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3)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67%
  • 리뷰 총점8 33%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10.0
  • 40대 0.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텍스트를 읽고, 그 저자를 읽는다.
"텍스트를 읽고, 그 저자를 읽는다." 내용보기
[한비자]를 흔히 동양의 [군주론] 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한비자]를 지은 한비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부르며, 군주의 권력유지를 위한 법치주의의 창시자로 본다. 그러나 법가는 한비가 [한비자]라는 책을 저술하기 이전에도 원래 세 갈래의 학파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상앙이 백성들의 사익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법(法)을 강조한 것과, 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
"텍스트를 읽고, 그 저자를 읽는다." 내용보기

[한비자]를 흔히 동양의 [군주론] 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한비자]를 지은 한비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부르며, 군주의 권력유지를 위한 법치주의의 창시자로 본다. 그러나 법가는 한비가 [한비자]라는 책을 저술하기 이전에도 원래 세 갈래의 학파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상앙이 백성들의 사익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법(法)을 강조한 것과, 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판을 그들의 행동과 일치시키는 신불해의 술(術), 그리고 군주만이 가지는 유일한 권세를 내세운 신도의 세(勢)가 바로 그것이다. 한비는 이 세가지 분파에 비판을 가하면서, 이를 종합하여 법가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한비는 이러한 법을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 즉 제왕의 도구로 생각했고, 이후 법가는 역대 군주들이 현실정치에 활용한 통치술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한비가 말하는 법이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법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한비자 교양강의]는 [한비자]라는 한비의 저술에 대해서 해설 한 것은 아니다. 한나라 공자로 태어나, 무너져가는 조국 한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난세를 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 한비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고 있다. [한비자]는 한비의 학설로 55편이 전해 내려오지만, 한비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비의 모든 것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와있는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지만, 막상 [사기]의 노자한비열전에는 노자, 장자 같은 도가사상가와 법가인 신불해의 전기가 함께 실려 있으며, 한비에 대한 내용은 극히 빈약하다고 한다. [사기]에 의하면 한비는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순자의 제자였으며, 진시황이 한비를 등용하려고 하자, 이사가 시기하여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한비와 순자는 결코 만난 적이 없었으며, 한비의 죽음 또한 이사의 시기심 때문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한비의 경력을 [전국책]이나, 다른 경전의 숨은 기록에서 찾아내고, 또한 중산국 왕릉에서 발견된 청동솥의 명문등과 비교하며, 사마천의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비는 전국시대 한나라 공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출생연대는 불분명하다. 전국시대는 사상사부문에서 비약적인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로, 우리는 흔히 백가쟁명의 황금시대라 칭한다. 이 시대 문장의 특징은 비유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었고, [한비자]에 나오는 비유는 전국시대 문학 가운데 최고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나라는 진(晉)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조, 위, 한 세 국가중 하나였으며, 문화대국이었던 정나라를 정복하였으나, 정나라의 문화는 한나라에서 그대로 유지 되었다고 한다. 정나라 사람들은 소송을 좋아하고, 논쟁을 즐기며, 이론으로 내달려 곧잘 현실을 망각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비가 말년에 법률지상주의 정치학인 법가에 이끌린 것도, 젊어서 정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비가 존경했던 인물이 정나라 재상이었던 자산이었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자산은 형서를 발표하고, 법률의 규정을 명문화하였고, 이것은 중국 고대 성문법의 기원이 되었다. 자산의 법가학문은 후에 상앙이 진나라에서, 그리고 신불해가 한나라에서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한비는 자산의 언행을 칭찬하면서도, 자산이 모든 것을 자신의 지혜에만 의존하려 했던 것에 대한 비판 역시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초나라 오기와 진나라의 상앙을 법술지사의 전형으로 공격하고, 두 사람의 실패를 충분히 반성하고 분석한 뒤에, 자신만의 법술이론을 구축하였다고 한다. 즉, 상앙의 법, 신불해의 술, 그리고 신도의 세를 종합하여 법가의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당시 법가라는 학파는 없었다. 유가와 묵가만이 드러나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공자와 묵적이 죽은 후, 유가와 묵가는 여러 학파로 분파되기 시작한다. 도가는 묵가에서 떨어져 나온 분파로, 한비는 송견의 도교사상에 큰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법]을 애독하고, 차츰 송견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법가로 전향하여 갔다. 격동의 시대였던 전국시대, 한비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고,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법(法)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비자]의 대표적인 편으로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꼽았다. 고분은 진나라의 위협에 맞서 한나라를 위해 상소를 올리지만 채택되지 않자, 자신의 주장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홀로 울분에 가득 찬 마음을 터트린다는 말로, 진시황도 이 글을 읽고서 감탄했다고 한다. 또한 오두는 다섯 마리의 좀 벌레란 뜻으로, 한비는 오두를 힘으로 없애야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오두란 인의도덕의 정치를 주장하는 학자, 유세가, 칼을 차고 다니는 협객, 군주와 가까운 신하, 그리고 농민들의 이익을 빼앗는 상공업자를 꼽았다. 또한 한비는 군주의 재난은 사람을 믿는 데서 시작되며, 따라서 오직 법률로만 다스릴 것을 말 하였다. 군주가 동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허물 있는 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면 공을 세우기도 전에 상을 주며, 이는 신하들의 권세를 높이어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망하게 이른다고 보았다. 형벌은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이지만, 거꾸로 그들의 간악한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진시황은 법가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군주만을 위한 통치술 이었기에 천하를 통일한 진이 그토록 쉽게, 허무하게 단명에 그쳤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비자]를 읽으면서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어떤 생각들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거기에서 오늘날에 맞는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이 어떤 배경하에 쓰여졌는지를 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독서는 흔히 삼독(三讀)이라고 한다. 저자 가이즈카 시게키는 [한비자]를 읽고, 그리고 텍스트를 쓴 저자 한비를 읽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이다.



k*****1 2012.08.09. 신고 공감 11 댓글 14
리뷰 총점 종이책
[13-11] 한비(韓非), [한비자(韓非子)]의 재조명
"[13-11] 한비(韓非), [한비자(韓非子)]의 재조명" 내용보기
한비(韓非) 혹은 <한비자(韓非子)>에 대한 선입견 벗기.   우리는 막연하게 한비(韓非)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한비자(韓非子)>를 ‘동양의 <군주론>’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한비(韓非)에 대한 지식은 기껏해야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짤막하게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13-11] 한비(韓非), [한비자(韓非子)]의 재조명" 내용보기

한비(韓非) 혹은 <한비자(韓非子)>에 대한 선입견 벗기.

 

우리는 막연하게 한비(韓非)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한비자(韓非子)>를 ‘동양의 <군주론>’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한비(韓非)에 대한 지식은 기껏해야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짤막하게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한비(韓非)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아가 그가 진실로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저자는 고고학적 자료, <사기(史記)>외의 다른 고서(古書) 등을 이용, 한비(韓非)의 삶과 사상에 대해 재조명하고 있다.

 

먼저 일반적으로 알려진 한비(韓非)에 대해 살펴보자.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따르면 “韓非(한비)는 韓(한)의 公子(공자)로서 刑名(형명)▪法術(법술)의 學(학)을 좋아했으나 그 근본이론은 黃(황)▪老(로)의 學(학))에 기초한 것이다. 韓非(한비)는 말을 더듬어 자신의 주장을 말로는 잘 표현하지 못하였으나 저술을 잘하였다. 李斯(이사)와 함께 荀卿(순경)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李斯(이사)는 자기가 韓非(한비)만 못하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 중략 ~ 秦王(진왕)이 그를 만나 크게 기뻐하였으니, 아직 신용하기 전에 李斯(이사)와 姚賈(요가)가 그를 모함하였다. 秦王(진왕)은 그럴 듯하게 여겨 韓非(한비)를 하옥시켜 治罪(치죄)케 하였다. 그러자 李斯(이사)는 韓非(한비)에게 약을 보내 자살케 하였다. 韓非(한비)는 자신의 (억울함을) 개진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고 한다.

 

하지만, 한비(韓非)의 생애를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 번째는 한비(韓非)의 학통(學統)에 관한 것이다.

<순자(荀子)> ‘의병(議兵)’ 편에 기록된 글들을 보면, “순자(荀子)가 이사(李斯)를 ‘자네[汝]’라고 부르며 제자를 다루듯 대했으므로 이사가 순자에게 정식으로 입문한 것은 명백2)”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비(韓非)의 스승이 순자(荀子)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한비(韓非)의 시대로부터 1세기 이상 이전 인물인 신불해(申不害)가 <한비자(韓非子)>에서 자주 화제에 오르고 그의 저서 <신자(申子)>까지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에 비해, (<한비자(韓非子)>에는) 한비(韓非)와 시대가 가깝고 (그의 스승이라는) 순경(荀卿, 즉 荀子)의 저술인 <손경자(孫卿子)>, 즉 후세에서 말하는 <순자(荀子)>의 본문을 확실하게 인용한 구절이 없을 뿐 아니라, 순자에 관해서 언급한 곳도 거의 찾아볼 수 없(고)3)”, 그나마 유일하게 순자(荀子)에 대해 언급한 <한비자(韓非子)> ‘난삼(難三) 편’조차 순자(荀子)의 생애를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설정4)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 등을 감안하면, 한비(韓非)의 스승이 순자(荀子)라는 전승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 동문 이사(李斯)의 시기심에 의해 한비(韓非)가 억울하게 옥사(獄死)했다는 점이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의하면, 한비(韓非)가 진(秦)을 침략하려던 4개국[연(燕), 조(趙), 위(魏), 초(楚)]과 우호관계를 맺고 돌아와 상경(上卿)으로 임명된 요가(姚賈)를 비난한 것이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즉, 한비(韓非)는 “요가(姚賈)가 대왕의 권세와 나라의 보물을 이용해 밖으로 제후들과 사사로이 교분을 맺(었는데, 이는 그가) 조상 대대로 문지기를 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위(魏)나라의 큰 도둑으로 있다가 조(趙)나라에서 쫓겨난 (자이기 때문입니다.)5)”라고 매도했다가 도리어 주살(誅殺)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족이라는 자신의 신분/계급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한비(韓非)가 비천한 신분에서 출세한 이사(李斯)나 요가(姚賈)를 시기하여, 무고(誣告)하려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비(韓非) 사상의 변화를 엿보다.

 

이렇게 한비(韓非)의 참모습을 파악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 순으로 <한비자(韓非子)>에 실린 한비(韓非)의 사상을 재배열함으로써, 한비(韓非)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하였고,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비자(韓非子)> 55편 가운데 명확하게 한비(韓非)의 글이 아닌 것을 제외하면 크게 3 부분, 즉 전반부(3편~21편), 중반부(22편~35편), 후반부(36편~55편)으로 나눌 수 있다.6)

 

전반부는 청년기의 글로 추정되는데, 한비(韓非)의 글이 아니라는 주장이 존재할 만큼 넓은 의미의 도가(道家)라고 볼 수 있는 황로학파(黃老學派) 송견(宋銒; B.C. 360? ~ B.C. 290?)7)의 영향이 짙게 드려져 있다.

심지어 ‘해로(解老) 편’에서는 “예(禮), 즉 외면적 규칙을 강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사람의 소박한 마음에 직접 호소해야만 한다.8)”고 언급하여, 오늘날의 자연법주의와 비슷한 발상을 내비친다.

 

하지만 중반부를 거쳐 후반부로 올수록 한비(韓非)의 주장은 바뀐다. ‘전국 7웅(雄)’ 가운데 하나라지만, 한번도 헤게모니를 주도한 적인 없는 약소국 한(韓)나라의 입장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려면 “도술(道術; 여기서는 법(法)을 의미)을 통해 국가 정치의 원리적 기초를 설정하고 군주를 전지전능한 성인에 비유하여 군주 독재국가를 실현하는 것이 유일한 길9)”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전반부의 자연법주의에서 실정법주의로의 전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한비(韓非)는 군주가 자신의 의도를 노출시키거나 신하에게 약점을 노릴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신불해(申不害)의 술(術), 개인의 직분과 행위의 한계를 분명하게 정하고 그 전체를 권세(權勢)를 독점한 군주가 장악해야 한다는 신도(愼到)의 세(勢), 백성들의 사익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앙(商鞅)의 법(法)을 융합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한비(韓非)는 “(이) 세 가지 학설을 각각 평등한 입장에서 종합한 것이 아니라, 법(法)과 술(術)을 세(勢)라는 한 단계 높은 입장에서 종합했다10)”고 한다.

 

그래서일까? <한비자(韓非子)> ‘외저설 상(外儲說 上)’에서 “국가는 군주의 수레이다(國者, 君之車也)”라고 표현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군주독재 혹은 군주전제를 대놓고 내세운다. 즉, 전국시대라는 난세를 살아가던 지식인이었단 한비(韓非)가 선택한 것은 군주로 대표되는 강력한 권력이 철저한 법치를 하면서 평화를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비록 그 군주가 조국의 군주가 아닐지라도.

 

현재가 또 하나의 난세라면, 그럴듯해 보이는 외국의 사례나 이론을 수입해서 적용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인 아니 한 사람으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아가 어떻게 난세를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한번 차분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1) 사마천(司馬遷), <史記 – 中國古代社會의 形成 - >, 이성규 편역, (서울대출판부, 1987), pp. 460 ~ 465

2) 가이즈카 세게키[貝塚茂樹], <한비자교양강의>, 이목 옮김, (돌베개, 2012), p. 55

3) 가이즈카 세게키, 앞의 책, p. 56

4) “연왕(燕王) 쾌(噲; 재위 B.C. 320~B.C.310)가 자지(子之; ? ~ B.C. 314)를 현자로 존경하면서 순자(荀子; B.C. 300 ? ~ B.C. 230 ?)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신세를 망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순자(荀子)가 시간을 거꾸로 달리지 않는 이상 성립될 수 없는 설정이다.

5) 귀곡자(鬼谷子), <귀곡자(鬼谷子)>, 신동준 역주, (인간사랑, 2013), p. 528

6) 가이즈카 세게키, 앞의 책, p. 141

7) 송견(宋銒)은 묵가(墨家)로 분류하기도 한다.

8) 가이즈카 세게키, 앞의 책, p. 141

9) 가이즈카 세게키, 앞의 책, pp. 203~204

10) 가이즈카 세게키, 앞의 책, p. 242

w******f 2013.02.27. 신고 공감 3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한비자
"한비자" 내용보기
제왕학. 한비자                   "고전이란 인류의 조상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계획했는지를 후세에 남긴 글로 우리 정신문화의 바탕을 이룬다. 고전은 현재와 과거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않는 지침서 역할을 해주며, 현재의 삶에 녹아들어 미래를 밝히는 마음의 등불역할도 한다." 이것이 내가 고전을 읽는 이유다. 고전에 나오는 제자백가 사상 성인
"한비자" 내용보기

제왕학. 한비자

                   

"고전이란 인류의 조상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계획했는지를 후세에 남긴 글로 우리 정신문화의 바탕을 이룬다. 고전은 현재와 과거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않는 지침서 역할을 해주며, 현재의 삶에 녹아들어 미래를 밝히는 마음의 등불역할도 한다."

 

이것이 내가 고전을 읽는 이유다. 고전에 나오는 제자백가 사상 성인들중 그중에서도 난 한비자를 동경한다. 어느 누가 동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가 난세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필독해야할 서적임에는 틀림없다.

 

한비는 법가의 대표자이다. 그의 이름은 '비'이며 전국시대 한나라 명문귀족 후예이다. 그는 말더듬이였으나 논리적인 문장을 갈고 닦는데에 힘써 탁월한 문장력을 지녔다고 한다. 말더듬이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유세가라니.. 이것만 봐도 한비자는 대단한 사람이란걸 알수있다.

 

설상가상으로 한비가 살았던 당시의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다. 영토는 사방천리도 못되는데다가 서쪽으로는 진나라, 동쪽으로는 송나라와 제나라, 북쪽으로는 위나라, 남쪽으로는 초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잠시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동양고전을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열이면 열, 모두다 굉장히 악조건인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비자 뿐만 아니라, 고전에 나오는 성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난세속에서 살다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영웅은 난세에 나온다고 했던가, 한비자 또한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난세인 시대에 산 인물이지만 그의 저서 '한비자'는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고전이다.

 

그래서 내가 더욱더 흥미가 가는 이유이다. 그리고 한번 읽으면 놓을수 없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절대 한번 읽어서는 이해못할 책이다. 기본 3번이상은 정독해야 한비자에 대해 조금 알게 됬다고 할수 있을것 같다.


c********7 2015.04.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