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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이길 요량으로 가볍게 집어든 책, 더우니까 짧아야 한다는 나의 진리를 '아흔 아홉'에 걸었다. 이 고문같은 더위는 살갗을 태우는데, 아흔 아홉의 대관령 고갯길엔 눈발이 흩날렸다. 아~ 나의 선택은 그래도 Go를 외치게 만드는구나!
이름도 없는 주인공 '그'는 정물화를 닮은 아내와 자꾸 그림 밖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Y를 애인으로 둔 행복에 겨운 인간이다.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스릴과 즐거움이 상승곡선을 타고 가던 어느 날, 아내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대관령 일대를 방황한다. 딱히 아내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불안한 맘을 달래기 위해서랄까. 아내가 없는 휑한 집구석이 불안하고, 아직도 ‘사랑해’라는 문자를 날리게 되는 Y와의 관계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고, 아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불안한 마음을 풍경에서 위로받기 위해서 움직인다. 로드무비 같은 '여행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어딘가 정착할 수 없는 맘에 말 없는 자연이 들어와 콕~ 박히듯이. 여행의 출발과 도착이 어딘지 막연한 여정처럼 문장에서도 예고 없이 아무 때나 단어를 타고 과거로 흘러들며 여행한다.
인간사엔 명확한 이유같은 건 없다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라도 사연들을 정확하게 풀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하얀 눈발이 흩날릴 때 자취를 감춘 아내의 이유와 그간의 행적들을 밝혀주길 기대했던 나의 바램과 달리 작가는 풍경 속에 이유들을 흩어지게 내버려뒀다. 파헤치기를 선호하는 나의 성향과 달라서 답답하기도 했으나,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을 다시 찾지 않는 것처럼 과거들은 땅 속에서 우리를 성장시키는 영양분으로써 역할을 다하도록 남겨두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이 소설 속에 담긴 무수한 풍경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이리라.
이미 로드무비로도 한 번 만들어진 적 있는 작가의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처럼 잔잔하고 조용하게 변화하는 풍경들을 글로 읽고 상상하는 즐거움, 동시에 눈 덮인 대관령 아흔 아홉 고개의 찬바람을 숨 가쁘게 들이마실 수 있었던 이 폭염 속에 한 줄기 시원함, 나는 그렇게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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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식의 하소연이랄까? 그렇게 된 까닭이 세상의 무분별한 의욕들이 되었든, 인간의 내재적 한계이든, 혹은 그네들이 뿜어대는 광기의 혼란이든 여하튼 어쩌지 못하겠다는 얘기인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일까? 그저 동류(同類)로서의 공감이면 족하다는 것일까? 아님 이 원인들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것인가? 그래서 어렴풋이 알아냈기로 인간이 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또 어쩌겠는가? 그냥 얘기를 즐기고 너나 나나 같지 아니한가? 라고 푸념을 나누자는 말인가?
소설은 이러한 시니컬한 의문들을 연잇게 한다. ‘아흔아홉’이란 헤아리기에는 많은 것 같고, 무언가 여운이 남는 수가 발휘하는 영감이 이 소설로 유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숫자에 감추어진 결점을 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 탓일 것이다. 장점이 곧 단점이 되어 허무하고 공허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되니 말이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구불구불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지 않아도 돼서 아흔아홉 고개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곳이 소설의 배경이다. 하기 좋은 말로 설렁설렁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가며 강원도 산세와 풍광을 보는 것이 어찌 고달프기만 한 것이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차량으로 오르내려도 그 답답함과 짜증을 이겨내는데 족히 시간이상이 걸리는데 즐거운 고개이기만 하겠는가? 더구나 소달구지나 봇짐을 지고 걷는 옛사람들에게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새로 뚫린 터널과 산 중턱과 중턱을 잇는 수직의 교각이 죽 늘어서 이젠 직선의 도로를 그냥 내달릴 수 있다. 그래서 동과 서를 분리하던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 고개가 그렇게 어떤 분절을 상징하는 기호의 자리를 고수하지 못한다. 소설은 바로 이 새로운 길과 옛 길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 앉아 시간의 다름, 인식의 다름, 관념의 다름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사념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것이 이것인가, 저것인가와 같이 선명하다면 무슨 근심이 있고 불안이 있겠는가? 서로 다른 시간, 그 속도의 감각이 여전히 우리들 몸에 새겨진 태고의 시간과 갈등하고 충돌한다. 우린 그래서 방황한다.
대관령 옛길과 새 길이 바라보이는 자락에서 서울을 오가는 대학 강사인 남자가 있다. 어느 날 늦은 귀가에 아내의 부재를 발견한다. 그녀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남자에게 Y라는 애인이 있다. 아내 눈을 피해 만나는 여자. 새 길은 남자의 바람기에 일조하는 길이다. 휙 달려갔다, 휙 달려오는 길. 사라진 아내는 남자의 외도 길이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니 새 길은 삶의 안정을 방해하는 파괴의 기호인 셈이다. 대관령 끝자락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그 정적인 시간의 세계가 속도의 시대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는 실종된 아내를 찾아다니지만 적극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내를 기다린다. 그리고 Y의 몸을 생각한다. 정과 동, 빠름과 느림, 직선과 곡선의 혼화(混和)속에서 무엇이 삶의 답인지 식별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부재한 집에서 홀로이, 때론 친구들과 어울려 술병을 쌓아간다. 이 기다림의 의식이 흐르고 일 년여가 지난 날 문득 아내가 집에 들어선다.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부재로 쌓인 묶은 얼룩들을, 마치 남자의 부정의 흔적을 찾아내 제거해버리려는 듯 꼼꼼히 씻어 내린다. 그리고 Y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전화 속 멀리에서 들려온다. 뱃속의 생명을 지워버린 여자의 흐느낌이.
오랜 침묵 끝에 집에 돌아온 아내와 남자의 대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했느냐,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느냐이다. 여자는 시인하고, 남자는 부인한다. 어렵다. 여자가 기대하는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남자는? 여자는 남자의 애인 Y에게 세 사람이 함께하는 소풍을 제안하고, Y는 흔쾌히 수락하고 이들 셋은 산행을 한다. 두 여자는 자매처럼 손을 잡고 남자를 앞서 거닐고, 남자는 짐 가득한 배낭을 메고 뒤를 따른다.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사실은 우리네 인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이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세 사람의 대화는 소설을, 아흔아홉 구불구불 인생길을 압축한다.
“근데 왜 하필 아흔아홉 굽이야?” “백 굽이라고 하면 허탈하잖아”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안 들 것 같아요.” Y가 거들었다. “아흔 아홉은 허파에 바람 든 사내들을 부르는 고갯길.” 아내의 한탄조였다. “고갯길을 바라보며 그 사내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한숨 숫자.” Y의 답가였다. “밤늦게 그 사내가 회한에 젖어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에이!” 아내와 Y가 동시에 조소를 보냈다. “야유를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는 흰 선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는 몇 번째 굽이를 돌고 있는 거지?” - P 169 중에서
채워져서 미리 기를 꺾지 않아 기어오르도록 하지만, 이 유혹이 한숨과 회한의 길인 것이 인생이란 선문답(禪問答)일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중얼거림이 눈길을 끈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이 그런 것이란 걸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소심한 항변일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 게다가 지금 어디쯤 인생굽이를 돌고 있는 줄. 결국 이 시니컬한 푸념 자체가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니, 소설의 시작을 떫게 읽어나가던 시선이 슬그머니 쑥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조탁(彫琢)되지 않은 일상의 언어들이 삶의 모습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체에도 더욱 정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도 고백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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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작품들은 홍상수의 영화를 닮았다. (조금은) 찌질한 고등교육 받은 백수(혹은 거기에 준하는 남자 사람)가 등장하고, 그 남자들은 대개 본능에 충실해서 ‘여자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남자는 여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문제의 해결은 늘 여자들이 한다. 남자들은 문제 앞에서 늘 수동적이거나 문제 자체를 회피하려고 한다. 물론 그건 고의가 아닐 것이다. 다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성인이라기보다는 ‘유아’에 가깝다.) 이 인물들이 몸담고 있는 삶의 공간은 ‘서울’과는 거리가 멀다. 홍상수의 영화들이 대체로 지방의 도시들을 배경으로 하듯이 (서울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그의 영화속에 등장하는 서울은 ‘한국 관광의 해’ 등에서 서울을 홍보할 때 절대 등장하지 않을 만한 곳들이다) 김도연의 작품들에도 항상 ‘강원도’가 등장한다. ‘그 곳’에서, 세련된 것이나 문명의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인물들은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산다. 남자는 아내와 애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그 와중에 과부가 나오는 삼계탕집에서 여자들의 몸을 주무르기도 한다. 아내가 가출한 동안 아내의 친구가 하는 카페에 가서 함께 술을 마시다 일행 중 하나와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것도 아내가 부재한 집에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 남자의 ‘수컷 본능’은 구제불능인 것일까? 애인의 존재를 알게 된 아내는 집을 나가고 1년의 시간이 흐른다. 집나갔던 아내가 집에 돌아올 즈음 이번엔 애인이었던 Y가 잠적한다. 아내가 행방불명되었을 때처럼 남자는 애인을 찾으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소극적으로) 고민한다. 그 와중에도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린다. 무시로 내리는 눈은 (작품의 배경은 강원도라는 걸 기억하자) 날이 풀리면 녹았다 추워지면 다시 쌓이기를 반복한다. 이게 이 작품의 전부이다.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단순한 구성이다. 이야기 역시 새로울 것 하나 없다. 그런데 이게 김도연이다. 어떤 사람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계속 보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를 세 가지 이상 꼽을 수 있는 독자라면 아마 이 작품도 좋아할 가능성이 크다.
글쎄… 이 이야기를 영화나 드라마(‘TV 문학관’ 류로 만들기 좋은 작품이다)로 만든다면 작품 중에 상징처럼 계속 등장하는 게 바람 자루일 것 같다. (나라면 그럴 것 같다. 묵음처리한 상태에서 바람자루의 이미지를 자주 보여주고 싶다.) 이 자루는 구멍이 트여 있기에 바람이 쉴새 없이 넘나들 수 있다. 바람이 많이 불 때는 미칠 듯이 요동치다가 바람이 잠잠하면 침묵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바람이 드셀 때에야 비로소 바람자루의 존재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잔뜩 바람을 품은 돛의 위용처럼, 바람을 가득 머금은 바람자루는 그제서야 제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어찌보면 이것이 삶의 역설이자 아이러니가 아닐런지. 그러니깐 제 스스로 존재감이나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바람’이라는 존재를 통해서야만 자신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수컷 본성’이라는 것은 제 스스로 어른이 되지 못하는 ‘유아적 남성’들의 어찌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선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바람을 핀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한눈파는 행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확장 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나 풍파 없는 잔잔하고 평온한 삶을 바라면서도, 실제로 그런 삶이 계속되면 (우리가 흔히 ‘일상’이라 부르는) 어쩔 줄 몰라한다. 뭔가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사람들을 갈구한다. 일상을 깨줄. 그래서 인생은 역설적이다. 감당도 못할 바람을 갈구한다는 측면에서. 곧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러거나 말거나… 인간은 제 식대로 산다. 결국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하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큼만 감당하면서. “어린 시절엔 정말로 대관령이 아흔아홉 굽이인 줄 알았어.” “아니란 말이야?” 아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닐 거야. 그냥 상징적인 숫자겠지.” “근데 왜 하필 아흔아홉 굽이야?” “백 굽이라고 하면 허탈하잖아.”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안 들 것 같아요.” Y가 거들었다. “아흔아홉은 허파에 바람 든 사내들을 부르는 고갯길.” 아내의 한탄조였다. “고갯길을 바라보며 그 사내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한숨 숫자.” Y의 답가였다. “밤늦게 그 사내가 회한에 젖어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pp.168-169)
그런데 김도연인 이게 바로 인간이고 이게 바로 인생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구질구질한 너 자신을 인정해라. 네 삶이 구질구질하다는 것도 인정해라. 그러거나 말거나 진흙 같은 세상 속에서도 소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 삶의 역설이자 진리이다. (김도연의 작품들은 대개 불교의 심우도(尋牛圖)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아흔아홉… 아흔아홉…… 아흔아홉……. 백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아흔아홉. 그 길에서 쳇바퀴를 굴리며 걸어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아흔아홉이라는 사랑. 아흔아홉이라는 미망. 아흔아홉이라는 희망. 아흔아홉이라는 변명. 아흔아홉이라는…… 쓸쓸함. [1]
멸균 상태의 인공적인 평화나 안온함이 아니라 사랑이기도 했다 미망이기도 했다 희망이기도 했다 변명이기도 했다 쓸쓸하기도 한 것, 그게 바로 인생이다. 거기서 네 자신의 소를 찾아라.
[덧붙임] 특이하게도 ‘작가의 말’이 앞에 있다. 대체로 ‘작가의 말’이 앞에 있는 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변명부터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김도연의 책을 딱 한 권만 고르라면 이 책은 아닐 것 같다. 나라면『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쪽을 고르겠다. 그쪽이 훨씬 김도연답다. 김도연의 특성이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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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아흔아홉.작가정신. 표지만보고저는스릴러인가.음습하고우울하게느껴졌는데.ㅎㅎ대관령을배경으로하는불륜이야기입니다.ㅎㅎ 한번도가본적없던대관령에대한궁금증을마구증폭시켜준소설이기도합니다.잘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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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혼란스럽고 무기력한 모습이 공감 가면서도 화나고 쓸쓸한 책이었다. 아내한테 이입이 많이 되어서 화도 많이 났는데 등장인물 모두가 안개 속에 존재하는갓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스토리는 끝까지 탄탄하고 흥미롭고 재밌어서 좋았다. #사락독서챌린지 #아흔아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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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 김도연 지음 작가정신
만약 아내(남편)과 애인과 함께 소풍을 가자고 제안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는 댓글 이벤트에 ☞ ㅠㅠ 아내와 애인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니... 저는 당연히 안 갑니다. 저는 아이를 낳고부터는 라고 댓글을 달고, 당첨되어 이 책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더위를 극복하려고 이 책을 읽었지요~ 오랫 만에 에로물(?)을 읽어본 것 같아요. 제 취향은 아니고...... 마음과 몸이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여자의 심정은 어떨까요? 1년 간의 가출을 겪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당사자가 아니고, 경험이 없는 일이라... 막상 닥치면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또한 이미 아내가 있는 남편을 사랑하는 Y의 마음은 어떨까요? 전혀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는? 아내와 애인을 동반하고 산을 오르는 남자라는 존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네요. 2012.8.11. 새로운 이야기에 밤을 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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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사라져 남편이 아내를 찾아 다니는.. 그러한 과정을 쓴 책이었어요. 이렇게만 말하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를 찾는 모습이 상상되겠지만 사실은 남편에게는 내연녀인 Y가 있어서 전혀 아름다운 로맨스적인 내용은 아니었습니다.'0'
책은 위의 사진처럼 검정색 표지였고, 크기는 일반 책보다는 작았습니다. 그리고 200쪽으로 이루어진 얇은 책이었습니다. 글씨 크기도 일반 사이즈보다는 조금 커서 읽기도 쉬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고, 아담하며 글씨 크기가 조금 큰 책을 좋아해서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굉장히 전개가 빠른 편이었어요. 뭔가 빨리 지나갔고, 그래서 어지럽고, 복잡한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어렵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용은 어렵지 않고, 읽기 쉽습니다.^_^*
부부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저는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20대 초반이어서 그런거겠죠? 음.. 결혼하신 분들이 보시기에 공감이 될 책인 것 같아요.~ 요즘 우리나라의 부부들의 현실에 대해서 보여준 것 같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 소수의 부부들은 대화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귀기 전보다 결혼 한 후에 서로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뉴스를 보고 책을 봐서 그런지 정말 요즘 현실을 보여준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부는 부부지만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뭔가 삭막한 느낌... 아내를 사랑해서 열심히 찾는 다는 느낌보다는 의무감으로 찾는 느낌? 그래서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1년 뒤에 돌아와서 서로 그때 부터 이야기를 하는데, 참.. 일찍 대화를 하고 서로에 대해 신경을 썼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반성도 하면서 깨닫기도 한 책입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나의 미래 결혼 생활은 어떨지? 뭐.. 이런 생각도 하기도 했구요.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도 갖구요~
아흔아홉.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생각을 하게 해준 다소 복잡했던 책입니다.^^ 하지만 전개가 빨라서 쉽게 읽을 수 있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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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대관령 이야기를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대관령이 아흔 아홉 굽이로 이루어져 있듯이 삶의 고개길을 작가는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내가 사라졌다. 아내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아내를 기다리며 답답해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아내가 아닌 여인 Y. 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이렇게 많이 쓰는 걸까? 아내말고 남편 말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한다는 것이 로맨틴하기만 한걸까? 아니면 그 속에서 현실과 다른 환타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마치 이미 잡은 물고기에게는 떡밥을 주지 않는 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내에게서 소식이 없는 그는 청소도 하지 않고 옷고 갈아입지 않고 아내가 나간 그 시점에서 모든 일상이 멈춰버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경찰서에 나간 아내를 찾아달라는 호소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y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가 사라진 이상 이미 y와의 만남도 그닥 해피하지만은 않다. 무언가 내 안에 채워진 것이 있을때 바깥에 나가면 바깥 세상이 환상적이기라도 한것처럼 남편은 아내가 없는 빈자리를 채울수 없다. y역시 그 빈자리가 달갑지만은 않게 다가온다.
문득 친구에게서 연락이 오고 친구와 아내의 여자친구가 운영하는 찻집에 가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만남을 갖고 또 시간은 흘러간다. y는 역시나 남편 옆에서 맴맴 돈다. 그리고 아내가 사라지고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듯한 시간 y도 남편과의 관계가 시들해지고 만다. 딱히 설명할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멀어지게 한것은 아닐까? 그들이 유지해야하는 그 유지가 그들에겐 힘겨운 벌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아내는 어느날 아무일없었다는 듯이 돌아온다. 남편은 아내에게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디있었는지 묻지만 아내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던 아내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내 빈자리를 메꾸어줄 누군가가 없을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기라도 하는듯이 그리고 나 역시 그 빈자리를 내 안에 가득 채워보리라는 기대를 해보지만 그 역시 허사였다는 것을 아내는 깨닫기라도 한듯이 무너지듯 이야기한다.
그와 동시에 아내는 y와의 소풍을 제안하고 남편과 아내 y는 소풍을 떠난다. 소풍을 위해 아내는 친구와의 즐거운 소풍을 준비하듯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준비한다. 남편과 y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아내는 더욱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일까? 그 소풍에서 셋은 또 다른 공간속에 놓이게 된다.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듯한 몽환적인 현실을 만나게 된다. 삶이란 어쩌면 현실을 넘어서는 그무엇이다. 그리고 넘어서는 그곳은 곧 외면하려 했던 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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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 왠지 백이라는 숫자에서 하나가 빠진 무언가 허전함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생의 모든 고비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해요. 가끔은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저 무관심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느끼지 못할때가 있죠. 마치 우리가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하지만 정작 공기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고 무관심한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공기는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지만 정작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책에 나오는 부부의 관계처럼 말이죠. 어느날 아내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는 그 허전함을 느끼죠. 텅 빈 집. 친구들. 그리고 밀애 상대. 가장 무서운 적은 멀리 두지말고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던가요? 셋이 함께 대관령으로 떠나는 길. 그와 아내와 애인. 참 묘한 조합이죠? 사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흔아홉은 바로 대관령을 의미해요. 고개가 험한 그곳. 어떻게보면 대관령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어쩌면 우리들 인생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지? 왜 다른 멋진 관광지를 놔두고 그 험한 고개로 함께 소풍을 떠났을까요? 오르고 또 오르고 굽이굽이 산길. 그 산길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 질투 등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인생의 모든 문제를 초월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그 공간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과연 사랑이, 삶이, 인생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 등. 마치 인생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억는 것 같은.. 바람처럼 그저 지나가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죠. 인생 무상이랄까요? 그 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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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설국>의 이미지를 이 책에서 강하게 느낀 터라 부랴부랴 책의 첫머리를 찾아 인터넷 서점 미리 보기로 다시 들어갔다. 배송되어 온 책의 앞부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17페이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맙소사였다.
<설국>이 한 여행자와 그가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방문하는 지방의 게이샤와의 불륜(?)을 다룬 소설이고, 이 책 또한 한 남자가 아내를 두고 Y라는 여자와 외도를 하는 내용을 다룬 소설인데,설국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미처 느낄 수 없었던 혐오스러운 감정이 소설 <아흔아홉>에서는 드러난다.
그것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집을 비웠고, 일 년이 넘도록 연락조차 닿지 않는 그녀의 존재가 그의 의식 속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존재감을 붙잡아두기 위해 아내의 친구를 등장시키기도 하는데, 이처럼 마음속 한켠의 죄스러움과Y에 대한 욕망이 뒤범벅된 감정이 그의 내면에 남아 있고, Y 역시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터라.두 사람은 마음껏 행위를 즐길 수가 없고, 그를 바라보는 독자의 입장도 매우 불편하다.
이 불편한 감정을 김도연 작가는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게 기가 막히게 절묘하다. 이런 기법을 소설용어로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방식을 단순히 말하자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귀로 듣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 즉 오감에서 표출되는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려진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것은 음악이 흐르고, 몸을 움직이고, 무언가를 듣고, 어떤 생각을 떠올린다”와 같이 정돈된. 순차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어떤 음악이 들려온다고 치면 그 노래의 가사를 서술하고, 그 음악이 흐르는 시간 사이사이에 들려오는 옆 사람의 대화.눈으로 보는 이미지를 이리저리 끼워 넣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그런 방식을 반복해서 전개된다.
따라서 이런 문장을 읽는 동안 상당한 혼란스러움이 몰려온다. 소설이 어렵다기보다는 무엇을 말하는지 좀 명확하지 않은 편이다. 특히, 그가 혼란에 허우적거리는 앞부분이 더욱 그러하다.거기에다가 짜여있지 않은 듯한 불규칙한 시점의 이동은 이를 더욱 가중시킨다. 이를 통해 독자가 눈으로 읽는 문장에서 그의 감정이 혼란스럽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이런 특이한 서술 방법과 훌륭한 문장력 그리고 자주 의인화한 사물과 동물. 그리고 군데군데 <파리대왕>처럼 성행위 장면을 연상시키는 서술표현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무능한 모습과 일 년이라는 기간이 지난 후. 나타나서 모든 것을 포용하려 하는 아내의 결단이 과연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돌면서 쏟아 낼 수 있을만한 해결책인가 라는 의문은 있다.
결국,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중에 희생(이게 희생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을지도 모르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부일처제의 사회계약으로 봤을 때. 이것은 희생이 생각한다.)해야 하는 이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여성이 이 소설의 결말에 동의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