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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자아형성이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라는데..
"건전한 자아형성이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라는데.." 내용보기
우리 모두는 평화를 꿈꾼다. 전쟁이 없는 행성, 폭력이 없는 사회는 어쩌면 전 인류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지구상 어느 곳에선가는 전쟁의 총소리가 울리고 있고,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폭력과 전쟁은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관점에서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렇다면
"건전한 자아형성이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라는데.." 내용보기

우리 모두는 평화를 꿈꾼다. 전쟁이 없는 행성, 폭력이 없는 사회는 어쩌면 전 인류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지구상 어느 곳에선가는 전쟁의 총소리가 울리고 있고,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폭력과 전쟁은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관점에서 나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쟁과 폭력은 어디서 연유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전쟁이나 폭력의 원인을 정치, 경제, 이념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인 심리학자 아르노 그륀은 전쟁이란 인간적인 문제라고 단언한다. 전쟁이나 폭력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결국 상호간의 작용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이런 작용의 토대는 어린 시절 인간의 내면에 쌓인 고통을 직시하기 힘든 심리적 억압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 평화로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심리적 억압으로 빚어지는 집단과 사회의 부조리에서 벗어나냐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린 시절 인정과 공감을 받으며 자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저자는 평화의 요건을 사람들의 심리적인 상태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결속 시키는 것은 감정이입, 즉 공감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감정이입적 인지능력이 부모의 권위주의적 폭력으로 억압될 경우, 아이는 두려워하게 되고, 무력감에 쌓인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자라서 자신의 내면을 꽁꽁 감추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타인을 괴롭히고 싶은 분노를 지니게 된다. 이것은 자녀를 소유관계로 인식하는 오늘날 서구문화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음은 아이러니 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그들이 권위에 복종하는 가운데 목표지향적인 단계들을 착착 수행하는 훈련이 잘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현대 서구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경쟁과 대립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긴장, 불신, 적의, 불안을 범람시키며, 폭력성이 남성적 영웅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의 이면에는 절대 자기자신의 본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인정받지 못해 타인을 억압함으로써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약한 인간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에 규율과 복종이 최고의 원칙이며, 선한 의지를 허약한 것으로 치부하는 권위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 그들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분노와 증오는 언제든지 폭력성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폭력성이 섬뜩한 극우파에서 광신적인 종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또 잔혹한 세계정복자에서 파렴치한 세계화 선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파괴적인 자들이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원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들, 즉 심리적 피해기제로 말미암아 남성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좋아 보이게 만드는 측면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며, 자아가 위협 받을까 두려워 고통이나 번민 같은 어두운 측면과는 마주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그들은 공통적으로 권력을 중시하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의 내면과 너무도 다른, 자신이 원하는 외면으로 포장하고 있으며, 그들의 꾸며진 이미지와 휘황한 말 잔치에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된다고 한다. 2차대전 당시 히틀러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특정 유형의 인물들은 바로 공감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물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서구문화는 내면의 가치보다 부와 사회적 지위와 같은 외면의 가치를 더 중요시 한다. 이는 각 개인의 고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신뢰와 공감에 근거한 자아를 발전시킬 수 없는 문화로써 적대감과 폭력을 키운다. 이런 사회에서 중시하는 것은 결국 성취와 소유이고,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권력구조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불안을 거부하는 심리적 기제를 지닐 수밖에 없다. 또한 사람들의 본질은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성으로 바뀌기 싶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을 크고 힘있는 것에 의지하게끔 만든다. 권력과 부는 이것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불만, 탐욕, 증오로 가득 찬 허구의 자아를 만들어 낼 뿐이다.

 

결국 폭력과 전쟁을 추구하거나 동조자가 되도록 유혹 받는 사람들은 고유한 내적 체험과, 타인과의 공감을 토대로 하는 자아형성의 가능성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족쇄를 드리우고 있는 내면의 무력감이나 분노와 마주해야 하며, 원하는 성공을 위해 잘못된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전쟁은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오히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결합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이란 것을 인식한다면 폭력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자신을 여는 공감행위야말로 평화를 위하여 우리가 가꾸어야 할 능력이라고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강해지며, 또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내면의 괴로움과 고통에 공감할 용기를 갖게 되고, 그것은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저해하는 전쟁이나 폭력의 원인을 인간의 심리상태에서 찾는 저자의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우리가 자라면서, 아니 아이들을 키우면서 우리 혹은 아이들의 자아가 충분히 자존감을 갖고, 부모를 비롯한 주위사람들과 공감능력을 가질 때, 폭력을 유발하는 내면의 무력감이나 분노로부터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용기를 가져야 하는지를 반문해본다.



k*****1 2012.07.09. 신고 공감 12 댓글 23
리뷰 총점 종이책
공감과 사랑 폭에 쌓이고 쌓여야만 전쟁이란 눔이 꼬리를 내뺄 거야
"공감과 사랑 폭에 쌓이고 쌓여야만 전쟁이란 눔이 꼬리를 내뺄 거야" 내용보기
부모가 아이의 고유한 생명력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바람에 부응할 때에만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면 아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때부터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행한 투쟁을 시작한다. 아이는 자신만의 감정이입과 욕구는 억누른 채 부모의 기대에만 방향을 맞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고유성은 분열되고 위축된다(p89).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요
"공감과 사랑 폭에 쌓이고 쌓여야만 전쟁이란 눔이 꼬리를 내뺄 거야" 내용보기

  부모가 아이의 고유한 생명력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바람에 부응할 때에만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면 아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때부터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행한 투쟁을 시작한다. 아이는 자신만의 감정이입과 욕구는 억누른 채 부모의 기대에만 방향을 맞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고유성은 분열되고 위축된다(p89).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요!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요! 무서워요! 어린 소녀가 늘 가슴에 품고서도 차마 밖으로 내 보일 수 없었던 '마음말'이었다. 하늘은 늘 파랗거나 가끔 먹빛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바쁘고 바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다람쥐통 같은 공간에 오밀조밀 모여 사는 소녀를 비롯한 세 자매들은 작은 가슴이 담아 내기엔 너무나 큰 멍울을 키워 갔다. 어느덧 그 멍울의 나이테도 촘촘해질 대로 촘촘해져 증오와 분노, 열등감이란 붙박이 나무로 떡 버티고 서 있다. 가지가지 달린 총구란 열매는 언제 터져 나올 지 모르는 불안이란 열꽃에 가뭄까지 겹치고 겹쳐 일촉즉발의 터에, 아직까지는 고요히 잠을 자고 있다.

 

  생명이 잉태되면서부터 태아와 어머니는 감정이입을 통해 상호작용한다. 아이는 이를 통해 자신이 남과 다른 존재임을 자각해 나가며 궁극적으로 독립을 지향하는 인격체로 발전한다(p84).

 

  자신보다 커다랗다는 것이 무언지,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쳤던 그 커다란 눈 속에 보였던 형상은 '엄마'라고 했다. 세상이 소녀에게 가르쳐준, 어쩌면 소녀가 태어나 가장 처음 발음하게 된 단어도 '엄마'였을 것이다. 큰 형체에 압도된 상황에서도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 작은 소녀의 가슴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만들고, 익숙한 심장 소리에 편안히 잠들게 하고, 뭔지는 모르겠으나 포근한 이불 같은 안정감이란 기운으로 꽉 채워주었던 그녀, 그녀는 '엄마'였다. 헌데 그 엄마가 언제부터인가 몹시 무서워졌다. 어려웠다. 언니나 동생이 부르는 엄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소녀만은 '엄마'를 소리내 불러 보는 게 그렇게 힘들고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자들에게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용기를 갖겠는가?(p139/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채 왜곡된 성장기를 보낸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무시하고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느끼는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p91).

 

  소녀의 나이테에 일곱 개의 줄이 생겼을 때 어느 날 '아빠'라는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빚이란 걸 잔뜩 안겨놓고서. 엄마는 그때부터 몇 배는 더 바빠지고 자매에게 혹독해졌다. 성인이 된 지금의 소녀가 생각하기론 그 시절 엄마는 소녀에게 '히틀러'보다도 훨씬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녀는 소녀와 눈 한번 더 마주치기보다 자매들의 싸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세 자매를 좁은 방 코너로 몰아 매질하는 데 전력했다. 그 모진 풍경이 끝나면 그녀는 늘 눈물을 보인 후, 먹음직스런 통닭을 시켜주곤 했다. 집이 어질러져 있을 때도, 소녀가 친구 관계로 울면서 집에 들어올 때도 소녀의 엄마는 항상 같은 모습을 보였다. 언니와 동생은 거짓말이 늘기 시작했고, 소녀에게 엄마가 가장 많이 들려주었던 말은, '바보 같은 년, 병신 같은 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소녀가 먼저 '엄마'의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소녀는 시시때때로 우울하고 썩 내키지 않고 좋지 못한 감정이 싹터감을 느꼈다.

 

  분노는 일반적으로 자기 욕구가 실현되지 못하고 저지당해서 생기는 감정이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행동이 방해받았을 때 생기는 공격적인 감정이다(p135).

 

  부모 자식 간의 애정 형성 과정과 그 유형에 따라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은 천자만별이다. 건강한 한 시민이 되느냐, 건강한 시민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폭군이 되느냐 하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어릴 적 부모 자식 간 애정 관계에 두고 정신분석과 심리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후대로부터 정치사회적 비극이란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지도자의 유형 중 독일의 '히틀러'를 예로 든다. 어린 시절의 감당할 수 없는 모멸감과 분노로 붕괴된 자존감과 열등감이 어떤 형식으로 분출되는지, 큰 히틀러라 볼 수 있는 이상화된 부모상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순종이 한 개인을 떠나 한 사회를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가를. 여러 극단적인 선택들만을 놓고 스스로 최선책이라는 결론을 향해 질주하는 그들은 죽음이 아니면 권력을 탐한다. 눈 뜨고 살아 버티기엔 버거운 관계로 아예 이 생을 등져 버리거나 최고의 권좌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려는 그들의 잘못된 욕망의 전말을 우리는 수도 없이 봐 왔다.

 

  그들은 자아가 위협받을까 두려워 고통이나 번민 같은 어두운 측면과는 마주하기를 꺼린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공통적으로 권력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권력이 현실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변화시켜 줄 신통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p127).

 

  찢기고 멍든 어린 시절의 상처가 미처 치유되기도 전에 굳게 잠가버린 그들의 영혼은 그렇게 소리내 울고 또 운다. 자살 테러, 대량 학살이라는 명찰을 당당히 달고서. 높이 치켜 든 그들의 손 끝에 걸린 위상은 간당간당 거리며 미소 짓는다. '보라, 내가 곧 세계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니...' 행복? 평화? 그들이 내거는 슬로건은 과거 자신들을 옭아매었던 공포, 수치, 분노, 무기력함- 이란 멍에의 잔형일 뿐인 것이다. 또 권력이 진실이라 믿는 그들에겐 최소한의 인간미조차 기대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측은지심이란 용납되지 않는 감정인 동시에 그 감정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자만을 최고로 인정해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1944년 중국의 소년병과 예비 나치스를 양성하는 나폴라 학교,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곳곳에 존재하는 잔인한 소년병- 이다. 그렇게 애완동물을 키우게 한 뒤 죽이게 한다거나 처참한 살육장면을 목도하게 하는 등의 반복적 훈련과 경험은 어린 가슴에 사랑이란 아름다운 본능을 말살시킨다. 14살의 한 소년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시 정각에는 눈을 찔러서 뽑고, 3시에는 한쪽 손을 자르고, 4시에는 다른 쪽 손을 잘라요. 5시에는 한쪽 발을 자르고, 6시에는 다른 쪽 발을 잘라요. 그러면 대부분 죽지요.'(p72)

 

  오늘날 우리가 문화적으로 이해하고 있듯이 자아는 어떤 면에서 볼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내면이 아닌 외면에 의해서 너무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주창하는 지극한 무아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릇된 남성적 영웅신화의 이상을 버려야 한다. 무아란 권력과 성공, 육체적 아름다움, 경쟁, 지적 탁월함 등에 기대고 있는 거짓된 자아를 포기해야한 도달할 수 있다. 과대망상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며 타인에게 자신을 여는 공감 행위야말로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p140).

 

  그렇다면 과연 저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건 무엇일까? 또 앞으로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해야할,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단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에 빗대 그들의 잔인무도한 행태를 용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부모의 애정결핍으로 인한 일종의 인격 장애라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라는 이유가 훨씬 더 설득력있다. 인간이 인간을 철저하게 신으로도 악마로도 변질시킬 수 있다는 그 묘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빨리 판단하여 실천하는 것. 이타적인 삶에 합류하여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함께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가슴 따듯한 사랑을 키우는 것. 저자는 이 점을 해답으로 제시하면서 달라이 라마의 말을 인용한다. '이웃을 도울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도울 수 없다. 이것은 사랑과 공감을 지속시키며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들어가 그것을 나누는 우리의 능력이자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살아남기 위한 기본 원리다.'(p157).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평화... 그녀가 그것에 마음 한켠을 열어 두고 잔잔한 향에 물들어갈 수 있기를, 전쟁 없는 세상에서 꿈꿀 권리가 소녀에게도 가 닿기를, 그 소녀가 가난하고 비통한 이웃에게도 눈 돌릴 수 있기를, 무엇보다 소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꼭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 주소서!


 

a*********9 2012.07.09. 신고 공감 12 댓글 73
리뷰 총점 종이책
공감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 아르노 그륀 -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공감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 아르노 그륀 -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내용보기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단편 영화 『악의 탄생(Hitler: The Rise Of Evil)』을 참고하면, 그의 어린 시절은 늘 무시와 경멸, 소외 속에서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심과 격려, 애정은 그에게 있어 사치스러운 단어였습니다. 마땅히 받고 가지고 누렸어야 할 것들의 부재와 결핍은 그를 악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와 태아는 절대적인 관계이자 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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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단편 영화 『악의 탄생(Hitler: The Rise Of Evil)』을 참고하면, 그의 어린 시절은 늘 무시와 경멸, 소외 속에서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심과 격려, 애정은 그에게 있어 사치스러운 단어였습니다. 마땅히 받고 가지고 누렸어야 할 것들의 부재와 결핍은 그를 악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와 태아는 절대적인 관계이자 합일된 상태이다. 뱃속에서 태아는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못한다. 고독이나 분리로 말미암은 불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 딱 한 번 경험하고 두 번 다시 겪지 못하는 모태 일치 상태로 돌아가기를 희구한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서로 하나 됨을 꿈꾼다는 뜻이다. 이를 확장시켜 생각하면 각 개인이 인류와의 심오한 연대를 꿈꾸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갈등 없고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동경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43p

 

 저자 아르노 그륀은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치즘을 피해 폴란드, 덴마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르노는 '집단적 망상이 어덯게 맹목적인 복종과 무자비, 그리고 증오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연구하는 심리학자이며 다른 저서를 통해 '숄 남매상', '로비자 평화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분야-평화 및 폭력-에 대해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인 것입니다.

 

 아르노는 히틀러와 같은 악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이루어지는 단계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나치즘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을 위하여 미군에 자원 입대까지 했던 아르노였지만 그는 인간에 대한 선한 믿음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선한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즉, 부모의 양육 태도에 달려 있다고 외칩니다.

 

 인간의 몸에서는 이른바 엔돌핀이 만들어진다. 엔돌핀은 고통과 불행의 감정을 희석한다. 흔히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엔돌핀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 특히 많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절과 멸시를 당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아이에게 이 본능의 방패는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 엔돌핀 발생 기제라는 놀라운 장치가 갖춰져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조절불능 상태의 과도한 괴로움을 당할 경우 도리 없이 자신의 감정을 떼어내야만 견딜 수 있다. -99p

 

 아르노는 자신이 담당했던 심리 치료 환자들을 지켜보면서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꼈던 사람이었습니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살인을 몇 번이고 저지른 연쇄살인범부터 피 튀기는 고문과 전쟁 속에서 매일을 보내는 소년병들 중 사랑과 애정과 관심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환자들 중에는 떳떳하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설명하는 어린 소년도 있었고, 오로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한 살인범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타인을 죽이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한 인간이 악한 인간-혹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악-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아르노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부모로부터 거절을 당한 아이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것은 죽음에 가까운 내적 고통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는 고통과 감정의 고리를 모두 차단하여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즉 인간이라면 마땅히 느낄 수밖에 없는 관심과 애정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사살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자아를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자아를 죽인 아이들은 쉽게 말해서 감정이 제거당한 아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공감'이라는 단어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 죄책감, 미안함과 같은 감정은 그들에게 금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친위대의 제국 총통을 지낸 하인리히 힘러는 1943년 10월에 친위대원 장교들 앞에서 유대인 학살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연설했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말해줘야 할 것이다. 100구, 500구 또는 1000구의 시체가 널브러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이런 상황을 견뎌내며 인간적 나약함을 극복하고, 품위를 유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중략… 힘러는 실로 교묘한 어법을 동원하여 실제 희생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희생자로 뒤바꾸는 묘기를 부려댔다. 그는 사실을 야비하게 왜곡시킴으로써 살인은 희생자들 자신이 불러들인 재난에 불과하다는 거짓 주장을 편다. 즉 자신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과제를 맡아, 영웅적으로 맞서도록 부름 받은 것이라 오도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살인 행위에 동참하기를 망설이던 사람들의 마지막 방어 심리를 무장해제했다. 이때 살인이 합법적인가 아닌가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151~153p

 

 민족 말살이나 대량 학살은 결코 특수한 시대적 상황 때문만은 아니라고 아르노는 주장합니다.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 등은 공통적으로 영웅적 죽음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념은 무척이나 감성적이고 충동적이기에 한 번 대중에게 불이 붙으면 무서운 속도로 사람들을 옭아매기 시작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결핍된 애정으로 인해 '공허한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 늘 진정한 자아는 숨긴 채 부모나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기 너무나 두려워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을 증오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권력, 명예, 존경,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강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을 아주 악랄하게 이용하는 이념이 바로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로 잔혹함을 영웅스러움으로, 살인을 명예로운 행동으로, 죽음을 최고의 미덕으로 뒤바꿉니다. 지독한 악은 오히려 선한 얼굴을 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약물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인위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인간적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갑작스런 일로 충격을 받아 친구를 찾아간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진정제 한 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털어놓으면서 그저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친구가 알고 싶어하기를 바랄 뿐이다. 간단히 말해 친구가 관심을 갖고 함께 공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88p

 

 전쟁과 테러 같은 폭력을 주장하는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공허한 자신의 내면을 채우기 위하여 영웅으로 보이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타인을 공격하고 죽임으로써 영웅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타인에게 고통을 가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들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잔혹하며 무의미한 것인지, 우리는 이미 지나간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배워왔습니다. 

 

 그렇기에 아르노는 책의 첫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한결같이 공감을 외칩니다. 부모 자식 간의 공감, 형제자매 간의 공감, 친구 간의 공감, 연인 간의 공감은 상처투성이인 자아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린 시절 살아가기 위하여 스스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아와 마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자 고통의 재인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을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옆에 있다면, 인간은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인간은 폭력이나 권력이 아닌 공감과 사랑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보듬어 안아줄 수 있을 것입니다.

 

 

 

"Non-Violence", by Fredrik Reuterswärd

 

 

※ 본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k*******3 2012.07.11.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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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그리고 덴마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심리학을 공부하고 아동정신 정신과 과장을 역임한 저자   스키마에 따라서 같은 책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고 환경과 문화, 경험에 따라서 신념과 사상이 정립되고 인생을 사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라는 내 생각이 또한번 드는 저자의 배경과 책내용의 연결이었다.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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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그리고 덴마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심리학을 공부하고 아동정신 정신과 과장을 역임한 저자

 

스키마에 따라서 같은 책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고

환경과 문화, 경험에 따라서 신념과 사상이 정립되고

인생을 사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라는 내 생각이 또한번 드는

저자의 배경과 책내용의 연결이었다.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니

전쟁과 폭력에 대해 생각하고

아이들의 정신신경학적 문제를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린시절의 문제가 폭력성과 연관있다고 하는게 당연해 보인다.

 

이 글의 평화와 총구는

전쟁이라는 단편적 문제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표지와 제목이지만

실상 내용에서는 전반적인 폭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부모가 어릴 때 억압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말도 폭력이고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남의 고통이나 불행을 묵시한것도 폭력이고

테러행위, 전쟁을 준비하는 것도 어쩐지 이상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군인이 되어 누군가의 평화를 지키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

아이러니한 폭력의 이면들이다.

 

모든 폭력은 어린시절의 경험이 원인이 되니까 어릴때 잘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아이는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기대에 자신을 맞춰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타인이 원하는 감정을 자기도 모르게 연기하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공감하지 않고 타인의 감정에만 맞추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감을 가장 큰 해결책으로 여긴다.

타인에 대해 공감,이해하는것.. 동감이 아닌 동정이 아닌 공감을 필요로 한다.

마음을 열고 진짜 감정을 보여주면서

진실함으로 대하고 자신에게도 솔직하며 남에게도 진정으로 대하는 것을 요구한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 같다.

저자의 말대로 자신을 보호해 주는 유일한 존재인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로써 아이는

나약하기까지 한 존재로 보인다.

사랑과 이해로 충만한 유년기를 보내도록 하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정말 모두 그렇게 살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저자역시 교육과 이성만으로는 불가능 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c******6 2012.07.28.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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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당신의 손은 어떠한가요?
"부모님, 당신의 손은 어떠한가요?" 내용보기
포스터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버트 브레송의 77년작 '아마도 악마가'란 영화의 포스터이다.  이 영화에서 세상의 현실이 보여주는 부조리함과 몰염치함에 진절머리가 난 주인공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이렇게 중얼거린다.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거죠?"  절망 가운데 문득 솟아난 스스로에게 보내는 물음이었으나  문득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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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버트 브레송의 77년작 '아마도 악마가'란 영화의 포스터이다.

 이 영화에서 세상의 현실이 보여주는 부조리함과 몰염치함에 진절머리가 난 주인공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이렇게 중얼거린다.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거죠?"

 절망 가운데 문득 솟아난 스스로에게 보내는 물음이었으나

 문득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이렇게 대답한다.

 "아마도 악마가 그러나봐요."

 

 

  최근 용산의 비극적 사건을 다룬 '두개의 문'이란 다큐멘터리가 상영중이다. 일부 가진자들의 끝없는 물욕이 가져온 처참히 파괴되어버린 보통사람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그 용산의 비극이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보고 있노라면 저 여성의 말대로 어쩌면 정말 악마가 그렇게 몰고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아니, 사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에 따르면 이건 그저 허투른 생각만도 아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은 아렌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그녀의 대표작이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유태인 대량학살을 자행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예루살렘에서 열리게 되자 직접 거기로 가 재판을 목격한다. 그녀 역시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악의 실체를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놀란다. 자신의 상상과는 달리 아이히만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 없었다. 성격도 생각도 취향도 평범했다. 그런데 어떻게 유태인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 아렌트는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그래서 나온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 그녀는 이 책의 부제로 그녀의 말 중 가장 많이 인용되기도 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말을 쓴다. 그녀가 이 책의 부제로까지 썼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바로 이것이야말로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학살을 자행케 만든 진정한 이유였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 그대로 악이란 것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뭔가 어떤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뜻한다. 우리는 악이란 것을 어떤 특별한 성격,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런 게 악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평범성이란 말 자체에 담긴 뜻은 이런 것이다. 누구나 쉽게 물들 수 있는 것. 너무도 평범해서 정작 자신이 악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것. 아이히만이 그랬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는 재판 내내 변명했다.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른 것일뿐이라고... 이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자신에게 너무도 평범해서 이게 선인지 악인지 구분이 안되는 상태. 그래서 태연하게 타인에게 고통을 입힌다.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전문 킬러들이 사람들을 죽일 때 언제나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늘 이런 말을 하면서 사람을 죽인다. "이건 비즈니스야. 사적인 감정은 없어." 이 또한 악의 평범성이다. 직업이니까 죽인다. 명령이니까 죽인다. 그렇게 마치 자신의 선택이 아닌듯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은 악인 것이다. 왜 악인가?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들어 여기에 답한다. 아이히만이 그렇게 악의 평범성에 빠졌던 이유는 바로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럼 사유란 무엇인가? 타자를 고려하는 것이다. 타자가 나의 행위로 어떤 영향을 받을지 그에게 어떤 결과가 미칠지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유라고 한다. 즉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생각이란 걸 전혀 해보지 않았기에 그 수많은 유태인이 목숨을 잃는 와중에서도 태연하게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평화란 바로 이와 같은 악의 정반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악이라는 것이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무사유함에 있다면 평화란 어디까지나 타인을 고려하는 공존가운데 이루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땅을 고루 다진다는 것에서 나온 '평(平)'은 모두가 서로 대등한 존재임을 얘기하고 '화(和)'란 그 대등한 존재들의 조화로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평화란 남과 내가 다 대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며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울려 살아갈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란 아렌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디까지나 치열한 사유속에서 얻게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로버트 브레송의 영화 '아마도 악마가'에서 주인공의 절규와도 같은 자문에 문득 대답하는 여성의 말은 사실 온전히 옳은 말이기도 하다. 용산이나 강정 이 모든 사태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하고 몰염치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악, 즉 타인의 가치와 입장을 일절 고려하지 않는 무사유함이 팽배해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비슷한 절망 속에서 평화에 대한 희망을 찾으려 했던 아르노 그륀의 책,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역시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1923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유태인에게 가해진 나치의 만행을 직접 겪은 셈이다. 그 같은 경험이 있었기에 평화에 대한 염원은 그 누구보다 간절했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역시나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간절함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심리학 박사로 심리학 교수까지 지낸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심리치료이다. 전공과 현재 직업이 그러하기에 이 책 역시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는데 있어 무엇보다 심리적 원인과 대안들을 찾고 있다.

 

 사람들은 전쟁의 원인을 대체로 정치, 경제, 이념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전쟁은 무엇보다 인간적인 문제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남을 죽이려 드는 인간은 역사상 늘 존재해 왔다. 남에게 살인을 부추기며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부추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군인들이 말도 안되는 명령을 따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정치인들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면서도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나와 남을 속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칭 자유의 신봉자이며 민주적 시민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 잔인하기 짝이 없는 정치인을 구원자이자 강한 남자라고 흠모하는 까닭은 무엇인가(드라마 추적자에서 강동윤을 무턱대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불현듯 생각났다.)? 이런 의문들에 직면하여 최종적으로 던지게 되는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것. 말하자면 살인에 대항하는 제동장치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른바 공감의 기능이 어떤 상황에서는 왜 작동하지 않는가?" (p. 19 ~ 20)

 

 이 모든 의문에 잘 나타나있듯이 그 역시 악의 평범성이 전쟁을 부추기고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감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사유의 부재라 할 것인데 아르노 그린은 그 무사유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철학적으로 접근했던 아렌트와는 달리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지는 독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견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답을 얻는다. 인간에게 공감 기능은 본능적으로 주어진 것인데 그러한 것이 마비되는 이유는 어린시절 부터 받은 교육 때문이라고.

 

 이러한 임상사례(애정결핍으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심각한 애정 결핍은 사람을 평생토록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스스로 항상 강해야 하며,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들이 약자이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고통당한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고 말겠지만 그 결과는 파국적이다.(p. 68)

 

 이렇게 책은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공감의 파괴가 바로 어린 시절의 부모와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힌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교육방송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하나가 생각난다. 아이들의 양육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 부모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는데 아이들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가정의 경우 주로 그 원인은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때로는 폭력까지 자행되는 강압적 태도에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부모들을 면담해 본 결과 그 부모들 역시 그들의 어린 시절에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들의 부모들로 부터 당했었다는 게 드러났다. 다큐멘터리는 이 사실을 이렇게 요약했다. '지금 당신이 어린 자녀에게 하는 것은 당신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것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즉 우리는 우리가 어린 시절 받았던 그대로 또 우리 자녀들에게 행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린시절에 우리가 어떤 경험을 가지게 되느냐는 실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자녀, 우리의 자녀의 자녀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반복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로느 그륀의 이 같은 초점맞추기가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알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새삼 주목하게 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을 막기 위해 책은 공감의 회복이 절실하며 연대만이 회복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공감과 연대가 가능할 수 있도록 폭력이 아니라 배려로써 타자에게 귀기울이고 배척이 아니라 포용으로써 그들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치 갑자기 뚝 떨어지는 감처럼 어느 순간에 갑작스레 가능할리가 없다. 공감과 연대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을 때라야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더욱 부모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부모들의 어린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그들 존재 자체를 최상의 가치에 두고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발현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감과 연대를 발휘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무럭무럭 자라게 할 테니까...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유아기를 보낸 사람은 삶의 원초적 믿음이 굳건한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여 불안 혹은 적대감이 없는 인간관계를 맺어나간다. 또한 정직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지닌다. 자신과 타인에게 그 어떤 것도 속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p.162)

 

 제목 그대로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근본적인 평화는 바로 부모들에게서 나온다. 때문에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무엇보다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다. '세상을 지키는 손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어루만지는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l****1 2012.07.16. 신고 공감 2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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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꿈꾸어야 할 이유, [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_ 창해
"평화를 꿈꾸어야 할 이유, [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_ 창해" 내용보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안정이란 생생한 모든 것의 소멸을 뜻하는 건 아닐까.’ 책의 앞쪽인 17페이지에서 맞닥트린 저자의 이 문장에서 번뜩이는 작가의 철학을 감지했다. 저자 ‘아르노 그륀’은 독일에서 출생하여 2차 세계 대전의 참화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심리학자로 활동한 80대의 노작가이다. 올해 들어 접하게 되는 신선한 충격의 작가들 중에 적어도 60대 이상의 분들
"평화를 꿈꾸어야 할 이유, [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_ 창해" 내용보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안정이란 생생한 모든 것의 소멸을 뜻하는 건 아닐까.’ 책의 앞쪽인 17페이지에서 맞닥트린 저자의 이 문장에서 번뜩이는 작가의 철학을 감지했다. 저자 아르노 그륀은 독일에서 출생하여 2차 세계 대전의 참화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심리학자로 활동한 80대의 노작가이다. 올해 들어 접하게 되는 신선한 충격의 작가들 중에 적어도 60대 이상의 분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이 유럽의 한 지식인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구나 하며 그 정신의 청춘에 감탄했다.

 

작년부터 약 1년여간 지구촌에서는 여러 명의 유명한 인사들이 고인이 되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중에 정반대의 4명이 있었다. 바로 오사마 빈 라덴과 김정일, 스티브 잡스와 휘트니 휴스턴이다. 한 명 한 명 모두 다 다른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뭉뚱그리기 살짝 무리가 따르지만 내 생각엔 앞의 두 사람과 뒤의 두 사람은 생전과 사후에 사뭇 다른 영향력을 후대에 전해준 건 분명하다. 빈라덴과 김정일, 이들은 테러리스트와 독재자로서 굳건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는 확실한 추종세력의 찬양을 나름 누리다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잡스와 휴스턴은 시대의 아이콘이자 스타였는데 그들의 창조물과 노래들은 사람들에게 혁신에 대한 영감을 주고 인생에 대한 용기와 영혼의 감성을 주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보통 우리들은 앞의 두 사람의 죽음은 곧 잊어 무심하지만 뒤의 두 사람을 떠나 보낸 것에는 오래 마음 아파했다.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의 아르노 그륀은 그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 나치즘의 망령을 직접 목격한 세대였다. 그래서 이 책의 시작은 정신분석학자인 자신의 전공을 바로 제시하며 아돌프 히틀러나치즘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얘기하며 시작했다. 이제는 가끔씩 나오는 헐리웃 영화로만 그 사건을 기억하게 되는 한국의 평범한 30(?)인 나로써는 참으로 오랜만에 심도깊게 전해듣는 히틀러 얘기들이었다. 유태인 학살이 참으로 비극적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이야기들이 또 나오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내가 알던 홀로코스트 스토리는 그야말로 일화들을 두서없이 매체로 전해 들은 것임을 실감했다. 그냥 히틀러라는 사이코 한 명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나치즘이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독일 사회의 깊은 병과도 같은 근절되지 않은 민족적 본능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었고 무엇보다 심리학자로서 분석하기에는 사랑받지 못하고 큰 한 남자의 왜곡된 야망이 대중의 숨어있는 악한 욕구를 흔들어서 이용한 사례였다. 전문적인 학자의 논리에 빠져 들어갔고 한번도 히틀러와 나치대원들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지 못한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히틀러 옆에는 각 분야에서 충성스럽게 그를 보필하는 부하들이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유럽의 고급 교육을 받은 인텔리이자 능력자들이었다는 데에서 또 놀랐다. 결국 히틀러를 탄생시킨 건 본인의 야심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를 숭배하고 지원한 똑똑하고자발적인 독일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우리 시대에 또 다른 히틀러가 등장하는 재난을 막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 권력·성공·천재적 재능·비범함·완벽한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환상 때문이며, 환상이 결국 한 인간을 타락의 길로 몰고 간다. 화려한 외모와 섹시한 스타일, 권력이나 남성적 카리스마 따위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조종당하고 만다.” (p.37)

 

저자는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경고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80년대 이후 서구 사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패권주의를 공고히 해갔는데 그때 어린시절을 보내어 이제 막 성인이 된 젊은이들은 너무도 체제 순응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세상이 그런거지라면서 약삭빨라지기만 한 청년들이 대세인 속에서 아르노 그륀이 목격하고 참여하기도 했던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한갓 무용담으로 전락했다고 탄식한다.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삶이란 이미 한물간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다 함께 좀 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던 꿈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만 성공하고 부자가 되겠다는 꿈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미국의 부촌에 가면 20대나 30대 초반에 좋은 대학 나오고 안정된 직장 다니며 고수입을 올리고 있는 여피족들의 차뒤에 나는 가난한 너희들이 역겨워라는 글을 쓰고 다니는 걸 볼 수 있다고 한다. 근데 그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렇게 이해못할 것도 아니며 저런 팻말을 붙이고 돌아다니는 걸 그들 리그 안에서는 이상히 여기지도 않는단다. 또 충격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누구인가. 오랫동안 정신 상담일을 해온 필드의 전문가답게 그는 겉으로는 너무도 멀쩡한 20대 서구 청년들의 내면이 얼마나 그늘지고 삐뚫어져 있는가를 담담히 밝힌다. 자신 세대가 비록 전쟁의 위기를 겪었지만 이런 현상은 없었는데 현대의 젊은이들이 뿌리깊은 내적 질병을 앓고 있음을 진단하며 안타깝고 아프게 여긴다. 게다가 그들을 그런 기형적인 인간으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그들의 부모이며 그들이 자녀들을 자신의 자랑거리로만 여기며 사랑으로 양육한 게 아니라 조종했을 뿐임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여러 사례들을 읽으며 설마 정말 저랬을까 싶은데 상담가인 그가 꾸며낸 일은 결코 아니었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서구사회를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나지만 한 전문가의 심리학에 기반한 오랜 통찰을 통해 서구의 화려한 성취 뒤의 이면(異面)을 알아버렸다. 읽는 과정의 마디 마디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못 박는 저자 아르노 그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서구의 부모의 그릇된 자식 사랑과 그로 인해 빚어진 자식들의 비인간화는 개개인들에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책에서 용어를 쓰진 않았지만 사이코 패스란 말이 서구에서 나온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더 슬프다.”는 말에 연실 고개가 끄덕여졌다. 별 고생없이 부모의 사육에 발맞춰 혜택을 누리며 성장한 젊은이가 어느날 갑자기 연쇄살인자로 이 세상에 알려지면 서구 사회는 경악한다. 그럴 때 이유를 도저히 알수 없기에 정신분석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총동원된다. 그들의 프로파일링 작업을 통해 어렵사리 내린 결론은 잘못된 교육에 기초한 성장, 무한경쟁과 타인과의 비교를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무감각하게 살아온 것이 살인의 이유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흔히 자녀들을 최고의 교육 과정속에 집어놓고 졸업시킨 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장과 업종에 밀어넣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부모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것일 경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한다. “그것은 자녀 각자가 지닌 고유하고 독립적인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p.61)

 

1년에 한두번, 몇 년에 한번씩 서구 사회로부터 여러 형태의 잔인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걸 보면 그런 삐돌이들은 정말 존재하긴 존재하는 것 같다. 갑작스런 그러한 폭력심의 발현이 일견 무서웠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 역사가 꽤 길기에 부정할 수는 없는 서구의 치부가 아닌가 싶었다. 현실적으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이 시대의 괴물같은 존재들로부터 어쩌면 그 누구도 안전하다거나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새삼 하나 더 깨달았다. 단지, 서구 사회 내부에서 이렇듯 자정하는 목소리가 계속되어 왔고 그들이 이제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반성하면서 차츰 자신들의 오만과 편견을 줄여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엿볼 수 있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저자는 이 모든 폭력과 무감각한 내면에 대한 대안으로 공감 능력을 시종 일관 제시한다. 책의 상당한 분량이 무시무시한 실제 사건들과 그를 뒷받침하는 작가의 분석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낸 건 사실이지만 결론으로 가며 공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무척 반가웠다. 너무 엄청난 얘기들의 홍수에 한동안 어질했다.)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자는 인간에게 긍정적인 본능이 있으며 그것을 외면하지는 않는다며 희망에의 믿음을 보여줬다.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바로 그러할 때 참사랑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삼엄한 현실이 압박해와도 이 공감 능력만 잃지 않고 유지한다면 우리는 타인들과 연대할 수 있다고 부드럽게 말한다. 그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게 좌우명이 되어서도, 그걸 가르쳐서도 안 되며, 서로를 필요로 하며 돕고 도움 받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꿈을 결코 버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한동안 안 본 장르이지만 가끔 미국 인디 영화 중에 가족의 실체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었고 그 중에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대사가 책을 통해 생각났다. 영화 속 가족에서 가장 어린 주인공이 미인대회에 나가려고 하자 오빠가 부모에게 동생을 말리자고 하며 했던 말. “인생은 이와 같은 미인대회들의 연속이에요!!” 정말 맞는 말 같다. 세상의 틀에 맞춰진 한 시험을 통과하면 또 다른 시험들이 형식과 내용만 조금 다르지 업그레이드 하며 한 사람을 옥죄여온다. 하지만 영화는 통쾌했다. 그냥 미인대회 안 나가는게 대수가 아니라 보내서 철저한 굴욕을 겪게 하는 것이다. 대신, 그걸 부모가 수수방관하는 게 아니라 무대에 함께 올라가 같이 망가진다. 실재였다면 아마 유튜브에 떠서 황당가족이란 타이틀로 한동안 악플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 건강한 게 아니겠나? 아르노 그륀이 주창하는 진정한 교육이란 단적으로 이런 거였다. (그런데 그게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드는 거 보면 나도 솔찮은 학부형 나이가 되긴 됐나 보다. ㅜㅜ)

 

리뷰를 정리하며 다른 말로 약간 쉽게 말하면 이미지를 정해놓고 그것을 좇아가는 허상의 삶을 누군가에게 살게 해서는 절대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짧지 않은, 가볍지는 더더욱 않은 책 속에서 폭력테러의 주범이 바로 관계의 결핍임을 이 방식 저 방식으로 다양하게 논증하고 있었기에 이해 되었다.

 

전쟁광들은 마치 고귀한 동기가 있어서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굴지만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살인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미사일과 공중폭격을 퍼붓는 현대판 전쟁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며 십자군 전쟁의 출정 길에 나서는 옛 전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p.151)

 

1994년 보스니아에서 있던 인종청소, 1995년 르완다에서 부족에게 행해진 민족말살 등 꽤 가까운 과거의 대량 학살 사태가 그 근원을 따져보면 범죄를 자행한 사람들의 인격 장애의 결과임을 참담한 심정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인류가 다시금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연대만이 해답이며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님을 끊임없이 자각해야만 하겠다.

남한 사회에서 어찌 보면 구태의연하게만 들리는 평화라는 단어를 새삼스럽게 되새겨볼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평화를 꿈꾸지도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쉽지 않기에 꿈꾸지 않은 것이지만, ‘평화는 만들어가는 것임을 우리가 몰랐던 건 아닐까? 세상에 어떤 평화가 꿈꾸고 시도하지도 않는데 저절로 오겠는가. 이 책은 2006년에 나왔으나(번역이 2012) 공교롭게도 그 때 이후 유럽은 경기 침체까지 겹쳐 사회 불안이 가중되며 외국인 차별, 실업자에 대한 비난, 병자와 노인에 대한 냉대에 이르기까지 차별의 깊이가 생기고 있다는 안좋은 소식이다. 서구를 우리와는 먼 동떨어진 문제로 보지 말고 이제 우리 내부에서도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병리적인 현상들과 비교, 대입하면서 우리는 우리대로의 교육과 심리 치유의 방법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내면의 왜곡된 심리와 맞서 싸울 때, 고유한 생명력을 얻고 진정한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다.” (p.195)

 

http://blog.yes24.com/bohemian75

 

서구 문화의 오만과 편견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책,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리뷰

YES마니아 : 로얄 b********5 2012.07.10. 신고 공감 2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설득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는 '공감'해야 한다. 가장 빠른 길이다.
"설득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는 '공감'해야 한다. 가장 빠른 길이다." 내용보기
저자 아르노 그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부모를 따라갔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독일로 돌아가 전후세대인 독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와 공감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역설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황금기에서 꿈을 잃은 채 허덕이고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질 것을!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 것을! 독려했다
"설득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는 '공감'해야 한다. 가장 빠른 길이다." 내용보기

저자 아르노 그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부모를 따라갔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독일로 돌아가 전후세대인 독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와 공감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역설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황금기에서 꿈을 잃은 채 허덕이고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질 것을!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 것을! 독려했다.

 

사실 독일을 포함한 유럽에서 살지 않은 나에게 이 책에서 강력하게 드러나는 저자의 독려는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지리·공간적인 공감대 형성이 불가능하고 어차피 먼 나라 얘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시대를 떠올리며 친일파를 생각할 때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을 독일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물론 한국인들은 2차 세계대전이다, 나치다, 유대인 학살이다 세계사를 배우기도 하고 많은 책과 영상물을 통해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직접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서 사는 사람들만큼은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사고의 폭을 넓힌다. 비단 세계대전만이 아니라 수많은 학살과 민족 분쟁, 9.11 테러와 연속적으로 이어진 자살테러, 미국의 이라크·아프칸 침공 등 상식적·인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모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일 정도로 동조하고 묵시적 지지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똑똑하고 현명한 지성인들에게서 그런 무자비하고 비이성·비상식적인 동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심리치료를 하는 저자는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을 어린 시절 부모와의 소통과 유대에서 찾는다.

 

 

“폭력의 이면에는 절대 자기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인정받지 못해 타인을 억압함으로써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나약한 인간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p.77)

“부모는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이들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p.61)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인격의 형성이 달라지고 부모로부터 정상적인 보호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성인은 여전한 상처를 가진 채 비뚤어진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억압하고 타인에게 폭력(넓은 의미에서)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히틀러 한 명에게 수많은 독일인들이 빠져들었던 것처럼 비극적인 문제로 대두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결속시키는 것은 감정이입, 즉 공감이다.” (p.84)

“공감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p.88)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주장한다.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대부분의 가정문제, 학교문제가 ‘공감’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것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온라인 게임 등으로 ‘공감’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현상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일어났던 전쟁과 학살, 폭력의 가해자와 동조자들 모두 개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마다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배려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때 비로소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미약해 보이는 과정일 수 있으나 결코 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저자의 독려에 100% 동의되지 않았다. 앞서 말했던 대로 시대적·사회적 환경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 동의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오히려 나는 박근혜와 박정희를 오버랩하는 것으로 이 간극을 메워볼 수 있었다.

지난 주 본가에 내려가 부모님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이번 대선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결론은 부모님은 “이번에는 박근혜가 해야지” 이었다. 아무리 논리로 설득하려 해도 도무지 되지 않았다.

언젠가 김어준씨가 그랬었다. “박근혜는 감정이다. 논리로는 설명도 설득도 이해도 되지 않는. 이미 체화되고 일반화된 감정이다.” 라고 말이다.

부모님과 대화하며 김어준씨의 말에 100% 동의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나의 부모님의 박정희에 대한 기억과 [독재자], [비참한 죽음]의 역사를 익혀 온 나의 박정희에 대한 학습 사이에는 그랜드 캐년 협곡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에 대한 부모님과 나의 간극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에는 [박근혜]에 대한 부모님과 나의 간극의 각은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하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이 책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에서 저자가 2차 세계대전과 이후 줄곧 현대사에서 이어진 학살과 폭력, 전쟁과 테러에 대한 암묵적 동조자와 침묵의 지지자들을 이해하는 것의 출발이 개인적 가정 사(史)라고 했다. 비극적이고 참담한 과거의 기억을 한 방에 상쇄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과정이었다.

또한 내가 이해 한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부모세대와 젊은 세대의 간극도 부모세대가 살아 온 역사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트라우마로 새겨진 전쟁과 빈곤에 대한 기억이 박정희라는 철옹성을 도저히 무너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풀의 웹툰 [26년]에서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동기가 여전히 그 대통령의 가장 측근 경호원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대통령 암살을 계획한 동기가 묻는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경호원이 대답했다. “이분이 무너지면 나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분의 역사가 사라지면 나의 역사도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지켜야 된다.”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부모세대의 설득되지 않는 ‘감정적 동조’를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공감’해야 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펼친 논리와는 많이 다르다. 대상도 많이 다르고 결과도 다를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좀 더 내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맥락을 잡은 것이다.

 

유럽 전쟁 주체 세대의 개인적인 가정 사(史)와 한국 부모 세대의 곡절 많은 성장 사(史)의 맥락을 통한 이해가 다소 무리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여기서 리뷰를 맺을까 모두 지우고 다시 쓸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맺을까 한다.

리뷰라는 건 ‘읽는 이만’의 특권이니까. 내가 이해한 만큼 내 리뷰도 나아가는 것이니까.

 

 

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그런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독일의 젊은이와 한국의 젊은이가 가져야 할 꿈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을 굳이 설득하려 애쓰는 것보다 저자의 독려처럼 조금만 더 ‘공감’하려는 노력이 절실 하다. 서로 탓해봐야 남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위장된 태도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그들에게 구원자 역할을 기대한다. 가짜 구원자가 그럴싸하게 포장한 행동이 그들을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p.120)

 

 

위장된 태도와 포장한 행동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지우고 싶은 역사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독일 사람은 독일사람 대로.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 대로.

 



l****h 2012.07.11. 신고 공감 2 댓글 5
리뷰 총점 종이책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르노 그륀, 창해, 2012.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르노 그륀, 창해, 2012." 내용보기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끝에 나온 저술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평화라고 하면 국가적인 평화 또는 세계적인 평화를 거창하게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러한 광범위한 평화는 결국 한 가정의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부모의 요구보다 아이의 요구가 우선되는 관계를 통해 결국 평화의 싹은 부모의 사랑이 틔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간에는 공감이라는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르노 그륀, 창해, 2012." 내용보기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끝에 나온 저술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평화라고 하면 국가적인 평화 또는 세계적인 평화를 거창하게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러한 광범위한 평화는 결국 한 가정의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부모의 요구보다 아이의 요구가 우선되는 관계를 통해 결국 평화의 싹은 부모의 사랑이 틔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간에는 공감이라는 인간 고유의 본능에 있다.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공감이야말로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p.84). 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은 젊은이들과 공감하려 하지 않고 주장하고 속박하려고 한다.

 

꿈을 꾸고 상상하는 행위는 많은 어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른들에게 있어 '꿈꾼다'는 것은 일상적인 속박과 질서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16

 

아직도 꿈꿀 수 있는 젊은이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것들을 회피하고 천편일률적인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 꿈꾸기를 포기한다면 그 가능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p.18

 

인간 모두의 고유 본능이라고 하는 공감과 관련하여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것, 말하자면 살인에 대항하는 제동장치로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이른바 공감의 기능이 어떤 상황에서는 왜 작동하지 않는가? - p.20

 

저자는 이러한 공감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폭력과 살인에 집중한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공감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선한 인간의 고유성을 버리고 타인을 죽이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이 필요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인터뷰 내용(p.101)은 정말 끔찍하다. 이 인터뷰 대상자는 어머니로부터 어린시절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환자였다. 어머니로부터의 학대라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면서도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는 욕구가 드러났다. 이러한 분열된 자아가 지속되면서 살인 행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생기있는 아이가 되느냐 아니냐는 부모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느냐 못받느냐에 달려있다. 사랑으로 바라보는 부모와 눈을 맞출 때 느끼는 만족감과 애정은 아이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진다. - p.117 

 

가정에서 무관심과 멸시, 몰이해의 고통은 아이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며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다. 결국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자신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아이에게 권력은 생명의 원동력으로 인식되고 더 나아가 그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위대해지고자 하는 '과대망상'을 품게 된다(p.115). 이것이 파괴와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권력의 충동을 느끼며 자란 아이들은 부모가 부여한 자신의 이미지를 실제 자신의 이미지로 착각하고 부모의 욕구에 부응하도록 노력한다. 저자는 이러한 노력은 위장이라고 판단한다. 이 위장이라는 현상이 정치사회로 넘어가면서 심각한 오해를 낳게 된다. 즉 위장에 능한 선동 정치인들은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목표를 내거는 능력을 겸비하는 경우가 많고 여기에 현혹되어 선거에서 한표를 던져주게 되는 것이다.

 

가정교육에서 근원을 찾은 '비평화'의 문제점을 국제사회로까지 확대시키며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밝힌다. 공감하지 않고 외면하는 현상은 서구사회에서 전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원인이며 결국 전 국제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전쟁은 막을 수 있고 폭력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책의 구성은 상당히 흥미롭다. 책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다시피 평화의 출발은 '총구'로 대표되는 폭력과 파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이 책의 서두에 등장하면서 이 논리의 증거를 가정교육에서 찾았으며 마지막으로 다시 이러한 주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논리는 국가간의 관계라는 것이 항상 긍정적이고 상호협조적인 관계가 되기는 힘들다는 점을 간과한 듯 하다. 결국 국제사회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주도하는 한개의 사회라고도 볼 수 있지만 국가와 민족이 개입되면서 상대적인 이익을 찾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평화로움이 깨질 수 밖에 없는, 저자가 문제시하였던 폭력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결국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와해되기 전까지는 이 땅에 전쟁이라는 행위가 없어질 것인가 라는 점의 의문이 든다. 국가와 민족을 따지기 전에 사람은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소심한' 생각으로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도덕적인 호소와 정치적 지지만으로는 이 세상의 폭력과 테러를 막을 수 없다. 오로지 다른 사람과 공감함으로써, 즉 멸시와 압박과 폭력에 시달리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때에만 가증스런 독재자의 등장을 막고 그들이 벌이는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공감 능력은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맞닥뜨릴 때 자라난다. - p.37



k******1 2012.07.26. 신고 공감 1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총구는 전쟁을 부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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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힘보다는 그것을 믿지 않고 비교우위의 전투력을 확보하였을때, 힘에 의해서만 평화가 보장된다고 믿는 강경론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그것은 보복의 악순환, 전쟁의 악순환을 부르고 있다. 내가 발딛고 사는 대한민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남북한이 하나같이 전력우위를 점하고자 천문학적인 돈을 무기 수입, 개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총구는 전쟁을 부를 뿐이다." 내용보기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힘보다는 그것을 믿지 않고 비교우위의 전투력을 확보하였을때, 힘에 의해서만 평화가 보장된다고 믿는 강경론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그것은 보복의 악순환, 전쟁의 악순환을 부르고 있다.

내가 발딛고 사는 대한민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남북한이 하나같이 전력우위를 점하고자 천문학적인 돈을 무기 수입, 개발에 쏟아붇고 있지만 아직도 평화의 길은 요원하게만 보인다. 구경중에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가장 재밌다고 하는데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거나 그 소용돌이에 휩쓸려도 크게 다치거나 피해를 보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치시절을 경험한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다방면의 폭력을 분석하고 특히나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폭력이 미치는 영향은 아주 심각하다고 경고 하고 있다. 폭력에 의해 상처 받은, 전쟁에 의해 상처받은 이들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감과 평화라는 사실에 깊이 공감이 간다.


하워드 진교수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들을 위해 군수물자를 생산 보급하는 일에 종사하거나 침묵으로 동의하는 것 역시 전쟁에 직접 참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씀처럼 나치나 일제강점기 시절 집단광기, 폭력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집에 돌아가면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만 아니면 돼 라는 말이 주말 오락프로그램에서 들리는 말처럼 전쟁의 피해 당사자가 나 자신이 아닐때 불구경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하나의 드라마나 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특히나 종전이 아닌 휴전, 엄청난 병력이 대치하는 한반도에 살아가는 나로서는 전쟁보다는 평화,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사람에겐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거울 뉴런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집단광기나 집단 무의식에 사로잡히면 전쟁의 다른 당사자의 죽음은 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어 무자비한 폭력과 보복이 자행된다. 그것은 9.11테러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알수 있음에도 정책은 언제나 힘의 우위에 의한 평화가 정답인양 결정되고 있다.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답이다. 그러나 우리가 연대의 손을 맞잡지 않으면 총구에서 평화가 나온다고 믿는 전쟁론자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아울러 가정내에서의 사회내에서의 폭력도 근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높다. 세상은 아직도 말로는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믿을지라도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국가를 마주하면 총구에서 평화가 나온다고 쉽게 입장선회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웃을 도울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도울 수 없다. 이것은 사랑과 공감을 지속시키며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들어가 그것을 나누는 우리의 능력이자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살아남기 위한 기본 원리다."  157쪽

y*****n 2012.08.13.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똑같이 반복되고 놀랄것 없는 삶[내면의 가치가 상실된 시대]
"똑같이 반복되고 놀랄것 없는 삶[내면의 가치가 상실된 시대]" 내용보기
어제도 오늘도 아니 내일도 신문기사는 여전히 톱기사에 진흙탕 정치와 뇌물비리로 얼룩질 것이다. 모든 국민이 만성이 되어 대수롭게 생각한지도 오래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서로 물어뜯어가면서 지아니면 안된다고 야단법석이다. 국민은 온데간데 없고 지 잘난맛에 가면을 쓴체 짙게 화장하고 변장술을 부린다. 이제는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고 우격다짐을 하지만 선거때가 되면 지연,학
"똑같이 반복되고 놀랄것 없는 삶[내면의 가치가 상실된 시대]" 내용보기

어제도 오늘도 아니 내일도 신문기사는 여전히 톱기사에 진흙탕 정치와 뇌물비리로 얼룩질 것이다. 모든 국민이 만성이 되어 대수롭게 생각한지도 오래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서로 물어뜯어가면서 지아니면 안된다고 야단법석이다. 국민은 온데간데 없고 지 잘난맛에 가면을 쓴체 짙게 화장하고 변장술을 부린다. 이제는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고 우격다짐을 하지만 선거때가 되면 지연,학연에 얽매여 올바른 판단에 검은 먹구름을 끼게 한다.

 

저자는 공감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려 한다.그러나 우리 사회의 계층간의 공감과 소통은 단절된 느낌마저 든다.상대에게 심리적 총구든,육체적 총구를 겨누어 경쟁에서 이기기위해,타인과의 동질화를 위해 사회적 통념에 기우는게 올바른 가치관이라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꿈을 꾸라고 꿈비전을 설계하라고 종용한다. 아이들이 부모의 생각과 대치되는 꿈을 꾸어 보려 이야기하면 꿈 깨고 정신차리라고 한다. 왜 기성세대는 꿈 깨라는 식을 젊은 세대에게 판에 박힌 명령을 내리는가. 현실이 아닌 꿈에 사로잡히는 것은 해악이라고 여긴다. 어른들에게 있어서 "꿈꾼다"는 것은 일상적인 속박과 질서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으로 기성화된 사회가 원하고 부모가 원하는 똑같이 반복되고 놀랄 것 없는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변화 없는 안정된 삶은 자율성과 호기심,낯선 이웃과의 교류를 철저히 단절시킨다. 중고등학교 도덕책에 등장하는 호연지기의 사정성어는 스쳐가는 일종의 바람일 뿐이다.

 

어릴 때부터 감정이 거세당한 사람에게는 죽음과 파괴만이 삶의 활력을 준다. 이들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자리 잡지 못하며 오직 규율만 있을 뿐이다. 역사를 거꾸로 변환시킨 독재자들이나 살인마들,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수 많은 사건 사고를 분석해보면 저자의 이 말이 딱 들어 맞는다.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제목은 곧 어릴 때의 양육 과정에서 총구를 양산하는 과정이다. 이쯤해서 아이들의 미래 가능성에 대한 부모와 사회의 태도의 세 그룹 중에 우리 기성세대는 아이들을 어느 방향으로 총구(공감의 총구와 폭력의 총구 中)겨누는지 선택해 보자.

 

1> 자녀의 잠재력을 귀하게 여기고 격려하는 그룹

 

2> 자녀의 좋은 부모님임을 증명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자녀의 행동을 억제하는 그룹

 

3> 자녀의 생명력을 짓누르는 그룹

 

이 세가지 주제를 가지고 젊은이들이 바라보는 소망과 부모와 사회의 태도와의 관련을 심도있게 풀이하는 과정이 이 책 제목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이나 거대 자본주의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제반적인 권리를 제한하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오만하고,기회주의적이며 약삭빠른 성공이라는 뚜렷한 한 가지 목표만 추한다. 문제는 성공한 사람과 권력자들 가운데 히틀러처럼 꾸며진 이미지와 휘황한 말잔치에 눈이 먼 사람들은 그들이 행한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막을 수 있다. 그 첫 걸음은 바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문제는 어릴때부터 사회와 부모가 2>,3>형을 1>형으로 전환되어 준다면, 복잡한 세상에서 돈으로 계층을 갈라놓은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아니된다. 기성세대의 기존사회의 틀을 올바르게 바꾸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권력.성공.재적 재능.비범함.완벽한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환상 때문이며,그 '환상'이 결국 한 인간을 '타락의 길'로 몰고 간다. 화려한 외모와 섹시한 스타일,권력이나 남성적 카리스마 따위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조종당하고 만다. 현재까지의 역사는 그렇게 조종당해 왔고 조종당하고 있다.

 

멸시와 압박과 폭력에 시달리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때에만 가증스런 독재자의 등장을 막고 그들이 벌이는 전쟁을 막을 수 있다.제러미 리프킨<공감의 시대>나 안철수현상이 일시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의 넘어 증거가 되고 있지 않은가.타락한 성공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맞닥뜨리는 공감능력이 탁월한 리더십을 그 어느때 보다고 강력하게 요구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의 사랑은 지배/종속 관계를 사랑으로 점철되고 있다.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더 슬프다."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관심과 책임,존경,이해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연인들,부모의 자녀에 사랑,치인들 ,위주의자들은 사랑이란 약을 오남용하고 있다.

 

저자는 서구 문화의 병리현상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인간의 내적 체험을 무시하며 합리적인 사고와 이론적 발상만 제대로 자리 잡히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많은 학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시민의 정신적 안녕이라는 문화에 별반 관심이 없다. 권력 유지의 필수요소임을 각인시키며, 그걸 구체적인 수치로 보여줘야만 반짝 관심을 보일 뿐이다.

 

서구 문화는 곧 성취와 소유만이 유일한 가치이었기에  신뢰와 공감에 근거한 자아의 뿌리는 말라 비틀어져버리고 적대감과 폭력이 그 문화를 대체했다. 소유에 대한 권력구조와 경제탐욕이 곧 유럽위기나 세계금융위기는 개인의 내면을 점점 더 피폐하시키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빈곤이 왜 위험한가. 빈곤은 굶주리는 것만이 아니라 남보다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빈곤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거나 종종 자신을 불필요하고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모두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잣대 삼아 삶의 의미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서구 문화는 가난을 수치이자 게으름 탓으로 돌린다. 과연 그럴까? 

 

인간은 누구나 타인으로 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러한 욕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성취되지 못할 때 인간은 열등감을 느끼며 공허해한다. 이 욕구의 결핍이 크게는 전쟁으로부터,폭력,강간,살인,사회적 범죄로 그 욕구를 분출하게 된다. 부와 사회적 지위 같은 외면의 가치를 중요시하던 문화를 거세시켜 내면의 가치를 존중시키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힘 주어 노 작가는 젊은이와 기성세대에게 함성을 울린다.

 

비극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저자 아르노 그륀이 단호하게 처방전을 내놓는다. 우리의 문화가 생각과 감정에 족쇄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아야 한다고. 우리는 사유재산을 인정되고 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성공에 도달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규칙을 먼저 배운다.그러면서 고유한 사고 과정을 방해하는 이미 확정된 사고의 틀에 무의식적으로 의지한다. 이 사회는 자신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믿지 말라고 명령한다, 독창적인 존재가 되어 선하고 정직하며 이타적인 사람들,자신의 고유성을 인식하며 타인을 위한 일에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들은 권력과 성공,돈에 가치를 두지 않고 내적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의 힘이 우위에 있을 때 총구가 생산되지 않는 평화는 올 것이다.

 

충분한 사랑을 받고 성장한 아이는 우의와 공감을 키워간다. 학교는 끊임없이 외적성공을 위해 가르친다.이미 어릴때부터 지배자 피지배자를 양산하고 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과목은 국.영.수다.도덕은 없다.선생님도 임용고시만 패스하면 사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외적 성공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내면의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사람들은 외면의 가치를 추구하게 마련이다.내며 깊숙이 결핍과 상처가 자리 잡은 사람들은 부와 권력과 명예에 집착한다.

 

알콜,마약,도박,우울증 등을 포함해 사회적으로 정신질환자들이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다. 그들의 치료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병원에 입원시켜 약물치료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약물을 치료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병원은 드물다. 인위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은 완치가 불가능하다. 소통이라는 인간의 오감이 함께 환자와 작동할때 그들을 다시 사회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다. 치료가 아닌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이 목적화 된다면 그들이 결국 우리사회에 총구를 겨냥할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c*********o 2012.07.07.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