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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2011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18세 이상 성인 10명 중 3명(유병률 27.6%)이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했고, 6명 중 1명(15.6%)은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으며 최근 1년간 자살시도자만 10만 8,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이데일리, 2012.7.13.기사 발췌). 그 정도가 차이가 있을 뿐 전국민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자조 섞인 탄식이 나올 정도- 기사 제목이 “정신질환 공화국 대한민국” 이다 - 로 심각해진 원인은 무엇일까? 수십 수백 개의 원인 분석 기사들 중에 “고(苦)가 많은 현실”이 원인이라는 글에 눈길이 간다. 공해, 실업, 과당 경쟁, 과로, 가정불화, 치안불안, 정치사회 불신 등등 괴롭고 고통스러운 현실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 정신 질환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러한 심각성을 고려해 정신건강검진을 확대 시행하고 지원을 늘린다고 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치유되지 않는 이상 큰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만 같다. 서두부터 유쾌하지 않지만 남이 아닌 나의 얘기일 수 있는 정신질환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책이 현대인의 대표적인 정신질환 중 하나라는 “강박증(强迫症,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을 앓은 작가의 경험담을 털어 놓은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바로 “에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원제 Amen Amen Amen / 비채 / 2012년 6월)>이 그 책이다.
5학년으로 올라간 첫째 주 어느 날 아빠의 여동생이자 영원한 나의 영웅인 “시몬” 고모가 동맥류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죽음은 우리에게 필요한 휴식이고 깊은 잠에 드는 것과 같다는 엄마가 말씀하셨지만 아직 어린 나이라 죽음에 대해 이해를 할 나이는 아니어서 그런지 아직 젊고 생기 있는 사람이 일주일 만에 영영 사라졌다면 좀 더 납득이 가는 설명이 필요했다. 나는 고모의 죽음에 슬픔보다는 나쁜 짓을 저지르면 나쁜 일이 생기고, 진짜 나쁜 짓을 저지르면 죽는다는 사실과 함께 하-님 - 유태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면 불경하다는 생각에 축약해서 부른다고 한다 - 만이 인간이 죽는 이유와 시기를 아시는 유일한 존재이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만이 영원한 잠에 들어서 떠도는 동안 하늘에 계신 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이해한다. 얼마 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나는 조금씩 이상 행동을 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알 수 없는 기도를 올리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못과 같은 날카로운 조각들을 주워 모으며, 자신의 의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즉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저 고모와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충격으로 어린 시절 잠시 잠깐의 이상 행동, 즉 일종의 성장통인 줄만 알았던 이런 강박증은 대학을 가고 성인이 되어서도 점점 더 심해져만 간다. 유일한 버팀목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함께 기도하고 자신을 다독거리는 바로 어머니였다. 여기에 또 다른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몇 몇의 남자들과 사랑을 하지만 실패하고 만나게 된 남편 “제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딸이다. 엄마는 결국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이런 강박증을 결국 극복해냈을까? 책에는 완치되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남편과 딸로 인해 충분히 극복해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 주며 끝을 맺는다.
어린 시절부터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중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인생 역정과 함께 자신을 평생 괴롭혀 온 강박증에 대하여 솔직하게 털어놓은 자전적인 소설 - 책 분류가 소설로 되어 있는데 엄밀하게는 자서전(에세이)가 맞을 것 같다 - 인 이 책,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자못 감동적이긴 하지만 사실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내가 남성이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이나 어머니와의 사랑에 대해 둔감한 탓도 있을 테고, 다행히(?) 내가 작가와 같은 강박증을 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여담이지만 인터넷에 나오는 강박증 자가 테스트를 해보니 나는 정상이라고 한다. 물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으로 정확한 테스트가 되진 않겠지만 말이다 - . 처음에는 그저 사춘기 시절 앓고 지나가는 성장통 쯤으로 그려질 줄 알았는데 장년이 돼서도 쉬이 떨쳐 내지 못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강박증이라는 병의 심각성과 치유의 어려움(難治)에 꽤나 놀랍기도 했다, 또한 주인공(작가)이 앓고 있는 강박증의 수준이 전문적으로는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책에 나와 있는 내용만으로는 심각한 수준 같은데, 장년이 되도록 특별한 치료가 없었다니 그녀의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무신경에 살짝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정신과 상담을 받아왔고, 성인이 되어 의사들의 진료를 받으면서 약을 복용해왔으니 작가 입장에서는 치료를 받아온 것이겠지만 책이나 TV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정신질환은 병원에 강금당해서 치료받아야 한다는 내 잘못된 선입견을 탓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주문(呪文)처럼 끊임없이 외워대는 기도나 길거리에서 못이나 날카로운 것들을 주워 모으는 그녀의 결벽증적인 행동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다는 망상증(妄想症) - 주변의 죽은 사람들 이름을 살인 목록에 올려놓기도 한다 - 이라면 제대로 치료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녀의 인생이 책에서처럼 굴곡지고 힘들지는 않았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경험이 오늘날 유명 희극 배우로서, 그리고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강연과 연극 제작을 하는 사회활동가로서의 그녀를 있게 한 것이긴 하지만.
이처럼 대외적으로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가 자신이 강박증 환자였다는 것을 내밀한 속살을 털어놓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런 책을 쓰게 된 것일까? 아마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강박증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자신처럼 방치해두지 말고 하루 빨리 치료받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여기에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희망과 용기의 격려도 포함해서 말이다. 정신질환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병을 솔직히 인정하고 늦게나마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 작가에게 진심으로 경의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우리나라 상황에도 분명한 경종(警鐘)을 울리는 책이 되길 바래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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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나이 때 정말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작은 아마도 추석 때 성묘를 다녀와서 일 것이다. 무덤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다녀와서 죽음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상상했었다. 죽음이 영원한 결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영원히. 그런데 어떻게 영원히 나로 있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니까 지금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나라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과연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은 채 영원히 있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것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 같다. 결별로 인한 슬픔 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로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런 것들이나 상상해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죽음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든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존재 자체가 삶의 절대적 외부에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 사유에 있어 언제나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영원히 불가해한 것이기에 그 반응에 있어서도 천차만별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자끄 드와이용 감독의 영화, '뽀네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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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의 주인공은 4살짜리 여자 아이다. 감독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여자 아이의 실제 나이 또한 꼭 네 살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연구 결과 5세 이상이 되면 죽음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문명에 포획된 의미의 죽음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회적 의미 이전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 시선을 담으려 한 것이다. 바로 거기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아이는 당연히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 상실의 '영원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가 돌아올 것을 굳게 믿으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결국 엄마의 무덤으로 몰래 가서 파헤치기까지 한다. 아이에게 죽음은 인식할 수 없는 무한이 입을 벌린 것과 같았다. 그것은 아이가 절대 이해란 이름으로 포획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타자란 바로 무한성'을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죽음이란 '뽀네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 있음을 알게하는 것이었다. 내가 절대도 넘어설 수 없는 경계 저 편에서 내 한계를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죽음은 대부분 우리에게 부정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내 자아의 영역을 위축시키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싶듯이 죽음을 밀어내고 설사 죽음과 맞딱드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더욱 자신의 자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영원한 상실을 열어보인 무한의 틈을 의식적으로 없는 것 처럼 메우려든다는 것이다. 마치 죽음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네델란드의 세계적 석학, C. A. 반 퍼슨은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에서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를 기준으로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나눈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현대를 죽음을 망각하는 태도로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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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1세기 전만 하더라도 다반사로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 죽음은 교묘하게 은폐되고 있다. 겉으로는 죽음과 애도를 감추려는 사회 규칙에 의해, 안으로는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인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웃이 함께 슬퍼하는 일도 이제 없어졌거니와 상복을 입는 일도 이제 드물게 되었다.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주의 사람은 물론이고 죽어가는 당사자 조차도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도 '소비 가능한 것(소모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C.A 반 퍼슨,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 P. 213)
현대에 이르러 유독 이렇게 의도적으로 죽음을 은폐시키고 망각하려 드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나'라는 자아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확장되어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점점 강해져만 가는 자아에게 있어 유일하게 '한계'라는 상처를 입히는 절대적 타자인 죽음이기에 은폐와 망각을 통해 상상적으로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고전 추리 소설이라면 흔히 나오는 탐정의 마지막 추리 쇼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게 흥미롭다. 거기서 탐정은 꼭 예전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세부에 있어서까지 정확하게 복원한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다. 아니,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리 소설은 에드가 알란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과 더불어 태어난 근대의 산물이고 그런 추리 소설에 있어 범죄란 늘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고 설파하는 근대성에게 상처를 입히는 얼룩 같은 존재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즉 추리 소설의 시간 되돌리기 추리쇼는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을 그대로 복원해 그 상처가 마치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드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은폐와 망각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범죄에 대해 근대가 보여주는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근대에 의해 태어난 자아라는 주체성이 타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척도가 된다. 즉 은폐와 망각이라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바로 기본적인 태도라는 사실이다.
즉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대면함에 있어 중요해지는 것은 '나라는 '자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그 절대적 타자가 열어보이는 무한 앞에서, 나의 한계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그래서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무한 앞에서 어떻게 내게 존재하는 절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나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것인가가 더없이 중요한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집착이요 그래서 하나의 강박이다. 그것도 내 쾌락의 원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벌이는 것이기에 프로이트의 분류에 따르면 도착증적 강박이다.
정확히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 이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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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소설은 아니다. 물론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여기에 실려있는 내용들은 작가 애비 셰어의 실제 경험과 내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의 고백록이라고 불러야 한다. 애비 셰어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모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이 소설에서 정직하게 밝힌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증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불행이 바로 자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강박증이다. 제목의 '아멘 아멘 아멘'은 현실속에서 그녀가 불행한 사건을 만날 때마다 올리는 기도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빌며 그것을 위해 노력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가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되므로 행동을 조심하는 것. 또는 길가의 날카로운 쇠붙이나 유리 따위를 줍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여나 행인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강박적으로 노력한다. 오로지 세상이 불행없이 이대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강박증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죽음이 가져온 영원한 상실, 그 변화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한 반응은 무엇보다 자아의 보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녀의 강박적인 노력들 역시도 그와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녀가 세상에 불행이 없기를 바라며 하는 모든 노력들은 사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그런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러한 현재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열망은 그대로 변화에 대한 거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일어났던 진정한 변화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애비 셰어의 그러한 강박적인 노력은 사실 그녀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 아버지의 죽음을 지우고 그것이 없었을 때의 세계를 되돌리려는 노력에 다름아닌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죽음이 각인시키는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애비 셰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리스트의 의미다. 그녀는 여러가지 리스트를 만드는데 그러한 계보의 작성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증명했듯이 근대에 이르러 탄생한 것이었다. 즉 이는 자기 세계의 확고한 보존을 드러내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이 열어보인 자기를 삼키려 드는 무한 앞에서 강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분이라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애비 셰어는 정말 많은 죄책감을 보여준다. 그녀는 세상에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에 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자신과 타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대로 애비 셰어 역시 타자에게로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비 셰어의 죄책감이 일종의 도착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녀는 왜 세상 모든 불행한 일에 끊임없이 강박적일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이 질문은 죄책감의 진짜 목적을 묻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애비 셰어에게서 혹시 지젝이 '까다로운 주체'에서 말했던 중세의 수사가 신자들에게 금욕적일 것을 요구하여 유혹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유혹에 대한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집요하게 떠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나? 과도한 선이 오히려 과도한 악을 창조하는 모순을... 푸코는 권력 자체가 저항을 생산한다고 말하고 라캉은 금기 자체가 욕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런 말을 한다.
법 자체야 말로 죄의 영역이다. 법을 위반하려는 사악한 충동들의 영역을 열어놓고 지탱하는 곳이며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도착적이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게 만든다. 그리하여 법의 지배의 궁극적 결과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그 모든 초자아의 비틀림과 역설들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한에서만 즐길 수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자기-반성적 전회를 통해 죄책감 속에서 쾌감을 취한다는 의미이며 사악한 생각을 하는 나를 응징하는 속에서만 향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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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 셰어가 느끼는 죄책감의 본질은 이 말대로다. 사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쾌락 추구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그 죄책감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을 공급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은 쾌락을 위한 하나의 제스쳐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강박은 도착증과 다를바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도착증이 애비 셰어만의 독특한 반응이 아니라 사실은 근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체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도착증과 히스테리를 구분한 적이 있다. 거기서 도착증은 히스테리와 달리 전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당연하다. 도착증은 자신의 쾌락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세계마저도 그 쾌락을 위해 능동적으로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새디스트를 생각하면 된다. 그는 자신의 쾌락이 피학에서 오는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 앞에서 그 피학으로 유도하는 연기를 한다. 바로 이것이 도착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타자에게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자와 세계마저 마음대로 조작해 가는 것. 이런 의미에서 애비 셰어의 모습은 그야말로 죽음에 대한 현대의 반응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죽음이 열어보인, 삶을 궁극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그 변화를 받아들임이야 말로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은 다행히 사랑을 매개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녀가 진정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사랑 또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전적으로 나를 내어주는 것, 그렇게 타자에게 나를 맡김이다. 후반에 그녀는 서서히 강박적인 것이 줄어듦과 동시에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을 병행시킨다. 그렇게 강박으로 집요하게 보존하려 했던 자아에 대한 포기가 바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임을 암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소설 초반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에는 질서가 있다. 나쁜 짓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진짜 나쁜 짓을 하면 죽는다.(P. 27)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 나머지 이야기는 불확실성으로 시작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시작한다. (P. 461)
말하자면, 이런 변화가 바로 애비 셰어의 고백이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노래로 끝난다. 고정적일 수 없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것 말고 세상에 같은 노래는 있을 수 없다. 노래는 혼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다 다르다. 왜냐하면 악보에 표시된 음은 다만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음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와 세계가 하나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우연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음이 상징하는 것, 이 노래 자체가 상징하는 주체가 근대이후로 수많은 비극을 잉태시킨 도착증적인 주체를 극복할 하나의 대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주체가 늦지 않고 '제 때에 도착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은 그 기도의 공감을 위한 진솔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여정이라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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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줄만 알고 읽고있다보니 픽션이라기엔 쳐내야할 부분의 반복도 좀 있고, 또 화자의 감정선이 소설처럼 자연스럽지않아 (^^;;;) 찾아보았더니만, 역시나 픽션이 아닌 작자 자신의 이야기였다. 원제는 [Amen,Amen, Amen:memoir of a girl who couldn't stop praying]. 저자는 기도를 멈추지못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OCD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에다 거식증을 가진 인물. 어릴적 사랑하는 고모와 아빠의 죽음을 겪으면서, 사랑, 죽음, 종교, 직업, 가족 등에 대한 불확신과 끝임없는 고통을 견뎌가면서 깨달아가는 것들을 읽는이들에게 소중하게 전달하려고 한다. 심지어 그녀의 싸이트 (http://abbysher.com/)에 가보니 느껴지는 것들이, 꽤나 많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싶어하는 열망이 느껴졌다. 자신처럼 글을 써보라는(쓸 것이 없다면 어떤 것부터 쓰라는 팁도 있다). 확실히 모든 문제점의 첫발자욱은 현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하는 것. 글쓰기는 내향적이건 외향적이건간에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으므로.
니체를 읽으면서 '동정심'에 대한 그의 냉정한 견해를 아직 다 이해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님, 그 연유를 아직 더 자세히 읽지못했음)하지 못한데다, 실상 밖으로 보이는 감성적인 부분을 좀 더 줄여야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터라, 또 난 공감과 감상을 헷갈리는게 아닌게 하는터라 읽으면서 울다가 (에잇, 앞에 모녀사진때문에 더 울었잖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그러고난뒤 한일전 보려니까 아, 이건 무슨 울다웃으며 널뛰기하는 미친x같아서... 책에 대해서는 다른 책 리뷰쓸때처럼 부분부분 토달며 말하고픈 생각도 많았지만, 나중에 가서 이게 작가의 인생이라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되니 뭐라고 토달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열심히 반복 쇠놰시키듯 말하듯, 아직까지도 타인에 대해 경솔한 평가와 입놀림을 그만두지 못하지만, 적어도 고통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말도 하고 싶지않다. 내가 유산하고서 새언니 앞에서 "낙태하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어. 다 지옥가야되!"라고 말했을때, 사랑하는 새언니는 매우 조용하게 "오빠랑 결혼하고 레지던트하고 바쁠때라 지웠었다"란 말을 듣고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매우 오랫동안 아이가 들어서지않아 매우 고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작품은 좋았다. 소설이었다면 더 그럴듯하게 더 감동적으로 꾸몄을 부분도, 저자는 가만내버려두고 진솔하게 다 써내려갔고, 그녀가 겪은 상실을 내가 다 겪지 못했고 겨우 하나에 허덕이니 앞으로 다가올 것이 마치 그녀의 이야기로 미리 보여지는 것 같아 두렵지만 결국 그녀처럼 버틸 수 있을거란 생각도 들기도 한다.
p.s: The suggested topics by the Author - 지금 내가 감사해하는 5가지: - 가장 좋아하는 요리 5가지 - 글쓰고 싶어하는, 5글자의 주제 - 지난 24시간동안 만졌던 모든 것들 - 오늘 하루 들은 것들 - 아침에 일어날때 들은 것들 - 잼 세션을 구성한다면 밴드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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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제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제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제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제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제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제때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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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n :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아멘 아멘 아멘....연신 주문을 외듯 혼자말을 읊조리는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애비. 주문에는 애비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제발 아무도 죽지 않게 해주세요' 애비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상 속 두려움으로 각인된 것은 고모가 동백류를 일으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이후 부터다. 물론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으며, 태어나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지만 갑작스러운 친족의 죽음을 맞이한 어린 소녀가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틀전까지 얼굴을 마주하며 웃던 고모의 죽음 후 애비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었을꺼야...그러니까 고모가 죽은걸꺼야' 하지만 애비의 불행은 고모에 이어 아버지까지 짧은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자 애비는 무생물체의 수집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애비가 모으는 것들은 도로변에서 발견한 못이나 위험한 잡동사니들이다. 잡동사니들을 모으는 이유는 두가지다. 한가지는 갑자기 달리던 자동차의 타이어가 거리에 버려진 못에 찟기기라도 한다면, 운전자나 차에 탑승한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거리의 버려진 것들을 줍는 것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거리의 쓰레기들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애비는 자유롭지 못하다. 여전히 그녀의 삶은 불안하게 하고 심각한 섭식장애에 시달리기도 한다. 처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이후, 애비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준 것은 새로운 생명이다. 그녀안에 잉태된 새로운 생명. 자신의 아이를 통해 애비는 비로서 죽음이 아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상처입은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게된다. 더 이상 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방안을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는 모습에서는 가슴 한편이 애잔해진다.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숨지 않는 애비의 모습에서 불안정하지만 어른의 모습 또한 보여진다. 우리는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척....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게 되는 데 애비는 자신의 불안정한 감정과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친한 친구를 잃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애비가 대견스럽다.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든, 서로에 대한 감정이 변해서 헤어지든..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상실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애비에서 찾을 수 있다. 죽음과 이별, 방황을 다루지만 슬프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슬픔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애비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무조건 강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솔직하고 주변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비로서 어른이 되는 것임을..애비가 보여주고 있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상처입은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게된다. 더 이상 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방안을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는 모습에서는 가슴 한편이 애잔해진다.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숨지 않는 애비의 모습에서 불안정하지만 어른의 모습 또한 보여진다. 우리는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척....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게 되는 데 애비는 자신의 불안정한 감정과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친한 친구를 잃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애비가 대견스럽다.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든, 서로에 대한 감정이 변해서 헤어지든..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상실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애비에서 찾을 수 있다. 죽음과 이별, 방황을 다루지만 슬프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슬픔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애비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애비를 통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조건 강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솔직하고 주변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이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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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 때만 해도 학교 수업이 오전반, 오후반 나뉘어 있었던 기억이 나요. 그 날은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었는데, 저보다 엄마가 먼저 외출하시면서 문을 잘 잠그고 나가라고 당부하셨죠. 문을 잠궜는지, 아니면 그냥 열어놓고 갔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가 저에게 문을 잘 잠그고 가라고 했더니 오히려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크게 혼나지는 않았어요. 엄마도 어이가 없으셨는지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고 앞으로는 문단속 잘 하라고만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일이 제게는 무척 충격이었던가 봅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문단속에 무척 신경쓰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병원에 가본 적은 없지만 저는 제 스스로 강박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거든요. 기억에도 남아있고요. 그런데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확인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제 안에 어떤 기준을 마련해놓고 있는 거죠. 몇 번 확인하면 괜찮아, 그 수만큼 확인하면 괜찮을거야-라는 기준. 사실 [아멘 아멘 아멘]을 읽으면서 무척 불편했어요. 애비는 자신 안에 기준을 마련해서 쓰레기를 줍고, 몇 십번씩 기도를 하고, 운전을 하면서는 누구를 치어죽이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며, 끝내는 자해까지 감행하죠. 그 시간들이 주위 사람에게는 걱정이고 두려움이겠지만 본인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와 공포였을 지 조금은 이해하니까요. 자신 안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들로 분명 피곤했을 거에요.
그녀의 강박증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조금 더 높았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은 있고 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니까요. 결코 밝을 수만은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용기있게 써낸 그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그녀가 겪은 강박장애는 결코 부끄럽지도, 이상한 눈으로 판단될 일도 아니지만 여전히 현실에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을테니까요. 누구나 겪는 우울증이 특별한 취급을 받지 않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이고, 아직도 우울증에 헉!하는 감정을 갖고 있는 분들도 많다는 현실은 아쉽습니다. 학교만 해도 한 반에 우울증을 앓는 아이들, 심리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 적게는 두 세명, 많게는 열명 가까이 있거든요. 분명 그녀의 책이 용기있게 세상으로 걸어나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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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가 없지만, 딱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 있을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른 이의 믿음을 쉽사리 부정할 만한 논리나 신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의 존재를 내 나름대로 부정했다가도 어느 샌가 그에 매달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부풀어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를 가진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나 같은 사람도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에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에게 기도하고 잠깐일지언정 위안을 받곤 하니까. 물론 종교가 없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 역시 또 다른 모습의 '신'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논리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논리'야 말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이고, 과학 속에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이야말로 누군가의 신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두는 저마다의 '아멘'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비의 '아멘' 역시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아멘은 다른 이에 비해 조금 많이 되풀이되는 것 같다. <아멘 아멘 아멘>, 하고.
어린 시절에 맞닥뜨린 삶과 죽음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항상 거기에 있을 거라 믿고 있었던 존재의 부재가 커다랗게 다가오는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왜 죽음은 그렇게 찾아왔던 것일까? 죽음을 맞이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나쁜 생각을 하면 죽게될까? 라는 생각이 되지는 않을까. 애비는 키니 고모가 떠난 밤, 삶과 죽음에는 질서가 있으며 나쁜 짓을 저지르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님뿐이다. 애비는 키니 고모에 이어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 애비는 자신의 방에 있는 벽지를 노려보며 아버지는 자신의 나쁜 생각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울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때 부터, 애비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전자제품의 스위치가 꺼졌음을 확인해야 했고, 길가에 버려져 있는 날카로운 쓰레기들이 타이어에 펑크를 내 비극적인 사고로 이어질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 그 쓰레기를 하나하나 주워모아야만 했다. 구급차를 발견하면 제 때 도착하기를 쉼없이 기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애비의 가장 좋은 남자친구이자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애비는 친구를 만나 서로가 최고의 존재가 되길 간절히 바랐고, 남자친구가 오롯이 자신을 바라보길 원한다. 갈수록 심해지는 강박증은 거식증과 우울증을 동반한다. 애비는 기도를 하다 단어 하나를 잘못 말하면 다시 처음부터 기도를 수십, 수백 번 되뇌어야 했다. 날이 갈수록 말라갔고, 끊임없이 자해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 조앤과 남자친구 제이를 만나 이를 극복하기 시작한다. <아멘 아멘 아멘>은 이렇듯 소녀가 맞닥뜨린 죽음의 극복 그리고 화해의 기록이다.
상실감과 그로 비롯된 강박증을 견딘 애비의 이야기는 그래서 상당히 개인적이다. 하지만 보편적이다. 애비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일상적으로 시달리지 않을 뿐, 우리는 애비의 증세들을 종종 겪을 때가 있다. 지금 타고 있는 차가 갑자기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며칠 동안 집을 떠나 있는 동생은 무사할까. 달려가는 구급차 속에 누워있는 사람은 무사히 병원에 도착할 수 있기를,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부디 슬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기를. 그들의 무사평안을 그 때만은 조용히 어딘가에 계실 신에게 빌곤 한다. (물론 거기까지만, 이라는 게 문제지만.) 그리고 애비는 자신의 상실감 속에서 이러한 걱정들을 일상적으로 혼자서 떠안으려 했다. 혼자만의 세계 속에, 물 아래로 침잠되어간 그녀는 마음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고요하게 모두를 지키려 했다. 강박증 위에 놓여 풀어놓은 애비 셰어의 내러티브는 그래서 조금은 답답하지만 공감할 수 있었고,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녀의 기도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그래서 <아멘 아멘 아멘>은 온전히 소설에 공감하기도, 완전히 바깥에서 관조하기도 어려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책장의 속도에는 쉽사리 가속이 붙질 않는다. 그러나 느릿느릿 속도의 변화 없이 꼼꼼히 그녀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앞서 만났던 그녀의 목소리에 새삼스럽게 다시 귀 기울이게 된다. 책장을 수도 없이 앞으로 되돌리며 애비는 물론이거니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려 애쓰게 된다.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사건에 맞닥뜨리면 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스스로에게 무지막지한 죄책감이 밀려오곤 한다. 하지만 이내 그래봤자 내가 뭘 어쩌겠어,라는 체념이 이어진다. 그런 무기력함에 나는 미안함을 담아 나만의 '아멘'을 읊조린다. (역시, 거기까지만,이라는 게 문제지만.) 그러고 나는 애비 셰어의 이야기를 읽으며 또 다른 '아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다른 일을 나몰라라 하는 이들과 나 자신에게 화가 나던 찰나,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질 수는 없다며 강박증에 시달리는 애비에게 건네는 어머니의 다정한 한 마디가 그랬다. 무게는 비록 다를지언정, 나에겐 그랬다.
애비의 강박증은 그녀의 어머니와 현재의 남편 제이, 그리고 그녀 속에 새롭게 잉태된 생명으로 인해 서서히 극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끝내 나의 '아멘'과 애비의 '아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녀의 고백에 귀기울이며 발견한 '무언가'는 떨어져 있었을지언정 곁을 묵묵히 지키고 또 끝내는 이별했을지언정 함께 있는 애비와 어머니 조앤의 이야기는 이 세상 모든 딸과 어머니들의 화해였다. 그래서 애비의 아멘이자 하-님은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아멘, 아멘, 아멘.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에는 질서가 있다. 나쁜 짓을 저지르면 나쁜 일이 생긴다. 진짜 나쁜 짓을 저지르면 죽는다. 죽음은 끝도 없이 캄캄하며, 머릿속에 피의 홍수가 나도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 아무도 구해주지 못한다. 하-님은 인간이 언제 혹은 왜 죽는지 아시는 유일한 존재이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만이 영원한 잠에 들어서 떠도는 동안 하늘에서 하-님을 만날 수 있다._p.27 음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시로에게 편지를 쓰면 더이상 아무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_p.39 내가 울지 못한 이유는 내 못된 생각으로 인해 아빠가 죽었기 때문이다._p.82 애비, 네가 세상을 다 책임질 수 없어, 너도 알잖아._p.113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타이어가 터진다. 자동차 핸들이 갈비뼈와 비장과 신장에 박힌다. 모든 사람과 동물이 성난 불길에 휩싸인다. 남자가 죽고 여자가 죽고 아기가 죽고, 피와 불길, 비명과 파멸에 휩싸인다. 그들을 구하는 임무가 내게 주어졌다. 내 책임이었다. 내 사명이었다. 나의 존재 이유였다._p.117 M선생님에게 내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까지 내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야 한단 말인가? 기도는 병이 아니었다. 기도는 치유였다._p.186 기도는 내 삶의 질서를 잡아주는 장치였다. 매일 하루의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 고독한 확신이 들었다. 사람들의 안녕과 안전한 여행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였다._p.306 그날 밤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엄마를 위해 기도한 것만이 아니라 엄마를 향해 기도했다는 사실을. 나는 엄마를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존재로 만들어놓고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엄마를 위대한 마법사의 조수로 열렬히 신봉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엄마도 그저 살과 뼈로 이루어진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_p.351 어떤 면에서 이것은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선언이었고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달리 엄마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에 관한 질문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묻는 질문이었다._p.425 나의 믿음은 여전히 세상 그 무엇보다 불확실하다. 나는 전능한 존재, 설명하기도 어렵고 보이지도 않고 이름조차 부르기도 어려운 그 분을 믿는다. 나는 단지 길잡이가 되어줄 어떤 존재를 갈망하는 마음만으로 하-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_p.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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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접하기전 한 소녀의 성장통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사춘기시절 다들 겪는 그러한 삶이라 생각을 했는데 책속에는 그 소녀를 비롯하여 가족의 소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있다. 본격적으로 읽기전 한 페이지에 빼곡히 있는 문장 '제때 도착하기 바랍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 몇장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었는데 진도를 나가면서 이 글은 그녀의 기도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득 국내에서는 최근에서야 정신건강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우울증이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으로 여겨 집밖을 나가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았는데 외국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들도 상담을 받고 그 순간을 이겨내는 사례도 있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의 인격체를 세세하게 치료한다는 점에서 흥미가 이끌었다. 그리고 오늘 만난 <아멘아멘아멘>은 한 사람의 성장과정 속에 상처와 치유가 있으며 그것을 이겼내는 모습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죽음이란, 성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그 순간을 이겨내는 사람들은 나머지 생활에 문제가 없지만 이기지 못한자들은 우울증이나 심각하면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하물며 어린 소녀에게는 의지하고 든든한 아버지가 세상에 없음에 울어버릴 수도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벽에 부딧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한 고모를 잃은 후 아버지를 잃어버린 소녀. 마지막 아버지와의 통화속에 휴가를 같이 가자고 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한점 더더불어서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그녀는 친구와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집착에 보이게 된다. 그 흔한 못이나 유리등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매번 집으로 가져오는 행동이 왜 그렇게 눈물이 나게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다행스러운것은 그녀 곁에는 언제나 엄마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엄마로 인해 그 기나긴 시간속에서 나오게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글을 접하면서 오래전에 들었던 외국의 여가수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비오는 날 노래를 하던중 감전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딸...아버지게로 달려가던중 사고가 생겼는데 자신이 아버지에게 달려갔기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폐아가 되버린것이다. 그렇다보니 '애비'의 마음이 어떨지...그녀의 잘못이 아님에도 혼자서 세상을 구하려는 그녀의 의지가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러다 그녀는 쓰레기를 주워오는 대신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때 도착하기 바랍니다'라는 기도문이다. 모든 것이 엠블런스가 병원에 제때 도착하여 죽지 않기를 .... 바라는 어린 소녀의 기도는 살기를 바라는 그녀 나름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평소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책을 통해 아동의 심리에 대해 관심이 기울어지기도 했다. '애비'를 통해 그녀가 성장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도 언제나 불안해 하는 그녀의 모습은 상처를 가진자라면 안고 있는 마음의 상처이다. 이것을 슬픔으로 끝내지 않고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그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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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머지 이야기는 불확실성으로 시작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시작한다. -p.461
어떤 책을 읽을 때는 소개글을 잘 보지않습니다. 출판사 소개글 자체가 스포가 되는 경우도있고 고심 끝에 고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을때 표지를 중히 보는데요. 이번에 만나게 된 <아멘 아멘 아멘>은 저에게 물음표로 시작하게만든 책이었습니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책 표지까지. 뒷면의 글을 읽더라도 어떤 내용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더라구요. 사실 장르 소설을 좋아해 편차가 심한 편이라 읽기가 힘들기도했어요. 마냥 쉽지만은않게 다가온 책이었답니다.
허구의 소설로만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인공은 작가 그 자신입니다. 보통의 이들은 숨기려고하는 본인의 증상을 세상에 알리며 책으로 출판하기까지한거구요. 애비에게 닥쳐온 강박증은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애비의 시선을 경계해야할 투성이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길가에 버려져있는 유리조각, 압정 등 뾰족한 것들은 당장이라도 해를 입을 것만 같아 주머니가 불룩해질 때까지 넣었고 구급차를 보면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했든, 그러지않았든 모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던거죠. 성인이되고 강박증에 폭식증에 신경성으로 걸리는 병은 다 가지고있는 듯합니다. 성인이되었지만 정신은 성숙하지않아 보였던 애비가 점차 성장을 하게되죠.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인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셔서 많이 힘들어했지만 사랑을하고 결혼을하고 새 생명을 가지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결코 쉽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보다듬어주는 가족이있고 일어서려하는 본인의 의지가있어 힘겹게 한 발짝 내딛은거구요.
소설 속의 애비의 성격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같다고 느꼈습니다. 책을 읽는 초반에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어요. 주위에 애비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이도 없을 뿐더러 강박증과 폭식증에 대한 것은 대략적으로만 알았지 이렇게 책으로 읽은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이야기가 가볍지않다보니 초반에는 몰입도가 다소 떨어졌지만 책을 점점 읽으면서부터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가왔어요. 진정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아무래도 결말 부분 가까이에서부터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 책 표지의 푸른 물색처럼, 책 분위기도 그랬어요. 짙푸른 물색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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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강박의 고통과 함께한 한 소녀의 아픈 성장기 - 아멘 아멘 아멘 _ 스토리매니악 내가 죽음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반 친구 몇과 함께 선생님 지시(?)로 장례 치르느라 학교에 나오지 못한 그 친구 집에 갔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이 죽는다는 게 참 무섭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이제 9살인 친구가 아버지가 없다니, 친구가 불쌍해지면서 더럭 겁이 났더랬다. 이 소설 <아멘 아멘 아멘>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났다.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라던 주인공 '애비'는 사랑하던 고모에 이어 갑작스레 아빠 또한 잃는다. 그 충격 때문인지 애비는 몇 시간씩 기도를 올리고, 아빠 사진에 수 백 번 뽀뽀를 하고, 주위의 위험해 보이는 쓰레기를 주워 들이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시작한다. 누군가가 더는 죽지 않기를 더는 아프지 않기를 더는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벌이는 그녀의 행동들은 그녀 자신을 강박증으로 몰아 붙이고 그녀의 삶을 휘저어 놓는다. 이렇듯 강박과 싸우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성장하는 애비의 이야기가 주된 전개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이유와 해답을 찾으려는 애비의 이야기는 독특하다. 아빠와의 이별의 충격으로 강박증을 드러내는 그녀, 그녀의 강박 행동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짠한 감정과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이야기는 상당수가 이런 강박증의 일면을 보여 주며 그녀 자신이 자신을 치유하고 그 과정을 견뎌 가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면으론 답답하다 싶을 만큼 그 내용이 반복 되지만, 그 과정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를 잘 느끼게 해준다.
그녀가 보이는 강박은 일종의 죄책감이다. 자신 때문에 아빠가 죽었다는 죄책감, 자신의 부주의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는 망상이 겹치면서 그 죄책감은 심해지고 그녀를 갉아 먹는다. 그 과정에서 엄마, 친구, 남자들과 많은 관계를 맺고 끝내게 되지만, 그녀의 죄책감에 의한 강박은 그리 나아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러한 강박을 기도로서 이겨내고자 한다. 유태인인 그녀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기도에 집착하고, 신에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이 또한 강박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녀의 삶에서 기도와 신은 중심을 차지한다. 솔직히 무신론자 입장인 나로서는 그녀의 신에 기대는 모습이 달갑지만은 않고, 그 이유를 크게 이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애비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내게 애비의 모습은 단지 두려움과 맞서려는 일종의 방어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성장기가 내내 답답하리만치 안타까웠다. 그 내용을 작가는 절절하게 잘도 묘사해 놓았다. 이는 이 소설이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고백록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층 더 이해가 된다. 자신이 경험한 감정이기에 이리도 감정을 풍부하게 실어 놓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야기 자체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후반에 들어 자신의 영원한 친구라는 엄마와의 관계다. 그녀의 성장기를 내내 지켜 보다 그녀가 자신의 강박에서 벗어나오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엄마와의 이별이다. 그 장면 장면을 보는데 꽤나 마음이 동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과 순리의 이별, 신과도 같았던 엄마와의 이별을 통해 그녀 자신을 감싸고 있던 꺼풀을 하나 벗어버리는 듯 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연의 연결은 그녀가 자신을 치유하는 유일한 치료제였다고 보여진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이야기고, 아릿한 성장기였다. 한 소녀가 겪어야만 했던 이별과 치유의 폭풍을 잘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한 편으로는 소설 같기도 하고 또는 에세이 같기도 했는데, 그런 면이 이야기에 진실성과 감동을 더 넣어주지 않았나 싶다. 애비가 지나온 거친 성장통의 과정을 한 번 읽어 보길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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