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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으로 사전에는 명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미리 정한 기간 동안 법을 제정하고 투표로 국가를 운영할 대표자를 뽑아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특징을 보인다. 삶의 어떤 부분은 공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속박됨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현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일상이 구체화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살아간다. 민주주의 시대의 핵심은 인민의 주권과 개인의 자유로 두 자율권은 상호 제한적인 관계를 맺는다. 권력이 정당하더라도 그것이 한 기관에 집중되어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되고, 다양성을 단순화로 환원하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서두에서 저자는 말한다. 이는 그가 전체주의 국가인 불가리아에서 살았던 청년 시절부터 프랑스로 귀화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바라며 굴곡 많은 삶을 통해 민주주의 내부의 위기를 짚고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길이 현실화되기에는 현안들이 쌓여 있다.
1945년 나치즘은 패망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공산주의는 종말을 고하였지만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하여 민주주의의 위기를 촉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심도 있는 대립을 보인 두 신학자의 논쟁을 통해 민주주의 내부의 적을 통시적으로 살핌으로써 지금의 민주주의 위기를 통찰하였다. 기독교 교리에 순응함으로써 구원을 받기 위해 인간은 신의 은총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게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다. 이에 반해 펠라기우스는 기독교의 교리나 교회에 순응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 통제와 정신력으로 스스로 자신의 창조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펠라기우스가 강조했던 인간의 완성 능력을 존중하여 계속되는 진보에 대한 믿음을 신봉하여 개인적인 영역에서 활동무대를 공동체로 바꿔 주의주의의 세계관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나간 메시아주의와 결합하였다.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포 정치와 혁명으로 세속적 구원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자들은 여러 과정을 거치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현상을 야기했다. 이들은 자유를 옹호하면서 타국 인민의 미래에 개입하여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고 그 나라를 공격하여 식민지화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 동시대의 다른 유럽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며 격이 야만성과 미개함에 빠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구출하여 이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천명하였으며,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해 예속 국가로 전락시켜 갔다. 정치적 메시아주의자들은 총괄 계획을 세워 능동적인 주체와 그들의 수혜를 누리는 수동적인 타자를 구성해 역할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군사적 방법으로 계획을 수행해 갔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몰락 후 중세 시대의 십자군이 종교적 정당성을 내세워 선의 이름으로 감행한 정복을 답습하여 민주주의 체제를 와해시키고 인권을 유린하는 경향은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의 의지를 다른 나라에 관철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003년에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점령은 2011년까지 이어 인류를 위해 공권력을 투입하고 전 세계의 자유를 신장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처럼 꾸며 자국의 사리사욕을 은폐하였다. 이라크 전쟁에 미온적이었던 오바마 대통령은 침략자에 맞서 자기 방어와 자국 방위를 넘어서서 벌이는 전쟁이 유용함을 주장하면서 공권력 사용을 정당화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석유가 매장된 리비아의 끔찍한 독재자 카다피의 부패 정치를 종식하려는 내전에 개입함으로써 인도주의의 탈을 쓰고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미국은 전쟁의 참상을 방불케 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려는 메시아주의 정치는 서로를 파괴하며 정치적 혼란만 가중시킨다. 경제적 자유와 개인적 자유를 동일선상에 두는 콩스탕, 신이 창조한 세계는 악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은 바스티아는 개인의 적극성을 강조했다. 시민들의 경제적 자유를 박탈하고 인간을 정치의 노예로 만든 전체주의 국가에 맞서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신자유자들은 경쟁을 방해하는 모든 구속을 체계적으로 없애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장려하고 나섰다. 인간사의 다른 활동과 경제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으며, 경제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신자유주의는 시장 바깥에 구원이 없다는 말로 국가 권력은 경제 권력을 촉진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신자유주의는 공통의 이익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사회를 개인들의 총합으로 치부하여 물질적 부를 위해서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인 사회적 삶을 경시하며 인간의 상호 관계를 도외시하고 말았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문명사회를 이룩하는 가시적인 실용성만을 추구하던 인류는 예기치 않은 원전 폭발로 심각한 폐해를 겪어야 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에 이어 후쿠시마 폭발로 유출된 방사능은 수만 년 간 지속해 목숨을 앗아가고 숱한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고통 속에 연명해 가는 모습은 끔찍한 재앙으로 비춰진다. 과학적 신기술을 무절제하게 사용하는 현실에서 탈피하여 자연에 희망을 걸어 생태 주의적 삶으로 전환하여 지금의 위험 요소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유연성을 요구하는 프랑스 텔레콤의 노동 현실은 바람직한 인간과계를 토대로 한 노동에서 벗어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우울증을 비롯한 신경쇠약을 낳아 극단적인 선택까지 일삼은 노동자의 어두운 그림자를 투영하였다. 표면적으로는 개인의 자율성이 증대된 것처럼 말하지만, 행위자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없는 법칙은 기계처럼 사람들을 길들여 나간다. 개인의 개성과 창조성을 말살하는 표준화는 강도 높은 노동을 정당화하는 반인륜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민주주의 근간을 이루는 표현의 자유는 적절한 의사결정을 이루기 위한 전제로 충분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논의를 위해 필요하다. 디지털 시대로 SNS 네트워크 시대에 매체의 영향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작용한다. 금권 정치에 개입한 거대 언론은 다수에게 개인의 의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다수에게 개인의 의지를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 영향력 있는 인물의 의견에 따라 정보를 전달하는 통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권력에 반하는 표현의 자유를 펼 줄 알아야 한다. 냉전 이후 급격히 부상한 포퓰리즘은 데마고그를 활용해 공동 이성을 파괴하고 뛰어난 개인을 선동가로 내세워 군중의 즉각적인 지지를 추구한다. 현실성을 고려하지 않고 옳고 그름 등을 따지는 가치판단을 포함한 본래의 목적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행태인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로 대두된다.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계는 다문화주의로 흘러가고 있다. 다문화주의를 거부하면서 떠올리는 이슬람 문화의 구성 요소를 저자는 여성들에게 히잡 착용을 금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정치인들은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민자들을 다루기 쉬운 희생양으로 여겨 쉽게 자국 문화에 흡수하려는 일에만 급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로의 문화적 정체성을 통제하기보다는 다수의 문화와 이민자의 문화가 공존하여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공조하는 모습을 그려 본다. 자신들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민주주의를 추구하여 인권을 지켜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될 것임은 전쟁의 폐해가 막대함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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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진화해 왔다. 3당 합당과 고착화된 지역주의를 분쇄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 세대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IMF의 광풍이 이념을 휩쓸고 간 후 신자유주의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때였다. 그래서 지난 4년간의 후퇴한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불편함과 스트레스가 크다. 그전까지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려오던 것들이 4년 만에 무너져가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레이스에 뛰어든 후보들이 너나할 것 없이 ‘경제민주화’를 부르짖는다. ‘정치민주화’가 엄청나게 후퇴되고 퇴보했음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화두이기에 ‘일단 먹는 것부터 해결하자~!’라는 원초적인 문구가 이번에도 먹힐 듯싶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이기는 하나 ‘먹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들이 많은데, 그것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을 회피하면 지난 4년과 같은 꼴이 그대로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함께 먹고 살아야’하는데, 민주주의 사회가 심화되고 신자유주의가 팽배해지면 질수록 ‘함께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흔히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북유럽 선진국에서 극우주의자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고 많은 유럽 국가에서 인종주의가 다시금 부활하는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 책 「민주주의 내부의 적」은 그것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데 적절한 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해결책이나 처방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우려 한다.” (p.17) 저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불가리아 태생인 저자가 대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온 후 프랑스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귀화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인생의 역사가 세계대전 후 68혁명을 기점으로 이루어낸 서유럽의 민주화 과정, 그리고 반대편 냉전 체제하에서 구소련 체제하에 있던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 형성 과정의 역사와 일맥상통한다.
1. 천사가 되려한 짐승들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는 유럽의 시각에서는 이미 수백 년이 된 개념이지만 나와 같은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개념이다. 유럽은 말 그대로 밑에서 부터의 혁명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충분히 성숙되고 숙성된, 그래서 국가에 소속된 국민의 의식 속에 고스란히 흐르는 잠재역량이라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굉장히 다르다. 근·현대사가 그 어떤 국가와 집단의 그것보다 급변했고 정치적 테제를 결정하는 주체가 늘 통치 권력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미군정으로, 미군정에서 독재 권력으로 통치 권력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흔히 유럽, 특히 북유럽 하면 ‘우리보다는 성숙한 사회’, ‘엄청난 GDP를 자랑하는 복지국가’ 정도로 생각했었다. 박노자 교수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를 읽으며 우리가 가지는 북유럽에 대한 판타지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경고 받기는 했지만 TV나 책을 통해 노출되는 북유럽과 서유럽은 노래 가사처럼 “희망의 나라”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인인 저자의 눈에 비친 서구(유럽과 미국을 포함한)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책의 제목처럼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 인해 그렇다는 것이다. “안보리가 구현하는 국제 질서는 당위성이 아니라 힘의 지배에 기여한다.” (p.73) “역사의 시기마다 군사 개입은 거의 도덕적인 태도를 표방했다. 이때 특히 서구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p.85) 코소보 사태와 아랍의 재스민 혁명, 이라크 전쟁에서부터 아프간 전쟁까지 유럽과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일념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또는 주도적으로 실행했다. 저자는 이것을 정치적 메시아주의라 칭한다. 스스로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코소보에서 아랍에서 이라크에서 메시아가 되어 주기를 고대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전 세계의 민주주의, 발전, 자유 시장, 자유 경제를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보고서는 거듭하여 이러한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될 수 있다고 정당화한다. 그것이 전쟁이라도 말이다.” (p.60, 「미연방 국가 안전 전략」) “고상한 이상을 내세운 이 계획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는 공산주의의 구원을 약속하고 식민 전쟁을 벌이던 과거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부활을 의미한다.” (p.60)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가하기 직전 부시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TV연설을 했던 것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분명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제2십자군전쟁’이라 칭했다.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부시에서 십자군을 이끄는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했다는 말인가? 이렇게 이어져 온 서구의 민주주의에 대한 내부의 공격은 또 다른 외부의 공격을 말미암을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다. 자꾸만 눈을 외부로 돌리려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냉전체제가 허물어지고 전 세계가 급격히 신자유주의의 격랑에 빠지고 나서 인류는, 아니 서구는 문명 진화의 최대치가 신자유주의가 될 것임을 기대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신뢰가 더 나은 세계와 문명을 견인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너무나도 한순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오일쇼크로부터 이미 징후는 계속되었으나 서구는 애써 외면했다고 봐야 한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더블딥, 나아가서는 트리플딥의 반복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숨기며 오히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논점을 흩트리는 것으로 과정이 진행됐다. 서구의 관점에서 그들보다 미개하고 미성숙한 아랍과 이라크, 근동지역같은 곳은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기 위한 도구로 안성맞춤이었다.
“천사가 되려고 하다가 짐승이 된다.” (p.90) 「팡세」에서 파스칼이 말한 대로 그들은 메시아는커녕 그대로 짐승이 되어버렸다.
2. 데마고그와 데마고기의 놀이터 신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테제가 희미해져버린 서구의 자리에는 포비아(phobia)가 자리 잡았다. 책에서는 외국인, 특히 무슬림에 대한 포비아가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현실을 진단한다. 앞서 지적한바 선진 정치국가라 인식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인종주의’를 내세운 정당이 제1야당이 되고 많은 젊은이들을 그 기치아래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마고기(demagogy)를 일삼는 데마고그(demagogue)들이 놀이터를 점령해 버렸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이것을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위해 이용하고 활용하는 데마고그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사실은 문제의 심각성을 대변한다. 각 국가 내에서 상존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분노의 형태로 타인(특히 외국인)에게 치환된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데마고그들의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선동·선전(데마고기)은 힘을 얻는다. 따르는 무리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나와 나의 국가·집단은 갑자기 모두 피해자가 된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 총구만 ‘그들’에게 돌려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책에서 지적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러시안 룰렛이다.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총구를 들이대지만 격발되지 않은 총구는 언제든 나에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기획은 우리를 한 극단주의에서 다른 극단주의로, 즉 전체주의적인 ‘국가 우선’에서 극단적인 ‘개인 우선’으로, 자유를 죽이는 체제에서 ‘사회를 죽이는’체제로 이행시켰다.” (p.111)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대중들이 자신의 두려움, 불안, 적대감을 다른 집단에 투사하는 것이다.” (p.155) 노르웨이에서 수십 명을 살해한 브레이브크스는 이러한 극단에 몸을 실은 젊은이다. 그가 남긴 문서들에서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결단했다. 물론, 컴퓨터 게임에 빠진 채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해 내지 못한 정신병리학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그가 극우세력의 데마고그들의 선전과 선동에 심취했음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아직 극단적인 데마고기가 넘치는 정치세력 내지는 집단이 집권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그것으로 빨려 들어가는 젊은이가 많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가 ‘그들의 문제’로 피해의식을 덧입은 채 치환돼 버리면 이성은 상실된다. 데마고기(demagogy)를 일삼는 데마고그(demagogue)들이 놀이터만 점령하면 다행이다. r들이 만들 난장판은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다. 유럽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극단세력들은 어떤 면에서는 맥이 닿는다. 디테일한 정치환경과 집단의 특성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요즘 부각되는 독도 문제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양국의 접근 방식을 보면 ‘자유를 죽이는 체제’를 벗어나 ‘사회를 죽이는 체제’로 이행하고 있지 않나 염려스럽다. 대선을 앞두고 국내에서도 난장판이 펼쳐질 것이 뻔하다. 각자 나름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갑’이 되겠다고 뛰어들겠지만 심각한 내부의 적이 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나와 다르면 ‘빨갱이’, ‘수구꼴통’ 이 두 단어로 상대의 주체성을 상실시켜 버린다. “유럽의 장점 - 민족의 다양성, 사상의 다양성, 이러한 유럽의 특수성은 메시아주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 같은 민주주의의 탈선을 막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저항할 수 있는 지형을 만든다.” (p.206)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러한 민주주의 내부의 ‘적들’을 견제하고 균형 잡힌 사회발전을 위해 유럽의 특수성과 다양성이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내게는 좀 먼 나라 얘기에 불과하지만 수백 년간 쌓아온 그들의 정치적·문화적·시민적 역량이 폭주하는 탈선을 막기에 차선이라도 된다면 주목해 지켜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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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적이 있을 때는 내부적인 힘으로 똘똘 뭉쳐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 적이 있다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지 모른다. 내부의 적은 스스로 자각이 되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졌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염려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 민주주의는 구소련의 붕괴로 전체주의나 공산국가와 같은 적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세계적인 적이나 라이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민주주의는 그 내부의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저자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1939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스물네 살까지 공산주의 국가인 불가리아에서 살았다. 그 후 프랑스에 유학 하게 되면서 현재까지 구조주의 문예이론가이자 사상가로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저자는 공산국가에서 살았던 두 배의 세월을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면서 민주국가에서 가장 근간으로 삼고 있는 자유가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민주주의에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어원상 인민(같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과 이들이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 권력을 갖는 체제라고 한다. 민주주의의 구성요소인 인민, 자유, 진보 중 하나가 적정선을 넘어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벗어나면 포퓰리즘, 극단적인 자유주의, 메시아주의 같은 민주주의 내부의 적들이 나타난다고 보는데, 이런 민주주의 내부의 위협을 살펴보기 적합한 사람으로 공산국가와 민주국가에서 살았던 저자 자신이 적합하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현재 우리의 시대를 더 잘 이해하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18세기 후반 보수주의자 콩도르세는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한 인민들이 무한히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동시대의 다른 유럽인들보다 정치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자신들처럼 문명화된 존재가 다른 민족들을 야만상태에서 구출하는 것을 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이 다른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때조차 자신들처럼 고등한 인종이 다른 열등한 인종들을 문명화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서구에서 유래한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다른 이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이었다. 1999년 서방국가들은 군사연합체인 나토를 유고슬라비아에 투입했다. 이는 나토가 어떤 나라에서 인권유린사태가 벌어졌을 때 희생자를 보호하고 침략자를 저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무력을 행사할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정한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모순이 있다. 2003년에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2011년에야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미국 측 사망자수 4,500명에 비해 이라크 측 사망자수는 45만 명 이상이라는 추산이 나왔다. 여기에서 생명과 자유를 수호한다는 민주주의를 앞세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2011년 3월에 시작해서 그해 8월에 끝난 리비아 전쟁은 카다피가 재판 없이 처형되면서 끝이 났다. 리비아의 운명이 서방국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오늘날은 마치 제국주의였던 프랑스와 영국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130년 전의 상황과 비슷하다. 서구가 한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를 파괴하면서까지 전쟁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카다피를 제거한 대가로 나토는 리비아 석유기지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리비아 사례를 통해 국가 간의 관계는 힘과 이익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자신들이 세계질서를 보호할 중책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미국의 이익이 발생할 때라야 미국의 개입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도 선이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이 부분을 읽으며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힘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무엇보다 국력을 키워야한다는 민족주의가 떠올랐다. 아래와 같은 이유로 민주주의 국가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가 번영을 약속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법을 공평무사하게 적용하여 민중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3쪽) 저자는 말미에 유럽을 통한 민주주의의 발전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거대국가들의 세계적 민주화 수행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기 때문에 불합리한 점이 많고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유럽이야말로 다시 한 번 민주주의를 부흥시킬 수 있는 저력이 있으므로 유럽인들의 분발을 촉구하면서 끝을 맺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든 생각은 저자의 의도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지지했던 서구 여러 나라의 행동들에서 그 어떤 정의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내용을 보고 국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개인 간에 상대성이 있는 것처럼 국가 간에도 상대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앞으로 우리와 미래 세대들이 세계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력을 키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앞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제들, 우선 코앞에 있는 독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도발을 막을 수 있는 것조차 국가의 힘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답답한 심정과 함께 앞으로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힘이 없어 강대국들에게 당한 우리의 역사가 여전히 우리의 뼈를 아프게 하고 있다. 저자가 프랑스인답게 유럽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만큼 나는 우리나라가 과거와 같이 나라에 힘이 없어 수모를 당하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국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국가의 우월성을 빛내줘야만 하는 열등한 국가에 속해 비참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모든 국민이 두 눈 부릅뜨며 정치를 지켜보고 경제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은 다음에라야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깨달았다. 독서를 방해한 요소들 36쪽 10째줄: 턱분에 → 덕분에 42쪽: 6~13째줄 → 같은 문장 반복 155쪽: 여러 나라의 사례를 살피며 이 문제에 (대한) 논의해 보자 → 이 문제에 대해 191쪽: 2010년부터 겨울부터 → 2010년 겨울부터 207쪽: 비록 개인은 현실의 여러 도전 앞에서 무능하다. → 문장의 호응관계가 맞지 않음 기타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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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의 초석을 이룬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이 프랑스 대혁명은 세 가지 이념을 기치로 내걸었는데 그건 프랑스 국기로 상징되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바로 그 세 가지 이념이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진 중심적 가치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 세 가지 이념은 바로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로 여기서 자유는 그 가장 첫 머리에 온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유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은 인간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거기에 있어서도 자유권은 원칙을 선언한 인간의 존엄성(그리고 그것을 보장할 행복 추구권) 바로 뒤이어 나온다. 인간의 기본권을 규정한 조항들 중 가장 많은 조항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자유권이다. 그 만큼 자유는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모두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유가 무조건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어디까지나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보장된다. 이른바 J.S 밀이 말했던 '해악의 원리'다. 자신에게 인정되는 권리는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공간 역시 어디까지나 타인의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에 한정된다.
그런데 이 공존의 공간 설정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그리 쉽지가 않다. 헌법학에서 이 문제는 주로 기본권의 충돌로 다뤄지는데 이 충돌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이익 형량이라든지 규범조화적 해석등 헌법재판소가 각 사안마다 개별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그렇게 아주 구체적인 현실들을 고려해야 할 만큼 칼로 무우 자르듯 규정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현실이라는 것은 몇 마디 말로 다 포섭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복잡하니까. 사실 현실이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모자이크화와도 같지 않은가. 그건 민주주의 역시도 마찬가지다. 비록 프랑스 대혁명이 세 가지 이념으로 출발했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 세 가지 이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도 발간된 구조주의 시학의 대표작 '산문의 시학'으로 유명한 츠베랑 토도로프도 그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복합적인 배치를 이루기 위해 서로 결합하는 여러 특징들의 총체로 정의된다. 이 특징들은 완전히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기원과 지향성이 상이한 까닭에 서로를 제한하며 상호균형을 이룬다. 만약 균형이 깨질 경우, 위험 신호가 작동되어야 한다. (P.13)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특히 사실은 서로를 제한하는 그래서 상호 모순되는 인민 주권과 자유가 상호 균형을 이루는 체제이다. '개인은 자신의 의지를 공동체에 강요해서는 안되며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시민들의 사생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P. 14)
그런데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리 길지도 않은 현대 민주주의 역사 동안 그 균형은 자주 깨어졌다. 사회 민주주의로 출범한 나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체주의가 되었고 그건 인민 민주주의로 출범한 소련의 스탈린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다들 민주주의를 천명했지만 쉽게 독재와 전체주의의 길로 빠져들어갔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 내부에 그 자신을 갉아먹는 기생충이 있는 것 같다. 바로 그 민주주의에 존재하는 내부의 적을 다루는 책이 이번에 나온 츠베랑 토도로프의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다.
그가 이렇게 민주주의가 가진 내부의 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9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이제 공식적으로는 서구 민주주의의 적이 없어진 상황에서 그렇게 바깥에 대적할만한 적이 존재했을 때는 쉽게 노출되지 않았던 민주주의가 가진 함정이 그 적이 없어지자마자 바로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신자유주의와 지금 가장 진보했다고 평가받는 유럽에서 더 불타오르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을 통해서 말이다.
츠베랑 토도로프는 이 책을 통해 바로 그 원인을 추적한다. 역사적으로 그 연원은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선언했던 중세의 펠라기우스에서 부터 시작하는데 바로 그 인간의 의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18세기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메시아주의로 발전한다. 즉 보다 좋은 것을 위해서라면 타인이 가진 자유는 마음껏 유린해도 상관없는 그런 이기주의적 구원관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츠베랑 토도로프는 오늘날 망가져 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근본 병균이 바로 '정치적 메시아주의' 라고 본다. 이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총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는데 그 처음은 프랑스 혁명기요 두번째는 공산주의 그리고 마지막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 때 민주주의 구현이란 이름으로 폭탄을 마구 퍼붓던 시기다. 이 모든 단계들은 모두 자기들이 스스로 형성하고 인정하는 구원관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생명이나 권리쯤은 희생해도 좋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두 번째 단계까지는 이념을 위해서 희생해 왔지만 세번째 단계에 와서는 이제 이념 따위도 필요 없고 오로지 현실적 이익만 있다면 얼마든지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무시해버려도 되는 단계로 까지 타락하고 말았다. 리비아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는 가장 먼저 개입했는데 그 때 프랑스가 개입했던 것은 외부에 알려진 대로 민주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해방된 리비아로 부터 석유 시추권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오바마를 비롯해 오늘날 벌어지는 온갖 개입전은 이렇게 철저히 이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바로 거기에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가장 타락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타락의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츠베랑 토도로프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이 가진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바로 온갖 감언이설로 치장했지만 본질은 나만 잘되면 된다는 극단적 자유의 추구가 민주주의가 걸려 넘어지는 함정인 것을 말이다. 근대의 민주주의는 그 자유의 추구를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주장했지만 과연 자유의 추구가 우선적인 것이어야 할까? 그것이 바로 토도로프가 이 책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점이다.
다시 말해 타인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려는 자세 보다는 내 자유를 먼저 확보하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제한해도 좋다는 그 사유 방식 자체가 이제는 가장 진보한 유럽 조차도 외국인 혐오증을 기반으로 하는 포퓰리즘의 불길에 휩싸이도록 만든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유럽 사상의 일시적인 착란이나 광기가 판을 치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유럽적인 체험의 일부이다. 세계대전 때 자유프랑스전선에서 싸운 로맹 가리는 첫 소설에서부터 적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인간성을 지녔다는 사실과 우리들의 잔인함을 고발했다. 1946년에 출간된 소설 '튤립'에서 할렘의 흑인 '낫' 삼촌은 '독일에서 범죄자는 바로 인간이야'라고 말하며 소설 '절반'에서는 알제리인 라통이 친구 뤽에게 "너 이 세상에 독일놈들이 몇 명인지 알아? 30억이 넘어!"라고 말한다. 로맹 가리는 나치즘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현대사를 들먹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전 역사에서 인종주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P. 201)
그러니까 토도로프는 이 사유방식 자체의 전환을 이 책을 통해 요청한다. 자유의 추구 보다는 공존을 위한 절제를 우선시 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의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그 무엇보다 시급히 요청되는 사유의 태도라고 말한다. 바로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이러한 스타일로 썼다.
정치적 행위의 목표는 과학자들의 작업처럼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잘못 이해하면 잘못된 행동을 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개인적 삶과 공동체적 삶의 특징에 관한 인문 사회과학적 연구를 참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때 현실론은 이상주의나 도덕적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와 대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온한 보수주의와 맹목적 주의주의 혹은 순종적인 체념과 순진한 몽상 같은 것을 다 넘어선다. 이런 의미의 현실주의가 바로 정치적 인간의 사명이다. (P.204)
어디까지나 내가 가진 자유의 확보를 먼저 추구했던,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서구 민주주의에 있어 이러한 주장은 한 마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토도로프도 이 책에서 복기하고 있지만 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생각한다면 꼭 한 번 귀담아 들어둘만한 발언이다. 거기다 분량도 많지 않고 역사와 현실의 사례를 충분히 들어 자신의 논지를 펴고 있기에 그리 이해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오늘의 난제를 해결하는 좀 색다른 시각을 원했던 분들이라면 더욱 안성맞춤이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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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출판되어져 나오는 책들은 시대상이나 시대적 담론들을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본주의의 한계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어져 나오는 것도 이미 자본주의의 내부적 문제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사회가 민주주의 지배로 승리를 맛보았다고 하지만 여기저기서 민주주의 부작용에 대한 담론이 만만찮게 거론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체제와 맞물린 탓도 있지만 그 체제의 시스템으로 인해 인간의 탐욕이 극대화 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민주주의 체제에도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민주주의 내부의 적>이다. 제목 자체에서 벌써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참 신기하게도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담론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볼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자유와 의지와 애착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 츠베탕 토도로프의 진가가 나타난다. 그는 사상가 답게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는 먼저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향상시키고 선택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인간의 의지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을 파악해서 인간이 만들어놓은 가장 좋은 제도인 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제도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사적인 언급은 이 책을 단순한 정치비평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이를 부여한다. 토도로프에 따르면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데 개선의 여지를 부정하지 않지만 인간은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모든 것을 하나의 권력으로 환원하려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임을 간파한다. 그래서 그는 ‘더 나은 것은 가능하지만 선은 우리의 능력 밖이다’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역시 다른 정치체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활동에 대한 어떤 개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체제는 신정정치나 전체주의 체제와 달리 국민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지도, 거기에 이르는 길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지상낙원을 창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사회 질서의 결함은 어쩔 수 없는 조건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전통이 부과한 규칙에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는, 전통적인 보수주의 체제와 민주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체념으로 점철된 운명론적 태도를 거부한다.(p.14)
민주주의를 논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사상적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 만큼이나 특별한 이 책의 장점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데올로기적인 대결이라는 식상한 구도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토도로프는 민주주의에서 ‘진보’의 요소가 지나치게 강조되었다고 말한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소비에트 이후의 공산주의, 이라크 전쟁 이후 리비아 사태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모두가 ‘진보’라는 환상을 가지고 시작된 민주주의 발전상이라는 것이다. 토도로프가 보기에 이 세가지 사건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먼저 총괄 계획을 세우고, 능동적인 주체와 그의 수혜를 입는 수동적인 타자를 구성하여 불균형한 역할을 분배한 뒤 군사적 방법을 동원하여 계획을 수행한다.(p.48) 결국 정치적 메시아주의로 진행된 민주주의는 악이 선의 이름으로 실현되고 그것이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당회되는 역설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도로프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결정적 위기의 징후로 꼽는 것은 바로 대중추수주의, 즉 포퓰리즘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대중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해서 최근에 유행하는 정치 기술이다. 오늘날 이것은 매체를 통해서 대중들의 감정을 움직여 즉각적인 지지를 얻기위한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은 고대사회에서부터 늘 문제가 되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미디어와 매체가 발전한 시대에는 그 피해가 막대하다.
저자는 민주주의 내부의 적을 간략하게 인간 이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지나친 낙관, 이데올로기적 대립, 그리고 대중 선동적인 정치라고 본다. 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제도라고 한 것에 대한 수정이 가해져야 될지도 모르겠다. 현 역사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제도로 평가받고 있지만 아마도 또 다른 시대를 위한 다른 제도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성공과 실패를 함께할 운명인 우리들은 오늘날 똑같은 모험을 하고 있다. 비록 개인은 현실의 여러 도전 앞에서 무능하다. 그러나 역사가 불변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섭리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않으며, 미래가 의지에 달려 있다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p.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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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敵)은 있을 수 있다. 어느 조직이고 단체건 간에 적이 없다면 말 그대로 평화다. 그렇지만 평화로 가장된 위기를 감지 못하고 있다가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외부의 적은 최소한 그 움직임정도는 감지 할 수 있다. 그러나 X 맨 같은 내부의 적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저자와 함께 그 많은 적군 중 특히 민주주의 내부의 적에 대해 스터디 해보기로 한다. 저자 츠베탕 토도로프는 불가리아 태생이다. 전체주의 국가라고도 불리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인생의 초반 3분의 1을 보냈다. 그리고 프랑스로 이주했다. 구조주의 문예 이론가이자 사상가로 문학, 철학, 역사, 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30여권의 책을 썼다. 저자의 어린 시절은 기본적인 생활이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필수품은 물론이고 음식, 옷, 욕실 용품, 가구 등 ‘삶에 맛을 더해주는 자잘한 특별품’을 손에 넣을 수 없어서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평안한 삶,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물질의 풍요가 행복이라는 나라에 안착시켜주진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인 경우는 불편함과 함께 자존감이 낮아진다. 삶의 맛이 없어진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니다. 그냥 심드렁해진다. 급기야 삶의 의욕이 사라진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참을 만큼 참았음에도 자유가 박탈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모든 일상이 감시되고, 강요된 노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고발당했다. 나의 중학교 시절 몇 학년 때인가? 급훈이 '조용히’였다. 어지간히 조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용히‘라고 쓴 붓글씨가 액자 안에 턱 하니 자리 잡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자는 “자유가 부재하기 때문에 자유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권(人權)이 제대로 보호되고 있으면 굳이 이 단어가 나와 이곳 저 곳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아도 된다. “민주주의는 자기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힘을 발산한다. 또한 이 힘이 외부에서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힘보다 우세하다는 점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특징이다. 이 힘을 무찌르고 제압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을 표방하고 정당성의 외양을 확보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어렵다.” 저자는 본격적인 주제를 다루기 전에 오늘날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전 역사를 논의해보자고 한다. 1600년 전 로마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주요 등장인물은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기독교인이란 것이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오며, 이러한 반성적 능력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 저자는 펠라기우스를 기독교인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현자에 더 가깝다고 그리고 있다. 스토아학파의 분위기라고 표현한다.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교회에 바쳤다. 그는 부자들에게 지상에서 신을 대표하는 자에게 의탁하기보다는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 재산을 나눠주라고 주장하면서 현실에선 특별한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한 펠라기우스를 경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생각 때문에 생의 후반기를 펠라기우스주의를 철저히 반박하는데 할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열정은 타락한 의지에서 나오고, 습관은 열정에 예속됨으로써 생기며, 욕망은 이 습관에 굴복할 때 생긴다. 존재는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 존재를 선택할 수 없다. 존재는 우리 의지의 창조물이 아니다. 무의식적 동기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나 연인에게 느끼는 매력을 예로 든다. 우리는 누군가를 선택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앞으로 계속 관심을 가져볼 만한 분야이다. 저자는 펠라기우스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판정패를 당한 것으로 그려주고 있다. 관점의 차이일 수 있고,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일 수도 있기에 좀 더 냉정한 판단이 뒤따른다. 펠라기우스의 성찰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볼 때 , 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데 유일신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이교도의 신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세계는 신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실현한 결과다. 저자는 펠라기우스가 생각한 인간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보다 신을 더 닮았다고 한다. 몽테스키외는 인간이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는 경향 때문에 결국 통제하기 어려운 충동에 빠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권력을 가진 모든 인간은 늘 권력을 남용한다. 다시 말해 전지전능함을 추구하는 것이 원죄보다 더 가벼운 죄라고 할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을 무한히 신뢰할 위험 때문에 결국 이것은 원죄와 관련된다.” 몽테스키외는 모든 전제정치(공산주의)를 비난했고 이를 ‘괴물적 지배’의 현현으로 여겼다. 또한 그는 원죄와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정치체제와 입법에 주목했다. 이른바 정치적 메시아가 태동하는 시점이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모든 존재는 의지의 노력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하는 미완성 상태의 질료이다. 전 인류를 도덕적인 동시에 행복하게 만드는 과업이 갑자기 실현 가능해보이기 시작한다. 과대망상증 환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법을 만들기 시작한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는 목표아래 작업이 진행된다. 이 과정 중에 혁명 전쟁과 식민 전쟁이 수반된다. 그 중심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자리 잡고 있다. 나폴레옹이 앞장 선 프랑스는 1792년부터 1815년까지 23년 동안 멈추지 않고 전쟁을 벌여 수백만의 희생자를 냈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전쟁을 강요했다. 영국은 인도, 아프리카를 야금야금 접수했다.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먼저 총괄 계획을 세우고, 능동적인 주체와 그의 수혜를 입는 수동적인 타자를 구성하여 불균형한 역할을 분배한 뒤 군사적 방법을 동원하여 계획을 수행한다. 저자가 20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살면서 가장 깊이 각인된 기억은 일상생활에서 겪은 수만 가지 불편함이나 지속적인 감시, 자유가 결여된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모든 악이 선의 이름으로 실현으로 되고, 숭고한 목적이라며 정당화되는 역설을 뼈저리게 인식했다고 한다. 전쟁, 고문, 대량학살 등이 악을 선으로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과정 중에 저질러졌다. 1917년을 기점으로 공산주의는 이론적인 기획에서 러시아의 현실이 된다. 이 사건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사유에 기폭제가 되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이 국가에 완전히 예속되고, 더불어 경제는 중앙조직이 결정한 계획에 따른다. 이때부터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자유주의의 새로운 발전 단계가 시작된다. 신자유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경제에 종속돼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인간사의 다른 활동과 경제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으며, 경제가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현실에서 이를 보여주지 못하긴 했지만 마르크스 이론의 특징이 바로 경제의 지배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2011년 3월에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의 후유증은 상당히 심각하다. 그곳 근해에서 잡힌 생선이 국내에 반입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 동태탕, 대구탕 등을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저자는 이 사건을 신자유주의의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예시하는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인류는 욕망을 쉽게 실현하기 위해 과학적 발견과 발전에 지나치게 의존해왔다. 과학이 진보하여 산업사회에서 활용되면 모두에게 번영과 권리를 가져다줄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 열정은 휴브리스, 즉 오만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일상에서 과학을 빼면 아프리카 원주민의 일상 그 자체가 된다. 과학지식은 지구 온난화의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지 해명 할 수 있다. 또 과학지식을 통해서 유전자조작 식품의 기대 효과와 부작용을 알 수 있다. 과학을 자연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나쁜 과학을 좀 더 나은 과학으로 대체할 수는 있다. 후쿠시마 참사나 그와 유사한 재앙들은 더 잘 살기위한 인간의 열망이나 물질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오직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냉정한 개인들의 집단으로 보는 신자유주의 논리 때문에 일어났다. 포퓰리즘(populism)에 대해 생각해본다. 포퓰리즘은 정책의 현실성이나 가치판단, 옳고 그름 등 본래의 목적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행태를 말한다. (두산백과) 저자는 최근 몇 십 년간 유럽에서는 포퓰리즘 정당의 급부상이라는 새로운 정치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냉전 이후 급격히 증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대중들이 자신들을 돋보이게 해줄 적대자를 필요로 하는 데서 이런 현상의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대중들이 자신의 두려움, 불안, 적대감을 다른 집단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대상이란 다름 아닌 외국인이다. 살아가면서 까닭 없이 당하는 일만큼 화가 나고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없다. 도대체 알고나 당하자. 다양한 이민자들이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해서 위협적인 요소가 된다. 신앙적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가 인종차별로 이어진다면 곤란하다. 아니 심각하다. 결국 잡을 수 없는 폭력사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의 주장 중에 개콘의 한 토막 같은 부분이 있다. “인종은 대등하지 않다. 흑인이 육상 경기에서 이기는 것을 보아라.”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총알 탄 사나이' 자메이카의 우샤인 볼트가 100m를 9초 63으로 끊어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등으로 라인에 들어오는 것을 TV로 보면서 “사람도 아니야~”했다면 당신은 포퓰리스트 자질이 있다. 물론 같은 말이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다. 당신이 그랬다면 그냥 애교로 봐주고 싶다. 골수 포퓰리스트들은 진짜 사람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문제다. 한발 양보해서 지능은 자신들이 더 높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할지라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유색인종을 하나의 생물학적 범주로 묶고, 신체적 능력의 위계가 지성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실제로 이 둘의 상관관계는 증명된 바 없는데도 말이다. 저자는 문제점만 들춰내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경험적 측면에서 해결 방안을 조심스럽고, 단호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충분히 참조할 가치가 있다. 약 2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부르카 착용금지 법안 및 2011년 7월 22일, 서른 두 살의 노르웨이 청년 앤더스 베링 브레이빅이 저지른 두 차례에 걸친 테러(84명의 사망자 발생)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정치인들과 소수 극우파들의 지극한 영향 탓이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은 내 안에서 내몰고자 하는 인물과 내가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콩스탕은 이런 경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벗어나려는 대상과 당신이 추구하는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법은 없다.” 저자의 우려(憂慮)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담아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주의 국가, 군부 독재, 백성을 우민(愚民)으로 만드는 봉건체제보다는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것이 여전히 더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가 낳은 내부의 적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되고, 더 이상 번영을 약속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주의 내부의 적들은 외부에서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과거의 적들보다 더 공포스럽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계획하지도, 군부 쿠데타를 획책하지도, 준엄한 신의 이름으로 자살 테러를 저지르지도 않는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위험 요소가 눈에 띄지 않아 정말로 위험하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맞서는 세력이 더 이상 없을 경우 민주주의 체제를 없앨 것이다. 사람들의 존재를 박탈하고 인간성을 말살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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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베탕 토도로프는 24세까지 공산국가인 불가리아에서 살다 지금은 프랑스인이된 문예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 모든 일상이 감시되고 범죄자들은 수용소로 보내지는 부자유속에서 살았기에 어느 누구보다 자유의 가치에 예민하고 목마른 사람이다. 그가 불가리아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보다 두배나 긴 시간을 프랑스에서 살면서 결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며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나치즘이 패망하고 1989년 공산주의가 종말을 고하자 비교우위를 자랑하던 민주주의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과 대면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요소인 인민, 자유, 진보라는 특정한 요소를 편협하게 배제하거나 선호하는 정치적 메시아 주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인종주의를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며 개인적 경험을 곁들여 이 주제들을 펼쳐나간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 약 1600년전 펠라기우스는 로마부자들의 방탕한 생활을 비난하면서 육신의 쾌락을 거부하고 물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운명은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으니 자신의 과오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자유의지야 말로 신의 은총이라며 인간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와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인간은 자기 안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으며, 원죄를 갖고 태어나는 결함이 있는 존재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에 기대야한다고 설교했다. 펠라기우스가 완벽하게 자율적인 성인을 이상적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연약하고 두려워하는 아이와 같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인간에 대해 관대하고 타협적이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은 사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으며 저자는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기초로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치적 메시아주의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현세에서 구원을 추구하며 각각의 교의에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 일종의 '정치적 종교'를 의미한다.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모든 민중들에 대한 박애와 원조"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전쟁을 불사했던 프랑스 혁명과 유토피아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열망으로 급진적 유혈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공산혁명을 예로 들 수 있다. 냉전이 종식된 현재는 인도주의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개입한 서방국가들이 새로운 메시아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요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내적 원칙을 훼손하는 것일 뿐이니 아무리 숭고한 목적을 표방한다고 해도 폭력적 수단은 정당하지 못하며 당사자들의 국익이 근본적 동기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신자유주의 콩도르세는 종교선택의 자유, 속박없이 진리를 추구할 자유, 사생활을 누릴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를 주장했으나 경제적 번영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 현대에 개인의 경제적 자율성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이다. 경쟁이 유익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치는 사회적 삶, 공동체적 가치를 훼손하며 경제적 약자에겐 실질적인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이윤은 개인에게 돌아가지만 경제위기의 위험은 사회가 떠맡는 현재의 금융위기는 극단적 이기주의라는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잘 드러낸다.
포퓰리즘과 인종주의 사람들은 사회적 집단안에서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에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가 몰락한후 대중들은 적대감을 외국인들, 특히 무슬림에게 투사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논쟁에서 실업이나 금융부채같은 난제가 아니라 임신중절이나 동성결같은 풍속문제에 집중하는 것 처럼 세계화와 개인주의로 인한 문제를 눈에 띄는 외국인 혐오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법치에 위배되는 명예살인은 용납되지 않지만 히잡이나 부르카를 쓰는 관습까지 금지할 수는 없다. 다양성을 용납해주는 관용의 문화야말로 민주주의의 미덕이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선언은 진실이 아니며 "인간은 의존적이고 나약하게 태어나고... 어른이 되어야만 자유와 평등을 획득한다." 인간은 헌신하는 부모, 공통의 기억과 언어를 가르쳐주는 공동체, 생태계안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경계한 휴브리스(오만)가 아니라 중도와 절제를 권하며 국가가 개인의 의지와 공동체의 의지를 중재할 수 있다고 본다. 극단적 자유는 강자의 자유이며 폭력일 뿐이다. 경제적 위기속에 유럽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들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다문화사회로의 변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지 계속 질문을 던지며 그런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들의 의견이 모인 선거의 결과가 늘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한 민주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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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이슈에 이어 민주주의 자체도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책이다. 민주주의는 용어 자체의 의미에서처럼 국민이 권력을 갖는 체제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미리 정한 기간 동안 법을 제정하고 국가를 운영할 대표자를 선출한다(p.13). 저자는 이러한 지적을 하기에 앞서 본인은 인생의 1/3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머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낸 경험을 책에서 풀어놓겠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포퓰리즘, 극단적인 자유주의, 메시아주의 등이다. 즉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인 인민, 자유, 진보 중 어느 하나가 적정선을 넘어 유일한 원칙임을 자처할 때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한다고 한다. 책의 주제를 다루기 전에 1600여 년 전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권력을 얻기 시작했으며 신학적인 논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대표적 논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주된 예로 들고 있다. 논쟁의 주제는 '자유의지'와 '죄와 구원'의 문제였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죄는 물려받아서가 아니라 선조의 행동을 모방한 결과라고 말한다. 즉 신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죄를 짓고 안짓고의 문제는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 자기통제와 정신력을 배우며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능력을 낙관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았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고 오직 자신만을 탓할 수 있을 뿐이다(p.26).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유의지의 결과라고만을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원죄는 인간 종에 속한 모든 개체 특유의 결핍과 취약점인데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한 근본적인 결함이라는 주장을 한다(p.28). 원죄로 가득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기대야 한다(p.29)는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418년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이 이단 선고를 받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지만 그 이후 이 논쟁의 불시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 이후 루소나 몽테스키외 같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어느 쪽에서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 이후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개인의 운명(도덕)보다 사회의 운명(정치)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의 논쟁에서 정치적 행위와 권력자들이나 대중에 대한 담론으로 이행한다(p.40). 대중들이 요구가 폭발하기 전에 몽티스키외의 중용의 태도는 마르퀴드 콩도르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격렬하게 비판받는다. 콩도르세는 필라기우스의 사상과 유사하게 인간이 법을 충분히 적용한다면 지상의 악을 일소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신을 완성하고 능력을 펼치게 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원죄는 제거해야 할 미신일 뿐이며 행복은 사후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논의가 급진전되어 더 나아가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내세우면서 특유의 궁극적인 목표와 이에 이르는 특별한 방법(혁명과 공포정치)를 지향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를 정치적 메시아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콩도르세의 사상과는 좀 다른 양상으로 움직인 결과이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났다. 첫번째 단계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에 헉명전쟁과 식민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며, 두번째 흐름은 공산주의으로, 세번째 흐름은 민주주의로 나타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예상했던 바와 같다. 즉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서방 선진국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모든 악이 선의 이름으로 실현되고 숭고한 목적이라며 정당화되는 역설이라는 것이다. 선을 추구하지만 그 선은 결국 과거의 종교를 대체하고 있을 뿐 큰 차이는 없으며 나만이 선하다는 주장으로 인해 전쟁을 선포하고 다른 나라 국민들의 인권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오만함과 헛된 욕망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국제 정치에 복무하는 도덕과 정의는 도리어 도덕과 정의를 해치고 강대국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단순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강대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위선적인 장막으로 나타난다.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메시아주의 정치는 서로를 파괴한다. "천사가 되려고 하다가 짐승이 된다."라는 파스칼의 문구가 이런 상황을 더없이 잘 설명해 준다. 일군의 국가가 다른 국가에 자신들의 의지를 무조건 관철하는 이상, 국제질서는 개선되지 않는다.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의 눈앞에서 실추되고 심지어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국가에서조차 민주주의 원칙이 부식될 위험이 있다. - p.90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신자유주의로 넘어간다. 국가의 활동은 공공질서 유지 정도로 최소화되어야 하며 최소화되어야 하는 것은 경제활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연결된다. "부를 제한"하거나, "공정하게 분배"해서도, 심지어 "과도한 부의 추구를 막아서도" 안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입장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마냥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자유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좌파는 검열, 금기, 도덕 등 행동에 최대한 자유를 부여하되 경제적 자유는 국가가 제한해야 한다고 하며, 우파의 경우는 이와 반대의 주장을 한다. 두가지 자유를 모두 추구할 수는 없으며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이슈라는 점을 지적한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지나치게 통제를 해서 비판을 받았는데 신자유주의는 최근의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다시피 지나친 방임이 낳은 결과로 재분배가 되지 않는 현상을 낳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계급의 소멸을 위한 투쟁 대신 이익의 조화를 가정한 뒤 시장의 자연법칙에 의존하는 역사법칙에 찬성한다. 여기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으로 짧게나마 되돌아 보게 한다. 적당한 통제와 적당한 자유의 경계선은 어디인지 저자도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자세를 일관되게 보이고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행태를 "야만화"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비판을 마무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지켜야 할 도를 넘어선 나머지 탈이 났다(p.199)고까지 표현한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위험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그 위험요소가 눈에 띄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스스로 쇄신의 길을 걷게 될지 아니면 포퓰리즘으로 치달을지 아직 결말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데 해답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조한다. 역사가 불변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섭리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않으며, 미래가 의지에 달려있다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 p.2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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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국가에서 24살까지 살았던 경험과 나머지 국가에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겪은 저자는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민주주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관하고 있는 내부의 위험요인들이다.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펠라기우스는 이상적인 인간은 완벽하게 자율적인 성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자신의 의존성과 연약함이 부끄러워 숨어서 움츠려 있는 아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는 신의 품속에 있다. 인간은 존재를 완성할 수 없고, 신은 죄를 용서할 것이다.” (p.30) 자율성을 인정하는 펠라기우스의 주의주의적인 생각은 후에 민주주의의 관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는 과거에서 주어진 운명이나 기존의 틀은 거부하고 오직 구성원의 의지로 굴러가는 의지를 가진 거대한 생명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틀속에서 생겨난 신자유주의는 다시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사회적 경쟁이 공동체의 위기를 야기할 만큼 과열될 때마다 사회는 민심 속에 만연한 폭력적 욕망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찾아 낸다는 ‘희생양(pharmaconm) 이론’을 주장했다. 전술이나 전략을 이야기 하는 책 중에는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중에 하나가 외부의 공통의 적을 만들라 이다. 이 전략은 그 대상이 조직이든 작은 인간관계든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문제는 외부의 적을 소멸시킨 다음이다. 같이 합심해서 외부의 적을 쳐낸 시점에서 내부 갈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결점을 보완한다는 명분으로 등장한 전체주의는 엄청난 피해만을 입히고 1945년 사라졌고, 공산주의 또한 1989년 11월에 사라졌다. 이제 공산주의는 형태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체제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 됐고 시선은 민주주의의 내부로 옮겨지고 있다.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힘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기대했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어서 저자는 그 놀라운 힘에 대해 이야기 한다. 민주주의가 외부의 명확한 적을 가지고 있을 때 문제는 드러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표적인 공산주의 체제가 일순간에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를 잡고 나자 내부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치가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내부로 국민의 시선이 옮겨질수록 자신들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희생양이 필요했고, 이 즈음 등장한 이슬람은 적절한 악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선동을 데마고기라 하는데, 자극적인 변설(辯舌)과 글을 바탕으로 감정적ㆍ정서적으로 대중을 기만하여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방법이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우리라는 개념을 대중에 각인시키고 그 외의 것은 적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결국 민주주의의 자유를 위해 외부의 적을 새로 만들어 싸워대는 불합리한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외부의 테러집단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이들은 외부의 적을 내세우며 냉전시대에나 가능했던 고문과 차별을 공공연히 합법화 하고 있다. 자유가 민주주의의 근본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위기가 있다는 것도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미국과 서구 유럽은 그 수호자를 자처하며 개입하며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실현하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엄청난 자유에 감춰져 보지 못했던 권력의 잔인함, 강대국의 오만, 가진자들의 횡포 뿐이다. 민주주의가 최상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구성 요소들의 환상적인 균형이 필요하다. 인민, 자유, 진보 중 하나가 그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내부의 적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게 된다. 저자는 휴브리스(hubris, 오만)를 이야기 한다. 이는 곧 자유가 주어진 인간이 언제까지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에 좋은 단어이다. 항상 그 선을 벗어난 인간으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즈음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민주주의의 위험요인을 내부로 시선을 돌려 찾으려 하는 저자의 의도는 적절하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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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이 책의 저자다. 1939년에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24살 때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이후 49년째 거기서 살고 있다. 프랑스 국립고등연구원 명예원장으로 문명충돌과 휴머니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토도로프는 진보, 자유, 인민을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로 본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내부의 적이 바로 이 세 가지 구성 요소에서 파생한다는 점을 밝혀낸 것에 있다. 특정한 하나의 요소가 편협하게 배제되거나 선호될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본문에서 “나는 전에는 자유가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 중 하나라고 믿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을 뜻한 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러 보편적 가치들 중에서 느닷없이 ‘자유로운 공격’을 내세우면서, 경제 부문을 국유화한 모든 나라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가?”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유’를 찾아 불가리아를 떠난 토도로프. 그는 ‘자유’가 어떻게 극우파시스트들이 이용하는 개념이 됐는지 극단적 자유주의인 신자유주의를 통해 비판한다. 또한 토도로프는 사상가답게 파스칼, 몽테뉴, 루소를 능숙하게 소환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개념과 관련된 논쟁의 출발점으로 1천600년 전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를 참조한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원죄, 그리고 인간의 의지와 완결성에 대한 싸움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승리함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이 민주주의의 전제가 됐음을 논증해낸다. 그의 글쓰기는 이데올로기의 투쟁으로 점철된 민주주의의 식상한 구도까지도 벗어났다. 그는 ‘진보’가 지나치게 강조됐던 세 시기, 18세기 프랑스 혁명, 소비에트 이후의 공산주의, 이라크 전쟁 이후 리비아 사태까지의 시기를 차례로 거론한다. 그는 하나의 가치에 천착한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오만한 발상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경고한다. 토도로프는 미디어를 통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포퓰리즘을 가장 경계해야할 민주주의 내부의 적으로 규정한다. 책을 통해서, 노학자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치열한 사유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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