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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 진화론은 종교와 과학이라는 다른 입장에서 보는 논리적 대립으로 평행선을 그으며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과학과 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다루고 이해하는 사유 체계이지만 명백히 다른 근본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영적인 믿음으로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종교와 현실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자연 현상을 다루는 과학은 양립하기 힘든 것처럼 보여 왔지만 사유 체계를 구성하는 영역으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하여 시간적인 소모를 줄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들의 견해가 있다. 종교적 핵심인 믿음은 두뇌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진실이라고 간주하는 모든 인지나 감정으로 정의 내리는 인지신경학자는 믿음의 기원까지 올라가 신에 근거한 신앙 체계를 뇌의 중요 요소로 확립하여 믿음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으로 이끌어 냈다.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과학은 기존의 자연 현상과 이론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되,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명확히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현대진화론과 유신론ㆍ무신론 논쟁의 정점에 서 있는 도킨스 교수는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의 편협함, 맹신, 잔인함, 악습과 편견에서 나오는 극단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며 신을 만들어진 망상이라고 말하여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현재 환경에 더 잘 맞는 유전자를 지닌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기고,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서 개체군에 유전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 변화는 그 생물의 환경에 대한 적응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개체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여겼다. 자연선택은 모든 생명체가 실제로 살아남는 것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낳고, 이 자손들의 형질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 뒤 환경에 더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게 되고, 살아남은 생명체의 형질이 유전을 통해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연구를 새롭게 열어 보이려는 윌슨 교수는 자연사적 정보를 통해 진화론의 강력한 기초는 금욕주의적 수행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나교뿐 아니라 특정 종교를 연구하는 발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가설을 많이 내세워 자신의 논리를 펴고 있지만 설득력 있는 실례를 제시하지 못하는 밈 가설을 이론적 가능성으로 간주하였다.
우주는 생명체만을 위해 이상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 현상을 말한다. 진화론을 취하는 과학은 인간이나 종교가 만들어낸 법칙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 부합하여야 하며, 자연과학의 결과와 이론은 실제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연구 결과는 언제나 잠정적이며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알렉산더 교수는 과학적 설명은 생물학적 다양성이 생겨난 방식을, 신학적 설명은 그 원인을 기술하는 상보성을 들어 통합 상보성 모델을 적용하는 일이 과학과 종교의 대척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문화인류학자 겔너는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권위자를 종교적 근본주의자, 엄격한 계몽주의자, 상대주의자라는 세 범주로 나눌 수 있지만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여 사회의 공적 역할에 충실해야 함을 주장했다.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생각하고 믿으며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부정적 관점에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의심할 자유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믿을 자유 또한 인정해줘 무신론자의 자유는 유신론자의 자유와 밀접하게 엮여 있음을 킹 목사의 연설문을 인용하여 그 뜻을 명확히 하였다. 수양과 도덕에 초점을 맞추고 공공의 선을 향한 신념이 강한 불교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종교학과 강사 히로코 카와나미는 2007년 미얀마 불교 승려들의 반정부 시위를 억압적인 군사정권에 맞서 사회적 안녕과 윤리적 기초를 마련하는 일을 예로 들었다. 인과 관계의 상호관계를 믿으며 업을 역동적인 원리로 보아 공덕을 쌓고 지혜와 연민을 키워가려는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로 고통의 조건을 수용한다는 오해를 풀어가려는 움직임은 다원적인 측면을 인식하는 게 중요한 종교의 가치를 일깨운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떤 경로로 연결되었는가를 파악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부족들 간의 지위 경쟁, 폭력, 전통적 전쟁의 인류학에 대한 광범위한 고찰을 저서에 담은 마쉬너 교수는 길고 추악한 역사를 공유하는 전쟁과 종교를 들어 종교 자체가 전쟁의 직접인 원인은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종교가 전쟁을 촉진하는 것으로 봤다. 종교는 인간이 내집단과 외집단, 우리와 그들을 분류하는 근본적 수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불가피한 수단으로 기능함을 역사 속에서 살피고 있다. 20세기 후반 종교적 사리사욕이 없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새로 부활한 설계론은 생물 진화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는 신만이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이라고 주장한다. 과학 자체로 신의 선물이라 칭했던 슈발리에는 과학이 어떻게 신의 권능을 가리키는지 살펴 볼 것을 촉구하여 과학과 신앙 간의 대화가 풍부히 오가는 것을 다윈의 유산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마이클 오브라이언은 문화의 진화를 파악하기 위한 유일한 접근법으로 다윈의 진화를 들어 진화론은 자연계를 설명하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하는 것으로 믿음의 문제인 신앙과는 별개로 인정하여 종교와 과학이 배타성을 띠기보다는 모두 의미 있는 유효한 체계로 이해했다.
종교의 기원은 인과성에 대한 믿음이 진화한 데 있으며 인과성에 대한 믿음의 기원은 도구 사용에 있다고 본 월프트 교수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여 어려움을 해결해 온 종교 활동은 개인의 안녕과 낙관주의를 향상시켜 인간의 생태적 삶을 진화해 왔다고 봤다. 초자연적인 작용인(作用因)에 대한 믿음을 종교적 사유의 방식으로 여기는 이들의 인지적 유연성이 인간 사회 내에서 불가피한 현상으로 종교는 만들어졌다. 과학은 인간의 삶을 물질적으로 편안함을 제공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삶을 심리적으로 안정하게 해주며 질적으로 향상시켜준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종교와 과학이 창조론과 진화론이란 논쟁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공동의 선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언어와 공감을 가능케 했던 진화상의 거대한 도약인 거울신경세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는 인간으로 교감한다는 게 은유에 불과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영역이 공존하는 틀을 마련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65쪽 14줄 의미를 띄게 되고 --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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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진화론에서부터 시작된 종교와 과학간의 논쟁.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현재에까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영원이 풀지 못할 숙제이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인간이 지적능력이 향상되어도 논리적 해명이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나는 카톨릭 신자다. 정확히 말하면 사이비 신자. 세례는 받았으나 성당엔 가지 않고, 종교는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서 바꾸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종교를 가진다는 자체도 부모 세대의 영향을 받은지라, 사실 내 스스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사실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몇년 전에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딱히 관심이 있어서 본 책은 아니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읽어봐야 할 책 중 하나로 선정되어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구입을 했고, 별 생각없이 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리 기억이 뚜렷히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굉장히 지루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관심 영역이 아니니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창조론에 대한 비판, 신은 없다로 일관된 주장을 폈던 책이라는 것. 최근에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이라는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겼다. 그 책에 대한 난해함으로 인해 내가 이해했던 것이 얼마 되지 않음과 스스로 작성했던 리뷰에 대해 너무나도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아마 오늘 또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될 것 같다. <현대 과학/종교 논쟁>이라는 책은 역시나 나에게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책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는 과학 대 종교의 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지, 앞서 말했던 책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수 많은 저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주장들을 묶어낸 책이라는 점이다. 한 권의 책이라기 보단 짤막한 기고문들을 모아둔 책이라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사유의 기간이 짧게 끊을 수 있어 상대적으로 읽기 수월하다. 굳이 글로 쓰자면, 하나의 장에 대해 하나의 리뷰를 써도 될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냈다. 위에서 <만들어진 신>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된 이유를 말해보자면, 이 책에서 종교와 관련되어 호의적인 학자들의 주 타겟이 해당 책을 쓴 리처드 도킨스이기 때문이다. 뭐 극단적인 주장을 펼친 만큼 반박도 심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아무튼,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책에 담겨있는 논조들은 무조건적인 비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온건파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내 주장을 펼친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 거부감이 덜 들었다. 어느쪽 주장을 지지하든 너무 극단적으로 남의 의견을 깎아내리는 것은 정답이 있던 없던 못마땅하니깐 말이다. 재미있는 질문이 있다. 과학자도 사람이고 종교를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런 과학자들은 창조론을 믿어야 할까? 증명을 못하므로 진화론을 주장해야 할까? 과학자들은 꼭 종교적 믿음에 도전을 해야 하는가? 종교는 불가피한 것인가? 이것 역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책에서는 특정 주제에 대해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책에 담긴 내용들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부터 시작하여, 각 진영에서 상대 진영의 주장을 반박하고 자신의 생각을 펴는 형태로 쓰여져 있다. 저자들도 과학자, 종교학자, 고고학자 , 인류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비단, 종교와 과학간의 대립 이야기 뿐만 아니라, 거울 신경 세포라던가, 성선설과 관련된 주장, 뇌과학과 관련된 내용, 우주에 대한 내용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므로, 종교적인 생각이 없는 분들 역시도 크게 거슬림 없이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서두에 말했듯이, 역시나 관심 영역이 아닌지라 이런 저런 논쟁이 진행되고 있구나와 같은 생각, 또 종교, 과학 간 논쟁이 아닌 장을 읽으면서 지식 습득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역시나 리뷰로 담아내기엔 이해도가 떨어진다. 깊이 있게 생각해 본적도 없는 내가 이렇다 저렇다 떠들 것도 못되는 것 같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은 무신론,유신론 양쪽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크게 거슬림 없이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책이 담아내고 싶은 핵심이 종교와 과학은 양자택일이 아닌 서로 간에 공존해야 된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간이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현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모두 판단할 수 있다는 시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단순한 토론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논쟁과 서로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 공격으로까지 커지는 것은 양쪽 모두를 위해 실로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지만, 솔직한 내 심정은 별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어느 쪽 기준으로 생각해도 주장할 것이 있고, 편협한 생각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메세지 하나를 던지며 글을 마칠까 한다.
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2 더하기 2가 4라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대신 나는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화론이 자연계를 설명하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반면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신의 존재야말로 순전히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걱정하느라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왜 인간까지 포함하여 자연이 지금의 모습인지에 관해 더 나은 진화론적 주장을 만드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이 신이 존재하는가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과학과 종교를 혼동하는 것은 중요한 실수입니다.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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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에서 과학과 종교의 논쟁은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후로 지속된 논쟁이다. 종교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중세에는 종교의 힘이, 과학적 발전과 문명이 발전한 현대에 와서는 과학이 그 논쟁에서 승자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의 해묵은 논쟁은 그 결말이 아직도 나지 않은 상태이다. 영국 더럼 대학교의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엘릭스 벤틀리에 의해 엮어진 『현대 과학·종교 논쟁』은 기독교 근본주의 창조론과 진화론과의 과학과 종교 간의 냉전에 관한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글들을 엮은 책이다. 이 논쟁에 있어 주요 쟁점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과학자, 신학자, 인류학자 들이 입장을 표명하고 이 논쟁에 각자 그들의 생각을 밝혔다. 오랫동안 당파적이었고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이었던 근본주의자인 종교론자들은 소위 ‘과학적 무신론’ 혹은 ‘다윈주의’에 대항할 유일한 대안이라며 자신들의 논리를 방어한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전통이 권고했던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성경》해석 방식보다는 《성경》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프로테스탄트 사상 때문에 과학과 종교는 사실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 갈등하게 되었다. 또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자 주장한 19세기 후반 미국복음주의자들이 내린 불행한 결정은 과학과의 갈등을 더욱 확고히 했다. 과학과 종교의 논쟁은 1860년 영국 옥스퍼트 대학교에서 진행된 진화론 토론회에서 창조론의 공격에 대해 다윈을 옹호하며 논쟁을 펼친 것이 ‘창조-진화 논쟁’의 서막이 되었다. 결국 창조론은 창조과학·지적 설계론으로 발전하고 진화론도 “진화론 자체가 다소 철학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서로 발전해 가고 있다. 거기에 더해 진화론의 이데올로기적 변형이 한창 진행중이며 이제 진화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이르렀고, 거기에는 무신론을 장려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음모론도 포함되었다. 종교란 초자연적인 작용인에 대한 믿음이다. 하지만 종교는 인간이 내집단과 외집단, 우리와 그들을 분류하는 근본적 수단으로 전락했다. 종교는 유전적, 문화적, 인종적, 민족적 경계를 가로지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종교가 긍극적으로 전쟁을 촉진시켰고, 종교의 이름으로 대량학살이 일어난 예화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및 종교로 인한 전쟁을 들수 있다. 이러함을 근거로 진화론자이자 과학의 대변자인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자신이 종교를 혐오하는 이유는 종교의 편협함, 맹신, 잔인성, 극단주의, 악습관 편견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도킨스에 대해 종교론자들은 자신의 명성에 편승하여 종교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터뜨려 대는 분노 가득한 무신론자 중 한사람이라고 공박한다. 과학을 대변하는 도킨스와 해리스와 히친스는 종교의 다양한 측면 중 단 하나, 폭력행위만 포착해서 코끼리를 만지는 맹인처럼 종교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그 측면을 이용했다. 현재의 어떤 논리를 들어 종교와 과학의 논쟁에 있어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종교와 과학의 논쟁을 들여다보는 우리의 가장 정확한 시각을 대변해 주는 말이 있다. “나는 2더하기 2가 4라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대신 나는 2 더하기 2 가 4 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마이클 오브라이언의 말처럼 종교와 과학의 상호 보완적인 수단일 뿐이다. 마이클 바웨터의 “당신이 옳고 내가 옳지 않다 해도 우주의 작용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데, 현대인들이 계몽주의 이후의 이론 놀이를 거부한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해가 된단 말인가?”라는 표현처럼 과학과 종교의 논쟁이 세상의 이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과학은 그저 과학으로 종교는 그저 종교로 상호 인정하고 공존을 통해 인류에의 봉사의 길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과학으로 종교를 해석해서도 안되고 종교로 과학을 해석하려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이 논쟁은 인류에 어떤 도움도 안되는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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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최초의 인간이라는 것을, 노아의 방주라는 한정된 공간에 다양한 생물종을 한쌍씩 다 실었다는 것을, 천지창조에 7일이 걸렸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따지고 든다면 할 말은 없다. 왜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많은 종교 가운데 하필이면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도 설명하기 어렵다. 비신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은총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믿음과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주류과학인 우주 물리학이나 생물진화론은 상충되는 것일까? 평일에는 대학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다가 일요일에는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가는 과학자는 이상한 사람일까?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했을 당시 영국의 종교계는 신의 선택을 받은 완벽한 종인 인간이 진화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진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는 것이 새삼 떠오른다. 그러나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태양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종교와 과학이 이렇게 서로를 수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대하기도 했지만 과학은 꿋꿋하게 발전의 역사를 써왔고, 진화론이나 우주의 빅뱅이론같은 새로운 과학이론에도 불구하고 종교도 유구한 맥을 이어왔다. 《현대 과학·종교 논쟁》이라는 제목과 달리 과학과 종교가 논쟁보다는 공존과 이해를 도모하자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생각된다. 책은 전체 18장으로서 각장의 저자들은 철학자, 인류학자, 뇌과학자, 종교학자 등으로 각계의 입장을 총망라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인류학에서는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구별되는 것은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 물리적 실체들간의 인과관계는 과학의 기초가 되었고, 인과적 기능을 통해 원인과 결과를 알아내고 현재의 정보에 기초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일기변화와 천문현상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알고자 했던 인류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인 탄생과 죽음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믿음을 가지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욕구이고 이런 불확실성과 불안감으로 인해 종교적 신앙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을 우주에 확장하면 결국 우주의 궁극적 원인인 신이란 존재로 향할 수 밖에 없다. 합리적 인지기능과 마찬가지로 감정도 우리가 믿음을 유지하도록 돕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덜 불안하고 더 행복하고 삶에 잘 적응해서 자연선택 과정에서 살아남았다고 가정한다면 생물학적 특성뿐 아니라 종교도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과한 진화의 산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너머에 있는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믿음은 믿는 사람에게 새로운 힘과 신비적 체험을 제공한다. 피조물 중 유일하게 인간에게는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두뇌가 있지만 과학의 언어로 종교의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코끼리의 일부를 만져서 코끼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내려는 장님처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될 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킨스처럼 종교의 편협함, 맹신, 잔인성, 극단주의, 악습과 편견을 지적하는 적극적인 무신론자는 정규분포의 한 극단에 속하는 사람이며, 다윈은 생물진화의 결과를 세부적인 것은 우연에 맡긴 "설계된 법칙의 결과"라고 간주했고, 말년에는 자연에서 경험했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보면서 종교적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케플러, 뉴턴, 하이젠베르크 같은 물리학자들도 과학이론에 존재하는 "믿을 수 없는 단순함"에 조물주가 느꼈을 미적 감수성과 환희를 공유하는 감동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신을 믿는 과학자들에게 자연의 기품있고 섬세한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일은 대개 기존의 신앙을 뒤엎기 보다는 오히려 입증하는 것이었다." 페일리의 《자연신학》에서 매우 정교한 시계를 발견하고 설계자를 추론했던 것처럼 지적 설계론이 부활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론적으로보다 정서적으로 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종교의 경전을 글자 그대로 고집하면서 과학적 증거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어리석지만 결함이 많은 뇌로 인지한 불완전한 지식으로 종교를 평가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과 종교는 명백히 서로 다른 근본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쟁점은 어떻게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은 원리가 다르듯이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므로 교회에서 진화론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창조론에 입각하여 과학을 가르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식의 축적에 따라 과학이론도 다른 체계로 바뀔 수 있는 만큼 과학자라면 불가지론자의 입장에서 과학적 탐구를 지속하는 것이 마땅하고,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과학적 증거는 수용하고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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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신앙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려 섞어 학문과 신앙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것은 현실적인 삶에 서로 상충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듯하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의 긴밀한 조화 속에 그의 삶이 유지되고 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그 삶이 파괴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느 한 쪽만 고집해서 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자들의 모습이다. 과학은 보이는 것에 대한 판단이고,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나름의 결단이다. 우리는 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어느 것이 옳다 그러다 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각각의 영역을 이끌어 나가면 된다. 그것이 현실적 문제에서 상충될 때는 서로의 지혜가 필요하다. 역지사지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럴 때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상호보완이 이루어지면서 공동의 삶이 가능한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한 쪽은 물질적인 풍요만 쫓게 되고, 다른 한 쪽은 현실을 망각하게 된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을 쫓으면 될 뿐이다. 이 글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과학을 선호하는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둘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 있는 글이다. 내 생각과는 맞지 않는 내용일 수도 있다. 허나 하나의 생각으로 수용하면서 읽어보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을 인용한 화자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그가 주장하는 바를 읽어 본다.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맹인이다.”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그의 모든 내용은 이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윈의 진화론과 연결된 많은 이론들을 이야기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물질적인 면에서만 다루어져야 하는데 개념적인 문제에서도 도입하여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정신, 학문, 정치, 경제 등에서는 진화의 개념이 도입되어서는 안 될 내용이라는 전제를 깔면서 그러한 내용들이 팽배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 둘은 사로 다른 것이고 공존할 수 있는 문제라고 언급한다. 화자는 이기적 유전자를 쓴 도킨스의 생각을 중심으로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다. 도킨스는 인간이 진화하는 유전자들로 형성되어 있고, 종교는 필요 없는 것이라는 관점에 서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이 도킨스의 극단적인 생각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종교의 존재도 인정해 함께 화합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극히 조화를 우선시 하는 입장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을 자유의 원칙에 결부시켜 과학과 중교를 포괄하고 믿음과 의심, 이성과 합리성을 포함하는 더 높은 목적을 향해 의식을 고양해야 한다는 입장에 선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예화로 킹목사의 이야길 들려주고 있다. 새로운 엄청난 호전성이 흑인 공동체를 집어 삼켜도, 그것 때문에 모든 백인들을 불신해선 안 된다. 백인들의 자유와 우리들의 자유는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의 조화로운, 더 큰 입장에서 모든 것들을 감싸 안으려는 의견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그는 그렇게 신앙은 신앙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을 다윈의 유일신 개념의 종교에 대한 묵묵부답의 생각을 언급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보충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또 종교의 진화를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정신이 더 건강하다는 것, 즉 심리적 안정이 낙관주의로 흐르게 하고 스트레스를 감소하게 하여 신체적 영향도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좋은 생활을 영위했을 것이고 자연선택 과정에서도 살아남았다는 논리다. 그리고 종교적 믿음에도 유전적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뇌의 측두엽을 관장하여 느낌과 감정을 조절하면서 믿음의 강약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증명하고 있다. 잘 인지되는 내용은 아니다. 또 종교가 신의 문제와 결부되고, 신이 인간에게 필요한가란 문제도 따져보고 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보편화된 논지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권력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신을 업은 일들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신은 인간 사회에서 불가피한 요소로 인식된다. 인간이 주변에 존재하는 것을 변형시키는 물질문화를 이용함으로써 지금까지 다른 생물을 능가하여 그들을 설계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 인간의 구조적 결합, 기이한 발달과 지체로 점철된 물질문화와 생물학적 진화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합목적성과 숨은 설계자 등의 개념에 사로잡힐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완성에 대한 인간의 의자는 온전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들의 나약함은 온전한 상태에 대한 경외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신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적인 요소로 이루어지지 않고 집단의 문제로 빠질 때 위험서이 내포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종교도 아니고 집단이기를 추구하는 일로 치부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이나 아랍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등은 종교적인 속성보다는 군중심리와 같은 이기주의의 발로로 보고 있다. 신앙은 긍정적인 기능을 많이 하고 인간의 삶을 조화롭게 만든다는 생각을 작가는 가지고 있다. 신앙에 대해서 비교적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앙의 원천이 되는 삶과 죽음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근거로 삼아 논의할 수 없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후 문제와 관련이 되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우선된다면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늘 것이다. 화자는 그러면 어떤 입장에 설까? 창조론과 진화론, 절대자에 의한 설계로 이루어진 인간 세상과 우연히 만들어진 세상이 진화하여 변해왔다는 생각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아마 그 두 쪽을 공유하는 생각을 내어놓지 않을까? 진화론에 가깝게 생각하지 않을까? 합리를 우선적으로 하고 조화를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말이다. 허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둘의 논쟁은 별로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각자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약육강식의 세상, 그것은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라고 생각해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도태되는 것도 있고 발전되는 것도 있다. 더러는 사라지고 더러는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서 변화하는 존재가 생겨나고 우수한 존재도 탄생한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도 설계 안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창조론, 진화론을 어떻게 설명할까? 무슨 주의자들처럼 모든 것들을 물질로만 보는 일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인간의 영성이 회복되는 상황도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이 바른가라는 것보다는 어떻게 보는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더 마음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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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빠의 편파리뷰 최근 프로야구중계 중에서 편파중계라는게 있습니다. 기존 공중파에서처럼 중립적인 해설이 아니라, 어느 한팀의 입장에서 편파해설을 합니다. 자기편에게 불리한 판정은 오심이라고 하고, 자기팀에게 유리한 판정은 공정한 심판이라고 하는 등 어느 한팀의 팬의 입장에서 재미있게 중계를 합니다. 이 리뷰도 진화론을 지지하는 도킨스빠의 편파 리뷰입니다. 편파리뷰라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의 성격때문입니다. "현대 과학.종교 논쟁"이라는 구미를 당기는 책이 있었습니다. 음~ 책 제목만 보면 애매하지만 책 뒷면에 [과학과 종교간의 접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한 권에 모아둔 매우 인상적인 책! ] 이라고 이 책의 성격에 대해서 해설을 붙여 놓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고 책 안쪽 그리고 목차만 보고 그런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다양한 관점"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성격은 한마디로 "반(反) 도킨스" 학자 열 몇명이 모여서 도킨스에 대한 반박, 반대주장. 반론등을 하는 책입니다. 출판사의 오류인지 마케팅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도킨스"책이 어떻게 과학과 종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주는 책이라고 광고 판매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도킨스책이 많이 팔렸고 우리가 과학 시간에 진화론에 대해서 배우니까, 그것에 상응한다는 의미로 다양한 관점이라고 하는 의미였다면 제가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거고요. 책제목만 보면 명백한 낚시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성격을 분명히 하여 '반도킨스 책이 나왔다. 열받은 진화론자, 옳다구나 창조론 옹호자 다 모여라' 했으면 관중이 더 모이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책은 꽤 읽을만 합니다. 반도킨스라고 불렀지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한 무리의 학자들이 각 분야의 에이스급들이어서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하지만 약간의 번역상 애매한점이 느껴집니다. 저 역시 생물학,진화론에 대한 독서,공부가 초보 단계라서 할말은 없지만, 번역가가 생물전공이 아니시더군요. 책의 상당 부분이 인문학적인 내용이어서 그랬나 봅니다. (본인도 인문학이 관심분야라는데 굳이..공동번역도 .) 그래서 좋은 번역이 아닌것 같다는 문맥이 여러군데 있습니다. 이 역시 제 공부가 짧은 탓 일수도 있고요. - 관중들 경기장 탓부터 합니다. 이제 책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이 책은 얼마전에 읽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고 하는가? , 도킨스등 공저, 바다출판사"가 생각이 나는 책입니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고 하는가?"는 도킨스 등 16인의 학자가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에세이를 모은 책입니다. "현대 과학 종교 논쟁"은 이십여명의 학자가 연합해서 "반도킨스"의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그것을 모아 책으로 출판 한것입니다. 두 책의 상관관계가 있나는 어디서 찾아봐야겠습니다. - 우리 도킨스 선수 대단합니다. 이십명의 에이스급 학자들이 오직 도킨스한명을 이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명의 학자들의 에세이를 썼지만 편파적인 리뷰어가 봤을 때 핵심글은 1장"과학과 종교-21세기의 급류를 헤쳐 나간다는 것 : 데니스 R. 알렉산더" 와 12장 "도킨스의 종교론은 왜 잘못된 것인가?: 데이비드 슬론 월슨" 이 두글입니다. 나머지는 평범하거나 찌질합니다 - 편파리뷰입니다. 책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장 "과학과 종교 - 21세기의 급류를 헤쳐나간다는것 : 데니스 R. 알렉산더" 이 사람은 림프구신호개발연구소, 암연구소 소장 수석과학자 등 화려한 경력이 주욱 서술되는데 눈에 띄는 경력이 있네요. <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편집위원> 일단 우리편은 아닙니다. 50쪽에서 [신진무신론자들이 과학을 근거로 한 일련의 확고한 종교비판관련 저서들을 출간한 것은 미국 사회에서 종교가 장악하고 있는 지배력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진화론에 무신론의 의제를 덧입히려는 리처드 도킨스나 그 밖의 저자들의 시도는 과학의 판단 범위를 넘어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형된 전형적인 예다]라고 말합니다. 즉, 진화론의 연구는 과학일뿐 진화론을 가지고 종교에 대한 판단까지 넘어오지 말라는 영역표시입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가요? 진화론은 과학이니 그 것을 가지고 종교의 영역으로는 넘어오지 마라. 그렇다면 창조론은 종교내애서만 유효하다라는 입장인지 궁금하군요. 현명한 저자가 바로답을 합니다. 54쪽에서 [영국 학술원의 마틴 리스경은 "어마어마한 수수께끼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이유다. 무엇이 우주의 평형 상태를 교란시켰으며, 이 교란은 어떻게 실체화 되었을까? 이런 질문은 과학을 초월한다.....이는 철학자와 신학자의 영역이다. 이것은 과학자들간의 공통된 견해이다.] 아~ 심판! 갑자기 편파적인 판결을 내립니다. 벌써 공통된 결론이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편파중계자인 저는 그런 공통된 결론을 본적이 없습니다. [과학적 내러티브와 신학적 내러티브는 상보적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과학적 설명은 생물학적 다양성이 생겨난 방식을, 신학적 설명은 그 원인을 기술한다.] 노골적으로 편파판정을 합니다. 56쪽에서 [ "현대사회에서 과학자는 종교적 믿음과 경쟁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네가지 주장을 포함한다. 첫째, 과학자는 자신이 잘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 둘째, 사실과 관련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대중에게 알리는 것은 과학자가 해야 할일이다. 셋째, 과학 교육은 과학외부와의 끝없는 질문이 아니라 과학과 관련된 질문만을 다루여야 한다. 넷째,과학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주제들은 종교학이나 문명연구철학의 먹잇감이다] 전체적으로는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에만 남아있고 종교는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과학을 검열하지 말라는 주장입니다.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일부라고 표현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을 진화론 대신 혹은 병행해서 교육과정에 넣으려는 현실에서 너무 이상적인 답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첫번째 주장은 너무 과격하네요. 너희들은 실험실에서 연구나 해라! 나와서종교에 대하여 떠들지 마라! 저자의 바람입니다.58쪽에서 [지금의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서 급물살을 헤쳐나가기 위한 자원은 풍부하다. 양극화된 표어 만들기로부터 대중을 분리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신중하고 식견을 각춘 대화를 독려할 수 있다면, 과학과 종교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진화론과 종교가 공생하자는 주장입니다. 과격하게 진화론은 허구다, 창조론이 맞다, 종교는 악이다- 이렇게 싸우지 말고 공생하자는 아주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논술등에서 양비론 양시론은 안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진화와 종교의 문제에서 양비양시론적인 주장이 어느 정도 끌리는것도 사실입니다. 12장은 "도킨스의 종교론은 왜 잘못된 것인가? : 데이비드 슬론 월슨" 이제는 아에 제목부터 대놓고 욕합니다. 내용은 상당히 전문적입니다. 12장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제가 지금 쓰는 리뷰가 정확한지 자신이 없네요. "집단선택" 이라는 개념과 그 실증을 가지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216쪽에서 [집단수준에서 종교가 제공하는 이점에 대한 도킨스의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론 내 '집단의 선을 위한 특징'이라는 사고방식의 역사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집단은 그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기여할때에만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헌은 집단 내의 더 이기적인 개체의 착취에 취약한 편이다. 다행히 서로 돕는 개체군은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집단의 선을 위한 특징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집단간 선택 과정이 필요하면, 집단 내의 선택은 이러한 특징을 손상시키는 경향이 있다.] 221쪽에서 [집단주의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데 ~~~ 조지월리엄스의<적응과 자연선택>과 리커드 도킨스<이기적인 유전자>라는 두 권의 책 덕분이다. ~~~집단 간의 선택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언제나 집단 내의 선택에 패배한다. 실질적으로는 모든 적응들은 개체 수준에서 진화하며, 심지어 명백한 이타주의의 실례도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설명해야한다는 것이다.] 223쪽에서 [집단선택은 진화의 중요한 추진력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지배적인 추진력이다. 진화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진전 중의 하나는 '대이행'이라는 개념이다. 진화를 발생시키는 것은 작은 돌연변이만이 아니라 통합정도가 높아서 그 자체로 더 높은 수준의 유기체로 변하는 사회집단, 다양한 종의 공동체라는 점이 판명되고 있다.] 즉 도킨스는 집단선택은 없다고 했는데 내가 연구해보니 있다. 그러므로 도킨스가 틀렸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진화라는 개념을 부인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집단선택에 대하여 흥분하나 봤더니. 237쪽에서 [현재 도킨스는 진화론자이자 과학의 대변자로 얻은 자신의 명성에 편승하여 종교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터뜨려대는, 부노 가득한 무신론자 중 한 사람일뿐이다. 지금은 인간 조건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불가해한 측면 중 하나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연구할 때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은 집단선택을 통해 진화했고 그 중 종교가 있다. 그러니 종교를 비난 마라'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리뷰를 길게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책 제목이 낚시성인 것만 빼면 진화론자, 창조론자 모두 읽어 볼 만한 좋은 책입니다. 진화론이 대세여도 종교의 역할은 있다. 종교의 장점만 보면 타당성이 있지만 종교의 단점을 보면 말도 않되는 주장입니다. 어려운 판단입니다. 정말 논쟁이 있는 책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서 제목은 " The Edge of Reason?" 이성의 경계쯤 되나요? 진화론이라는 이성에서 벗어나자는 제목같네요. 이상 도킨스빠의 편파리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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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은 나의 가장 큰 관심사중의 하나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와 과학만큼이나 예민하고 대립적은 논쟁은 없을 것이다. 20세기 대표적인 철학자인 화이트 헤드는 앞으로 종교와 과학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시대적 모습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고대로부터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고 철학에서 과학이 분리되어져 나갔다. 원래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은 한뿌리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이였지만 근대로 갈수록 학문이 분화되고 발전하여 종교와 철학과 과학은 상호보완관계가 아니라 상호대립관계가 되고 말았다. 특히 근대로 오면서 지식의 최종 권위는 과학이 가지게 되었고 거의 과학이 근대지식의 준거점이 되었다. 그래서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철학은 수용가능하지만 종교는 시대에 뛰떨어진 유아적 발상이기에 유통기간이 끝난 폐기되어야 할 것이로 취급되었다.
최근 과학과 종교의 논쟁은 리처드 도킨스에 의해 다시 점화되었고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종교폐기론을 주장하였다. 현시대에 신은 필요없고 인간이 스스로 신의 역할을 할수 있다고 하면서 무신론의 메니페스토(menafesto)를 선언하였다. 그 이후 철학에서는 대니얼 대닛, 심리학에서는 데이비드 버스 등 본격적인 무신론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책 <현대 과학 종교 논쟁>은 본격적인 종교 과학 논쟁이 시작되었던 리처드 도킨스 이후에 종교와 과학 논쟁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책이다. 최근의 담론을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담론들이 오고가므로 원래 종교와 과학이 한뿌리였던 것 처럼 상호공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과학자들도 리처드 도킨스를 많이 비판한다는 것이다. 바록 도킨스가 과학의 옷을 입고 있긴하지만 도킨스의 의견도 이미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난 하나의 도그마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도킨스의 종교 비판은 세계 종교 전체에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 기독교 신에 집중적으로 가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워낙 기독교의 세력이 강해서 기독교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상당히 급진적이긴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이 대부분이 영미권의 학자들이기에 아마도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은 일련의 과학자들의 다양한 주장인 만큼 기본적으로 논쟁적인 성격보다는 합의적이고 조율적인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각각의 논문은 자신의 학문적 성격에 따라 다르며 그래서 전체적인 문맥과는 다소 동떨여저 보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포괄적이고 수용적인 것임에는 분명하다. 진화론과 인류학, 문화적 상대주의, 고고학적 성과, 지적 설계론등 다양한 학문적 성과과 함의되어 있어서 이 책 한권으로도 종교와 과학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들을 맛볼수 있다.
이제는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한뿌리였던 것처럼 서로 조율하고 대화하고 보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둘다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에서 종교를 믿는다고 알려지는 것은 미국에서 무신론자로 알려지는 것만큼이나 경력에 불리하다. 그러나 나이프와 포크, 걷기와 숨쉬기 중에 선택할 필요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과학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며 종교없는 과학은 맹인이다.” 인간의 삶은 매우 복잡해서 온갖 종류의 접근과 도구가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그 전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p.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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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종교 논쟁> 이라는 제목을 보고 떠오르는 인물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현재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중 한 명인 리처드 도킨스였습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포기하고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갈릴레이와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에 대해 진저리(?)를 치는 리처드 도킨스... 그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았는지 도킨스의 이름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때로는 부드러운 비판으로 때로는 ‘현대 도킨스는 진화론자이자 과학의 대변자로 얻은 자신의 명성에 편승하여 종교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터뜨려대는, 분노 가득한 무신론자 중 한 사람일 뿐이다. (p. 237)’라는 신랄한 비판으로 등장합니다.
“과학과 종교 간의 접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한 권에 모아둔 매우 인상적인 책”이라는 부제에는 조금 의문이 생겼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긴 하지만, 글쓴이 중 많은 이들이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학, 회의론자, 신경외과 의사 등의 글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인류학을 전공했고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글이 “진화론에 이념적 부담을 지우려는 캠페인은 과학 교육에 좋지 않다. 또한 종교는 결코 과학을 검열해서는 안 된다. (p. 56)" 라든지, ”과학과 종교를 포괄하고, 무신론과 유신론의 믿음과 의심을 모두 고려하며, 더 넓은 자유 원칙이 과학과 이성과 합리성을 포함하는 더 높은 목적을 향해 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생각하고 믿고 행동할 자유가 있다. 단,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p. 108)", "종교와 관련시키는 모든 것들은 정치와 마찬가지로 인간 영역의 일부다. 인간의 행동과 사회조직을 범주화하려고 할 때마다 인간 생동의 상이한 양상들을 산뜻하게 분리한다면 바람직하겠지만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p. 249)" 라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는게 많았습니다.
뇌과학을 연구하는 신경외과 의사도 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했던바 대로 지각과 믿음이 세상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기란 불가능하므로 수많은 정보를 걸러내는 두뇌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구성하여 올바로 항해하고 행동하도록 도울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신앙을 억압하려는 과학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고 마찬가지로 과학을 억압하는 신앙의 태도 또한 옳지 못하다는 입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과학과 종교의 논쟁이라는 타이틀과는 거리가 좀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맹인이다.” 라는 아이슈타인의 말과 하나의 의미화 체계인 과학과 또 하나의 의미화 체계인 믿음은 모두 유효한 체계이며 배타적이지 않으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과학과 종교의 입장에 대한 정답인 것 같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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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한 과학의 도전! 혹은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종교의 반박! 종교와 과학이 가지는 단면성은 인류의 역사가 품어온 아이러니 혹은 모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의 과학자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기도 하였으며 종교인이었던 과학자들은 자신의 신앙에 위배되는 연구를 하지 않으려 하였을지 도 모르니 말이다. 그 끊임없는 대화를 이 책은 시도하고 있다. 조금은 종교적인 부분에 치우쳐서 말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요즘 우리시대에도 많은 이슈거리를 만들고 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우리는 각 진영의 입장을 들어보아야 하는데, 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르는 사람들의 이상한 이론일 수도 있고, 종교인의 입장에서 본 과학은 신앙에 위배되는 이론이 존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책의 서두는 이기적 유전자를 주창한 도킨스에 대한 반박이 지배한다. 진화론에 대한 반박은 어쩌면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타당하다 할 수 있지만 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억지에 가까운 논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보이는 것이 아니고 과학은 보이는 것은 증명하는 일에 더 치중하고 있다면 사람이 먼저 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이론이 더 친숙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럼 우리는 어떤 이론을 후세에 가르쳐야 할까? 창조론? 진화론? 종교가 있는 아이에게 진화론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그렇다고 종교가 없는 아이에게 창조론은 어떤 의미로 전달되어질까? 두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자. 어떤 쪽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이론이 아닐까? 무신론자에게 창조론을 교육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강요로 오인 받을 수 있으며, 종교인에게 진화론은 신을 부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윈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데 이 책은 어떻게 그 해결 방안을 찾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책의 요점을 찾아 가게 되었다. 결국 극단적으로 가지 말자는 결론을 자신의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처하게 된 위치와 해결 방법은 어쩌면 머리말에 몇 줄로 요약이 되어있었다. 오늘날 영국에서 종교를 믿는다고 알려지는 것은 미국에서 무신론자로 알려지는 것만큼이나 경력에 불리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보다 더 근본적이어서, 잘못된 대립 자체가 문제다. 나이프 포크, 걷기와 숨쉬기 중에 선택할 필요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맹인이다.” - 17쪽-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집단적 사고의 흐름에 소외되지 않기 위한 발버둥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 선택에 강요를 받을지 모른다. 사회가 가진 집단적 사고에 의하여 이 논리 역시 변함없이 상충된 의견을 내 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것 역시 어쩌면 적합한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현명한 선택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여러 가지 논문들로 이루어진 책의 내용은 좀 머리 아픈 이야기가 많았다. 전에 접하였던 신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입각한 책에서 그 반대의 내용을 들어 보면 조금은 부정확한 논리도 포함되어 보이지만 이론적 근거를 종교적 입장에서 대는 것과 과학적 입장에서 대는 것은 어쩌면 나의 교육이 과학적 객관성을 더 추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좀 색다른 내용의 책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양 쪽의 입장을 다 들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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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현대 과학과 종교 논쟁의 쟁점을 파헤치다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맹인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종교와 과학은 서로 상생하면서 20세기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과학과 종교 사이에선 소리없는 총성을 울리면서 서로에게 총구을 겨누고 있다. 이 냉전의 중심엔 종교와 과학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근본주의와 과학적 다윈주의의가 서 있고, 그들은 서로의 극단적인 입장만 고수한 채 우리에게 ‘모 아니면 도’식의 획일적인 생각만 강요하고 있다. 위대한 진화론자 도브잔스키는 “과학은 사실을 다루는 반면 종교는 의미를 다루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기능하므로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거부한 채 비난을 퍼붓고 있는 현실에서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을 누가 속시원하게 해결해줄 수 있을까?
<현대 과학 . 종교 논쟁>은 과학과 종교에 일가견이 있는 사화과학자와 자연과학자, 신학자, 인류학자들이 종교와 과학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며 이 현대적 논쟁에 각자의 생각을 밝힌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종교라는 영역이 워낙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영역이라 우리가 이 책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 책에 소개된 저자들의 생각만이라도 이해하고 공부한다면 현 시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학과 종교의 해묵은 논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후기 빅토리아시대에는 ‘과학과 종교 간의 전쟁’에 대해 논하면서 이 두 문화가 항상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가정하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과학사가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게 된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본문 49쪽 中)
이 책에서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현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과학과 종교 논쟁에 자신들의 의견들을 쏟아내고 있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 새로이 벌어지고 있는 냉전의 의미와 이 둘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합리적인 의견들을 여러 분야의 교수들이 제시하고 있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의견들 자체도 자기 밥그릇을 빼앗길 수 없다는 입장을 전제로 과학과 종교를 비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비판의 중심엔 과학으로 대표되는 다윈주의와 종교를 대표하는 기독교적 근본주의가 있고, 더 넓게 보면 경제, 정치, 과학, 기술 분야에서 세계를 지배하면서 기독교를 대표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중심으로 낙태, 줄기세표 치료, 학교 내 창조론, 지적 설계론, 교육 등 정서적으로 민감한 쟁점이 종교와 과학이라는 카테고리와 얽혀서 극도로 양극화되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종교와 과학의 논쟁을 불러왔다고 본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를 혼동한다. ‘과학자’인 동시에 ‘신자’일 수 있는가에 대해 끝도 없어 보이는 현재의 논쟁은 피곤한 말싸움일 뿐만 아니라 지적 사기다. 이러한 논쟁은 인간이 주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해낸 세 가지 위대한 의미화 체계, 즉 과학과 종교적 믿음(그리고 상식)을 영악하게 혼동시킨다.(본문 323쪽 中)
이 책을 읽으면서 과학과 종교가 서로 대립각을 내세우며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대상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상호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근본주의자들과 다윈주의자들이 알았으면 한다. 그들의 존중과 신뢰는 믿음과 과학이라는 의미 체계의 뿌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며,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미래의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아껴주고 위로해주면서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발전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가 양자택일이 아닌 공존의 관계로 우리들 곁을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