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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열전 - 박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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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사건과 인간의 두 축을 중심으로 서술되며, 역사서술은 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왜?', '어떻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건은 풍성한데 그것을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설령 있더라도 군주, 지배층 등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건 뒤에 가져겨 있어 역사가로부터 외면받는다. 균형 잡힌 역사서술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신이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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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사건과 인간의 두 축을 중심으로 서술되며, 역사서술은 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왜?', '어떻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건은 풍성한데 그것을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설령 있더라도 군주, 지배층 등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건 뒤에 가져겨 있어 역사가로부터 외면받는다. 균형 잡힌 역사서술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면, 인간은 천지를 변화,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그 변화와 발전의 주체인 인간의 삶과 생각을 중심으로 한 역사서술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역사 속의 인간 역시 거대한 역사의 구조물에 갇혀버린 듯 좀처럼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 p. 5 ~ 6의 서문 中에서 -

 

 [고려사][고려사절요]는 비록 고려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모두 조선 시대에 편찬되었다. 이전의 사료들을 정리하여 객관적으로 다룬 부분도 있지만, 조선이 역성혁명을 통하여 고려 다음에 성립된 왕조임을 감안한다면 이 책들을 그대로 고려의 역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고려 역시 [고려실록]이 쓰여지긴 하였으나,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고려의 역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기에는 많은 제약이 뒤따르고 있다. 더구나 조선은 강력한 유교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한 그릇된 평가 역시 다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 역사에 대한 연구가 더욱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서문과 고려사에만 전념한 저자의 이력으로 인하여 [고려 열전]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 할 수 있다. 역사의 주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그들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은 기존의 역사서에 가려져 있던 색다른 관점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이 책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인물에 대한 색다른 평가와 더불어 잘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끌어내면서 충족시키고 있는데, 가장 먼저 다루는 견훤에 대한 서술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보통 역사를 승자의 기록 내지는 승자독식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역사는 바로 승자에 의하여 기록되다보니 경쟁자에 대한 평가는 다소 치우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의 역사가 대부분 조선 시대에 서술되었다는 점을 언급하였는데, 견훤은 여기에 더하여 고려의 숙적이었다는 점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견훤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들을 이끌어내고 있다. 비록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민심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것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점은 반란이라는 부정적인 부분에 가려진 견훤의 개인적인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앞서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견훤이라는 인물이 역사의 방향성에 일조하였다는 점을 바로 '마한 계승론'을 통하여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나는 삼국의 시원을 살펴보았다.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 세대를 거듭해 크게 흥했다. 이에 따라 진한과 변한이 마한의 뒤를 이어 일어났다. (중략) 나는 지금 완산(전주)에 도읍하여 (백제) 의자왕의 오래된 억울함을 설욕하고자 한다.

 - p. 24의 [삼국사기] 견훤 열전 中에서 -

 견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실려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견훤의 역사 의식은 사실이라 볼 수 있는데, '마한-백제-후백제'라고 생각하는 그의 계승 의식은 단순히 통합전쟁으로 비춰질 수 있는 후삼국시대를 역사 계승에 따른 대결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고려 역시 '마한-고구려-고려'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대결의 명분을 주장하였으니 이 시기의 전쟁은 '삼한일통(三韓一通)'이라는 역사 인식의 계승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견훤은 통일 신라의 피지배층의 민심을 바로 '마한-백제'의 역사 계승이라는 명분을 통하여 모을 수 있었다는 점과 한 개인의 역사에 대한 의식과 관점으로 인하여 당대의 역사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은 확실히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궁예가 이상주의를 주장하면서 통일을 이루지 못한 부분이 왕건 세력에 대한 명분을 주었다는 점으로 확장한다면 이러한 역사 계승 의식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최지몽(907~987)에 대한 설명은 조선과는 다른 고려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유교를 숭상하면서 불교마저 배척했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유교는 물론이고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사상들에 대해서도 관대함을 보여주는데, 바로 최지몽의 존재가 그러한 상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명의 국왕을 63년간 보좌한 그의 능력은 바로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점성술과 꿈에 대한 해몽이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미신으로 치부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지몽은 고려 태조 왕건의 꿈을 정확히 해몽하면서 이후 왕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이 시점에서 최지몽과 함께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바로 최승로를 들 수 있다. 최지몽과 비슷한 시기에 역시나 많은 왕들을 보좌하면서 천수를 누린 이 인물은 고려 시대에 유교를 체계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따라서 이 둘의 양립은 바로 고려 왕조가 유교는 물론 이외의 사상에 대해서도 골고루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교를 통한 정치를 주장하는 최응에 대하여 왕건이 아래와 같은 대답을 하면서도 통일 이후에도 불교를 숭상한 점도 그러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전쟁이 그치지 않아 한치 앞의 편안함과 위태로움도 알 수 없다. 백성들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부처님을 비롯해 산수의 신령한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것이다. 어찌 이런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전쟁이 그쳐 편안해지면 유교이념으로 풍속을 고치고 백성을 교화할 것이다."

 - p. 102의 [보한집] 中에서 -

 

 [동명왕편]의 저자로 알려진 이규보를 우리는 고구려 계승의식의 소유자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저자의 주장은 '소중화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보통 이 사상은 조선 중기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하자 조선 스스로 중화를 자처한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시대에도 이러한 개념이 성행하였다.

 (국왕 문종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았으며, 위엄으로 오랑캐들을 교화하셨다. 황제가 보낸 조서는 친절하고 간곡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 성명이 빛나고 문물이 번화했다. 그들은 융성한 문물이 중국에 견줄 만하여 소중화라 일컬었다.

 - p. 171의 [동문선] 中에서 -

 고려 문종 시기에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한 고려는 요나라와 금나라에 시달리던 송에 견주어서 그 문물의 수준이 중국에 뒤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의 '소중화 사상'은 중국과의 대등함을 강조하는 의미였다. 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의 '소중화 사상'은 중국 한족을 중화문명의 중심으로,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에 근거한 것으로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규보가 이러한 '소중화 사상'에 경도되어 고구려는 물론 설총과 최치원을 비롯한 신라의 인물에 대한 호평한 점은 [동명왕편]이 단지 고구려 역사 의식의 계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자부심에서 비롯되어 쓰여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최영 장군에 대한 평가는 확실히 승자독식의 결과를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 일파가 그를 처단한 이유는 바로 사대(事大)에 어긋난 요동정벌을 추진하였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경한 일이기 때문에 이전의 공(功)은 의미가 없다는 그들의 논리는 조선의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뒤늦은 평가임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요와 금, 원과 명과 같은 중국의 다양한 왕조들과 실리에 따른 외교를 이미 벌여왔다는 점에서 최영의 요동정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의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일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선 관점의 평가는 원나라에서 환관으로 활동한 고려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 여성들의 삶에 대한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환관과 여성에 대한 조선의 금기가 고려의 역사 평가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를 통하여 고려의 역사가 조선에 비하여 얼마나 역동적이고 개방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의 삶은 오히려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열전]은 자칫하면 단순한 인물들의 나열에 그칠 수 있는 우려를 범하지 않고,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이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가벼운 책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들 인물이 역사를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간 역사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종속적인 존재로 바라본 개인에 대하여 달리 바라볼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 역사책들을 읽고 여러 책을 증거로 삼아 참고하고 조사해야 한다. 오직 하나의 책만 믿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그 사이에 행운으로 성공한 것도 있고 불행으로 실패한 것도 있다. 대체로 사실이 맞지 않는 곳이 많을 뿐 아니라 맞는 곳도 역시 믿을 수 없다.

 - p. 21 ~ 22의 [성호사설] 中에서 -

 조선 후기의 이익[李瀷]의 말대로 다양한 역사책에 대한 비교, 분석을 통하여 올바른 역사를 이끌어낼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확장하면 다양한 역사책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는 것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다양한 기록에 대한 분석 역시 역사 연구에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 [고려 열전]은 분명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이 리뷰는 예스24블로그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글입니다. ]  

g*******7 2019.05.07. 신고 공감 12 댓글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