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긴이 말마따나 아렌트는 20세기에 반(反)했기에, 21세기를 선취한 사상가일런지도 모르겠다만, 그녀의 책이 원채 난해하기로 이름난지라 그간 회피해 왔었는데, 본서의 경우 분량도 얄팍(?)한데다가 초입의 '옮긴이의 말'에서 아렌트의 책 중에서는 비교적 쉽다는 언급이 있어 구입하게 되었다. 난이도에 대해서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쉽다는 것보다는 '비교적'이란 말에 강조점을 찍어야 할 듯 싶다. 아렌트의 저서들 중 본서가 '비교적' 쉬운건지 어쩐건지는 그녀의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터라 무어라 말하긴 어렵지만, 확실한건 여타 사회과학 서적들과 비교해 볼때 결코 쉬운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리뷰를 자신있게 올리기는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일단 정리된만큼만 올리고 본다. 책이 쓰여진 해는 1970년으로,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이어진 정세가 평화로 귀결되기 보다는 냉전을 통한 군비의 확장으로 인해 '전쟁이 외교의 연장'이던 과거는 전복되고 외려 '평화가 다른수단을 통한 전쟁의 연속'이 된 시기였다. 이러한 파국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 이래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이 당시 대학생들을 자극시켰고, 이는 '폭력적'학생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파농이나 사르트르의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주장 또한 위력을 발하고 있을 때였다. 문제는 그들이 '폭력'의 성격을 전혀 모른다는 점, 아울러 그 '폭력'을 사상적으로 규명할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기획'이 그 취지상의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을 지적한 후, 그녀는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님을, 외려 폭력의 반대는 권력임을 논증해 낸다. '폭력의 반대는 권력'이라는 테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상식과 다소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지금까지의 많은 사상가들은 폭력을 권력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말한다.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권력이 아니라고. 권력이 없는 곳, 권력이 균열을 일으키는 바로 그 곳에서 폭력은 발생한다고. 아렌트가 말하는 권력은 '다수의 동의'에 기반한다. 반면 폭력은 순전히 '도구'에 의존한다. 때문에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렇게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하였음에도 '권력'은 베트콩에게 손쉽게 넘어갔다. 이러한 폭력과 권력의 개념은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사람에 반하는 다수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사람이다."라는 아렌트의 언급에서 권력과 폭력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임을 우리는 좀더 쉽게 알 수 있다. 권력은 그 시초로부터의 '정당성'을 획득해야 하지만, 폭력은 미래의 어떠한 목적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즉, 폭력은 단순한 수단이기에 다른 '목적'이 요구된다. 하지만 권력은 그 자체가 애초의 목적이다. 권력은 권력 자체만으로도 정당화된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중요하게 보여지는데, 이는 권력을 파괴할 목적을 지닌 폭력이라는 수단이 성공을 거두어 폭력에 의해 권력을 획득했다면, 권력을 획득한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여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애초 폭력으로만 맞붙는다면 국가를 이길만한 조직체는 없다.) 즉, 권력과 폭력은 애초 다른 개념이기에, 폭력을 통한 권력 획득은 이미 사라진 권력을 재창조하거나 이미 넘어온 권력을 접수하는 과정일 뿐인 것이 된다.(즉 권력은 폭력의 정당화가 예정된 그 현장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20세기가, 그리고 그 부산물(?)이라 할만한 21세기가 전쟁과 쿠데타로 점철된 폭력의 세기가 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권력이 권력답지 못하기에, 권력이 권력이 되는 과정인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에, 아울러 권력이 한곳(그것이 자본이건, 관료건)으로 집중되었기에, 역설적이게도 권력이 부재하는 수많은 틈이 생겼고, 그 틈에서 폭력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독 20세기가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치적 자유를 총체적으로 억압하고 권력이 독점되는 '관료제', 올바른 합의의 장이 붕괴되고 사적이익만이 횡행하는 시민사회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권력의 독점화는 나라 안의 진정한 권력 원천들을 고갈시켜서 없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즉, 우리가 지금 보는 야만적인 폭력은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대중의 소통을 통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공적영역이 붕괴되었기에, 그러한 공적영역을 지속적으로 붕괴시키는 사회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단순히 비폭력 담론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때문에 폭력만큼이나 폭력적이다. 한편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는 맹목적인 폭력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합의에 기반한 능력있는 권력, 다원화되고 분산된 민주화된 권력, 바로 그것 아닐까? |
|
몇 년 전에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다가 도저히 난해해서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독서평론하시던 한 분이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해서 위안을 삼은 적이 있습니다만, 전에 읽은 적이 있었던 '폭력의 세기'를 다시 꺼내어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는 내내 그녀의 글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책장을 다 덮고 난 후에도 사방으로 날뛰는 용어들과 생각들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까? 읽긴 읽었는데 이걸 읽었다고 해야 하나? 등등의 고민을 했습니다.
폭력의 대척점에 있는 게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다. 라는 그녀의 주장에 동의를 하면서 제 나름의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진보'를 전제로 한 역사의 전개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폭력'은 목적을 위해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그대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할 때, 권력의 내부에 이미 폭력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완전한, 이상적인 권력이란,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 힘을 행사하는 상태. 즉, 완전 비폭력적인 상태에서의 힘의 행사라고 볼 때 폭력의 대척점에 비폭력이 아닌, 완전한 권력이 자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회사가 아주 껄끄러워 하는 몇 사람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듭니다. 회사는 괜히 건드려봐야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하고 노동조합의 요구조건을 다 수용합니다. 이런 경우엔 폭력이 전혀 행사되지 않고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대로 하게 만들었으니 폭력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회사와 대립하게 되면서 말로는 안 되는 상태가 되고, 폭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권력행사가 불가능한 상황, 오로지 폭력만이 문제해결의 방안이 되는 상태를 권력이 사라지고 '폭력'만이 남은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해석을 해 보자면, '폭력+권력=1'인 방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폭력이 1이 되면 권력은 0이 되고, 권력이 1이 되면 폭력은 0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너무 단순화된 도식이지만, 이렇게라도 이해를 하지 않으면 너무 난해해서요~
그리고,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다소간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견해에 대해 저자는 의구심을 드러냅니다. 진보라는 개념이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발전이라는 것과 유사하게 이해되는 관계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게 괜찮아질 거다는 지나친 낙관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과연 인류에게 혹은 이 세상에 '진보'란 무엇일까? 그저 시간이 지나고 여건이 충족되면 과연 인간은 역사의 종착지에 이를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니다!'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폭력에 의해서 권력을 획득한 프롤레타리아들이 과연 제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도 의문이고, 역사가 정해진 트랙을 따라서 종착지로 간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고, 그게 진보다! 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사적인 영역에 매몰되어 공적인 가치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사회시스템은 자꾸 사적인 공간으로 개인을 몰아넣고 공적인 가치를 축소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진정한 진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행동이다!' 라고 하는 저자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참고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출판사에서 작성한 리뷰를 일부 옮겨 봅니다. ----------------------------------------------------------------- 아렌트는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 그 공통분모인 폭력의 세기로 규정한다. 20세기는 이성의 힘으로 폭력 수단을 발전시켜왔지만, 이제 아무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없는 상황이 되었고,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파괴 수단에 의해 스스로 절멸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전쟁이나 혁명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어 왔지만)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은 전무하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에 대한 옹호는 19~20세기가 갖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진보'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진보,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진보, 이러한 20세기의 관념은 언제든 목적을 내세워 폭력 수단을 정당화하는 폭력에 대한 변론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
| 폭력은 권력과 대립적이라고 말하는 아렌트의 말은 주저없다. 가령,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71쪽)라고 진술할 때 그러하다. 아렌트는 역사를 더듬어 자신의 입론을 증명하되,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 여기서 르네 지라르와의 차이가 드러나며, 그 차이는 꿈과 현실의 명도대비처럼 보인다. 삶에 밀착하려는 철학은 친숙해보인다. 그 친숙은 그러나 경박함을 가능성으로 안고 있어 그만큼 긴박하다. 이 모든 것들에 앞서 내 마음에 끼어드는 물음은, 과연 현재의 우리에게 `폭력의 세기`란 실제로 존재했는가이다. 그 물음에는 몰역사적인 젊은이들의 천박한 행태에 대한 나의 경멸이 녹아있고, 동시에, 나 또한 그러한 젊은이의 하나라는 자기모순의 고통이 스며있다 |
|
폭력의 세기 (On Violence)
그 동안 무척이나 책을 읽는 것에 인색했다. 아마도 게을러졌다고 해야겠는데, 그 중간에도 나는 읽고 싶었던 책들의 목록을 꾸준히 만들어보고는 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였다. 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특징 중의 하나로 계속적으로 이야기되었던 잔인함과 폭력성 (결국은 같은 의미지만)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다. 역사를 보더라도 폭력은 인간의 천성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폭력을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나는 폭력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한 책을 원했다. 한나 아렌트의 책이 난해하기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나의 생각에 있어서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본서를 읽기 전에 무엇보다도 그 시대적 비경에 대해서 일정부분 인지하고 있어야 되는데, 1960년대의 시대는 이른바 '혁명의 60년대'로 이야기되는 바,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양분할 수 없다지만 단순논리로 모든 시대로 그렇게 변동되어 왔다는 점에서 특별한 점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는 다른 시기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특징적 요소들을 많이 내포했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좌파운동, 핵전쟁에 대한 불안감, 급격한 과학의 발전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아마도 기존의 체제는 보다 빠른 속도로 해체를 가속화했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폭력은 그 도구적 특징을 넘어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는 일도 목도되었을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상황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난 세기의 두차례의 커다란 전쟁의 경험과 합쳐져, 폭력 그 자체를 성찰하고 분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시도는 일련의 얄팍한 시도들 - 폭력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서술 혹은 오해 - 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학생운동, 신좌파(New Left) 등의 폭력은 이른바 맑스주의와 연결되어 보이나, 맑스에게 있어서 폭력은 새로운 사회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종의 산고였다. 폭력에 대한 대한 새로운 전도자들이 의식했든지 아닌지 맑스주의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다름이 아닐까. 19세기 원리에 대한 추종은 진보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데, 사실 진보개념은 17세기부터 지식축척의 개념으로 18세기에는 인류의 교육이라는 19세기에는 더욱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무제한적인 진보의 획득은 이른바 급격한 과학발전이 그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진보는 더이상 우리가 풀어놓은 변동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만약 진보가 불가피한다고 생각한다면 전쟁과 혁명의 외피로 폭력만이 유일한 장애물을 조성한다 생각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계속되는 역사를 중단시키는 것은 단순한 행위와 구별되는 모든 행동의 기능이다.
저자는 과연 우리는 권력의 본성을 폭력 그 자체라든지 혹은 폭력수단에 의한 기초를 두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이해해야 되는가 그러나 이는 국가를 지배계급의 손안에 있는 억압의 도구로 보는 맑스의 판단을 의지할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또한 권력의 본질을 명려으이 유효성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난 것으로 그 자체로 이미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폭력은 그 자체로 정당성은 없으며, 정당화될 뿐이다. 저자는 권려과 폭력은 대립적이며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으나 권력을 생산할 수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특징으로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특성으로,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인간은 수많은 규칙과 제도적 장치에 엮매어져 버렸으며, 진보의 개념은 이러한 폭력적인 상황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아마도 폭력, 그 자체를 사유하고 분석한 책은 거의 유일하다고 보며 시간이 된다면 한번쯤 읽기를 권한다. 그것은 본서와 현재와는 많은 시간적 차이가 있지만, 나는 여전히 한나 아렌트의 담론이 유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
|
말로만 듣던 아렌트를 한 번 읽어보자는 취지에서 읽기 시작했던 책. 한나 아렌트는 이 소고에서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의문은 맑스를 추종한다는 지식인들의 오해에 대한 질문이다. (1장 진보의 역설)
문제는, 왜 그렇게 많은 폭력의 새로운 전도자들이 맑스의 가르침과의 결정적인 불일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왜 그들은 사실의 전개를 통해 잘못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분명하게 자신의 정치 운동과도 조화되지 않는 개념과 원리에 대해 그렇게 완고한 고집을 갖고 집착하는가에 있다.
두 번째 의문은 '폭력'의 정의에 관한 의문이다. (2장 폭력과 권력)
내 생각에, 정치과학의 현재 상태에 대한 차라리 유감스러운 성찰은 우리의 전문 용어법이 '권력power', '강성strength', '강제력force', '권위authority',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과 같은 핵심단어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며 권력은 우수한 수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조직화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마오쩌뚱을 패러디 한 밑의 말로 요약될 수 있겠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폭력적으로 치닫는 권력은 오히려 권력 약화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즉, 권력의 상실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일으킨다는 것.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권력과 폭력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3장(폭력의 본성)에서는 폭력이 과연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수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폭력은 '이성적'으로 행사되었고 분노 없는 폭력이야말로 비인간화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프리모 레비가 번뜩였다.)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그것들의 뚜렷한 부재가 비인간화의 가장 분명한 징후이다.
군인들은, 누군가 계속해서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살인자가 아니며, 살인자들-'개인적 공격성'을 갖고 있는 자들-은 아마 훌륭한 군인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2장, 3장으로 가면서 논의가 더욱 심화되고 더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하긴.. 1장은 이 책이 발간될 무렵 꽤 많은 논란이 되었을 법 하다. 사르트르와 프란츠 파농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지와는 별개로, 가장 공감이 가던 부분은 이 세 부분.
나는 동물학자들의 많은 연구작업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일부 동물이 인간처럼 행위하는 것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종종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간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왜 우리가 "인간이 집단적 텃세 습성을 가진 종種들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는 것을 승인하도록"-차라리 그 반대로, 어떤 동물 종種이 인간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가 아니라-요청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우리는, 동물심리학에서 모든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을 "제거"한 후에(실제로 성공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제 "인간이 얼마나 '반인반수半人半獸인지"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가?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성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모두가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 말하자면 집단적인 유죄의 고백은 범죄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실행 가능한 가장 탁월한 방어수단이며, 그 범죄의 거대한 규모는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대한 가장 탁월한 변명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그 스스로가 점차 그 힘을 잃고 있다는 증거라는 그의 분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엔 여전히 답답함을 떨칠 수 없다. 모호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현실에서 다시 모호해진달까. 저 폭력적인 이명박 정권이 실제로 권력을 '잃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너무 비관적인가?) 낮은 지지도와 권력의 힘이 줄어드는 것. 이 둘이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현실이 그저 내가 눈이 나쁜 탓일까. 물론 권력 상실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프란츠 파농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본문이 12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책이지만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한나 아렌트의 글이 원래 좀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건 번역의 탓도 있는 것 같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 내가, 번역을 읽으면서 영문 구조가 보일 정도니 -_-... 쉼표를 쓰는 것을 뜻을 명확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사용하면 흐름을 턱턱 끊어놓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쉼표를 찍어대고 거기에 또 너무 많은 줄표를 사용하는데, 번역할 때야 명확해지기는 하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이 책 제목이 '폭력의 세기'인데, 원제는 'On Violence'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투박하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책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그냥 '폭력에 대하여' 정도록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싶다.
|
| 이럴 때 참 난감하다. 다들 좋은 책이라는데, 나는 그리 큰 감동을 받지 못 했느니. 원인은, 내가 책을 다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리라. 다 이해하지 못 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간을 충분히 이해할 배경지식이 없다. 둘째는, 번역된 우리말 문장이 참 거시기하다. 한 문장에 접속가 두개이상 게다가 지시어가 또 두 개 이상 나오는 문장은,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독불가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는 또 다시 나의 독서습관이 걸린다. 적어도 한 저자의 책을 두 세권 연속해서 읽어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폭력과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 성찰하고 있다. 기본적인 전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모택동의 말대로 '폭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력은 다수의 동의(?)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두환과 노태우가 오래(?) 못 간 것이고. 헌데, 이 말은 누구나 다 동의하지 않는가. 과거 또는 현재까지 민중의 힘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다 같은 맥락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총구 또는 폭력에서 나온 권력은 지속적이지 못하는가. 또 하나 더 폭력은 나쁜 것인가. 이 두 개의 질문에 대해서 첫 째 질문에 대한 답은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겠는데, 그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는가, 묻는다면, 글쎄,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 능력부족이겠지. 저자는 소수자의 불의가 아닌 위선적인 권력에 대한 폭력은 부분적으로 그 효용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폭력이 궁극적으로 지속적인 권력을 성립시키지는 못하고 오히려 폭력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한다. 근본적으로 폭력은 창조력이 없다. 제목이 그리 적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제목 그대로 직역하지는 않은 것 같다. 좋은 책이겠지. 하지만, 나의 능력으로는 폭력에 대한 충분한 성찰의 기회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폭력에 대한 부분적은 긍정의 기회가 된 것 같다. 이성은 분노에서 나오고 분노하지 않는 것은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결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