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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면 희망의 빛이 없는 듯한 세월이다. 햇빛 정책에 낀 까만 먹구름, 민주 투사임을 자처하던 정부의 언론탄압, 여러건의 인맥 로비사건,불안한 경제,끔찍한 테러,극단적인 문명 충돌...가슴 한 켠이 갑갑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이런 저런 사건들을 감히 매일 읽어내는 건 세월이 자아내는 무늬(어떤 흉칙한 형상일지라도)를 아예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다.
한동안 신문지상에는 정부의 언론탄압이 거의 모든 지면을 채운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 속에서 제일 입에 많이 오르내린 지식인이 이문열씨가 아니었던가 싶다. 토론과 대화를 잃어버린 사이버 세상을 보여준 이문열씨의 홈페이지. 다양한 견해를 인정하는 다원주의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보려는 혼돈의 사회.그 중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던 그는 드디어 홈페이지를 폐쇄하고 숨어버렸다.
뭐든 읽기를 좋아하는 나는 모든일에 적극적인 주체가 되기보다는 뒷전에 물러나 앉기를 좋아하는 희끄무레한 성격의 주변인일뿐이다. 나는 그저 읽고, 속으로 조금 분노하고,슬퍼하고,감격하다가 일상의 제자리에서 늘 맴돌뿐이지만, 도서관에 꽂혀있는 이문열씨의 낡은 책-변경-전집을 발견하는 순간, 그가 생각났고, 책으로 그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졌다.
한때는 대부분의 우리시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그의 책들을 신간이 나오는 족족 참 많이도 읽어대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에게 열중하는 편의 애독자는 아니었다. 그의 재미난 글을 읽으며 그라는 사람이 남긴 발자국 정도를 맛보는 걸 즐기는 편인 나는 그에게 있으나마나한 독자 중 한사람일뿐...
나는 그의 책 중에서는 '젊은 날의 초상'을 제일 좋아한다. 그의 책들은 재미있고, 그가 섭렵한 방대한 양의 지식과 이념이 잡동사니처럼 쌓여있지만, 나는 지식이 그득 쌓인 창고보다, 그의 청춘이 쓸쓸하게 남긴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후미진 뒷뜰 '젊은 날의 초상'을 사랑한다.
그래서일까...이문열씨의 자전 소설-내가 산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작가 스스로 남기겠다고 했던-이라고 할 만한 '변경'이 출간되었을때 관심을 가지고 읽었었다. 5권까지 나오고 그 뒤로 오랜시간 지체되는 바람에 그 뒷권들을 지금까지 못 읽게 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는 이래저래 그 후로 오랫동안 그를 잊고 살았다.
다시 만나게 된 해묵은 '변경' 전집... 처음 읽는 마음으로 다시 변경을 읽는다.
우리는 나무가 살아낸 세월-나이테를 보고, 감동한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낸 고목일수록 그 나이테는 더욱 아름답고, 진지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사람에게도 분명 '결'이 있다.나는 글 속에 담겨있는 작가들의 그 결을 사랑한다. 그토록 치열하게 자신을 깨고 나오는 그 외롭고도 따스한 기억의 흔적과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아내었다는 경이감!
좌익의 사상을 가지고 혁명을 해야만 했고, 또 그 때문에 월북해야했던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철저히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생활의 밑바닥을 헤매어야 했던 가족 이야기. 명훈,영희,인철의 눈으로 이야기되어지는 그들의 아픈 가족사.
-나도 한 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타던 소년이었고, 그 때문에 그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곤 합니다. 이런 저런 걱정거리에 시달릴때, 삶이 꼭 길없는 숲 속같아서 얼굴에 거미줄이 걸려 근지럽고 얼얼하며,작은 나뭇가지가 눈을 찔러와 한 쪽 눈에서 눈물이 흐를때,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잠시 이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새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운명이 짐짓 나를 오해하여 내 소원의 반만 들어주고 나를 되돌아오지 못하게 채어가 버리지 않기를 빕니다.ㅡ
작가가 제1권의 쓸쓸한 사랑에 인용했던 프루스트의 시 구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리속에서는 이 시구절이 맴돌았다. 쓸쓸하고 비장하기까지 한 유년을 찬란하게 꽃피워낸 그의 인생을 나는 개인적으로 존경한다.그가 맨 손으로 이루어낸 위대한 문학이라는 꽃. 나는 그의 사상이 어떠하든, 그가 정치적이든, 비정치적이든, 현학적이든,대중적이든간에 나는 그가 이겨낸 삶의 흔적앞에 무릎을 꿇고 싶을정도로 가슴이 뭉클하다.살아남는다는 것,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한 삶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의 삶이나, 사상 앞에서 무어라고 큰 소리 낼 자신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임의 세월 편을 거쳐 시드는 대지를 읽으며 사실 좀 짜증이 났다. 거창한 문학적 결함 따위는 잘 모르기도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너무 많은 암시가 깔려있다. 모니카와 명훈의 관계-그런 그의 기묘한 애증은 그녀의 특이한 성의 기교와 더불어 그 뒤 십년이나 그들을 얽어놓게 되는 것이지만... 혹은 짧은 생을 살게 될 모니카와 명훈 이야기가 복선을 깔며 거듭나도는 것, 또 영희가 그녀가 바라던 소공녀의 삶과는 달리 매춘에 종사하게 될 거라는 식의 암시 또한 너무 자주 나와 나를 조금은 맥빠지게 하였다. 그 외의 것들 황이 정치에 몸담을것이라는 것, 수도빌딩의 주인 부자가 이 나라를 이끌게 될 냉동산업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미리 운을 길게 뗀 것등등이 읽는 재미를 반감시켰다. 이 시대의 게르니카를 그리고자 한 작가의 크나큰 포부때문인지, 대하소설이 갖는 특징때문인지는 몰라도 필요치 않게 설명적인 부분이 많아 그의 생에 대한 감동 또한 줄어들었다.
하긴 그의 가슴 속에 꽉 차 있는 많은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완전히 전달 될 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전집의 반 정도를 읽고 이런 독후감을 쓰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산 흔적이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에 경이를 보내고 박수를 보낸다. 마치 모든 이가 떠난 객석에서 혼자 계속 박수를 보내는 특이한 관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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