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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책을 읽으면서 샘 솟는듯한 기쁨을 느낄 때가 있는데 오디세이 세미나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책을 읽는 도중 몇 번이나 앞부분으로 가서 이름을 찾아보고 내용을 다시 기억해야 할 정도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읽는 내내 즐거움을 느꼈다.
이 책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바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대니얼 멘델슨 교수의 오디세이 세미나(토론식 수업)에 아버지 제이가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업에 참여하면서 일어난 일과 둘이 함께 유람선을 타고 오디세우스의 흔적을 찾아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아버지 제이가 아들 대니얼의 오디세이 수업을 듣고 유람선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을 보면 사이가 좋은 부자지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니얼은 아버지에게 수학문제를 물어볼 때마다 벌벌 떨었고 감정표현에 인색한 아버지이기에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제이는 수학을 전공하고 전투기를 개발하는 그루만사에서 일했으며 회사를 나온 후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교수로 일하다 퇴직했다)
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면서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발표하고 오디세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에서 다른 사람들과도 자유롭게 교감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아버지를 재 발견한다. 대니얼은 수업과 여행에서 보여준 다른 모습의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에 아버지의 지인들을 찾아가는데 아버지가 총명하고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에 비례해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유달리 자식들의 영민함, 직업(교수) 등을 자랑하고 엄청나게 기뻐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제이는 라틴어 수업을 좋아했음에도 중도에 포기했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했다)
대니얼은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나와는 달리 끝까지 하도록 밀어주는 아버지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아들이 자기보다 많은 것을 성취하기를 바라고,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없었던 것이다"라고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우스를 찾으려 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아버지 라에테르스를 만나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이해하는 내용이 너무 훌륭하다.
"아버지라면 육체와 마음으로 아들을 만들고 자기의 야망과 꿈 그리고 냉정함과 실패를 통해 아들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아들은 비록 아버지로부터 나왔지만 아버지를 모두 알 수는 없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이미 훨씬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아들은 그를 따라잡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알수는 없는 것이다. "
"인생은 여정 본연의 정신을 잊지 말고 새로운 여정을 구하고 찾고 노력하는 것, 인생은 어떻게든 살만하다. 자기가 바라는 최종 목적지에 가지 못하더라도 도중에 획득한 재산과 지식을 가지고 그 섬에 닻을 내려 풍요로운 노인이 되라는, 인생은 목적지가 아니라 가는 여정에 있다"
어렵고 힘든 고전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진다. 오디세이를 여는 열쇠를 손에 쥔 것 같다. 자 이제 오디세이에 도전해보자!
너무 즐겁게 읽었는데 정리를 잘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중에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다시 읽고 정리해야겠다. 그럴 날이 곧 오기를~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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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여전히 통용되면서 삶의 지혜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재 많은 문제에 그대로 노출된 현대인들에게 고전에 대한 열풍이 일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정말 고전이 현대인들에게 유용한 의미를 줄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물론 고전이 실용서적이 아니기에 그러한 유용함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으나, 적어도 고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면 그것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대니얼 멘델슨의 [오디세이 세미나]는 그러한 부분을 세미나라는 형식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특히 고전이라 불리우지만,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오디세이]를 그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은 고전이 현대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모호함을 확실히 걷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평론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오디세이]를 강의 주제로 선정하여 학생들과 세미나 방식의 수업을 진행한다. 아울러 '오디세이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유람선 여행을 통하여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그대로 답습하는 과정도 병행하여 진행된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바로 이 과정에 그의 아버지가 참여한 것이다. 유람선 여행은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수업을 [오디세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듣겠다고 요청한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문학적 해석이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일이라는 소신과는 별도로 수학의 증명처럼 감정이나 주관적인 생각이 통용되지 않는 고전의 언어와 문법에 대해서는 확실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 p. 56 中에서 -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아버지가 과거에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로마 문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을 떠올린 저자는 고전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감안하여 그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오디세이]에 대한 세미나 및 여행은 점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저자를 엄격히 훈육하였으며, 꽤 무뚝뚝한 성격으로 인하여 둘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다고는 볼 수 없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계의 노인이 된 아버지와 중년이 된 아들이 [오디세이]에 대하여 함께 논쟁하고 생각을 나누는 부분은 바로 고전이 우리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이야기마저 이들 부자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고, 동시에 이들에 의하여 재해석될 수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앞서 고전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한 모호함을 불식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둘의 관계 만큼이나 [오디세이]를 바라보는 상이한 시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이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과정만큼이나 쉽지 않기에 또 하나의 보통 사람들의 영웅 이야기로도 다가오게 된다. 특히 오디세우스에 대한 아버지의 부정적인 시선은 묘하게 아버지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인 편견과 겹쳐지는 대목이 그렇게 느껴진다.
[오디세이]가 제기하고 있는 질문 중 하나는 생존을 위한 영웅주의란 어떤 내용이 될지를 탐색하는 것이라는 말로 저자는 우선 아버지의 오디세우스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려고 한다. 부하들을 죽음에 이르고 홀로 살아남았고,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칼립소와 부정을 저지른 점과 아테네를 비롯한 신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오디세우스를 비판하는 아버지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그의 [오디세이] 수업은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그러한 아버지의 지적이 오디세우스에서 비롯된 편견임을 밝히면서 이 고전에 담긴 다양한 숨겨진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의 주된 내용이 바로 그의 실제 강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저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의 모험담이라는 스토리에 주력하여 미처 알지 못한 부분들을 저자는 꼼꼼하게 설명한다.
[오디세이]의 시작이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현재 오디세우스가 없는 아티카의 상황을 설명한 부분은 이전에는 그저 오디세우스의 등장을 알리기 위한 서문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만, 텔레마키에 대한 불일치와 일관성 논란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가 바로 구전을 통하여 전승되었음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정확한 기록이 아닌 구전은 그 과정 중에 또 다른 구전가에 의하여 내용이 덧붙여지거나 삭제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텔레마키는 사실 [오디세이]에 추가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 고대 그리스 로마 연구가들은 [오디세이]의 첫 4권이 독립적인 소 서사시로 만들어졌다가 후에 [오디세이]에 붙여졌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여기에서 젊은 주인공이 수동적인 인물에서 긍정적인 인물로, 단순한 관찰자에서 열정적인 추구자로 발전하는 내용이 매우 힘 있게 서술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오디세우스의 젊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교육을 받고 인격이 형성되는 [텔레마키]의 소설적 궤도는 힘이 넘쳐나는 미니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 p. 161 中에서 -
헬레네와 메넬라오스의 이야기 역시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에 가려진 또 하나의 의미로 설명된다. 당초 아버지를 찾아나선 텔레마키의 조력자 정도로 묘사되던 이들이 그들의 대화를 통하여 젊은 텔레마키에게 결혼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는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만남은 물론 트로이 전쟁 이후 귀국한 아가멤논이 아내에게 살해되는 이야기로 확장지어 결혼이 서로가 공감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지하 세계에서 아킬레우스와의 만남은 단순히 먼저 죽은 자와 산 자의 해후가 아니라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상징적인 만남으로 해석하는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나에게 죽음에 대해 달콤한 말을 하지 말게 / 나는 말라 비틀어진 죽은 자들의 왕보다는 차라리 한 뙈기 땅 없이 생계가 힘들어서 / 농노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나을 것이오 - p. 240 中에서 - 오디세우스에게 건네는 아킬레우스의 이 말은 [일리아드]에서 죽음을 통하여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기에 충격적이다. 그저 죽은 자의 넋두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의 주체가 [일리아드]의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라는 점에서 그저 가볍게 지나칠 수 없게 된다. 이는 확장하여 생각해 본다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는 별개의 작품이 [오디세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처럼 저자는 학생과 아버지와 [오디세이]를 함께 하면서 우리에게 그간 몰랐던 의미를 전해준다. 이 과정은 고전이 시기에 따라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고전이 우리에게 일방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것보다 더 주목할 부분은 바로 시종일관 오디세우스에 대한 부정적인 아버지의 주장을 통하여 거꾸로 저자가 아버지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생동안 무엇인가를 믿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전체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단다." - p. 242 中에서 -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만남에 관한 아버지의 생각은 비록 저자의 문학사적인 시간에서는 무미건조한 표현처럼 보였지만, 이 말은 결국 그 역시 아버지를 그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디세이]는 이제 이들의 부자 관계는 물론 가족의 이야기로 새롭게 각색된다. 앞서 언급한 오디세우스에 대한 아버지의 비판에 대해서 저자는 처음에 아버지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일생에서 울지 않았다는 점과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아버지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가는 걸음마다 함께 있으마. 정 싫으면 우리가 같이 그만두고 돌아가자." 나는 서로 잡고 있는 손들을 내려다보았는데 놀랍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느라 둘러보면서 착잡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 p. 229 中에서 - 칼립소의 동굴을 방문하는 과정 중에 폐소 공포증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던 저자를 격려하면서 손을 잡아주는 아버지의 모습 역시 그동안의 삶에서 느낄 수 없었던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아버지와 함께 한 [오디세이]는 보통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도 통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이 세미나와 여행 이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지만, 저자는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아버지의 진정한 의미와 모습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고, 아버지 역시 그러했다.
[오디세이]에 대한 학문적인 분석과 그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책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고전이 우리의 삶에서도 함께 호흡하면서 존재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간 고전에 대한 의심을 갖고 있었다면 그건 거꾸로 우리가 여전히 고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신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무려 10년이 넘게 그의 고향인 아티카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인생을 향하는 데 필요한 고전이라는 나침반이 없다면 우리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동안 방황할 수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의지에 따라 그러한 나침반을 어렵지 않게 획득할 수 있다. 고전의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니라 그저 가까이 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니까.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교수 아들의 고전학 수업에 참여하는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몇 번의 참관은 해볼 수 있어도 아들과 고전학에 관심이 매우 많지 않다면 수업에 참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교수였던 아버지가 10대 학생들의 고전수업에 참여한다고 한다면 수업을 받는 학생들도 수업을 지도하는 아들도 불편 할 텐데(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딸이라면 절대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을듯하다.) 허용한 아들도, 학생들도 흥미로웠으며 어떤 식으로 세미나를 할지 몹시 기대되었다. 편도 2시간 반 이상을 들여 매주 수업에 들어와 많은 신입생들과 같이 2시간의 세미나를 듣는 저자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기원전 8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15000행의 24권에 이르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의 플롯과 은유적인 비유와 다음 이야기를 이끌 표식(이정표)들, 캐릭터들의 이름의 상징적인 의미와 성격 및 행동, 인물들의 감정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며 사랑, 결혼, 신뢰,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죽음, 욕망. 자만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들의 마음주제들과 연결하여 살펴본다. 주제와 밀접한 원문의 서사시 일부와 함께! 누가 자기를 낳아준 사람을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죽음과 탄생, 미래 예측과 과거 회상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진 <<오디세이>>는 서술과 연대기적 곡예를 통해 은밀하게 주인공의 전체 생애를 총 망라하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392쪽 텔레마코스가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찾아 여행을 떠나듯 저자 역시 오디세이 세미나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며 가족의 정체성,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특히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단면의 진실들을 보여준다. 아버지 본연의 모습과 아들이 아버지를 보는 모습과의 차이에 대한 긴장감을 잘 드러내면서 아버지를 입체적으로 바라본다. 인상적인 문구 남자와 아내가 함께 같은 생각을 가지면서 가정을 꾸미면: 적들에게는 엄청난 고난을, 친구들에게는 환희를 선사하고 그들 부부는 명성을 떨치리라 본문 179쪽 같은 생각을 가진이란 뜻으로 번역한 그리스어인 호모프로수네이는 생각을 ‘같은 방향으로 하다’인 동사 호모프로네인에서 나왔다.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의 유혹으로 7년간 억류되고 불사의 신으로 살아갈 수 있음에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목표를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페넬로페와 오디세이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품과 상관없이 같은 종교나 가치를 갖고 있는 부부가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서로를 신뢰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부정한 아내에 의해 살해된 아가멤논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페넬로페의 높은 정절과 지략 그리고 불신이 많은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를 의심하지 않는 동기도 설명된다. 남편의 부재로 오랜 세월 구혼자들이 재산을 축내며 괴롭혀도 흔들리지 않은 페넬로페, 부하들을 잃고 표류하거나 오랜 시간 억류되어도 기억을 잃지 않고 이정표(집으로의 귀환)를 향해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세파에 흔들리고 유혹당하지만 변질되지 않고 단단해지는 자아상이다. 이런 정체성이 내게 있는지 자문하게 한다. 정말로 그렇게 까지 인상적이지는 않구만! 시가 폐허보다 더욱 현실처럼 다가옴을 느낀단다 본문 202쪽 둘러보면서 중얼거리는 교수 아버지의 말이 인상적이다. 나 역시 지구 밖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을 헐떡거리며 올라갔지만 반복되는 긴 성벽이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내가 여러 유적에 대한 시나 감동의 글들을 접했을 때 느꼈던 감흥과 실제로 봤을 때의 공허한 풍경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당혹감, 허탈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감상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 도정을 추적할 뿐 아니라 저자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중 구조로 짜여있다. 머리말에도 나오지만 <오디세이>는 저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82세의 아버지와 오디세이 유람선 여행을 함께 하며 세미나 참석을 허용하고 겉모습만 알고 있던 아버지를 알아가며 아버지와 아들의 보이지 않는 끈을 이해하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서술방식을 가지고 있다. 노래(서술,모험)이 곳곳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전강의도 고전여행이며 오디세이 자체가 한 영웅의 모험이야기이며 실제로 유람선을 타고 오디세이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고전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저자가 학생과 아버지를 통해 오디세이를 새롭게 읽는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보여지는 아버지뿐 아니라 몰랐던 아버지를 알아가게 되는 부자간의 심리여행이라고 할까 원형 작문법의 형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정교하게 잘 엮어내고 있으며 문학적인 세미나란 제목을 달고 있듯 지적인 독자들을 만족시킬 만큼 오디세이를 깊게 읽을 수 있는 분석적인 요소들과 언어의 어원들을 새롭게 알 수 있어 다시 읽고 싶게 한다. 오디세이란 문학작품의 영웅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저자 개인의 사적인 가족이야기-특히 아버지-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존경과 애정을 담아낸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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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항해하는 데는 나침반이 필요하다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의 표지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나침반이 아니라 별자리를 보며 긴 여행과 항해를 계속해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테니 말입니다. 양장본 책일 것이라 기대했는데 종이표지라서 조금 놀랐습니다. 딱히 실망은 아니구요. 오히려 좀 가벼운 느낌이라 좋았습니다. 표지색감은 메탈느낌이 조금나는 청록색이랄까요? 청동색은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조금은 금속 느낌을 주는 색감이기는 합니다.
차례가 이렇습니다. 서시, 텔레마키, 모험담, 귀향, 인정, 무덤 또는 표지. 오디세이의 순서를 따라가는 듯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나의 소재에서 꼬리를 물고 다른 이야기로 가는 듯 하다가 다시 오디세이로 돌아오는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적당히 분위기 전환이 되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사실 차례만 보고는 내용이 너무 어려원서 읽는데 오래 걸리는 것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쉽게 읽힐 줄은 몰랐습니다. 글을 쓴 대니얼 멘델슨의 원래 이야기도 좋았겠지만 번역자의 번역이 매끄러웠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됩니다.
고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을 이렇게 되는가 봅니다. 많은 인문학 책들을 보면 말의 어원을 찾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그렇습니다. 오디세이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공부하는 사람이었기에 말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밟아가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여행이라는 것이 도로와 식량이고 힘들게 이동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어를 모를 경우 마법적인 세 번째 요소인 감정이라는 것이 이 호기심 많은 영웅의 이름에 녹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디세이>에는 오디세우스가 유아 시절 자기 이름을 부여받은 날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의 어원을 알려준다. 라틴어을 아는 사람이 viaticum에 숨어있는 via를 찾을 수 있듯이, 그리스어를 아는 사람은 Odysseus라는 이름에서 odyne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odyne 란 두 그리스어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디세우스란 이름은 물론 이 서사시의 뿌리다. 이 방대한 여행(voyage-journey-travel)이야기의 영우은 문자 그대로 '고통의 인간'이란 뜻이다. 그는 여행하는 사람이자 고통 받는 사람이다. p.36-37 오디세이가 그 이름에서부터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임을 이야기합니다. 트로이 전쟁 후 20년동안의 여행을 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이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더 큰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읽기 못한 오디세이를 제대로 읽어내고자 한 아버지가 아들이 오디세이 세미나에 참석합니다. 노교수로 퇴직한 아버지이기에 아들은 많이 걱정스럽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세미나에서 발언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세미나 참석을 허용하지요.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아들도 아버지가 충분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서 세미나 참석을 허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학자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면서도 그 형식적인 면에서 아버지와 닮은 자신의 모습을 찾는 작가를 보면, 어쩌면 이런 세미나(세미나와 수업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느꼈습니다. 우리가 겪은 세미나와는 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ㅜㅜ)를 통해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이야기를 생가할 때 비행기에 있었던 시간 내내 나와 아버지가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는 각자 자기 책이 있다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p.45 이렇게 은근슬쩍 아버지와의 닮은 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겉모습만 알 수 있는 익명성과 본연의 모습인 정체성 사이의 긴장은 <오디세이>의 플롯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목숨은 적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적절한 시점에 정체를 밝히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웅은 처음에는 아들, 다음에는 아내, 마지막으로는 아버지 등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친구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p.60 정체성(책 표지에서 말하고 있는 정체성은 성정체성인 듯 합니다만)이라는 문제가 이 부자지간에 큰 문제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커밍아웃했을 때도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이 부분에 대해 자신이 좀 더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으니까요. 아들은 인정받았다고 생각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있었던 듯 합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이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가 서로를 나름 이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 친구가 고전학자라면 그것은 나한테 물려받는 것이다." 나는 즐거운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며 책가방을 닫았다. 학생들에게 일어나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들이 노트북과 교과서를 백팩에 집어넣고 일어서려는데 아버지가 밭은 숨을 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나는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갑자기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는 말을 꺼냈다. "이것을 말해줘야겠다. 배우는 데는 나이 제한이 없단다." p.109 책 내용 중에 배운다는 것, 좋은 선생의 자질 같은 것들이 계속 언급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가르친다는 직종에 종사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좋은 선생님이란 단지 무엇을 할지, 무엇을 생각할지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지. 좋은 선생이란 어떻게, 무엇인가를 설명해주는 사람이란다. 선생은 너의 주변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도록 도와줘야 한단 말이다." p.126
정말 이상할 수도 있는 것이 가족인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가족과 비교해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험을 가지지 못하는 듯 합니다. 물론 tv에 나오는 가족들이 있어서 그 모습이 다른 가족들의 모습인가 보다 하는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방송에 보여지는 가족들이 절대 그 가족이 모든 모습일 수는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리스어 어형 변화표랍니다.시제 외울 때 쓰는 그런 것인가 봅니다. 이런 걸 보고 흥분하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걸 보면 이런 걸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해야겠지요. 배움을 만나는 순간 흥분되는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길을 계속 걸어도 되는 사람일 겁니다. 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 만남을 가졌다는 것에 말입니다. "누가 자기를 낳아준 사람을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이> 초반부에서 고통스럽게 묻는 말이다. 누가 정말로 알고 있을까? 우리는 부모한테 전혀 미스터리가 아닌데 부모는 그 반대로 우리한테 미스터리 그 자체다. p.208 "글쎄요. 한 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는 소년에게 어떤 게 더 위기일까요? 아버지 없이 평생을 사는 것하고 아니면 2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서 그를 알아야만 하는 것 말입니다." p.133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 확 와 닿은 내용은 아들은 아버지를 결코 모른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작가도 아버지를 몰랐던 것이었지요. 나중에서야 아버지를 알고 싶어 했고, 아버지를 아주 조금은 알게 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작가가 아버지를 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랑스러움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구요.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여행을 싫어하는 어머니 덕분에 여행을 쉽게 떠나지 않는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따라가는 유람선 여행을 함께 합니다. 오디세이 세미나를 마친 후였지요. 그 여행에서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엿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아들의 여행이 아버지를 새롭게 보는 여행이었다면 아버지의 여행은 아들과 함께(이 함께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는 모험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책이란 오래된 기술이야! 새로운 추세에 맞춰 살아가야지. 아이패드로 호메로스를 읽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게 바로 모험 아니겠니." p.233 그렇습니다. 모험이란 모름지기 이런 겁니다.
이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습니다. 1루수가 누구야, 2루수 이름이 뭐야, 3루수는 몰라. 이 개그가 이렇게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냥 단순한 말장난 이라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이런 말장난은 이렇게나 오래된 것이었던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장난, 재미를 좋아하나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 모두를 가진 모순적 존재이지요. 백이거나 흑이거나 회색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보면 보라색이기도, 파란색이기도, 주황색이기도 한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람은 한 가지 색이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삽니다. 사실 저도 그러니까요. 누구나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삶 속에서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냥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걸 알고 이런 빛깔을 가질 수도 있구나... 그렇게 바라보아야 겠습니다. "아무튼 내 말을 믿어주었으면 한다. 너희 교수의 아머니는 아름답단다." 중략 어떤 사람이 열띤 모습으로 아니면 권위를 갖고 적절한 말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고 사물을 다르게 보게 되고 사람들이 실제로 달리 보이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오디세이>에 무엇인가 맞는 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부부사이에는 자식들조차 모르는 비밀이 있고 결국에는 이를 기반으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오디세이>가 알려주고 있음을 시인한 것이다. p.356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너의 교수의 어머니는 아름답단다. 어떤 절절한 사랑고백보다도 아름답지 않은가요? 생의 마지막을 향해 하고 있는 한 남자의 고백입니다. 그는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처럼 같은 생각을 가진 소중한 아내가 있었던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나중에 이런 모습일 수 있기를 하고 바래봅니다. 오디세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디세이 세미나도 그런 이야기이구요. 하지만 더 큰 감동을 주는 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네요. 아무래도 제가 여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이건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하고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다르기에 느껴지는 무언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문구를 보면서 뭉클해집니다. 64년의 결혼생활. 그 결혼 생활 속에서 아름다웠단다가 아니라 아름답단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습니다. 저도 나중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책을 읽으면서 오디세이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아야 하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알고 나서 다시 보면 어릴 때 치기로 읽었던 오디세이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읽을 수 있을것 같아서요. 그리스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을 생각하며 오디세이 다시 읽기에 도전해보아야겠습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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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이 바로 내일이에요. - 영화 <사랑의 블랙홀> 中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기상캐스터 필 코너스는 매사 냉소적이다. 그러다 성촉절 취재 차 간 펜실베니아의 펑추토니에서 매일 같은 날을 반복하게 된다. 타임루프의 저주에 빠진 것이다. 즐거운 일탈도 잠시, 똑같은 하루하루가 지겨워 자살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심술궂던 필은 차츰 주변에 눈을 돌려 노숙자 노인을 도와주는 등 이웃의 대소사를 살피고 자기개발에도 열중한다. 필에게 매일 반복되는 하루는 이제 늘 같은 오늘이 아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는 좀 더 나은 자신이 되려는, 어느 지점에서든 어느 시점에서든 출발할 수 있는 여정이 된 것이다. 반복되는 시공을 맴도는 여행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필은 이 모든 것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풍요로운 인간이 되어 마침내 저주에서 벗어난다. 원을 돈다는 것 <오디세이 세미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오디세이> 텍스트를 나침반 삼아 함께 한 여정을 담고 있다. 저자인 대니얼 멘델슨은 대학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 제이 멘델슨이 이 수업을 청강하면서 부자의 여정은 시작한다. <오디세이> ‘세미나’라고 해서 서사시의 구조나 서구 문명화에 대한 비유와 상징이 넘쳐날 거란 생각은 마시라. 이 책은 미국 어느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이자 우리네 삶의 얘기다. 50년 전 지루한 선회를 거쳐 집으로 돌아온 여행 이후로 가장 멀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한 여행이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아들의 이야기,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두 번째 서른이 돼서야 <오디세이>가 인생지침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힌다. 50년 전 꼬마 대니얼에게 아버지는 여행에 관련하여 수수께끼를 낸다. "아무데도 가지 않으면서 어떻게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을까?” 정답은 “원을 돈다”이다. <오디세이>의 첫 수식어 ‘폴리트로포스’ polytropos는 회전을 많이 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충분히 방랑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오디세이 세미나> 역시 그 원형 原形이 그렇듯 수학자였던 아버지와 문헌학자인 아들의 이야기가 각자의 궤적을 그리다 어느 지점 - 혹은 시점 - 에서 함께 선회하는 원형 圓形 구조를 따른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오디세이>를 세밀하게 읽으면서 큰 그림은 무엇이고 조그만 것들이 큰 그림에 어떻게 맞아 떨어지는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 이런 문헌학적 독법과 <오디세이>의 궤적을 따르는 유람선 여행을 통해 멘델슨 부자의 교감은 차곡차곡 쌓인다.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 <오디세이>는 뮤즈가 원하는 임의의 시점, 혹은 지점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아닌’ 한 남자가 트로이 전쟁 후 귀국길에 오른 지도 7년이 지났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 아내를 만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이 남자는 트로이 목마로 그리스군을 승리로 이끈 이타카의 군주 오디세우스다. 이처럼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중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름과 유사한 발음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책략의 대가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와의 싸움에서 이를 영리하게 써먹는다. 네 눈을 찌른 게 누구냐고 묻는 동료들에게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야’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도망가면서 자만심으로 신상을 노출하는 통에 ‘아무도 받지 않을’ 저주를 사서 받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데 10년이 걸린다. 폴리페모스의 동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게 ‘누구냐’고 묻는 것 역시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언어유희라고 저자는 짚어준다. 그리스어로 ‘누구냐’(me tis)는 ‘술책’(metis)과 발음이 같다는 것이다. 하나의 상황에서 참과 거짓이 공존하는 게 가능할까? 세미나를 마치고 <오디세이>의 행적을 좇는 유람선 여행에서 저자는 아버지 제이 멘델슨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놀란다. 아들이 보아온 심술 맞고 완고한 노인은 유람선에서 호방하고 트인 노신사가 되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가 1930~40년대 자신감과 영악함, 건방진 행동의 시대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노인네라는 것을 깨닫고 저자는 정체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원의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파노라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한 것 여행을 뜻하는 영어단어 중 ‘journey’는 본디 ‘하루에 한 것’이라는 프랑스 고어 ‘jornee’에서, 궁극적으로는 라틴어 ‘diudru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먼 옛날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달할 때 도로상의 ‘거리’보다 하루의 이동을 표현하는 것이 편했고, 자연스럽게 하루에 이동한 것이 여정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변했다고 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 ‘travel’은 감정의 영역으로, 여행의 고됨을 품고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오디세우스의 이름 Odysseus에 들어 있는 ‘odyne’은 고통이라는 뜻으로 ‘odyssey’는 오랜 방랑과 모험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방대한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타임루프의 저주에 빠진 필. <사랑의 블랙홀>의 원제 ‘그라운드호그 데이’ groundhog day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좋지 않은 상황’을 나타내는 관용어가 된 지 오래다. 필은 리타에게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지만 호감을 사는 데 매번 실패한다. 하루하루 반복해서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진정으로 리타를 마주하면서 그녀가 좋아하는 시를 읊고 문학을 이야기고 여러 가지 자기 계발에 몰두하게 된다. 오늘은 무한히 반복되지 않는가. 어느덧 필은 지성과 예술로 충만한 삶을 살고 사랑도 이루게 된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필이 타임루프에서 보낸 시간이 족히 10년 이상은 걸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이타카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스 경제 위기로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나는 통에 멘델슨 부자는 여행의 정점이자 최종 목적지인 이타카에 갈 수 없게 된다. 대신 저자가 번역하여 출간한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스의 시 <이타카>를 주제로 조그마한 강연을 연다. 카바피스의 <이타카>는 “도착하지 않는 것의 덕목”을 노래한 시로 예상치 못한 여정을 대신하는 데 있어 탁월한 선택이었다. 항상 당신 마음에 이타카를 유념하라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너의 최종 목적이라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서두르지는 말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오 : 이타카가 당신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도중에 획득한 것으로 풍요로운 노인이 되어 그 섬에 닻을 내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오 저자의 말대로 이젠 대중문화 속 상투적 문구가 돼버렸지만 여행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을 거치면서 일어나는 변화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달렸다고 저자는 재차 강조한다. 마침내 타임루프의 저주에서 벗어난 필은 펑추토니에 닻을 내린다. 1초도 있기 싫다며 치를 떨던 곳에서 말이다. 멘델슨 부자는 이타카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나침반은 제 역할을 다했다. 이타카가 형편없다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그녀가 당신을 속인 것이 아니오 당신이 언제인가 많은 경험을 쌓고 현명해질 때 그때서야 당신은 이런 이타카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멘델슨 부자의 여정을 좇다 어느새 그 원형 原形을 다시 꺼내 본다. 이 그리스 고전은 이번엔 어느 방향으로 가는 나침반이 되어줄까? |
![]() 오디세이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기원전 약 700년경에 쓴 작품으로, 일리아드와 같이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일리아드가 트로이 전쟁 중이었던 이야기를 다룬다면 오디세이는 그 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트로이 전쟁 후 오디세우스가 10년에 걸쳐 귀향하는 과정을 그린 모험담이다. 원래는 장편 서사시 형태로 되어 있어 시대상과 배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함축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근현대시나 고대시를 배울때도 역사나 시대상을 모르면 겉만 읽고 끝나듯이 고대 서양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오디세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하나하나 집어주며 해설해 주고 있어 조금이라도 더 오디세이를 이해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오디세이의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트로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한 항해를 한다. 올림푸스 신들이 결정한 그의 운명은 고난과 역경이 가득차 있어 평탄한 귀향을 할 수가 없다. 이타카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왕비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자들이 궁전에 몰려들어 그의 재산을 탕진한다. 오디세우스는 항해중에 포세이돈의 아들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이 갇히기도 하고, 식인 거인족을 만나 전우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치기도 한다. 또 요정 칼립소의 섬에 갇히는 등 천신만고 끝에 고향 이타카의 섬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고교시절 그리스 고전은 중도에 포기한 컴퓨터를 전공한 아버지가 오디세이를 읽겠다는 일념으로 고전학자이자 교수인 아들의 오디세이 강의에 참석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인생 이야기를 오디세우스의 모험담과 엮어 풀어가는 인생의 지침서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란 속임수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머리가 잘 돌고 용감하긴 하지만 불투명한 거래, 회피, 거짓말, 교활한 어법으로 유명한 책략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일을 정당하게 하지는 않는 남자이다. 그는 요정 칼립소의 강요였긴 했지만 잠자리를 같이 했고, 스케리에라는 섬에서 나우시카 공주에게 자신이 그녀의 배우자감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사람임을 내비칠 정도로 호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돌고 돌아 결국은 부인인 페넬로페에게 돌아간다. 이 책에서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이 탕진한 남편의 재산을 속임수를 통해 구혼자들에게 선물로 되받은것 처럼,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에게 호감을 표현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고 그곳을 떠난 것처럼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오디세우스가 돌고 돌긴 했지만 불멸을 약속한 칼립소를 버리고 결국 페넬로페에게 돌아온 것은, 부부 사이에는 외모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은 비밀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이로 인해 서로 더욱 소중히 여길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자 관계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인생 목적은 아들을 교육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가르침은 인생은 고통스러운 여정이기에 오만을 떨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살면서 겪는 여정이나 돌아가는 우회길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시를 인용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최종 목적지에 가지 못하더라도 도중에 획득한 재산과 지식을 가지고, 그 섬에 닻을 내려 풍요로운 노인이 되라."는 충고를 한다. 즉, 인생의 목표한 바를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생의 목적은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정에 있으니, 상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 박사학위를 포기했지만 그의 삶이 헛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계속적으로 신의 도움을 받으며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며, 고군분투하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 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비슷한 고민들을 한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현재 우리 인생에 하나의 나침반을 얻은 듯하다. #오디세이세미나, #오디세이, #대니얼멘델슨, #민국홍, #바다출판사, #원탁의 서평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