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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딸아이의 친구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절단하였다. 출근할 때마다 나는 그 길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간다. 지나갈 때마다 눈물이 나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다 큰 어른이 울고 다닌다고 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아픔에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절망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한번은 커다란 슬픔 하나 정도는 살아가면서 겪게 된다고 하는데 그 아이에게는 그 슬픔이 너무 빨리 왔다. 그러나, 슬픔이라는 몫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 같다. 슬픔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야 하는 고독과 동의어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절망으로 보이는 때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세상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탓도 있다. 내 안의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나오기를 거부하다가 넓은 세상에 눈을 돌려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윤리나 도덕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된 것만 같다.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어쩔수 없이 신문과 뉴스를 챙겨보는데 매일같이 충격받고 있다. 텔레비젼도 없고 별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라 생각하지만 , 매일 같이 보도 되는 사건과 사고는 믿기 어려운 절망과 같은 소식들이다. 초등학생이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는 사회가 우리사회의 현주소라니... 그래서인지 더욱 울적한 날들이었다.
이 책 《그림, 눈물을 닦다》는 치유하는 그림 에세이란 부제를 가지고 있다. 치유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메스를 대고 상처를 끄집어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 이 책은 그렇게 삶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를 끄집어내 그곳에 메스를 대는 기분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긍정병으로 인해 타인을 의해 씌어진 삶이 아닌, 오로지 '자신' 위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그림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꼭 억눌러왔던 슬픔과 아픔, 상처가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림과 글을 읽어가다보면 마치 왓츠의 <희망>이란 그림에서처럼 두눈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마지막 하나 남은 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절망이라는 토양에 희망이라는 싹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슬프지 않은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비극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운명이다. 삶 자체가 비극이다. 부재,어둠,소망의 결핍, 나처럼 평소에 늘 ‘조증’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도 인생은 기본적으로 슬프다.
제우스에게 저항한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은 저항함으로쎠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베첼리오 티치아노,<프로메테우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스캔한 예술가의 모습이 아닌,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몸통을 쪼이면서도 살아야 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들의 운명과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야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을 통해 생生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과 직면하게 하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슬프고도 비극적인 사랑,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절망적이고도 처절한 사랑, 아나 멘디에타의 불행한 죽음, 고흐와 창녀와의 슬픈 사랑 등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슬픔이나 절망, 분노와 마주하게 하며, 서서히 그림을 통하여 우리가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를, 비극을 이해함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사랑은 오해다. 동시에 사랑은 상상력이다. 연인들은 불완전한 상대를 앞에 두고 완전한 서로의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력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 -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던 것 같다. 르네 마그리트는 기발한 발상으로 관습적 사고를 거부하고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화가로 유명한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경이로운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듯이 르네의 기상천외한 발상은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항상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 같다. 사랑이란 것은 어쩌면 이 그림처럼 서로에 대해 잘 몰랐을 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완전하다는 착각이 사랑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르네의 사랑에 대한 통찰 <연인>은 어쩌면 사랑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아닐까 한다. 한편으로는 태어나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교육을 받고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채 살아가며 사랑할 줄 모르는 괴물이 된 채 사랑하는 슬픈 연인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한 인생>에서 류가 그랬던가?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으며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이렇게 르네의 그림은 참 놀라우리만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지녔다. <결핍을 즐겨라>에서는 결핍이 있기에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고 한다. 이 책은 심리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미술평론가 조이한의 그림 심리 에세이이다. 저자는 그림이나 예술 작품을 만나는 일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한다. 가끔 마음이 울적하거나, 요동칠때 보는 그림이 있는데 앞서 말한 왓츠의 <희망>이라는 그림이다. 예술은 슬픔과 비극만 가득한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켜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절감한 적이 없다. 이명옥 교수는 인생이라는 흙길을 걸어가려면 신발에 흙이 묻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하며 , 신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인생의 고단함과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 삶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슬픔은 이겨낼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 없듯이, 저자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면, 묵묵히 상처를 껴안고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며 비극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임을 말한다. 이별했을 때, 이별노래가 심금을 울리듯이 마음이 아플 때 슬픈 그림은 내면 깊은 곳을 건드려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림, 눈물을 닦다>는 페르소나를 벗고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하는 여정을 통해 인생이라는 거울을 마주보게 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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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 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내 눈물을 본지가 언제인지 궁금해진다. 꼭 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부터인가 울음과 나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이 되어 버렸다. 감정이 메 말려 버려서 일까? 아님, 세상살이가 눈물 없이도 견딜 만 해서일까? 그렇지만 가만이 생각해보면 그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때로는 울고 싶고, 또 때로는 눈물을 펑펑 쏟고 나면 개운해 질것도 같은데, 쉽사리 눈물이 나오지를 않는다. 요즘 운전을 하면서 하나의 CD만 반복해서 듣는다. 누군가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노래들만 모았다며 건네준 CD에는 정말로 내가 좋아했던 곡들만 들어있다. 제목은 잘 모르지만, 가사는 자주 들었던 내용이고, 곡조 또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과도 같아 마음을 가라앉힌다. 노래를 들으면, 어렸을 때가 생각나고, 지금은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 생각난다. 가슴이 싸해지지만 그렇다고 눈물은 나지 않는다. 분명 명랑한 내용은 아니고, 가슴 아픈 기억들이 떠 오르는데도 말이다. 일요일 저녁, 무얼 먹을까 고민하며 같이 저녁을 먹을 사람을 떠올려보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핸드폰에 저장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지만, 막상 전화 해볼만한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있거나, 아님 만나면 내가 그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줘야 할 것 같아 선뜻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실은 내가 외로운 건데, 내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그러지를 못할 것 같은 생각에 그냥 혼자서 술 한잔을 걸치며, 하고 싶었던 얘기는 마음속 깊이 꼭꼭 감추고 만다.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또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로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읽고, 눈으로 보면서 마음속으로 듣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른다. 그래서 남들이 쓰고, 해석해 놓은 것들을 부지런히 찾아서 보고 또 읽는다. 그리고 어디서 보았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어떤 그림을 보았을 때, 누군가가 느꼈던 것들을 나도 느껴보려 애쓴다. 때로는 누군가가 느꼈던 감정들을 나도 똑같이 느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 같기만 하다. 더욱이 현대작품으로 올수록, 회화에서 조형미술로 올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그러면서도 나 또한 그림에서 공감하고 위로 받기를 원한다. 아니, 딱히 그림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힘을 주고, 나의 내면을 조용히 응시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원한다. 그래서였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인데 책이 마음에 끌린다. 아마 ‘미칠 것 같다면, 세상에 나를 소리쳐’, ‘주저된다면, 사랑마저 반역할 것’, ‘치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껴안아버려’, ‘사는 게 곤욕이라면, 생각의 틀 자체를 바꿔 봐’ 라는 각 장의 소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아픔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운 것들을 내 대신 얘기해 주어서 인지도 모른다. 미술사를 전공하기 전에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저자, 그래서인지 그녀가 전하는 그림이야기는 의외로 쉽게 읽힌다. 그녀 또한 아픔이 많아서일까? 아님 눈물을 많이 흘려서일까? 그림을 보고,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 또한 내 모습과 내 삶을 생각해 본다. 내가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얘기는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미치게 하는지, 그리고 왜 주저하고 있는지를..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작품 보는 법을 얘기하고 있다. 저자가 소개하는 작가들 역시 들어본 사람보다는 현대로 올수록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더욱이 작품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대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저자와 함께, 아니 그림과 함께, 나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 메마른 눈물이지만 손등으로 훔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저자의 말처럼 “때로는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이, 자주 위선과 거짓으로 위장되어” 있는 세상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해석하는 글로써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책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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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그림은 어려운데, 그 상징성이나 추상은 재미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림을 본 사람들의 반응과 이해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이 필요한 듯 싶다. 로댕의 <신의 손>을 보고도 누구는 신의 사랑을 떠올리고, 누구는 속박과 벗어나는 자유를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로댕의 신의손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신 안에서 참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제우스에게 저항한 프로메테우스. 그 대가로 독수리에게 계속해서 간을 쪼이는 벌을 받았지만, 의미를 발견하고 존재를 증명하였다. 예술가들이 프로메테우스를 자신의 분신으로 삼는다고 한다. 기존의 것에 저항하는 자이기 때문에.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는 것만이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카뮈의 사상과도 연결된다. 예술가들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을 보았고, 몰이해와 온갖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살았던 인간의 의지와 저항정신을 보았다고 한다.
사랑. 사랑은 원래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자기애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도 문제이지만, 자기애가 튼튼하게 받쳐주지 않는다면 삶은 매우 불안하게 흔들릴 것이고, 지지와 확신을 주는 타인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에서는 남녀가 얼굴을 가리고 키스하고 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상대에 대한 완전한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의미에서 모든 사랑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오해이지만 동시에 상상력이다. 우리는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갖고 있으므로 사랑을 할 수 있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는 사랑했던 연인과 함께 누웠던 침대 사진이다. 두 사람이 함께 누워있었던 흔적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난 빈자리의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그 사람이 사라졌기에 더욱 소중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연인이 사라졌기에 우리의 사랑은 더욱 완전해졌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고흐의 <슬픔>은 슬픔에 빠진 시엔이라는 여성을 그린 그림으로, 고흐는 그녀를 동정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갖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 곁에서 행복해하는 고흐를 태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슬픔은 공감의 통로가 되어준다.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 것처럼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작품과 대화할 통로를 알지 못한다. 고통과 상처는 우리안에서 가시처럼 머문다고 한다. 에바 헤세의 <액세션>은 수많은 가시로 이루어진 네모난 상자이다. 이 모습이 우리의 내면이라는 말일까. 상처가 많은 사람은 내면에 수 많은 가시들로 박혀 있어, 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또 상처를 내고 만다. 고야의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은 현실의 비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몽둥이를 들고 싸워야 하는 현실. 내가 죽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고, 그렇게 누군가가 쓰러질 때까지 몽둥이질을 해야 하는 비극성이라 한다. 잔인한 세상에 대한 회화적 은유로 볼수록 몸서리쳐지는 예술적 고발이라 한다. 자코메티의 <광장>에는 뼈대만 남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그들은 몸은 부서지거나 흔들릴지언정 쉽게 넘어지지는 않는다. 녹록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려 애쓰는 인간의 모습은 감동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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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열정의 목마름에 단비를 뿌려줄 수 있는 건 ‘보고’, ‘듣고’, ‘읽는’행위다. 아픔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주는 것 또한 그것이다. 때로는 더 처절하게 눈물짓게 하고 때로는 너무 벅찬 설렘으로 미소조차 잃게 만드는 그 행위들을 나는 가슴 터지도록 사랑한다. 그림이야 말해 무엇 하리. 한때 그림이라는 단어는 내 마음이란 뜰을 꽉 채운 꽃 같은 존재였다. 싱그러운 이슬을 머금고 개화한 꽃을 보는 즐거움,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최면이다. ![]()
오귀스트 르네 로댕, <신의 손>, 1898-1902 똑같은 작품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사랑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속박이나 자유를 생각한다. 작품에서 받는 감동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다(p13).
영화 [까미유 끌로델]에서 언뜻 야수를 연상케 하는 조각가 로댕에게 끌로델은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작품이 한 예술가의 손을 거쳐 존재하게 되는 것처럼 두 예술가는 서로 타자이면서 독립된 하나의 자아로써의 비극적 인연을 맺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 예술가의 사랑을 비극이라 말한다. 그러나 비극과 희극의 차이, 그 간극을 결정짓는 무례한 편견이란 사슬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한 사람이 있다. 더럽고 추하고 끔찍한 뼈대에 찰흙을 쳐 바르느라 끌로델의 손도 더렵혀졌다. 로댕 앞에 덩그러니 무식하게 버티고 선 하얀 대리석은 기다렸다. 제 살을 깍아 달라고, 쪼아 달라고...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두 연인이 들려주는 멜로디를 우리는 눈으로만 본다. 누군가는 살을 보태고 누군가는 제 살을 깍는다. 허나 불리어지는 이름은 하나, ‘예술작품(미술작품)’. 아니, 난 그리 간단한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아. 그건 부서지고 할퀴고 뜯겨진 삶의 파편들을 기워낸 사랑이란 조각보야. 이걸 혹 위로라고 하는 거라면 그래, 참 고맙구나. 어쨌든 나는 그 단단히 조여진 사슬에서 꿈틀거리는, 나약한 돌연변이다. 당신은, 당신은 강하신가요?
아나 멘디에타, <멕시코에서의 실루엣 작업>, 1973-1978
해변에 찍힌 여성의 몸, 그리고 그 안을 채운 붉은 물감은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 같다. 파도가 칠 때마다 몸을 채우고 있던 핏빛 물감이 바닷물과 함께 쓸려 나간다. 마치 아픔을 조금씩 치유하듯이(p37).
불안한 국면에 처한 예술가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야말로 생사가 달린 극한 상황은 그녀를 자연으로 데려다 놓는다. 사막과 해변, 설원과 산으로 간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자연에 담아 소리친다. 그녀의 메아리를 온몸으로 느끼는 우리의 상처는 곧 공기 중에 흩어져 차차 사라져간다. 그건 마치 세상 모든 괴로움과 생채기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저 바다의 몸부림이 자주 그리워지는 것도 그 파도가 나와 당신을 너무 닮았기 때문임에랴. 온갖 맹수와 비바람에 밟히고 밟힌 설원이 다시 흰빛으로 회복되는 과정에도 나와 당신은 늘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흔적에 기생하는 자연, 이 당돌한 발상에도 한없이 인자하기만 한 자연은 인간을 다시금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인다. 고요한 숙면을 취하게 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부활을 선물하는, 바로 이것이 대자연이다. 아나 멘디에타는 그렇게 잠들었다, 달콤한 꿈을 꾸며... 그러니까 우리는 그녀의 잠듦을 ‘자살’이라고 부르지 말자. 너무 아프잖아. 그건 자연도 슬퍼할 일이야.
제임스 엔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엔소르>, 1899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는 무엇이 가면이고 무엇이 내 진짜 얼굴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가면 뒤에서 우리는 종종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 진짜 내 얼굴을 봐 주길 기다리는지도 모른다(p55).
사투리 작렬! 섹시하고 멍청하지만 눈물 나게 웃기는 내 유머가 재밌었지? 그리고 삶에 지친 당신에게 적당한 휴식과 즐거운 에너지를 선사해주기도 했을 거야. 웃기는 내가 웃는 당신을 보고 그나마 위안 받을 수 있었던 부분이야. 얼마나 웃을 일이 적었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크게 웃었을까. 가식과 감추고 싶은 비밀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순간이야. 열성분자들처럼 허리띠 졸라매며 달리는 것과도 잠시 멀어지는 순간이기도 하지. 그런 지긋지긋한 고독이란 가면은 너도 나도 다 쓰고 있잖아. 조금이라도 잠깐이라도 니가 웃을 수 있다는 거에 작은 희망을 걸어보았더랬지. 그게 나였으면 하고 바라는 거야. 하지만 내 맘과 같은 사람들로 꽉 찬 건 아니니까. 그래도 내 맘과 같은, 적어도 몇몇은 될 테니까. 그래, 넌 알아보았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란 걸. 유쾌한 내 개그 뒤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라도 흘려본 니가 있어서 나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꼈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란 걸 알아. 세상엔 이렇게 피차일반인 짝꿍들이 제법 많단 말야.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나르시스>, 1598-1599
사랑할 때 우리는 상대방이 아닌 상대의 눈에 비친 나와 사랑에 빠진다. 자기애가 부족한 사람은 자신을 아름답게 비춰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p71).
왜 순간순간 니가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는 거, 그게 사랑이란다. 책에서 노랫말에서 그림에서 꿈속에서조차 자꾸 내 곁을 알짱거리며 기웃거리는 그것도 사랑이란다. 잘못된 만남이라느니, 때늦은 인연이라느니, 운명의 장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라며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어쨌든 사랑은 사랑이란다. 그런데... 그게 ‘자기애’라네. 내 눈을 통해 보는 너의 모습을 사랑하는 나르시스. 아무렴, 어때. ‘삶’이란 ‘사람’의 줄임말인 이상, 사는 동안엔 어차피 사랑과 끝없이 연애하다 가는 거지. 널 사랑하든 날 사랑하든 우린 다 같은 사람이니까. 예술가는 사람 아니니? 모든 사랑이 상상력이라니... 그럼 예술가들의 그 많은 상상력의 밥도 다 사랑이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 함께 예술가가 돼버리자. 설령 그 사랑이 오해이더라도.
알베르토 자코메티, <광장>, 1948-1949
뼈대만 남은 듯한 사람들이 걸어간다. 그들의 몸은 부서지거나 흔들릴지언정 쉽게 넘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녹록치 않은 삶이지만 어떻게든 살아 내려 애쓰는 인간의 모습은 한없이 고독하고 감동적이다(p155).
징글징글하게 무료하고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온종일 멍하니 앉아 있다 우연히 펼쳐 든 한 권의 책에서 번쩍하는 섬광을 본 적이 있는가. 헌데 그 섬광은 뜻만큼이나 참 짧기도 하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그 찰나적 희망의 횟수만큼 우리는 넘어졌다가도 금세 일어나곤 한다. 오뚝이처럼 혹은 개구리 왕눈이처럼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 죽기 살기로 살아내야 하는 삶. 카뮈의 말처럼 우연히 내던져진 공간이란 이 세계, 신이 없는 고로 누구에게서도 구원받지 못할 우리에겐 숙명적 기대감이란 것도 없단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나올 물음은, ‘그럼 뭣 때문에 살아?’다. 의지박약한 인간이 기댈 곳이 없다는데, 이 통렬한 막막함을 우리는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까?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란 이성이 없다. 살아내는 그 순간순간만이 존재할 뿐. 그렇게 흘려보내는 시간 위에 붕 뜬 채로 달리고 달리는 기나긴 마라톤인 것이다, 인생은. 나보다 앞서가는 동지의 뒤통수와 뒤쳐져 있는 동지의 심박수에 질투와 연민을 안고서.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p196/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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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상대방에 대한 악의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해서 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면 그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 부글거리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고, 내가 받았던 것과 똑같이 상처주기 위해서 펄떡거리는 심장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하지만 이렇게 내 상처를 감싸는 데만 급급했던 나는 한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이유로 그 누군가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좋은 동기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 행동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림, 눈물을 닦다]의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한가지 작품을 두고 서로 다른 감상을 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감상 모두 틀린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어차피 그림의 감상에는 틀린 것이 있을 수 없을테니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똑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이 없듯이, 사람의 감정도 어느 하나 똑같지 않은 것이 당연햔 게 아닐까. 그림을 감상하는 데는 정해진 틀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우리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틀을 슬며시 건네주고 있다. 그것은 '위로'라는 따뜻한 온기가 스며있는 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위로의 여러가지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해주었던 위로가 진실로 위로가 되었을지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 아마도 유아기의 나이에 -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군으로 부터 도피생활을 해야했던 에바 헤세는 성인이 되어서도 악몽으로 고통을 겪었다.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겪었던 극단의 폭력적인 상황은 크나큰 상처로 남겨져, 그녀는 낭만적인 이야기나 아기자기하고도 아름다운 것들을 역겨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또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많은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다. 울고 있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위로가 되는 것 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는데, 진심으로 누군가와 함께 울어주지 못한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아파하며 운 적은 많았지만 타인의 상처를 위해 울었던 적은 과연 몇번이나 될까. 진정한 위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함께 울어주는 것일텐데 말이다. 나는 무척이나 우울해 하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면서 일부러 밝은 척, 더 즐거운 척 한 적이 있다. 당시엔 그렇게라도 분위기를 띄워야 상대방이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아마도 우울한 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말을 잘 들어주고,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함께 울어줄 이가 필요했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상처받아 고통받는 이를 만난다면 즐거운 척, 밝은 척 연기하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도 푸념을 늘어놓을 테다. 기회만 된다면 그 앞에서 엉엉 울어도 보겠다. 그래서 당신 혼자서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떠안은 것이 아님을 조금이라도 알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이 책을 읽기전에는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동이라 단정짓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러한 편협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루도 낮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듯, 예술에서도 아름다움 못지 않게 그 반대의 양면성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아름다운 것보다는 추함, 어두음, 슬픔을 표현하는 그림으로부터 더 많은 위로와 감동을 얻는 다는 것도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림, 눈물을 닦다]는 그림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그림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들의 감정이 그대로 반영된 그들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은 예술가들을 대신해서 눈물흘리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그림을 보면서 슬픔을 다독인다. "이 세상에 슬프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랴. 너도 나처럼 이렇게 아프구나..." - 114페이지 발췌. 지금 이 순간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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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마다 열리는 스포츠 제전이 3일 뒤 런던에서 그 화려한 막을 열릴 예정입니다. 스포츠와 눈물을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불운에 눈물을 흘리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승리를 맞는 순간 그 감동에 혹은 그동안 인내해온 고통에 대한 상념이 교차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선수도 그렇지만 그 선수를 지켜보는 관중이나 시청자 역시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과학자는 거울세포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기 내내 선수와 함께 한 긴장이 감동으로 연결되면 절로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 영화, 연극과 같이 스토리가 있는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 독자가 혹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음악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감정이 이입되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감정이 점차 고조되면서 울컥하는 순간에 이르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 경우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과 그 분들의 눈물과 인연이 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미술사가 제임스 엘킨스교수의 <그림과 눈물; http://blog.yes24.com/document/5378538>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대하면서 눈물을 쏟았다는 분들이 왜 그렇게나 많은지....
그림과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또 하나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에세이라서 아마도 눈물과 인연이 있는 그림에 관한 소회를 담은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미술사를 가르치는 조이한교수님의 <그림, 눈물을 닦다>입니다. 그런데 ‘위로하는 그림읽기 치유하는 삶읽기’라는 부제가 달린 것을 보면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미술을 통해서도 치유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고달픔에 상처 난 마음을 감추고 ‘난 괜찮아’하는 최면으로 버티는 것보다는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다는 출판사의 주장이고 보면 그림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는 등 감정의 풀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 아니라 ‘그림감상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 역시 엘킨스 교수의 <그림과 눈물>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를 처음 보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서 도망치듯 시작한 독일 유학이니 낭만은커녕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오기로 버틸 때 만났던 <해바라기> 앞에서 저자는 바로 자신을 만난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름 내 쏟아져 내린 뙤약볕 아래서 마지막 수분 한 방울마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해바라기는 서 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이파리. 까맣게 타 버린 씨앗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선 모습. 해바라기의 자존심. 내가 거기서 본 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내 모습이었다.(204쪽)”
하기야 제가 보기에도 굵은 해바라기 줄기에 축 늘어져 있는 꽃과 말라붙은 이파리는 마치 신산한 삶에 굴복하고 목을 매단 채 늘어져버린 주검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난 이 그림이 저자에게 준 의미를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을 읽으면 마치 눈물에 관한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소설, 시, 영화, 사진, 조각 등 전방위적 예술작품을 이끌어다 눈물, 즉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어느 것이든지 그녀의 관심이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뿐 아니라 작가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사실들을 인용하고 있어 저자는 역시 ‘미술’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엔소르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사진작가 질리언 웨어링의 사진작품 <나는 절망적이다>의 소개에 이어 ‘감정노동’에 대하여 설명하면 자본주의의 키치적 비유를 끌어온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서비스에 종사하는 분들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직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업무를 수행하면서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무관련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그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놀고 있다면 이는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미술작품을 해설하면서 때로는 설명에 앞서 각자의 견해를 듣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린 이의 작품설명을 듣게 되는 경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각자가 느낀대로 감상하기 마련이므로 정말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술평론가 역시 일반인보다는 차원이 다를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의적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의 경우, “사진에는 마치 조금 전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무게에 눌린 배게와 흐트러진 시트가 찍혀 있다.(107쪽)”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사진은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잔 흔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마크 로스코의 <무제>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엘킨스교수가<그림과 눈물>에서 이 그림을 보면서 우는 사람이 많았다 해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그림에서도 진한 슬픔이나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슬픔은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추상미술에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물음을 로스코가 들었더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작 로스코는 자신을 사실주의적 화가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필립 라메트의 작품 <사물들의 자살>을 놓고 자살을 논하면서 우리 사회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자조적인 논리 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前) 대통령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작가의 특정한 의도가 읽혀지는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 붙인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너를 죽여야만 하는, 그렇게 누군가 하나 죽을 때까지 서로를 쳐야만 하는 비극, 이 잔인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움을 계속 한다.(150쪽)”라는 설명에 작가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편향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로저 킴볼의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 http://blog.yes24.com/document/6631623>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요? 제가 보기에도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두 남자가 들고 휘두르는 막대기의 모양새로 보아 서로에게 치명상을 주기에는 가냘프게 보인다는 느낌이라서 그렇습니다.
정리해보면, 고달픈 삶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의 미술은 분명 가능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길을 안내하는 분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곁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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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는 워낙 문외한이지만, 최근 들어 그림에 관한 책을 자주 읽게 된다. 내 분야가 아닌 것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배움으로써 내 생각의 폭을 더 넓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무관한 분야일 것 같아도 그 속에서 얻어지는 이미지는 내 분야의 사고의 틀을 확장시키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롤랑 바르트는 “최후의 언어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미술작품은 흔히 오브제, 대상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보는 이의 감성이나 시각에 따라 같은 오브제라 할지라도 저마다의 이미지로 새롭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미술 작품에 있어 좋은 해설이 필요한 이유는 오브제를 이미지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좋은 해설이란 단지 작품에 대한 평이한 해설이 아니라, 그 해설을 통해 각자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는 해설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해설을 만나면 반갑고 고맙다.
<그림, 눈물을 닦다>는 그런 좋은 해설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림 심리 에세이 형식을 띤 이 책은 ‘그림을 읽는 방법’을 보여주는 동시에 ‘마음을 달래는 방법’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나 한 가지쯤은 안고 사는 상처,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법한 감동을 그림과 함께 조곤조곤 풀어간다. 흔히 어렵게만 여겨지는 그림인데, 저자는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쉽게 풀어주고 있다.
로댕의 <신의 손>, 엔소르의 <가면에 둘러싸인 엔소르>,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 메리 카사트의 <캐서린 켈소 카사트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부터 생소한 작품까지, 저자의 설명은 다양하게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공통된 것은 그녀의 이야기에 어느새 동화가 된다는 점이다.
- 세월이 나를 현명하게 만들어 주길 기대하느니 지금 당장 나 스스로 자신을 바꾸는 게 낫다. - 단지 그 때문에라도 슬픔이라는 감정이 인생에서 절대 겪지 말았어야 할, 순전히 나쁘기만 한 감정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내가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억지로 웃음을 짜내는 ‘웃음 치료’에 대한 비아냥이나, 에바 헤세의 <액세션Ⅱ>를 통해 되새겨본 ‘가시나무’에 대한 단상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나로서는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책 중간중간에 보이는 그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공감이 된다. 나 또한 ‘한 문장을 쓸 때도 다른 이의 저작을 몇 번씩이나 들춰보며 혹시나 틀린 말을 하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가능하면 ‘나’를 노출시키지 않는 중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시각을 만난 듯해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계속 공감을 하며 읽었다. 비록 수단은 다르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어쩌면 카라바조의 <나르시스>에 대한 그녀의 설명처럼 ‘상대의 눈에 비친 내 모습’에 더 공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딱히 무슨 일도 없으면서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날이면, 친구를 찾아가 위로받는 기분으로 꺼내어 다시 읽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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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미술에세이. 솔직히 가볍게 생각했다. 잠깐 읽다가 치울 수 있겠지 싶었다. 근데 그게 아닌 것같다. 한장 한장 넘기는 게 어려웠다. 저자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가볍게 느낄 수 없었고, 내안에서 내 식으로 해석해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었다. 정말 솔직히 고백하면 지금도 그림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저자의 말을 내가 잘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이 겪을 힘든고 지친 상황들, 뭔가 나만 잘못되고, 나만 힘들 것 같을 때 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억 날것만 같다.
뭐랄까, 미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보기엔 낯선 그림들, 그러면서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나도 모르게 공감하게 된달까. 사실 지금까지 미술에세이를 여러 권 봤었는데, 그 책들이 외국 유명작가들의 그림에만 치중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면 이책들은 한국작가들은 물론이고, 유명하지 않은 낯선 작가들의 그림도 서슴치 않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그림들을 봤을 때 그 느낌,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때의 그 감정이야 말로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진정한 감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알려진 수많은 작품들, 그것들에 대한 평가나 설명은 수없이 많이 들어왔고, 그건 그림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감상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감상이라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저자는 그림이나 예술 작품과 만나는 일이 사람을 만나서 사귀고 때때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 말이 맞는 것같다. 똑같은 작품들을 보고서도 개개인 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는 천편일률적인 감상을 강요하고, 또 자기도 모르게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깐 그런가보다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는데, 이책은 낯선 그림들을, 낯선 감정들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책같은 느낌이다.
물론, 저자의 설명이 아예 없다 이런건 절대 아니다. 대신에 저자는 책에 실린 그대로 그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이 그림을 볼때 어땠고, 어디서 어떤 감정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뭐랄까 다른 책들은 그림에 대한 감상을 강요하는 느낌이라면 이 책은 그림을 볼때 이렇게 볼수도 있어요. 저는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독자님들은 이 그림 볼때 어떤 느낌 들었나요? 이런 물을 던져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림하나, 하나, 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크게 다가 오는 게 너무 좋다. 거기다 그림만을 설명하고 있는게 아니라, 저자가 봤던 소설 책들, 시들 각종 다른 제재들도 함께 끌고와 설명하고 있는게 정말 저자는 박학 다식하구나 이런 생각 + 아! 빨리 이 책에 나왔던 소설들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들이 절로 들수 밖에 없었다. 특히,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몇년전 사 놓고 보지 않아서 이책을 읽는 내내 책장에 있던 그 책으로 손길이 가는걸 막느라 힘들었다. 한권의 책으로 그림과 조각과 작가가 느끼는 감정들만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함께 보는 느낌. 시한편, 소설의 한구절 한구절이 딱 맞아 떨어지는게 사람들이 느끼는 희노애락을 다양한 표현으로 만날 수 있었던게 너무 좋았다.
저자는 말한다. 그림에 감동하는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나'와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 어느 시점엔가 우연히 만나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불꽃같은 거라고, 전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 이라고.
그림을 가슴으로 느낄수 있는 법, 그 방법을 책을 통해서 배운 것같다. 거기다 낯선 작가들의 작품들은 내 기억의 뇌리 속에 정말 오랫동안 머물것만 같다. 특히,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예수> 너무 인상적이었다. 종교의 신성 모독 이런건 잘 모르겠고, 독특한 시도와 함께 그 시도가 만들어낸 작품이 아름답다는 것, 낯선 시도들이 나로 하여금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없애주는 느낌이다.
쉬엄 쉬엄, 하루에 하나의 작품씩만을 봐도 좋을 것만 같은 책. 저자가 자기가 감동을 받았던 작품들을 실었다는데, 아무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낯선 작가, 낯선 작품, 낯설면서도 친근한 느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책이지만, 읽어보라고 절대 가벼운 책이 아니니깐,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실,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까, 어떤 미사어구를 써야할까 고민했었는데, 내 솔직한 심정은 그냥 읽어봐라. 이말 한마디로 끝을 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괜찮은 책이다. 정말, 이런 작품들도 있구나, 살면서 이런 감정 느낄 때 다른 사람들도 그런 감정 느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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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무척 낯익어졌다. 우리말로 굳이 해석하지 않더라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마치 외국어가 아닌 외래어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치유’ 정도로 번역해야하는 이 영어 단어가 오히려 ‘치유’보다 더 낯익고, 더 잘 해석되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이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쓰이면서 힐링한다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는 것도 느낀다. 여기저기서 힐링, 힐링하고 그 힐링의 방법이 유명한 스님이나 신부의 강연을 듣거나, 어디 한적한 데로 떠나거나 하는 것처럼 여겨지면서 벌어지는 상황인 듯 싶다. (지방에 학회 심포지엄 가는 것을 힐링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살지만, 그걸 굳이 어떤 식으로든 치유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치유되기도 하는데 굳이 병명을 만들어내서 약물을 투여하거나 상담을 받아야하는 것처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 힐링의 유행은 뭔가를 뒤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표현하게 하는 면에서 반가운 것임에는 분명하다. 말하자면 눈물을 흘리고 싶은데 그저 참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 눈물을 누군가 닦아준다면 그만큼 고마운 일이 또 있으랴. 최근에 그림에 관한 책들을 몇 권 읽었다.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감동적이었고, 전창림의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유익했고,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들』은 이지적이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이해를 못했다. 이 책을 최근에 내가 읽은 그림에 관한 책들과 비교해보면,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가장 가까운 동류가 아닌가 싶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민족의 상처와 가족사의 아픔을 미술 여행을 통해서 스스로 되새기고 있다면, 『그림, 눈물을 닦다』는 누군가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반적 성질의 그림과 함께 자신의 콤플렉스와 아픔을 치유했던 그림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바로 서경식이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라면, 그리고 거기서 가족과 민족, 세계로 나아갔다면, 『그림, 눈물을 닦다』가 수십 편의 작품들을 통해서 나의 주변(그걸 사회라 해도 좋다)으로부터 받는 나와 우리의 상처를 그림을 통해서 치유받는 얘기이다. 『그림, 눈물을 닦다』는 바로 그렇게 뒤돌아보고, 눈물을 흘리도록 하고, 또 눈물을 닦는데 어쩌면 그림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역할을 한다고 조용히 말해준다. 그림을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나의 마음, 문득 생각나는 과거의 일, 혹은 어떤 사람 등등 그런 것들이 그림을 이해하는 방법일 수 있고, 그런 것으로 내 마음이 정화되고 내 눈물이 닦여진다는 것이다. 학문이나 상식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내 마음의 그림으로서 위로받고 치유받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 그림이 한 몫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그랬다. 눈을 그리지 않은 모딜리아니, 주변뿐만 아니라 그 실체까지도 뭉개어버린 자코메티의 초상화를 보면서 어쩌면 섬뜩하기도 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그 이유를 묻고, 문득 희미해지고, 세상에 눈을 감는 나를 생각해보았다. 천으로 얼굴을 두르고 입맞춤을 하는 마그리트의 <연인>이라는 그림을 보면서는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고,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을 보면서는 나도 울고 싶어졌다(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조이한 씨는 더 무엇이 필요한가, 라고 쓰고 있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든 그림을 느끼면 되는 것이지 않느냐, 그게 바로 예술이고, 또한 힐링이라고(물론 조이한 씨는 작가에 대해서도 썼고, 그림의 의도에 대해서도 썼다). 그림을 이해하는 데 어쩌면 강박관념 같이 가지고 있을 어떤 사조나 의도 같은 것들에서 해방되어 편하게 그림을 볼 수 있는 자신감을 준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좀 과하게 감상적이고, 좀 과하게 전지적인 시점은 조금 불편하게 하지만 말이다. (2013.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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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라는 것을 옛날에 봤을때는 정말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냥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몇년전부터 그림 전시를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림을 보면 그냥 마음이 차분해 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는 그림이라는 곳에서 작가가 어떤상태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림을 보는 것이 좋아졌다. 그래서 보기 힘든 전시를 하게되면 꼭 가서 보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그러던 중에 이책을 우연히 지나가가 봤는데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설명해주고 이해할수 있게 해줘서 너무나 좋았다. 요새 세상도 그렇고 내삶도 그래서 그런지 챕터4 사는게 고독이라면, 생각의 틀 자체를 바꿔봐 여기에서 나오는 그림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만약 내가 사랑을 한다면 챕터 2를 좋았을지 모르지만..ㅎㅎ 못생겨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를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이 왜 이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전에 이작품을 많이 접했었었다. 그때는 왜케 뚱뚱한 사람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림 안에서 사랑에 빠지 남녀가 춤추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수 있었고, 전에 아무생각 없이 봤을때와 책을읽고 봤을때 그느낌이 조금은 달랐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이 있다. 루시안 프로이트 <화가의 어머니>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청춘을 기꺼이 찬양하지만 늙음을 예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이가 감수해야 하는 위태로움, 온갖회의와 불안을 떠올려 보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애통해할 필요가 없다. 나또한 그랬다. 항상 젊음을 추구해 왔지 나이 드는것에 항상 두렴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그림을 보면서 그래 모든것을 경험하고 살아온 세월을 간직한 늙는다는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 참 많은것을 얻어서 좋다. 전시회에가서 그림을 보지 않아도 책안에서 그림을 볼수 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책을 보면서 참 그림을 조금이라도 이해ㅏ 할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