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는 대화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해의 여지가 남지 않는 효율적인 대화. 걸거침 없는 정보의 흐름. 아무런 의문도 질문도 남기지 않는 명쾌한 소통. 그에 비하자면 현실 속 커뮤니케이션은 불필요한 오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는가.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에 내재된 불확실성과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실관계만을 철저하게 따지는 논픽션 글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생긴 버릇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은 해석자의 불가피한 주관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오해의 불가피한 필연성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쨌거나 소설 하나에도 그것을 읽는 독자의 수만큼 해석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그런 오해의 필연성 자체를 긍정하지는 못했다. 내게는 어디까지나 불편한 동거일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오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며, 나아가 이를 산뜻하게 받아들이고 그 즐거운 오해를 시작할 때 진정한 배움도 시작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완벽하게 효율적이고 명료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상대방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금방 얻어낼 것이고, 그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해진 시점에서 대화는 끝날 것이다. “그만하면 됐어, 이젠 다 알았으니까.”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에 그치고, 상대방은 그 정보의 컨테이너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만다. 화자는 대화에서, 그리고 자신의 말에서 소외된다.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았다고 선언한 이에게는 더 이상의 의문도 남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도 남지 않는다.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질문이 없으므로 더 이상의 배움도 없다. 이는 실제 대화 상황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명료하고 직설적인 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구구절절한 대화는 생략하고 빠르게 답을 내려는 것, 나아가 어서 이 지겨운 대화를 중단하자고 재촉하는 것으로 보이기가 십상이다. 특히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그런 오해를 사게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반면 모호하고 에두르는 대화는 미로를 탐험하듯 호기심을 자아내고, 그래서 더 집중해서 듣게 만들고 더 질문하게 만든다. 설령 결론에 곧장 도달하지는 못해도 거기서 오는 서스펜스를 즐기는 경우가 있는데, 어쩌면 그 상대방과 대화하는 일 자체가 즐겁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내가 뻔히 아는 이야기를 상대방이 신이 난 채로 할 때도 대화의 즐거움을 위해서 전혀 몰랐다는 듯이 끝까지 들어주기도 한다. 이러한 대화는 화자가 인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며, 대화 상황과 자신의 말에서 소외되지 않고 온전히 참여하게 만든다. 경청의 힘이라고나 할까. 이때 화자는 미처 말하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까지 말하게 되고, 여기서 질문자는 예상하지 못했던 조우에 뜻밖의 배움을 얻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대화가 주는 묘미 중 하나다. 뻔히 다 읽히는 사람은, 신뢰할 수는 있어도 흥미나 존경은 생기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말과 같아서 잠자코 듣고 있으면 고역일 뿐이다. 반면 무슨 말인지 당장 듣기에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의 말은 강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그런 물음을 일깨우는 사람을 스승이라 부른다. 스승은 관심과 질문, 어쩌면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는 내게 주어진 일종의 수수께끼이기도 하고 보물 지도와도 같은 암시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흔하디흔한 동네 아저씨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쉽사리 알 수 없는 깊은 무언가가 느껴지게 만든다. 내게만 다가오는 암시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보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오답자로서의 독창성’입니다. 어떤 메시지를 어느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오해했다는 사실이 그 수신자의 독창성과 아이덴티티를 결정짓는 것입니다.”(131쪽)
어쩌면 사실 그 사람에게 특별한 수수께끼라고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오독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인간의 진상이란 그 자신조차 끝내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정독이든 오독이든, 내가 특별한 물음을 품었다는 사실이 나만의 단독성, 독창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배움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그렇다고 골치 아프게 억지로 없는 물음과 수수께끼를 만들어가며 독창성을 흉내 내지는 말자). 여기서 포인트는, 내가 배움을 얻고자 하는 그 ‘스승’은 어쩌면 가르치려는 의지는커녕 의사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배우는 사람이 있고, 가르침이 없어도 배움이 가능하다. 이러한 형태의 배움을 실천하는 태도를 저자는 ‘배움의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상식과 달리 배움과 가르침은 대응되는 개념이 아니다. 내가 배움의 주체라면 가르침이 없어도 배움은 일어나고, 내가 배움의 주체가 아니라면 가르침이 있어도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핵심은 배움의 주체만이 상대방이 발신하는 온갖 노이즈를 수수께끼의 단서가 될 신호로써 해석하고 물음의 형태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어떤 의도로 헛기침을 한 것일까?” 단순한 헛기침일 뿐인데도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스승이다. 또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상대방을 스승으로 만드는 배움의 주체다. 그런 상태라면 설령 상대방이 발신하는 것이 발신자로서는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노이즈일 뿐이라 해도 수신자는 거기서 문답의 과정을 통해 나름대로의 배움을 얻게 된다.
“‘당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상대방이 있는 한 배움은 무한으로 열려 있습니다.”(150쪽)
앞서 말했듯 이는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오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본질적으로 형식화될 수 없는, 상당히 모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간의 소통에서, 해석의 주권은 발신자가 아닌 수신자에게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이해는 오해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이런 오해는 나를 성장시킬 뿐 누구에게도 폐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 스승이 책이나 자연 혹은 관념이라면 더욱 그렇다. 꼭 살아있는 사람만이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스승은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 오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해가 불러일으키는 의문을 포용하자. 그 의문이 불러일으키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려고 해보자. 나만이 할 수 있는 오해에서 비롯된 질문인 만큼, 그 질문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질문을 뻔한 상식의 대답으로 흘려넘기지 말고, 쑥스러워하지도 말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하고 독창적인 대답을 한번 만들어보자. 그 과정에서 타자와 세상에 대해 알게 되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없는 오해 지어내려 들지는 말고. 골치 아프니까. |
|
|
|
안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을 닫는 위험과 늘 함께한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내 이쪽은 이쪽이 말하는것을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듣는 이에게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고 혼자서 계속 열변을 토하는 자도 듣는 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억지로 들을 수밖에 없게 되면 우리는 마치 초절임을 당한 것처럼 깊은 상처를 입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