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시집을 한 권 꺼내본 적이 있는가. 종이가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꺼내서, 어딘지 색이 바랜 것 같은 모습에 눈을 껌뻑거린다. 그리고는 촛불 끄는 시늉을 하듯 조용히 입김을 불어본다. 더께앉은 먼지가 날아오르면서 눈을 따갑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비비고 나면, 별 무늬도 없는 장정인데도 제 색을 찾은 시집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처럼, 선명하게 윤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 윤기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선연하게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
시인은 곳곳에서 먼지 앉은 시집을 발견한다. 그 위에 얹힌 먼지의 두께는 시집이 견딘 시간의 무게를 의미한다. "만큼"이라는 말이 의비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리고 "품다"나 "가슴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삶은 따뜻한 삶이다. "마음이 약한 제비"가 아마도 미련을 갖고 몇 번이고 둘러본 제비집의 모습이다. 집이란 기억을 담는 장소이고, 이를테면 몽상의 고향이다. 그리고, 기억은 먼지, 비듬, 터럭, 그리고 가루와 같은 입자로 등장한다.
서정주의 「新婦」에서 우리는 이미 이 '입자의 상상력'을 보았다. 우리는 "매운재"가 "초록 재"나 "다홍 재"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때로 받지만, 매운재의 사전적 정의가 "진한 잿물을 내릴 수 있는 독한 재"라는 것을 상기하면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가 견디어야 했던 시간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부터 매운재의 말맛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그는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먹었다.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이므로 대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막내 아들인 제우스가 어머니 레토와 함께 크로노스를 속여 죽인 다음, 배를 갈랐더니 거기에서 하데스와 포세이돈을 비롯한 그의 형제·자매들이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모두 간과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그 삼킨 것을 그 안에 보존한다. 시간에 의해 소화된 과거는, 현재로서의 과거이다. 하데스와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임에도 제우스가 맏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은,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었던 그들이 갓난아이의 모습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점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
먼지의 집에서 먼지 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은, 그러므로 항상 부활의 조짐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그곳에 죽어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럼으로써 보존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 노인」은 노인이 평생 홀아비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끝나고는 있지만, 그 바로 앞 연에서 까치가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까치는 텃새라는 점에서나 노인이 죽은 다음 덩굴과 함께 들어왔다는 점에서나 노인의 적자嫡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미 부활의 단초가 보이고 있다. 특히 시집 뒤편에 실린 나무 시편들에서 그런 부활의 모습은 쉽사리 관찰된다. [인상깊은구절]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 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 「제비집」全文 |
|
그의 첫번째 시집 {먼지의 집}에서는 죽음을 견디는 연습으로서 시들이 쓰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작은 미물들, 거의 관찰 대상이 되지 않았던 그 미물들의 죽음이 시인의 시야에 포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그 죽음은 그야말로 덧없는 것이어서 어떠한 낭만적 색채도 띠지 않는다. 그러나 두드러진 죽음의 무상을 견뎌 냄으로써 희망의 편린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시인 자신의 죽음을 가져오기도 하리라. 물론 이 죽음은 세상과 섞여있는 자신을 방법적으로 죽여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의 추억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에게 피와 살을 주는 것은 바로 추억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추억에 대해 시인은 절대 금빛 가루를 뿌리지 않는다. 오히려 추억의 상기를 통해 죽음에 더 가까이 가려고 한다. 추억은 죽음의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다. 이렇게 어두운 시집은 아마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 내가 죽는다, 내가 숨쉬기를 멈춘다, 솜덩이처럼 각지게 묶인다 내 몸이 가졌던 열기가 쏙 빠지고 열기를 밀고 들어올 얼음, 칼 끝으로 비유될 그것이 내가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침묵이며 너의 얼굴을 빼앗아간다 먼지들이 일어날 수도 없는 뻣뻣한 나를 덮어준다 방문의 틈 사이로 들어올 햇빛 한 줄기, 내가 그때 눈을 살짝 떳다 감으면 놀라서 도망갈 먼지들이, 천천히 나를 덮는다 |
| 이윤학 시인의 첫 시집이다. 첫 시집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접한 시인의 시집은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이다. 그때의 느낌이 좋아서, 맘에 들어서 두번째로 읽은 것이 <먼지의 집>이다. 음... 읽은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먼저 읽었던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보다 감흥이 덜 하다. 전반적으로 생물들(동물,벌레,식물 등)을 소재로 한 시들이 내게는 좀 낯설다. 특히 구더기나 바퀴벌레, 파리 같은 것들이 제목으로 등장하면서 시로 쓰여진 것들은 아무래도 나같은 평범하고 시에 대한 수준이 낮은 독자에게는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아무리 시적으로 승화되어봤자 나한테 파리는 지저분하고 짜증나는 존재일 뿐이니까. 그런데 이 시집에는 생물을 소재로 한 것만큼이나 "먼지"가 많이 나온다. 그러니까 제목으로 삼았겠지만, 죽음과 오래된 시간의 흐름과 먼지로 연결되는 시적 분위기는 요즘의 내 정신, 혹은 감성에 썩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 하지만 난 요즘 나의 어둡고 무거운 감정들을 정리하고자 노력중이니 때가 안 좋은 걸까? 판교리 8 -먼지의 집 노을은 창문에 머물다 금방 간다. 창문에 기대어 조그맣게 뭐라고 말하려다 말을 감춘다. 기웃거리는 노을이 끔찍하다. 창문은 서쪽으로 나 있다. 떠나려는 노을이 붉어지는 집, 창문에 거꾸로 씌어진 글씨를 읽는다. 먼지의 집, 창문 안엔 멎은 지 오랜 벽시계가 걸려 있다. 엎어놓고 간 귀떨어진 대접들이 있다. 빈병에도 채워지는 먼지가 있다. 세월은 먼지를 먹고 배 부르다. 소주병의 鶴은 날개를 펴고 있을 뿐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병마개들 흙 속에 박혀 녹슬어가고, 덥수룩한 수염들 탁자에 둘러앉아 기침을 한다, 목을 적신다. 별 볼 일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린다. 덜컹덜컹 먼지의 집으로 들어가 안 나오는 바람이 있다. 혼자 사는, 쓸쓸한 먼지의 집. 창문 안에 노을이, 붉은 燈을 켜놓았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불면 1 흐린 날 아득하게 저려오는 다리를 펴며 쓴맛으로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약간의 설탕이 나를 녹슬게 한다. 어떤 날은 꿈속에서 나와 발을 씻고 있다. 물은 비어 있고 돌아갈 수 없다 나는, 깨이지 않는 마취에서 영영 가망이 없다. 형광빛 엑스레이로 드러나는 뼈 하얀 뼈 속에 내가 있다. 2 복선으로 깔린 철길에서 잠을 잔다. 하행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상행으로 돌아눕는 잠, 멀리에서 가깝게 오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을 싣고 멀어지기도 한다. 더디게 오고 가는 시간을 선눈으로 느끼고 있는 눌림. 귀는 이미 밑변에서 심장과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판교리 8 - 먼지의 집>은 굉장히 회화적이다. 왠지 박학기의 오래 전 노래 "그림 속의 풍경"이 생각난다. <불면>은 최근에 겪은 불면의 밤과 연결되어 인상적인 시다. 역시 불면의 상황을 놀랍도록 잘 묘사했다. 단, 불면의 괴로움에 대한 표현은 좀 약해 보이는데... 어쩌면 녹슨다, 돌아갈 수 없다, 드러나는 뼈, 철길의 잠, 눌림 같은 단어들이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별로 고통스럽게 느껴지진 않는다. 불면의 상황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어 혹시 그 순간의 느낌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 곳이고 어느 때라도 머리만 기대면 잠들 수 있었던 나로서는 불면이란 딴 세상 얘기였었는데 최근 노여움과 화를 삭이지 못해 불 끄고 눈 감아도 눈 앞이 하얘지는 불면의 밤을 겪었었다. 예전 같으면 그 자리에서 화내고 말싸움 한바탕했을 법한 일을 참고 이해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다. 그렇게 맘은 먹었지만 감정이란 아직 완벽하게 내 뜻대로 조절되는 건 아니어서 통제하지 못한 노여움 덩어리들이 통통거리며 내 잠을 설쳤다. 참은 게 잘한 짓일까? 좀 더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여기며 위안을 찾아 보지만 아무래도 내게 이런 상황을 제공한 그 사람을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 행동했지만 결국은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렇다면 나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참은 것일까?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어째서 내게 불면이라는 괴로움을 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