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분명히 재미는 혼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재미를 들어줄 사람도 필요하며, 재미있는 계획이 있다면 같이 행동해줄 사람도 필요한 법이다. 제목과 평론의 참신한 충격에의 기대가 내용에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 채 허탈한 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렇게 ‘느낌표’라는 TV프로그램의 선정도서로(이른바 ‘밀어주기식 선정 ’) 전국 서점의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을 차지했던 이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일종의 실망이었다. 학교 독후감 과제였기에 밑보이지 않으려고 3번이나 고쳐 써보고, 어떻게든 칭찬해보려고 또 읽었지만 끝내 얻은 건 없었다. 그의 사상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젊은 시절 ‘민청’에서 청년 운동을 하다가 6년이나 옥고를 치른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서 농사를 지을 뿐이고 거기에 앉아 있는 채로 사회에 물음을 던지는 것에 진정으로 ‘참다운 농부’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는가 조차 의문이 든다. 농사를 짓는 사람 치고 참답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집을 부리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그들의 장인 정신 일진데 이 책은 마치 세상에 단 한 명만의 참다운 농부가 존재하며 그가 바로 ‘전우익‘ 이라고 소개하는 듯하다. (굳이 책에 그런 직접적 문구는 없다 하더라도 책 맨 앞부분에 시작하는, 마치 짜고 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가 신경림의 책 소개 글이나 신문, 잡지 상에서 보여지는 출판사의 광고가 그렇다.) 그는 회의나 논쟁만이 다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가 어떤 행동을 했다는 대목은 책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책에서 그의 과거를 결코 회상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에게서 과거는 점점 멀어져 가고 그런 상태에서 외쳐지는 그의 소리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 박완서의 소설에서“노년의 성숙함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하고 쓰여진 서평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노년의 전우익의 성숙함은 힘이 없다. 스님들에게 자신의 생활 내용을, 사회현상에의 가벼운 비판을 하는 아무 것도 아닌(굳이 책으로 내기에는) 편지를 책으로 출간한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짧은 분량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소박함이 묻어 나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없는 감정에 미사여구를 붙일만한 재주가 나는 없다. “사람이 착해서 만은 안 된다. 착함을 지킬 독함을 지녀야 한다” 라고 그가 이야기했듯이 내 생각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도 힘들게 나는 독함의 글을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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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 -전우익 선생의 책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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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처럼 외로웠다고 한 시인은 말했지만, 터널처럼은 아니더라도, 그 시절 나도 퍽 외로웠지 싶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다들 취업준비에 겨를이 없을 대학 4학년, 난 수구언론을 반대하는 학내신문(이라기보다는 전단지에 가까운)을 만든답시고 까불고 다녔다. 한 신문의 극우적인 행태에 눈 감는 대학사회를 꾸짖고, 그 신문의 지면을 화려하게 해주는 대학교수들을 실명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마음 맞는 벗들이 추렴한 쌈지돈으로 만든 창간호의 반응은 썩 괜찮았다. 당시 강준만 교수의 실명비판이 각광을 받고 있었으나, 학생이 교수를 실명 비판했던 사례는 전무후무했으므로 우린 위아래(?)로 주목받았다. 신이 난 우리는 다음호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독립언론(?)은 늘 배고픈 법. 한 호, 한 호 제작이 눈물겨웠다. 책 광고도 싣고, 총학생회의 지원도 받았으나, 제작비는 늘 모자랐다. 5월에 시작한 신문이 어느덧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을 즈음, 그 많던 벗들은 어디로 갔는지, 둘러보니 나와 후배만 남았다. 더 이상 손 벌릴 데가 없었다. 카드 돌려막기는 그때 시작되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다가 신문을 만든 것은, 수구신문 사주가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는 일종의 ‘부채의식’보다는, 옳다고 믿는 일을 올곧게 실천하자는 소박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신문은 만드는 일은 말 그대로 ‘부채’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난 우리 신문이 격주간지라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신문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시나브로 사라진 전 편집주간 녀석의 말대로 주간지로 갔으면, 정말이지 등골이 서늘했다. 그래, 이만한 게 다행이야. 도저한 낙관주의자인 난,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터널처럼 외로웠던 것도 같다. 다 같이 도모한 일에 왜 나만 남아 카드를 돌려막고 있는지, 취업과 학점관리 나도 해야 되는데. 이 돈은 언제 갚을 수 있을지. 어쩌다 내 신세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이런 생각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했다. 그러나 곁에 남은 후배에게 이런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가오’를 잡기 위함이 아니라, 새내기의 열정만으로 고난의 행군을 함께하고 있는 그 녀석에게 운동판의 닳고 닳은 나몰라라 풍토를 일깨워주고 싶지 않았다. 방학이 나를 살렸다. 신문은 휴간에 들어갔다.
그 즈음의 난, 술만 마시면 무책임한 인간들을 차례로 씹어대며 이를 박박 갈곤 했다. 그런 모습을 그저 웃으며 바라봐주던 선배 K가 어느 날 책을 건넸다. 전우익 선생의『혼자면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 2002)였다. ‘영남삼현’(권정생, 이오덕, 전우익)에 대해 귀동냥을 했던 터라, 전우익 선생을 알고는 있었으나, 속으로는 돈이 없어 못 사본 E.P.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나 사주지,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술 깨는 오후, 배를 깔고 누워서 책장을 넘겼다. 10분이 지났을까. 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워 볼 책이 아니었다. 첫 장을 읽는데 술이 확 깼다. ‘삶이란 그 무엇인가에, 그 누구엔가에 정성을 쏟는 일’이라는 선생의 말이 거기 있었다. 그 문장을 읽자마자, 내 머리 속엔 그래, 내가 분투한 것은 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위해서였어. 그 일에 정성을 쏟은 것이 결국 내 삶이었던 거야라는 생각이 스쳤다. 전우익 선생의 책은 두껍지 않았으나, 생각의 골짜기가 두껍고 깊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생각을 수없이 갈고 닦은 한 현자의 지혜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잠언이었다.
선생의 책은 곳곳에 죽비소리가 가득했다.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한다.”는 말은 내 안의 원망과 미움 같은 못난 마음을 버리지 못해, 결국 내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다는 꾸지람으로 들렸고, “피로 쓴 절규도 세월과 더불어 빛이 바래는데 먹으로 쓴 구호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리는 없다.”는 말은,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었는지 돌이켜보게 했으며, “꽁꽁 얼어붙은 겨울 추위가 봄꽃을 하결 아름답게 피운다.”는 말은, 춥고 바람 불던 내 삶에 따스한 위로로 읽혔다. 나는 허겁지겁 2시간 만에 그 책을 다 읽었다. 책의 여운은 대단했다. 아니, 그것은 여운이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선생의 글이 준 울림은 선생의 글이 고담준론이나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의 글은 산 속에 사는 신선의 화두가 아니었다. 선생은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에 세상과 삶의 이치를 길어 올렸다. 선생이 존경한다는 노신처럼.
그 이후 전우익 선생의 다른 책들을 구해서 읽었다. 웅숭깊고 예리한 사유는 여전했다. 선생의 글을 다 읽고 나니, 내 외로움도 어느덧 견딜만한 것이 되었다. 갑자기 바람난 듯 잠시나마 운동에 복판에 서 있던 것을 가지고 세상사 모진 풍파는 혼자 다 맞은 것처럼 청승 떨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방학이 끝나고 신문은 다시 나왔지만, 예전처럼 힘들지 않았다. 이는 안정적인 광고를 받아 빚을 덜 졌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힘들 때마다 전우익선생의 글이 큰 힘이 된 것도 사실이다.(그 후 1년 정도 신문은 더 나오다 결국 폐간되었다.)
어쩌면 전우익선생의 글의 의미는, 되지도 않는 신문 만드는 일에 기운을 북돋아 준 데에 있기 보다는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에 변화를 주었다는 데 있다. 사실 중2때, 우연히 접한 사회과학 서적 때문에 인생항로가 비교적 일찍 결정되어 버린 난, 그 이후 골수 운동권으로 살진 못해도, 늘 그 언저리에 맴돌며 살아왔다.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길 즐겼고, 먹물을 경계하면서도 현학적인 대화가 기꺼웠다. 세상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고, 그 변화는 정치적인 변화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개인은 구조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전우익 선생의 글을 읽고 난, 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내 탓이오는 아니겠으나, 더 이상 남의 탓만 하지 말자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겸손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전우익 선생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오늘도 남 탓하며 살고 있지만,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선생의 말로 자기위안을 삼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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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청년기 내내 살았다고 자부하던 가치지향적 삶이 공허해진 순간, 나는 서울을 떠나 봉화의 비나리 마을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가혹한 농업노동 속에 내 삶을 던졌다. 끝없는 호미질과 단순 반복되는 고추 수확 작업…. 그때 어떤 지인은 내 바뀐 삶을 보고 자학이라 했다. 스스로도 그런 삶의 변화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경향신문 | 2008-04-07 22:55:06]에 수록 |
|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을까. 요즘 들어 남들 사는 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를 본다. 친구가 어디에 취직을 했다는 소식에, 엄마의 친구는 공무원이 되었다는 소식에, 친구의 친구가 결혼을 하는데 남자가 참 잘났다는 소식에 귀를 쫑긋거린다. 칭찬을 하기 위해 몰래 입에 침을 한껏 바르고는 축하한다고 한다. 남이 잘되는 것은 원래 이리 배가 아픈 것인지, 예전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칭찬 할일이 생기면 다른 감정없이 칭찬만 했었다. 아니 솔직히 부러움은 있었지만 그런 일로 배가 아플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내 삶에 방향을, 가치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되는 갈대가 되고 부터는 잘 살아가고 있는 지인들을 보면 괜시리 배가 아파지고 울적해진다. 이런 내가 싫어지는게 사실이다. 그러지 않을려고 하면서도 남들과 비교하는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마음으로 가득한 날, 서점에 들어가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제목이 맘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냐고, 못 살고 있는 나도 좀 챙기라고 내가 아닌 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책을 들고 나와 그늘이 진 곳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며 코를 킁킁거린다. 이 흙 냄새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나는 것인가, 아니면 책에서 나는 것인가, 설마 하는 마음에 책을 다시 읽는다. 흙 냄새가 난다. 책 속에서 나는 흙 냄새가 책 밖에서도 느껴진다.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전우익 선생님의 편지에는 흙 냄새가 난다. 이 분은 천상 농부시다. 그래서 아마 이분은 내가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것도 손사레 치며 싫어하실 것이다. 그저 자신은 농부라고, 자신의 글이 왜 책이 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자신이 누구를 가르치길래 선생님이냐고 말하시며 그리 부르지 말라고 하실 것이다. 전우익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 분은 흙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흙은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나눠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퍼주고 다 퍼주고 싶은 마음으로 나무를 길러내고 농작물들을 길러낸다. 필요한 거 이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전우익 선생님이 그렇다. 밭에서 자란 것들, 과일들, 손수 나무를 깍아 만든 조각들을 들고 지인이 사시는 곳을 찾아가 별거 아니라며 주고 오신다. 흙을 만지며 사시는 것을 좋아하시고, 나무를 보면 가서 안아주고 싶으시다는 전우익 선생님의 얼굴과 손에는 주름이 깊게 파여있다. 주름이 잘 어울려 더욱 인자해 보이고 강인해 보이기도 하는 전우익선생님이지만 이 분의 글을 읽어보면 그 주름들 하나마다 걱정과 고민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점점 더 사회와 고립되어 가는 농촌 현실을 걱정하시고, 더 많이 원하는 현대인들을 안타까워하시고 삶이라는 것에 대한 자아성찰를 하시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계시는 전우익선생님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땅을 일구며, 도라지와 산수유를 키우며 삶의 이치를 깨달아 가시는 모습은 내게 인상적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스스로 고민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구나 전우익선생님의 편지에는 신영복님과 노신이 자주 등장한다. 신영복님의 사색을 얘기하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고, 노신의 <아q장전>을 이야기 할 때는 머리를 망치로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노신의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가을 했다. 노신에 대한 것도, 신영복님의 대한 것도 거의 모르지만 이 두 분을 존경하는 전우익선생님의 맘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으로 전우익선생님이 좋아진것은 두말할 나위없다. 책을 읽으면서 스승이라 여기는 사람을 만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나라도 놓칠세라 손길이 분주해진다. 전우익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그랬다. 분주해지는 손을 잡고 숨을 크게 들이시며 한번에 너무 많은 양을 담지 말자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이리 좋은 글을 보고 또 보며 되새김질하면 된다고 그러다 보면 삶에 대해 나도 ''덜''이란 단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덜 먹고, 덜 입고, 덜 바라고, 넘치는 세상에서 내 한몸이라도 부족함이 남는 삶을 사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이런 마음이라면 앞서 나간다고 생각하며 부러워하고, 시기했던 친구에게 마음 다해 축하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며 그들의 삶도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마음의 풍요도 함께 하길 바란다고 편지를 담아 선물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요로운 삶보다는 부족함이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제대로 산다는 것, 잘 사는 것의 기준은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기준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깍고, 갈고, 다듬고, 매만지는 것을 게을리하면 안 될 것이다.아q장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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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로 전우익씨의 '혼자만 살믄 무슨 재민겨'가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느낌표를 불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느낌표에 선정된 책들을 불티나게 구입하는 소비자들의 그런 행동이 싫어 거부감이 생겼었다. 그래서 이런 좋은 책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전우익씨는 대단한 사람이다. 대단치 않다 하더라도 현대라는 시대속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참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삶의 모습이, 우리가 보기에는 '별종'처럼 보이고, 이상하게 보여도 우리는 그의 삶의 모습을 부정할 꺼리를 찾을 수 없다. 그의 의견을 반박하려 해도 반박할 꺼리가 없다. 책 속에 있는 신경림 시인의 글 속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쩌면 이런 전우익 선생을 시행착오주의자로 비웃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가 깊은 산속의 약초처럼 귀한 사람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결국 그의 삶의 방식, 그의 생각들이 우리가 닮아야 할 점인가?
그의 주장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 우리는 조금씩 그에게서 배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 대단하다"고만 하면 뭐하는가. 조금이라도 교훈을 얻어야지.
나는 이 책이 좋았다. 이 책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하는 말 하나하나는 작가의 삶 자체이다. 그는 '말로만' 하는 사람이 아닌 '실천가' 이기에이 책은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잔소리'가 아니라 '삶을 정성껏 사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교훈'이 되는 것이다.
학교 철학시간이나 친구들과의 대화속에서 '삶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많이 제기한다. 내가 생각하는 삶을 표현하지 못했는데 이 책 속에서 '삶'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p.27마지막 줄) 누구나 삶에서 그 무엇엔가, 그 누구엔가에 정성을 쏟는다면 이 세상은 밝아지지 않을까 싶다.
은은한 솔잎향기 같은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삶이란 그 무엇(일)엔가에 그 누구(사람)엔가에 정성을 쏟는 일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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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불과 몇 년 전과는 다른 모습의 사회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고, 이러한 모습이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버렸다. 마치 속도 경쟁이라도 하듯 매일이다시피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반 사람들로서는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으려 해도 좀처럼 발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다 느끼고 있듯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경제력에 의해 개인의 능력이나 가치가 평가되기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기술을 동원해서 새로운 제품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은 돈이 없어 편리한 기능의 제품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이러한 계층간의 격차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지 오래이다.
사회가 점점 빠른 것을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경제적인 측면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제품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언론 등에서는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그에 대해 온갖 합리화를 꾀하곤 한다. 마치 사회의 빠른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며, 그러한 변화에 맞춰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하여 급격한 변화에 맞추지 못하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때문에 나는 광고 문구나 각종 정보들에서 사용되는 과장된 표현을 접하면서, 문득 거부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은 나 혼자만의 특별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 빠르게 변화해 가는 시류(時流)를 좇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진정 그것은 아닐 것이다. 온갖 첨단 기기로 연출해낸 현대화된 삶의 방식은 그에 걸맞는 경제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간에 유포되는 ‘혁신적 기술’의 설명들에는 변화된 사회의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현상만이 엿보인다. 그 속에 ‘인간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체로 그러한 설명들에는 언제나 사람은 ‘주체’가 아닌, 변화된 사회에 그저 적응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해 가는 사회 속에서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얽매고 있는 일상의 생활은 그러한 자유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더 살펴보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그러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지금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생활을 비춰볼 수 있게 한다. 책으로만 대했지만, 아마도 전우익 선생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비록 자신의 삶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는 자연에서 얻어진 각종 재료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나누어준다고 한다. 이렇게 사는 생활에서 그는 삶의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가르치려고만 들지 배우려고 안 하는 자세가 못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입만 가지고 제 말만 하려 들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여겨, ‘귀만 있지 입이 없는’ 나무를 좋아한다고도 한다.
전우익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는 이러한 그의 삶의 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지인(知人)들에게 썼던 편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의 서문 역할을 하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 풍토는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 곧 끝장나는 날’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독특한’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모 방송국의 프로그램에 이 책이 선정도서로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실제로 그 이후 그의 말처럼 자신의 생활이 정말 ‘끝장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글을 통해서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빠르게 변화해 가는 사회 속에 휩쓸려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아주 편안한 목소리로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한 번쯤 생각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들고 싶다.
그는 이 책에서 ‘물을 푸지 않으면 샘이 말라버리듯 편지를 쓰지 않으면 생각까지 말라버릴까 두려워’ 글을 쓴다고 한다. 편지라는 양식이 그렇듯이, 이 책의 내용은 저자가 살아가면서 느낀 생각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글을 읽는 내내, 책의 곳곳에서 나는 저자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경림 시인은 이 책의 발문을 통해서, ‘나만이라도 좀 덜 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몸소 실천하는 저자를 ‘깊은 산 속의 약초처럼 귀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 그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약초처럼 이 사회의 아픈 곳을 치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개정판을 내면서 새롭게 적어 넣었을, 책의 앞부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이 책을 펴낸 그의 생각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혼자만 잘 살믄 별 재미 없니더. / 뭐든 여럿이 노나 갖고 / 모자란 곳을 두루 살피면서 채워 주는 것, / 그게 재미난 삶 아니껴.”
저자는 ‘한때 사회안전법에 걸려 주거제한을 당했던 보호관찰자’로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현대사의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늘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고민한다. 어느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부들로 자리를 엮으면서, 날줄은 역사이고 씨줄은 현실과 같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하여 ‘씨와 날이 단단히 매어져야 자리가 되듯 역사와 현실이 잘 어우러져야 제대로의 삶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간다. 또한 서울에 가는 길에 팔당댐을 보면서, ‘흐르는 물을 막는 건 마치 역사의 흐름을 막는 일과 흡사하’다고 여긴다. 역사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버리면 필경 왜곡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왜곡의 사례를 우리는 최근의 역사에서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아마도 저자는 물길을 막아선 거대한 규모의 댐에서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왜곡된 욕망을 읽어냈을 것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의 관점에서, 자연적인 물의 흐름을 막아버리는 댐의 존재는 마땅히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또한 당시 정권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죽은 이한열을 떠올리면서, ‘그를 진짜로 살리고 죽이는 것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이한열의 죽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묻히지 못한다면 그게 진짜 죽은 것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느 사이엔가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남겨졌던, 이한열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신촌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그의 뒤를 따르던,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한열을 가슴에 품고있는 것일까? 혹시 일상에 치여 그저 수많은 기억 중의 하나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농사꾼이라고 여기는 저자는 노동의 고역에서 벗어나, 노동 과정 자체를 즐길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진정으로 저자가 자신이 하는 ‘노동’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여 저자는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경독(耕讀)의 일체화’를 들고 있으며, ‘참된 경(耕)은 독(讀)을 필요로 하며, 독(讀)도 경(耕)을 통해서 심화되고 제구실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인식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땅’을 떠나 살고 있는 도시인들에게는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겠지만, 자신의 삶과 현실을 굳게 결합시켜 인식하는 저자의 자세만큼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저자는 늘 주변의 모든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것을 현실의 폭넓은 인식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땡볕이 드는 마당에 사흘 동안 널어 곯게 한 다음에 뿌리만 잘라 파를 심으면서, ‘땡볕과 뿌리를 잘리면서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아픔을 참고 견딘 뒤 그 아픔을 끝끝내 가슴에 새기면서 큼지막하게 자란’ 파의 생명력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파 농사의 경험을 통해 그는 ‘뿌리는 근본인데 사람이 바뀌자면 역시 새로운 사람이 탄생할 수 없’으며, ‘새로운 사람들의 집단적 탄생 없이는 세상은 바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세상이 바뀌자면 그 알맹이인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우리 스스로가 주체로 인식하는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저자의 글은 쉬운 문체로 쓰여져 아주 쉽게 읽히면서도, 나에게는 오랜 동안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아마도 다른 독자들 역시 이 책을 읽은 다음에 깊은 여운을 느꼈을 것이라 믿는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이 책의 저자인 전우익 선생의 부음(訃音)을 접했다. 어느 기사를 통해 저자가 2004년 12월 19일(일) 아침에 노환(老患)으로 돌아가셨음을 알리고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처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미’냐고 하면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논밭을 거저 주다시피 했다고 한다. 마음만큼이나 넉넉했던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이제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영면(永眠)에 드신 전우익 선생의 영전에, 조문을 가지 못하는 대신 이 글을 바친다. 아직 온갖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 우리 사회에, 아마도 선생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세상 사람들이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하리라고 여겨진다.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마치 덜 익은 과실이 자길 따먹는 사람에게 무서운 병을 안기듯이, 착함이 자기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면 못된 놈들의 살만 찌우는 먹이가 될 뿐이지요. 착함을 지키기 위해 억세고 독한 외피를 걸쳐야 할 것 같습니다.”
** 이 책의 초판본은 1993년에 출간되었지만, 1995년에 개정증보판이 간행되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선정도서’가 되면서 독자들에게 더욱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은 초판본이 아닌, 개정증보판(2004년1월 발행)을 읽고 쓴 것이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가을이다. 이 맘 때는 조금만 지나면 추석이 온다. 추석이되면 우리집은 언제나 성묘를 가는데 한 곳은 할아버지 묘소이고 다른 한 곳은 증조할아버지 묘소다. 증조할아버지 묘소는 산이 중턱 쯤에나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데 한 번 올라가려면 숨이 차서 도착하면 기진맥진한다. 올라가는 길은 험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등산객이 다니는 산도 아니고 우리들만 성묘 때나 오르기 때문에 겨우 한 사람 지나갈 만하다.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숲은 우거지기 마련이고 덤불이나 칡이나 한데 엉커 있어서 잘못 오르면 자빠져서 주르륵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올라가는 길에 성묘할 때 쓸만한 소나무 잔가지들을 꺽어서 가는데 그것이 또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에는 유난히도 갈참나무들이 많은데 비슷한 참나무과 다른 나무들도 많다. 특히 어른 허리깨나 겨우 올 법한 갈참나무들이 많은데 큰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들이 싹을 틔워 이제 막 나무로서 제몫을 해나갔다. 열매는 제법 도토리답다. 꺽고 가기에는 나무가 작고 과실 나무기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헤쳐서 겨우 소나무 가지를 더듬게 마련인데, 그럴 때면 모처럼 명절에 차려입은 옷이 엉망이 되고 만다. 어릴 때는 그 작은 도토리들을 두 손에 가득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서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에는 가득가득 채워서 산을 오리고 내리고 했다. 고깔을 벗기고 나면 반질반질한 것이 어찌나 야문지 맛이 떫은데도 일단 입에 넣어보고 했는데 작은 것이 어찌나 알차던지 유치(乳齒)로는 깨물기도 어림없었다. 깍정이나 겨우 갉으면 그제서야 그 떫은 맛에 혀를 내두르고 퉤퉤 뱉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토리 묵을 쒀먹으려고 해도 물에 며칠 담가뒀다가 만드는데 그걸 그냥 다 익지도 않은 푸르딩딩한 놈을 입에 댔으니 오죽 썼으랴. 집에 도착하면 훈장처럼 아이들이 모여서 주머니에 든 도토리를 끄집어내는데 애들이 딴 것이 어디 눈대중으로 짐작이라도 하던가, 다 익지도 않았고 덜 여문 것들이 태반이라 먹을 수도 없고 그저 가축 사료로나 줄 수 있을 것들인데 그걸 가지고 죽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한테 가서 죽을 쒀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었다. 사람이 없는 숲은 말그대로 야생이며 사람이 가면 훼손 되기만 할 뿐이지 도움은 못된다. 아마도 그 때 우리가 땄던 도토리들도 그냥 뒀으면 겨우내 다람쥐 먹이라도 됐을 것을.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가 길었냐하면, 이 책을 쓴 작가가 천상 농부라서 그렇다. 산에 피는 잡초하나 업수이 여기지 않고 그대로 마음에 심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맛나게 쓰는 그런 농부. 가령 산수유를 보고 우리는 으레 꽃이 피었구나 하고 넘어갈 것들도 그는 세심하게 살피고 또 살펴서 이 놈이 자라기가 이리도 힘든 놈인데 노란꽃을 흐트러지게 피웠구나 하면서 우리네 세상이 얼마나 눈 앞의 가치에만 급급하는가! 라고 말한다. 씨앗 하나에도 온정을 쏟으며 이 작은 녀석이 다 자라서 100년도 넘게 살아 이 자리에 있겠구나 싶어서 소중히 낱알 하나 쉬이 대하지 않는다. 농사는 혼자서 짓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와주고 땅이 도와줘야 짓는 것이 농사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농사법이 있어서 그리 한다해도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고 땅이 튼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농사인 것이다. 계절에 맞추어서 무엇 하나 지나치지 않고 딱 그 시기에 해줘야 할 일들이 많아서 게으름 부리면 대번에 태가 나는 것이 농사이기도 하다. 이 농삿꾼은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자연의 순리와 마음을 간직하고 우리하게 조근조근 들려준다. 때로는 나직하게 겨울에 온 눈꽃도 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호통으로 나무도 이렇게 순리대로 사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면 되겠냐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맨처음 말했듯이 어릴 적 추억들이 선연히 지나가며 예전에는 철이면 철대로 느끼고 즐겼던 시절들이 떠올랐다. 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오로지 도시의 샌님들이라곤 하지말자, 일주일에 한 번씩 독한 농약 뿌려가며 대충 농사 짓는 하늘을 땅을 져버리는 농삿꾼도 많다. 그래서 더더욱 이 시대의 진정한 농삿꾼의 이야기가 소중하고 좋았다. 가을이다. 슬슬 계절은 순리대로 서늘해지고 나무도 겨울을 나려고 준비하고 그 동안 모았던 양분으로 알찬 열매를 내놓기 시작한다. 허나, 보자. 가을이 오고 있는 지금에 우리들은 얼마나 순리대로 제 할 일 하면서 살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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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에게 정성을 쏟는 것이 삶이라 알려주었던 책. 농사를 짓는 농사꾼 이것이 전우익선생님을 다 말하는 것인지 알았다. 하지만 몸소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이 책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해주었다. 책 중간 중간에 있는 사진과 편지 형식의 이 글이 주는 그 느낌은 삶에 대한 진실한 마음과 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다. 욕심도 없으면서 아끼면서 생활을 하는 그 분의 삶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분은 말씀하셨다. 수도꼭지가 아닌 우물이나 물을 길러다 썼다면 사람들은 지금 처럼 낭비하면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 말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전부 가슴에 담고 반성해야 하는 말들이 들어 있다. 아마 이 분이 한평생을 살면서 얻은 모든 것이리라. 그 시각이 아름다워서 내 자신을 한 번 돌아본다. 다시 한 번 읽어도 좋은 책이다. 그리고 세상은 혼자가 아니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마치 덜 익은 과실이 자길 따 먹는 사람에게 무서운 병을 안기듯이, 착함이 자기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면 못된 놈들의 살만 찌우는 먹이가 될 뿐이지요.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 억세고 독한 외피를 걸쳐야 할 것 같습니다. |
|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라는 제목에서 부터 느껴지듯 이 책은 구수하고 정감가는 책이다. 얆은 두께와는 달리 빼곡히 채워진 전우익님에 인생살이 풀이는 내 가슴속에 잔잔한 여운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한번 스치듯 읽기에는 어려운 내용인 듯 했으나 두세번 곱씹어 내용을 은미하면 그 안에 인생살이를 절묘한 묘사와 풍자로써 풀이했음이 느껴졌다. 그중에서 지구는 자전과 공존을 한다는 비유를 사람에게 빗댄것이 내 머릿속에 깊숙히 자리잡았다. 사람은 자신에 자전과 사회와의 공존을 함께 해야한다. 라는 말이 마음속에 되풀이 되어 나에 인생살이에 많은 도움을 줄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직 내 인생경험이 짧고, 마음속에 품을수 있는 폭이 좁으며, 생각할수 있는 생각에 그릇이 작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지지 못한 내용이 많은듯 싶다. 다시금 꺼내어 읽어보고 싶은 누구에게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
| 느낌표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나보고 싶은 분 1위로 전우익 님을 뽑았다고 하는데.. 난 책을 읽으면서 솔찍히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농사꾼이라 자처 하시는 분의 이야기지만 이 책에서는 농사꾼으로서의 모습보다 귀농한 사람이 자연의 현상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당연한 모든 것을 신기해 하는 모습뿐인것 같았다. 그리고 위의 어떤 분이 언급하신 현학적인 모습이 너무나 많이 보여 씁쓸하기까지 했다. 아마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다면 이런 느낌들도, 스님에게라고 시작되는 글들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될 듯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감동을 얻었다는 것에 반해 나의 느낌은 솔찍히.. 별로다. 약간 더 두꺼운 책이었다면 끝까지 읽지도 못했을 것 같다. 개인의 취향이니..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서점에 가서 한번쯤 읽어본 후 사는 것이 어떨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