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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얼른 이 변화의 여정에 뛰어들기를...
"당신도 얼른 이 변화의 여정에 뛰어들기를..." 내용보기
사람이 가진 생각의 시야란 어느새 한정되기 쉽다.  살면서 거치는 여러 번의 사회화를 통해 상식과 인습에 갇히고 편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보다는 익숙한 것만 섭취하는 타성에 곧잘 젖게 되는 탓이다. 사람은 언제 권태와 허무에 빠져들게 되는가? 그건 상식이 상상력을 압도할 때다. 세상의 중력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현실에 납작 엎드려 그 한없이 낮은 눈높이로
"당신도 얼른 이 변화의 여정에 뛰어들기를..." 내용보기


 사람이 가진 생각의 시야란 어느새 한정되기 쉽다.

 살면서 거치는 여러 번의 사회화를 통해 상식과 인습에 갇히고 편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보다는 익숙한 것만 섭취하는 타성에 곧잘 젖게 되는 탓이다. 사람은 언제 권태와 허무에 빠져들게 되는가? 그건 상식이 상상력을 압도할 때다. 세상의 중력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현실에 납작 엎드려 한없이 낮은 눈높이로 보고 헤아리는 세상 외에는 어떤 다른 걸로도 담아내거나 꿈꾸지 못할 때인 것이다. 이제는 새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지도가 높은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중한 것은 그래서다. 그는 전혀 다른 것을 준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는 현실보다 꿈에서 이야기의 광맥을 발견한다. 주류가 한낱 몽상으로 치부하며 무시하거나 내친 것들마저  주류 못지 않게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면서 헤아림의 손전등을 기꺼이 들이미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가 상상력의 건전지로 한껏 충만된 손전등으로 비춘 순간, 박제된 지식과 낡아빠진 상식 속에서 퇴락과 실망만 거듭하던 세계가 온전히 다른 모습으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그가 나눠 준, 다른 곳에선 얻을 수 없었던 시선과 생각 속에서 이전에 몰랐던 매력과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식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 생각의 폭을 확장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의 쾌감을 유발해서만은 아니다. 관습과 타성에 절인 눈으로 보았을 그저 척박하고 퇴색한 빛만 가지고 있었던 나를 둘러싼 일상 세계가 그와의 동행으로 어느덧 이루게 시선의 도약 속에서 얼마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색채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듬뿍 경험하게 되어  많이 열린 눈과 마음으로 나와 세상을 긍정할 있게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베르베르의 매력은 최근에 나온 죽음에서도 여전하다.



 죽음 제목 그대로 죽음을, 정확히는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죽음 이후를 다룬다고 하니 얼른 94년에 발표한 타나토노트 후속작으로 2000년에 나온 천사들의 제국 생각난다. ‘타나토노트 흔히 우리가 저승이라고 부르는, 은하 중심의 블랙홀로 존재하는 영계를 탐험하는 이야기였고천사들의 제국타나토노트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다시 등장하여 이번에는 영계에서 수호 천사가 되어가는 이야기였다. 이건 여담인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베르베르의 소설 여기저기에 인용되어 낯익을, 심지어죽음에서도 여전히 등장하는 에드몽 웰즈 실물을 만날 있다. 천사가 이들을 지도하는 천사로 일하고 있는 그를 말이다


  죽음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 설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사실 후속작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시리즈에 대해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타나토노트 유니버스'라는 이름을 살짝 붙여보고픈 마음도 생긴다. 분명 베르베르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기에 겁은 좀 나지만서도.


 그렇다고 해도 작품들이 다루는 영역은 같지 않다. 서로 다르다.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 저승의 중심 영역이라 할만한 영계 다뤘지만 ‘죽음 아직  영계로 가지 않은 '떠돌이 영혼'들이 주로 부유하고 있는 연옥의 세계를 다루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연옥은 영계처럼 지구 저 편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오롯이 겹쳐 있다. 다가 올 환생을 기다리거나 그걸 거부하는 떠돌이 영혼들이 바로 우리 주위에서 우릴 지켜보며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위치 상의 연접은 '죽음'이 구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으로 말하겠지만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영매가 중요한 등장인물이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고 삼아 타나토노트 2권에서 가져온 영계의 지도.>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이야기인지 줄거리부터 간단하게 언급해 보려 한다.

 프랑스의 문단 주류를 차지하는, 그래서 흔히공식문학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한없이 천대받는 장르 문학을 주로 쓰는 작가, 가브리엘 웰스 그랬듯이 꿈에서 건진 문장인누가 죽였지?> 어떻게 하면 편의 소설로 발전시킬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일상을 시작한다. 때만 해도 여느 때와 다를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으나 갑자기 자신이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들른 주치의 대기실에서 우연히 만난 뤼시 필리피니 이름의 여성이 자신에게 이런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한다.


 그가 이미 죽어 유령이 되어 있다고.


 웰즈 자신의 이상형인 실존했던 헐리우드 배우 헤디 라마 빼다 박은 외모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 없었던 뤼시는 알고보니 죽은 자와 소통할 있는 영매 결국 그녀의 말이 옳다는 증명된다. 갑자기 사망할 아무런 사건도, 이렇다할 병력도 없었던 그이기에 그의 죽음에는 오직 하나의 이유만 남게 되는 셈이어서 자신이 곱씹었던 문장은 그대로 이제 무엇보다 풀어야 숙제와 같은 질문이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해답을 얻고 싶다. 그가 소설의 첫머리로 삼아 볼까 했던 문장, 이제 그의 머릿속을 점령한 바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나는 죽었지?’ (p. 69)


 소설은 때부터아버지들의 아버지처럼 추리 소설 형식을 따라간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가 주연했던 영화고스트와는 다르게 현실 세계에 아무런 물리력을 행사할 없고 그저 관찰자만 되어야 하는 떠돌이 유령인 가브리엘 웰즈는 해답을 얻기 위해 아무래도 살아 있는 존재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있는 뤼시에게 협력을 구하게 된다.


 내가 대단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그저  삶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챕터를 알고 싶다는데 입장에서는 정당한 요구 아닌가요누가  죽였는지 알고 싶은 거예요내가 나와 주변인들에 대한 정보를 주면 재능과 혈기를 가진 당신이 분명히 수수께끼를   있다고  확신해요범죄 수사가 전공이었으니까 내가 저승에서 당신을  안내해 줄게요.(p. 117 ~ 8)


 사실 뤼시는 보여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그리 평탄한 인생을 보내지 못했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자인 사미 다우디 맡긴 가방에서 마약이 나와 무려 8년을 교도소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웰즈의 소설, ‘죽은자들 우연히 만나고 영안이 열려 지금의 영매가 인연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도와주면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뤼시에게 가방을 맡기고 그대로 사라져버린 사미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범죄 수사 지식을 동원하여 찾아주겠다는 웰즈의 약속에 뤼시는 그를 대리하여 수사에 나서기로 한다. 결과, 웰즈가 24시간 안에 특별하게 제조된 독극물로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지고 이제 웰즈와 뤼시는 웰즈를 살해할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명의 용의자들, 그러니까 그가 이루고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해 강한 질투를 가지고 있었던 쌍둥이 형인 토마, 그를 작가로 데뷔시켜주고 현재도 그의 작품을 전담하여 편집하고 있는 출판인 알렉상드르 발랑브뢰르, 차갑게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한 미련을 드러내고 있는 과거의 연인이자 여배우 사브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작품들을 무시하며 맹렬한 비난만 해댔던 평론간 무아지 개인적으로 만나 추려가면서 진범을 색출해 나간다.


 그러나 여기엔 이 하나의 이야기만 있지 않다. 이와 병행하여 다른 이야기 하나가 더 겹쳐진다.


 그건 바로 이제 떠돌이 영혼이 된 웰즈가 살아 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그래서 한없이 낯설 수밖에 없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 이런저런 우연곡절 속에서 점차 적응해 나가는 이야기다. 연옥이 자리한 위치에 뒤이어 이야기 형식 또한 이렇게 '겹침'을 지향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베르베르가 왜 겹침의 설정을 반복하는가에 대해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서 거기에 대해 거듭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겹침이 그 어느 대상도 배제하지 않는, 서로 대등하게 공존하는 상태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온전한 평등의 상태가 바로 '겹침'이란 걸 말이다.


 영매인 뤼시의 존재는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건 무엇보다 뤼시가 하는 일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산 자와 죽은 자를 교통시키는 것만 하지 않는다. 그런 수동적인 전달자 역할에 더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등을 빚을 경우 되도록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 또한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경계에 서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고루 보살피는 존재다. 그는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내치지 않는다.


 어느 , 자신을상부의 일원이라고 소개하며 존재가 접촉해 왔어요. 이름이 드라콘이라고 했어요. 그가 저승에 양립하는 조직에 대해 설명해 줬어요. 하나는 환생을 위해 올라가는 영혼들을 관리하는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에 머무르길 원하는 영혼들을 보살피는 조직인데,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천상의 관리들 의해 운영된다고 했어요. 인간들의 영혼을 관리하고 거르고 안내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기본적으로 비슷하다고 말이죠. 그가 내게 지상에서 상부를 대표하는 일종의 대리인이 되어 보지 않겠냐고 하길래 주저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p. 104)



 이러한 영매가 웰즈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로 등장한다는 것은 소설 '죽음'이 무엇보다 지향하고 있는 게 바로 공존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개체가 어떤 자리나 어떤 모습, 어떤 성향을 하고 있든지간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고 헤아려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여기엔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먼저 수사 과정이 그러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용의자들을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차례차례 추려나가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이 여정 속에서 독자는 용의자 자신의 고백을 통해 그들의 삶을 오롯이 경험한다. 그들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마치 그 몸에 빙의하듯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엔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지 말라는 베르베르의 마음이 담겨 있다.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의 금지는 무엇보다 가브리엘의 이상형이기도 한, 실존했던 여배우인 헤디 라마에서 한껏 나타난다.


헤디 라마


 소설에서도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그녀에겐 야누스적인 면모가 있었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헐리우드의 여배우였지만 그녀에겐 그 모습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 때만 해도 사람들은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은 지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고 여겼었는데, 헤디 라마는 뛰어난 외모만큼 지적인 것도 탁월했던 것이다. 그녀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과학자였다. 실제로 그녀는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어뢰가 독일이 쉽게 무선 통신 주파수를 알아내는 바람에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자, 주파수 보안을 철저하게 하여 독일의 방해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기술까지 개발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주파수 도약'이란 기술이다. 일정한 함수 처리로 주파수를 마음껏 변화시킬 수 있는 이 기술은 현재의 와이파이와 GPS 그리고 블루투스를 가능하게 하였다. 한 마디로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의사소통이 가능한 현실을 창출한 장본인인 것이다. 헤디 라마가 탄생한 지, 101년이 되는 2015년엔 구글이 '헤디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라는 캐치 프레이즈까지 내걸었을 정도로 말이다.


 이토록 굉장한 업적을 이뤘지만 그녀는 살아 생전에 단 한 번도 그것을 인정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쁜 여배우는 지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과학자로서의 그녀를 깡그리 무시해 버렸고 이뤄놓은 업적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러한 처사는 소설에서 장르 소설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을 읽지도 않은 채 덮어놓고 비난부터 하는 평론가 장 무아지의 태도와 그대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문단 주류인 <공식> 문학을 대표하며 그만한 권력도 가지고 있는 그는 늘 같은 소재와 주제로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만 써대면서도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걸 오로지 대중이 그만큼 덜 계몽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웰즈의 소설이 대중에게 인기 있는 것도 웰즈가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타협한 결과라며 폄하한다. 상대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 보면서 스스로 잘못된 것을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모습은 그야말로 헤디 라마를 지적인 것이 결여된 예쁜 인형으로만 보고 다른 건 모조리 무시했던 모습 그대로다.


 타자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한 모습만 보고서 그것을 전부라고 판단하는 것.


 이건 우리들도 일상에서 사람과 사건을 만나며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자기 중심적인 시각과 판단이야말로 실은 공존을 가장 많이 무너뜨리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베르베르는 온전한 공존을 위해 자기 중심주의를 허물고자 한다. 굳이 '<죽음>은 절대적 타자'라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나 타자의 영역이라 생각하게 마련인 죽은 자의 세계를 독자 앞에 끌고 온 것이다. 그 타자의 세계를 독자에게 온전히 경험시키기 위하여.


 (내 멋대로 이름붙인) 타나토노트 유니버스를 이루는 세 작품들...


 따라서 소설이 원하는 건 독자인 우리가 단순히 떠돌이 영혼의 세계를 주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다 진정한 목적은 그것을 통해 현재 내 일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그 세계를 흠뻑 체험토록 하여 나와 세계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시야와 생각으로 보고 담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소설에서 비행 장면이 많이 나오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영혼이 된 웰즈는 무엇보다 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전과 순전히 달라진 자신을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에 붙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바닥에 붙어 움직이는 무거운 동물이지만 이제 그는 공중에 있는 가벼운 존재가 되었다. 가브리엘 웰즈는 새로운 존재 조건을 활용해 곡예비행에 나선다.(p.132)


  여기에서 보듯, 비행은 현실의 중력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력은 한 마디로 어떤 존재가 다른 대상을 끌어당기는 힘. 그대로 세계가 개체가 가진 고유한 개성을 억누르고 세계가 허락한 틀에 자신을 길들이게 만드는 것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사회는 틀을 만들어 각자의 자리를 구획하고 거기서 쉽게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을 들뢰즈는 '영토화'라 부른 바 있다. 영토화를 통해 틀에 갇힌 주체는 자기 자신의 시야를 가지지 못하고 사회가 허용한 시야로만 모든 걸 바라본다. 자신마저 그렇다. 우리가 고유한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기 보다는 항상 타인의 모습과 비교해 우월감과 열등감에 젖는 것처럼. 시야가 좁으면 생각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고 폭이 협소해지면 질수록 자신에 대한 긍정 또한  줄어들게 된다.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자기 안정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바라는 것 보다는 대다수가 바라는 것을 더 쫓게 되고 그렇게 다들 똑같은 것만 쫓게 되니 그것을 얼마나 이뤘느냐에 따라 절로 서열화가 이뤄져 늘 비교 우위나 열위를 통해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타자는 공존의 대상이기 보다는 질투와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내 뜻을 따르지 않는 대상에게 쉽게 증오를 표출하게 된다. 나와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고집하는 타자는 언제든 내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탈영토화'할 것을 권한다. 사회가 구획하여 우리를 심어놓은 곳에서 탈주하라고 말이다. 어느 것에도 고정되지 않는, 본향이란 게 없는 유목민이 되어 머무르게 되는 모든 곳을 고향으로 삼고 만나는 모든 이를 가족처럼 여기도록. 그렇게 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경계란 오직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베르베르가 소설에서 섬세하게 묘사하는 비행이 바로 이러하다. 그 어떤 경계도 넘나들고 그 어떤 장벽도 막을 수 없으며 생각 아니  상상하는 만큼 빠르게 날 수 있는('타나토노트'에선 심지어 광속마저 초월할 수 있다고 한다.) 비행은 그만큼 사회가 형성한 나와 그것을 기반으로 굳건히 형성된 자기중심주의로부터의 이탈의 중요한 상징 행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행이 베르베르가 꿈꾸는 문학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브리엘 웰즈는 자신이 <이야기꾼>이 된 것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때부터 문학은 내게 한바탕의 마술로, 풀리는 난해한 수수께끼로 다가왔어요. 당신처럼 나도 부모님이 권유하는 세계가 싫었어요. 학교도 나와 맞지 않았죠. 그래서 가출을, 육체의 가출이 아니라 정신의 가출을 감행했어요.(p. 150)


  그래서 나는이야기꾼이라는 나만의 자리를 찾았어요.(p.151)


 그런 웰즈는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문학이며 다양성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장 무아지에게 이렇게 항변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바로 문학의 다양성이에요. 자체로 나쁜 문학 장르가 있는 아니라, 장르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 따로 있을 뿐이에요.(p.40)

 작가인 우리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만다는 , 이것뿐이에요. 읽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똑똑한 사람도 많아지겠죠.(p. 41)


  창작을 하는 방법과 태도에 있어서 여러모로 실제의 베르베르와 유사한 점(심지어 책에 자주 소개되는 웰즈의 책 제목 역시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을 살짝 비튼 것이다.)을 보여주는 웰즈는 사실 베르베르의 분신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에 대한 웰즈의 소망은 베르베르 자신의 것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웰즈의 사후, 편집자 발랑브뢰르가 계획하는 A.I, <가브리엘 웰즈 버추얼>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문학이 마주하게 될 미래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고유하며 제한없는 상상력이 빚어내는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언제든 쉽게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A.I인 <버추얼>이 하는 일은 <공식> 문학 작가들이 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은 마치 정해진 공식을 따르듯이 기존의 소재와 주제, 형식을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한 채 쓰고 있을 뿐이니까. 이건 작가가 기존에 썼던 것을 데이터화 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최대한 그와 비슷하게 소설을 산출하는 A.I와 거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베르베르가 왜 그토록 상상력>을 중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상상력이 창출하는 다양성을 구현하는 사람의 능력을 A.I가 대체할 수 없다고 본다면 상상력,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증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베르베르는 무엇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아무런 제한 없는 상상력을 중시하니, 이건 그대로 아무런 영토와 경계에 좌우되지 않는 비행과 마찬가지고 동시에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언제든 다른 나가 될 수 있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르베르가 상상력을 중시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너무 단순하고 성급하며 오만에 찬 판단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려 말해 본다면, 바로 그 상상력이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변화를 만들거나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커다란 내부 동력이 되어주기에 베르베르는 중시하며 독자에게도 마음껏 향유해 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특히 2권 후반에 가서 펼쳐지는 장면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가득 자극하고 마음껏 뛰놀게 하는 마당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꼭 말해둬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앞서 슬쩍 언급한 적도 있는 <경험>이란 단어다.


 소설 '죽음'은 얼른 보면 한계 없는 상상력처럼 자유분방한 전개라고 느껴지지만 사실 이 <경험>이란 말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보면 꽤 유기적으로 형성된 작품이란 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것이 이 소설이 하필이면 모든 용의자의 총체적인 삶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나 헤디 라마의 경우와 같이 타자의 한 면만 보고 전부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그리고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행과 베르베르가 중시하는 상상력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주가 된다는 것이다. 소설은 대상을 단정하기 보다는 먼저 가서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눈으로 그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이는 용의자에게만 그치지 않고 웰즈가 떠돌이 영혼의 세계에 적응할 때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전 면모를 가늠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오래도록 깊은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행은 또 어떠한가? 소설은 누누이 날면서 느끼는 감각, 보여지는 풍경을 묘사하고 강조한다. 상상력 또한 그렇다. 그것은 과정 중에만 재현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처럼 소설이 가지는 중요한 형식과 테마 모두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바로 <경험>인 것이다.

 그 <경험>에 대해 베르베르는 드라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있어요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 봐야 고칠  있는 거예요단시간에 변혁을 이루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작은 변화와 성과를 소중히 여겨요진화는 덜컹거리고 요동치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니까. (…)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은 해야겠지만 절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뜻이에요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데는 모종의 숨겨진 의도가 있으리라는  기억하라는 말이에요실수 없이 앎에 도달하는  불가능해요경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우리는 누구나 경험을 해봐야 해요그러고 나서  경험의 결과물을 확인해야 비로소 행동을 바꿔야겠다는 자각이 오죠그래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돼요.(p. 198)


  여기서 잘 알 수 있듯, 그가 이처럼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자기중심주의에서 탈주하여 무한한 변화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오직 경험을 통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절대 머리 속 지식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몸을 통해 실제 느끼고 실수와 잘못을 절감하며 그를 통해 스스로 바꿔야겠다는 의지로만 구현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베르베르가 2권 후반에서 가브리엘 웰즈로 하여금 뤼시에 빙의토록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웰즈는 뤼시의 몸에 빙의되어 여자 가브리엘 웰즈로 살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과 상관없이 오직 외모만으로 멋대로 규정 당하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지도 않고 무턱대고 유혹부터 해오는 것 하며 그야말로 뤼시의 영혼이 아닌, 오직 뤼시의 육체만이 전부인 반응을 잇달아 만나는 것이다. 헤디 라마가 살아있을 당시 당했던 그대로 말이다. 그제서야 가브리엘 웰즈는 여성의 삶이 자신의 머리로 상상했던 것보다 많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여성이 되는 과정이 없었다면 결코 몰랐을 진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자신과 다른 견해를, 삶을, 타자를 더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말에 이르러 웰즈가 놀라운 반전과 함께 밝혀진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뤼시가 드라콘의 말에 따라 복수하려는 마음을 접고 보다 커다란 대의에 따라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과정의 경험이 가져다 준 힘 때문이었다.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의 말마따나 현대는 '죽음 혐오의 시대'다. 우리가 그토록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이 끝,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고 권한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나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물론 그렇게 여기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파스칼의 내기>처럼 억지로라도 한 번 믿어보자고 말한다. 누가 아는가? 소설에서 소개한 <백 번째 원숭이 이론>처럼, 한 마리의 원숭이가 우연히 고구마를 물에 씻어서 먹었던 것이 나중에 백 마리의 원숭이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도록 만들고 마침내 그 지역에 서식하는 모든 원숭이의 행동을 변화시켰듯이, 비록 나 혼자만이라 하여도 그렇게 믿고 나를 둘러싼 상황과 타자를 함부로 판단하려는 성급함을 접어두고 내가 아니라 타자를 중심으로 그와 이루는 관계의 과정에 충실하며 그 경험을 소중히 하면서 다가오는 변화에 온전히 나를 내맡긴다면 언젠가 나라는 작은 동심원에서 시작된 파문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 변화시킬지...


 이것이 소설에서 웰즈가 말한 대로 '우주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행복을 위해 비밀리에 결탁하고 있다고 믿는' <프로노이아>일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베르베르의 모국 프랑스를 포함하여 세계 곳곳에서 번지고 있는 혐오와 적대의 불길이 어떤 비극을 자아내고 있는지 보노라면 그래도 베르베르가 내민 손을 잡고 가브리엘 웰즈가 헤디 라마와 그랬듯이 그를 따라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부탁하고 싶어진다.

 당신도 얼른 이 손을 잡고 변화를 위한 부름에 뛰어들라고.




l****1 2019.07.07. 신고 공감 16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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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죽음]을 읽고서.. (1,2권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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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 [신]을 통해서였다. 전6권으로 되어 있는 그 소설이 당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호기심으로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론 잊어버렸으니 아마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판타지나 추리, SF를 총칭하는 장르소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이유도 한 몫 했을 것 같다. 한때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류와 같은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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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 [신]을 통해서였다. 전6권으로 되어 있는 그 소설이 당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호기심으로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론 잊어버렸으니 아마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판타지나 추리, SF를 총칭하는 장르소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이유도 한 몫 했을 것 같다. 한때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류와 같은 소설들을 줄기차게 읽은 적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시들해지면서 멀어졌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에 없지만 현실에 부딪히며 사는 것에 바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결과론적이지만 어렸을 때 푹 빠졌던 무협소설에 대한 기억이 한때나마 추리소설을 찾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어찌되었던 관심에 없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다시 찾아온 호기심 때문이었다. 프랑스작가임에도 오히려 한국에서 더 인기가 있다는 소리를 얼핏 들으면서 왜 그가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지 궁금해져서다. 출판사의 마케팅 덕분일까? 아니면 그의 작품이 한국인이 좋아하는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 궁금증에 이 책 [죽음]을 읽게 되었다.

 

‘누가 날 죽였지?’로 시작되는 소설은 인간의 사후세계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인 추리소설 작가 가브리엘 웰즈는 새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리며 눈을 뜨지만 이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살해되었다고 믿는 웰즈는 우연히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 뤼시를 만나게 된다. 뤼시는 사랑하는 남자 사미로 인해 교도소에서 복역 중 읽은 웰즈의 책 <죽은 자들>을 통해 심령사의 길로 들어선 영매이다. 사디를 자신의 하나뿐인 운명의 사랑으로 믿는 뤼시는 출옥 후 그를 찾지만 그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없다. 웰즈는 뤼시에게 자신의 살인사건을 수사해주도록 부탁했고, 대신 뤼시의 하나뿐인 운명의 사랑 사디의 소재를 찾아주기로 한다. 떠돌이 영혼이 된 웰즈는 저승에서, 그리고 살아있는 뤼시는 이승에서 각각 사람 찾는 일과 범인 찾는 일을 시작한다. 웰즈는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 영혼과 아직 환생하지 않은 떠돌이 영혼들의 도움으로 사디를 추적하고, 뤼시는 웰즈의 쌍둥이 형, 웰즈가 발표한 작품의 편집자, 웰즈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비평가들을 만나며 누가 범인인지를 찾아 나선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떠돌이 영혼인 웰즈를 통해 인간의 사후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이야기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 같다. 바로 글쓰기, 그리고 비평가와 작가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이다. 그렇게 보면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 작품의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바로 작가의 분신처럼 보인다. 먼저, 글쓰기에 대해 저자는 웰즈의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소설이란 첫 문장과 이것이 닦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마지막 문장이 전부이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강요받고, 선택은 곧 포기를 의미하며, 포기는 후회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글쓰기는 선택과 포기의 연속인 셈이다.

 

이 작품 역시 <누가 날 죽였지?>로 시작하여 <나는 왜 태어났지?>로 끝맺는다. <누가 날 죽였지?>는 이 작품의 첫 문장이자 인간인 웰즈가 새로 쓰려고 했던 소설의 첫 문장이고, <내가 왜 태어났지?>는 떠돌이 영혼이 된 웰즈가 새롭게 쓰려는 소설의 첫 문장이자,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는 <누가 날 죽였지?>라는 첫 문장을 쓰고, 그 문장이 닦은 길을 따라 범인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당연히 암시와 복선이 깔리면서 어떻게 하면 소설을 더 극적으로 반전시킬지에 대해 선택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다. 첫 문장을 쓰는 순간 그 길은 어쩌면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유감없이 나타낸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안 순간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했던 웰즈는, 뤼시의 육체에 들어가 잠시 여자 가브리엘이 되었을 때에도 그간 자신이 겪은 일을 세세하게 기록한다. ‘글쓰기가 나를 구원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진정한 나로써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오직 이 공간에서 만큼은 사건을 뒤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창조해낸다.’ (2권 185쪽) 아마 저자는 그것들을 창조해내기 위해서 작품 속 웰즈가 환생을 마다하고 떠돌이 영혼을 선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웰즈 자신이 불러주면 뤼시가 받아 적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게 한다. <누가 날 죽였지?>라는 첫 문장이 닦은 길을 따라오다 보니 <내가 왜 태어났지?>란 문장을 만나고 말았다. 이제 다시금 이 문장이 첫 문장이 되어 새롭게 닦은 길을 따라 새로운 소설은 시작될 것이다.

 

저자는 또한 작품 속에서 웰즈와 장 무아지로 대표되는 평론가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혹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에 대한 대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장르소설을 무시하는 평론가들에 대한 울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실제로 그런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꾸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굳이 많은 지면을 그 대립에 할애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쪽은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작품 속에서 웰즈의 말처럼, 대중의 지지를 받거나 비평가들의 지지를 받거나 둘 중의 하나라면 저자는 당연히 대중의 지지를 받으니 그것으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영혼의 관점과 육신의 관점을 따라 가던 책읽기가 중간중간 끊기는 것을 느낀다. 처음엔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너무 자주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이야기의 맥이 끊기곤 한다. 바로 책 속의 책으로 나오는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때문이다. 어쩌다 한,두번은 이야기를 보충해주는 자료로써 흥미를 갖게 해주었지만 너무 자주, 그리고 때로는 길게 이어지는 서술이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곤 했다.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책을 읽고 평가하는 것은 그 책을 읽는 독자 각각의 몫이란 생각을 할 때, 나에게는 자꾸 사족같이 느껴졌다.

 

책을 읽고서 책 제목이 왜 [죽음] 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것은 영혼이고 육체란 단지 영혼이 한 때 머무르는 곳 이라는 저자의 생각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영혼과 육체의 분기점이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들리지만 저자는 추리소설이란 장르를 빌려 자신이 생각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다면 그는 왜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은 걸까? 이는 역설적으로 현생에서의 ‘좋은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품 속에서 영매 뤼시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기도한다. 또 그녀는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만들려면 육체를 잘 보살펴야 한다’고 웰즈에게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곧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 일게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헌데, 말로만 듣던 저자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왜 그가 한국인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k*****1 2019.06.27. 신고 공감 16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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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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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아직 경험하진 못하였지만,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그 단어 자체로도 공포는 물론 금기시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공포는 쉽게 불식시킬 수 없다. 생(生)에 대한 집착과 전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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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아직 경험하진 못하였지만,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그 단어 자체로도 공포는 물론 금기시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공포는 쉽게 불식시킬 수 없다. 생(生)에 대한 집착과 전혀 알지 못하는 죽음 이후의 상황에 홀로 놓여진다는 점이 죽음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죽음에 직접적으로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입대 후 첫날밤 어둠 속에서 취침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문득 눈물을 흘린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죽음과 달리 막연한 군생활에 대한 두려움 및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 시간동안 나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그 생각은 죽음 이후에 드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왜 나만 여기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의 시작 부분에서 눈길을 끄는 문장은 단연 '누가 날 죽였지?'일 것이다. 죽음 자체에서 공포는 물론 회피하려는 보통의 사람에게 이 문장은 주인공인 가브리엘 웰즈의 죽음 자체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문장을 시작으로 작품을 구상하던 가브리엘이 영매 뤼시와의 만남을 통하여 실제로 자신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초반부의 장면은 이후 어떠한 내용이 펼쳐질지 기대감을 갖게 된다. [식스센스]와 같은 반전일까, 아니면 [사랑과 영혼]과 같은 달콤한 멜로로 흘러갈지 말이다. 또한 '누가 날 죽였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추리소설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가브리엘 웰즈 역시 추리소설 작가가 아니었던가? [죽음]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야기는 확실히 경쾌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 영매 뤼시는 가브리엘을 대신하여 누가 그를 죽였는지 수사하고, 반대로 가브리엘은 뤼시의 사라진 과거의 연인을 찾는 이야기의 구조와 그 과정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의 전개는 장르물의 흥행 요소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의 상상력과 조합한 이러한 스토리의 전개는 그 나름으로도 재미있지만, [죽음]의 진가는 바로 작품에 부여된 다양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장르 작가 가브리엘 웰즈의 행적을 보면 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존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가브리엘이 관상동맥이 막혀있고, 그것을 수술이 아닌 운동과 식습관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베르나르 역시 동일한 상황이라고 한다. 그래서, [죽음]은 작중 죽음을 맞이한 가브리엘을 통하여 현재 살아있는 베르나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작가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인하여 더이상 글씨를 쓸 수 없다는 것에서 절망하는 모습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 다가오며, 특히 비평가 무아지와의 갈등 구조는 현재 그가 프랑스 문학계에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웰즈는 <한마디로> 작가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죠. 그가 이런 방송에 출연하고 문단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문제예요. 다수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선동이 아니고 뭐겠어요. (중략) 미래 세대에 어필하겠다는 건 그의 공상에 불과해요. 나는 고전만이 유일한 가치를 지닌 수준 있는 문학이라고 믿고 그것만을 옹호할 뿐이에요. (중략) 좋은 소설이라면 응당 지금 여기를, 현실과 현재를 말해야죠. 작가의 앎과 경험에서 나와야 좋은 소설이지, 환상의 결과물은 좋은 소설이될 수 없어요."

 - 2권, p 38 ~ 39 中에서 -

 

 장르 소설에 대한 무아지의 이러한 신랄한 비판은 자신의 작품을 프랑스가 아닌 한국에서 더 잘 이해해주는 것 같다는 베르나르의 생각을 염두해 보면 베르나르에게 향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오로지 순문학이 가치가 있다는 프랑스 문단의 현실은 베르나르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이지만, 죽음 이전에 가브리엘이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본다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토가 프랑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역시 크게 틀리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베르나르는 이 시점에서 죽음을 통하여 가브리엘이 할아버지에 뒤이어 조력자로 코난 도일을 등장시킴으로써 프랑스 문단에 대한 극복의 의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드루이드의 강림 의식 '사모니오스'에서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들을 소환하여 작중 캐릭터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자신의 글에 대한 베르나르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그 대결의 끝은 단순히 장르 문학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책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문학계가 지향해야 하는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미래 세대가 책과 가까워지게 만드는 게 핵심이라는 걸 잊지 말아. 절대 적을 혼동하지 말게."

 - 2권, p. 260 中에서 -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내용이 활발하게 인용되는 구성 역시 눈에 띄는 작품이다. 과거 [개미]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의 창작의 보고 역할을 한 이 책의 내용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상상력이 공상이 아닌 현실과 기술에 기반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죽음의 다양한 형태와 관념을 다양한 지식을 통하여 전달함으로써 그가 이 작품에서 만들어내는 세계가 단순히 동떨어진 개념으로만 볼 수 없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의 '폭스 자매'의 심령술이라든지 일본의 '소쿠신부쓰(즉신불)', 강령술에 대한 코난 도일과 해리 후디니의 견해 차이와 같은 지식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의 상상력이 단순한 허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날개를 달 수 있고, 또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관점을 한 곳에 모아 놓음으로써 그 누구라도 공감하는 대목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사실에 대한 베르나르의 가공을 거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그의 창작에 대한 원동력이자 독자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이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이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의 몰입의 단초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 전개에 따라서 이 문장이 단순히 추리 소설의 클리셰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전 작품 [잠]은 수면을 통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음에 반하여 [죽음]은 그 자체의 반복을 통하여 생사(生死)를 넘나들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물음은 그러한 영역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관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물음이 있기에 여전히 가브리엘은 생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단순히 죽음이라는 상태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말미에 이러한 질문이 다른 질문으로 바뀌는 부분은 그러한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왜 죽었지?>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신비로운 질문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왜 태어났지?>

 - 2권, p. 313 中에서 -

 

 이쯤되면 [죽음]은 베르나르가 가브리엘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의미를 다루면서 동시에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의 시간을 가져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죽음에 대한 가정 및 체험 의식을 통하여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우리로서는 그의 시도가 낯설지 않다. 그래서, 프랑스 문단에서의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함께 그의 창작의 보고인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동원하여 완성된 이 작품은 죽음을 그저 막연한 공포 또는 외면하는 상황 속에서 유쾌한 이야기를 통하여 오히려 죽음 안에서 나름의 철학을 구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누가 날 죽였지?'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내용과 함께 죽음을 통한 삶의 오묘한 진리를 이끌어내는 이 이야기는 '과연'이라는 찬사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면 우리는 아마도 가브리엘의 묘비명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살아 있고 당신들은 죽었다.>

 - 1권, p. 227 中에서 -

 

 과거의 한 모임에서 죽음 이후에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단호하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며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 과학도의 대답을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죽음]에서도 가브리엘의 형인 토마가 죽음에 대한 단호한 부정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죽음을 그저 종교가 만들어낸 공포의 일종이라 말하는 이도 작품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이 작품에서 생각하는 죽음은 삶의 끝이자 완성으로의 죽음이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시 각자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인하여 잠시나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올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막연한 삶에 대한 의문을 갖고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보다 명확한 기준선을 그으면서 그것을 기점으로 현재와 과거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그러한 것이 익숙하지 않기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통하여 베르나르가 도출한 삶에 대한 철학에도 귀를 기울여 보면 이 작품은 단순히 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더불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오히려 제목과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책으로 다가오게 된다.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은 유일무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다. 비교하지 말고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 2권, p.311中에서 : 죽음을 통한 가브리엘의 배움 중 여섯 번째 항목 -

 

g*******7 2019.07.07. 신고 공감 13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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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삶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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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날 죽였지?> <죽음>의 첫 문장이다. 작품 속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인기 있는 소설 작가이다. 자다 깨서 머릿속에 남은 책의 첫머리를 열어젖힐 단순하지만 두근거리는 첫 줄을 찾아낸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에서는 다시 마지막 문장을 찾으며 극을 구성하려고 한다. <누가 날 죽였지?>와 <나는 왜 죽었지?>를 고민하며 작품을 계속 구성해 나간다. 그러다 자신의 후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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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날 죽였지?>

 

<죽음>의 첫 문장이다. 작품 속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인기 있는 소설 작가이다. 자다 깨서 머릿속에 남은 책의 첫머리를 열어젖힐 단순하지만 두근거리는 첫 줄을 찾아낸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에서는 다시 마지막 문장을 찾으며 극을 구성하려고 한다. <누가 날 죽였지?>와 <나는 왜 죽었지?>를 고민하며 작품을 계속 구성해 나간다. 그러다 자신의 후각이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병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우상 여배우 헤디 라마를 닮은 영매 뤼시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질문은 소설 속 첫 문장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에 팬 층이 두터운 베르나르 베르베르. 책의 재미는 걱정도 하지 않고 예약 구매를 했다. 역시 그답게 책을 잡는 순간부터 2권까지 단 번에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이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여서 그런지, 그를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가로서의 고민, 어려움에 대해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작가로서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풀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낄 수 있었다.

 

1. 죽었지만, 슬프지 않은..

 

죽음=슬픔. 당연한 공식이라 여겼는데, <죽음>에서는 죽음이 슬프거나 괴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작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도 모르는데도 극도의 감정으로 슬픔, 좌절, 분노를 내뱉지 않는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자신의 죽음을 궁금해는 하지만, 자신의 죽음의 원인을 찾는 태도는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잡는 정도의 궁금함과 비슷해 보였다.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마음껏 떠도는 상태도 즐기는 듯하다. 죽고 싶은데 죽지도 못하게 해서 괴로워했던 그의 할아버지 이냐스도 그러했다.

 

죽음=이별. 이 공식도 깨진다. 오히려 죽었기에 가브리엘은 할아버지도 만나고, 사랑스러운 여인 뤼시도 만날 수 있게 된다. 또 살아있을 때와는 다른 시각으로 주위 사람들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동경했던 작가들, 배우들, 유명한 인물들까지 만나고 그 상황을 충분히 즐긴다.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영혼만 떠돌게 된 상황.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죽기 전에 해야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쪽에 조명이 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죽은 사후 세계도 '지금, 여기, 이 순간'으로 여기며 떠도는 영혼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는 모습이 눈에 더 들어온다.

p.232

 

죽음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과 연결 짓고 출생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정반대야. 죽음은 우리를 모든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해 주는 거니까.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되지. 가벼워지는 거야. 반대로, 곰곰이 따져 보면 태어나는 게 그리 조은 것은 아니야. (생략) 태어나 최소한 13년 동안은 가족과 선생님, 친구들에 의해 네 정신적 틀이 형성되니까.

 

p.232

 

저승에서 살다 보니 갈수록 그런 확신이 드는구나. 죽음은 해방인 반면 출생은 자신을 꽃피우기 힘든 억업적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믿음이 확고해져. 결국 내가 진정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채 실패한 삶을 살 위험이 큰 거지.

 

환생을 거부하고 계속 떠돌고 있는 주인공의 할아버지 야나스를 통해서 작가가 생각하는 죽음과 탄생, 삶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그들을 보며 권태야말로 떠돌이 영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p.264 

 영매인 뤼시는 영혼들의 환생을 돕는 일도 한다. 괜찮은 조건으로 환생하는 것을 선택한 수 있는데도 떠도는 영혼으로 있는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가브리엘 역시 환생이 아닌 영혼으로 자유로이 사는 것을 선택한다. 죽음은 선택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면 그 이후의 삶은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이는 읽는 사람들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나 죽음은 선택이 아닌 필수과정이다. 그 죽음을 너무 슬프게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죽던 살던 그 과정을 잘 수행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2.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상상력' 넘치는 스토리가 아닐까? 두렵고 알 수도 없는 사후 세계를 마음껏 그려낸 <죽음>. 자유롭게 공간 이동을 하고, 다른 이의 몸에 들어가 보고, 유명 연예인을 훔쳐 보고 하는 정도는 이제 상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도 식상한 느낌이다. 이 정도 상상을 살짝 넘어 나폴레옹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인슈타인을 불러내 상상을 초월하는 기계를 만드려고도 한다. 주인공 가브리엘은 자신의 소설에서 이러한 상상력을 담아내려 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그가 죽은 이유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상력이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p.287-288

'자네는 단순히 SF 소설 한 편을 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네가 수집한 자료와 자네의 상상력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거라는 얘기야. 진짜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분야에 매몰되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이 자네는 해답을 찾아냈으니까.'

(생략)

'그냥 소설인걸요. 허구잖아요.'

'물론. 하지만 다시 말하네만, 누군가 자네의 공식을 테스트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분명히 자네 책에 나온 <불로장생의 샘> 연구소를 세우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는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또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상상에도 책임이 따를 수 있다는 메시지가 이 책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이라면 가상이라고 하더라도 책임감 없이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 말이다.

 

3. 산다는 일

 

결국, 죽음을 이야기 하면 할 수록 사는 것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책 첫 질문이 <누가 날 죽였지?>였다면, 마지막 질문이 <나는 왜 태어났지?>이다. 죽고 나서야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주위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가브리엘. 우리도 무엇인가를 잃고 난 후에야 소중한 것에 대해 되돌아 보게 되고 거기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하기 전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내게 주어진 사명과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가는 자세가 필요함을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1.

P.71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만들려면 육체를 잘 보살펴야 한다.

 

p.265

이 육신이 전부인 줄 알았으니...

 

산 자들에게 소리쳐 경고해 주고 싶다. <당신들은 정신을 가진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정신이다.>

 

죽음2.

 

P.9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P.198

 

'체념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돌로레스가 반기를 든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은 해야겠지만 절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데는 모종의 숨겨진 의도가 있으리라는 걸 기억하라는 말이에요. 실수 없이 앎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경험은 오랜 기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 우리는 누구나 경험을 해봐야 해요. 그리고 나서 그 경험의 결과물을 확인해야 비로소 행동을 바꿔야겠다는 자각이 오죠. 그래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요.'

 

P.301

주인공이 말하는 거야. <지난 삶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웠나?>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는 메시지, 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생각하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는다. 죽음을 이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게 한 <죽음>이었다.

p******0 2019.07.07. 신고 공감 10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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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1,2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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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 초 만에 죽음의 일곱 단계를 겪는다. 충격, 부정, 분노, 타협, 슬픔, 체념, 수용. 각각의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욕이 후렴구처럼 따라붙는다. (…) 그는 망연자실한다. 그리고 일곱 단계를 순서가 조금 다르게 다시 겪는다. 분노, 부정, 수용, 체념, 슬픔, 타협, 충격. (1권 p. 32~33) 언제인가 “후회 없는 삶”이라는 주제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교육생의 자격으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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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 초 만에 죽음의 일곱 단계를 겪는다. 충격, 부정, 분노, 타협, 슬픔, 체념, 수용. 각각의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욕이 후렴구처럼 따라붙는다. (…) 그는 망연자실한다. 그리고 일곱 단계를 순서가 조금 다르게 다시 겪는다. 분노, 부정, 수용, 체념, 슬픔, 타협, 충격. (1p. 32~33)




언제인가 후회 없는 삶이라는 주제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교육생의 자격으로 자리에 앉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 기억에 선명히 남기도 했으나, 그날 각 조별로 분배되었던 주제가 참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남기도 했다. 6개의 조에 분배된 후회 없는 삶은 부모”, “성취”, “명성”, “사랑”, “기여그리고 죽음이었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느껴졌던 죽음이란 내용의 토의를 하다가 순간 순간 울컥했던 감정, 남겨두고 갈 것들에 대한 미련 등을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이 책을 읽으며, 그날의 감정을 고스란히 떠올린 것은 과연 우연일까 그렇지 않을까. 나는 죽음을 만나게 되면, 어떤 순서로 일곱 개의 단계를 겪게 될까. 이 책을 읽는 순간마다 나는 그렇게 일곱 단계를 고민해보았다. 문득 가브리엘의 마음은 이렇게도 알아채려 노력하면서, 정작 나는 내 마음은 알려고 노력해왔는지 고민이 들었다.







-       죽음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과 연결 짓고 출생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정 반대야. 죽음을 우리를 모든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해 주는 거니까.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되지. 가벼워지는 거야. 반대로, 곰곰이 따져 보면 태어나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니야. 정신의 가족을 떠나 네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모인 육신의 가족에 안착하는 일이니까. (1 p. 232)


아마 내가 최근 죽음과 관련된 몇 몇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공감하지 못했을 말일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올해 초에 죽음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었다. 그 후 내가 얻은 결론은제대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제대로 살았다는 증거였다. 혹은 정 반대로 삶이 지긋지긋했거나. 가브리엘의 할아버지는 제대로 살았었기도 했고, 삶이 지긋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3일간 쉬지도 않고 날아다녔다고. 물론 죽음이 모두에게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비통한 상태인 사람이 더욱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죽음의 순간을 맞아 세상을 떠나는 날엔 이냐스처럼 홀가분히 훌훌 터는 사람 이길 바란다. 물론 그 바람에는 엄마 없이 혼자 남게 될 내 아이가 부디 안정적인 상태 이길, 나와의 이별로 죽을 듯 힘겨워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는 통증이 오거나 쾌감을 느끼는 순간에만 자신의 육체를 의식하게 된다. 내향성 발톱 때문에 고생을 해봐야 발톱이 자란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위장염을 앓아봐야 내장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러한 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1p. 38)


-       멈추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과연 진보일까? (1 p. 212)


이 책을 읽으며 어떤 문장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장이 맞나 싶을 만큼 낯선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떤 문장은 아프게 내 마음을 때리기도 했다. 특히나 멈추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삶의 무의미를 고민하는 내용은 마음이 아팠다. 책을 다 읽은 후에 그가 연명치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사실은 그 단서가 없이도 그의 글에서 이미 연명치료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안락사를 반대하는 이들이 말하는 존엄성을 위해 연명치료는 본인이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더욱 공감하고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안락사를 선택한 누군가가, 멈추고 난 자신의 육체를 돌아보며 그때서야 뼈저리게 아프다면? 그 아픔은 결국 죽음을 선택한 사자 본인이 감내해야 할 몫인 것일까?



결국 우리 역시, 죽음을 겪지 않는 한 그 어떤 것조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고 인간의 유한성을 돌아보게 될 뿐이다.



-       악인들은 운만 좋은 게 아니야. 발 벗고 나서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니 어쩔 도리가 없는 거지. (2 p. 172)


-       정의. 정의라, 참  말은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지! 당신들이 정의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죠? / 우리는 산 자들의 법정들에서 저지르는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해 죽은 자들의 법정을 만들고 싶은 거에요. (2 p. 195)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이 답답해졌던 부분을 고르라면 나는 고민 없이 이 부분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여자들은 대개가 남자들보다 똑똑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180도 달라져 어린아이보다 더 순진해지기도 하지(2 p. 137) 라는 문장에서는 아직도 세상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언제 인가부터 당연한 듯, 악인들에게 행운이 따르고, 그들을 지키는 견고한 사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가 하는 마음에 씁쓸함도 느껴졌다.



글쎄,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책에서만은 그런 세상을 안 만날 수는 없나. 하는 막연한 비합리적 평화주의사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제인가 나에게 누가 그런 말을 했다. 나 같은 애가 하나라서,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거라고. 하지만 문득 생각해본다. 분명 어딘가에는 나 같은 생각으로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이 분명 있으리라고. 그래서 산 자들의 법정에서 저지르는 실수를, 죽은 자들이 바로 잡으려 하는 일이 없기를, 산 자의 실수는 산 자들이 충분히 알아서 해결하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을 읽었다.







-       인간의 삶은 짧기 때문에 매 순간을 자신에게 이롭게 쓸 필요가 있다. /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는 도리어 우리를 완성시킨다. 실패할 때마다 뭔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 유일무이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다. 비교하지 말고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2. p. 311)


어쩌면 저자가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말은 이 말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뤼시가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 되뇌던 말처럼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p. 142)>라고 되뇌며, 우리도 오늘을 소중히 살라고, 그저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라고.


가브리엘의 입을 빌려 그가 전한 말들 모두가 마음에 울림을 주었으나, 특히나 나는 비교하지 말고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가장 가슴에 닿았다. 나는 내 스스로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종종 바닥 치는 자존감을 만났고, 자격지심으로 잘난 이들을 그대로 봐주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마음에 닿은 이 감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적어도 내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어느 날,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2 p. 301)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사람이 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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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 2019.07.07. 신고 공감 9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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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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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버린 책. 죽음.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품을 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뇌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때론 진실보다 사랑이 중요하듯. 작품의 의미보다 재미가 더 가치 있을 때가 있는게 아닐까? 죽음을 이야기 하는데 슬프거나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게 아니라 홀가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게하는 글. 살아있음이 즐거운 일임을 느끼게하는 소설이었다.고전을 아주 쬐금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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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버린 책. 죽음.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품을 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뇌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때론 진실보다 사랑이 중요하듯. 작품의 의미보다 재미가 더 가치 있을 때가 있는게 아닐까? 죽음을 이야기 하는데 슬프거나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게 아니라 홀가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게하는 글. 살아있음이 즐거운 일임을 느끼게하는 소설이었다.

고전을 아주 쬐금 읽고 이런 이야기는 우습지만, 계속 느끼는 점은 신이 인간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하고 있고 천재적인 이들이나 작가들이 그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작가로서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대목들이 있었다. 죽음을 종착지로 생각하고 두려워 하며 가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말이다. 그렇게 한 세대가 끝나고 또 새로운 세대가 생겨나고. 다만 함께 존재하는 다른 종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배려심도 가지고서 살아가라고. 너무 과거를 궁금해 하지도 말고 말이다.

결국 지금 살아있는 순간을 사랑하라고 말이다.





p******0 2019.05.24. 신고 공감 6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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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대회]★베르나르 베르베르★『죽음』
"[리뷰대회]★베르나르 베르베르★『죽음』" 내용보기
저자가 사후 세계를 다룬 소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작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로 저자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때문에 <죽음>이 보여준 상상력이 창의적이지는 않다. 사실 저자의 신작들 중 몇몇은 이전의 소재를 답습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맛보기는 어려워진 것일까.  비슷한 시기 정유정 작가의 신작 <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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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사후 세계를 다룬 소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작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로 저자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때문에 <죽음>이 보여준 상상력이 창의적이지는 않다. 사실 저자의 신작들 중 몇몇은 이전의 소재를 답습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맛보기는 어려워진 것일까.

 

비슷한 시기 정유정 작가의 신작 <진이 지니>가 비슷한 소재인만큼 비교도 되었다. 어느 소설이 우위에 있다 할 수는 없다. <진이 지니>는 읽다보면 작가의 화려한 말솜씨에 놀라게 되고 <죽음>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폭넓은 지식 스펙트럼을 맛 볼 수 있다. 공통점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다.

 

 

 

 

‘누가 날 죽였지?’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가 뱉은 첫마디다. 인기 추리 작가 가브리엘은 죽음에 관한 소설을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평소 작업하는 비스트로로 가던 중 갑자기 아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서둘러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거울에 자신이 비치지 않고 창문으로 뛰어내려도 이상이 없다. 죽은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 뤼시 필리피니와 협업해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추리 소설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숨막히는 긴장감이 아닌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영혼 세계 묘사는 경쾌하고 흥미롭다. 토마스 에디슨, 코난 도일 등 역사적 유명인물들의 영혼으로 만나는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저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불교의 윤회사상처럼 한 세대가 끝나면 새로운 세대가 생겨나니 죽음을 두려워 말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며 한낱 미물인 인간으로 다른 생태종에 피해를 주기 말라고도 한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교조주의에 빠진 평론가와 순수문학 작가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만의 필력과 전개능력은 명불허전이다. 그의 팬이라면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l*****0 2019.06.04. 신고 공감 6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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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건가 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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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웰즈!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가로 데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자국인 프랑수 문단의 평론가에게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매년 꾸준한 리듬으로 신간을 발표해 대중에게는 사랑을 받고있는... 이 책을 쓴 베르나르와 매우 흡사한 경우다. 혹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가? ㅎㅎ 이 작가, 가브리엘 웰즈가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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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웰즈!

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가로 데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자국인 프랑수 문단의 평론가에게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매년 꾸준한 리듬으로 신간을 발표해 대중에게는 사랑을 받고있는... 이 책을 쓴 베르나르와 매우 흡사한 경우다. 혹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가? ㅎㅎ

 

이 작가, 가브리엘 웰즈가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눈을 뜬다.

그런데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해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창문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이상이 없다.

 

죽은걸까? 그럼, 누가 날 죽인걸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 뤼시 필리피니를 만나 소설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얼핏 오래전 영화 '사랑과 영혼"을 연상시키는 도입부지만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이에 그치면... 실망이 아닌가?

 

장르문학가로 자국 프랑스에서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가-우리나라는 이외수, 류시화 정도(?)-로서 섭섭한(?) 마음이 소설 곳곳에 프랑스 문단에서 벌어지는 장르문학과 순수 문학의 대립을 거의 전쟁 수준으로 묘사해 놓았는데, 이는 장르문학가로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m******1 2019.06.04.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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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하면, 부딪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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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웰즈!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가로 데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자국인 프랑수 문단의 평론가에게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매년 꾸준한 리듬으로 신간을 발표해 대중에게는 사랑을 받고있는... 이 책을 쓴 베르나르와 매우 흡사한 경우다. 혹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가? ㅎㅎ 이 작가, 가브리엘 웰즈가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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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웰즈!

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가로 데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자국인 프랑수 문단의 평론가에게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매년 꾸준한 리듬으로 신간을 발표해 대중에게는 사랑을 받고있는... 이 책을 쓴 베르나르와 매우 흡사한 경우다. 혹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가? ㅎㅎ

 

이 작가, 가브리엘 웰즈가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눈을 뜬다.

그런데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해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창문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이상이 없다.

 

죽은걸까? 그럼, 누가 날 죽인걸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 뤼시 필리피니를 만나 소설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m******1 2019.06.04.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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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고통의 기억이 뇌속에 있는게 아니라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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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었다. 나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편집증있는, 평단과 정반대의 대중의 인기를 가진, 비순수문학인 장르문학을 쓰는, 플레이보이지만 미국여배우이자 발명가였던 헤디 라마만을 동경하던 작가 가브레일 웰즈는 어느날 죽었다. 그리고 만난 인물은, 건강염려증에 한 남자 (사미)만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헤디 라마를 똑닮은 영매 뤼시 필리피니와, 폴란드 이민자였고 사진사
"기쁨과 고통의 기억이 뇌속에 있는게 아니라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내용보기

나는 죽었다. 나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편집증있는, 평단과 정반대의 대중의 인기를 가진, 비순수문학인 장르문학을 쓰는, 플레이보이지만 미국여배우이자 발명가였던 헤디 라마만을 동경하던 작가 가브레일 웰즈는 어느날 죽었다.

그리고 만난 인물은, 건강염려증에 한 남자 (사미)만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헤디 라마를 똑닮은 영매 뤼시 필리피니와,

폴란드 이민자였고 사진사이다가 경찰이 된 할아버지 이냐스 웰즈를 만난다. 그러면서 각자 누가 살인범이고 사미는 어디있는지를 알아내는 조건으로 서로 협력을 하게 되고....

 


(헤디 라마, 1940년대의 세계적 미녀배우이자 플레이걸, 그녀는 CDMA기술발명으로 와이파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야기는 범인을 찾는 후더닛인듯 보이나, 많은 내용은 문학평단에 대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풍자와, 죽음과 생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다. 다소 직설적인 내용으로, 문단과 대중의 평가가 반대이고 장르문학은 인정받지못하는 등의 문단의 실태와 함꼐, 어려운 소설보다 쉬운소설을 더 좋아하면서도 반대로 대답하는 현학주의 독자들에 대한 풍자를 섞으며 그 중간에 간혹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인용하며 진지와 유머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 

 


 


(1권 140~141)

 

...나는 살아있고 당신들은 죽었다....1권, 227

...인류가 가진 많은 문제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죽음이 두렵지않다고 주장하는 성직자들이 심약한 영혼들을 통제하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2권.27

 

죽음은 부정적인 것, SF나 장르문학은 소모적인것 그러나 반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해방이며 삶은 족쇄이고, 과학적 상상력을 촉진시킨 SF는 실제 과학의 모태가 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이렇듯 정반대의 것들이 계속적으로 나오지만, 반대로 보는 경우엔 그 상태가 정반대가 된다. 그리고 또한 서로를 보완하는 모습을 보인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k*****k 2022.05.31.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