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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강의 우리와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나라지만, 조금은 먼 나라로, 공산주의로 대별되는 나라였기에,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반공주의가 지배한 우리나라에서는 조금은 가까이하기 힘든 나라였는지, 그래서 우리에게 소개된 글은 적다. 물론 세계문학전집에 공산주의가 성립되기 전 작가들의 작품, 특히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등이 소개되었지만 그렇게 와 닿는 문학과 주류의 외래문학은 아니었다. 이들 말고는 푸시킨, 고리끼, 고골 정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 작가가 아닐까? 이 책은 비평서라고 해야 할까? 저자 나보코프의 미국에서의 러시아문학의 강연을 한 글들이라고 하는데 러시아 문학의 정신을 보여주고, 창조의 권리와 비평의 권리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그는 러시아 문학에서 19세기는 대작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 전은? 그 후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문학은 이념문학으로 변질되었다. 한마디로 정부와 비평가(급진적 좌파), 사상가가 문학을 망치는 주범이라고까지 말한다. 예술을 정치에 종속시키려 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에 모순된 결과를 초래하였고, 문학을 국가의 수단으로 만든 소비에트였다. 훌륭한 독자는 그 책을 구상하고 구성하고 있는 사고와 동일시한다. 보편적 관념보다는 개별적 상상을 좋아한다. 러시아 소설은 러시아 정신이 아니라 현재 개개인을 찾으려 노력이 아닐까? 그리고 거장 자체를 보라 그러면 러시아문학이 보일 것이다. 고골. 고골의 작품은 서민의 삶을 노래한다고 해야 하나, 소시민의 작은 기쁨과 즐거움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러시아였다. 이런 러시아에서 그는 현실을 풍자하면서 서민들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나보코프는 한마디로 고골과 푸시킨이 등장하기 전 러시아문학은 반소경이었다고 한다. 고골은 푸시킨의 격려 하에 작품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니 푸시킨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고골의 최대 작품, 죽은 혼은 속물근성을 잘 보여준다. 속물근성이라면 보편적으로 갖게 되어있는 본질적인 어리석음이다. 그것을 죽은 혼의 거래를 통한 풍자와 비유를 통해 탄생한 주인공들로 잘 보여준다. 나보코프의 정말 탁월한 해석, 정말 해석에 따라 원작이 그렇게 보인다. 생생한 실례를 제시, 농노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원했다. 죽은 혼에서 산 혼으로 만들어간다. <외투> 어두운 삶에 검은 구멍을 내는 기괴하고도 음침한 악몽이다. 부조리는 비극과 맞닿아 있다. 악의 없는 문장을 악몽 같은 폭죽의 거친 향연에서 도발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반 투르게네프. 잘 모르는 작가였다. 그는 사실주의 작품, 농노들의 삶 속에서의 어려움을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도스토옙스카와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3대 소설가로 꼽힌다. 부드럽게 채색된 수채화 같은 그림들이 이곳 저곳에 삽입 있는 그의 글, 당시 러시아는 하나의 큰 꿈이었다. 그의 가슴은 차갑고 머리는 뜨거웠다. 자제력이 부족하고 행동은 할 줄 모른 채 몸만 바쁜 열정주의자였다. 머리에 든 에너지를 표출할 방법을 몰랐던 무능은 마침내 그를 단련시키고 강인하게 만들었다. <그 전날 밤> 독자들의 직관을 위한 여지는 남겨두지 않은 채, 무언가를 제시하고, 그 제시된 것에 대한 지루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지나치게 명료했다. 그는 읽기 편한 작가일 뿐 위대한 작가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 농노제 폐지, 태형 금지 법 엄격히 집행을 강조했다. 훌륭한 유머와 번득이긴 하나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황무지를 지닌 평범한 작가에 불과하다는 평가 과연 정당할지? 간질과 신경쇠약 속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들, 새로운 고골의 탄생이라고 여겨졌다. 그의 글속에는 시베리아와 감옥에서의 경험을 통한 러시아 민중을 인위적, 병적인 이상화가 보인다. 하지만, 그만큼 핍박 받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보이반’이 아닐까? 인물들 사이의 조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논리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환경을 물색한다. 그 만의 독창성 얼마나 개연성 있게 그것을 만들어 냈는가의 문제였다. <죄와 벌>. 죄인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당한 실제적 고통이고, 육체적 고통과 모욕이 인간의 도덕을 증진시키지만, 개인적 비극의 원인이 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의 테마와 형식, 억양을 잘 보여주는 최고의 그림이자 토스토옙스키적인 것의 결집체이다. <백치>. 사랑의 비극인가? 악령 테러리스트들의 이야기, 토스토옙스키는 극작가와 비슷한 방법으로 등장인물들을 다룬다. 인간존엄의 비하, 조화와 경제성의 원칙이 결여된 채, 너무 급하게 쓰였기 때문에 대작이 아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추리소설적 기법의 최고봉이다. 레프 톨스토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일 것이다. 서사적인 <안나 카레니나>에 약 160페이지의 평을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불멸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영혼의 방랑자였다. 독자들의 수많은 시계들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갖는 유일한 작가이고,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사랑이야기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내향성과 외향성의 충돌로 이반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톨스토이 작품 중 가장 예술적이고, 가장 완벽하며 또한 가장 정교하다. 그는 언어를 ‘톨스토이’화 한다. 러시아 모더니즘의 선구적 작품이다. <게라심>. 혼자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체호프. 러시아 지방을 대변하는 전형적 인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글로 표현했다. 인간적이며 민중적인 인물로 진정한 예술가다. 그는 등장 인물을 교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인물을 미덕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았다. 체호프적 색채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단어의 신기루를 둘러싸이고 번져 더욱 짙게 채색한다. 훌륭한 자연의 법칙 중 가장 훌륭한 것이 약자생존의 법칙으로 여기고 있다.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위선적인 삶은 모두에게 공개되어있는 반면, 정작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감추어져 있는 현실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갈매기>. 실생활에 정말 일어날 법한 작고 엉뚱한 일들이 모여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을 만든다. 체호프 역시 자신이 깨뜨리고자 했던 전통적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훗날 진정 위대한 희곡을 탄생시킬 씨앗이다. 고리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삶은 행복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러시아 가장 낙관주의적인 작가, 혁명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작가로 러시아 사회구조를 잘 대변하고 있다.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슈코프로 ‘고통받는 자’라는 ‘막심 고리키’를 필명으로 사용하였다니. 그가 대변하고 싶은 것은 고통받는 민중이었으리. 정치성이 강한 글을 써서 권력과 충돌하였다. 속물과 속물근성, 고상은 레이스 달린 천박함이고 부르주아는 의기양양한 속물이자 근엄하면서 천박한 인간이다. 번역의 예술, 언어 재탄생, 러시아어 활과 양파는 동음이의어이지만, 활처럼 굽어진 해안을 양파해로 번역하고 있다. 문학이 보편적 관념이 아닌 특별한 단어와 형상에 속한다. 여기에 소개된 작품들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본 것 같다. 나보코프는 나의 짧은 러시아 문학기생에 큰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그가 지적한 부분들, 설명하는 것들 와 닿는다. 러시아 대가들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의 생각과 잘못된 점 그리고 잘한 것들도, 그 역시 작가이기에 더 작품을 잘 볼 수 있고, 러시아 출신이기에 러시아문학을 더 잘 들여다보고 그 한계도 인식하는지 모르겠다. 평론에 가깝게 여겨지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러시아문학을 논할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무엇이 러시아문학인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어슴푸레 느끼게 되었다. 힘든 시대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민중들, 그들의 삶과 부패한 제도, 그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문학, 그것이야말로 민중들의 희망이요, 용기가 아닐까? 문학이란 이런 지친 영혼들을 달래고 보듬어 주고, 같이 고민하는 것 아닐지. 여기 실린 책들을 다시 읽어 보고, 다시 읽어봐야 할 책 같다. 평론이 이런 것 아닌가 한다. 작품을 더 멋지게 빛내주고, 그 숨겨진 메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우리네 비평가들도 좀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책 읽기는 행복이다. 이런 행복을 도와주는 것이 비평가의 역할이 아닐까? 길잡이 역할을 해주면 독서라는 바다에서 조금은 빨리 목적지와 목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개인적 감성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놓치는 부분을 알려줌으로써 새로운 즐거움을 알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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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겨울방학,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개학 전까지 며칠 간 집에서 뒹굴 거릴 때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있었던 책장을 들여다보다가 시커먼 책 수십 권이 꽂혀 있는 것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요즘 책 표지와 같은 산뜻하고 멋있는 디자인은커녕 양장본으로 제목과 저자의 이름조차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낡은 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장을 넘기자 세로글로 되어 있었다. 글자크기는 또 왜 그렇게 작은지 이렇게 멋도 없고 세로로 쓰여 불편한 책이 어디 있나 싶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세계문학전집이라는데 한 번 읽어봐야 겠지~’ 그래서 읽었다. 1시간, 2시간이 흐르고 저녁 먹으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새벽 2시 경까지 그 자리에서 책을 읽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웠지만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이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다. 다음날부터 책장에 꽂힌 전집을 닥치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었던 책이 톨스토이의 책이라 그랬던지 주로 러시아 문학을 읽었다. ‘이래서 고전 고전 하는구나~!!’ 싶었다.
몇 달 전, 함께 책을 보던 아내가 소리쳤다. “아~ 이 책 뭐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진짜 절망을 준다. 절망을 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이었다. 「롤리타」를 보고 싶다고 한 아내에게 「롤리타」의 작가인 나보코프의 다른 책을 먼저 사주었다. 아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도플갱어 미스터리’라는 「절망」의 소개 글에 혹해 사게 되었다. 아내는 그 책을 절반도 읽지 못하고 중도 포기했다. 나는 미스터리를 좋아하지 않기에 손도 대지 않았고ㅡ.ㅡ
이 책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제목 그대로 미국으로 이주해 대학에서 러시아 고전 문학, 유럽 모더니즘 문학을 강의한 것을 옮긴 책이다. 나보코프가 쓴 「절망」에 대한 절망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나보코프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작품을 쓸 때와는 달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다 보니 쉽게 재미있게 러시아 문호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가감 없는 비판과 찬사가 동시에 담겨 있다. 물론, 번역자인 이혜승씨의 공도 크다. 수십 년이 지난 책을 번역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러시아어는 물론 영어에 대한 언어·문학적 통찰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나와 같은 문외한을 쉽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그 개념 자체에 대해 비러시아인들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명의 위대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우선 떠올린다.” (p.29) 책은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 6명의 러시아 대문호를 소개한다. 이후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창작동기가 되고 지금까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들에 대한 나보코프의 강의는 역자의 소개대로 재미있고 친근하다. “훌륭한 독자는 자신을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이나 소녀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구상하고 구성하고 있는 사고와 동일시한다.” (p.44) 책을 구상하고 구성하고 있는 사고는 그 책을 창조해 낸 작가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라 판단한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학을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가장 먼저 작가에 대한 성장배경과 작품 집필 배경을 상세히 소개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나는 고골과, 투르게네프, 체호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나머지 세 명의 작품은 복수로 읽어서 알고 있었다. 책은 나보코프가 실제로 강의한 강의노트를 바탕으로 엮었는데 강의의 첫 부분은 작가에 대한 소개와 성장배경 및 집필배경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뒷부분은 작품에 대한 의의와 의미에 주목한다. “어머니 사망 후, 그는 소작농들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하인들을 해방시켰으며 1861년 농노 해방 당시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p.133) 부유한 대지주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역사의식은 물론 보다 나은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투르게네프에 대한 소개다. 이 책에 소개된 6명의 러시아 문호들은 각자 조금씩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급변하던 러시아 역사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도 치열한 시대정신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식인으로서 사명에 충실해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것이 꼭 정치적 입장이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작품과 삶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나보코프의 견해는 당황스러웠다. 초반에 언급했다시피 처음 고전문학을 접한 것이 톨스토이의 「부활」이었고,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너무나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토록 많이 들어 왔던 설교도, 그토록 많이 해 왔던 기도도 아니오. 수세기 동안 진흙탕과 거름통 속에 파묻혀 있던 인간 존엄의 가치를 민중들에게 일깨우고 교회의 가르침이 아닌 상식과 정의에 부합한 권리와 법, 그리고 가능한 한 엄격하게 그것을 집행하는 것이 바로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것이오.” (p.193) 문학비평가 벨린스키가 쓴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중 일부인데, 나보코프는 벨린스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에 나타난 한계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크게 동의되지 않았다. 나보코프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할 당시는 냉전의 초창기였고, 그 이전 도스토옙스키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이 책에서도 그런 언급은 전혀 없다. 정확하게 어떤 이유로 도스토옙스키를 폄하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서는 나보코프의 평이 야속하기만 하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보며 감동 받기도 하고, 책을 읽던 초창기였기 때문에 대단한 작가의 대단한 작품을 읽었다는 성취감 또한 컸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게 지켜오던 순정을 듣도 보도 못했던 나보코프란 양반이 작대기로 후벼 파는 심정이었다. “형이 죽은 후 그가 출간했던 잡지는 폐간되었고, 도스토옙스키는 파산했다. 게다가 형의 가족도 부양해야 했다. 이 무거운 짐을 해결하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죄와 벌」,「백치」,「악령」,「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 기념비적인 작품들은 모두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 쓰였다.” (p.200) 책에서도 분명히 지적하지만 훌륭한 독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구성하고 구상한 인물에게 몰두해야 한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다른 비평서적을 전혀 읽지 못한 내게는 나보코프의 비평이 전부다. 형이 죽고 파산한 후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낸 도스토옙스키의 몰두는 그것만으로 인정받고 의의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나보코프는 그것마저 인정해 주지 않는 듯하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비천하고 멸시당하는 이들에 대한 그의 오만한 연민은 순전히 감상적인 동정일 뿐이며, 그만의 독특한 색채로 번득이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책을 통해 주장한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p.267) 이 부분을 읽고는 오히려 재미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좀 귀엽기도 했다. 작가라는 정체성은 완고하고 고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티격태격하는 것으로 보였다.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에 이르러서는 그에게 극찬을 쏟아낸다. 분명 도스토옙스키와는 뭔가 사단(事端)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의식의 흐름 또는 내적 독백의 기법은 제임스 조이스보다 훨씬 앞서 러시아의 톨스토이가 개발한 표현 방식으로, 등장인물의 내면을 흘러가는 대로 보여 주는 방식이다.” (p.336)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에 대한 작품설명은 책에 실린 다른 작가의 작품들 몇 배에 달하는 분량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강의한 다른 작가들 보다 톨스토이를 우위에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읽으며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궁극의 미로를 체험했던바 톨스토이는 이보다 훨씬 앞선 표현 방식으로 의식의 흐름 또는 내적 독백의 기법을 작품에 담았다고 표현한다. 적어도 내게는 톨스토이의 작품이 율리시즈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쉽고 감정선을 따라잡기가 수월했다. 같은 표현 방식이라도 톨스토이가 앞서 했다보니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더 구체화하고 내면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도 그의 생애에 있어서 후세에 여러 가지 비판을 받은 면이 있지만 나보코프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와는 달리.^^;; 이것도 귀엽다고 이해해야 할지 얄밉다고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제껏 이해하고 인식해 오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에 대한 색다른 견해와 언급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었다. 더불어 책에 소개된 네 명의 다른 문호들의 책들도 하나하나 찾아 읽어보려 한다. “확고한 혁명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터라 급진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명성이 갈수록 높아졌지만” (p.530) 특히 문학작품의 열성적인 창작과 함께 열성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던 막심 고리키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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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를 처음 대한 것은 중학생 때 학원출판사(?)에서 나온 ‘아다’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당시에도 ‘롤리타’는 나와있었지만 남들이 읽는 작품 말고 다른 걸 읽겠다는 마음에서 선택했었다. 책은 길고 어려웠으며 남은 기억이라고는 나보코프를 천재라고 하던 소개글뿐이었다. 그 이후로 처음 만난 그의 글이 이 책이다. 그의 천재성이 이 책에서 얼마나 발휘될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이 책은 1940년에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나보코프가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만들었던 강의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19세기를 수놓았던 여섯 명의 러시아 작가를 대상으로 그들의 작품 세계를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작가 별로 몇 작품을 뽑아 분석하는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강의록을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미국의 대학생들이 러시아 문학에 무지하다는 점을 실감하고 낯선 작가와 문명을 소개하는 데 이러한 강의 방법이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책에 나오는 러시아 작가는 등장 순서대로 볼 때 고골, 투르게네프, 토스토엡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이다. 작가를 소개할 때에는 작가 별로 작품 전반에 대한 나보코프의 관점을 투사하고 좋고 싫음을 분명히 한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이토록 명확한 나보코프의 시선에 대해 부담을 느끼거나 거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작품 하나하나로 들어가서는 작품에 대한 면밀한 해석과 냉철한 평가, 방대한 인용-인용 내용이 무척 많다-을 담아(P. 7)낸다. 나보코프가 문학이라는 예술에 대해 일관되게 견지하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나보코프는 투르게네프나 도스토엡스키, 고리키를 매우 경멸하며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삶의 예술적 표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며 문체가 저급하다고 평가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얘기할 때에는 추리 소설 쓰는 정도라고 폄하하며 고리키를 언급할 때에는 고리키가 인물과 상황을 그려내는데 서툴다고 한다. 작가 소개 때에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작품을 비평하는 영역에 들어서면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사실 투르게네프나 도스토엡스키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고 그들의 작품을 읽을 때 불편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많았었는데 나보코프의 비평을 읽으면서 일정 수준 그 불편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어서 내게는 매우 도움이 되는 글들이었다.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와 체호프에 대해서는 대단한 찬사를 보내며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비평을 읽고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이 작품도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읽었던, 길고 재미없다고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체호프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나보코프의 여러 관점이 문학 작품을 대하는 내 태도와 관점을 어느 정도 바꿀 듯하다. 나보코프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인물은 바로 독자다. / 훌륭한 독자는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서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나 체호프 속의 러시아는 천재들이 만들고 상상해 낸 특별한 세계지 역사 속 실제 러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러시아 소설에서 러시아의 정신이 아니라 천재 개개인을 찾으려 노력하자. 그리고 거작을 둘러싼 틀이나 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라 거작 자체를 보자. 등이 대표적으로 그런 영향을 주었다. 이제 이 책은 절판 상태로 나타난다. 절판되기 전에 책을 구입하여서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보코프가 제시하는 관점이 마음에 든다. 러시아 문학 작품을 읽는 데 관심을 두는 분들이라면 도서관에서라도 꼭 구해서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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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는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산문 작가로 톨스토이를 꼽으면서 도스토옙스키는 열외로 할 정도로 톨스토이에게 보낸 찬사에 비해 도스토옙스키에게는 경멸에 가까운 혹평을 하고 있다. 《죄와벌》, 《지하 생활자의 수기》,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 도스토옙스키의 다섯 작품에는 70여쪽을,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 한 작품에만 160여쪽을 할애하는 불공정함을 보이고 있다. 나보코프 자신이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과 막대한 유산을 받았음에도 볼셰비키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독일로 망명했다가 다시 나치의 압제를 피해 미국에 정착했던 만큼 도스토옙스키보다는 톨스토이에게 더 공감할 수 밖에 없고, 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분노하는 그의 사상적 토대를 감안하고 그의 강의를 들어야한다.
러시아 문학은 르네상스의 문학적 전통이 없는 불모지에서 생겨난 '순수 그 자체'지만 소비에트 정권수립이후 예술에 대한 통제때문에 그 황홀함은 19세기에 반짝 빛나다 사라져 버렸다. 그는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와 고리키, 빛나는 여섯 작가를 다루고 있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비교가 가장 눈에 띈다. 그의 귀족적 심미적 예술관은 톨스토이가 《안나카레니나》에서 안나의 검은 곱슬머리가 목덜미에 드리우는 것에 대한 묘사가 레빈의 러시아 농부들에 대한 헌신보다 더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볼 정도로 예술지상주의적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정교회, 절대 군주제, 러시아 민족주의 숭배같은 신념을 드러낸 것을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관제예술처럼 예술 자체보다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주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가 말년에 예술가로서의 삶을 버리고 수행자의 삶을 살았던 것을 큰 예술적 손실로 보고 안타까와 한다. 그가 《안나카레니나》를 해설하면서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당시의 복장, 음식, 기차내부의 모습까지 그림으로 남겨놓은 것은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큰 자산이 될 것으로 생각되고, 그의 재치있는 말장난과 시니컬한 독설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좋은 글을 읽는 독자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어떤 국가나 계급에 속하지 않는다. 감시관이나 북클럽도 그의 영혼을 좌우하지 못한다. 주인공 중 어느 한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묘사를 생략'하는 일반 독자와 달리 소설을 대할때 그런 유치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훌륭한 독자는 자신을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이나 소녀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구상하고 구성하고 있는 사고와 동일시한다...작품의 섬세한 디테일을 흡수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즐거움을 즐길 줄 알고, 내면과 온몸으로 빛을 뿜을 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위조의 달인, 상상의 달인, 마술사, 예술가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에 전율을 느끼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인물은 바로 독자다."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그 작가가 쓴 것과는 다르게 혹은 좀 더 나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묘사하는 것을 상상해 봄으로써 예술적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평범하고 거짓되고 비속한 독자라 해도 무슨 상인가를 수상한 이류급 소설에 대해 욕을 퍼부으면서 짓궂지만 건강한 즐거움을 만끽할 권리는 있다." 나보코프가 제안한 방법이라면 독자도 잠시 예술가가 느끼는 창조적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유치한 독자가 되는 것이 독서의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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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을 접할 때 마다 인동초 [忍冬草]를 생각합니다. 겨울에도 줄기가 마르지 않고 겨울을 견디어내어 다시 새순을 내는 인동초. 동토(凍土)의 땅에서 어찌 그런 대작이 나오는지 어찌 그런 대가들이 나오는지 참으로 감탄하게 됩니다. 물론 러시아 문학 모두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 문학의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뭐 중, 고등학생 때 문학소년, 소녀가 아닌 사람 어디 있을까마는.. 나의 중, 고딩 시절 각 교회 중, 고등부는 ‘문학의 밤’이 대세였지요. 행사를 잘 마치고 나면 교회 나오는 학생들 수가 2~3배로 껑충 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연애 복덕방’의 주가가 상승되는 겁니다. ‘문학의 밤’ 여러 프로그램 중 문학 관련 퀴즈 순서에서 상을 제법 타기도 했습니다. 작가와 작품,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는 작품 알아맞히기, 시와 시인, 시 한 편 통째로 암송하기 등 다양했지요. 작가와 작품이 단골 분식집 메뉴처럼 꿰뚫어지던 어느 날, 왠지 내게 익숙한 작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작품 이름만 줄줄이 꿰고 있으면 뭐하나, 작품 하나,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봐야 되지 않겠나. 다이제스트판으로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1 여름방학을 세계문학, 한국문학을 섭렵하는데 올인 하기로 결정했지요. 도시락을 싸갖고 거의 매일 도서관에 출근했습니다. 요즘이야 오픈서가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엔 도서목록 카드 함에서 일일이 도서를 찾아 신청서를 통해 책을 대출받았습니다. 그 당시엔 당연한 일이 지금 돌이켜보니, 왠지 억울합니다. 시간 낭비였습니다. 목록카드 함 뒤지고, 적고, 신청하고, 책을 기다리고 시간이 꽤 흘렀지요. 그러면서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홉, 고리키, 솔제니친을 만났습니다. ‘안나 카레리나’를 읽으면서 어렵다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그러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나면서 솔직히 어려웠습니다. 명작이니까 읽어야했습니다. 명작이니까 어려운가보다 했습니다. 까라마조프 그 이름만큼 까칠했지요. 이 책이 고맙습니다. 아니 책이라는 존재가 너무 귀하게 느껴집니다. 책이 아니면 어찌 이런 좋은 강의를 만나볼 수 있겠는가. 이 강의를 들은 사람이 정성껏 녹음을 해서 갖다 준다 한들 내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20세기가 낳은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면서 또한 미국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가족들과 유럽으로 망명했지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슬라브어를 전공했습니다. 히틀러의 유럽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나보코프는 가족들과 함께 194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에 정착한 저자는 웰즐리 대학과 코넬 대학에서 19세기 러시아 고전문학, 유럽 모더니즘 문학 등을 강의했는데, 새롭고 독창적이고 기지가 번득이는 강의 내용 덕분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강의록은 일일이 손으로 쓰거나 간혹 부인의 도움을 받아 타이핑한 상태로 남아 있다가 저자 사후 『러시아 문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러시아의 문호(文豪)들은 니콜라이 고골, 이반 투르게네프, 표됴르 도스토엡스키, 리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 등입니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한 나라의 언어가 다른 나라의 언어로 변화되는 과정. 번역이라는 과정 중에 보태지는 것보다는 빼먹는 것이 더 많습니다. 자의적인 해석 또한 상당합니다. 책의 말미에 나오지만 ‘번역의 예술’이라는 챕터는 번역가들 나아가서는 번역된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번역의 예술’이라는 표현보다 ‘번역의 반역’이라고 붙이고 싶은 마음을 참은 듯싶습니다. 번역의 과정을 저자는 ‘언어 재탄생’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네요. 저자는 이 언어 재탄생의 ‘진기한 세상’에는 세 단계 악이 존재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악은 잘 몰라서 혹은 이해를 못해서 빚어진 실수로, 정도가 가장 약하고, 능력 부족으로 인한 실수인지라 용서 할 수 있다. 지옥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악은 미지의 독자들에게 모호하거나 생소하게 느껴 질 수 있는, 혹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단어나 문단을 임의로 삭제하는 경우다. 세 번째 가장 최악은 독자층의 생각과 선입견에 맞춰 재단하기 위해 대작을 대패질하고 다듬는 부도덕의 극치다. 이는 중세 시대 표절에 대해 내려졌던 엄벌처럼 강력한 처벌을 요하는 중범죄다.” 저자가 러시아를 떠나 서방 세계로 건너 온 후에 수없이 번역되어 있는 러시아문학들을 읽어보고 나서 참으로 한심하다 못해 속이 많이 상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이 강의록(책)의 특징이자 장점은 비 러시아인이 그저 러시아에 몇 해 머물며 공부를 한 후 쓴 러시아 문학론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대가들과 같은 토양에서 자랐습니다.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지요. 그래서 더욱 저자의 강의에 신뢰가 갑니다. 다소 당혹스러운 면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음에 담고 있던 대가들의 이미지를 수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제일 심한 것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입니다. 나보코프는 독서를 즐기지 않는 독자들에게는(독서를 즐기지 않는 독자에겐 어차피 상관없는 일 아닌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전제하에(사실 난 지극히 혼란스럽소..) 도스토옙스키를 권좌에서 끌어내립니다. “서구의 고딕풍, 감상주의가 종교적 연민과 결합되어 과장된 감상주의로 거듭난 결과, 도스토옙스키는 유럽 추리 소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 유럽적인 러시아 작가로 치부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잘 모르겠지만, 러시아 작가들에게 유럽적인 작가라는 호칭은 그리 명예롭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유럽적인 작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보너스로 추리 소설 작가가 붙습니다. 반면 톨스토이에 대해선 매우 깍듯합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다. 전 시대의 푸시킨, 레르몬토프 등은 논외로 하고,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산문 작가들의 순위를 매겨 본다면 이렇다.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호프, 4위 투르게네프. 마치 학생들의 석차를 매기는 것 같다. 지금쯤 도스토옙스키와 살티코프가 내 사무실 앞에서 항의하려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보코프가 사후에 도스토옙스키를 안 만났기를 바랍니다. 정서적 불안정의 도스토옙스키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을 것입니다. 좀 더 러시아 문학을 접하길 원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가이드북으로 그만입니다. 책에 언급된 대가의 작품들 중에 읽은 것도 있고, 아직 못 읽은 것이 태반입니다. 못 읽은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단점은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나보코프가 빌려주는 안경, 그의 시각을 통해 작품을 해석하는 일도 생길 수가 있습니다. 이에 절충이 필요합니다. 우선 내 느낌의 밑그림을 그려 놓은 뒤에 나보코프의 안내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지요. 1958년 4월 10일 예술의 날 기념으로 코넬 대학에서 진행된 특강에서 나보코프는 소비에트의 출범으로 결국 승리를 굳힌 공리주의가 예술에 가한 압박을 통렬히 비판하며 작가를 속물적 도덕주의나 독재자로부터 구원 할 수 있는 것은 훌륭한 독자밖에 없음을, 거작 속에서 사실을 찾으려 하지 않고 거작 자체를 발견할 줄 아는 독자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명작은 독자와 함께 합니다. 명작이 명작으로 남는 것. 시대와 세대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남는 것은 현명한 독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선별 할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한 것입니다. 한탕주의로 포장을 한 책이 아닌가. 반짝 인기를 업고 “이것도~”하면서 내미는 책이 아닌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보코프가 「문학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고 싶다고 하네요. 같이 읽어볼까요? “내가 제안하는 이 방법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세일 수 있다. 만일 어떤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작가가 쓴 것과는 다르게 혹은 좀 더 나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묘사하는 것을 상상해 봄으로써 예술적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평범하고 거짓되고 비속한 독자라 해도 무슨 상인가를 수상한 이류급 소설에 대해 욕을 퍼부으면서 짓궂지만 건강한 즐거움을 만끽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여러분이 좋아하는 책은 숨이 턱턱 막히는 전율 또한 선사할 수 있어야한다. 실용적인 방법을 하나 제시하겠다.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胃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 되면서 당신이 시간을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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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다!
감개무량!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든 느낌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보코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구나 이 책을 읽으면 러시아 문학에 대한 눈이 확 높아진다는 한 강사의 말을 들은 이후로 오래도록 이 책의 번역을 기다려왔기 때문이었다. 영어로만 읽었던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를 우리 말로 읽을 때의 감격만으로도 왠지 이 책을 벗하는 시간을 충분히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맨하튼에 정착한 나보코프는 1941년 웰즐리 대학에서 비교문학 강사로 일하게 된다. 그 곳에서 7년간 러시아 말과 러시아 문학을 강의한 나보코프는 48년, 이제는 코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유럽과 러시아 문학에 대해 강의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 나보코프가 강의한 것을 후에 세 권의 책으로 펴내게 되는데 이번에 나온 '러시아 문학 강의'는 바로 그 중 한 편이다. 원래 러시아 사람이고 거기다 활발하게 러시아 문학 작품을 펴냈던 작가로서 러시아 문학은 그야말로 나보코프의 전문 분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를 통하여 러시아 문학을 들여다보는 것은 확실히 얻는 게 많다 무엇보다 20세기 최고의 거장 중 한 작가로 꼽히는 그이니 만큼 그동안 우리가 미처 러시아 문학에 대해 보지 못했던 것까지 아울러 알게 하는 장점까지 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다른 많은 책들이 있겠지만 확실히 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그 중 가장 상위에 랭크한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럼, 그가 보여주는 러시아 문학은 어떤 것일까?
강의의 내용은, 특히나 문학 강의의 내용은 먼저 그 강의하는 사람이 문학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도 나보코프가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걸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소개글만 지나면 바로 나오는, 1장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들'이다. 이 글을 이를테면 그가 왜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이런 형식으로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걸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러시아 문학이 19세기에 발생된 최근의 사건이라 말하면서 그 러시아 문학이 가지는 특수성을 상세히 설명한다. 말하자면 러시아 작가들이 직면해야 했던 러시아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다. 거기엔 문학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 혁명의 힘을 두려워하여 사사건건 검열의 돋보기를 들어대던 정부의 억압도 있었고 문학이 가지는 저마다 고유의 개성을 무시하고 '민중해방'이라는 단일한 이념 아래 오로지 봉사할 것을 강요하는, 정부와는 가장 반대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급진적 반정부주의자들이나 비평가 그리고 사상가로 부터 오는 압력도 있었다. 19세기라는 러시아가 변화하려는 그 과도기에 한 편으로는 혁명의 힘을 억누르는자와 한 편으론 혁명을 위해 모든 역량을 하나로 모으려는 자들 사이에서 마치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와도 같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 온 것이 바로 러시아 문학이었다. 그런데 그 위태위태한 러시아 문학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나보코프가 밥벌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는데, 과연 그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나보코프는 바로 거기에 집중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지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체계를 수립한다. 나보코프는 말한다. 바로 그 힘은 오로지 '독자'들에게서 나왔음을!
예술가를 황제, 독재자, 사제, 청교도, 속물, 정치 도덕주의, 경찰, 우체국장, 좀도둑들로 부터 구해낸 것은 다름아닌 뛰어난 독자다. 훌륭한 독자를 정의해 보자. 어떤 국가나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다. 감시관이나 북클럽도 그의 영혼을 좌우하지 못한다. (...) 훌륭한 독자는 자신을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이나 소녀에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구상하고 구성하고 있는 사고와 동일시 한다. 훌륭한 독자는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서 러시아 소설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톨스토이나 체호프 속의 러시아는 천재들이 만들고 상상해 낸 특별한 세계지 역사 속 실제 러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훌륭한 독자는 보편적 관념 보다는 개별적 상상을 좋아한다. 특정 그룹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섬세한 디테일을 흡수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즐거움을 즐길 줄 알고 내면과 온몸으로 빛을 뿜을 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위조의 달인, 상상의 달인, 마술사, 예술가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에 전율을 느끼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위대하는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인물은 바로 독자다. (p.44)
나보코프는 분명히 선언한다. 바로 이러한 훌륭한 독자들이 러시아 문학을 그 위태로움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건져 낸 일등 공신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의 러시아 문학 강의 역시 바로 그러한 훌륭한 독자들을 만드는데 맞춰짐은 당연한 일일 터! 그래서 그는 이 강의록 가장 첫 머리에 창작의 권리만큼 중요한 것이 비평의 권리다(p.25)'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아예 이렇게 러시아 문학 작품을 볼 것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다시 요약해서 강조하자면, 러시아 소설에서 러시아의 정신이 아니라 천재 개개인을 찾으려 노력하자. 그리고 거작을 둘러싼 틀이나 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라 거작 자체를 보자는 것이다.(p.45)
이 말만큼 이 러시아 문학 강의가 가지고 있는 형식 그리고 내용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러시아 문학 강의'는 나보코프가 한 제안 그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러시아 문학 통사를 강의하지 않고 자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가 여섯만 특히 선별하여 강의한다. '천재 개개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자' 이 말 그대로이다. 그래서 선별된 작가가 바로 니콜라이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프스키,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그리고 막심 고리키이다. 이 여섯 작가에게 한 장씩 할애하여 나보코프는 설명하고 있는데 거기 있어서도 천재 개개인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즉 먼저 작가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밑그림 부터 그리면서 그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데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앞서 인용한 말에도 나왔듯이, '거작을 둘러싼 틀이나 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지 않고 '작품 자체만' 보기 위해서이다. 즉 작가의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밝혀 지금까지 작품에 덧 씌워진 과장된 평가나 무분별한 해석들을 걸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을 해설하면서 그가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죽은 혼'을
러시아 지방 농노제, 관료주의로 인해 만들어진 사회적 속물근성에 대한 폭로를 발견할 수 있다(p.53)
라고 했던 러시아 비평가들의 태도다. 물론 나 역시도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었는데 나보코프는 사실 고골은 실제 러시아 지방 도시를 전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건 근거없은 오해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고골의 실제 삶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면서 그의 논지를 강화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렇게 나보코프는 기존의 평가, 해석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작가 자신의 삶, 그리고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것에만 근거하여 작품이 가진 의미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실 나보코프의 평가는 읽어보면 실로 뒤통수를 맞는 부분이 많다. 그 중 가장 커다란 충격은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톨스토이 산을 겨우 넘고 나니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거대한 산맥이 또 보여 좌절케 하더라'라는 말까지 하고 있지만 나보코프에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야말로 과대평가된 작가다. 이러한 평가가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를 러시아 문학 최고의 거장으로 알고 있는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런지 스스로도 걱정되었던지 그는 일부러 '도스토옙프스키에 대해 나는 다소 난처하고 곤란한 입장이다.'라고 말하면서 또 한번 자신이 이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나는 문학이 나를 흥미롭게 한다는 관점, 다시 말하면 불후의 예술, 천부적 재능이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접근한다)인지 강조하면서 세간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으나 나보코프가 보기에는 그저 과대평가 되었을 뿐인 대표작(여기에는 '죄와 벌, 백치, 지하생활자의 수기(나보코프에 따르면 이 제목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원래는 회고록이 맞다고 한다.), 악령 그리고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 있다. 참고로 나보코프가 생각하는 도스토옙프스키의 최고 걸작은 두 번째 작품, '분신'이라고 한다.)들을 하나 하나 분석하면서 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자신이 러시아 문학가 중 가장 거장이자 러시아 문학 중 가장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톨스토이의 '안네 카레리나'를 설명함으로써 도스토옙프스키의 결점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이를테면 때린 데 또 때리는 격이다. 이것은 비중에 있어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도스토옙프스키는 저렇게 많은 작품들을 설명했지만 그 분량을 모두 합해도 '안네 카레리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보코프 자신이 말한대로 정말 도스토옙프스키가 벌떡 일어나 나보코프 사무실 바깥에서 항의 차원에서 마구 문을 두드려 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 같다. 바로 그 우려 때문인지도 몰라도 그는 264 페이지에서 491 페이지까지 무려 몇 백 페이지에 걸쳐 안네 카레리나를 철저히 분석한다. 나중엔 소설에 나오는 각 사항을 따로 인덱스하여 세부적 설명을 붙여 놓은 것도 있는데 이것만 봐도 나보코프가 얼마나 안네 카레리나를 연구하는데 공을 들였는지 짐작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음에 있어 또 하나의 이점을 알게 된다.
즉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그저 그의 눈을 통해 러시아 문학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것만큼 비중있는 한 가지 이점이 더 있는데 그건 이 강의를 통해 나보코프 자신의 문학 세계까지 아울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 '안네 카레리나'를 설명하는 장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니까 '안네 카레리나'의 불륜을 다루는 글에서 우리는 이와 주제가 이어지는 나보코프가 쓴 작품 하나를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데 바로 그것은 나보코프의 대표작으로 이름이 높은 '롤리타'이다. '롤리타'는 1955년, 그의 러시아 문학 강의가 이루어지고 난 뒤 한 참 후에 나왔는데 사실 안네 카레리나가 겪게 되는 유혹의 모습은 '롤리타'에서 험퍼트가 겪는 유혹의 과정과 비슷하다. 때문에 '롤리타'가 바로 나보코프가 '안네 카레리나'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말하자면 '안네 카레리나'에서 보여준 유혹의 현대적 버젼이 바로 '롤리타'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그가 쓴 작품들이 어디에서 어떤 개념을 가지고 비롯되었는지 그것을 추적하게 만드는 있는 단서들을 제공한다. 사실 이 '러시아 문학 강의'는 너무 나보코프 개인적 취향이 들어가 객관성이 상실된 것이 아니냐 라는 비판을 더러 받기도 하는데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나보코프의 문제 의식, 초점이 어디에 가 있는지가 잘 드러나 그의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통로가 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러시아 문학만이 아니라 나보코프 작가 개인에 대해 관심있는 이들도 한번쯤 꼭 읽어볼만한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대했던 대로,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대로 정말 만족스런 책이었다. 번역도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힘을 받는 책이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리뷰를 쓰면서 나는 전문적인 리뷰어도 아니고 그냥 일개 아마츄어일 뿐인데 너무 작품 자체에만 매달려 세세하게 분석해서 쓰는 게 잘하는 일일까 고민해 왔었다. 문제는 이런 스타일이 타인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전달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연히 비용편익을 생각하게 되고 이제 이런 식으로는 그만 쓸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이었는데 나보코프가 저렇게 말을 해줘서 많은 힘을 받았다. 그래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쾌락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격려를 위한 독서였다. 위대한 거장답게 글도 정말 잘 써서 줄을 몇 번이나 그어 읽을 때마다 마치 어깨를 토닥이는 느낌을 여러 번 받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건 개인적인 술회일 뿐이니 고려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아무리 독서할 시간이 모자르다 하더라도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확신한다. 러시아 문학 뿐만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조차 가늠하게 만들므로 부디 그 강의에 참여해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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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시절 한 때 나의 꿈은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서 시인이 되어 시집을 출간하는 것이었다. 잠시나마 문학소년의 꿈을 가졌던 것이 지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20여년전 고등학교 시절에 가졌던 그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단지 그 대상이 국문학이 아니라 러시아문학으로 바뀌었을 뿐.
사실 나는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잘 모른다기 보다 러시아 문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방대한 연구성과물이 있을 정도였는지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목차를 보다보니 아는 사람 이름들이 나온다. 톨스토이, 토스토옙스키, 체호프, 고리키... 책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니콜라이 고골을 제외하고는 한두번씩은 다 들어봤던 작가들이다. 이 나이되도록 그 작가들의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책을 읽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예를 들어 빅뱅으로부터 우주가 탄생하여 태양계가 생기고 인류가 진화했다는 내용의 책을 읽다보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고 과학에 반발하는 종교에 대한, 특히 기독교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서양철학에 관심이 가게 되고, 서양철학 책을 한두권 읽다보면 역사에 관심이 가고... 돌고 도는 독서의 물레방아여!
이 책은 지금까지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려 14권에 달라는 다른 도서들을 추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 감사합니다(ㅠㅠ)
처음부터 읽지는 않았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특히 러시아 문학에 문외한인 내가 '흥미롭게' 읽기 위해서는 좀더 많이 들어본 작가들을 읽으면서 워밍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고른 것은 톨스토이. 근데 이 나보코프라는 이분. 꽤 코믹한 분이다. 러시아의 소설가 순위를 매기면서 1위를 톨스토이로 평가하고 도스토옙스키는 순위에 넣지 않았는데 그 이후에 나오는 문장은 토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항의하려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잠깐이나마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분은 패스. 어디선가 나도 이런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보다는 톨스토이가 더 위대하다는. 하지만 나는 이런 저자의 평가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한다. 작가에 대한 평가, 특히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러시아 문학을 좀더 접한 뒤에는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다.
톨스토이의 첫 작품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안나 카레니나>다. 나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불멸의 걸작'이라는 저자의 평가에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작심을 하게 되었다. <안나 카레니나> 작품을 설명하기에 앞서 톨스토이라는 작가에 대한 소개로 몇페이지를 할애한다. 읽다보니 모든 작품들을 설명할 떄 이런 식이다. 작품만 해설하지 않고 작가의 인간적 모습까지도 언급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시기는 1860년대에서부터 1870년대 초까지의 시기인데 톨스토이는 18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마음 속에서 진행된 양심과 쾌락의 전쟁에서 양심이 그의 삶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예술은 반종교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안나 카레니나를 마지막으로 붓을 꺾는다. 이 책을 통해 톨스토이가 힌두교와 기독교의 혼합된 새로운 종교의 가르침을 신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부분은 다른 책들을 통해 좀더 연구해볼 내용이라 여겨진다.
톨스토이가 추구했던 진실(대문자 T로 시작하는 Truth)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은 정말 압권이다. 이 절대적인 진리를 많은 러시아 작가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왔는데 저자는 톨스토이가 추구했던 진실은 바로 톨스토이 자신이었고 톨스토이 자신이 예술이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절대적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절대적 진실이라는 환상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더 중요시 했다(p.270). 톨스토이가 절대적 진실을 추구했던 과정은 결국 불멸의 진리로 승화되어 자신의 이미지, 즉 자기 자신을 찾는 결과를 얻었다.
톨스토이에 이어 읽은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이다. 저자는 그에 대해 평가절하했지만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읽어보았다. 나의 무식으로 인해 아는 작품은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단 두편 분이다. 바로 작품해설로 들어가지 않고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시작한다. 역시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느꼈던 대로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위대한 작가는 아니라고 평가(p.194)한다. 더 나아가 '훌륭한 유머가 번득이긴 하나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황무지를 지닌 평범한 작가에 불과하다'고 악평한다. 유럽 추리 소설이나 감상주의적 소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p.202)고도 평가한다. 극작가가 될 운명이었지만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소설을 쓰게 된 사람(p.204)이라고도 평가한다. 저자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평가한 작품은 <분신>이다. <분신>은 첫 작품이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성공 이후 두번째 작품인데 평단의 냉담한 반응을 얻었던 작품인데 본 도서에서는 소개하지 않았다.<죄와 벌>을 시작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해설한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평가를 하듯 <죄와 벌>에 대한 평가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악평을 내린다. <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은 특이하고 혼란스럽다고 평가한다. 하다못해 각 장의 제목 설정 조차 소설의 내용과는 다르게 진기하고 이상함만 강조했다고 한다(p.255). 이런 여러가지 비판적 요소들은 도스토옙스키가 신경쇠약이나 간질병을 앓아왔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타살)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죄책감도 어느 정도 이유로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육체적 고통과 모욕이 인간의 도덕을 증진시킨다는 생각에 광적으로 집착한 것은 개인적 비극에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시베리아 유형으로 인해 그는 내면에 있던 자유 애호가, 반역자, 개인주의자로서의 모습이 어느 정도 사라져 버렸고, 그 자연스러움이 상실되었엄을 감지했지만, 그는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돌아왔노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 p.219 러시아. 웬지 나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다. 어린 시절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로 기억되었고 고등학교 시절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읽으면서 뭔가 변해가는 나라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그저 공산주의라는 삭막한 사회에서 변해가는 나라라는 정도의 인식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1917년 이전의 러시아는 문학이나 음악 등 문화적으로 상당히 융성했고 놀랄 만한 예술가들이 많았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책을 처음 펴들었을 때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작품들 정도는 중고등학교 시절 다 읽었어야 하는 책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다못해 대학생때라도. 하지만 마흔이 넘은 지금의 상황도 고전을 읽기에 늦지 않은 나이라는 자신감을 가지면서 차차 정복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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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권리만큼 중요한 것이 비평의 권리다.」 이 뒤로는 '이것은 사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줄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선물……'이란 말이 붙는다. 지당하고 지당한 말이다. 거기다가 나는 대부분의 쾌감은 사물과 추상의 사후 해석에서 온다고 믿기 때문에 비평의 권리와 자유야말로 인간 감정을 히말라야 산맥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다. 일단 역사와 달리 문학은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보다는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해석의 여지가 풍부하다. 이 문학적인 서사로 보건대 문학과 비문학을 구분하는 것 자체도 고역이거니와 대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문학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 역시 답이 있다면 '문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클리셰가 문학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작가의 본의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다른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나보코프의 문학관(이랄까)'이다. 책에 포함된 강의록과 에세이를 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ㅡ 물론, 정상인보다 미친 사람을 훨씬 선호하는 도스토예프스키(그의 말에 따르면)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슬로 모션으로 이어지는 전형적 추리물이자 시끌벅적한 스릴러'라고 하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곳곳에서 보이는 장황함에는 좀 지겨운 감도 있기는 하다. 그래도 이 말들을 물리치는 건 '창조의 권리만큼 중요한 것이 비평의 권리'란 말씀이니, 가히 모든 패를 뒤엎을 수 있는 조커가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건 장난이고) 여기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과연 어떤 대답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소거시킬 수 있을까. '문학성'은 무엇보다도 문학을 다른 목적에 사용되는 언어와 구별시키는 언어의 조직화에 있다고 한다. 문학은 언어 그 자체를 전경화시킨 언어이다(낯설게 하기?). 언어를 낯설게 만들어서 그것을 독자에게 내민다 ㅡ 「자! 내가 언어야」라고 하면서(조너선 컬러 『문학이론』). 음,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으나 나는 언어의 전경화가 언제나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게다가 '미학적 대상'으로서의 문학이 있으니까 말이다. 나처럼 순수하게 (넓은 의미로서의)재미가 있으면 읽는 독자가 분명 존재하므로. 그럼 뭐가 되느냐. 「'고상함'은 레이스 달린 천박함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는 단순한 조악함보다 더 나쁘다. 사람들 앞에서 트림을 하는 것은 무례지만, 트림을 하고 나서 '실례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고상한 것이고, 그래서 더 천박하다.」 나는 이 말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분자를 중시하는 고리키가 있는가하면 세세한 입자가 아닌 파동을 그리는 체호프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나 ㅡ 비록 이 책이 러시아 문학만을 다루고 있다 할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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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단계로 치고 내려오면서, 세 번째는 이에 다다르는 여정. 롤. 리. 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1955 거장들의 베스트셀러 대부분의 영화광들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1955년작 <롤리타>를 언급할 때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말은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1962년작 <롤리타>를 더 우선순위로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실 원작과 영화는 같지 않은 엔딩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의 각본 크레딧에는 거의 드물게 이 영화의 각색 작업에 참여했던 나보코프의 이름이 보이는데(스탠리 큐브릭이 실질적인 각색자이다) 그는 공식작인 석상에서는 이 영하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1962년 영화를 보기 전 어느 한 인터뷰에서 “앰블런스 안에 환자가 편안하게 가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급커브를 도는 것같이 느껴졌다” 며 이 영화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매우 탐탐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게 그의 심경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한 번 더 1997년 에드리안 라인에게서 리메이크를 시도하는데 큐브릭버전보다는 더 농밀하고도 에로틱하게 시도했지만 그다지 대중이나 비평가들에게 평판을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롤리타>만이 그의 소설이 영화화프로젝트를 실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멜로드라마의 주석자이며 니콜라이 레이의 계승자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1978년 <절망>(우리나라 상영제목<양지로의 여행>)을 새롭게 독일버전으로 각색하여(심지어 주인공 이름이 헤르만 헤르만(Hermann Hermann)이다) 영화제작에 착수한다. 물론 파스빈더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멜로의 정수가 심하게 느껴지도록 ‘절망’스럽게 영화를 만들었다. 아무튼 나보코프의 소설들은 대가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영화화 되는 소설가이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지성 탐구사 시리즈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는 그가 1948년 미국 코넬대학교에 영문학교수로 재직시절 문학에 대해서 강의를 하며 종종 메모하던 그의 노트를 (말 그대로 곤충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과 콜라보레이션으로 전환하면) 채집하여 모은 강의록이다.(그는 이 시절에는 강의만 집중하여 1947년 장편소설 <Bend Sinister>과 1947년 단편소설<Nine Stories>만 출판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과 <외투>,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지하 생활자의 수기>,<백치>,<악령>,<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골짜기>,<갈매기>, 막심 고리키의 <뗏목 위에서>을 선보이고 있다. 이 목록의 선정에는 어떠한 정치적 편견도 적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막심 고리끼는 쌩떼끄부르크귀족이었던 나보코프일가를 추방하며 망명과 쇠락의 길을 걷게 했던 볼세비키당의 정책노선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선전했던 문학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소설에서도 내비쳐 지는데 그의 소설에서는 맹렬한 정치적인 이상대신에 고향을 떠난 추억의 시간과 기억의 공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선 그가 다루고 있는 러시아 소설들은 자르시대의 쓰였던 러시아 문호가들의 대표작들을 엄선한 작품들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고골은 러시아의 리얼리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예술가이다. 그는 작품 속에 당시의 러시아의 현실, 특히 지주 사회의 도덕적 퇴폐와 관료 세계의 모순과 부정 등을 예리한 풍자의 필봉으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알려져 왔는데, 나보코프도 그 중요한 논점을 놓치지 않고 예리한 감각으로 그의 책에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 첫대목에도 묘사를 하는데 “사회적 성향을 가진 러시아 비평가들은 <죽은 혼>과 <검찰관>에서 러시아 지방도시의 농노제, 관료주의로 인해 만들어진 사회적 속물근성(social poshlust)에 대한 폭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들이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라며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그는 단편적이며 파편적으로 문학읽기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의해 문학해독에 정진한다. <죽은 혼>과 <감찰관>은 1842년 동시에 출판하게 되는데 여기서 ‘죽은 혼’이란 단어의 뜻은 황제 짜르시대에 강제적이며 억압적인 철권정치로 인해 고통에 신음하던 ‘죽은 농노’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감찰관>도 또한 당시사회에 관료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희극작품이다. 물론 나보코프는 <죽은 혼>과 <감찰관>을 하나의 짝패로 보고 있다. 위대한 문학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외투>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라고 언급했다. 그만큼 이 소설이 러시아 문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나보코프도 표현했듯이 “<외투>의 플롯은 매우 간단하다” 모든 문학가들은 이 단순성에 상당히 크게 매료됐던 거 같다. 그러나 ‘유령’이 등장하는 순간 이 초현실적인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리얼리즘의 세계를 더욱 비관적으로 만든다. 죽는 자와 산자가 벌이는 공생게임에서 과연 어떠한 결말이 도사리고 있을까라는 자못 비장한 결심에 이야기는 나보코프는 ‘호소’라는 말로 정의 내린다. 그가 두 번대로 관심 있어 하는 작가는 바로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연대기 작가’라는 별명을 지닌, 이반 투르게네프이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을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읽으면서 낭만적인 멜로드라마보다는 냉소적 패배주의 비극으로 더 가깝게 봤다. 물론 이 견해에는 나보코프도 동의하는 것 같다 그가 서술한 “ 마지막 28장 에필로그 모든 사람은 결혼한다. 짝짓기 기제다. 교훈적이면서도 살짝 유머러스하다. 운명이 우세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투르게네프가 원하는 방향대로다.” 라며 어떤 운명적 사슬에 연결망이 촘촘하게 짜인 네트워크의 매트릭스를 보는 것 같은 의심이 들 정도이다. 투르게네프는 당시 러시아 귀족들이 그랬듯이 불어에 능통했으며 프랑스문학에 심취해있었던 거 같다. 그는 플레베르와 졸라와 모파상을 친구를 두었으며 그의 죽음도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사망했다(러시아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고국을 떠나면 대단하고도 매우 깊은 ‘향수병’을 앓는 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영상시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는 이러한 트렌드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음침하고도 음울한 장소를 귀족들의 화려한 조명이 흐르는 사교장 파티로 전환 시켜버렸다. 그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언제나 ‘해피엔딩’이었다. 여기 나보코프가 세 번쩨로 다루는 문학가는 바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이다. 그의 소설은 다행스럽게도 열린책에서 그의 이름을 내건 전집덕분에 모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영어본이나 일어본에 의한 중역이 아닌 러시아본을 참고로 하여 만든 ‘정통’ 번역본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교양으로서의 태도와 문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이라는 두 가지 목표설정을 하고 문학이라는 매체를 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나보코프의 진정한 <러시아 문학강의>에 참의미를 깨닫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어떤 책을 집더라도 우리들의 뇌의 세계는 확장 버전판을 체험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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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이라는 말만 떠올리면 독자들은 열광하거나 혹은 움츠러드는 부류로 나뉠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부류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의 문학도들에게 러시아의 대표 작가로 각인된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호프 등의 작품은 비평보다는 찬양과 어찌보면 경외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롤리타라는 작품의 저자로만 알려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가 중 하나이며 러시아를 떠나 미국의 코넬 대학을 비롯한 명문대에서 언급한 러시아 작가들에 대한 통렬하면서도 지성에 가득찬 비평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듯 싶다.
그의 영문 강의 내용의 흩어진 편린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는 한국의 러시아문학 애호가들에게 한여름 무더위를 시원하게 보내 줄 선물이 될거라 믿는다.
단순히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당시 작가들이 무덤에서 살아나온다 한들 한마디 반론도 제기할 수 없을 거 같은 나보코프의 대담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비평은 한국의 러시아 문학 독자들에게도 더욱더 러시아 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키울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겠다.
나보코프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중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책에 그 답이 있다.
참고로 500여 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번역하느라 고통을 감내한 역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