농, 황제)의 '삼황(三皇)'과 '소호(少昊), 전욱(?頊), 제곡(帝?), 제요(帝堯), 제순(帝舜)'의 '오제(五帝)'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들인데 사실 역사보다는 전설 또는 신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서인 [십팔사략(十八史略)]에 포함되어 있다는 부분은 단순히 허구로만은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신동준 선생도 보설(補說)을 통하여 이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술이부작 [述而不作 : 창작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서술하는 것]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사마천이 '오제(五帝)'를 [사기(史記)]의 본기에 포함한 것에 주목하였다.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은 천지창조와 관련한 반고(盤古)와 여와(女?)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 자체로 간주해 역사 속으로의 편입을 부인하면서도 그와 별반 차이가 없는 오제(五帝) 신화는 역사 속으로 편입시켰다. [사기(史記)]의 맨 첫머리에 [오제본기(五帝本紀)]가 등장하는 이유다. - p. 63 中에서 - 이는 사마천이 신화와 같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오제(五帝)'에 대한 부분은 역사로 보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당나라의 사마정은 그러한 사마천을 비판하면서 [삼황본기(三皇本紀)]라는 책을 통하여 아예 '삼황(三皇)'마저도 역사로 포함시키려 하였다.
신동준 선생은 이 부분을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쓴 김부식과의 비교를 통하여 역사에 대한 범위를 지적한다. 즉, 단군 신화 및 발해사를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역사 서술에서 제외시킨 그의 행적은 그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교범으로 역사서를 서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의 역사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비판한다. 신화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신화와 전설은 나름대로 선사시대 조상들의 사고와 생활양식을 구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수하면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전범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와 발해사 등을 삭제한 김부식의 소행은 사마천이 삼황오제(三皇五帝)와 같은 신화를 왜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 p. 63 中에서 - 즉, 신화와 전설은 문자가 없던 시기에 대한 내용들이 구전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임을 감안하지 않았기에 그로 인하여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뒤쳐질 수 밖에 없음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김부식이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통렬한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비록 실증적인 사관으로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지만, 중국과 일본이 왜 고대 역사서에 전설과 신화를 편입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한 무지는 확실히 아쉬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등장하는 하(夏)왕조와 은(殷)왕조에 대한 부분도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여지가 있다. 사실 이들 나라가 확실한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0년대 중반에 발견된 은허 지방의 유적으로 인하여 기존에는 전설상의 왕조라 여겨졌던 은(殷)이 실제로 존재했음이 밝혀졌기 대문이다. 제순(帝舜)으로부터 천하를 물려받아 우(禹)가 창조한 하(夏) 역시 최근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무렵에 존재한 청동기 문화인 '얼리터우 문화'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은(殷)과 마찬가지로 실존했던 왕조였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만약 김부식의 관점이었다면 하(夏)와 은(殷)은 역사에 편입되지 못했을 것이며 이로 인한 중국 고대사 연구에 더욱 큰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다.[십팔사략(十八史略)]의 하(夏)왕조에 대한 다음의 기록은 아직 '얼리터우 문화'가 정확히 하(夏)의 유적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禹)는 중원에 해당하는 9주 천하를 다스리는 제후들인 구목으로부터 수집한 쇠를 녹여 중국을 상징하는 세발솥인 이른바 9정(九鼎)을 주조했다. 발을 셋으로 한 것은 정직과 강건 및 유순 등 3덕을 상징한 것이다. 상제와 귀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 9정(九鼎)을 사용했다. - p. 46 中에서 -
9정(九鼎)은 하(夏)를 거쳐 은(殷)과 주(周)의 왕실을 상징하는 보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하(夏)가 역사상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춘추시대에는 초(楚)장왕이 주(周)의 사신에게 9정(九鼎)의 무게를 물어보면서 자신이 보유한 병력의 창으로 9정(九鼎)을 대신할 수 있다면서 주(周)왕실을 압박한 기록이 있기에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부분을 볼 때,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축약된 중국의 역사에서 오히려 다양한 의미를 추출하고, 또한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여기에 기록된 역사와는 다른 주장을 다룬 신동준 선생의 추가적인 설명은 역사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를 제공해주고 있다.
일례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이 단기간에 멸망하면서 벌어진 한초쟁패(漢楚爭覇)의 최후의 전장인 '해하(垓下)'에 대한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에서 이 최종 전투 장소인 '해하(垓下)'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정리하여 실제 전장은 '해하(垓下)'와 '고릉(固陵)'의 사이인 '진하(陳下)'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유방이 항우에게 '고릉(固陵)'에서 패배를 하여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한신과 경포, 팽월이 각각 군을 이끌고 삼면에서 공격을 가하여 결국 '진하(陳下)'에서 항우의 군을 대파하였고, 동쪽으로 도주하던 항구가 결국 '해하(垓下)'에서 섬멸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하(陳下)'가 아닌 '해하(垓下)'가 마지막 전장으로 기술된 이유는 유방이 아닌 한신의 공이 더욱 크게 드러나면서 유방은 오히려 구원을 받은 입장이 되기 때문에 '고릉(固陵)'에서 더욱 멀리 떨어진 '해하(垓下)'를 최후의 전장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방은 비록 '고릉(固陵)'에서 항우에게 타격을 받았지만, '진하(陳下)'에서 한신을 비롯한 장수들의 군대를 모아서 '해하(垓下)'로 진격하여 최종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다케의 분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진하(陳下)'와 '해하(垓下)'가 동시에 나타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더욱 타당해 보인다. 아마도 사마천이 '진하(陳下)'로 썼다가 후대에 '해하(垓下)'로 바꾸었을 가능성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세운 한(漢)은 각각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뉘는데, 그 시점은 바로 왕망이 건국한 신(新) 때문이었다. 약 15년 간의 이 시기는 외척이었던 왕망이 다스린 시기인데, 한(漢)에서 다수의 외척들의 발호가 심심찮게 등장한 상황 속에서 나라를 건국한 왕망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는 간략히 소개가 되고 있지만, 역시나 이 책에 수록된 추가적인 설명은 왕망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에 충분해 보인다. 자신의 재산을 기부해 이재민을 위한 주택을 장안에 대거 신축하였으며, 학자들을 위하여 무려 1만여 채의 집을 세우면서 인재를 모아 각종 경전을 부활시켰으며, 죄를 지은 자신의 아들마저 단죄하는 단호한 모습과 더불어 청렴한 생활을 한 왕망은 복고주의를 내세우며 유교 경전을 근거로 개혁 정치를 단행하면서 토지 소유를 제한하여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방지하고 토지가 없는 자에게는 국가가 토지를 지급하였으며, 노비 매매를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그가 신(新)을 건국할 즈음에는 많은 이들의 지지마저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국의 역사서에서 신(新)은 하나의 왕조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일까?
신동준 선생은 이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왕망은 기득권 세력을 자극하기만 했을 뿐 그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둘째, 왕망은 정책 수단인 공권력이나 물질적 자원 등을 확보하지 못했다. 셋째, 왕망은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 넷째, 왕망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정책을 단순하게 꾸리지 못했다. - p. 439 中에서 - 이러한 이유를 들어 선생은 왕망이 황제를 넘어서 '성군'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는 기존의 역사서에서 왕망을 반역자 내지는 패배자로만 보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관점이다. 그러나, 앞서 그가 신(新)을 건국할 즈음의 다양한 정책들은 확실히 이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재화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즉, 그가 추구한 이상은 현실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신동준 선생의 평가는 적절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 역사서의 축약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위(魏), 진(晉) 이후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북조가 더욱 강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그대로 반영하여 동진을 비롯한 남조(南朝)의 역사를 앞에 세워 기술하면서 그 사이에 북조(北朝)의 역사를 부기하는 방식을 취했다. 심지어 증선지가 위(魏)를 정통론에 입각하여 서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유염이 촉한(蜀漢)을 정통왕조로 보면서 새로이 편집한 부분은 중국 역사의 대부분이 한족 중심으로 쓰여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보면 증선지가 단순히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요약하여 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유염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그가 유교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지 않았다는 점과 더불어 다양한 역사서의 내용을 시대별로 적절히 배치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이해가 깊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下)권에서 등장하는 요(遼 )와 금(金), 원(元)나라와 같은 이민족의 역사는 기존의 한족 중심의 역사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이기에 [십팔사략(十八史略)]이 단순히 역사에 대한 요약에 그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역자 신동준 선생은 지난 4월 25일 별세하였다. 돌이켜보면 동양 인문 고전 분야에서 선생의 손을 거치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기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단순히 번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수정하면서 자신만의 해석과 주장을 통하여 고전을 통한 지혜와 배움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책으로나마 그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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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상 증선지/신동준 인간사랑/2019.4.30.
'십팔사략'상권에서는 하, 은, 주, 진한 및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정밀하게 추적하며 효과적으로 축약해 놓았다. 핵심적인 사실을 전후 맥락의 연관 속에 기술해 놓은 것이다. '십팔사략'을 통해 수천 년에 달하는 중국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기에 미중 무역전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엄중한 상황을 인식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얻을 것으로 본다고 역자는 말한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분단체제 유지를 바란다. ‘순망치한’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중국을 깊이 이해하여 한국 주도의 한반도통일을 전제로 한 ‘동북아시대’ 개막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널리 활용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역자는 강조한다.
“역대 통사 가운데 '십팔사략'처럼 간략하면서도 핵심 사실을 두루 언급한 통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청나라 때 나온 필원의 '속자치통감'내용까지 거의 모두 담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지치통감'보다 뛰어난 바가 있다.(p.26)” '십팔사략'>의 명칭은 기본적으로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다룬 정사 가운데 18종의 정사를 선정해 시기별로 요점이 되는 내용을 축약해 만들어냈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삼황오제의 전설시대에서 시작해 남송이 패망하는 시기까지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상권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영웅호걸은 물론 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을 비롯해 초한지의 주인공인 항우와 유방, 삼국지 영웅인 조조와 유비 및 손권 등을 다루고 있다. 역사무대에 등장한 무수한 영웅호걸과 제자가인들의 지략과 대응, 행보 등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치세와 난세의 차이에 따른 임기응변의 리더십을 터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변화무쌍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원래 선사시대는 문자가 발명되어 인류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하는 역사 이전의 시대를 뜻한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주로 신석기시대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역사시대는 인류의 삶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된 이후의 시대를 말한다.(p.51)” 서양은 신화와 전설이 엄밀히 구분되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그 경계가 애매하다. 중국의 신화는 형식상으로만 신화일 뿐이지 사실 전설에 가깝다. 중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천지창조 신화를 갖고 있다. 당나라 때의 사마정은 사마천이 ‘삼황’ 신화를 역사로 간주하지 않은데 크게 반발해 스스로 <삼황본기>를 지어냈다. '삼황본기'의 출현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삼황’과 ‘오제’ 신화를 모두 역사로 간주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반고 및 여와는 황당한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된데 반해 삼황과 오제는 당당한 역사속의 실존인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해 국가 차원의 개입을 통해 삼황오제를 실존 인물로 격상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 맨 앞에 '오제본기'편을 두고 황제를 역사상 실존 인물로 단정해 놓은데 반해 고려조 김부식은 '사기'를 흉내 내 펴낸 '삼국사기'에서 단군을 누락시켰다. 신화로 간주한 탓이다. 중국이 신화를 역사 속으로 편입하는 작업을 21세기까지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p.57)” 중국은 지난 1992년 한국과 수교하는 동시에 치우를 중화민족 3명의 조상 가운데 하나로 끌어안았다.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한국을 의식했다는 지적도 있다. 일설에 따르면 서울 뚝섬의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뚝섬의 치우사당에 치우와 황제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벌인 ‘탁록대전’을 그린 대형 휘장이 걸려 있었으나 일제 말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 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이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처럼 위서로 치부되는 책에만 나올 뿐이다. 왜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보완할 수 있는 책은 위서로 취급해야 하는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한국 학계는 실증적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치우를 중국 고대 신화의 인물로 보고 있다. 이는 치우를 황제와 함께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격상시킨 중국의 움직임과 대비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의 신화적 인물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한 일본사 정립과도 대비된다. 우리의 사학자들은 자기의 조상들도 묘를 잃어버린 선대는 모두 실증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이 전설은 황하 상류인 위수 일대에 거주하던 황제족이 인근의 염제족을 제압해 동맹을 결성한 뒤 동쪽으로 진출해 황하 중하류에 널리 퍼져 있던 동이족을 제압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치우는 동이족을 대표하는 구려의 추장에 해당한다.(p.61)” 하북 탁록현에 서 있는 귀근원과 중화삼조당에는 6미터 가까운 황제와 치우, 염제의 거대한 좌상이 나란히 안치돼 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오직 황제만을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간주한 것과 대비된다. 오랑캐의 시조로 치부되던 치우와 염제가 왜 문득 황제와 함께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이 된 것일까? 우리의 사학계는 단군을 신화로 만들고 어떻게 5,000년 역사를 주장하는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내용으로 5,000년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데도 시도조차 금기시하는 그들의 정체가 의심되는 때가 많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민족의 이동은 빈번히 일어났는데도 우리의 조상은 한반도 에서만 계속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 과연 과학적인 사관인지 묻고 싶어진다.
“주나라 주평왕의 동천 이후 춘추 시대로 접어들었다. 당시 이름을 떨친 12제후 가운데 제환공(齊桓公)을 비롯해 송양공(宋襄公), 진문공(晉文公), 진목공(秦穆公) 초장왕(楚莊王) 등이 이른바 오패로서 사적을 남겼다.(p.90)” 주위열왕(周威烈王) 이후에 전국시대가 시작됐다. 이 때는 秦나라, 楚나라,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魏나라, 韓나라 등 모두 7대국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진나라와 초나라 및 연나라는 춘추시대부터 지속된 오래된 대국에 속한다. 전씨가 찬탈한 전국시대의 제나라인 전제(田齊)와 趙나라, 魏나라, 韓나라는 전국시대에 들어와 새로이 등장한 대국에 해당한다. '춘추'의 핵심은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에 있다. 왕실을 보위하고 외적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당시 이를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 바로 제나라의 군주인 제환공과 그의 참모인 관중이었다.
“아무리 참모의 계책이 뛰어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실행하는 당사자는 주군이다. 유방의 뛰어난 면모가 여기에 있다. 참모가 건의한 계책이 쓸 만하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받아 들여 실행하는 게 그렇다. 특히 ‘대회계’의 경우는 건달 출신인 유방의 용인술을 최대한 활용한 계책 이라는 점에서 천고에 남을 만한 묘계에 해당한다.(p.314)” 장량이 유방의 책사로 활약하면서 가장 빛을 발한 대목이 바로 ‘초한지제’가 마무리될 무렵 유방에게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한 ‘대회계’를 건의한 대목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당시의 정황에 비춰볼 때 ‘대회계’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던 까닭에 유방의 입장에서 볼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방은 선뜻 이를 받아들였다. 비록 ‘대회계’의 계책은 장량이 냈지만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유방의 기민한 대응과 통 큰 결단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중국 최초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건원’은 기원을 세우다라는 뜻이다. 그는 이후 정복한 국가들에 대해 단일 연호를 강요했다. 중국 중심의 단일 문화권을 형성코자 한 것이다.(.369)” 이 때 동중서가 나타나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역설하게 됐다. 유가를 제외한 모든 제자백가의 학문을 내쫓고, 오직 유가의 학술만 존숭한다는 뜻이다. 한경제의 열한 번째 아들인 유철이 유가 사상을 추종하며 한무제로 즉위한 덕분이다. 그가 등용한 대신들은 경전에 박식하고 문학에 뛰어난 사람들이다. 중국 역사상 문장가를 대신으로 기용한 최초의 황제가 한무제였다.
“동양의 로마제국이라 불리는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는 존속기간 15년의 신(新)나라가 있다. 신나라는 국가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왕망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인 탓이다.(p.437)” 그의 치세 때 법령은 ‘조령모개’라고 할 만큼 수시로 변했다. 법령을 강제하기 위한 엄벌은 민심이반을 부추겼다. 이웃나라를 터무니 없이 깎아내리는 바람에 흉노와 고구려 등 주변국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안팎으로 고립을 자초한 셈이다. 그의 죽음으로 신(新)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다.
조조가 보여준 난세 리더십의 핵심은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을 섞어 사용하는 이른바 기정병용(奇正竝用)의 용인술이다. 난세의 시기에 조조 및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한 유비는 객관적으로 볼 때 크게 내세울 게 없었으나 그에게도 남다른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재를 알아보고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능력은 제갈량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그가 천하의 쟁쟁한 호걸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근본 이유이다. 손권이 강동 일대를 장악해 삼국정립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부형인 손견과 손책 덕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강동을 기반으로 터를 닦았다. 조조보다도 훨씬 빨랐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이들이 오랫동안 살았다면 손권은 아예 ‘삼국정립’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p.576)
한고조 유방 원년의 을미년인 기원전 196년부터 따지면 촉한의 후주 유선의 염흥 원년인 계미년의 264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26제 총 469년 만에 패망한 셈이다(p.599). 조씨 위나라는 황제를 칭한 위문제 조비로부터 위원제 조환에 이르기까지 모두 5세46년 만에 패망했다 (p.600). 동오(東吳)는 대제 손권으로부터 시작해 모두 4세에 걸쳐 칭제한 이후 총 52년 동안 존속하다가 패망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총 80여 년에 달한다 (p.606).
서진은 진무제 태강 원년인 280년에 이르러 마침내 동오를 멸망시키고 진시황과 한고제 유방에 이어 사상 3번째로 천하를 통일했다. 서진은 사마염부터 시작해 모두 4세 52년 동안 존속했다. 진민제 사마업이 해를 입은 즉시 낭야왕 사마예가 지금의 남경시인 건강에서 진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가 바로 동진의 창업주인 진중종 진원제이다(p.629). 남조 제나라는 제고제로부터 제화제 소보융에 이르기까지 모두 7세, 23년 동안 존속하다가 패망했다(p.714). 양나라는 양고조 양무제 소연으로부터 시작해 이때에 이르기까지 4세에 걸쳐 모두 56년간 존속하다 패망했다(p.729). 남조 진(陳)나라는 진고조인 진무제 진패선이 칭제한 이래 모두 5세, 22년간 존속하다가 패망했다(p.740).
저자 증선지는 송말 원초의 학자다. 자는 종야, 남송 말기 도종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지방 관리와 법관을 역임했다. 송 멸망 후 원나라에 출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칩거한 채 '십팔사략'을 펴냈다. 생전에 스스로 ‘전진사(前進士)’라 칭했다. '십팔사략'이 송나라 때까지 역사를 다뤘다는 취지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92세에 생을 마쳤다. 역저자 신동준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 연구가이자 평론가다. 1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책은 출간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많은 독자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줬다. 역서로 '삼국지 통치학', '조엽의 오월춘추', '전국책',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공자의 군자학', '맹자론', '순자론', '노자론',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등 10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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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상 증선지/신동준 인간사랑/2019.4.30. sanbarm
<십팔사략>상권에서는 하, 은, 주, 진한 및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정밀하게 추적하며 효과적으로 축약해 놓았다. 핵심적인 사실을 전후 맥락의 연관 속에 기술해 놓은 것이다. <십팔사략>을 통해 수천 년에 달하는 중국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기에 미중 무역전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엄중한 상황을 인식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얻을 것으로 본다고 역자는 말한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분단체제 유지를 바란다. ‘순망치한’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중국을 깊이 이해하여 한국 주도의 한반도통일을 전제로 한 ‘동북아시대’ 개막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널리 활용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역자는 강조한다.
“역대 통사 가운데 <십팔사략>처럼 간략하면서도 핵심 사실을 두루 언급한 통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청나라 때 나온 필원의 <속자치통감>내용까지 거의 모두 담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지치통감>보다 뛰어난 바가 있다.(p.26)” <십팔사략>의 명칭은 기본적으로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다룬 정사 가운데 18종의 정사를 선정해 시기별로 요점이 되는 내용을 축약해 만들어냈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삼황오제의 전설시대에서 시작해 남송이 패망하는 시기까지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상권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영웅호걸은 물론 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을 비롯해 초한지의 주인공인 항우와 유방, 삼국지 영웅인 조조와 유비 및 손권 등을 다루고 있다. 역사무대에 등장한 무수한 영웅호걸과 제자가인들의 지략과 대응, 행보 등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치세와 난세의 차이에 따른 임기응변의 리더십을 터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변화무쌍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원래 선사시대는 문자가 발명되어 인류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하는 역사 이전의 시대를 뜻한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주로 신석기시대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역사시대는 인류의 삶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된 이후의 시대를 말한다.(p.51)” 서양은 신화와 전설이 엄밀히 구분되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그 경계가 애매하다. 중국의 신화는 형식상으로만 신화일 뿐이지 사실 전설에 가깝다. 중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천지창조 신화를 갖고 있다. 당나라 때의 사마정은 사마천이 ‘삼황’ 신화를 역사로 간주하지 않은데 크게 반발해 스스로 <삼황본기>를 지어냈다. <삼황본기>의 출현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삼황’과 ‘오제’ 신화를 모두 역사로 간주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반고 및 여와는 황당한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된데 반해 삼황과 오제는 당당한 역사속의 실존인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해 국가 차원의 개입을 통해 삼황오제를 실존 인물로 격상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 맨 앞에 <오제본기>편을 두고 황제를 역사상 실존 인물로 단정해 놓은데 반해 고려조 김부식은 <사기>를 흉내 내 펴낸 <삼국사기>에서 단군을 누락시켰다. 신화로 간주한 탓이다. 중국이 신화를 역사 속으로 편입하는 작업을 21세기까지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p.57)” 중국은 지난 1992년 한국과 수교하는 동시에 치우를 중화민족 3명의 조상 가운데 하나로 끌어안았다.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한국을 의식했다는 지적도 있다. 일설에 따르면 서울 뚝섬의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뚝섬의 치우사당에 치우와 황제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벌인 ‘탁록대전’을 그린 대형 휘장이 걸려 있었으나 일제 말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 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이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처럼 위서로 치부되는 책에만 나올 뿐이다. 왜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보완할 수 있는 책은 위서로 취급해야 하는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한국 학계는 실증적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치우를 중국 고대 신화의 인물로 보고 있다. 이는 치우를 황제와 함께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격상시킨 중국의 움직임과 대비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의 신화적 인물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한 일본사 정립과도 대비된다. 우리의 사학자들은 자기의 조상들도 묘를 잃어버린 선대는 모두 실증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이 전설은 황하 상류인 위수 일대에 거주하던 황제족이 인근의 염제족을 제압해 동맹을 결성한 뒤 동쪽으로 진출해 황하 중하류에 널리 퍼져 있던 동이족을 제압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치우는 동이족을 대표하는 구려의 추장에 해당한다.(p.61)” 하북 탁록현에 서 있는 귀근원과 중화삼조당에는 6미터 가까운 황제와 치우, 염제의 거대한 좌상이 나란히 안치돼 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오직 황제만을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간주한 것과 대비된다. 오랑캐의 시조로 치부되던 치우와 염제가 왜 문득 황제와 함께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이 된 것일까? 우리의 사학계는 단군을 신화로 만들고 어떻게 5,000년 역사를 주장하는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내용으로 5,000년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데도 시도조차 금기시하는 그들의 정체가 의심되는 때가 많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민족의 이동은 빈번히 일어났는데도 우리의 조상은 한반도 에서만 계속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 과연 과학적인 사관인지 묻고 싶어진다.
“주나라 주평왕의 동천 이후 춘추 시대로 접어들었다. 당시 이름을 떨친 12제후 가운데 제환공(齊桓公)을 비롯해 송양공(宋襄公), 진문공(晉文公), 진목공(秦穆公) 초장왕(楚莊王) 등이 이른바 오패로서 사적을 남겼다.(p.90)” 주위열왕(周威烈王) 이후에 전국시대가 시작됐다. 이 때는 秦나라, 楚나라,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魏나라, 韓나라 등 모두 7대국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진나라와 초나라 및 연나라는 춘추시대부터 지속된 오래된 대국에 속한다. 전씨가 찬탈한 전국시대의 제나라인 전제(田齊)와 趙나라, 魏나라, 韓나라는 전국시대에 들어와 새로이 등장한 대국에 해당한다. <춘추>의 핵심은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에 있다. 왕실을 보위하고 외적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당시 이를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 바로 제나라의 군주인 제환공과 그의 참모인 관중이었다.
“아무리 참모의 계책이 뛰어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실행하는 당사자는 주군이다. 유방의 뛰어난 면모가 여기에 있다. 참모가 건의한 계책이 쓸 만하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받아 들여 실행하는 게 그렇다. 특히 ‘대회계’의 경우는 건달 출신인 유방의 용인술을 최대한 활용한 계책 이라는 점에서 천고에 남을 만한 묘계에 해당한다.(p.314)” 장량이 유방의 책사로 활약하면서 가장 빛을 발한 대목이 바로 ‘초한지제’가 마무리될 무렵 유방에게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한 ‘대회계’를 건의한 대목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당시의 정황에 비춰볼 때 ‘대회계’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던 까닭에 유방의 입장에서 볼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방은 선뜻 이를 받아들였다. 비록 ‘대회계’의 계책은 장량이 냈지만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유방의 기민한 대응과 통 큰 결단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중국 최초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건원’은 기원을 세우다라는 뜻이다. 그는 이후 정복한 국가들에 대해 단일 연호를 강요했다. 중국 중심의 단일 문화권을 형성코자 한 것이다.(.369)” 이 때 동중서가 나타나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역설하게 됐다. 유가를 제외한 모든 제자백가의 학문을 내쫓고, 오직 유가의 학술만 존숭한다는 뜻이다. 한경제의 열한 번째 아들인 유철이 유가 사상을 추종하며 한무제로 즉위한 덕분이다. 그가 등용한 대신들은 경전에 박식하고 문학에 뛰어난 사람들이다. 중국 역사상 문장가를 대신으로 기용한 최초의 황제가 한무제였다.
“동양의 로마제국이라 불리는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는 존속기간 15년의 신(新)나라가 있다. 신나라는 국가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왕망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인 탓이다.(p.437)” 그의 치세 때 법령은 ‘조령모개’라고 할 만큼 수시로 변했다. 법령을 강제하기 위한 엄벌은 민심이반을 부추겼다. 이웃나라를 터무니 없이 깎아내리는 바람에 흉노와 고구려 등 주변국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안팎으로 고립을 자초한 셈이다. 그의 죽음으로 신(新)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다.
조조가 보여준 난세 리더십의 핵심은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을 섞어 사용하는 이른바 기정병용(奇正竝用)의 용인술이다. 난세의 시기에 조조 및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한 유비는 객관적으로 볼 때 크게 내세울 게 없었으나 그에게도 남다른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재를 알아보고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능력은 제갈량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그가 천하의 쟁쟁한 호걸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근본 이유이다. 손권이 강동 일대를 장악해 삼국정립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부형인 손견과 손책 덕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강동을 기반으로 터를 닦았다. 조조보다도 훨씬 빨랐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이들이 오랫동안 살았다면 손권은 아예 ‘삼국정립’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p.576)
한고조 유방 원년의 을미년인 기원전 196년부터 따지면 촉한의 후주 유선의 염흥 원년인 계미년의 264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26제 총 469년 만에 패망한 셈이다(p.599). 조씨 위나라는 황제를 칭한 위문제 조비로부터 위원제 조환에 이르기까지 모두 5세46년 만에 패망했다 (p.600). 동오(東吳)는 대제 손권으로부터 시작해 모두 4세에 걸쳐 칭제한 이후 총 52년 동안 존속하다가 패망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총 80여 년에 달한다 (p.606).
서진은 진무제 태강 원년인 280년에 이르러 마침내 동오를 멸망시키고 진시황과 한고제 유방에 이어 사상 3번째로 천하를 통일했다. 서진은 사마염부터 시작해 모두 4세 52년 동안 존속했다. 진민제 사마업이 해를 입은 즉시 낭야왕 사마예가 지금의 남경시인 건강에서 진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가 바로 동진의 창업주인 진중종 진원제이다(p.629). 남조 제나라는 제고제로부터 제화제 소보융에 이르기까지 모두 7세, 23년 동안 존속하다가 패망했다(p.714). 양나라는 양고조 양무제 소연으로부터 시작해 이때에 이르기까지 4세에 걸쳐 모두 56년간 존속하다 패망했다(p.729). 남조 진(陳)나라는 진고조인 진무제 진패선이 칭제한 이래 모두 5세, 22년간 존속하다가 패망했다(p.740).
저자 증선지는 송말 원초의 학자다. 자는 종야, 남송 말기 도종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지방 관리와 법관을 역임했다. 송 멸망 후 원나라에 출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칩거한 채 <십팔사략>을 펴냈다. 생전에 스스로 ‘전진사(前進士)’라 칭했다. <십팔사략>이 송나라 때까지 역사를 다뤘다는 취지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92세에 생을 마쳤다. 역저자 신동준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 연구가이자 평론가다. 1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책은 출간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많은 독자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줬다. 역서로 <삼국지 통치학>, <조엽의 오월춘추>, <전국책>,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공자의 군자학>, <맹자론>, <순자론>, <노자론>,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등 100여 권이 있다.
(이 리뷰는 예스24를 통해 인간사랑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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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한 시대로 접어들며 대부분의 신화가 사서와 경전 안에 역사적 사실로 삽입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삼황오제와 하나라의 우(禹)이다. 덕분에 이들은 이제 신화 및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탈바꿈했다. 경전과 사서에 편입되지 못한 신화의 주인공들은 이단적인 허구로 간주되어 가차없이 폐기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신화서인 <산해경>이 수천 년 동안 이단의 기서 내지 신빙성이 없는 조잡한지지(地誌)정도로 밖에 취급받지 못한 이유가 바로여기에 있다. 이는 중국문명이 조기에 고도의 농경문화를 완성함에 따라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무신론의 세계로 진입한 사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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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역자 저자는 송말원초의 학자 증선지다. 그는 강직하며 기개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남송 말기에 지방관리와 법관을 역임하면서 직무를 이행했고, 송이 멸망 후 원의 치국의 특징인 현지인을 이용해 그들을 다스리는 정책에 그도 출사할 것을 부탁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진사>란 이름으로 자신을 칭하면서 출사를 거부하고 칩거 생활을 했다. 그 칩거 생활 중에 심혈을 기울여 십팔사략을 썼다. 그래서 십팔사략에서는 중국 역사가 송나라까지 담겨져 있다. 저자는 92세에 삶을 마감했다고 전해져 온다.
역자는 신동준 선생이다. 이 서평에 이렇게 역자를 기록해 보는 일은 책이 만들어 지는 과정 속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편집 중, 출판사인 인간사랑에서 저자와 의논할 사항이 있어 집에 연락했을 때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알게 되었다. 과로라는 말을 출판사는 해주고 있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자는 박학다식하여 중국 역사와 관련한 많은 저서와 역서를 남겼다. 내가 읽은 것만 해도 10여 권은 족히 넘을 듯하다. <삼국의 통치학> <조조 통치론> <중국 문명의 기원> <공자의 군자학> <후흑학> <장자> <한비자> <풍몽룡의 동주 열국지> <춘추좌전> <시경> <서경> <제갈량 문집> 등 숱한 작품들이 있다. 선생의 가시는 길이 평탄했으면 한다.
표현 미중 무역전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한반도가 엄중한 현실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데 중국을 제대로 아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생각에 십팔사략을 번역할 결심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번역한 십팔사략에 잘못된 번역이 많이 보이기에 그것을 고쳐 바르게 하고, 현실 속에서 체스판 위의 말이 되어버린 한반도를 조금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나갈 것을 소망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역자는 전한다. 지피지기면 모든 일들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중국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은 현실 속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중국과의 관계를 이루어나가는데도 소중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책은 원문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번역을 하여 들려주고,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다. 요긴한 부분은 각주를 달아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번역은 직역을 중심으로 했다고 말한다.
내용 삼황오제의 전설 시대부터 얘기를 하고 있다. 요순시대의 태평성태를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은주의 역사 시대를 말한다. 은왕 성탕의 치국과 주에게 바쳐진 유소씨의 달기라는 미녀 때문에 나라를 망친 왕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주 무왕 희발에 의해 나라가 망할 때까지 629년이어 져온 은나라다. 주는 서주와 동주로 갈린다. 이 시대는 지방분권형을 선택했기에 왕족들에게 나라를 떼어 줘 다스리게 했다. 그것이 결국 춘추전국시대를 부르는 요인이 되었다. 춘추시대는 주 평왕의 동천 이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간다. 주 왕실의 힘이 미약해 지고 제후국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5 패자 국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진초연제한위조란 7개국이 전하쟁탈을 하는 전국시대에 들어선다. 책의 분량만큼 비교적 자세하게 내용들이 제시해 주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열국지나 초한지 등을 통해 많이 읽혀진 내용이다. 소설화된 책들이 되어 역사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들은 이들을 통해서도 재미있게 만나볼 수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나누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이곳에서는 시대의 흐름만 살펴볼 뿐이지 자세한 내용까지 언급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분량이 많은 만큼 내용도 충실하다. 번호를 붙여 가면서 항목별로 내용을 풀어준다. 이해하기가 쉽게 이끌어 나간다. 또한 국가별로 제시해 한 부분만 생각하면서 읽어나갈 수도 있게 했다. 보통의 춘추 전국지나 열국지 등을 보면 내용들이 서로 얽혀 그려나가기에 읽기가 힘 드는 면이 있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나라별로 제시되어 읽기가 좋다. 비교적 단순 명확하게 나라를 표현한다는 말이다.
시황제의 천하통일과 항우와 유방의 초한쟁패 등이 표현된다. 이야기가 흥미롭게 진행된다. 하지만 초한지처럼 장대하게 이야길 전개해 나가진 않는다. 사실만 제공해 주고 다음의 한나라로 넘어간다. 한고조 유방이 처음으로 관중에 들어갔지만, 결국 항우의 힘에 밀려 한중으로 쫓겨 가서 한중 왕이 된다. 이 유방을 막기 위해 항우는 관중에 삼진을 설치하고 나라를 경영해 나간다. 하지만 결국 이 삼진이 유방의 길을 막지 못하고 해하에서 항우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의 시대가 열린다. 이 천하쟁패에 장량, 한신, 소하 등이 많은 역할을 감당한다.
한고후는 유방의 정실부인 여희다. 유방이 죽은 후 여희의 힘은 지대했다. 그 힘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측실부인을 금수로 만들어 고통을 주었다든지, 왕을 바꾸는 이야기, 여씨의 천하를 꾀한 일 등 많은 내용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희의 죽음 후 이런 모든 것들이 평정되면서 유씨 천하가 지속되어 간다.
이것은 한고후의 힘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처럼 책은 이야기를 기록 위주로 표현해 나가고 사실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표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혜제는 유방과 한고후의 아들로 한의 2대 왕이다. 왕이 된 지 7 년 만에 붕어한다.
이를 이어 한문제, 한경제, 한무제 등으로 이어진다. 한무제 때에는 흉노와 관련해서 많은 일이 진행된다. 이 때 이광리, 위청 등이 활약을 하고 조선엔 한사군이 설치되기도 한다. 한무제는 법률과 제도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 제위 54년간이나 이어간다. 한무제가 다스리는 동안 영토확장 정책은 성공을 거둬 서역까지 교통로가 열렸다. 고대 중국이 가장 멀리까지 영향을 끼진 때라 할 수 있겠다. 한소제, 한선제 한원제 한성제 한애제 한평제 등이 등장한다.
한평제가 어려서 즉위하자 임조청제가 행해진다. 그러면서 왕망이 정사를 총괄했다. 나중 왕망은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는다. 한평제가 제위한 지 6년만에 승하하고 나이가 2세인 유영이 왕에 오르면서 왕망이 섭정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높여 가황제, 섭황제란 호칭을 사용한다. 이런 왕망의 기세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승리하지 못한다. 이것은 왕망이 스스로 황제에 오르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어린 유영을 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왕망는 마침내 스스로 황제가 된다. 국호를 한에서 신으로 바꾼다.
왕망이 나라를 열었을 때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 중 종실로 유연과 유수가 용릉에서 일어나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회양왕 유연을 황제로 삼아 왕망의 신에 대항한다. 결국 유수를 중심으로 왕망의 군사를 무찌르고 한의 나라를 회복한다. 왕망의 신은 15 년만에 망한다. 유수는 왕위에 올라 광무제가 된다. 후한의 실질적으로 강건한 토대 위에 세운 인물이다.
후한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면서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등이 일어난다. 한영제가 죽고 한헌제가 동탁에 의해 옹립되어 황제가 된다. 이에 관동의 영웅들이 원소를 맹주로 삼아 동탁 토벌의 기치를 세운다. 그러면서 3국이 정립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유비의 촉, 손권의 오, 조조의 위 등으로 3국이 나뉘는 시대가 형성된다. 이 시기는 영웅호걸들의 경연장으로 삼국지를 통해 자세하게 이야기 되고 있다. 제갈공명, 관우, 조자룡 등은 후세에도 기리는 인물이 되어 있다. 이 세 나라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사마의라는 인물이 등장함으로 정리되어 간다. 삼국은 위를 중심으로, 위를 이어받은 진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간다.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 때에 위를 무너뜨리고 진을 건국한다. 그리고 촉, 오를 병합하여 통일 왕국으로 간다. 통일한 지 10년 후 사마염이 붕어한다. 이후 북쪽에서 많은 세력들이 밀려들고 진은 동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남북조 시대가 열린다. 이 남북조 시대는 왕조도 많이 바뀌지만, 자체적으로도 갈등이 심했던 때다. 그래서 중국 역사 속에서 소재를 선택한 이야기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 많은 왕족과 쉽게 몰락하는 귀한 신분 등이 어울려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기 때문인 듯하다.
오호십육국이 일어나 패권쟁탈전을 벌이는 일은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일시적인 우위를 점하는 일은 있어도 확고부동하게 세력을 떨치는 나라는 없다. 서로 이권쟁탈을 벌이는 전국시대와 많이 닮아 있는 시대다 각자의 몫으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려는 노력이 가상하게 여겨지는 시대다. 이 시대 중 후연과 북위 등은 서사 극중에 많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이들이 결국 수라는 나라로 통일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는 하권에 제시될 듯하다. 상권은 오호십육국까지 그 상황을 제시해 주고 있다.
생각 역사가 소상하게 읽혀진다. 합쳤다가 분리되고 분리되었다가 또 합쳐지는 중국의 역사,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눈물겹게 느껴진다. 기득권자들의 이권 다툼에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자들이다. 힘없는 자들이 양산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그것은 지난한 아픔이 된다. 또 힘 있는 자들로 변화하는 인물들의 갈등과 삶도 그려진다. 우리가 자신의 나라를 못 지킬 때, 그 나라의 백성들이 얼마나 곤궁함에 처하게 되는가를 여실히 읽을 수가 있는 책이다. 당장 우리 일본제국주의 시대만 해도 우리 민족의 아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지 않았는가? 중국의 역사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들의 이권쟁탈에 곤궁함을 당하는 일반, 힘없는 사람들의 애환이 가슴 아프게 느껴져 온다. 이제 이런 역사를 거울삼아 위정자들이 진정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깨달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이 책을 번역한 분의 그런 마음이 느껴져 온다. 하권에서 조금 더 얘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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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난 1992년 한국과 수교하는 동시에 치우를 중화민족 3명의 조상 가운데 하나로 끌어안았다.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한국을 의식했다는 지적도 있다. 일설에 따르면 서울 뚝섬의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뚝섬의 치우사당에 치우와 황제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벌인 ’탁록대전‘을 그린 대형 휘장이 걸려 있었으나 일제 말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 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이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처럼 위서로 치부되는 책에만 나올 뿐이다. 한국 학계는 실증적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치우를 중국 고대 신화의 인물로 보고 있다. p.57 이는 치우를 황제와 함께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격상시킨 중국의 움직임과 대비된다. 하북 탁록현에 서 있는 귀근원과 중화삼조당이 그 실례다. 여기에는 6미터 가까운 황제와 치우, 염제의 거대한 좌상이 나란히 안치돼 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오직 황제만을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간주한 것과 대비된다. 오랑캐의 시조로 치부되던 치우와 염제가 왜 문득 황제와 함께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이 된 것일까 p.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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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풍의 훈훈함이여 백성 노여움 풀어주네 남풍의 때맞춤이여 백성 제물 쌓게 해주네 - P.42
1. 중국에는 평화로운 떄가 있었을까? 아마도 있었겠지.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 지금도 중국은 건재하겠지. 하지만, 역사 속에서 중국은 언제나 치열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재물을 쌓는 자는 존재했으니, 중국의 역사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십팔사략은 중국의 역사를 단 두권으로 집대성해 놓은 책이다. 두권이라 하지만, (상)(하)편으로 나뉜 것으로 봐서 원칙적으로는 한권이라 할 수 있다. (상)편이 700페이지가 넘는다. 그런데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이 중에 반은 한문원문 표기이므로 실제적으로 읽을 분량은 300여페이지가 조금 넘는다고 할 수 있겠다. 중국역사를 전공하거나 한문을 전공하지 않는 분들은 굳이 한문까지 볼 이유는 없겠다 싶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반인들보다는 전공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이 아니기에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다. 광대한 역사의 페이지를 축약해 놓은 형태기 때문에 친절한 설명이나 재미 위주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역사를 나열해 놓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를 건조하게 나열한 다른 책들과 달라 나름 어느 정도의 나래이션 형태를 취함으로서 지루하지 않게 늘어놓아서 가독성이 안 좋은 편은 아니다.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에선 재미 있게 서술해 놓았기에 읽는 재미도 준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이 책 전체를 읽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으나 부분부분 발췌해가면서 읽는다면 십팔사략을 읽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신통한 다이어리가 꽂힌 것처럼 말이다.
상편에서는 진시황, 유방과 항우, 제갈량과 사마의에 대한 내용도 같이 볼 수 있다.. 역사를 집대성해 놓은 책이라, 중국역사를 소설로 읽었던 내용을 축약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제갈량과 사마의에 대한 구체적 대결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부분이다.
2. 유비는 자신의 부인이 적군에게 끌려갔다는 말을 듣고도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또 조조에서 패해 관우와 장비와 헤어지고 처자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상황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조조와 손권 등이 유비를 두고 '천하의 효웅'으로 칭한데서 알 수 있듯이, 눈물을 흘리는 것 자체가 그의 본래 모습과 동떨어진 것이다. 오히려 풍부한 시정을 갖고 있던 조조가 자주 눈물을 보였을 공산이 크다. 난세의 시기에 조조 및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한 유비는 객관적으로 볼 때 크게 내세울 게 없었으나 그에게는 남다른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재를 알아보고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능력은 제갈량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그가 천하의 쟁쟁한 호걸들과 자웅을 겨를 수 있었던 근본 이유이다. - P.574
중국과의 대립과 친선. 롤러코스터를 오가듯 우리나라의 정세는 시시각각 변한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를 중국의 역사를 보다 면밀히 들여다봄으로서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재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아무런 장점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찌 않을까 한번 생각해 보며, 상권의 리뷰를 마친다.
나 이거 다 읽었냐고? 읽었다. 다만, 속독과 정독의 적절한 조화가 있었으니 참고하시라...키키킥...
- 이 리뷰는 인간사랑으로부터 증정받은 도서로 작성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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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군출신 유비는 자가 현덕이다. 그의 조상은 한경제 유계에서 갈려 나왔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동생인 손권과 함께 부춘에 머물러 있다가 나중에 서주로 옮겼다. 손견이 죽었을 때 손책은 나이가 17세였다. 원술을 찾아가 부친이 남긴 병사인 여병을 얻었다. 그는 10여세가 되었을 때 이미 호걸들과 교유하며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조조가 여포를 격살했다. 당초 여포는 관중의 장안을 빠져나와 원술에게 갔다가 다시 원소에게 귀의 했다. 조조가 유표를 쳤다. 유표가 병사하자 유표의 후사인 유종이 형주를 들어 조조에게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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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로마제국이라 불리는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는 존속기간 15년의 신(新)나라가 있다. 신나라는 국가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왕망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인 탓이다. p.437 그의 치세 때 법령은 ‘조령모개’라고 할 만큼 수시로 변했다. 법령을 강제하기 위한 엄벌은 민심이반을 부추겼다. 이웃나라를 터무니없이 깎아내리는 바람에 흉노와 고구려 등 주변국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안팎으로 고립을 자초한 셈이다. 그의 죽음으로 신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다. p.4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