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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mate3416/222148480063 < 책방 하고 싶은 면서기 >
내게 친절한 마음을 주는 직원의 생일이 지나간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녀는 다행히 책을 읽는 사람이어서 선물을 고르러 서점으로 갔다. 그리고 후회했다. 어쩌자고 그 위험한 생각을 했을까. 책선물을 하겠다는 생각을. 인간행위 가운데 가능한 촉을 모두 곤두세우고 다각적 관점으로 접근, 고심해야 하는 것이 ‘선물하는 것’이다. 고도의 집중력과 사고력이 요구된다. 만만치 않은 에너지와 시간과 금전도 필요하다. 왜냐고? 그럼에도 실패하니 그렇다. 건네는 이의 설렘과 받는 이의 기쁨이 같은 크기로 짝을 이룰 확률이 아주아주 적기 때문이다. 전, 중, 후 그 일련의 모든 과정이 선물하는 이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섭섭해 하거나 야속해 할 필요 없다. 도박과도 같은 것임을 이미 알고 시작하지 않았는가. 한 방 제대로 먹히거나 숱하게 실패하거나.
책선물은 더더욱 그렇다. 일단 선물 받을 사람이 책 읽는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적고, 희박한 확률로 그이가 책을 읽는다 해도 책 취향을 정확히 짚어내기란 서른한 가지의 아이스크림을 살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기적적으로 취향을 맞추었다 해도 일 년에 6만 5천 권, 하루에 200권씩 새 책이 출간되는 책바다에서 그이의 마음에 쏙 드는 한 권을 선물하는 것이 무슨 수로 가능하겠느냔 말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갈팡질팡과 첩첩산중과 오리무중과 암중모색과 들었다놨다의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친절한 그녀를 생각하며 서점의 서가를 살피는 것을, 상냥한 그녀가 이 책 『오늘만은 나랑 화해할래요』를 어찌 읽을지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품는 것을, 그러니까 아무래도 실패할 책선물을 한 번 더 고집한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원래 가성비 못 따지고 성공확률 상관없는 결정을 고수하며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안녕. 나는 지금 국경을 지나고 있어. 내 몸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뜻이야." 오늘만은 나랑 화해할래요, 는 이런저런 짐작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지금까지는 다투어 왔다는 것, 이제는 용기를 내었다는 것, 어쩌면 일시적인 화해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도 어쨌거나 화해는 해보겠다는 것 등등. 처음 한 동안은 이 글들이 남자의 것이라는 걸, 산티아고 순례기라는 걸 알지 못했다. 다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곤소곤, 해질녘 넓고 옅게 사위는 주황빛의 글들이다. 당찬 선언과는 달리 화해를 이뤄내기 위한 적극적인 제스처는 없다. 저자와 저자 자신이 작정하고 마주앉아 지난날을 치열하게 뜯어본다거나 그 때 왜 그랬는지를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이해한다, 괜찮다 같은 말조차 없다. 그저 산티아고의 까미노를 둘이 걸을 뿐이다. 요란스럽지 않게, 침착하고 차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두어 발짝의 거리를 두고. 그렇게 조용한 걸음을 시작하며 저자는 ‘마침내 홍수처럼,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마음들에 영락없이 벌거벗은 한 명의 인간’이 되어 서서히 자신에게 집중한다. ‘나는 결코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낙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앙상하고 가여운 글씨로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고 끝내 그 고백을 이 삶 속으로 고스란히 실천해 옮겼노라고 또박또박 새겨놓겠다’는 선언을 한다. ‘어엿한 자기 자신으로 삶을 살아내는 비결은 내게 일어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나의 방식에 철저히 의존하게 된다는 사실’을 침묵의 길 위에서 배운다. ‘마음에 빈곳이 없다면 풍경은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단단해 진다는 건 내 빈곳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 욕심이 아니라 작은 호기심, 확신이 아니라 희미한 희망이라도 안고 있다면 짙은 안개 속에서도 걸음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내 그 길의 끝에서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산티아고의 까미노가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아주 달콤한 꿈’이었음을 회상한다.
감상적인 글이다. 어스름한 새벽이나 빛이 모두 진 밤에 읽으면 좋을 책이다. 모처럼 마음이 붕― 뜰 때, 어쩌자고 자꾸 멜랑콜리해지려 할 때 손에 들면 괜찮겠다. 그나저나 그녀 마음에 들었으려나, 이 책도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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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먹은 시점에서 떠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비록 그 무엇도 즐겁지가 않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했지만,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떠났다던 이의 기록에서 닿은 장소에 대한 부분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목적지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지만 이제껏 읽어온 책은 으레 자신이 닿은 장소들을 꼼꼼히도 담아내곤 했었다. 다른 형태의 기록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왠지 내 자신이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때였다. 반갑게도 내 눈에 확 들어온 단어가 하나 있었다. 순례자. 한국인들이 참 많이도 찾는다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그는 걷고 있었다. 며칠 동안 걸을 작정으로 이 곳에 온 것일까. 정보에 집착하며 그간 독서를 해온 탓인지 글이 조금은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20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게를 자랑하는 배낭을 짊어진 채 꼬박 43킬로미터를 첫날부터 걸었다는 문장이 초반에 등장했지만, 나는 이를 어찌 해석하면 좋을지를 몰랐다. 하루에 43킬로미터를 걷는다는 건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것과도 같다. 걷기를 즐기는 나도 10킬로미터를 넘게 걸으면 발바닥이 아프고 입이 벌어진다. 산티아고에선 물론 걷기 외에 달리 할 게 없다. 자신이 점 찍어놓은 숙소 혹은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걷고 또 걷는 게 그 곳에서의 일과다. 단조롭기 짝이 없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힘들 여정일 것이다. 읽는 나도 힘이 들었다.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적잖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여행서적은 결코 아니다.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사진도 없었다. 멋드러진 도시나 길의 풍경을 기대했다는 큰코다치기 딱이다. 그 흔한 사람을 일부러 배제하기라도 마음먹은 건지, 사진 속 세상에는 사물뿐일 때가 잦았다. 저자에게 의미가 있으면 된 거다. 책으로 엮긴 했지만 독자를 염두했다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철저히 따르는데 치중한 모양새다. 글쓰기가 지닌 효능 중 하나가 치유인데, 왠지 저자는 치유 효과를 톡톡히 누렸을 것만 같았다. 생각에 골몰하면 사람이 잘 안 보인다. 아마도 혼자인 순간이 많았을 거 같다. 대화가 이따금 등장했는데, 읽다 보면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당신 혹은 제3 자와의 대화가 아니었다. 내면의 선과 악이 자신에게 속삭였다. 일종의 갈등이 치열하게 내면에서 일었던 것이리라. 대화는 끝났음에도 어떠한 결론이 나지 않은 경우도 잦았다. 좋건 싫건, 상반되는 요인은 모두 자기 안에 있었다. 원하는 시점 언제든 소환하면 끊겼던 대화도 바로 이어진다. 걷는 내내 치열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라며, 난 저자를 부러워했다. 걷기를 마무리 짓는다 하여 달라지는 건 없다. 한국에 두고 온 상황이라 하는 건 단지 잠깐 미루어 둔 것에 불과했다. 한국에선 다시 같은 시점에서 혹은 그보다 더 뒷걸음질 친 단계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그래도 사고의 부재로 시름시름 앓는 게 일인 지금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나을 듯했다. 비록 사진에 박하게 굴었지만 저자 곁에도 함께인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두고 온 모자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일념 하에 저자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왔다는 한 인물의 이야기에 마음 적셨다. 함께 걷되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각자의 보폭을 존중해주겠다는 대화로 첫 단추를 낀 관계도 있었다. 나의 얼굴은 볕에 한 쪽만이 유독 검게 그을렸고, 상대는 계획보다 무리해서 걸었던 지 지친 표정이 역력했을 때도 서로 간의 대화는 가능했다. 진실된 마음은 비교적 짧은 시일 안에도 통하는 법이라는 걸 책을 읽으며 느꼈다. 뭐니뭐니해도 걸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은 스스로에게 대한 자각이었다. 타인에겐 한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조차도 자신에겐 엄격하다. 단지 엄격하기만 하면 다행이다. 남들에게 뱉지 못하는 모진 말로 제 정신을 병들게 만들고, 끊임없는 비교 끝에 자신에게 비참함을 선사하는 일이 얼마나 잦았던가. 산티아고에서의 하루하루는 물론 즐거운 적도 많았겠지만 고됐다. 걷고 또 걸어도 보이지 않는 끝.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증에 시달리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끝까지 걸어낸 건 남 아닌 나였다. 수많은 생각, 하루에 수십 번도 들었을 관두고 싶다는 욕구를 잘 다스려가며 마침내 다다른 것이다. 이미 화해에 성공했을 수도 있다. “조금만 더”라는 말을 할 때 이미 내 몸은 그 말에 수긍했고 순응했다. “그만”이라며 몸이 멈추어 섰을 땐 반대로 마음 또한 더는 재촉 않음으로써 몸을 존중하는 길을 택했다. 경험은 자아를 성장시킨다. 길에서 나는 비로소 나와 하나 되는 법에 눈을 떴다. 또 다시 간접 경험이다. 이로써 만족하고 모든 걸 내려놓길 바라는 심보는 욕심일 것이다. 한껏 부풀어 오른, 떠나고픈 마음을 주체하려면 한동안 애 꽤나 먹을 거 같다. 괜찮다. 너무 평온하면 발전이 없다. 수시로 대립하는 가운데 난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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