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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에 옹알옹알 살구비누 열리네
두 살배기 계집아이로 돌아가기로 했어 어린 살구나무가 바지에 오줌 싸듯 울어보기로 했어 엄마 몰래 꿀꺽 비누를 집어삼킨 계집아이, 똥 기저귀 차고 화장실엔 왜 끌려가나 끌려가서 울긴 왜 우나 에비에비 퉤퉤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 집어넣는 엄마 금가락지 반짝, 살구나무에 열리고 하얗게 질린 내가 토해내는 것은 살구가 아니야 안녕! 살구나무야 기억하겠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란 똥 한 무더기 노란 똥 한 무더기 맛있게, 받아줄 수 있겠니 솥뚜껑 같은 손바닥 슬쩍, 뒤집으면 변기 뚜껑으로 변하는 나를 구역질해보는 비누 거품 속이야 생쥐처럼 비누 갉작대는 치매 할머니 똥 기저귀 차고 내려다보는 저기, 산등성이마다 동그란 무덤들 전생을 두들겨도 뽀얗게 우려낼 수 없는 영혼의 엉덩이들 살구나무에 옹알옹알 살구비누 열리고 백발성성해진 계집아이 하나 엉엉 울고 있어 빨래 방망이 하나 치켜들고 - 김륭,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살구나무와 살구비누는 일상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사물들이다. 봄이면 살구나무에서 살구꽃이 핀다. 살구 냄새가 나는 살구비누로 얼굴을 씻고 밖으로 나가면 활짝 핀 살구꽃이 우리를 맞는다. 일상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그 일상을 누린다. 시인은 누구나 누리는 이 일상을 비틀고 있다. 위 시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라는 제목에는 이미 일상의 바깥에서 일상을 보는 시인의 눈이 투영되어 있다. ‘살구’라는 말이 붙어 있지만 살구나무와 살구비누는 분명히 다른 대상이다. 살구나무에 열리는 건 살구 열매지 살구비누가 아니다. 시인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시인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일상을 비틀어 시적으로 낯선 세계를 우리 앞에 내놓는다.
낯선 세계로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두 살배기 계집아이로 돌아가기로 했어”라는 문장에 그 방법이 나와 있다. 시인은 두 살배기 계집애가 되어 “엄마 몰래 꿀꺽 비누를 집어삼킨”다. 아이는 살구비누에서 살구 냄새를 맡은 것일까? 감각으로 세상을 보는 존재가 아이들이니 살구비누 냄새를 살구와 동일시하는 아이 마음을 이해할 듯도 하다. 문제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살구나무와 살구비누를 뚜렷이 구분한다. 살구 냄새가 나는 살구를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똥 기저귀 차고 화장실에 끌려간 아이는 “에비에비 퉤퉤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 집어넣는” 엄마 행동에 그만 놀라 울음을 터뜨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는 살구가 아닌 무언가를 토해내는 상황에서도 “엄마 금가락지 반짝,” 하는 그 순간의 감각을 놓치지 않고 있다.
두 살배기 아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란 똥 한 무더기 노란 똥 한 무더기”를 살구나무가 “맛있게” 받아주는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아이는 손바닥 한 번 뒤집으면 변기 뚜껑으로 변한다. 비누 거품을 물고 구역질하는 아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활짝’ 웃고 있다. “에비에비 퉤퉤”를 외치는 어른들을 보며 우는 아이가 있고, 우는 아이를 보며 웃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새 역설이라는 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두 살배기 아이가 된 어른=시인이라는 상황 자체가 역설이 아닌가? 상상은 우는 아이를 웃는 아이로 만들고, 살구나무에서 살구비누가 열리는 뜻밖의 세상을 만든다. 현실이라고 해도 좋고, 환상이라고 해도 좋다. 현실과 환상을 나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현실 속에서 환상을 보고 환상 속에서 현실을 보는 게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 세계를 살고 있다.
아이는 이제 “생쥐처럼 비누 갉작대는 치매 할머니”가 된다. 치매 할머니는 똥 기저귀를 차고 “산등성이마다 동그란 무덤들”을 바라보고 있다. 두 살배기 아이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눈으로 “저기”를 본다. ‘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전생을 두들겨도 뽀얗게 우려낼 수 없는/ 영혼의 엉덩이들”이 있다. 똥 기저귀를 찬 아이=할머니는 살구나무에 살구비누가 열리는 기막힌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옹알옹알”이라는 시어로 시인은 살구나무에 살구비누가 열리는 상황을 묘사한다. ‘옹알옹알’은 갓난아기가 옹알대는 소리이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언어 이전에 아이가 옹알대는 소리가 있다. 언어 바깥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옹알대는 아기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를 두 눈으로 보고 있다. 눈을 감고 갓난아이가 옹알대는 소리를 들어보라. 느껴지는가? 거기에는 두 살배기 아이가 된 시인이 있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있다.
“백발성성해진 계집아이 하나”는 지금도 엉엉 울고 있다. “빨래 방망이 하나 치켜들고” 이 할머니=아이는 왜 하염없이 울고 있을까? “에비에비 퉤퉤”를 외치는 어른들이 여전히 살구나무와 살구비누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걸린 치매란 살구나무와 살구비누를 하나로 묶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겠는가? 자신이 살아온 기억을 하나하나 잃다 보면 치매 할머니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기”라는 말로 시인은 할머니가 서 있는 경계를 표현하고 있다. 두 살배기 아이와 할머니는 현실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경계에 놓여 있다. 논리가 스며들지 못하는 경계는 수많은 모순들로 들끓고 있다. 빨래 방망이 치켜들고 엉엉 우는 할머니는 아이가 되고, 아기가 되어 옹알옹알 살구비누를 갉아먹고 있다. 무슨 얘기냐고? 할머니가 살구비누 갉아먹는 이야기이다. 한 편의 시는 그렇게 다른 세계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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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독을 품고 사는 일보다 밥맛 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목덜미 꽉, 물어뜯는 한순간보다
오래 살고 싶을 때가 어디 있을까
저기, 대가리 빳빳하게 치켜든 독사 한 마리 질질
올챙이 시절 잘라버린 제 꼬리처럼 땅바닥에 끌고 가는
개구리보다 살맛 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보다 치명적인 독이 세상 어디 있을까
밥보다 오래된 독이 어디 있을까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한다. 어설프게 주고받으면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존재의 모든 것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사랑. 사랑은 본질적으로 치명적인 독이다. 매혹이고 중독이다.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목덜미 꽉, 물어뜯는 한순간보다 / 오래 살고 싶을 때”가 없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쩌면 “짝짓기가 아니”라 “자작극”(「늙은 지붕 위의 여우비처럼」)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들어보렴 누군가는 칼이라고 했지만 꿈틀, 우리는 서로가 숨긴 뱀을 꺼내들고 사랑을 속삭이지 길이 30-40cm에 굵기 2-3cm 축 늘어진 목구멍 가득 울음을 밀어 넣는 오늘은 밥 대신 살을 먹고 살던 시절의 후렴구”(「뱀의 형식」)라는 시구는 자작극 같은 사랑의 형식이다.
꽃과 딸에 대한 위험한 독법
그러니까, 나는 딸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다 아파트 베란다 마른 빨래처럼 널린 여자들에게 꽃을 안기고 물을 주었지만 무심했다, 하나뿐인 딸에게는 둥둥 그저 엉덩이나 두들겨주었을 뿐 발그레 익어가는 볼우물 가득 벌레나 풀어놓았을 뿐
딸을 꽃으로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뿐인 딸을 만나기도 전에 사랑해버린 것이다, 고백컨대 딸에게 떠먹인 밥알과 꾸역꾸역 내가 삼킨 눈물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나는 바람의 문체로 씨앗을 퍼뜨릴 수 없는 곡절이다
꽃대처럼 가늘고 긴 딸의 목에서 무슨 색이 올라올지 무슨 노래가 깨어날지 벌레 먹은 입을 노루발 밑에 떨어진 꽃잎처럼 주절주절 흩뜨려놓고 사는 것인데, 내 품을 떠난 딸의 처녀성이라도 찾아오고 싶은 것인데
그럴 때면 눈이 빨간 산토끼처럼 꽃밭에 쪼그려 앉아있는 내 성기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니까, 갈라선 아내가 키우고 있는 딸에게 모처럼 넣어본 전화를 꽃이 받는 순간의 낭패감이 찡- 눈을 찔러올 때마다 턱밑에 붉은 밑줄을 긋고 완성한 늙은 지붕 위로 구름은 깨진 화분 같은 몸을 올려놓았지만
꽃의 나이를 물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나는 딸과 꽃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못다 한 사랑은 그렇게 울컥, 나이를 먹고 나는 제대로 늙기도 전에 미치거나 시드는 꽃을 눈물로 잘못 읽은 것이다
사랑이 이성에 대한 것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애인과 아내, 딸과 아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같을 수는 없다. 아비의 딸에 대한 사랑은 선천적이다. “꽃으로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뿐인 딸을 만나기도 전에 / 사랑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딸에게 떠먹인 밥알과 꾸역꾸역 내가 삼킨 / 눈물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게 딸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건만 “나는 한 번도 딸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고 “갈라선 아내가 키우고 있는 딸에게 모처럼 넣어본 전화를 / 꽃이 받는 순간의 낭패감이 찡- 눈을 찔러”온다. 그렇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밥의 도덕성」) 밥을 먹어야 하고,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쌀 씻는 남자」) 듣는다. 그 또한 사랑처럼 어쩔 수 없는 영역인 밥의 형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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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이름의 시인이지만 시집 제목이 좋아서 산 시집. 김 륭 시인은 동시집을 두권이나 낸 분이지만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가 첫 시집이라고 한다.
사랑은 자작극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시집은 뭐랄까 좀 우울하다. '죽음'에 관한 말도 많고 부서지는 것, 사라지는 것 등 부정적인 말도 많다.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다 읽었는데도 사실 잘 모르겠다. 중간중간 맘에 드는 구절은 있었지만. 사랑에 빠졌잖아, 우리는 발이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놓은 곳은 없지만 바람의 발바닥이 두근두근 날개로 부르틀 때까지 꽃의 나이를 캐물을 수 있을 때까지 달리고 달리겠지만 - 새의 식탁 그대를 사랑한 후 알았다 단말마의 고통을 위해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꽃이다 - 살부림 독을 품고 사는 일보다 밥맛 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목덜미 콱, 물어뜯는 - 독사 울어라 울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살아서 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 바람의 육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얻기 위해 꼬리를 잘랐으나 저기, 저 꽃들은 바람의 발바닥이 붉다는 농담 따위나 히죽히죽 건넸을 뿐 - 눈물의 배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