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10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10.0
리뷰 총점 종이책
가족의 바깥을 향한 소설적 사유
"가족의 바깥을 향한 소설적 사유" 내용보기
가족의 굴레, 그 바깥을 향한 소설적 사유- 이혜경 『길 위의 집』     핏줄로 연결된 것이 근대적 의미의 가족이라면,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말해야 한다. 운명으로서의 가족은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핏줄의 의미가 강조될수록 가족은 한 개인이 영위하는 삶의 지평을 한정하고, 가족의 삶 너머에서 생성될 수 있는 또 다
"가족의 바깥을 향한 소설적 사유" 내용보기

가족의 굴레, 그 바깥을 향한 소설적 사유

- 이혜경 『길 위의 집』

 

 

핏줄로 연결된 것이 근대적 의미의 가족이라면,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말해야 한다. 운명으로서의 가족은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핏줄의 의미가 강조될수록 가족은 한 개인이 영위하는 삶의 지평을 한정하고, 가족의 삶 너머에서 생성될 수 있는 또 다른 삶을 부정하는 계기가 된다. 핏줄에 철저하게 얽매인 한국사회의 가족신화는 개인의 삶을 가족(국가)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삶으로 구조화한다. 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은 이런 점에서 가족의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주어지는 예외적인 특권이라 하겠다. 이혜경 소설의 중심을 형성하는 가족의 소설학은 가족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존재들의 피 맺힌 투쟁의 역사로 기록된다. 그녀의 소설에 묘사되는 가족은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는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60)을 불러일으키는 선험적인 조건으로 작용한다.

 

가족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생기는 자기모멸감은 장편소설 『길 위의 집』에서 윤기인기라는 두 인물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사장)의 아들이라는 신분적(태생적) 기호는, 이들의 삶이 타인(일꾼)들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제약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저 팔자 좋은 놈이라는 낙인이 존재의 삶을 뒤흔들고,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의 상황을 불러낸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니 벗어나려 할수록 존재를 옭아매는 가족이라는 제도는 이미 하나의 신화가 되어 존재의 삶을 구속하는 굴레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혜경은 이렇듯 길 위의 집에서 가부장적 권위에 짓눌린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다채롭게 드러내고 있다. 길중 씨의 차남 윤기의 뇌리에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던 어머니의 모습이 각인되고 있고, 집안의 유일한 딸인 은용은 미친년이 되고 싶어, 창녀가 되고 싶어.”라는 극단적인 소망을 일기에 적고 있다. 부권이 지배하는 가족은 가족의 어원인 파밀리아가 한 사람에게 속한 노예 전체라는 윤기의 생각처럼, 아버지라는 주인과 어머니-자식이라는 노예들의 계층화된 삶으로 표현된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는 어머니의 형상이 자식들의 삶을 규정하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짜장면과 얽혀 윤기가 회상하는 폭력의 기억은 윤기가 아버지를 증오하는 원초적인 기억으로 나타난다. 폭력은 기억으로 각인되고, 그 기억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길중 씨의 집안을 흐르는 냉랭한 분위기는 실상 이러한 가부장의 폭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하겠다.

 

 

최후의 만찬처럼 상 위에 죽 놓인 짜장면 그릇들. 동생들은 그 그릇 앞에 앉아 입가에 묻은 짜장을 핥으며 먹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당신은 왜 안 먹어? 어서 먹어요.”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어머니가 더 버텨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어서 젓가락을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반 엇갈렸다. 어머니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쪽진 머리를 조금 수그려 상 위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에서 옹골찬 고집이 묻어 나왔다.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면발을 삼키던 동생들의 젓가락질 속도가 떨어졌다. 납작한 옆모습으로 불안이, 전압이 낮아져 순간적으로 흐려진 불빛처럼 뉘엿댔다. 그릇이 어머니의 머리를 덮은 건, 갑자기 전등불이 밝아진 순간이었다. , 동생들의 손이, 입이, 어깨가, 똑같은 순간에 굳어버리는 걸, 윤기는 이상하도록 넓어지는 시야로, 갑자기 밝아진 불빛 아래, 낱낱이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 (70)

  

인용문에는 어머니가 저녁을 짓지 못한 날, 식구 수대로 짜장면을 시킨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에 짜장면을 뒤집어씌운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국수가닥과 짜장이 가린,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윤기의 기억 속에 어머니의 얼굴로 새겨진다. “아프도록 움켜쥐었던 주먹 속의 살의로 밤을 지새운 윤기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핏줄이라는 운명의 끈으로 묶인 가족의 형상만으로 이러한 살의의 기억이 치유될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제도와의 싸움이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기억과의 싸움으로 의미화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억은 개인적인 추억에 머물지 않고, 주체들의 현재적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근간으로 작용한다.

 

아버지에 대한 윤기의 저항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기억을 향한 저항과 다를 수 없다. 기억 속의 상처는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는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바, 윤기와 아버지의 화해는 이러한 상처가 치유되어야만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품(재산)으로 일시적으로 투항한 윤기는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며 극심한 자기모멸감에 빠져들고 있다. 재산을 물려받은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향한 적대감을 끊임없이 표출하고 있다. 기억 속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아버지를 향한 윤기의 증오심은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상처받은 기억은 그 기억을 잉태한 사회적인 기억과 마주해야만 그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의 상처받은 인물인 현희와 윤기의 사랑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윤기는 기억 속의 상처와 대면하지 못하고, 상처 받은 타자와의 사랑을 통해 그 상처를 봉합하려 한다. 저항해야 할 존재는 분명하지만, 윤기는 아버지(저항의 대상)와 직접적으로 맞서는 대신에, 아버지의 주변에서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른 길을 걷는, 간접적인 저항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아버지와 타협하는 윤기의 삶은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저항하는 존재가 가야 할 장소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작가가 아버지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을 산 장남 효기와 윤기의 삶을 동일한 맥락에서 평가하는 이유는 여기서 연유한다. 치매에 걸려 집밖을 떠돌다가 돌아온 윤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아버지-효기-윤기의 싸움은 자신들이 처한 입장에서 한 치도 나오려 하지 않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폐쇄적 구조를 암시한다.

 

, , , 조용히 해, 조용히 해, 이 개새끼들아!”(길 위의 집, 15)라는 은용의 외침은 남성들의 아집 속에서 지탱되는 가족이 결국은 개새끼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새끼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관념의 성채를 스스로 깨뜨릴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기억 속의 상처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더 이상 개새끼들이 되지 않기 위한 싸움의 시작을 의미하거니와, 그런 점에서 그 싸움은 저항의 대상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 자신의 폐쇄성을 극복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싸움일 것이다.

o*****s 2017.09.06.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