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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야말로 글쓰기의 최전선이 아닌가 싶다. 이슈를 죽어라 쫓아가지만 스스로 이슈가 되지 못하면 사장되고 만다. 독자가 내 생각을 찰떡같이 알아먹을 거라 전제하고 느긋하게 쓸 수가 없다. 시비에 항상 대비해야 하니까. 글은 결국 뼈대가 드러나다시피 명료하게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분량도 짧은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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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서‘소수’를 말하듯이‘상대성’을 가진 의미이다. 그래서 소수란 결코 작다거나 혹은 수적으로 적다는 절대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보이거나 보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이면에 노출되지 않은 엄청난 다수가 잠재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네 사회의 여론이라든가 정치권력의 의사라는 것이 마치 다수가 동의한 결집된 의견인양 말하지만 사실 아무리 떠들어도 반영되지 않는 대다수 민중의 의지는 결코 들리지 않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국민의 여론, 즉 다수의 의견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소수 권력계층이 의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대다수이다.
방송, 미디어 등 소위 여론을 조작하는 보수경제권력과 자신들의 기득적인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수구적 계층이라는 소수가 다수처럼 행동하고, 그래서 정작 다수인 민중은 소수가 되고 이들의 의견은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의 다수 의견인 주류적 시각에서의‘소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사회이다 보니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민중은 소외되고 그 삶은 점증적으로 피폐화되어 간다. 소득과 자산은 극소수에게 편중되고 배제된 소수인 대다수 민중은 극단적으로 가난해져 간다. 정책과 법제도는 기득권 유지와 부의 축적을 위한 방향성만을 모색한다. 여기에 자신들의 생활경제적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양가적 자의식의 중간계층이 자기 이익의 편의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왕복하며 소수의 지배권력을 도와 주류사회라는 것을 형성한다. 이 중립적이고 선수가 아닌 심판 같은 행동만 하려는 중간계급의 이중 잣대가 스스로들은 물론 민중 모두의 의견을 분산시켜 결집을 방해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속화시킨다.
학연, 지연을 좋다고 하는 사회
다수인 민중의 의견을 압살하는 모순된 중간계급의 노예 의식과 이기적 욕망이 자신 또한 배제된 소수 의견자임을 망각케 한다. 더더욱 소수 의견은 이들의 무지와 무교양으로 인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 종편방송의 문화평론가, 의사, 변호사, 작가, 스포츠 해설가 등 중간계급 주류 인사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패널로 자리잡아 하는 말들은 이들의 무교양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거예요”라고 떠들어대며 마치 진리를 말한 것처럼 모두들 머리를 끄덕인다.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가장 악화시키는 악질적 폐해를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다수인 민중의 소수의견은 오간데 없어지고 보수 언론, 다시말해 소수 기득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몰염치와 혐오스러움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학연과 지연이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규칙과 규범 등 공정한 루트를 통하지 않고 자기 개인들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뒷문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규칙을 자신만은 지키지 않아도 될 때의 특권의식이 가져다주는 쾌락,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은 지구상에서‘뒷문 해결사회’의 대표적 전형으로 지목된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사례로 들었듯이 ‘새치기의 시장 의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줄서기, 즉 규범과 규칙이라는 공평함과 자기노력의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시키는 주범이 새치기이다. 나는 규칙을 초월한 사람, 규칙의 예외를 적용받는 사람이라는 비뚤어진 권력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쾌락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질서와 배분양식을 파괴하는 악덕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이 무지의 타락성이 오늘 한국사회의 도덕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나아가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대를 낳기에 이르렀다. 학연, 지연이라는 뒷문 해결의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내 자식만큼은 모두를 짓밟고 일어서서 학연과 지연의 성채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규칙의 예외를 적용 받으면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락을 만끽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이 아니어도, 학연과 지연이 없어도, 규칙과 규범을 지켜도 손해를 입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중간 계급들이 상식이라고 행하는 것들,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이러한 것들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 그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구태의 썩은 정치를 바꾸고, 경제의 민주화를 이루자고 제아무리 외친들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중간계급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 어느 것인들 도달할 수 있을까?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저열함이 그득한 사회
자, 다수로 보이는 것들의 왜곡과 편협의 사례는 이 사회에 무궁무진하다. 소위 소셜 미디어라고 칭하는 SNS의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여론을 읽어내고 소통하는 만능의 공간처럼 주류의 미디어들은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이 도구가 세상의 문제와 본질, 그리고 민중의 의견을 읽어내는, 진정한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재벌, 그리고 고작 연예인들의 자기 전시 욕망의 표출 장소이고 연극성 인격장애와 무교양의 자폭 공간이외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더구나 감각적이고 표피적 단문으로 본질을 논하기 보다는 취향의 시비를 다투는 저열함이 더 극성을 부리지 않는가? 자신을 보여주고 대상화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시 욕망, 바로 물신화와 자기소외의 황폐함만이 그득하지 않은가? 정신의 실종, 생각의 결여, 문제본질의 왜곡, ...
그래서 사회안전망의 바깥에 선 오늘의 청년과 중노년의 불안과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불임화시키는 불안정 노동 진전의 사회인 현실의 논의는 이런 곳에서 행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혹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엉뚱하게도 무지의 대결인 취향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장으로 추락하고 만다. “임금소득 불평등 OECD 1위, 임시직 비율 2위”, “비정규직 858만명(2008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 OECD국가 “GDP대비 공적 사회복지 지출 비중 최하위”라는 지표가 말하듯이 한국사회는 불과 5년도 이르기 전에 두 국민(1%의 강부자와 99%의 민중)정책의 성공적 성취로 인해 국민 전체가 가난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용없는 성장, 불안정 노동의 확산, 자산 소득의 극단적 불평등으로 남미사회의 지독한 양극화 모델과 동일해지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시장의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도덕성 상실의 사회, 탈규범적 행태를 능력이라 찬양하는 타락과 부패의 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소수 의견이 짓밟히고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혁신을 기치로 내건 사람, 공평과 정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 나서 이제 한국사회를 바꾸자고 외친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누가 변화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소수가 된 민중, 양가적인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힘든 여정을 지나야 하는 것일 게다. 정치, 일상,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취업, SNS, 청년빈곤 문제에 이르는 음영이 짙게 드리운 이 사회에 날선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소수의견’이 다수, 주류의 의견이 되는 사회가 곧 우리들이 지향해야 하는, 변화의 도달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소수 의견이 상식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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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 자신에게 놀라게 되었다.
글을 읽다 보면 기분이 씁쓸해진다. 가슴도 뜨끔하다.
현재 대한민국이 가진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은 전적으로 대통령 한 사람 탓인 것도 아니고,
저자의 의견이 현재 사람들의 상식을 벗어난 소수의견 일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통념에 치우쳐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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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정치적 성향의 책들은 배제를 했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소수의견을 선물 받았을 때 '이 일을 어쩐다'라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나에게 잘 흡수되고, 재미있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는 일상들의 모습에 대해 쓴 '날 선 일상들'이 공감과 관심을 가지고 읽어 볼 수 있는 장이었다.
책의 특성상 개인편차가 심할 것으로 생각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쉽게 읽을 수 있게 맛깔난 글을 써주신 작가의 글솜씨에 더불어 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회 현상들을 작가의 시각으로 다시금 재접근하게 되니 닫힌 시야가 넓혀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소수의견이 내일의 상식이 될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몰상식과 비이성이 판치는 세상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작가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읽고, 판단은 스스로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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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감 - 루쉰은 짧은 에세이를 잡감이라 불렀다. 잡감은 논문이나 문학, 즉 학(學)이나 문(文)이 아니라 지적으로 여과 처리된 감(感)과 촉(觸)이다.
소수의견 Dissenting Opinion - 소수의견은 다수결로 최종결정이 이루어지는 기관에서 다수를 점하지 못해 폐기되는 의견을 가리킨다. 대표적으로 대법원의 판결이 있다. 소수의견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단지 폐기된 의견이 아니라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수의견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88만원 세대’를 통해서 알게 됐지만 그것 말고는 따로 접해보진 않았었다. 이곳저곳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모아 이런 책으로 발표된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읽어보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88만 원 세대> 저자 박권일이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시사IN', '한겨레' 등의 언론에 쓴 사회 비평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는 이 책의 이름을 ‘소수의견’이라 짓고 ‘박권일 잡감’이라 불렀다. 박권일은 노무현 정권과 함께 기자가 되었고, <88만 원 세대> 저자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명박 정권과 함께 칼럼니스트로서 삶을 시작했다. 이 책은 공교롭게도 고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애도에서 시작해 이명박 시대를 되돌아보는 기록물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명박 정권만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으로 연결되는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태평성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그리고 루쉰)의 말처럼 ‘소수의견’은 ”학(學)이나 문(文)이 아니라 지적으로 여과 처리된 감(感)과 촉(觸)“으로 된 글이고 그래서인지 짧은 내용으로 채워졌지만 날서있고 예리함을 잃지 않고 있다. 10년이 넘은 글에서 지금도 해당되는 문제의식과 여전한 문제점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김대중-노무현-이명박으로 연결되는 역사성“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계속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10년 전 글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읽게 되니 기분은 그리 좋지 않다. 과연 조금이라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여러 가지로 불편한 기분으로 읽게 만든다. 뭐라도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도대체 뭘 해야 할지는 딱히 떠올려지지 않는다. 마냥 답답한 기분으로 글을 읽게 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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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편독이 무척 심한사람입니다. 거의 소설, 단편도 잘 읽지 못하고 항상 장편만 읽습니다. 그러던중 박권일씨의 소수의견을 선물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박권일씨는 너무 유명한 '88만원세대' 때문에 알고있었기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거부감없이 받아들일수있었습니다. 지금 당장의 현실에 대해서만 '의견'을 내고 있는것이 아니고 FTA시위부터 노전대통령이야기 그리고 SNS와 관련된 이야기까지 2007년부터 차근차근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정치나 사회쪽에 많은 지식이 있지 않으나, 많이 어렵지 않게 현상들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한번 우리의 현실과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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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박권일. 자음과 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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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년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의 구성원 다수 중 소수입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결국, 다수 중 제 3자가 쓸데없는 오지랖만 난무할뿐.
더이상 자살은 개인 소수 문제로 치부하기 보다는 사회 문제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소수는 공허한 메아리일뿐.
소수가 공론화 하는 세상이 오길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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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책을 읽으면 좀 편식을 하는 편이다. 소설과 에세이, 시 그런 감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것 저것 따지고 그러는 정치적 성향의 글들은 아예 배제를 한거 같다. 그래서 처음에 ‘소수의견’ 의 첫 장을 보았을 때, 신문에서 보았을법한 이야기 거리라서 나랑 맞지 않겠다라는 선입견이 먼저 들었었다. 그래도 호기심에 몇 줄을 읽어보니, 간단하게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작가의 예민한 감과 촉을 이용해 글을 썼기에 감성적인 나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여서 쉽게 쉽게 읽어 내려 갔던거 같다. 나에게 관심이 귀울여 졌던 일상들의 모습의 ‘잡감 셋,/날 선 일상들‘은 요즘 흔하게 볼수 있는 일상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고민들, 현상들, 가족간의 관계를 다루는 ‘숟가락 마이크'로 치유의 인터뷰, 나 또한 나를 전시하기 위해 틀에 맞춰진 자기 소개서를 써 봤기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자기소개서에 담긴 삶’, 빈부의 격차가 더욱더 벌어지고,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 조차 사라진 ‘공부의 신’도 못 따라갈 대한민국 현실등의 부분은 정말 많은 공감과 함께 우리 사회의 모습의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현실을 다시 보게끔 하는 장이였다. 어렵게 느껴진 사회현상들을 ‘소수의견’을 통해서 쉽게 접근하게 되어 상식이 급 상승이 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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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수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다수결이 절대적으로 옳은 의사결정 방법이라고 주입 내지 세뇌당하면서 살아간다~선거나 판결처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들은 차치하더라도, 3명의 친구들이 만났을 때 식사 메뉴를 정할 때조차도 2명이 찬성한 메뉴를 나머지 1명은 불평없이 먹는 게 당연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할 정도로...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던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나이가 들어서 경험이 쌓일수록 그리고 역사관련 책들을 많이 읽을수록 다수결에 대한 회의가 점점 강해지는 걸 느낀다. 플라톤이 그의 조국이자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칭송받는 그리스의 참담한 정치현실을 한탄하며 쓴 중우정치라는 용어...다수결로 당선자가 결정되는 선거를 통해서 독일을 자신의 뜻대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은 히틀러가, 비록 양자입양이기는 하지만 세습을 통해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한 로마의 5현제들보다 훌륭한 지도자인가??
이런 의문을 한번이라도 가져본 사람이라면 "소수의견"을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에 담겨있는 세부적인 사회현상들에 대한 글쓴이의 견해에 동의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다수의 의견과 다른 소수의 의견이라도 그 자체로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깨달음!!!!!그리고 "소수의견"은 이런 의문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만 편집에 있어서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이 종종 있고, 접속사의 연결이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문장들도 눈에 띄어서 아쉬움이 남는데, 나중에 개정판이 나오면(빌려서 읽음) 사서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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