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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일이 뜻대로 안 되어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홀로 뒷산으로 향한다. 평지에서 멀어질수록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적지를 향해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는 동안 풀 섶에 깃들어 사는 생명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흐르는 땀방울 속에 번뇌를 씻어 내린다. 외진 길을 걸어 묵묵히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 새 자신도 자연의 일부에 동화되어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일상을 동경할 때가 있다.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초원을 찾아 이동하며 게르를 짓고 생활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양떼를 돌보는 할아버지 바이타르의 나날은 자연적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전형을 보인다. 전작 <<153일의 겨울>>에서 할아버지는 손녀 갈샨에게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법부터 시작하여 늑대의 습격으로부터 양떼들을 지키는 일을 손수 보이며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열어주었다. 바이타르는 혹독한 추위와 돌발적인 상황이 초래하는 시련 등에 두려움 없이 맞서는 법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고난을 헤쳐 가는 힘을 갈샨에게 실어줬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빨리 만나고 싶은 갈망에 아버지 리함은 아내와의 약속을 뒤로 하고 위험한 길을 선택해 제정신이 아니고는 택하지 않는다는 경비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향하여 우랄을 몰았다. 아찔한 절벽과 험준한 협곡, 치솟은 산꼭대기는 구름에 잠겨 있는 호오르가 산을 넘기 위해 트럭을 몰고 가다 산사태를 만난 리함은 우랄에서 나와 혹독한 추위와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멀리서 우랄이 보이기 시작하면 갈샨은 손을 흔들고 아빠는 우랄의 헤드라이트로 딸에게 신호를 보내며 그들만의 환영식을 치러왔는데 갈샨이 기다리는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갈샨은 도착 예정일을 넘긴 아빠 대신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우랄의 환영에 시달리거나 아빠의 트럭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악몽으로 불안감에 휩싸였다. 소식이 끊긴 아빠의 흔적을 찾아 갈샨은 세속적인 삶과는 절연하고 차궁에서 양 떼를 돌보는 늙은 양치기 바이타르 할아버지를 찾아 차궁으로 향했다.
교육을 받아 본 적 없이 증조부, 조부가 양 떼를 돌보았던 대로 고산에서 생활하는 바이타르 할아버지는 점점 눈이 멀어 볼 수 없게 되지만 예민한 청력으로 늑대들의 기습에 맞서 양 떼들을 돌보아 왔다. 할아버지의 동공을 덮고 있는 하얀 각막 백반을 걷어 내자는 손녀의 말에 바이타르는 점점 시력을 잃어 실명하게 되더라도 자연적 질서를 거역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인위적인 산물들을 배제하고 살아왔다. 아들 리함의 실종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차궁 골짜기에 어워를 세움으로써 아들이 어딘가에 살아있길 바라는 마음을 돌탑에 담았다. “야이이아아!” 유목민의 삶을 고수하는 일을 천명으로 받아들이며 양 떼들을 보호하기 위해 야생의 개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바이타르는 여기며 한평생 말을 타고 양떼를 돌보는 일을 천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아버지 리함의 궤적을 찾고 싶어 하는 손녀의 마음을 그는 수용하여 그동안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 현재적 삶에 충실함으로 손녀에게 흩어져 있는 양들을 찾는 일을 가르친다. 할아버지는 갈샨에게 가축들을 몰기 위해 소리치는 법을 알려주고 늑대들이 양 떼를 노리는 것을 감지하는 법을 배우고 가축들을 길들이는 법을 배우며 갈샨은 아빠 리함이 선택한 눈물길에 이르렀다.
할아버지와 우우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갈샨은 아빠 리함의 라이터를 발견하고 어딘가에 있을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먼눈으로 오감을 열어 어둠을 꿰뚫는 바이타르의 모습은 생명을 내어놓고 짐승들과 싸우면서 그가 돌보는 가축들을 지키는 모습은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고독을 스스로 상쇄하며 자신의 길을 의연히 걸어 왔 다. 이는 한다. 바이타르는 아들의 종적을 찾아 안개 속을 헤쳐 산길을 달리다 총상을 입은 리함과 동행하여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과 거리가 먼 그를 보면서 갈샨은 간절한 그리움 끝의 그리움이 융해된 만남의 기쁨으로 전율하였다. 강인함으로 어떤 한계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여겼던 갈샨의 아버지는 연약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아 그 모습이 낯설었다. 눈물길에서 죽음의 문턱에 이른 아버지를 동굴 속에서 돌봐 준 이는 마지막 원시인들이었고, 그들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온 생을 다해 그들과 재회하려고 애쓴다는 할아버지의 말대로 리함과의 재회는 찰나에 그치고 말았다.
갈샨이 죽어가는 새끼 양을 살려내고, 원시인들이 죽을 고비에 놓였던 리함을 살려 그들의 삶으로 끌어 들였고, 바이타르가 눈 더미 속에 얼어가는 우우간을 살려 양치기로 길러낸 일은 진정한 사랑과 정성이 이뤄낸 인생의 선물이다. 게르 안에서 쌍둥이 형제를 길러내는 차아메드는 갈샨이 자리를 비울 때면 새기 양을 돌보아 잘 자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주어진 환경 속에 동물과 인간이 지금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며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모습에 차별 없는 사랑을 전하는 이들의 마음이 따스하게 전해져 온다. 멀리 있어도 그 사람의 안녕을 빌며 함께 할 날을 간절히 바라다보면 언젠가는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딸을 뒤로 하고 원시인들이 사는 곳으로 떠난 리함의 선택을 받아들이며 그를 보내 준 것처럼 집착을 거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들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또 다른 집착이 아니었는지 반성하며 고독한 유목민들의 사랑을 떠올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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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반 사이한 …… 아빠.”
![]() 리함은 그의 러시아제 낡은 트럭 ‘우랄’에 올랐다. 장장 4주간 가족을 떠나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급하다. 우랄에 시동을 걸고 호오르가 산을 오른다. 그 산엔 눈물길이 있다. 젊은 시절엔 호기로 그 길을 운전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아내와 약속했다. 가족을 생각하면 그 길은 결코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이다. 눈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이제 이 길만 넘으면 가족을 만날 수 있다. 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랄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렸다. 리함은 트럭에서 공중으로 몇 미터 튕겨져 나갔다. 산사태였다. 눈물길로 오는 게 아니었다.
“어떤 꿈은 사냥하는 늑대와도 같다. 그 꿈들은 절대 떠나는 법이 없지.” 갈샨은 매일 밤 같은 꿈을 꾼다. 꿈 속에서 트럭이 보이고, 아빠는 그 곳에 없었다. 아타스 바이타르는 갈샨과 함께 양들을 이끌고 산을 오른다. 아타스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산 밑에 이르면 빛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을지 모른다. 엄마가 수술을 권했지만 거절한다.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우우간을 만난 아타스와 갈샨은 양들을 이끌고 산 밑으로 간다. 저기 멀리 아빠가 살아 있을 것만 같다. “네 아빠는 죽었어..” 어느 깊은 밤, 늑대들이 습격하고 밤을 깨우는 총소리가 산 속의 적막을 깨운다. 아타스가 총을 쏘았다고 직감한다. 아타스는 앞이 안 보이는데.. 갈샨은 우우간의 만류를 뿌리치고 함께 아타스를 찾으러 간다. 아타스를 찾은 그 곳에서 다시 굶주린 늑대들의 습격을 물리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내 눈이 보는 것을 내 손도 본단다.” 어느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아빠. 그 아빠를 매일 꿈에서 보는 딸 갈샨. 갈샨은 아빠가 아직 살아 있는 증거라고 하지만, 어른들은 이미 아빠를 포기했다. 아빠는 살아 있을까? 할아버지와 엄마는 정말 아빠를 포기한 것일까? 할아버지는 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양을 치러 갔을까? 갈샨의 기다림은 멈추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능동적이고 희망적이다. 그에 비해 어른들은 체념이 빠르다. 그들은 지난한 삶 속에서 체념하는 법을 터득한 것만 같다. 이 이야기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세계가 공존한다. 아빠와 엄마로 상징되는 신문물, 정부 주도의 문맹 퇴치 운동으로 변화하는 세계가 있다. 그 대척점에 선 것은 할아버지(아타스)로 상징되는 유목민들의 삶, 전통을 지키고 자연에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세계가 있다. 이 두 세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아들이자, 남편이며, 아버지인 리함이 무사하게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마음으로 인해 두 세계의 사람들은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되고,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인정하려 한다. 이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 힘은 ‘공감’ 이다. 할아버지가 눈 수술을 거부하는 것도 자신의 조상들처럼 순리대로 살다 가기 위함이다. 과학의 힘을 빌어 자신의 신체를 잠시 회복시키는 것 보다 그저 순리대로 살다 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리함의 죽음 혹은 실종을 통해 두 세계는 화해의 길을 모색하게 되고, 공존해야 만 할 인간과 자연의 길을 보여 준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위치는 과연 어디쯤인가? 지금껏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려고만 하고, 이미 지배했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말이 없으니 인간들의 논리는 우리끼리의 교만하고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이야기는 끝을 향해 나아가며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귀속되고 자연 안에 포함 될 때 ‘어머니 자연’이 주는 선물과 기적을 만날 수 있다.
소중한 것들이 멀리 있을 때, 마음으로 그의 곁에 이르는 법을 찾아갑니다. 갈샨은 믿었다. 아버지의 생환을 믿었고, 자연의 위대함을 믿었다. 작가는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순진한 동화 같은 믿음을 갈샨을 통해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그 꿈의 결과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여러분이 확인하기 바란다. 더 나아가면 책 읽는 재미가 반감할테니..
이제, 갈샨과 함께 나의 소중한 것을 찾아 길을 떠나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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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153일의 겨울』의 작가여서 반가웠다. 익히 글맛을 알고 있기에 기꺼운 반가움은 표지에서도 금방 알았다. <이책은> 청어람주니어 서평단을 1년여 했는데, 신간이 나왔다는 이메일이 왔다. 신간 온 뒤에 소리없이 온 책. <저자는>
<책내용 맛보기>
<책 읽은 소감> 전작 '153일의 겨울'을 통해 고집센 늙은이 바이타르와 손녀 갈샨의 혹독한 겨울나기를 봤다. 몽골의 겨울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지, 그것조차 순응하며 살아가는 유목민 바이타르가 내리사랑이라고 손녀 갈샨에 향하는 말없는 사랑은 눈물겹고 애처롭기만 했다. 아들에게 걸었던 기대를 걷어들이며 상실감을 손녀 갈샨으로 조금이나마 치유하는데 갈샨을 매개체로 아들과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게르가 있고 넓다란 평원에 한가로이 풀뜯는 양떼들, 어김없이 하늘은 드높고 맑아 두리둥실 흰구름 떠가도 풍경이 되는 곳. 이런 몽골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아름답고 낭만적으로만 보다가 153일의 겨울에서 본 몽골의 혹독한 겨울은 마치 속살을 보는듯 아리고 매서웠다. 그런 척박한 환경이나마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알고 주어진대로 순응하는 바이타르를 통해 자연의 위대함과 불변함을 엿보기도 했다.
아빠 리함의 트럭 우랄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등장하면 딸 갈샨과 둘만의 수신호로 무사귀환을 알린다. 어느새 태어난 여동생을 데리고 자는 갈샨의 꿈에 우랄이 내동댕이쳐지고...허나 운전석에 아빠는 보이질 않는다. 식은땀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다 깨는 갈샨을 엄마가 근심스레 쳐다보나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빠가 돌아와야 할 날에서 엿새나 지났기 때문이다. 매일밤 악몽은 똑같이 꾸는데 아빠는 없다. 아빠는 어떻게 된 것일까?
오죽하야 '눈물길'이라 이름을 붙였을까. 눈물길은 사고가 많이 나는 지름길이지만 위험해서 도통 통행하는 차는 없었다. 늘 딸과 아내를 위한 작지만 의미있는 선물을 마련한 리함은 어김없이 돌아오는 길에 왜그리 딸과 아내가 보고싶은지...아내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늘 쳐다보지도 않던 눈물길이건만 어느새 그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다니던 길인데...설마가 우랄을 삼키고...
센 베노(안녕), 아빠! 라 불러보고픈데 아빠는 없다. 악몽은 계속되고 직원들이 나서서 아빠가 눈물길로 들어섰음을 밝혀내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아빠. 아빠는 살아계시기나 한걸까. 결국 엄마와 갈샨은 차를 빌려서 바이타르에게 간다. 너무나 오랜만이지만 냉랭한 기온만큼 신식며느리와 이 시대 마지막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는 시아버지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갈샨이 극구 우겨서 양떼 이동을 위해 남는다. 바이타르에게 꿈얘기를 하니 그건 좋은 징조라 말해주지만 미덥지가 않다.
아빠는 ...
바이타르는 여전히 말은 없으되 갈샨은 마음을 읽는다. 눈에 질병이 생겨 시력이 잘 보이지 않음도 감지한다. 눈이 역할을 못하니 답답하고 속상한건 손녀일뿐 오히려 청각이 발달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리나 느낌으로 감지한다. 며느리의 수술을 받자는 제안을 거절하며 자연에 순응함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시력을 잃었음을 잘 알면서 그게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한다. 미련한게 아닌 순리라 생각하는 그 고집이 유목민의 삶을 살아내는 숙명이다.
척박한 몽골의 혹독한 겨울의 모습을 어찌 그리도 따듯한 느낌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 '153일의 겨울' 에서 정감을 느꼈었다. 그 글력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한번도 접하지 않은 기후를 책을 통해 마치 아는 것처럼 느끼는 감정. 그랬기에 연재글 '조드'를 접하며 떠올렸던 책. 그 감정이 그대로 이어진 속편이자 두번 째 이야기다. 느낌도 그대로인게 여전히 할아버지와 손녀는 다정다감하지는 않지만 그네식의 다정다감함이 전해져 온다. 자연을 감지하듯 서로의 마음이 이심전심이다. 그걸 읽어내는 내마음도 편안하다. 안타까움과 조마조마함도 끝까지 같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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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베노~! 이 말은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안녕”이다. 우리말로 “여보세요”라고 할 때는 그냥 “베노~”라고 한다. 5년 전과 4년 전 몽골에 다녀온 후 몽골의 팬이 되었다. 이미 여러 포스팅과 리뷰를 통해 가깝게 지내는 몽골 가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번의 몽골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된 몽골 가족은 한국에 들어와 일하고 학교를 다니며 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다시 몽골에 가 있다.
이 책 「센 베노, 아빠!」는 저자 자비에 로랑 쁘띠의 「153일의 겨울」에 이은 속편이라고 한다. 이전 책을 읽지 못해 아쉽기만 했지만 갈샨과 아빠 리함이 재회할 때의 짧은 대화와 할아버지 바이타르와 겪는 유목 생활만 들여다보아도 이전 작품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유목인의 생활을 벗어나 트럭 운전을 하는 아빠 리함이 ‘눈물의 계곡’에서 갑작스레 닥친 눈사태로 실종된다. 트럭 회사 사장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딸 갈샨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엄마인 라알라조차 설득하지 못할 정도로 아빠가 분명 살아 있다고 생각한 갈샨은 아빠의 소식을 전하러 찾아간 할아버지 바이타르의 게르에 남게 된다. 엄마는 당연히 심하게 반대했지만 갈샨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갈샨은 할아버지와 함께 게르에 머물려 유목 생활을 한다. 사나운 조드가 찾아오기 전 양떼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할아버지를 돕는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 할아버지 바이타르에게 생명의 빚은 진 우우간 아저씨와 차아메드 아줌마, 다라이와 이아라드 쌍둥이를 만나게 된다. 각막의 질병으로 하루가 다르게 시력을 잃어가는 할아버지 바이타르를 돕는 것이 갈샨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몽골의 유목민들의 시력은 일반 사람들의 시력보다 4∼5배 정도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 시력을 잃어가는 것이다. 유목민에게는 초원 저 끝의 양 한 마리까지 볼 수 있어야 늑대의 위험에서 지켜줄 수 있는데,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은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것이다. 이미 자신을 떠난 아들이 낳은 손녀는 유목민이 아니었다.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에 놓여있던 벽을 허물어져 버렸다. 극적으로 소통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바이타르 덕에 목숨을 건지고 지금은 굉장히 많은 가축을 가진 유목민이 된 우우간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머리털 하나 보기 힘든 사막에서 죽기 직전 바이타르에 의해 생명을 건지고 양떼를 이동시키며 리함을 찾아 나선 바이타르와 갈샨에게도 큰 어려움 직전 도움을 준다. ‘눈물의 계곡’에서 엄청난 눈사태로 인해 실종된 리함이 구조된 장면은 더욱 극적이다. “동굴은 그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장소였지.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어, 갈샨. 우리를,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어” (p.189) “그들이 내 목숨을 구해 줬어.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죽고 말았을 거야. 갈샨, 나는 그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야. 마지막 원시인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고.” (p.191) 시력을 잃어가던 바이타르가 한밤중에 자신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 늑대에게 총을 쏘는데, 그것은 늑대가 아니고 자신의 아들이자 갈샨의 아빠 리함이었다. 리함은 완전히 피폐해진 모습에다가 다리에 총상까지 입어 수일을 게르에서 치료받는다. 늑대로 오인하여 자신을 쏜 사람도 아버지 바이타르고 자신을 들쳐 업고 게르에서 며칠 밤을 새며 치료하고 간호한 사람도 아버지 바이타르였다.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리함은 딸 갈샨에게 놀라운 얘기를 전한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존재가 동굴에 살고 있는 원시인이라는 것이었다. 동굴에 살고 있는 원시인은 바이타르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얘기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 목숨을 잃을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내 치료한 존재가 원시인이었고,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긴 것도 그들이었다고 한다. 인간과 문명을 피해 살고 있는 마지막 원시인의 존재가 조금 뜬금없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았던 몽골의 끝없는 초원과 사막을 감안하면 개연성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책에서 리함을 구해준 원시인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는가 싶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까지 인간과 공존해 오던 것들은 한순간에 ‘미개’한 것으로 치부된 것이 사실이다. 자연은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지만 유목민들도 반강제적으로 학교에 다녀야 하고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교육을 받지 않는 유목민들은 미개한 사람들로 여기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한다. 도시와 유목민, 현대인과 원시인, 양 떼와 사람들, 노인과 소녀 등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영역을 이 책에서 잇는다. 공간적 소재를 몽골에 둔 것이지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해야 할 시도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이고, 책에서의 극적 장면들처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조우할지 모르는 일임을 감안할 때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두 번의 몽골 여행을 통해 중부내륙과 고비사막을 다녀왔는데 서북쪽 산악지역을 가보지 못했다. 이 책의 배경도 아마 그쪽일거 같은데 다음 번 여행 때는 산악지역과 아름다운 호수인 홉스굴에 꼭 가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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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베노 아빠』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소중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갈샨의 아빠인 리함은 트럭 운전수다. 가족과 한시라도 빨리 재회하기 위해 호오르가 산을 넘는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가 사고로 조난을 당한다. 여기서부터 악몽은 시작된다. 그 날 이후로 갈샨은 아빠가 몰던 트럭이 사고를 당하는 악몽에 날마다 시달린다. 하지만 갈샨은 그 악몽 속에서도 아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갈샨은 현실에서도 만날 수 없는 아빠 리함을 꿈에서도 보지 못하는 이중의 헤어짐을 경험한다. 갈샨의 할아버지인 바이타르는 양을 기르며 생활하는 유목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바이타르 역시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손녀 갈샨이 찾아와도 목소리만 들을 뿐이다. 바이타르에게는 아들 리함이 사고를 당했든 당하지 않았든 간에 역시 사랑하는 아들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다. 갈샨의 엄마인 다일라 역시 참으로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다. 갈샨이 할아버지 바이타르를 도와서 양떼를 이동시키려 할 때도, 다일라는 갈샨과 바이타르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비록 고의는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다일라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생각해야 할 남편 리함을 찾는 일을 방해한 셈이다. 결국 다일라도 눈이 먼 상태다. 바이타르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우우간 역시도 육체적인 눈은 정상이지만 정신적인 눈은 어두운 상태다. 그래서 바이타르를 도와서 양떼를 이동시키고 갈샨을 산사태가 발생한 호오르가 산으로 안내하기는 하지만, 우우간은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우우간은 늑대의 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해서, 바이타르의 행방도 놓치고 할아버지를 찾으려는 갈샨의 부탁도 무시한다. 결국 우우간은 (물론 자신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현실을 택함으로써 계속해서 눈이 먼 상태로 남는다. 이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눈먼 상태를 경험하지만, 그 속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할아버지 바이타르다. 바이타르는 시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손녀 갈샨의 꿈을 통해 현실을 내다본다. 손녀 갈샨의 꿈은 바이타르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꿈속에서 트럭에 아들 리함이 없었다는 손녀의 말을 들은 바이타르는 아들의 생존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바이타르에게 꿈은 단순한 허상이 아닌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이타르가 손녀 갈샨을 자기 곁에 머물도록 고집한 것도 아들 리함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할아버지 바이타르와 함께, 갈샨도 마음의 눈을 새롭게 회복한다. 갈샨은 처음에 자신의 꿈을 악몽으로 생각하지만, 할아버지가 들려준 해몽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심지어 할아버지 바이타르가 리함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듯이 보이는 때도, 갈샨은 바이타르의 해몽을 상기시킴으로써 오히려 바이타르를 격려한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갈샨은 마음의 눈으로 아빠 리함을 보고 있으며 또한 만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결국 리함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인물은 할아버지 바이타르다. 비록 육체적인 시력이 거의 상실되어 아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는 하지만, 바이타르는 그런 아들이 기력을 회복하는 데 성심을 다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리함은 건강을 되찾는다. 하지만 리함이 궁극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의심받는 ‘크시기이크’라는 원시인들이다. 문명의 혜택 속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크시기이크가 보이지 않는다. 문명인들의 눈에 크시기이크는 무명의 존재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크시기이크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센 베노 아빠』는 우리에게 물리적인 눈이 아닌 정신적인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의 눈은 우리를 지탱하는 힘인 동시에 현실의 한계와 장애를 극복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정말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비록 지금 당장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마음의 눈으로 늘 볼 수 있기에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교훈을 일깨워준 『센 베노 아빠』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사랑과 인정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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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광활한 대지와 가족의 따뜻한 정을 그려냈던 <153일의 겨울> 속편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옛 유목민 생활을 하며 자연의 품 속에서 한층 성장했던 갈샨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센 베노, 아빠!>는 첫 시작부터 집중하게 합니다. 갈샨의 아빠 리함의 이야기이지만 리함이 위험에 처할 것 같은 느낌을 아주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딸을 하루라도 빨리 보기 위해 좋지 않은 기상 상태에 위험한 호오르가 산을 넘으려는 리함. 그리고 산사태. 리함은 이 깊은 산 속, 외로운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갈샨은 아빠의 사고와 실종을 믿을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악몽 속에서도 트럭에는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갈샨은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아버지 바이타르와 함께 공유하려 합니다. 오랜 세월 자연 속에서 조금의 의미라도 읽어낼 수 있는 바이타르는 아들의 실종에 대해 손녀와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요?
갈샨이 엄마와 함께 도시에서가 아니라, 아빠의 사고가 난 호오르가 산 근처 할아버지 바이타르 곁에 머물려고 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샨은 정말로 용기 있고 자립심이 강한 소녀임이 틀림 없습니다. 그들의 여정에 끊임없이 어려운 고비가 계속되지만 갈샨은 이제 할아버지의 보호 속에서도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려 하니까요. 그런 행동은 방종이 아니라 이제 갈샨이 한 걸음 더 성장했음을 의미합니다.아빠 리함이 살아있다는 것을 끝까지 믿은 갈샨의 생각은 아빠에 대한 사랑이겠죠. 그저 믿을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라기 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한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153일의 겨울>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센 베노, 아빠!>에서도 몽골의 자연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혹독한 추위와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 속에 위험한 동물들이 등장하고 산사태와 온갖 위험이 가득한 곳이지만 갈샨과 바이타르가 느끼는 자연의 위대함을 함께 공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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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갈샨은 아빠 리함이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아빠를 기다린다. 모두들 아빠는 죽었다고 말하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소녀 갈샨은 아빠에 대한 믿을을 놓치 않는다. 매일밤 꿈에 아빠의 빈트럭이 나오는걸 무서워하지만 자신의 꿈의 비밀을 찾으려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은 갈샨은 눈이 뿌옇게 되버린 할아버지에게 꿈 이야기를 말해주고 할아버지가 비밀을 풀어주길 기다린다. 엄마와는 너무나도 다른 할아버지. 문명의 저편에 있는 할아버지는 눈이 보이지 않으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찾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종된다면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것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을때 난 어느쪽을 선택할까... 나라면 어딘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희망은 고통이 되어 하루하루 견뎌내기 힘들었을거 같다. 곁에 있을때 잘해야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곁에 있기에 소중함을 망각하는 나.
가족에 대해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고마운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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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피그말리온 효과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는 책. 그러나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으로서 숙연한 마음이 먼저 앞서게 되는 책입니다.
센베노는 안녕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본문 중에도 몽골어가 나와요. 책의 번역 과정에서도 몽골어 의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153일의 겨울" 후속이라고 해요. "153일의 겨울"을 읽어보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책의 주석 등을 보면 이해가 되어 책 읽는데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153일의 겨울"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몽골의 혹독한 겨울 추위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하네요. 아시아 전지역을 다니며 트럭을 운전하는 갈샨의 아빠가, 가서는 안되는 눈물길을, 가족과 빨리 만나야겠다는 일념 하에 가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아빠가 산사태로 인해 집에 돌아오지 못한 거죠. 갈샨은 꿈을 꿉니다. 아빠의 트럭이 발견되지만 아빠의 운전석은 비어있는... 그래서 갈샨은 아빠가 꼭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았어요.
모두들 아빠가 죽었을 거라고 했지만 갈샨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엄마의 반대도 무릅쓰고 할아버지와 나선 길.. 기적처럼 아빠와 재회하게 됩니다. 아빠가 행방불명된 이후로 갈샨의 오후는 텅 비어버린 거대한 주머니를 닮아갔다는 부분에서부터 이 책에 몰입했던 것 같아요.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방법, 그리고 마음으로 다가서는 법이 거대한 몽골의 대자연 앞에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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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베노, 아빠 * 몽골 문화를 엿보다.
몽골소녀와 고집스런 할아버지의 혹독한 몽골 겨울나기를 이야기하고 있던 전작 '153일의 겨울' 을 너무도 감동적으로 만났기에 그 후속편이라는 사실만으로 큰 기대감을 가졌던 센 베노, 아빠 ! 였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전통과 현대로의 과도기가 있지요.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였구요. 전통의 존중과 현대화가 이루어지는 그 과정안엔 갈등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153일의 겨울이 그러했듯 센 베노 아빠에서도 몽골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합니다.
몽골 호오르가 산의 눈물길에서 아빠가 사라졌습니다. 153일의 겨울의 여운속에서 접한 초반 아빠의 실종이었던지라 어떻게 이 슬픔과 마주해야 하는걸까 굳은 마음을 다지게 했으니, 아빠가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 갈샨은 텅 비어 있는 트럭이 자신에게 달려들다가는 이내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악몽을 꾸었답니다. 그리곤 숨막힐것 같은 기다림이 시작됩니다.
48톤짜리 우랄 트럭과 함께 먼 국경지대를 누비고 다니던 아빠의 실종은 엄마와 갈샨이 감내하기엔 너무나 큰 슬픔이었으니 그들은 결국 모두가 떠나버린 차궁에서 홀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혹독한 겨울을 나기위한 대이동을 시작합니다. 아빠가 실종된 눈물길이 있는 호오르가 산을 행해서 ~~~
혹독한 겨울의 날씨와 굶주린 늑대가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100여마리의 양떼들과 그들을 지켜줄 10여마리의 개,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와 , 도시에서 온 작은 여자아이가 길을 떠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것은 며칠 후 유일한 동료로 남아있는 우우간의 가축들과 합류했다라는 사실 정도였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울을 나기위해 떠난 그 길은 역시나 험난합니다. 혹독한 추위가 시작되고, 눈이 내리고 늑대의 습격까지 이어지는 하루하루, 게다가 갈샨은 아빠의 행방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고통이 밀려왔던 밤 갈샨은 드디어 죽은줄만 알았던 아빠를 만납니다. 센 베노 아빠. ( 보고싶어요 아빠)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다시금 몽골의 전통문화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153일의 겨울에서는 매가 매개체가 되었다면 센 베노 아빠에선 꿈의 해몽과 원시인들이 있었지요.
"그들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온 생을 다해 그들과 재회하려고 애쓴다고들 하지. 그런데 난 한 번도 이룬 적이 없구나. "
아무에게도 존재가 밝혀지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내면서 목숨을 구한 아빠 리함이 목숨이 다해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목민으로 살아갈지, 아님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도시로 돌아갈지 궁금해지는 마지막이었답니다.
안녕, 아빠 ,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보지 못해도 서로를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던 가족, 그들을 통해 변화해가는 몽골의 전통 문화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가는 사람들의 아련한 시간속에서 뭉쿨한 감정들이 굴곡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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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베노'는 몽골어로 '안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네요.
그럼 아빠와 이별하는 이야기일까요. 어쩐지 슬픔을 품은 듯한 책인 것 같아 마음을 다잡으며 읽기 시작했어요. 이야기는 정말 단순해요.복잡하게 머리 굴려야 하는 부분이 거의 없어요.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우리의 삶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진정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여정은 참 쓸쓸하고 힘겨울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153일의 겨울>의 뒷 이야기입니다. 갈샨이라는 소녀와 그의 가족을 통해서 변해가는 사회를 받아들이는 힘겨운 싸움을 엿볼 수 있었어요. 양떼를 몰고 다니며 사는 삶을 버리지 못한 할아버지와 거대한 트럭, 우랄을 몰고 다니며 새로운 생활을 꿈꾸는 아버지의 생이 그려집니다. 책속에 나오는 몽골의 자연은 쓸쓸하고 황량해 보여요. 아빠의 트럭을 삼켜버린 무시무시한 자연,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 늑대와 맞서며 양을 키우는 거친 유목생활...
누군가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찾게 되고, 또 그 사람의 도움으로 다른 생명을 구하고...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이어지지요. 호들갑스럽게 아빠를 찾아나서는 대신 마음을 통해 아빠와 더 가까워지려는 할아버지 바이타르의 묵묵한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아빠의 죽음을 떠올리는 꿈을 매일 밤 꾸는 갈샨 대신 꿋꿋하게 마음속으로 믿으며 행동으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바이타르는 깊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냥 삶을 받아들이며 살겠다는 의지는 어쩌면 바보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는데...왜 그리 고집스럽고 답답할까..했는데, 결국 갈샨의 아빠를 찾아낸 건 할아버지의 진한 고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지네요.
우우간 가족과 만나 함께 양떼를 몰고 다니고, 늑대를 막고, 아빠를 만나게 되는 과정도 잔잔한 감동을 주네요. 황량한 자연속에서 인간이 뭉쳐서 나눌 수 있는 정감의 가치도 새롭게 깨닫게 됐고요. 죽었을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아빠를 찾아 떠난 시간들...돌아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쓸쓸한 기억이겠지만, 아마 지금쯤 갈샨은 다시 행복해졌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과정,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다시 채워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네요. 짧고 단순한 이야기지만,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해준 따뜻한 느낌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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