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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행복을 바란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들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행복이란 참으로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그 의미가 모호한 말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사람이 사는 목적을 '행복'에 놓았던 최초의 철학자다. 그가 행복이라는 것을 그토록 중시했으니 당연히 거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되어야할 터.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정의 내리게 된다. 한 마디로 '중용'이라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이다. 그 때 그가 떠올린 것은 물의 이미지였다. 바람 한 점 없어 파문 조차 생기지 않는 반듯한 물. 그 어떤 타자의 침입이나 간섭이 없는 그건 그대로 평화였다. 그리스 사람들이 꿈꾸던 천국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행복의 이미지는 더욱 명확해진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유토피아를 아르카디아라고 불렀는데 그건 푸른 하늘 아래 한껏 펼쳐진 들판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더없이 조용한 전원적인 이미지가 그들이 꿈구던 천국의 모습이었다. 후일 스토아 학파가 꿈꾸던 '아파테이아' 역시도 사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이러한 이미지를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상태로 여겼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비밀 한 가지를 말해준다. 즉 우리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고독'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스마트 폰이나 SNS로 잠시라도 타인과 연결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세상에 존재하느라 이것이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원래 우리의 조상들은 내내 그것을 꿈꿔왔다. 로마의 웅변가로도 유명한 카토는 이런 말도 남겼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로우며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발하다."
이런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어쨌든 세상은 너무도 다르게 흘러오고야 말았다. 지하철이나 버스 그리고 거리에서도 잠시도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지금 우리에게 고독이란 건 가장 가까이 하기 싫은 것들 중 하나가 된 것만 같다. 이런 시대에 그 고독을 소망하며 그 고독이 가져다 주는 평화를 내내 작품 속에다 각인시키려는 작가가 하나 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필립 지앙 이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눈썰미가 제법 되시는 분들은 아마 이 이름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 때는 우리나라 카페의 한쪽 벽면을 몽땅 차지하기도 했던 영화 포스터의 주인공 '베티 블루 37.2도"의 원작자가 필립 지앙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나쁜 것들'은 2009년에 나온 필립 지앙의 16번째 장편 소설이다. 그의 데뷔작 '베티 블루'가 1985년에 나왔으니 25년이 흐른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 지앙은 '베티 블루'의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온전한 자기만의 개성으로 충만했던 '베티 블루'가 작품 내내 간절하게 평화를 찾았던 것과 마찬가지로(결국 그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평화는 죽음을 통해서야 얻게된다.) '나쁜 것들'의 주인공 프랑시스도 내내 그것을 희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순 살이나 되어 이런저런 구질구질한 일들에 얽혀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P.9)
그는 조용한 평화를 갈망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자꾸만 자기를 타인과 엮이게 하고 사건 속으로 데려간다. 그는 모든 것으로 부터 한 발 물러나려고 하지만 늪이란 것이 나오려고 하면 할 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가듯이 오히려 더 안 쪽 깊숙이 들어갈 뿐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고독해지려는 주인공과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세상 사이의 투쟁과도 같다. 그런데 왜 그는 그토록 고독해지려고 하는가? 그건 그 고독이야 말로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립 지앙에게 있어 고독이란 언제나 주체성과 연결된다. 자신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면 먼저 모든 시 공간을 자신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고독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립 지앙의 견해인 것이다. 그건 데뷔작 '베티 블루'에서도 그랬다. 타인이 보기에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하는 베티 블루는 그 충만한 주체성으로 인해 오히려 사람들의 뇌리 속에 쉽게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그와 똑같이 필립 지앙은 홀로 된다는 것이 전적인 자기 충실성을 가져와 자신의 존재를 더욱 오래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고독하게 되기를 염원한다. 베티 블루의 임신은 바로 그것의 상징과도 같았다. 제목의 37.2도란 가장 임신이 잘 될 때의 체온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이 제목으로 나와야 할 정도로 임신은 베티 블루에게 있어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임신에 바로 필립 지앙이 고독에 부여한 의미가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이다. 임신한 아이가 오로지 베티 블루에게만 속해있다는 점과 아이의 출생은 그대로 베티 블루의 존재 지속이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게 베티 블루의 임신은 고독을 통한 주체성의 확보와 지속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베티 블루의 임신과 같은 것이 '나쁜 것들'에서는 '글'이 된다. 주인공 프랑시스는 작가다. 작가에게 있어 글이란 자신을 그대로 실어보내는 통로라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주체성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글 또한 작가에게서 잉태되는 것이니 베티 블루의 임신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오래도록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거기엔 물론 비극적인 원인이 있다. 글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은 바로 그 상실과 고통 때문에 그가 자신만의 고독으로 돌아갈 수 없었음을 뜻한다. 소설 내내 그는 계속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고독으로 돌아가고픈 열망의 표현이었지만 그 시도는 내내 타인의 간섭과 사건들의 부름으로 죄절될 뿐이다. 베티 블루에게 출산이 허락되지 않았듯이 그에게도 고독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베티 블루가 결국 유산으로 절망해 버렸듯이 그 역시 그렇게 된다.
지금은 기피 대상 제 1호가 되어버린 고독. 하지만 고독이 그렇게 기피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우리가 순전한 고독으로 돌아가기가 영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이솝 우화에서 아무리 해도 포도를 먹을 수 없었던 여우가 '저건 분명 무척 신맛이 날거야' 하면서 일부러 더욱 외면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그리스 때 부터 인류의 소망이기도 했던 고독은 이제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독을 바라면 바랄 수록 우리는 더욱 절망하고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장정일은 예전에 '길안에서 택시잡기'란 시를 지었다. 스스로 고독을 바라여 어디론가로 떠나지만 막상 고독을 얻게 되면 그것이 불편하고 또 두려운, 그렇게 이미 달라져 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미 달라져 버린 몸이기에 그것은 더욱 저 너머의 상실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그리움을 그러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절망을 심어주면서. 이 소설은 그러한 달라져 버린 스스로에게 보내는 자조와 그로 인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의 기록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아주 아프게 아프게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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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소설이 마치 자신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 같다면 그 느낌이 어떤 것일까? 나는 객관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해야 하겠다. 작중 화자의 넋두리에 내가 앓고 있는 분노를 대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염세적인 한 마리의 늙은 짐승처럼?” 나쁜 것들!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에 말이다. 굳이 관계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지하고 부도덕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함을 고작 오만과 고독이나 즐기려는 삶의 회피자로 몰아세우면서 절에나 들어가 사시지 왜! 하는 반응같은 것. 웃을 일이 없어 입을 앙다문 사람에게, 슬픔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는 꼴 아닌가. 상처입고, 막막하고, 망가지고, 짓밟혀 신음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반응이란 고작 이런 것일 게다.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지 않은가?
육십 줄에 접어 든 소설가, 십여 년 전 눈앞에서 아내와 큰 딸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모습을 작은 딸 아이와 함께 절망적으로 지켜 본 남자, 그래서 그 고통의 환영이 온 몸에 새겨진 남자가 있다. 소설은 현실의 삶들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생의 분절을 만들어 낸 사건 전후의 시간들을 오가면서 인생이란, 운명이란 것의 회한을 쏟아 놓는다. 그것은 차마, 혹은 미처 용서 할 수 없었고, 용서 받지 못했던 것들의 얘기이자, 어쩌면 삶을 구성하는 본질의 모습들일지도 모른다.
영화배우가 된 둘째 딸, ‘알리스’와의 끔찍할 정도의 반목, 그 근원에는 죽은 아내‘조아나’의 일기가 있다. 남자의 외도사실을 꼼꼼히 적어 놓은 일기, 알리스는 남자에게 ‘추잡한 인간’이라 길게 악을 써대며 집어 던진다. 남자는 이 우발적이고 일회적 외도의 사실을 아내에게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런 딸아이가 실종 되었다는 소식을 사위로부터 전해 듣게 되고, 노년의 남자는‘안 마르’라는 대학동창인 여자에게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탐정 일을 의뢰한다. 아내를 잃고 난 후, 이년이 지나 결혼한 아내‘쥐디트’는 남자의 고통에 뛰어들지 않으며, 자신의 일로 바쁠 뿐이다. 더 이상 그는 딸에게도, 사위에게도, 아내에게도, 아무런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이자 남편일 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동정도, 연민도 스며들어 있지 않다. 그저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며, 자신들의 고통과 욕망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탐정 일을 맡겼던 안 마르에게 살인죄로 형량을 채우고 출감하는 아들‘제레미’가 있고, 그 상처 받은 영혼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 만큼 고통스러운 존재의 음울함을 발견한다. 노 작가와 마음의 손상으로 짓밟힌 젊은이와의 교우는 서로를 보면서 현실을 견뎌내는 위안이 된다. 청년의 트라우마가 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증오에는 역시 모자(母子)의 치유할 수 없는 불용(不容)이 있다.
소설에는 이처럼 부모와 자식의 얘기가 있고, 그 자식들에게 애를 먹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런 운명에서 벗어난 부모는 드물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다. 마약에 절어 살던 딸 내외의 거침없는, 무례한, 교활한 삶의 방식, 그러한 것까지 인정해야 했던 남자에게 딸의 실종은 지독히 잔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실종 사건이란 것이 단지 여배우로서 인기에 대한 병적 집착 때문에, 대중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벌인, 소설가 아버지를 제물로 삼은 딸 내외의 자작극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심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타인들이 알기나 할까?
이해 할 수 없고, 이해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싸여 혹여라도 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 사소한 말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남자에게 나는 동류의 연민을 느낀다. 한 때 남자의 소설을 읽고 독자로서의 열정을 보여 주었던 아내 쥐디트의 무심함이 남자의 입에서 “나쁜 년, 내가 지금 『전쟁과 평화』나 『길 위에서』 같은 작품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니.”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래서 미행을 붙일 만큼, 피폐해진 남자의 불안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여자의 이기심에 또한 불용의 장막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 인한 감정의 소비에 일말의 동정을 보낼 여지는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그만 움찔해질 것 같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반은 자신의 내면에, 나머지 반은 자신의 개를 향해”있다는 청년 제레미에 대한 조롱의 견해는 남자에게 또한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한다. 점점 용서하기가 힘들어진다. 완고한 늙은이처럼 변해가는 내 모습을 문득 느끼게 될 때면 그 나쁜 것들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인식에 도리질을 하게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십년 만에 다시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여전히 숨 쉴 수 있어 다행스럽다는 남자의 표현은 더더욱 가슴을 파고든다. 자식에 대한 관용과 용서는 부모로서 어쩌지 못하는 것일 게다. 갈수록 회의적이고 견유(犬儒)주의자처럼 세상과의 차단을 바라게 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궤도를 달리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한 남자의 자기 관찰적 소회(所懷)인 이 소설은 이처럼 내겐 깊은 동료적 울림으로 태연히 읽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다. 염세적인 늙은 짐승의 추악한 외침이라고 누군가 비난할지라도. 제레미가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길을 잘못 들어선 남자의 내면을 종식시키는 상징인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이 허둥대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한 소설이 있었던가? 하고 자문하게 하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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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안다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건 결단코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각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과 손등의 차이 같은 것이다. 같은 손이지만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애쓰는 것이다. 들어주는 것, 곁에 있어 주는 것, 지켜봐는 주는 것으로 말이다. 고통의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날카로운 못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일, 가시가 되는 말을 들어야 하는 일, 냉소가 담긴 시선을 받아야 하는 일들이 그렇다. 소설 『나쁜 것들』에는 이처럼 고통과 동거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을 증오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절망을 보여준다.
한 때 유명했던 소설가로, 두 딸과 아내와 행복했던 남자, 프랑시스가 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상처를 입은 아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시기를 놓치고 눈 앞에서 아내와 큰 딸이 사고로 죽는 걸 목격한다. 둘째 딸 알리스와 함께 말이다. 그 후로 남겨진 부녀의 삶은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게 전부다. 약물에 의지해서 사는 딸, 무기력한 일상을 이어가는 아버지는 서로를 할퀴며 살아간다. 알리스는 친구였던 로제와 프랑시스는 부동산 업자인 쥐디트와 결혼한다. 어쩌면 부녀에게 결혼은 새로운 삶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배우로 활동하는 알리스는 쌍둥이 엄마가 되고서도 여전히 늙은 아버지를 괴롭힌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알리스가 실종된 것이다. 프랑시스는 옛 친구이자 탐정인 안 마르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그녀에겐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다녀온 아들 제레미가 있었다. 안 마르가 알리스를 찾는 동안 그는 제레미와 시간을 보낸다. 딸의 실종의 혼란한 날들에도 프랑시스는 젊은 아내 쥐디트의 외도를 의심한다. 그는 제레미에게 아내에 대한 조사를 맡긴다. 알리스의 실종이 그녀가 의도한 것이라는 게 확인되고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안 마르와 제레미의 관계도 그렇다. 암에 걸린 어머니를 방치하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서로에게 고통을 준다. 엄마의 죽음이 아버지의 외도에서 시작했다고 믿고 싶은 알리스는 아버지에게, 죽은 아내의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며 사랑을 강요하는 프랑시스는 쥐디트에게, 어머니의 동성애을 원망하는 제레미는 어머니 안 마르에게 말이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그들에게 용서와 명분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증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생의 목적인 양 서로를 할퀸다.
그들에겐 자신만의 도피처가 필요했다. 알리스는 연기가, 프랑시스는 소설을 쓰는 일, 제레미은 개를 키우는 일이 그렇다. 딸과 아버지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어머니와 아들이란 관계는 멈추고 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잔인하면서 슬프다. 각 자의 상처를 꺼내거나 약을 바르거나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두고 다른 상처를 낸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다. 그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타인의 고통과 관련해서는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들에게 초래한 피해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놀라서 얼이 빠지고 기겁을 한다. 길거리 싸움판에서 멋모르고 휘두른 주먹 한 방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일처럼. 나는 결국 내가 그녀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서 받은 고통을 몇십배로 되갚아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걸 다 갚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108~ 109쪽
작가는 애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애도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은 아닐까. 용서가 그렇듯 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과 누군가를 온전히 용서하는 일은 우리 생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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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를 뛰어넘어누군가를 변화시키거나 감동을 전하는 글을 쓰는 것. 그렇지 않으면 <나쁜 것들>처럼 인간의 밑바닥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글을 쓰는 것. 참으로 어렵다.
<나쁜 것들>은 이러한 밑바닥을 드러내기 위해 소설가의 환상조차도 무너뜨리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모든 영역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 그들은 바로 소설가다. 그렇지만 그 글 속에 녹아있는 자전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나쁜 것들>에는 이러한 자전적 경험에 자기 파괴적인 영감들이 가득하다.
2. 왕년에 알아주던 소설을 쓰던 작가에서 글 한 줄조차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예순의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룬 <나쁜 것들>. 답답함을 토로하는 분위기에 젖어서 그랬을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지웠다가 썼다를 반복 하고 있다. 이런 행위에 지쳐 초조함이 슬며시 밀려오긴 하지만 그것조차 정반합과 유사한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을법한데…….
3. 새로 얻은 부유한 마누라. 연예인으로 성공한 딸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는 그리고 주위의 시선에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단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이 가장 잘했던 것을 해야만 하는 소설가로서의 숙명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써야만 했다. 소설가로서 회복되지 못할 불안감과 그 불안감으로부터 파생되는 의심을 품에 안은 채 이야기는 흘러갔다. 그리고 소설 속의 그도 써내려갔다. 겉과 속의 두 작가가 동시에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4. 그렇지만 <나쁜 것들>에서 드러나는 주인공의 불안과 의심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지난날 한순간의 실수로 최악의 결과를 낳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를 덮기 위해. 외로움을 극복하고 안식을 위해 마련한 새로운 환경은 또다시 그를 옥죄려고 하는 장면만 볼 수 있었다.
5. 어쩌면 인과응보라는 말을 이 소설에 빗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보면 그는 불행한 인간이다. 인생 최악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딸이었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싫은 기억을 공유하거나 기억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멀리 떼어놓아야 잊을 수 있을 텐데 이토록 가까운 사람이니.
그 기억을 공유한 딸의 입장에서도 어긋난 삶에 대한 책임을 돌릴 곳이 단 한 군데 밖에 없기에 가슴이 아플 수밖에…….그런 딸을 아내로 맞은 사위도……. 그런 사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딸도…….
그리고 과거의 잘나갔던 소설가의 이미지만을 간직한 채. 새로운 삶을 위해 찾아든 새 부인의 입장에서도 여전히 잘못된 과거 속에 갇혀있는 그의 모습. 그녀와의 아이를 거부하는 그를 이해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쁜 것은 나쁜 것들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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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블루 37.2...스물살 무렵에 가슴을 졸이며 보았던 영화다. 불에 데인듯한 흔적을 가슴에 남긴 영화이기도 하다. 그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작가의 책이라는 소개글에 망설임없이 선택한 책... 『나쁜 것들』 영화 "베티 블루 37.2"가 새겨놓은 흔적들이 새롭게 돋우어지길 기대하는 맘이었다.
솔직히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흐름과 간결하지만 함축적인 표현들은 앞뒤를 거슬러 반복해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이 전개되는 앞뒤가 툭툭 잘려있고, 상황에 대한 구차한 설명 대신, 주인공의 내면에 집착하다시피한 표현들...기대와 다르지않게 어려운책읽기였다. 소파에서 읽다 잠들어 바닥에 구겨지듯 떨어진 책을 다시 주워 읽기를 거듭했다.
『나쁜 것들』...원제목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다. 표현을 비슷하게하면,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되겠다. 60이 넘은 소설가인 주인공의 삶이 마치 누군가 씹다버린 껌처럼 바닥에 찐득이며 책속에 펼쳐진다. 아내와 큰딸을 잃은 아픔과 위로받지못한 지독한 슬픔, 버려지듯 남겨진 자신과 작은 딸 사이에 해소될 길 없는 원망과 갈증, 재혼한 아내와도 이해와 수용대신 의심과 원망 끝에 헤어지고 마는 주인공. 몸은 늙어가지만 자신의 육체적인 욕구와 갈증에 질척거리는 모습들....
그 모든 것을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유명한 소설가이고 그 딸도 세계적인 배우이지만, 그들이 누리는 명성과 삶의 윤택함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변이라는 배경처럼 책속에 파묻혀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헤어나올길 없는 슬픔과 원망...보이지않는 감옥에 갇힌 삶의 모습뿐이다. 책읽기를 힘겹게 했던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글의 짜임도 책속 인물들의 삶이 과거로부터 매여있어, 현재의 삶도 온전히 살아내지못하는 모습을 말해주는 듯하다. 위로받지 못한 과거의 아픔이 현실을 지배하고, 또다시 아픔을 겪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갇힌 삶. 과거는 과거대로 매듭짓고 현재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과 힘을 쏟아 살수없게 된 혼란스러운 삶.... 용서하고 용납하기엔 너무나 틀어진 관계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할지 모를 우리네 삶의 모습들을 이책속에서 또다시 들여다 보고 말았다. 그 씁쓸함이 낯설지 않아 책을 끝까지 잡고 있게 만들었다.
"내가 아직 성생활을 즐겨서 미안하구나." 249쪽 모르는 여자와의 성관계를 딸에게 들킨 주인공의 말이 참 씁쓸하게 기억에 남는다. 낯뜨거운 장면을 들킨 이의 민망한 사과이지만 측은하기만 하다. 마치 '내가 아직 살아있어서 미안하구나...'라는 말로 들린다. 지독한 삶의 언저리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기전에 스스로를 용서하고 용납하지못한 이의 넋두리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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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인공 자신이 가족들과 주변인들로 부터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누구나 가족의 소중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을것이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혹여 가족중 누구에게라도 예기치 않았던 사고가 난다면 그 후유증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정도로 매우 아플것이고 정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거라고 본다. 그런데 주인공 프랑시스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전부인과 큰 딸을 한꺼번에 잃게된 아픔을 간직한채로 새롭게 재기하기 위해 재혼을 한 주인공이지만 결코 결혼 생활이 평탄치가 않고 작은 딸까지 실종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위가 찾아와 하는 말도 모두가 믿어지지 않고 또 믿음을 주기도 힘들다 보기 싫지만 사위이기에 꾹 참고 대해야 하는 애매한 심정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한번 가족의 해체가 시작이 되어버리면 걷잡을수가 없는것 같다. 누구나 자신이 먼저 가족을 위해 희생할 준비를 하고 또 어떤 이유에서든 의심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하지만 점점 자신을 위협하고 조여오는 두려움과 공포들이 결국 주인공에게 의심만 키우게 만들어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격지심이 커져서 이런 일들이 생겨난것일수도 있을테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무언가를 척척 해 내기엔 이젠 무리가 있으니 생각만 공상쪽으로 점점 키워가고 있는건지도 모를일이다. 주인공의 이웃에 있는 사립탐정 역시도 마찬가지로 집안이 복잡하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잘 읽다보면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소중함을 다시 한번 찾아볼수 있다. 가까이에 있을때 잘 모르고 지나칠수 있는 우리 가족들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아픔이나 상처들도 사랑으로 감싸 안아준다면 순조롭게 모두 잘 해결이 되리라 본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런 소설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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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지앙은 베티블루라는 영화의 원작가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입니다. 또한 이책은 앙드레 테네시 감독에 의해서 영화화되었다고해서..책을 읽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영화를 찾아보았는데 우리나라엔 검색조차 안되네요. 하루빨리 영화를 보고싶은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책은 정말 인상깊은 책이였습니다. 그간 많은 책을 보았지만 이런 색다른 느낌은 처음이였습니다 프랑스 특유의 무심한듯 담담한 필체..그리고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것도 신기했습니다 작가가 노련하다는게 책에서도 느껴졌습니다. 위험하고 불안하고 하루하루 불안불안하게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있습니다 아버지는 작가..그리고 딸은 유명 여배우, 그리고 딸의 남편은 마약중독자 은행가..그리고 쌍둥이 두딸.. 재혼한 부동산업자 부인..이 가족은 모두 한사람한사람 개성이 뚜렷하고 무척 위태로운 가족을 이어가고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한 친구에게 딸의 뒷조사를 부탁하고 그의 아들..감옥에서 막 출소한 아이를 이 작가가 도맡아 주는 부분에서는 인간애를 느꼈답니다. 이 작가는 냉철하게 보이기도하고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딸에게 냉정하게 대하기도하지만 인간애가 아주 넘치는것 같았습니다. 작가의 나이는 60으로..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나이라서..잘 알수는 없지만 그 나이에 느낄수있는 인생이나 환경에 대한 것들을 서술한것에게 깊은 공감을 느끼기도햇습니다. 또한 나이드는게 그렇게 나쁜일만은 아니구나..그런생각도 들었습니다. 책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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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아픔에 공감한다고 하지만 사람은 늘 자기중심적이라 자신의 생각을 부수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한다. 어쩜 너무나 당연하다. 같은 사물을 봐도 각기 다른 면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실종된 알리스를 찾으려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통 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은 60초반의 주인공. 죽음은 결과적으로보자면 매우 큰 스트레스이자 상처임에 틀림없다. 남은 딸마저 자신에게 추잡한 인간이라며 외면하고 경멸한다. 거기다 재혼한 아내 쥐디티가 자신의 동창의 아들 제레미와 불륜에 이른다. 그것이 자신에 의한 것이든-의처증- 그렇지 않든 주인공은 예순 살이나 되어서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내뱉으며 자조 섞인 삶을 뒤죽박죽 떠올리며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과거의 기억이 툭툭 튀어나오는 방식의 전개를 취하고 있다. 자기 혼자 배신감에 몸을 떨며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고치에 웅크려 위태위태한 자신의 인생을 염세적인 목소리로 들려준다. 한때는 유명했지만 십 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쉼 없이 글 타령을 하는 프랑시스는 완성도 높은 소설을 완성시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실추된 명예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자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도피처는 아니었을까? 누구도 용서하지 못하고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조차 증오한다. 자신 또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함을 보이고 있음을 잘 안고 있다. 원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래서 상처에 대한 용서가 이뤄지지못한 것이 전체를 이어가고 있다. 전처 조아나가 자신을 일기장에 나쁜 인간으로 묘사해놨을 거라 믿는 것이 결국은 모두가 나쁜 것들로 통칭되는 것이리라.
작가인 필립 지앙, 그는 삶의 궤적을 소설 속 프랑시스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흘리고 있다. 60, 인생의 허무를 알게되면 이렇게 어둑어둑한 자조에 이르게될까. 그리고 누군가를 용서하기에 앞서 자신의 아픈 실수에 대한 용서가 가능하기나 할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한 고심에서 누구도 빠져나가기 힘들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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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지앙? 생소한 이름이다. 그런데 영화 <베티 블루>의 원작 작가라 한다. 단박에 조르그가 떠오르면서 작가의 이미지가 한숨에 정리된다. <베티 블루>의 원작명은《37.2도 아침》이고 필립 지앙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처음 접하는 필립 지앙의 '열여섯번째' 장편소설 《나쁜것들》 역시 자동차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육십대 노작가 프랑시스와 한물간 여배우 출신인 작은딸 알리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굳이 '열여섯번째'를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인이라면 그가 발표한 장편소설 가운데 14권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끔찍한 얘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왠지 불길하다. 이 작가의 소설은 재미와 오락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불안감이다. 그런데 한국은 해외문학상을 받은 작품만 즐겨 번역하는 버릇이 있기에 이 작가의 작품이 덜 소개된 것은 작품성 자체와는 관계가 없으리라는 단언을 내릴 수 있다. 필립 지앙이 분명 상복이 없는 거겠지. <베티 블루>가 비정상적인 광기와 사랑의 열병을 그린다면, 《나쁜 것들》은 가족의 상실이 불러온 소시민의 상처, 소외와 권태감, 허무주의, 이기주의, 속물성 등을 그리고 있다. 《나쁜 것들》이란 4음절 제목도 노골적으로 <베티 블루>에 착안한 것 같다. 주인공 프랑시스는 작가로 성공한 조르그의 노년을 떠올리게 한다. 세월의 거친 풍파와 가족을 잃은 아픔이 순진한 조르그를 염세주의자 프랑시스로 돌변하게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염세적인 노작가는 소설이라는 환상 세계와 고독한 글쓰기를 방어벽 삼아 자기 주위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자폐적인 벽을 설치하고 그 안에 칩거한다. 프랑시스의 작은딸 알리스는 직업이 화려한 무대에 오르는 여배우인만큼 적어도 미모면에서는 베티가 환생한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물론 알리스에게 베티와 같은 히스테리나 광기는 없다. 자신의 배우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자 자작극을 벌이고 아버지마저 속이는 속물성과 이기주의를 드러내지만 말이다. 12년 전 자동차 사고로 아내와 맏딸을 잃은 이후 프랑시스는 영감이 바닥나 일종의 정체기를 겪게 된다. 그 때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쓴 일기장을 읽은 작은 딸은 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고 딸과의 사이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지게 된다. 프랑시스는 프랑시스 나름대로 알리스에게 실망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노심초사하게 만든 딸의 실종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프랑시스는 사설탐정 일을 하는 마르그리트에게 알리스의 실종사건을 조사하게 하는데, 딸이 가장 가까운 피붙이를 속였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배신감에 망연자실하게 된다. 한편 프랑시스는 의처증 초기 징후를 보이게 된다. 부동산 사업을 하는 능력 좋은 아내 쥐디트의 바람을 의심해 마을 청년 제레미로 하여금 아내의 행적을 감시하게 한다. 쥐디트는 원래 프랑시스가 유명작가로 한창 인기를 구가할 때 그의 충실한 문학팬이었다. 제레미는 프랑시스가 소싯적 한때 잔 적이 있던 마르그리트라는 여자의 아들이다. 나중에 아니나 다를까, 쥐디트와 제레미는 불륜에 빠져들게 된다. 너무나 프랑스적이다. 마르그리트는 전남편이란 남자에 그만 질린 탓인지 동성애자가 되고 제레미는 그런 엄마의 성정체성에 반항을 한다. 제레미는 소설에서 전형적인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패배적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아마 프랑시스도 젊을 때는 제레미와 같은 반항을 일삼지 않았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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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과 지혜는 달라야 하므로 과시하거나 아집을 부리거나 할 필요가 없다. 오래 전 베티의 순수와 자유로움 그리고 광기로 날 사로잡았던 필립 지앙이 이번에는 예순 살의 작가이자 알리스의 아버지 프랑시스의 시선으로 가족과 삶에 대해 통찰한다. 특별한 사건조차 없이 자조하듯 서술되는 일상의 문장에서 철학적 통찰이 느껴진다. 작가는 세월과 함께 고통과 용서,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해 묻는다.
자동차 전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고 유일하게 남은 딸 알리스와 함께 세상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소용돌이 치는 연기, 울부짖는 사람들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 둘을 잃자, 남겨진 아버지와 딸은 하염없이 세상에 각을 세운다. 어쩔 수 없다. 아버지는 딸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한 채 혼자만의 자괴감에 시달렸고, 알리스는 또 다시 그런 아버지를 보며 상처에 불안을 거듭 쌓아간다. 소리없이 빠른 속도로 부패해가는 부녀 사이는 방황하는 사춘기 딸과 결혼적령기의 딸을 잘 케어한 것으로 아버지를 안심시키나 싶더니, 배우가 된 딸이 마약쟁이이자 은행원과 결혼하겠다고 할 때 이제 그녀의 행복을 빌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의 행복을 바라고 뒷바라지하면서 인생을 채워야만 훌륭한가. 프랑시스는 알리스를 향한 정해진 아버지의 틀을 완전히 깨.는. 글쓰는 그러니까 온갖 창조와 영감의 샘을 강렬히 바라마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다. 그는 사위와 두 손녀마저 때로 귀찮다고 여긴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니지만 십년 간 메말라버린 영감 때문에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쾌감, 외로움을 갈망하면서 외로워지기는 두려운 아이러니, 오래 전 동창이었던 안 마르그리트의 아들 쥐디트의 잘못을 감싼 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고픈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어느 날 사위가 두 딸을 데리고 찾아와 '또' 아내가 사라졌다고 통탄한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라 배우인 그녀가 종종 처하는 상황이라 기다리고 또 기다려보지만 딸은 돌아오지 않고, 아버지는 온갖 과거의 아픈 순간을 떠올리며 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친구이자 탐정인 안 마르그리트에게 딸의 행방을, 그녀의 아들 제레미에게 재혼해 살고있는 쥐디트의 뒷조사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철저히 혼자이면서 혼자일까봐 두려운, 사랑하는 쥐디트가 바람을 피는 거라 믿어의심치 않은 늙은 남자의 불안과 직감이 잘 투영된다. 나중에 쥐디트가 결국 떠나자, 인생은 혼자임을 알게 되는 프랑시스는 이 세상에서 밀쳐진 늙어가는 한 남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파도처럼 돌아왔지만 모든 것이 배우로서의 경력을 위해 자신을 속인 거란 걸 알았을 때,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 아닌 같은 예술인의 깊은 회한으로 분노한다. 딸을 향한 원망은 과거의 시간을 하나하나 불러오고,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소설은 함부로 아버지와 딸의 화해를 그리지 않는다. 옮긴이가 이 모든 것을 자조의 문장이라 표현한 것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수긍이 간다. 늙어가는 아버지는 소중한 가족 둘을 잃고 남겨진 딸을 지키며 예술활동에의 갈망과 고뇌까지 더해져 철저히 파괴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본의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본인은 점점 더 나오기 힘든 세상 안의 동굴로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딸이 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사과할 때조차도 아버지의 자존심이 밀어낸다. 철저히 벽을 쌓아 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또 외로워지려했던 아버지는 딸이 아니라 본인의 삶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대신할 수 없는 일, 지켜줄 수 없었던 죄책,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자조까지 더해져 단단한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프랑시스는 오래 전 베티의 자유로움을 광기어린 파멸로 귀결시켰던 그 작가와 많이 달라졌고, 또 달라보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세상이 정해놓은 룰에 퍼즐처럼 나를 끼워맞춰가는 것. 아니면 세월이 흐르는 게 두려워 그 물을 피해보려 자신의 주위에 돌을 하나씩 쌓는 것. 그래서 자유와 순수, 때로 포기조차 잃은 채 타협하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막을 스스로 지어내는 것에 다름 아닐까. 큰 사건 없이도 울림이 있도록 소설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프랑시스는 헤밍웨이의 엔초비에 유독 애정이 많고, 작가로서의 명성 보다는 스스로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안쓰럽다.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드러낼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었던 예순의 어느 아버지와 앞으로 살아가실 내 아버지의 삶이 겹쳐보이는 건 대체 웬일일까.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 당신 안에 들어있던 하나의 불씨. 당신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건 다름아닌 당신의 유일한 불씨였던 나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