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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는 백가쟁명의 시기이다. 그만큼 많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혼란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중에는 진나라 천하통일의 바탕이 된 법가도 있었고, 선진4가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도가와 묵가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반적으로 중국문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화는 유가와 동일시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유가를 말할 때 흔히 ‘공맹의 도’라 부른다. 공자와 맹자가 한 묶음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공자는 제자가 3000명이나 되었고, 또 맹자는 공자가 죽은 지 100년도 더 지나 태어났는데 어째서 맹자가 공자의 뒤를 이었을까?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대성했다고 알려진 순자는 유가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우리가 순자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의외로 적다. 맹자의 성선설에 맞서 성악설을 주장했다거나, 훗날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치부되었다는 것 정도가 우리가 아는 전부이지 않을까 싶다. 공맹의 도라는 말이 말해주듯 유가는 공자에서 시작되어 맹자가 완성했다는 믿음이 순자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았는지도 모르겠다. 순자는 조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말년에 제나라 직하학궁에서 10여년을 보내며 후학을 가르쳤고, 이후 초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순자]는 총 20권 32편으로 되어있다. 전한 말 유향이 순자의 책을 정리하면서 중복되는 내용을 바로잡아 12권 32편으로 편집되어 전해오다, 당나라 양경이 주석을 달면서 각 편을 비교해 순서를 바꾸어 20권 32편으로 개편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순자]라고 한다. [순자]는 다른 동양고전들과는 달리 순자가 직접 서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고전을 읽다’ 시리즈를 쓰고 있는 중국의 학자 양자오는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는 역사 속에 그것을 되돌려 놓고 고전의 저자가 어떤 시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고 어떤 답을 찾으려 노력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읽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공맹의 도나 순자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수많은 오해를 담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후기를 살다간 공자는 서주(西周) 봉건제도의 왕관학 전통을 이어받아 예(禮)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왕관학이란 군자의 도리와 치국방법의 전수에 중점을 둔 고대의 귀족교육 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공자 사후 예에 대한 해석과 견해가 엇갈리면서 제자들은 여러 문파로 나뉘었다. 맹자는 공자가 죽은 지 100년도 더 넘은 기원전 372년에 태어났으며 증자에서 자사로 이어지는 문파였다고 한다. 반면에 순자는 기원전 313년에 태어나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238년에 죽었으며 염옹의 문파였다.
춘추전국시대는 웅변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세객들은 군주 앞에서 유세를 하며 자신의 방법이 채택되기를 희망했고, 군주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유세객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러나 맹자의 시대에 와서는 수십 개의 나라가 사라지고 전국칠웅 가운데에서도 격차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순자의 시대에는 그 가운데에서도 진(秦)나라가 강대하고 압도적인 위치를 점유한 시대였다. 당연히 유세객들의 활동이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의 성공이 변법에 힘입어 완성되어가고 있음을 눈으로 보고 있었기에 경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군주들이 원한 것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국정의 기본방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진나라의 예를 본받아 정해진 것이었고 단지 그 방향과 관련된 세부적인 계획과 조정이었다. 맹자의 시대 유가는 그나마 유세라도 할 수 있었지만, 순자의 시대 유가는 ‘쓸모 있음’을 설득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절박한 시대였음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환기 시킨다.
이어서 저자는 맹자와 순자의 차이점을 살펴보고 있다. 맹자는 성인의 지혜가 사람마다 내면에 갖고 있는 정신적 질서를 정리하고 통합해 외부에 제도화하는데 있다고 보고 성선(性善)을 주장하였다. 반면 순자는 성인이 창조한 예는 보통사람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보통사람의 천성을 다스리고 바로잡기 위해 고안되었다며 성악(性惡)을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맹자의 사상에서 예(禮)와 법(法)은 각기 다른 층위에 속했다. 예는 인성의 근본위치에서 비롯되지만 법은 부득이하게 마련되고 운용되는 보조수단이라고 보았다. 허나 순자의 예는 법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고안된 외적질서에 불과했다. 예와 법은 본질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맹자와 순자의 사상의 차이를 통해보면 중국 전통에서 맹자가 주류였던 적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정치적인 면에서 말과 글로는 공맹의 도를 들먹였지만 그 내용은 순자의 주장과 가르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맹자는 공자와 등가로 살아남았지만 순자는 잊혀졌다. 저자는 그 이유를 순자가 예와 법의 절대적인 구분을 제거하고 유가와 법가 사이의 차이마저 제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진의 멸망과 함께 유가를 중국사상의 주류로 만든 순자는 잊혀지고 그의 사상만이 공맹의 도로 부활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에게 순자에 대한 이해를 도운 저자는 텍스트 [순자]읽기에 들어간다. 몇 단락을 취해 꼼꼼하게 읽기를 택한다는 그의 말 마냥 이 책에서도 <비십이자(非十二子)>와 <유효(儒效)>, <권학(勸學)> 세편을 골라 읽는다. 흔히 동양고전을 읽다보면 [맹자], [논어], [시경] 등의 편명은 딱히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편집상의 편의를 위해 각 편의 첫 번째 단어를 편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순자]와 [한비자] 등은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 저자의 강한 주관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순자] 역시 편명을 보면 순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비십이자>에서 순자는 열두 명의 학자를 비판한다. 도가, 법가, 묵가 등 10명의 학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비판한 순자는, 화살을 유가로 돌려 자사와 맹자를 두고 고대 선왕을 추종한다고 하면서 흉내만 낼뿐 그 원리는 모른다고 반박한다. 자신들의 말을 공자의 말인 것처럼 둔갑시켜 다른 사람들의 질문을 막아 학설이 잡다하고 순수하지 못한 내용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이처럼 순자가 유가의 다른 학파를 비난한 목적은 유가의 학설을 제자백가 중 가장 신뢰할 만하고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주장으로 만들고, 유가 내에서는 자신이 계승한 염옹문파가 유가의 유일한 대표로 올라서게 만들기 위함 이었다고 한다. 아는 당시에 유가문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십이자>에서 자신이 속한 문파의 정통성을 부각시킨 순자는 <유효>에서 유가야말로 현실의 혼란과 고통에 대한 가장 옳고 효과적인 대안이라고 표명한다. <유효>는 편명이 뜻하는 그대로 ‘유가는 어떤 쓸모가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다른 제자백가는 모두 현실의 변화에 대응해 생겨났기에 답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으나, 유가는 왕관학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보수적이고 비현실적인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하여 핵심문제에 대한 답을 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유효>야말로 순자가 가장 공들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중국고전을 읽다’라는 시리즈를 읽으면서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과 달리 직접적인 해설보다는 역사적 맥락과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먼저 풀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얇기만 한 이 책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의구심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저자는 고전이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과거의 책이라고 말한다. 고전은 과거의 책이므로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고, 그 시대 사람들이 당시의 현실적인 문제와 현실적 관점에 대해 쓴 글이라며 그것이 고전의 가장 큰 가치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고전은 우리에게 세계를 달리보고 세계 속에서 달리 살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고전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는 것조차도 유쾌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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