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7)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81%
  • 리뷰 총점8 15%
  • 리뷰 총점6 4%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9.0
  • 50대 9.0

포토/동영상 (2)

리뷰 총점 종이책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의 중국역사를 읽다. 2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의 중국역사를 읽다. 2" 내용보기
신동준 선생의 번역으로 인간사랑에서 상하 두 권으로 펴낸 [십팔사략]의 하권은 수당시대부터 시작하여 송원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250년 넘게 이어지던 남북조 분(分)의 시대는 또 다시 합(合)의 시대로 접어든다. 581년 양견이 북주의 정제로부터 천자의 자리를 선양 받아 수나라를 세운다. 이어 589년 남조의 동진을 멸망시키고 하나의 왕조로 통합한 것이다. 진시황, 한고제, 서진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의 중국역사를 읽다. 2" 내용보기

신동준 선생의 번역으로 인간사랑에서 상하 두 권으로 펴낸 [십팔사략]의 하권은 수당시대부터 시작하여 송원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250년 넘게 이어지던 남북조 분()의 시대는 또 다시 합()의 시대로 접어든다. 581년 양견이 북주의 정제로부터 천자의 자리를 선양 받아 수나라를 세운다. 이어 589년 남조의 동진을 멸망시키고 하나의 왕조로 통합한 것이다. 진시황, 한고제, 서진의 진무제에 이어 4번째로 천하를 통일하면서, 한나라 말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혼란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수문제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수양제는 우리 역사에도 등장한다. 수의 고구려 침입이 바로 그것이다. 그 과정을 [십팔사략]에는 이렇게 전한다. 611년 고구려를 치고자 전쟁준비에 돌입하고, 612(수양제가) 직접 요동에서 공성을 지휘했으나 이기지 못하여, 614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항복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고.. 우리가 아는 사실과는 사뭇 다르다. 아무튼 그들의 입장에서 쓴 중국역사를 읽고 있으니 그건 그렇다치고.. 당시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준비에 돌입하면서 백성들은 곤궁한 나머지 도적이 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기병이 잇따랐다. 616년 이연이 기병하여 장안으로 들어와 수양제 양광의 손자인 양유를 황제로 내세운다. 그가 수공제이다. 618년 수공제는 당고조 이연에게 보위를 선양한다. 이로써 수나라는 수문제로부터 3(), 37년만에 패망하였다.

 

수공제로부터 보위를 선양 받아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은 각지에서 제왕을 참칭하는 세력들을 624년에 이르러 모두 제압하고 나라를 안정시킨다. 626년 차남 이세민이 현무문의 난을 일으키자 당고조는 이세민에게 보위를 선양하니 그가 바로 당태종이다. 당태종의 시대를 정관지치라 부른다. 그만큼 탁월하게 제국을 운영했다는 뜻일 게다. 그런 당태종에게도 하나의 과오가 있다면 세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당태종의 뒤를 이은 당고종은 당태종의 후비였던 재인 무씨를 소의로 삼았다가 이내 황후로 삼는다. 당고종 사후 태후 무씨는 당중종과 당예종을 폐한 후 스스로 칭제하고 국호를 당에서 주로 변경하여 15년동안 이어간다. 그녀가 바로 우리에게 측천무후로 더 잘 알려진 당무후이다.

 

713년 당현종이 즉위한다. 개원지치로 불릴 만큼 성군의 정치를 펼치던 그가, 말년 무렵인 745년 제18자인 수왕 이모의 왕비로 있던 양태진을 귀비로 삼는다. 바로 양귀비이다. 이때부터 당은 기울기 시작한다.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9년동안 지속된다. 763년 안록산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하북과 산동지역에서 번진세력의 할거양상이 표면화되고, 무력을 지닌 절도사들이 조명에 항거하기 시작한다. 806년 즉위한 당헌종 이후, 황실은 100여년 동안 환관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당소종 대에 이르러 주전충이 환관들 모두를 주살할 때까지 황제가 독살되는가 하면, 보위는 환관들의 옹립에 의해 이어진다. 당소종의 뒤를 이은 당애제는 907년 상국인 양왕 주전충에게 선위 한다. 이로써 당은 당고조 이연으로부터 시작하여 20()동안 290년을 지속하다 망하였다.

 

당이 쇠락의 기운을 띠기 시작한 것은 당현종이 18번째 아들의 부인이었던 양태진을 귀비로 삼으면서 부터다. 미희로 인하여 나라가 멸망에 이르는 것은 중국역사에 자주 나타난다. 하나라 걸은 말희로 인하여, 은나라 주는 달기로 인하여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런가 하면 주유왕은 포사로 인하여 결국 견융의 침입을 받아 죽었고, 이로써 춘추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멸망한 것은 꼭 말희나 달기때문 만은 아니고, 주와 당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 역시 포사와 양귀비 같은 미희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지도자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당나라가 패망하고 송나라가 건립되기까지 약50여년 동안 혼란기가 이어진다. 이 시기를 사가들은 오대십국시대라고 부른다. 당애제를 겁박하여 낙양으로 천도하게 한 후 당나라를 찬탈한 주전충이 세운 후량(後梁)907년부터 923년까지 17년간, 후량을 멸망시킨 이존옥이 세운 후당(後唐)936년까지 14년간, 거란의 군주 야율보기가 후당을 깨뜨린 후 석경당을 황제로 세운 뒤 국호를 진으로 삼게 한 후진(後晉)946년까지 12년간, 거란이 후진을 멸망시키자 하동절도사로 있던 유지원이 세운 후한(後漢)950년까지 4년간, 그리고 951년 곽위가 후한을 대신해 세운 후주(後周)960년까지 10년간 존속하였다. 이들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오대(五代)라 부른다. 반면 남쪽에 건립한 십국은 차례로 등장한 오대와는 달리 각지에 할거한 채 동시다발적으로 건립되었다. 다만 이전 왕조 뒤에 등장한 경우가 있어 십국이 동시에 존재한 일은 없었다. 십국의 국호는 초(), (), 오월(吳越), 전촉(前蜀), (), 형남(荊南), 남한(南漢), 후촉(後蜀), 남당(南唐), 북한(北漢)이다. 증선지는 [십팔사략]에서 이들 십국의 역사를 오대의 역사 아래에 부기하였다.

 

오대의 후주공제가 960년 조광윤으로 하여금 거란을 방어케하자 군사들이 조광윤을 천자로 옹립하였다. 바로 송태조이다. 후주공제로부터 선양 받은 조광윤은 국호를 송이라 정한 후, 절도사진영인 번진을 모두 혁파하고 중앙의 금군을 강화하여 지방군이 넘보지 못하게 한다. 송태조의 뒤를 이은 송태종은 979년 북한(北漢)을 마지막으로 십국을 모두 평정하였다. 오대십국시대는 황소의 난이 일어난 885년부터 시작하여 979년까지 94년에 달했다. 거란족 추장인 야율아보기가 916년 키탄국을 세웠다. 뒤를 이은 야율덕광이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고 발해 등을 병탄한 후, 947년 국호를 대료(大遼)로 바꾸었다. 요성종은 고려를 3차에 걸쳐 침입하였고, 1004송진종 때에는 송나라가 형이 되는 대신 매년 요나라에 공물을 바치기로 하는 전연지맹을 맺었다. 송나라는 명분을 요나라는 실리를 택한 것이다.

 

여진이 거란에 반기를 들고 1115년 대금(大金)을 세웠다. 1120년 금태조가 요나라 도성인 상경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다. 1127년 정강지변이 일어났다. 금이 송나라를 침입하여 송흠종과 상황인 송휘종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다. 강왕 조구가 남경에서 즉위했다. 바로 남송을 개국한 송고종이다. 사가들은 정강지변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북송이라 하고 그 이후를 남송이라 칭한다. 1206년 몽골이 원을 세운다. 그리고 1234년 금을 멸망시키고, 1279년에는 송회종이 항복을 함으로써 원이 천하를 통일한다. 이로써 송나라는 송태조가 건국한 960년부터 167년동안 북송으로 존재했고, 이후 1127년 송고종으로부터 153년간은 남송으로 존재했다. 320년을 존속하다 몽골에 패망한 것이다. 증선지는 원의 역사는 남송의 역사와 병기했으나 요금의 역사는 북송의 역사아래 부기했다. 원은 중국대륙을 통치했기에 그들의 역사로 보았지만 요금의 역사를 변방의 역사로 본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분()과 합()이 교대로 나타난다. 주나라가 비록 75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하나 뒤의 500년은 춘추전국시대로 난세였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지만 15년에 불과했고, 이어 한고조가 재통일하였지만 동한말기 황건적의 난을 기점으로 삼국시대가 100여년동안 이어진다. 서진의 진무제가 진시황, 한고제에 이어 세번째로 천하를 통일하지만, 그 합()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50여년 후 또다시 남북조시대로 갈라져 250년 넘게 분()의 시대가 이어진다. 수문제가 남조의 동진을 멸하고 다시 하나의 왕조로 통합하지만 37년만에 패망하고, 이어 당나라가 907년까지 290년동안 지속되었으나, 885년 황소의 난을 기점으로 시작된 오대십국시대라는 분()의 시대가 90년이 넘게 지속된다.

 

이러한 중국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지혜와 리더십을 배울 수가 있다. 굳이 중국역사만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분()과 합()이 교대로 나타나는 그들의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역사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700년에 가까운 분()의 시대를 거쳐 1200년이 넘는 합()의 시대를 살아왔다. 우리에게 분()이란 기억너머의 일인 셈이다. 그런 분()이 현대에 들어 70년넘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역사서를 읽으면서 분을 합으로 이루려는 사람들의 지혜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십팔사략]을 거의 일주일에 걸쳐 읽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왜 모택동이 [자치통감]17번이나 읽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분(分) 시대를 살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k*****1 2019.05.10. 신고 공감 16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십팔사략(하) - 증선지 저/신동준 역
"십팔사략(하) - 증선지 저/신동준 역" 내용보기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십팔사략]의 하(下)권에서는 '수(隨) - 당(唐) - 오대십국(五代十國) - 북송(北宋), 요(遼), 금(金) - 남송(南宋), 원(元)'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이 돋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치통감]에서는 기록하지 못한 '오대십국(五代十國)'이후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간 다른 역사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거란의 '요(遼)'와 여진의 금
"십팔사략(하) - 증선지 저/신동준 역" 내용보기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십팔사략]의 하(下)권에서는 '수(隨) - 당(唐) - 오대십국(五代十國) - 북송(北宋), 요(遼), 금(金) - 남송(南宋), 원(元)'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십팔사략]이 돋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치통감]에서는 기록하지 못한 '오대십국(五代十國)'이후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간 다른 역사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거란의 '요(遼)'와 여진의 금(金)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든다면 하(下)권은 그러한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기존의 중국 사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부분들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이 알게 되는 부분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다양한 호기심을 통하여 이 책의 내용을 바라볼 여지가 생기게 된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를 역동적인 기간으로 보면서 동시에 호한융합(胡漢融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는 진인각의 주장은 중국에 대한 한족 중심의 역사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북쪽의 호(胡)인과 남쪽의 한(漢)족을 하나로 묶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뜻하는 이 용어는 언뜻 유목 민족이 기존 중국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융합 과정으로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이것을 시행한 주체가 유목 민족이라는 점에서 당시 역사의 주도 세력이 한(漢)족이 아닌 호(胡)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위의 효문제는 적극적인 한(漢)화를 추구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권력에서 소외된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돼 523년 '6진지란'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북위의 멸망을 가져왔고, 반대로 북주의 우문태는 호(胡)화를 추구하게 된다. 기존의 중국 역사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한(漢)족에 동화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효문제와 우문태의 정책을 비교해 본다면 한(漢)화 내지는 호(胡)화 또는 이들에 대한 적절한 조화는 나라의 부강함을 위한 수단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중국의 역사를 오늘날 중국의 기득권을 형성하는 한족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십팔사략] 하(下)권에서 다루는 이 시기의 역사는 확실히 관점에 따라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들이 다수 존재한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끝부분을 장식하는 북주(北周)의 우문(宇文)씨, 북주의 외척이자 선양을 받아 수(隨)를 건국한 양(?)씨, 이어서 당(唐)을 건국한 이(李)씨 가문은 사실 선비족 출신이라는 점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북주(北周)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隨)와 당(唐)을 중국 한족의 역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이 결국 한(漢)화된 선비족이기에 자연스레 한족의 역사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현재 중국의 영토를 기반으로 성립된 나라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중국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여 발전시켰기에 그러한 주장과 해석은 무리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기의 역사의 지배층은 바로 선비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족의 형태로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 시기의 황제라 자칭한 인물들의 대부분은 바로 무천진 출신의 군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문(宇文)씨와 양(?)씨, 이(李)씨는 모두 선비족 장수들의 본거지인 무천진 출신이었다. 또한 수(隨) 문제 양견이 북주 우문(宇文)씨의 외척이었으며, 양견의 아내인 독고(獨孤)황후의 독고(獨孤)씨 역시 바로 무천진 출신의 군벌이었다. 이는 당(唐)으로까지도 연결된다. 당(唐) 고조 이연의 이모가 바로 독고(獨孤)황후였기에 이연은 수(隨) 양제와는 이종사촌이 된다. 심지어 수(隨)를 살해한 인물이 바로 우문(宇文)씨의 우문화급이었다는 점은 이 시기의 지배층에 선비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북주(北周)와 수(隨), 당(唐)의 절대자가 된 인물들 모두 무천진으로서 심지어 결혼을 통한 인척 관계로 맺어진 사실을 본다면 수(隨)와 당(唐)의 역사는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십팔사략]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수(隨) 양제가 아버지인 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 문제의 첩을 자신의 첩으로 맞이한 것이라든지 626년 '현무문의 정변'을 통하여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이고 당(唐) 태종으로 등극한 이세민이 동생의 첩을 역시 자신의 첩으로 삼은 일은 이들이 여전히 유목민족의 전통을 그대로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훗날 당(唐) 현종이 자신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양귀비를 첩으로 들인 것도 한(漢)족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오대십국(五代十國)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唐)의 멸망과 이 시기를 연 주전충과 이극용이 실제로는 돌궐 출신의 유목민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까지 지배층에 여전히 유목 민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들은 우리가 중국의 역사를 그들의 주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스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발해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그들의 주장은 발해의 일부 지도층이 고구려 출신이고 대부분은 말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온 배경은 단순히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이라기 보다는 나아가서 그들의 역사에 대한 정통성 문제로도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주장대로 지배층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가 된다면 중국 대부분의 역사는 기존의 한(漢)족 중심의 역사에서 많은 부분 수정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생각이 단순히 중국의  한(漢)족 중심의 역사에 대한 폄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십팔사략]을 통한 중국 역사의 흐름을 살펴 보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여지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와 더불어 이 책에 등장하는 대목 중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690년 무조(측천무후)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한 부분이다. '이(李)'씨 천하를 '무(武)'씨 천하로 바꾼 이 사건은 보통 무조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한 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렇지만, 이전의 당(唐) 태종이 '정관(貞觀)의 치(治)'라 불리우는 태평성세의 시기 다음에 태종의 뒤를 이은 당(唐) 고종이 황후로서 함께 정치를 다루다가 결국 그러한 국호 변경을 한 사실은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그러고보면 측천무후 역시 태종 시기에 궁녀로 있다가 출가시킨 이후 태종의 아들인 고종이 다시 불러 들인 점을 본다면 이 역시 앞서 언급한 유목민의 전통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통 이러한 사건들은 이전 정권이나 국가가 쇠약해졌을 때 발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오히려 당의 치세에 발생한 사건이기에 역사에서 그동안 저평가 되었단 무조(측천무후)의 능력과 결부지어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기존에는 무조의 권모술수만을 부각시켰지만, 그러한 국호 교체가 원활히 이루어진 점과 더불어 그 시기에 농민 반란과 같이 백성들의 불만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은 그녀를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다. 특히 죽기 직전에 '이(李)'씨와 '무(武)'씨 사이에서 갈등한 점과 적인걸과 같은 명신을 등용하였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 부분이라 생각된다.

 

 이 시기의 역사는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눈길을 끈다. 물론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러한 부분들이 상세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령 수(隨)와 당(唐) 시기에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지만, 간략히 원정을 실행한 정도로 밖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와 고려는 연병하여 신라가 입공하는 길을 끊고자 합니다.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p. 60 中에서 -

 644년 당(唐) 태종에게 보낸 신라의 이러한 요청으로 말미암아 당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계의 변화는 송나라 시기에 등장한다. 남송(南宋)이 원(元)으로부터 금(金)에 대한 협공을 요청받고 고민하는 상황에서 고려가 남송(南宋)에게 의원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내면서 넌지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경우처럼 그러한 원(元)의 요청을 거절할 것을 조언하는 대목은 신라와는 달리 고려가 남송(南宋)과는 대등한 외교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조언을 은밀히 전함으로써 고급 외교를 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증선지가 한(漢)족 임에도 불구하고 요(遼)와 금(金)의 역사를 다룬 부분은 한(漢)족이 중원을 차지한 북송(北宋) 시기에도 여전히 유목 민족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의 역자인 신동주 선생의 보설을 통하여 언급된 부분은 그러한 사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어를 비롯한 슬라브어권에서는 중국을 '차이나'가 아닌 '키타이'로 표현한다. 만주를 위시해 중앙아시아 및 북중국 일대를 차지했던 거란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방증한다. '키타이'의 복수형은 '키타'이다. 한자어 거란은 '키탄'을 음사한 것이다.

 - p. 392 中에서 -

 과거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중국의 형상 1]을 출간한 적이 있었는데, 부제는 '키타이'의 전설이었다. 신동준 선생의 설명처럼 서양에서는 중국을 '차이나'가 아닌 '키타이'로 알고 있었는데, 그 어원이 바로 거란이라는 사실은 당시 거란의 위세가 중국은 물론 서양에까지 알려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고려 시기의 거란의 침입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에서도 한(漢)족을 압박한 유목 민족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만, 거란과 그들이 건국한 요(遼)가 꽤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상상할 수 있다.

 

 [십팔사략] 하(下)는 개인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고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더불어 중국의 이러한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면서 비슷한 상황에 대한 각기 다른 대처 방법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한(漢)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위(魏)의 조비에게 선양한 뒤에 산양공으로 봉해지면서 천수를 다하였는데, 이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부터는 선양 후 살해되는 것이 밥먹듯이 일어났으며, 심지어 멸족에 처해지는 과정이 심심찮게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후주(後周)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른 송(宋) 조광윤은 후주(後周)의 황제 가문인 '시(柴)'씨 일족을 보호하면서 반란을 제외한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첩지까지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호지]에서 등장하는 소선풍 시진이 바로 '시(柴)'씨 가문이었다. 더불어 조광윤은 한(漢)의 유방과는 달리 개국 공신들이 편안하게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송(宋)은 그간의 참혹한 역사에 따른 피해를 어느 정도 봉합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책의 저자인 신동주 선생은 G2 시대의 중국의 불안한 행보를 짚으면서 그러한 상태에서 올바른 해답을 도출하기 위하여 중국의 역사 연구에서 답을 찾고 있다. 우리 역시 중국과 미국의 첨예한 갈등을 바라보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 사이에 놓여서 휘둘릴 수 있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우리의 입장이 더욱 시급한 상황이다. 신동주 선생은 중국이 한중일 3국의 단합을 통하여 미국과의 경쟁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이 당장 현실화 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나는 중국의 역사를 통한 교훈들을 통하여 현재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았으면 한다. 예를 들어 송(宋)나라가 요(遼)와 금(金)에 휘둘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확고한 외교 정책의 부재였다는 점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화파와 주전파의 갈등 속에서 외교 정책을 스스로 어기면서 요(遼)와 금(金)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부분은 원(元)과의 항쟁에서도 재현되었기에 우리 역시 확고하면서도 시의적절한 외교 정책을 이러한 교훈을 통하여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외교 뿐만이 아니라 우리 내부적으로 역사에 대한 무지와 왜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례를 본다면 역사 연구의 필요성은 누구라도 절감할 수 있지 않을까?

g*******7 2019.05.13. 신고 공감 11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사마천의 '사기' 신화속 오제를 역사로 편입시키다
"사마천의 '사기' 신화속 오제를 역사로 편입시키다" 내용보기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사실상 내용면으로 볼 때 여와신화와 별반 차이가 없는 오제의 신화 및 전설을 역사 속으로 편입시켰다. 이때 그는 유가 사상의 엄격한 선별기준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대부들의 신화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일반 서민들은 사마천의 이런 기준을 거부했다. 고대 중국에서 복희와 여와를 민족
"사마천의 '사기' 신화속 오제를 역사로 편입시키다" 내용보기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사실상 내용면으로 볼 때 여와신화와 별반 차이가 없는 오제의 신화 및 전설을 역사 속으로 편입시켰다. 이때 그는 유가 사상의 엄격한 선별기준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대부들의 신화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일반 서민들은 사마천의 이런 기준을 거부했다. 고대 중국에서 복희와 여와를 민족의 시조로 숭배한 것이 그 좋은 실례이다. p.57

사마천은 사기맨 앞에 오제본기편을 두고 황제를 역사상 실존 인물로 단정해 놓은데 반해 고려조 김부식은 사기를 흉내 내 펴낸 삼국사기에서 단군을 누락시켰다. 신화로 간주한 탓이다. 중국이 신화를 역사 속으로 편입하는 작업을 21세기까지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p.57

k******4 2019.06.04. 신고 공감 10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십팔사략 하
"십팔사략 하" 내용보기
십팔사략 하 증선지/신동준 인간사랑/2019. 4.30   <십팔사략 하>는 수와 당나라와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와 원나라가 건국되고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요약 하여 기술하고 있다. 4백년에 걸친 분열시대인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수양제는 3차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고, 대단위 토목공사인 운하건설에 힘쓰다 내부 반란으로 무너졌다. 또한 당태
"십팔사략 하" 내용보기

십팔사략 하

증선지/신동준

인간사랑/2019. 4.30

 

십팔사략 하는 수와 당나라와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와 원나라가 건국되고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요약 하여 기술하고 있다.

4백년에 걸친 분열시대인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수양제는 3차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고, 대단위 토목공사인 운하건설에 힘쓰다 내부 반란으로 무너졌다. 또한 당태종 역시 고구려를 3차에 걸쳐 침공했다가 국력을 크게 소진하게 된다. 그로 인해 즉천무후의 시대를 거쳐 이룩한 현종의 개원지치도 양귀비로 인해 무너지면서 안사의 난황소의 난등으로 내부분열에 의해 망하게 된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5대십국의 혼란기를 거치게 된다. 이 혼란을 잠재운 송나라가 5대십국의 막부시대 반작용으로 문치에 힘쓰게 되자 문약한 나라가 되었다. 거란족의 금나라에 쫓겨 북송시대를 마감하고 남송시대를 열었다. 거란의 금나라 또한 120년간을 버티다 몽골의 칭기즈칸에게 멸망하고, 칭기즈칸은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3남인 오고타이게 원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원나라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면서 남송의 유민학자 증선지에 의해 십팔사략이 기술되었다.

수당제국의 고구려 원정 연원은 매우 깊다. 이들이 고구려 원정에 집착한 것은 고구려가 돌궐과 합세해 협공을 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 고구려를 복속시키는 일은 급선무에 해당했다.(p.71)” 수양제는 모든 국력을 기울려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거듭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모두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부 반란을 부추겨 패망을 자초하는 결과를 나았다. 당태종 역시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차에 걸친 고구려원정을 행했다가 실패하고 그 후유증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주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황족을 차례로 제거하는 계책을 구사했다. 크게 3가지 였다. 첫째, 중종 이현을 폐위 시키고, 예종 이단에게서 실질적 권력을 빼앗아 괴뢰황제를 만들었다. 둘째, 황태손 이중조를 폐위시켰다. 셋째, 이씨의 싹을 말린 측천무후가 보위를 탈취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p.94)” 측천무후는 자신이 발탁한 인물이 이내 적합지 않다고 판단되거나 권력을 농단하는 기미를 보이면 사정없이 내쳤다. 때로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녀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당시 유능한 사람들은 일하는 보람을 느꼈다. 업적이 있으면 반드시 측천무후의 인정을 받았다. 많은 인재들이 다퉈 직무에 충실한 이유다. 사마광의 평이 보여주듯이 그 덕으로 많은 인재가 양성됐다. 현종의 개원지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서는 양귀비를 두고 자질풍염으로 기록해 놓았다. 자질이 뛰어난데다 풍만하고 요염했다는 뜻이다. 이백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자색도 자색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뛰어난 가무실력이다. 가무뿐만 아니라 악기를 타는데도 능했다. 현종은 지나치게 음률을 좋아했다. 이게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녀의 가무와 탄주는 현종을 옭아매는 마약 양귀비나 다름없었다.(p.117)” 이런 상황에서 안사지란으로 힘을 소진한 당나라는 이를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말 그대로 무력을 지닌 절도사가 지역별로 막부를 세워 천하를 나눠 다스리는 이른바 막부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나라를 패망의 늪으로 밀어 넣은 것은 소금의 밀매를 통해 부를 쌓은 황소(黃巢)가 일으킨 변란인 이른바 황소지란이다. 이 변란이 일어날 당시 염세와 차세, 주세는 사람들을 경악케 만들 정도로 높았다. 이들 모두 백성들의 생활필수품이었다. 가혹한 세금은 황제와 황친, 조정관원, 지방관의 사치에 충당됐다.

 

중국 역사상 당나라가 공식적으로 패망한 10세기 초엽부터 송나라가 건립되는 10세기 중엽까지 약 50년 동안 이어진 혼란기를 통상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로 부른다. 오대십국시대는 불과 53년의 기간 동안 5개 왕조가 바뀌고 14명의 황제가 명멸했다. 모두 무인들이 정사를 좌우하는 이른바 막부시대였다. 무인들이 무력만 있으면 능히 한 지역을 차지해 이른바 토황제를 자처할 수 있었다.(p.277)” 후주의 세종 시영이 생전에 중앙집권화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다. 이런 기조는 송태조 조광윤이 건립한 송왕조 때 그대로 이어졌다. 조광윤이 중앙의 금군을 강화해 지방군이 감히 중앙을 넘보지 못하게 만든 게 그렇다. 원래 조광의는 960년에 일어난 빈교병변의 설계자였다. 형 조광윤을 설득해 후주의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조광의와 당대의 책사 조보의 머리에서 나왔다. 송나라 건국 직후 진왕에 봉해졌고, 개봉부윤 등에 임명됐다. 이후 태조 조광윤 사후 뒤를 이어 태종으로 즉위해 중원을 통일하는 등 볼만한 업적을 남겼다.

 

“‘예치순자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순자를 공자사상의 정맥을 이은 춘추전국시대 최후의 거유로 평하는 이유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아성(亞聖)은 맹자가 아닌 순자를 가리킨 말이었다. 북송 때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저술하면서 오직 순자만을 인용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맹자를 인용한 대목은 단 하나도 없다.(p.333)” 공자사상의 정맥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송나라 때 의정역정을 대비시켜 맹자사상을 맹종하는 학파가 등장했다. 그게 바로 남송 때 주희에 의해 집대성 된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기독교에 가까운 묵자사상을 차용한 맹자사상과 달리 불교교리를 대거 차용해 이론을 정립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성리학의 창시자는 북송 때 이른바 태극도설을 주장한 유학자 주돈이다. 그는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의 기초를 닦는 공을 세웠다는 취지에서 주자(周子)로 불렸다.

 

거란이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요태종 야울덕광의 시기였다. 그는 부친 야율아보기를 요태조로 추존하면서 제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야율덕광 시절 요나라는 서쪽으로 당항(黨項)과 토욕혼(土谷渾),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해 대제국을 형성했다.(p.393)” 요나라는 요성종의 치세 때 모두 3번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1차 침공 때는 소손녕이 서희의 담판에 넘어가 강동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었다. 2차 침공 때는 요성종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해 강조의 군사를 격파하고 개경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양규의 게릴라 전술에 큰 피해를 입고 이내 환군해야만 했다. 3차 침공 때는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강감찬의 수공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화약을 맺었다.

 

정강 원년은 금태종 완안성의 천희 4년에 해당한다. 이해에 금나라가 송나라 도성 개봉을 함락시키고 송휘종과 그의 아들 송흠종을 만주로 납치해 갔다. 송나라 황실은 황급히 장강 이남으로 달아나 잔명을 이어갔다. 사가들은 이를 계기로 북송과 남송을 구분하면서 이 변란 사건을 통상 정강지변으로 불렀다. ‘정강지변으로 인해 북송은 공식적으로 끝나고 남송의 역사가 시작됐다.(p.444)” 중국의 한족 사가들은 서진 때 빚어진 영가지변’, 명나라 영종 때 터진 토목지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3대 굴욕사건으로 거론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정강지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송나라는 문치위주의 통치를 견지한 까닭에 근본적으로 이른바 문약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 후 금태조 아구타가 건국한 금나라는 120년 만에 패망하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야율초재가 없었다면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사후 이내 사라졌을 공산이 컸다. 역대 사가들이 몽골의 건국과 관련해 칭기즈칸을 언급할 때 반드시 야율초재를 거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498)” 3남인 오고타이는 원태조 칭기즈칸의 뒤를 이었다. 바로 원태종이다. 큰 아들 주치는 혈통, 둘째 차가타이는 급한 성정이 문제가 됐다. <몽골비사는 오고타이가 비교적 온화한 성격을 지닌 덕분에 발탁됐다고 기록해 놓았다. 몽골 제국이 종교에 관대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의 이런 성격과 무관치 않았다. 남송이 멸망할 때 순국한 신하들이 다른 왕조에 비해 훨씬 많았다. 원나라 치하에서 송나라 유민으로 살아남은 사대부도 있었다. <십팔사략을 저술한 증선지를 비롯해 자치통감의 주석서인 자치통감음주를 쓴 호삼성, 역대 산문집인 문장궤범을 쳔찬한 사방득 등이 그들이다.

 

유병충이 생전에 이룬 업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안으로 대도의 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의 북경은 바로 이 때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601)” 오고타이가 사망하고 쿠빌라이가 원의 황제가 된 후 중원의 인재를 적극 기용하게 되는데, 그 중에 유병충이 있었다. 통치기반의 마련을 위한 유병충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원나라 통치는 역대 왕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궤도로 오를 수 있었다. 유병충은 쿠빌라이의 눈에 든 이래 수십 년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전국의 통일과 통일왕조의 운영을 위한 대계를 마련해 주었다.

 

십팔사략은 남송의 유학자 증선지에 의해 중국 역사를 시원부터 송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를 요약하여 기술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함께 중국 3대역사 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도 십팔사략의 역서가 몇 번 발간되었지만, 이 책의 역자 신동준은 일생동안 100여권의 고전을 번역하였다.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이 책을 발간하면서 그간의 오역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 보설을 통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구성하였다. 독자들이 중국역사의 시대상황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책을 끝으로 유명을 달리했기에 더욱 애석하게 생각된다. 역자의 필생의 역작인 십팔사략을 온 국민이 두루 읽어 복잡다단한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k******4 2023.04.02. 신고 공감 1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십팔사략 하
"십팔사략 하" 내용보기
십팔사략 하증선지/신동준인간사랑/2019. 4.30sanbaram   <십팔사략 하>는 수와 당나라와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와 원나라가 건국되고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요약 하여 기술하고 있다. 4백년에 걸친 분열시대인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수양제는 3차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고, 대단위 토목공사인 운하건설에 힘쓰다 내부 반란으로 무너졌다. 또한 당
"십팔사략 하" 내용보기

십팔사략 하

증선지/신동준

인간사랑/2019. 4.30

sanbaram

 

십팔사략 하는 수와 당나라와 오대십국을 거쳐 송나라와 원나라가 건국되고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요약 하여 기술하고 있다.

4백년에 걸친 분열시대인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수양제는 3차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고, 대단위 토목공사인 운하건설에 힘쓰다 내부 반란으로 무너졌다. 또한 당태종 역시 고구려를 3차에 걸쳐 침공했다가 국력을 크게 소진하게 된다. 그로 인해 즉천무후의 시대를 거쳐 이룩한 현종의 개원지치도 양귀비로 인해 무너지면서 안사의 난황소의 난등으로 내부분열에 의해 망하게 된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5대십국의 혼란기를 거치게 된다. 이 혼란을 잠재운 송나라가 5대십국의 막부시대 반작용으로 문치에 힘쓰게 되자 문약한 나라가 되었다. 거란족의 금나라에 쫓겨 북송시대를 마감하고 남송시대를 열었다. 거란의 금나라 또한 120년간을 버티다 몽골의 칭기즈칸에게 멸망하고, 칭기즈칸은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3남인 오고타이게 원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원나라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면서 남송의 유민학자 증선지에 의해 십팔사략이 기술되었다.

수당제국의 고구려 원정 연원은 매우 깊다. 이들이 고구려 원정에 집착한 것은 고구려가 돌궐과 합세해 협공을 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 고구려를 복속시키는 일은 급선무에 해당했다.(p.71)” 수양제는 모든 국력을 기울려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거듭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모두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부 반란을 부추겨 패망을 자초하는 결과를 나았다. 당태종 역시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차에 걸친 고구려원정을 행했다가 실패하고 그 후유증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주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황족을 차례로 제거하는 계책을 구사했다. 크게 3가지 였다. 첫째, 중종 이현을 폐위 시키고, 예종 이단에게서 실질적 권력을 빼앗아 괴뢰황제를 만들었다. 둘째, 황태손 이중조를 폐위시켰다. 셋째, 이씨의 싹을 말린 측천무후가 보위를 탈취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p.94)” 측천무후는 자신이 발탁한 인물이 이내 적합지 않다고 판단되거나 권력을 농단하는 기미를 보이면 사정없이 내쳤다. 때로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녀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당시 유능한 사람들은 일하는 보람을 느꼈다. 업적이 있으면 반드시 측천무후의 인정을 받았다. 많은 인재들이 다퉈 직무에 충실한 이유다. 사마광의 평이 보여주듯이 그 덕으로 많은 인재가 양성됐다. 현종의 개원지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서는 양귀비를 두고 자질풍염으로 기록해 놓았다. 자질이 뛰어난데다 풍만하고 요염했다는 뜻이다. 이백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자색도 자색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뛰어난 가무실력이다. 가무뿐만 아니라 악기를 타는데도 능했다. 현종은 지나치게 음률을 좋아했다. 이게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녀의 가무와 탄주는 현종을 옭아매는 마약 양귀비나 다름없었다.(p.117)” 이런 상황에서 안사지란으로 힘을 소진한 당나라는 이를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말 그대로 무력을 지닌 절도사가 지역별로 막부를 세워 천하를 나눠 다스리는 이른바 막부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나라를 패망의 늪으로 밀어 넣은 것은 소금의 밀매를 통해 부를 쌓은 황소(黃巢)가 일으킨 변란인 이른바 황소지란이다. 이 변란이 일어날 당시 염세와 차세, 주세는 사람들을 경악케 만들 정도로 높았다. 이들 모두 백성들의 생활필수품이었다. 가혹한 세금은 황제와 황친, 조정관원, 지방관의 사치에 충당됐다.

 

중국 역사상 당나라가 공식적으로 패망한 10세기 초엽부터 송나라가 건립되는 10세기 중엽까지 약 50년 동안 이어진 혼란기를 통상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로 부른다. 오대십국시대는 불과 53년의 기간 동안 5개 왕조가 바뀌고 14명의 황제가 명멸했다. 모두 무인들이 정사를 좌우하는 이른바 막부시대였다. 무인들이 무력만 있으면 능히 한 지역을 차지해 이른바 토황제를 자처할 수 있었다.(p.277)” 후주의 세종 시영이 생전에 중앙집권화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다. 이런 기조는 송태조 조광윤이 건립한 송왕조 때 그대로 이어졌다. 조광윤이 중앙의 금군을 강화해 지방군이 감히 중앙을 넘보지 못하게 만든 게 그렇다. 원래 조광의는 960년에 일어난 빈교병변의 설계자였다. 형 조광윤을 설득해 후주의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조광의와 당대의 책사 조보의 머리에서 나왔다. 송나라 건국 직후 진왕에 봉해졌고, 개봉부윤 등에 임명됐다. 이후 태조 조광윤 사후 뒤를 이어 태종으로 즉위해 중원을 통일하는 등 볼만한 업적을 남겼다.

 

“‘예치순자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순자를 공자사상의 정맥을 이은 춘추전국시대 최후의 거유로 평하는 이유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아성(亞聖)은 맹자가 아닌 순자를 가리킨 말이었다. 북송 때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저술하면서 오직 순자만을 인용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맹자를 인용한 대목은 단 하나도 없다.(p.333)” 공자사상의 정맥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송나라 때 의정역정을 대비시켜 맹자사상을 맹종하는 학파가 등장했다. 그게 바로 남송 때 주희에 의해 집대성 된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기독교에 가까운 묵자사상을 차용한 맹자사상과 달리 불교교리를 대거 차용해 이론을 정립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성리학의 창시자는 북송 때 이른바 태극도설을 주장한 유학자 주돈이다. 그는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의 기초를 닦는 공을 세웠다는 취지에서 주자(周子)로 불렸다.

 

거란이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요태종 야울덕광의 시기였다. 그는 부친 야율아보기를 요태조로 추존하면서 제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야율덕광 시절 요나라는 서쪽으로 당항(黨項)과 토욕혼(土谷渾),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해 대제국을 형성했다.(p.393)” 요나라는 요성종의 치세 때 모두 3번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1차 침공 때는 소손녕이 서희의 담판에 넘어가 강동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었다. 2차 침공 때는 요성종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해 강조의 군사를 격파하고 개경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양규의 게릴라 전술에 큰 피해를 입고 이내 환군해야만 했다. 3차 침공 때는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강감찬의 수공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화약을 맺었다.

 

정강 원년은 금태종 완안성의 천희 4년에 해당한다. 이해에 금나라가 송나라 도성 개봉을 함락시키고 송휘종과 그의 아들 송흠종을 만주로 납치해 갔다. 송나라 황실은 황급히 장강 이남으로 달아나 잔명을 이어갔다. 사가들은 이를 계기로 북송과 남송을 구분하면서 이 변란 사건을 통상 정강지변으로 불렀다. ‘정강지변으로 인해 북송은 공식적으로 끝나고 남송의 역사가 시작됐다.(p.444)” 중국의 한족 사가들은 서진 때 빚어진 영가지변’, 명나라 영종 때 터진 토목지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3대 굴욕사건으로 거론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정강지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송나라는 문치위주의 통치를 견지한 까닭에 근본적으로 이른바 문약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 후 금태조 아구타가 건국한 금나라는 120년 만에 패망하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야율초재가 없었다면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사후 이내 사라졌을 공산이 컸다. 역대 사가들이 몽골의 건국과 관련해 칭기즈칸을 언급할 때 반드시 야율초재를 거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498)” 3남인 오고타이는 원태조 칭기즈칸의 뒤를 이었다. 바로 원태종이다. 큰 아들 주치는 혈통, 둘째 차가타이는 급한 성정이 문제가 됐다. <몽골비사는 오고타이가 비교적 온화한 성격을 지닌 덕분에 발탁됐다고 기록해 놓았다. 몽골 제국이 종교에 관대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의 이런 성격과 무관치 않았다. 남송이 멸망할 때 순국한 신하들이 다른 왕조에 비해 훨씬 많았다. 원나라 치하에서 송나라 유민으로 살아남은 사대부도 있었다. <십팔사략을 저술한 증선지를 비롯해 자치통감의 주석서인 자치통감음주를 쓴 호삼성, 역대 산문집인 문장궤범을 쳔찬한 사방득 등이 그들이다.

 

유병충이 생전에 이룬 업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안으로 대도의 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의 북경은 바로 이 때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601)” 오고타이가 사망하고 쿠빌라이가 원의 황제가 된 후 중원의 인재를 적극 기용하게 되는데, 그 중에 유병충이 있었다. 통치기반의 마련을 위한 유병충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원나라 통치는 역대 왕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궤도로 오를 수 있었다. 유병충은 쿠빌라이의 눈에 든 이래 수십 년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전국의 통일과 통일왕조의 운영을 위한 대계를 마련해 주었다.

 

십팔사략은 남송의 유학자 증선지에 의해 중국 역사를 시원부터 송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를 요약하여 기술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함께 중국 3대역사 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도 십팔사략의 역서가 몇 번 발간되었지만, 이 책의 역자 신동준은 일생동안 100여권의 고전을 번역하였다.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이 책을 발간하면서 그간의 오역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 보설을 통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구성하였다. 독자들이 중국역사의 시대상황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책을 끝으로 유명을 달리했기에 더욱 애석하게 생각된다. 역자의 필생의 역작인 십팔사략을 온 국민이 두루 읽어 복잡다단한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 리뷰는 인간사랑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k******4 2019.05.29. 신고 공감 8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중국의 5대 10국 시대
"중국의 5대 10국 시대" 내용보기
중국 역사상 당나라가 공식적으로 패망한 10세기 초엽부터 송나라가 건립되는 10세기 중엽까지 약 50년 동안 이어진 혼란기를 통상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로 부른다. 이에 앞서 절도사가 장악한 번진 세력이 할거하기 시작한 763년부터 주전충이 당경종에 선양을 받아 ’후량‘을 세우는 907년까지의 시기를 ’번진할거시대(藩鎭割據時代)‘내지 ’번국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이
"중국의 5대 10국 시대" 내용보기

중국 역사상 당나라가 공식적으로 패망한 10세기 초엽부터 송나라가 건립되는 10세기 중엽까지 약 50년 동안 이어진 혼란기를 통상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로 부른다. 이에 앞서 절도사가 장악한 번진 세력이 할거하기 시작한 763년부터 주전충이 당경종에 선양을 받아 후량을 세우는 907년까지의 시기를 번진할거시대(藩鎭割據時代)‘내지 번국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는 대략 안사지란이 발발한 755년 또는 난이 끝나는 763년을 시점으로 잡고 있다. 결국 안사지란이 번국 시대와 오대십국시대를 야기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 셈이다. p.239

k******4 2019.06.26. 신고 공감 6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십팔사략 (하)] 넉넉한 마음으로 (파블 16기 - 05월-05) |
"[십팔사략 (하)] 넉넉한 마음으로 (파블 16기 - 05월-05) |" 내용보기
1.위진남북조 시대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유교와 불교 및 도교 모두 상호 치열하게 경쟁적이면서도 상대의 장점을 적극 흡입해 사상통합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정치군사적으로 볼지라도 북쪽의 호인과 남쪽의 한족을 하나로 묶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실시됐다. 문화적으로도 남조의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문체와 북조의 간결하면서도 굳센 문체가 극명하게 대비되
"[십팔사략 (하)] 넉넉한 마음으로 (파블 16기 - 05월-05) |" 내용보기

1.

위진남북조 시대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유교와 불교 및 도교 모두 상호 치열하게 경쟁적이면서도 상대의 장점을 적극 흡입해 사상통합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정치군사적으로 볼지라도 북쪽의 호인과 남쪽의 한족을 하나로 묶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실시됐다. 문화적으로도 남조의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문체와 북조의 간결하면서도 굳센 문체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상황에서 서로 장점을 베끼려고 노력했다. 20세기 초 청화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진인각은 이를 호한융합으로 표현했다.

위진남북조가 전개되는 와중에 북중국을 통일한 왕조가 등장했다. 바로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이다. 북위는 이후 통일왕조인 수당 제국 건립의 바탕이 됐다. 북위의 수도는 석굴로 유명한 지금의 산서성 대동이었다.

- P.16

 

『십팔사략』상권이 송나라까지의 개괄적인 역사를 다루었다면, 하권에서는 송나라까지 왕조별로의 업적과 역사를 서술해 놓았다. 뭐 상권도 마찬가지고 하권도 마찬가지인데, 그냥 지루한 나열이 아니다. 나름 재밌으려고 많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여기서 잠깐! 네가 뭔데, 이 책을 평가해? 노력이라니? 이러시는 분. 혹시 있을지 몰라, 밝힌다. 내 맘입니다요!

 

2.

당나라를 패망의 늪으로 밀어 넣은 것은 소금의 밀매를 통해 부를 쌓은 황소가 일으킨 변란이 일으킨 이른바 '황소지란'이다. 이 변란이 일어날 당시 염세와 차세, 주세는 사람들을 경악케 만들 정도로 높았다. 이들 모두 백성들의 생활필수품이었다. 가혹한 세금은 황제와 황친, 조정관원, 지방관의 사치에 충당됐다.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이유다. 당의종 때 일어난 구포와 방훈의 난은 '황소지란'의 전조에 해당했다.

당시 황소는 소금 밀매를 통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사서는그가 격검과 기사에 능했고 책도 어느 정도 읽은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사실 황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진사과에 응시한 독서인이었다. 『전당시』애 그가 지은 사 두 수가 실려 있다.

- P.185

 

전공자를 위한 책이라고 할 수는 있어 다소 지루한 부분도 분명 있기는 있으나,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빨려든다. 비록, 리뷰를 위하여 속독으로 읽고 건너뛴 부분도 있으나, 차분히 자세하게 읽어도 재밌을 듯 하다. 특히, 중국 선사시대에서 송나라까지의 역사에서 몰랐던 부분은 발췌를 해가면서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 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중국역사사전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3.

요즘 책읽기가 잘 안 되고 있었는데, 십팔사략을 통해 다시 회복된 듯한 느낌이 든다.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역사를 정리하는 재미, 새로운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 소설을 읽듯이 역사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 그런 재미들이 어우러져 내게 책을 읽으라고 권유하고 있다. 오늘은 어떤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잠시 쉬었다 가는 오늘, 나의 도약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그대의 도약도. 뛰자, 뛰자, 뛰어가자! 그러나, 조금은 여유있게 경쟁하지 말고, 넉넉한 마음으로 뛰어가자~

 

- 이 리뷰는 인간사랑으부터 도서를 증정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h******o 2019.05.12. 신고 공감 5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인육을 식용으로 한 중국
"인육을 식용으로 한 중국" 내용보기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래 인육을 식용으로 사용해 왔다. 명나라 때 나온 이시진의 <본초강목> ‘인부(人部)’에 식용으로 사용한 인육이 이른바 ‘상육(想肉)을 언급해 놓은 게 그 증거다. 이에 따르면 말린 인육을 두고 두 다리가 달린 양고기와 같다는 뜻의 양각양(兩脚羊), 늙은 남자의 인육을 불에 구워먹어야 하는 고기라는 뜻의 요파화(饒把火), 젊은 여인의 인육을 두고 약고기
"인육을 식용으로 한 중국" 내용보기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래 인육을 식용으로 사용해 왔다. 명나라 때 나온 이시진의 <본초강목> ‘인부(人部)’에 식용으로 사용한 인육이 이른바 ‘상육(想肉)을 언급해 놓은 게 그 증거다. 이에 따르면 말린 인육을 두고 두 다리가 달린 양고기와 같다는 뜻의 양각양(兩脚羊), 늙은 남자의 인육을 불에 구워먹어야 하는 고기라는 뜻의 요파화(饒把火), 젊은 여인의 인육을 두고 약고기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맛있다는 뜻의 불선양(不羨羊), 어린 아이의 인육을 부드러운 나머지 뼈와 함께 구워 먹을 수 있다는 뜻ㄹ의 화골란(和骨爛)으로 불렀다고 한다. p.188

k******4 2019.06.25. 신고 공감 4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해어화 양귀비
"해어화 양귀비" 내용보기
오대십국 당시 왕인유가 쓴 <개원천보유사>에 따르면 하루는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대명궁 내 태액지에 핀 1천여 송이의 흰 연꽃을 감상한 적이 있다. 자우가 모두 찬탄하자 그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알아듣는 이 꽃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여기서 ‘해어화’ 성어가 나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행한 ‘엔딩’으로 인해 이후 ‘해어화’는 기
"해어화 양귀비" 내용보기

오대십국 당시 왕인유가 쓴 개원천보유사에 따르면 하루는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대명궁 내 태액지에 핀 1천여 송이의 흰 연꽃을 감상한 적이 있다. 자우가 모두 찬탄하자 그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알아듣는 이 꽃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여기서 해어화성어가 나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행한 엔딩으로 인해 이후 해어화는 기생의 뜻으로 바뀌었다. p.117

사서는 양귀비를 두고 자질풍염으로 기록해 놓았다. 자질이 뛰어난데다 풍만하고 요염했다는 뜻이다. 이백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자색도 자색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뛰어난 가무실력이다. 가무뿐만 아니라 악기를 타는데도 능했다. 현종은 지나치게 음률을 좋아했다. 이게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녀의 가무와 탄주는 현주를 옭아매는 마약 양귀비나 다름없었다. p.117

안사지란으로 힘들 소진한 당나라는 이를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말 그대로 무력을 지닌 절도사가 지역별로 막부를 세워 천하를 나눠 다스리는 이른바 막부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p.118

k******4 2019.06.24. 신고 공감 4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당태종의 실정
"당태종의 실정" 내용보기
태종 이세민은 정관지치 후기에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사치와 방종에 빠져들고, 마침내 태자를 교체하는 등의 불상사가 빚어진 게 그렇다. 가장 큰 실패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 것이다. 그 후유증은 매우 컸다. 그의 사후 당나라가 크게 동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측천무후가 비록 일시에 그치기는 했으나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여제의 자리에 올라 ‘주(
"당태종의 실정" 내용보기

태종 이세민은 정관지치 후기에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사치와 방종에 빠져들고, 마침내 태자를 교체하는 등의 불상사가 빚어진 게 그렇다. 가장 큰 실패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 것이다. 그 후유증은 매우 컸다. 그의 사후 당나라가 크게 동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측천무후가 비록 일시에 그치기는 했으나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여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세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p.71

k******4 2019.06.21. 신고 공감 4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