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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평범하게라도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남들처럼, 중간만, 보통 정도, 평범하네, 같은 말은 아주 좋지도 더 나쁠 것도 없는 중립적인 상태를 일컬으면서 그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지만 더 나쁘지 않음에 안도하기에 적정한 마지노선을 제공한다. 특히나 청소년기에는 이 보통 정도, 평범에서 탈피한 특별한 나가 되고 싶고 나아가 특출난 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절정을 이룬다. 물론 이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바라는 부분이다. 하지만 미성숙된 자아의 상태에서 바라는 보통 혹은 평범을 탈피한 그것과는 사고의 확장적 개념에서 어느 정도는 차이가 있다. 남들과는 다른 삶, 남들보다 더 나은 특별한 삶을 살고 싶은 한 소년이 있다. 본인 말에 따르면 성적도, 이름도, 키도, 얼굴도 모든 게 보통이어서 반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물론 존재의 유무조차도 흐릿한 아이. 이쓰오는 나른하게 이어지는 삶의 연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루하루를 한숨으로 보낸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나날을 거추장스럽다고까지 표현하는 걸 보면 정말로 재미가 없긴 없나 보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봐, 그 거추장스러운 나날이 오히려 엎드려 절을 할 만큼 감사한 나날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이쓰오네 집은 한갓 짓 시골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여관을 하고 있다. 경제난을 이기지 못해 주변의 이웃 여관들이 하나 둘 파산하는 마당이지만 이쓰오네 여관은 그럭저럭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나 이 역시도 현재로선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서 있는 거와 같다. 모두가 떠나는 마당에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키려는 건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전통을 고수하며 지키려는 할머니 때문이다. 부잣집 규수였다는 할머니가 남들보다 특별했던 그 삶을 벗어던지고 집을 뛰쳐나와 여관에 취직하고 주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무용담처럼 입버릇처럼 내내 하는 말씀이다.
"몇십 년 동안 계속 거짓말을 하면…… 어느덧 거짓말이 진실이 되는 법이지."-176쪽
한 번 두 번 치기 어린 마음으로 시작된 거짓말 속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삶이 이어진다. 이쓰오의 할머니가 그랬고 어쩌면 아쓰코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거라 배웠다. 성적이 나쁜 것보다 거짓말을 하면 더 많은 혼쭐이 났다. 공부를 못해도 거짓부렁을 하는 아이는 되지 말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살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거짓말, 그 후에 오는 정신적 타격이 더 크기에 진실의 파장이 크더라도 그냥 솔직해지고 말자 생각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 거짓말이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거짓에 열광하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을 보고 그에 더 신이 나서 버릇처럼 거짓을 고하는 이들을 오히려 안쓰럽게 바라봐야 하는 건 아닐까 같은 꽤 너그러운 척하는 내가 있다. 사실 난 너그럽지 못하다. 그래서 이들을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반 평생을 거짓으로 만들어진 '나'의 삶을 살아온 이쓰오의 할머니도 아픈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쓰코도....
"나, 내가 만든 추억 속에서 살아가기로 했어."-130쪽
사실과 다른 편지를 묻어둠으로써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믿고 추억이라 말하고 살아가려고 했던 아쓰코가 마음 아픈 한편 참으로 답답하게 다가왔다. 아직 아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넘어가자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말하지 못한 그 어른스러움에 아프다. 아쓰코를 이렇게 만든 건 어떻게 보면 세상이고 어른인 우리니까. 그 아이가 편히 기댈 곳을 만들어주지 못한 부모도 학교도 친구도.... 모두가 그 아이의 가해자다.
이 소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주인공 이쓰오가 바라보는 시각으로 전개된다. 거짓으로 만들어진 '부잣집 딸'로 살아오셨던 할머니와 반 아이들의 무자비한 집단 폭력에 짓밟힌 아쓰코가 그들이다. 이들의 상처를 드러내고 보듬어주며 이쓰오가 삶을 알아가는 게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일테다. 이들과 물의 관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시골 마을의 '댐 건설'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용했던 시골 마을에 댐이 들어서게 되고 보상금을 받기에 혈안이 돼 있던 시골 사람들의 무지한 욕심에서 아니 어쩌면 욕심이라기보다는 그들도 이제는 더 나은 삶을 살아보고자 했던 바람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의 욕심 탓에 최대의 희생자는 결국 아이들이 된다. 그 가운데 할머니-의 어린 시절-가 있다. 그리고 그 댐을 자신의 안식처로 택하고자 했던 아쓰코가 있다. 부모의 이혼으로 전학을 오게 된 아쓰코는 첫날부터 반 여자아이들의 집단 따돌림과 폭력의 목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쓰코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되는 듯했으나 동생의 선물로 줄 봉제인형을 훔친 걸 이쓰오가 알게 되고 둘은 부자연스러우면서 은밀한 공범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바꿔치기할 공범자로 이쓰오를 지목한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학교에서 시행하게 한 20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타임캡슐 속 편지에는 반 아이들에게 당했던 집단구타와 따돌림의 내용과 함께 어른이 된 그들에게 심적 자책감이라는 '복수'를 하기로 했으나 돌연 이 편지를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으로 바꿔치기하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만들어낸 행복, 만들어낸 추억 속의 아쓰코... 그러니까 거짓의 편지이다.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고 바랐던 일이 있었던 일처럼... 만들어 낸 거짓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한 사람의 삶과 거짓으로 꾸며낸 평범한 행복 속으로 이제 막 걸어 들어가려는 한 소녀의 삶. 이 두 대착점에서 이쓰오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으려 한다. 외려 아쓰코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린다. 그래서 그런 일은 일어나게 되었다. 만약 이쓰오의 행동과 반응이 달라졌다면... 아쓰코의 불가피한 선택은 달라졌을까? 부모의 이혼과 엄마와의 소원한 관계와 학교 친구들의 폭력과 따돌림 속에서 해방되고 구원받기를 원했던 한 소녀의 마지막 선택이 향하는 곳은 작금의 사회를 보는 듯해 마음이 좋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청소년들의 비행과 사건사고...그리고 죽음. 남겨진 자들의 모든 게 '네 탓'이라고 오용하는 사례들... 네 탓 내 탓 같은 누구를 탓하는 게 우선이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구조 즉 원인을 제공한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 굳이 뭔가를 탓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 앞에서 누구를 탓하는 게 무슨 소용일 것인가. 물론 소설은 성장소설에 걸맞게 해피엔딩이다. 다만 걸쩍지근한 해피엔딩이랄까.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향한 아쓰코의 용서도 마지막 엔딩도 억지스럽게 서정적으로 끼워 맞춘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뭐든지 물속 깊숙이 묻어버린다고 다가 아니잖아. 망각의 강을 건너면 당장은 행복하겠지, 하지만 평생을 망각의 강 속에서 허우적 대야 할거야. 그래서 이는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궁극적으로 누가 치유 받고 누가 구원 받은 거지? 현실을 회피하려한 아쓰코? 아니면 기억을 잃어버린 할머니? 떽~!
"도롱이벌레는......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단다." "사람하고 비슷하다고요?" "도롱이를 보고 모두 도롱이벌레라고 부르지 않느냐. 네 동생뿐만 아니라 어른도 그렇지. 도롱이를 보면 모두 도롱이벌레라고 불러. 실은 안에 든 까만 애벌레가 도롱이벌레인데." "그게 왜 사람이랑 닮았다는 건가요?" "그도 그런 게 사람도 모두 밖에 나와 있는 부분만 보지 않니. 진짜 알맹이는 보지도 않고 밖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믿어버리지." "색종이랑 털실로 꾸며놓으면 모두 예쁜 도롱이벌레라고 말하지만, 알맹이는 똑같아. 그냥 까만 애벌레 그대로야."-323~324쪽
근본적으로는 모두 똑같다. 인간 역시도. 상처를 감추고 또 감춰서 급기야는 그것이 곪아 터질 때가 되어야 드러내려 하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은 미련하게도 상처를 치유해줄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게 청소년이 됐든 어른이 됐든 그 누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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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니체는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잊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하는 것 ,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쉬울까? 누군가가 처절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 고통의 기억을 시간을 되돌려 지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순간을 지운 채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행복일까. 아니면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행복할까? 차동엽 신부님은 <잊혀진 질문>에서 고통 속으로 걸어가다 보면 고통의 작동메커니즘은 보호의 기능과 단련의 기능으로서 나타나 정신적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준다고 하였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위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의 문명을 이룬 것이라고 하였듯이 고통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 ![]()
<물의 관>은 성장소설인데 첫 시작을 너무 심각하게 시작한 듯하다. 요즘 뒤숭숭한 사건과 사고를 많이 접한 상태가 정신이 멍한 탓도 있다. 이웃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여중생의 자살소식이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사고로 인해 하반신 불구가 된 친구 딸의 맑은 눈망울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괴로운 탓도 있다. 그러나, 고통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하였던가. 살아가면서 인생에는 누구나에게 똑같은 몫의 어려움이나 고통이 온다고 한다. 그게 어떤 이에게는 젊은 날이 될 수도 있고, 다 늙어서 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이 찾아왔을 때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요즘이다.
<물의 관>의 등장인물은 크게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이쓰오와 아쓰코이지만, 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인물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할머니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전학 온 뒤로 반에서 왕따와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아쓰코는 엄마의 무관심과 이제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동생과 가난한 생활속에서 삶의 의욕도 없고 폭행의 공포에 길들어져 가면서 아무 희망을 느끼지 못한 채 죽기로 결심한다. 그 이전에 학교에서 20년후의 자신에게 편지쓴 타임캡슐을 떠올리고 내용을 바꾸어 놓기로 한다. 20년 후의 자신에게 평범한 편지를 써놓으면 자신의 삶도 변할 거라고 믿는 아쓰코는 작년 타임캡슐에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의 이름을 써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살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자살하였다고 믿게 되는 것이 두렵기에 자신의 편지를 지극히 평범하고도 보통의 아이로 꾸며야 한다.
“계속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에는 마음에 서서히 이끼가 끼면서 결국에는 아픔과 차가움, 목을 넘어가는 액체의 온도나 맛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계속 그랬다면 분명히 언제까지고 참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괴롭힘이 중단된 그 순간, 이끼가 벗겨져 아쓰코의 마음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야 말았다. 아쓰코는 언제 그 아이들의 손이, 발이, 말이 날아들지 모르는 캄캄한 곳에 벗겨진 마음과 함께 방치되었다.”
반면 이쓰오는 부잣집에서 자란 할머니의 푸념을 들으며 어린 동생을 돌보며 생활력 강한 어머니와 나약한 아버지를 보는 일상의 지루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아쓰코가 동생생일날 줄 선물로 인형을 훔친 사실을 알게 되면서 , 둘은 비밀을 공유하는 동지적 유대감이 생기게 된다. 이후, 아쓰코가 집단 괴롭힘과 폭행을 당하는 것을 눈치채게 되고 아쓰코의 타임캡슐을 찾아주는 것을 도와주려 하는데 ...
“내가 만든 추억 속에서 살아가기로 했어.”
아쓰코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쓰오는 부잣집 외동 딸로 살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할머니의 과거를 우연히 알게 되고, 오히려 아쓰코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애써 잊고 살아가는 할머니와 타임캡슐에 쓴 편지가 자신의 삶을 좌우할 거라 믿는 아쓰코의 모습은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잣집 외동딸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살았던 할머니, 타임캡슐에 자신의 평범하고도 평범한 모습을 써 넣으면 자신의 삶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아쓰코,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는 이쓰오. 이쓰오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와 아쓰코를 위해 할머니의 과거 아픔투성이인 고향의 댐이자 아쓰코가 몸을 던지려던 그곳에서 자신들의 형상을 닮은 인형을 던지는 의식을 하는 것으로 상처를 던져버리는 의식을 치른다. 인형과 함께 아픔과 고통을 물의 관속에 담아 다시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우비에 감싸여 눈부신 금색으로 빛나는 공기가 정말로 아름다워서 눈을 떠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미치오 슈스케는 사람의 상처를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 뛰어난 작가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졌을지라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상처를 극복하거나 다독이는 방법을 잘 모르기에, 아주 작은 상처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잊는다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한다는 것, 그 차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동시에 아직도 자신의 상처를 잊은 채 방치하고 있다면, 물의 관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잊은 것이 아니다.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 고통을 마주볼 수 있어야 상처가 치유된다. 이들이 만날 때, 항상 여우비가 내리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교집하는 곳이기 때문이리라...눈부시게 햇볕이 쨍쨍한 날 아름답게 내리는 비가 한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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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나오키상 수상작 '달과 게'를 통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작가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 『물의 관』이다. 평소 미스터리 장르소설에 관심이 많아 강력한 임팩트나 서스펜스 스릴을 기대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우비처럼 맑고 눈부신 감성으로 쓰여졌다고 해야 하나, 덤덤하면서도 물처럼 흐르는 감정선을 잘 살린 동화같다고 해야 하나? 심리적인 갈등상태나 내면의 세계를 풍경이나 사물에 빗대어 응축시키고 있다.
"도롱이벌레는.....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단다." "도롱이를 보고 모두 도롱이 벌레라고 부르지 않느냐. 네 동생뿐만 아니라 어른도 그렇지. 도롱이를 보면 모두 도롱이벌레라고 불러. 실은 안에 든 까만 애벌레가 도롱이벌레인데." "그도 그런 게, 사람도 모두 밖에 나와 있는 부분만 보지 않니. 진짜 알맹이는 보지도 않고 밖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믿어버리지." "색종이랑 털실로 꾸며놓으면 모두 예쁜 도롱이벌레라고 말하지만, 알맹이는 똑같아. 그냥 까만 애벌레 그대로야." P323-324
일상이 단조롭고 권태로워서 평범을 거부하는 소년 이쓰오와, 소외와 고통 속에 내몰려 평범을 동경하는 소녀 아쓰코, 두 아이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과 주인공 시점을 병행하고 있다. 그리고 70년의 세월 뒤에 거짓으로 숨겨둔 할머니 이쿠의 상처가 이 둘 사이에 결합하는데 각자 자신들의 지난한 상처들을 댐 호수에 묻고 서서히 치유와 극복의 간극을 경험하게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댐 호수는 치유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제목을 왜 댐이라 정하지 않고 ‘물의 관’이라 칭했는지, 언어유희만이 아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과거 속에 기생하여 현재까지 따라다니는 상처를 죽이고 싶었고, 잊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차마 자신만은 살고 싶었던 이유에서다. 햇빛 아래 쏟아지는 여우비처럼, 밤새 캐낸 타임캡슐처럼, 색종이와 털실로 꾸며진 도롱이 벌레처럼 따스한 시선으로 상처를 어루만져준 마법같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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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색상의 표지. 이번에는 좋아할수만은 없습니다. 표지 속 소녀를 보니 괜시리 제가 좋아하는 이 색마저 슬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일이진 모르겠지만 신발도 신지 않고 외로이 서 있는 것일까요? 감정을 억누르고 울음을 참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평범을 넘어 비범, 특별함을 꿈꿉니다. 남들과 다른 삶을 꿈꿉니다. 지루한 일상이 아닌 새로운 것을 꿈꾸는 이들이 있는 반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어찌보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은 지루해 보일수도 있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이 그리 재미없어 보일수 있지만 평범함의 행복을 안다면 더 이상의 욕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벗어나고픈 이쓰오, 평범함을 꿈꾸는 아쓰코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금은 충격적입니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어쩌면 전 아쓰코 또래의 아이가 있기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읽기보다는 아쓰코가 당하는 일들만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친구들은 아쓰코에게 그러는 것일까요? 친구..그들에게는 친구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반에 있지만 아쓰코가 왕따를 당하고 있는지 이쓰오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힘들때, 아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상대를 보면 그 아이를 따돌리면서 즐거워하는 법이지...그건 도대체 어떤 심리일까. 누군가를 비웃는 동안은 자기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지. - 본문 181쪽
자신이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쓰코. 그 소녀가 유일하게 자신이 왕따 당한 사실을 말한것은 타임캡슐에 넣을 편지 뿐입니다. 20년 후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가해자들이 그 편지를 받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던 아쓰코. 하지만 그런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 편지를 바꾸려 합니다. 왕따를 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생활을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쓰면 그 편지대로 평범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이쓰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왕따 당한 이야기를 하며 타임캡슐 속의 편지를 바꾸려 하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하다. 죽기가 무서웠으니까. 싫었으니까. 살고 싶었으니까. - 본문 278쪽
아쓰코가 바란 것은 큰 것이 아니였습니다. 가족들과 평범함의 행복을 꿈꾸는 소녀의 마음이 욕심인 것일까요? 사실 책을 덮으면서도 모리사키 미카 패거리는 쉽게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또래의 아이가 있기에 어찌보면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관대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아이같은 아쓰코에게 더 이상의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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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슈스케 소설 속 심연엔 딜레마가 있다.
그건 개미지옥과 같다. 삐져나오려 버둥거릴수록 오히려 더 깊이 끌려들어가기만 할 뿐인...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딜레마란 삶이란 것 자체에서 오는 딜레마다. 사람은 자기를 구속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원하는 한 편으로 막상 자유함으로 한 껏 열려진 세상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 지 몰라 두려워서 다시금 껍질 속에 웅크려 있기를 원한다. 그 처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정작 떠나려고 하면 그 익숙해진 현실이 커다란 유혹으로 다가온다. 삶이 가진 영원한 딜레마다. 슈스케의 인물들은 바로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달과 게'에 나왔던 '소라게'는 그야말로 슈스케 속 인물들의 단적인 상징과도 같다.
늘 벗어나고 싶어하는 껍질을 삶이 가진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언제든 거기로 도피할 수 있도록 자기 몸의 한 부분으로 삼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존재들이 바로 슈스케 속 인물들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처가, 아픔이 현존하고 있어 내내 통증을 호소하여 온다면... 그럴 때 당신은 어떡할 것인가?
'구체의 뱀' 이후 슈스케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란 걸, 나는 이번에 나온 '물의 관' 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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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았던 '소라게'를 라이터 불로 지지면서, 그렇게 유대교에서 자신의 죄를 양에게 전가시켜 불태움으로써 용서받았던 대속의 제의와도 같은 유희를 통해 현실의 상처를 때때로 지워버렸던 '달과 게'에서의 아이들의 놀이는 '구체의 뱀'에 이르러서는 '스노돔' 안에 간직해 두고서는 그대로 결빙시켜 버리더니 이번 '물의 관'에 이르러서는 이제 '수몰'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단 그렇게 슈스케가 지울 수 없고 현실 속에서 내내 반복되는 고통에 대한 첫 반응은 '의도적 망각'을 가져오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 한 부분에 스노돔을 만들어라. 상처를 그 안에 두고 그대로 결빙시켜 버려라.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상처가 깃들어 있다면 그걸 그대로 수몰시켜 버려라. 저 깊은 심연 속에서 시간이라는 해초들이 무성히 자라나 지워버릴 수 있게... 이런 주문을 독자들의 귓가에 읊고 있는 것이나 같다. 삶은 반복된다. 주인공 할머니의 삶은 그대로 주인공이 아는 여자 아이의 삶으로 다시 재생된다. 그 힘겨웠던 삶 속에서 소라게처럼 살아왔던 자신을 나타내는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도롱이'는 할머니에게서 여자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이건 주인공에게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현상이 된다. 고통은 그치지 않고 세대를 거치고 거쳐서 반복된다. 그 고통 속에서 삶이라는 것을 지속하려면 할머니가 그러했듯 '의도적 망각'이 필요하다. 프로이드도 말하지 않았던가! 무의식이 바라는 욕망은 현실 사회가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의식인 '이드'는 그것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위장 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꿈의 형상이라고. '의도적 망각'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할머니가 그랬듯 자기 기만의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어디 진실만 가지고 살아지는 법이던가? 때로 그것이 기만이든 아니든 거짓이 필요하다. 계속 살기 위해 스스로 속여야만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슈스케의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찾아왔다. 그래서 의도적 망각을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여자 아이 아버지가 들려준 어둔 바닷속 이야기처럼 혹은 주인공이 문화제 때 만든 유령의 집처럼 까맣게 어둡기만 한 삶을 오로지 작은 랜턴 불빛 하나만 의지한 채 걸어나가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슈스케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무엇보다 삶이라는 것이 그저 '우연한 깃듦'에 다름아니다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구체의 뱀'에서 주인공은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한다. '물의 관'에서 주인공은 '여관 집' 아들이다. 그 자각이 이러한 설정을 가져왔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모든 삶이란 바람이 쉬어가는 곳처럼 우연적 거처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더욱 자유를 원하는 한 편 두려움에 젓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린 사람과도 같이. 저려오는 팔의 아픔 때문에 당장이라도 놓아버리고 자유롭고 싶은 반면 눈에 보이는 저 까마득한 높이를 질주할 추락이 두려워 더욱 매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결국 거기서 아픔은 늘 현재를 부정하게 만든다. 삶은 단순히 그 아픔을 지우기 위한 수동적인 것이 되고 만다. 콧두레에 코를 꾄 소처럼 상처와 아픔에 삶이 내내 끌려가는 형국이다. 그래서 슈스케는 망각을 요청한다. 무엇을 망각해야 하나? 저려오는 이 팔의 아픔인가? 아니면 내가 추락할 저 높이인가? 결론은 모두 다이다.
아픔의 현존은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 진정한 선택은 늘 제대로 사유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아픔을 유보한다. 거리를 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슈스케는 그렇게 망각을 삶의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껴 안는다. 그리하여 '달과 게'에서는 보이지 않게 망각 속으로 흩어졌던 상처들이 이제는 '구체의 뱀'에선 스노돔으로, '물의 관'에서는 수몰된 것으로 그렇게 언제고 내킬 때마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실체가 된 것이다. 이건 변화이다. 깃든 상처란 지울 수 없다는 체념이자 기왕지사 삶이 우연적이며 때문에 상처로 부터 영원히 달아날 길이 없다면 보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망각을 안고 보듬어갈 수 밖에 없다는 고통스런 승인이다. 하지만 그게 삶이다. 삶은 우연적이고 문자그대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망만큼이나 희망 역시 열려있기 때문에 도박과도 같지만 견뎌나가야 한다. 어차피 삶이란 내기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결과란 죽음이 도래했을 때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는 계속해서 견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지가 될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붙잡아야 한다. '달과 게'에서의 대속적인 제의든 '구체의 뱀'이나 '물의 관'에서의 망각이든 무엇이든...
이것은 슈스케의 선동인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연민이다. 그는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아파하지만 그걸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 약한 존재인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자라는 어떤 흐느낌이 느껴진다. 그 절박한 호소가 와 닿는다. 그리고 그 호소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 슈스케가 성장하고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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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 청소년 소설들을 읽으면 밝은 내용보다는 왕따, 구타, 가출, 이혼 등이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더 많아서 읽는내내 불편하고 가슴이 아픈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물의 관' 역시 시종일관 침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년과 소녀는 중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이다. 소년 이쓰오는 마을 전체가 여관으로 이루어지다시피 한 곳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여관을 이어 받은 부모님과 동생,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2년 전 어느날 자기네 여관에 하룻밤 투숙하는 소녀 아쓰꼬를 만나게 된다. 아쓰꼬는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낯선 마을로 이사오게 되었으며 이사 첫 날에 엄마로부터 아버지와의 이혼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 소녀는 아버지가 선물로 준 열쇠고리를 버린다.
동성 친구가 다른 여학생에게 관심을 보이게 자신의 삶이 갑자기 너무나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쓰오와는 달리 평범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소녀 아쓰꼬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타인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 삶을 꿈꾸다는 것 만으로도 아쓰꼬가 동료 여학생들에게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아쓰꼬의 부탁으로 이쓰오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묻어 둔 타임캡슐 안의 편지를 바꿔치기 하기로 한다. 왜 그때 미처 그녀의 마음을 헤어리지 못했는지 내내 후회하는 이쓰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슬픔, 고통, 아픔의 무게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이쓰오는 아쓰꼬의 여동생을 데리고 아쓰꼬가 삶을 포기했던 장소를 가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아쓰꼬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학창시절의 추억? 객기어린 마음에 동료 학생을 왕따시키고 괴롭혔던 것을 성인이 된 이후에는 그럴수도 있는 일이지 않느냐는 식으로 오히려 반문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허나 당하는 당사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여기에 대한 책임은 전혀 생각 자체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 여동생에게 생일 선물도 하나 사주지 못하는 형편에 있는 아쓰꼬를 보면서 이쓰오는 동정은 아니지만 무관심에 가깝게 행동한다. 이쓰오 역시도 우연히 알게 된 거짓말 속에 자신의 삶을 묶어버린 할머니의 이야기와 아쓰오의 동생과 여관 절반에 걸친 관리와 살림을 하는 바쁜 엄마와는 다르게 무의도식에 가까운 아버지의 모습에 아쓰꼬와 했던 행동이 계기가 되어 폭발하고 마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아쓰오는 아버지에게 한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아쓰꼬가 죽을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무심했던 모습에서 할머니가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한 벗에 대한 짐까지 내려 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세사람은 할머니가 떠난 고향의 댐으로 가게 되고 자신들의 모습을 한 인형을 던지며 변화를 시도한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여우비가 내리는 모습이나 빛나는 별과 아름다운 전경들이 저절로 연상이 되어 아쓰꼬의 고통과 이쓰오의 허전함, 쓸쓸함이 더더욱 비교되게 느껴진다. 책표지의 울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프게 밟혔던 책으로 저자의 안 읽은 책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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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출장에서 돌아오는 금요일!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 가족 상봉의 들뜬 기분에 차 안에서도 발걸음이 분주하다. 하지만 이내 맘도 모르는지 어김없이 퇴근길 차량들이 내 발목을 부여 잡는다. 요즘같은 휴가시즌에는 이 작은 나라에 옹기종기 드리워진 도로들이 차로 가득 찬다. 오늘도 그랬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것 같다. 갑작스레 일이 밀린 관계로 휴가를 뒤로 미뤄버린 나로서는 부러움반, 짜증반... 뭐 그렇다. 시원한 돗자리에 누워 잘익은 수박 한 통 뜯으며 책 한권에 미소짓는 여유! 아마도 나에게 휴가란 이런 작은 휴식을 주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으악~~ 요즘 너무 바쁘다.
서설이 너무 길었나? ^^ 이번에 만날 작가는 미치오 슈스케다! 뭐 두말할 나위가 있겠나? 미치오 슈스케 바로 그다. 참 '슈스케 4' 가 다시 시작됐다고 하던데... 처음 슈스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를 TV에서 들었을때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마도 일본 미스터리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같은 경험을 했을것이다. 아마도... 이 여름 무더운 더위를 달래?줄 미치오 슈스케의 <물의 관>과 만난다. 언제나 이름만으로도 설레게 만드는 작가, 미치오 슈스케. 미치오 매직으로 찌는듯한 한밤의 열대야까지 날려가 줄 수 있을지 손끝이 조심스레 떨려온다.
한 소녀가 울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새 장, 새가 날아가 버렸는지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소녀의 발 아래는 물길에 휩싸인듯한 마을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소녀가 울고 있다. 표지만으로도 일본 작품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물의 관>이라는 제목 또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독특한 소재들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과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스토리셀러 미치오 슈스케가 이번엔 또 어떤 색다름을 선물해줄지 잔뜩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번에도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
'20년 후의 나에게' 라는 짧은 편지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요시카와 이쓰오라는 소년의 편지는 12살 또래 아이들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만, 그 아래에 쓰여진 기우치 아쓰코라는 소녀의 편지 내용은 약간은 살벌하기까지 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복수하기위해 적은 편지, 그것이 비로 아쓰코가 20년후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긴 내용이다. 써프라이즈!! 일본이나 우리나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와 같은 사회성 짙은 소재들에 대한 작품들은 꽤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치오 슈스케가 이런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제 그 단단하고 견고한 이야기들을 풀어내어보자.
'작년 가을, 비가 내리던 그날,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고 댐으로 향한 아스코를 쫓기 위해 이쓰오는 이 버스를 탔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미래 편지의 두 주인공인 이쓰오와 아쓰코는 그 편지 내용에서도 비춰지듯이 서로 전혀 다른 삶의 모습속에 살아간다. 모든게 '평범'이란 두 글자와 어울리는 이쓰오, 소년과는 다르게 가정의 불화와 학교 생활의 부적응으로 평범한 삶을 가장 손꼽는 소녀 아쓰코! 이 전혀 다른 두 소년 소녀가 마주한다. 우연하게 아쓰코의 잘못된 행동을 보게 되고 급관심을 갖게 된 이쓰오. 아쓰코는 초등학교 졸업행사에 묻은 타임캡슐 안의 편지를 바꿔치기 하는 걸 도와달라고 이쓰오에게 말한다. 바로 앞에서 말했던 20년 후의 나에게 쓴 편지 말이다. 그렇게 선택되듯, 끌리듯 아쓰코와 이쓰오는 소용돌이 속에서 평범함으로, 평범에서 일탈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미치오 슈스케가 미스터리속에 주인공을 아이들로 자주 이용하는 이유는 바로 청춘의 시간이 바로 미스터리한 시간, 상상과 환상의 방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시선에 비친 세상, 그것이 가장 선명한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이 사회의 거짓과 위선을 고스란히 내려놓는다. '미안해 스이카'처럼 극단적인 선택과 고백도 있을 수 있지만 미치오 슈스케는 그보다 삶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법에 조금더 신경을 쓰는듯하다. 웅크리고 성장통에 시달리는 청춘들, 조금씩 세상을 깨고 질주하려는 젊음의 이야기들이 미치오 슈스케식 푸르름으로 물든다.
걱정인형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건 어른이건 삶을 살아가면서 적어도 하나의 걱정거리가 없을 수가 있을까? 아쓰코가 던져버린 작은 인형이 아마도 소녀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짊어진 걱정인형이 아니었을까? 얼마전 직장내에서 왕따가 있다고 답을 한 사람이 45%가 넘는다는 뉴스를 접한적이 있다. 단지 학교내에서만 문제가 아니다. 학교 폭력과 왕따문제는 교문을 넘어 사회로 파급되고, 아니 오히려 어른들의 모습속에서 아이들은 학교내에서 폭력을 완성해가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이런 사회 문제에 대한 미치오 슈스케식 접근은 따스함과 여운이라 말할 수 있겠다. 긴박하고 미스터리함 속에서 그려지는 따스함과 마지막을 내려놓는 여운이 바로 독자들 자신이 많은 생각을 갖게끔 만든다.
미치오 슈스케의 광팬임을 자처하면서도 아직 만나보지 못한 작품이 몇 권정도 된다.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과 읽고 싶어 곧바로 구매를 하고도 책장 한구석에서 나의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는 '달과 게', '외눈박이 원숭이'도 이번 휴가 기간동안 만나볼 계획이다. 꼬옥! 하지만 이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 모두를 소장하고 함께하고 있다. 일본 미스터리에 눈을 뜨게 만들어준 작가, 일본 미스터리의 다양성을 손수 느끼게 해준 작가, 그래서 언제나 이름만으로도 설레이는 작가, 미치오 슈스케의 <물의 관>을 내려놓는다. 걱정인형에게 고민과 아픔을 내던지듯, 고통과 상처는 더이상 곁에 두지 않고 저 깊은 물속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미치오 매직이 앞으로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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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물의 관>은 <달과 게>로 2011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이다. 왕따와 학교폭력으로 괴로워하는 소녀 아쓰코,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년 이쓰오. 동급생인 아쓰코와 이쓰오는 초등학교 졸업 행사로 묻었던 타임캡슐 편지를 바꿔치기하기 위해 밤새도록 땅을 파낸다. 아쓰코와 이쓰오 외에도 이쓰오의 할머니도 가슴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가을바람에서 유황 냄새가 느껴졌다.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이 마을은 바람 냄새가 완전히 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계속 살던 사람들은 분명 모를 것이다. 다른 지방의 바람 냄새를 맡았을 때야 분명 다르다고 느끼리라.새로이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다르다는, 애매하지만 본능적인 감각기 그 여자애들의 지루한 일상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여자애들은 아쓰코를 무시하고, 물을 끼얹고, 알몸으로 만들어놓고 때리고, 발길질을 하고, 그 모습을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으며 깔깔 웃고, 수고했다면서 침을 뱉은 우유를 먹였다. 6학년 가을과 겨울. 동급생 대부분이 같은 중학교로 진학해 봄, 여름, 가을, 겨울. 2학년이 되어 다시 봄,여름.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소설 <물의 관>에서 이쓰오는 아쓰코와 할머니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려 노력한다. 평범함을 탈피하고 싶어하는 자신보다 아파했을 아쓰코와 할머니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려던 것이었으리라. 이쓰오, 아쓰코, 이쓰오의 할머니의 모습을 한 각각의 인형을 댐 호수에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인형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 떨어지는 건 세사람 각각의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상대에게 칼을 들이대는 대신에 자신의 팔에 칼을 그었던 아쓰코. 아쓰코는 상대에게 칼을 들이댔다가 만약 반대로 자신이 당해서 그 후로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뭔가를 해결하려는 것과 뭔가를 완전히 잊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할머니와 아쓰코를 보고 있자니 이쓰오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잊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이 댐 호수에 가라앉힌 것은 도대체 뭘까. "전부 잊고 오늘이 첫날이라는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에미코가 이쓰오에게 기분을 북돋아주기 위해 한 그말. 에미코가 말하고 싶었던 '잊는다'는 것은 정말로 기억에서 지우거나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다'라는 의미였을까. 이쓰오는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아쓰코는 극복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극복하기 전에 잊어버렸다. 하지만 어쩌면 할머니의 증상은 극복할 힘 대신에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이쓰오, 아쓰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폭력으로부터 희생당하던 아쓰코가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팔에 그었던 것도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서 벗어나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할머니가 치매로 과거를 극복하기 전 잊어버렸던 건, 할머니의 증상은 극복할 힘 대신에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잊는다는 것은 기억에서 지우거나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한다는 것이라는 글귀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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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정보 없이 단지 미치요 슈스케라는 작가 이름만으로 골랐던 책이다. 단순히 무언가 장르문학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누군가 나처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이 책은 장르소설은 아니다.그것보단 오히려 성장소설이라 말할 수 있겠다.주인공들의 생활을 따라가면서 어떤 사건에 대해서 쓰여지는.
여러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전개된다.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아쓰코. 다른 아이들에게 복수 하기 위해서 다같이 묻는 타임캡슐에 그들 모두에게 전하는 편지를 써서 남긴다. 자신은 죽어도 훗날 그들이 그 글을 보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결심을 하고서 나중에 마음이 바뀌게 되어 문화제 준비를 함께 하게 된 친구 이쓰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정통신문을 위조해 가면서까지 타임캡슐을 파내고 편지를 바꿔 놓기에 이른다. 아쓰코가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무얼까. 이쓰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아쓰코를 찾아 아쓰코의 동생과 함께 나서서 결국 댐 위에 서 있던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늦은 걸까. 마음을 되돌리기란. 아쓰코와 이쓰오. 두 명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들의 가정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쓰오의 할머니 이야기와 아쓰코의 동생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무언가 덜컹거리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한다. 이게 이 작가의 작품의 매력이었던가.내가 읽었던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검색해본다. 투명 카멜레온. 스켈리튼 키, 절벽의 밤, 수상한 중고상점. 대부분이 장르소설적인 책들이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작가는 장르소설로 각인되어 있었나보다.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내게 작가는 장르소설적인 면이 부각되는 책이 더 잘맞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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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단어의 조합과 표지의 그림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꽤나 소년의 심리를 잘 그려낸 성장 소설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어른의 시점에서 화자를 소년으로 설정하고 나면 은연중에 너무 성숙하거나 너무 유치해지기 쉬운데 그 중간 쯔음에서 소년의 심리변화를 무척이나 긴밀하게 묘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물의 관>이 미치오 슈스케의 책이라기에 주저없이 읽게 되었다. 여전히 소년과 소녀의 심리묘사가 뛰어나다. 저마다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스스로 낸 것일 수도 있고 주변에서 낸 것일 수도 있고 복합적으로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 저마다 성장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를 극복하거나 잊거나 묻어두거나 하는 식으로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물의 관> 속의 소년과 소녀, 그리고 이젠 늙어 할머니가 되었지만 소녀시절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애써 거짓말로 덮어두었던 할머니의 상처 극복법이 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낯선 곳으로 이사와 냄새마저 낯선 곳에서 겪게된 친구들의 괴롭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둔감한 어머니, 자신이 돌봐주어야 하는 동생 사이에서 아쓰코는 늘 평범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폭력과 폭력이 중간에 멈추었어도 언제 또 시작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아쓰코는 자살을 결심한다. 죽기 전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에게 쓴 편지를 타임캡슐에 넣었다가 자신의 과거가 괴로움으로 점철되는 것이 싫어져 그 편지를 다시 꺼내려 하는게 주 사건. 그것을 도와주는 여관집 이쓰오와 그의 할머니의 상처들도 잘 버무려지지만 주 사건은 아쓰코의 이지메와 편지 되찾기다.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는 댐 장면이라든지 할머니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아쓰코의 모습 등등은 미치오 슈스케의 탁월한 심리묘사에 힘입어 정말 좋았던 장면들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가진 책은 파본이었는데, 뒷부분에 8장 그러니까 16페이지가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있었다. 내용상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어서 괜찮았으나 분위기의 흐름이 좀 끊어져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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