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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보다 더 시각적인 이미지에의 지향”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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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보다 더 시각적인 이미지에의 지향”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을 읽고…    일본 북알프스의 산록, 나가노 현 오마치에서 살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물의 가족’을 읽으며 우리나라 낙동강 옆, 금정산 자락의 산록에 자리한 부산시 부산진구 금곡동 공창부락의 고향집을 생각했다. 달빛에 반짝이는 물망천의 이미지는 은어가 올라오던 도둑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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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보다 더 시각적인 이미지에의 지향”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을 읽고…

 

 일본 북알프스의 산록, 나가노 현 오마치에서 살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물의 가족’을 읽으며 우리나라 낙동강 옆, 금정산 자락의 산록에 자리한 부산시 부산진구 금곡동 공창부락의 고향집을 생각했다. 달빛에 반짝이는 물망천의 이미지는 은어가 올라오던 도둑골을 기억속에서 꺼냈다. 낙동강이 하구언으로 막히면서 올라오는 것을 포기해야 했던 은어가 사라지고, 공무원 연수원이 도둑골에 들어서면서 하수로 오염된 계곡이 슬펐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내리쏟던 계곡물을 잠수하여 들여다보던 물속의 포말이 주던 비밀스럽던 시원함도 갑자기 생각났다. 보이는 아귀산과 보이지 않는 아귀산을 말할 때, 지금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금정산이 그리워졌고, 형편없이 일그러진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의 가족들의 모습이 ‘마음껏 사는 것 밖에는 모르는 가족’으로 재인식되는 모습에서 고향집에서 아웅다웅 치열하게 싸우며 인생을 허비했던 나의 가족들이 생각났다. 고향집을 생각하면 어머니와 할머니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면서 방마다, 벽마다 발랐던 악의와 질투와 시기와 미움과 저주가 보여 내가 신혼방으로 쓰던 곳마저 가기가 싫었다. 할머니의 방을 지나는 복도가 어둡기만 해도 무서웠다. 그런 나의 가족도 ‘마음껏 사는 것 밖에는 모르는’ 나의 가족들이었다.

 

 어떤 가족이 비극 하나 없는 행복을 가졌을까?

어머니와 할머니의 비극적인 다툼은 둘째 손자이자 둘째 아들인 동생이 외지에서 교통사고로 비극을 겪는 원초적인 싹인 줄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누구를 저주하는 말들이 모진 마음을 가진 사람을 피해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의 앞길에 장애물이 되어 마주오는 버스와 충돌하게끔 한 것이라고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따지고 싶었던 적도 있지 않았을까? 그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나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나의 가족을 부인하는 질문이 될 것을 염려하여 무의식의 세계에 던져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생각의 자락을 잡고 자꾸 들어가면 끝내는 내 속에서 나오는 무기력한 질문일 것이다. ‘두 독사가 내뿜는 독기에 내가 죽겠다’는 무기력한 아버지의 푸념을 가만히 들어야 했던 기억도 내가 어려움에 빠질 때면 포기하려는 마음을 갖는 기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나의 모습은 근친상간의 죄에 빠져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집을 떠나는 무기력한 주인공, 객지에서 고생을 하며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도시를 벗어나 다시 찾아온 고향 언저리에서 고향의 물을 쓰려고 하는 주인공, 그리고 맥없이 죽음을 맞이하여 고향집과 마을의 여기저기를 영혼이 떠돌며 구원을 받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는 치유와 구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본다.

 

 “야에꼬는 봄의 선두에 서서 춤을 춘다”

주인공과 관계를 가지는 동생 야에꼬는 항상 오늘이라는 날에, 이 순간이라는 때에만 반응하면서 살뿐, 과거라고 하는 도깨비한테 등이 잡혀서 두려워 꼼짝 못 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는 삶을 사는 아이다. 그런 야에꼬가 아기를 낳고 주인공은 아이의 아버지가 농아 특유의 아름다운 눈을 가진 소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주인공은 야에꼬를 사랑하는 소년을 질투하지 않는다. 죽어서 그렇다고? 이미 영혼이 되어 야에꼬를 다시 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야에꼬의 아기는 조부를 바뀌게 하고,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일으키고, 아이가 없는 형 부부의 갈등을 잠재우며 비록 몸 마디마디를 격심한 통증으로 고통받게 하지만 동생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냉혹한 천벌로 제거하는 따위는 아니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에꼬는 봄의 선두에 서서 춤을 추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가족들 앞에 서서 춤을 추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코 자기는 할 수 없는 일을 야에꼬와 소년이 한 것을 어찌 시기할 수 있을까? 결국 주인공은 고백한다.

“우리 가족은 전부, 될 대로 되었고, 있어야 할 곳에 있다.”

 

 결국 주인공은 인식을 한다. “쿠사바 마을 내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은, 다른 고장에 가봐도 똑같거나, 아니면 악화일로를 치달을 뿐이다”는 것을. 주인공은 결국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못한 아버지의 장점을 깨닫는다. “아버지가 어떻게 침략전쟁 시대를 받아들였고, 이윽고 생필품이 바닥이 난 패전국 시절과,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번영의 시대를 한결같이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 앞을 알 수 없는, 일 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잔혹한 이 세상을, 항상 긍정하고, 만끽하며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인생이 곡절이 많고 비극을 겪으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해도, 나의 고통의 근원을 가족에게서 찾고, 가족에게 핑계를 대고, 가족을 원망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내가 가족들에게서 해결하지 못한 일은 다른 곳에서 해결하려고 해도 똑같거나, 아니면 악화일로를 치달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을 번역한 김춘미는 이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이렇게 썼다.

‘고향의 온갖 물에 대해 쓰고 싶다고 원하던 시혼에 찬 젊은 문학가 지망생은 서른 번째 생일을 한 달 여 남겨두고 죽는다.---청년의 영혼은 사랑하던 가족과 고향의 강과 바다와 산 언저리를 맴돈다.---별 볼 일 없는 삶도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것임을 확인한다. 인생은 아름답고, 산다는 것은 더 아름다우며, 죽는다는 것은 자연의 대운행에 결부되는 자연스러운 추이임을 인식한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아름답다.’

 

 모든 삶이 이유가 있고, 그래서 그저 마음껏 사는 것 밖에는 모르는 것이 당연함을 이 나이에 이 작가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미 고인이 된 가족들이 하나님의 품 속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행복하게 살 것임을 믿는다. 그들은 단지 마음껏 사는 것 밖에 몰랐으니까.

s*****m 2022.01.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