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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아마 빗소리와 종소리의 환청에 한동안 시달리게 될지 모른다. 장시간 배를 타면 육지에 내려서도 한동안 뱃멀미를 하듯 속이 울렁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 빗소리와 종소리가 이 소설의 배음이자 지배적인 정서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하자면 음울함을 배가시키는 춤, 바로 탱고를 들 수 있겠다.
참고로, 이 소설은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영화의 러닝 타임이 일곱 시간이 넘는다. 그 막막하게 지속되는 시간 역시 이 소설을 지배하는 것들 중 하나다. 어떠한 희망도, 소망도 없이 지속되는 시간, 아무런 가망도 없이 계속되는 인생. 그 자체만으로 질식할 것 같은 시간과 삶의 무게가 인내하기 힘든 것이라면, 그 견딜 수 없음을 영화의 러닝타임만으로도 표현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영화가 미치게 보고 싶어질 것이다. 도대체 이 막막한 소설을 어떻게 영상화했을지, 그 숨막힘을 어떻게 표현해냈을지 궁금해질테니까.
이 소설의 제목은 '사탄탱고'이고, 실제로 소설 속에서 (폐허가 된) 집단농장의 사람들은 술에 절어 밤을 지새우며 탱고 춤을 춘다. 이 소설의 구성은 탱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앞으로 여섯 스텝 가는 탱고의 스텝에 맞춰 1부룰 구성하고, 뒤로 여섯 스텝 가는 탱고의 형식에 맞춰 2부를 구성했다. 1부는 1장에서 시작해 6장으로, 2부는 역순으로 6장에서부터 시작해 1장으로 끝나는 구성인데, 이렇게 하나의 원을 이루는 순환 구조를 차용하여 작가는 피할 수 없는 몰락의 닫힌 원을 완벽하게 그리고 있다(참고로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2부 1장의 제목은 '원이 닫히다'이다). 이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형식적인 완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인간 군상의 완벽한 절망과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완벽한 완결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랍게도 이 (완벽한) 소설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데뷔작이다. 소설가로서 처음 쓴 작품이 이렇게나 방대하고 집요하고 압도적이라니 경악스럽다.
덧.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겨울이 우기다. 지구의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겠지만 캘리포니아도 극단적 여름과 극단적 겨울로 계절이 이분화되고 있는데, 올해는 10월 중순까지 극단적 여름이었다가, 갑자기 극단적 겨울로 접어들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 이번 시즌의 첫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비바람을 대동하고 휘몰아친 것이다. 그리고 그 비는, 예보에도 없이 게릴라처럼 종종 출현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내가 환청처럼 들은 빗소리는 소설 속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실재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 앞으로 나의 시 월은 이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그 해의 첫 비가 내리는 날이면, 『사탄탱고』의 이 첫 문장이 떠오를 것 같다.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 (p.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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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데뷔작! 몰락의 파도에 부유하며 휩쓸리는 주인공들처럼 마지막 장까지 속절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헝가리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호명되었다. 무슨 운명이었을까. 노벨문학상 발표 당일, 나는 우연히 『사탄탱고』를 소개하는 글을 읽고 습관처럼 온라인 서점의 구매 목록에 담아두었는데, 마침 그가 지목된 것이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작가일 뿐만 아니라 예의 ‘실험적 산문, 예언적 언어, 종말론적’이란 수식들이 일종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일단 저 제목과 붉은 표지의 강렬함에 압도된 뒤라서 주저 없이 이 작품을 선택했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일단 도입부를 읽는 데만 약간의 정성을 기울이고 나면 몰락의 파도에 부유하며 휩쓸리는 주인공들처럼 마지막 장까지 속절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란 것이었다. 나는 이제 겨우 그의 데뷔작을 읽었을 뿐인데, 라슬로라는 이름은 이토록 강렬하게 각인되고 말았다.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홀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 321p
어쩌면 이들은 연속된 불행에 일상의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행이 계속되다보니 몰락해가는 현실을 저지할 힘도, 변화에 대한 갈망도,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희망도 사라져버린 게 틀림없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어가던 1980년대 헝가리의 어느 해체된 집단농장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사탄탱고』 속에는 지속된 가난과 몰락으로 무력감에 길들여진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기필코 내일은 떠나리라 다짐하면서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후터키, 의자에서 거의 몸을 일으키지 않고 최소한의 생활과 움직임만을 추구하는 의사, 마치 펑크 난 타이어처럼 그저 술집에서 술이나 마실 수 있으면 족한 헐리치 등 이들은 모두 ‘탈출의 전망이 부재하는 고통’에 영원히 갇혀버린 것만 같다.
그의 눈은 빛 속에서 맴도는 수많은 먼지들을 보았고, 코는 눅눅한 부엌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갑자기 혀 끝에 신맛이 느껴졌다. 그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농장이 해체되고,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또 미련 없이 떠나가버린 뒤에 의사와 학교 교장을 포함해 오직 그와 몇몇 집들만이 남았는데, 누구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음식 맛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죽음은 무엇보다 수프와 고기 접시에, 그리고 담벼락에서부터 스며들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22p
여위고 남루한 몰골로 그는 도시를 향해 나아가고 마을은 점점 등 뒤로 멀어져서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는 자신이 돈을 손에 쥐기도 전에 잃어버렸음을 깨달았고, 오래전부터 예감한 일이 사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는 떠나려고 해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의 그늘 속으로 숨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 바깥, 마을 외부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몹시 낯설고 불확실한 무엇일 따름이었다. / 32p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리미아시라면 분명 죽어 있던 마을을 되살리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길로 술집에 모여 밤새 술에 절어 기쁨의 탱고를 추며 그간 불안과 절망으로 억눌려 있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녀가 꿈꾸었던 ‘돈 나무’에 대한 환상만큼이나 헛되고 또 다른 형태의 몰락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없애고, 또 없애도 소리 없이 생겨나 모든 것을 뒤덮는 거미줄처럼 헤어나올 길이 없는 쇠락의 운명에 탈출구는 없다.
‘우리는 이 세계라는 돼지우리 속에서 태어나 갇혀 있지.’ 그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물 속에 뒹구는 돼지들처럼 뭐가 어찌된 건지도 모르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젖꼭지를 향해 아우성치지. 사료 통으로 빨리 가려고, 밤이 되면 침대로 돌아가려고 허둥대는 거야.’ 그는 바지의 단추를 잠그고 채찍질하듯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내 낡은 뼈다귀를 씻어다오!” / 210p
“난 예전엔 잘못 생각했어.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네. 나와 벌레, 벌레와 강물, 강물과 강을 넘어가는 고함 소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건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거야.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귀 늘어진 양반!” / 321p
이처럼 작가는 묵시록 문학의 거장답게, 체제에 철저히 유린당하다 끝내는 고통의 원 안에 갇히고 마는 인간 군상을 거침없이 그려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마냥 절망적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지독한 몰락의 끝에 이르렀을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뜨고 마침내 세계의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 안에서 여전히 희망하는 인간을 꿈꾸는 라슬로의 문학은 그래서 음울하나 어둡지 않고, 고통스러우나 절망적이지 않다.
“잘 알아둬라. 인생의 비밀은 농담에 있다는 걸.” / 363p
평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에 높은 벽을 느꼈던 분들이라면 『사탄탱고』 만큼은 도전해봄직 하지 않을까 싶다. 복잡한 상징성이나 독특한 서술 구조를 애써 의식하지 않아도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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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의 그 춤을 <사탄탱고>를 읽고 사탄탱고,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제목이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로 잘 알려진 『늑대와 춤을』처럼, 사탄과 탱고를 추듯 인간과 사탄이 모종의 거래를 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작품일까. 등장인물들이 악마 혹은 그와 비견될 만한 사람과 춤곡에 맞춰 탱고를 추는 모습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손을 놓치거나 동선이 꼬여 중간에 그만두거나, 다른 누군가는 끝까지 춤을 춘 뒤 무대 공연을 끝낸 아이돌 같이 엔딩 포즈를 취할지도 모른다. 20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사탄탱고>는 읽기 전부터 내 머릿속에서 상상의 스텝을 밟아나가게 만든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의 눈걸음과 인물들의 발걸음은 느려지다 못해 못 박힌 듯 꿈쩍도 안할 것만 같다. '비'와 '진흙' 그리고 '술(집)' 때문이다. 마을에는 쉼 없이 줄곧 퀵퀵 슬로우의 탱고 스텝같이 '비'가 내린다. 몰락한 집단농장의 사람들은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물욕, 정욕, 자유욕 등 저마다의 이유로 빗속을 걸어가며 연신 '진흙'을 밟아댄다. 진창에서 빠져나온 발길이 닿은 장소는 마을의 하나뿐인 '술집'으로, 그곳에서 그들은 또 진창 '술'을 마시면서 어떻게 해도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잠시나마 잠재운다. 술집은 마을의 유일한 소통 창구이자 일종의 광장으로 기능하지만, 그런 이유에서인지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고 오해가 증폭되는 공간으로도 여겨진다. 대체로 비와 흙은 만물을 소생시켜 생명력을 불어넣는 요소로 여겨진다. 반면에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머리와 옷을 내리누르는 비와, 다리와 신발을 잡아끄는 진흙은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활력마저 소멸시키려는 모양새다. 여기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 겹쳐 보인다. 단편 「진흙」에서 죽음을 암시하는 진흙 덩어리가 나오기도 하거니와, 헝가리의 어느 마을과 아일랜드의 더블린이라는 공간은 다르지만 그 안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이들에게서 꼭 닮은 '마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까닭이다. 마(치 좀)비된 자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 둔해지거나 멈춰버린 자신을 새로이 깨우는 일일 테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때 집단농장 거주자들의 '후원자'로 활약하다 뜻밖의 사고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리미아시', 어떤 이는 그를 '재간꾼'이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사기꾼'이라 부를 정도로 평가가 극단으로 갈림을 그 자신도 모르는 바 아니다. 어찌됐든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부활자가 되어 다시 나타난 그가 그저 반가운 구원자로 비칠 따름이다. 이리미아시가 '에슈티케'라는 아이의 죽음을 빌미 삼아 그들을 꾸짖는 대목은 정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사탄의 탈을 쓴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마을 사람들을 두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각자의 마음 한 구석에 일종의 악마성을 숨기고 있어서다. 그런 불편한 진실을 흡사 상처난 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이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작중 비극성을 높이고 작가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가 에슈티케가 아닐까 싶다. 비정상적인 가족과 살면서 제대로 된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지적 장애까지 있어 독자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자극시킨다.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욕망,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어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무력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리미아시의 표현대로 그들이 (무)의식중에 어린 양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그려진다. 한편으로는 어른들의 속마음, 그러니까 사탄(같은 존재)과의 거래를 통해서라도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에슈티케도 어렴풋이나마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한다. 소녀 또한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울리는 '종(鐘)소리'를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들처럼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 종(終)소리를 따라 스스로 죽음으로써 도무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의 작별을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속에서 가장 어리고 여려 작아 보이지만 그 역할과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다시 첫 장을 여는 기분이 든다. 마치 탱고 한 자락을 마친 것처럼 말이다. 무대 위에서 나아갔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춤이 곧 탱고임을 모르지 않는다. 물론 거미줄에 걸린 것마냥 이리미아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이 술집의 전등 아래서 집요하게 8자를 그리며 춤추는 말파리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닫힌 결말을 가졌다고 단언하지 않을 것이다. 무릇 인간이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또 찾아야 하는 존재로 알고 있으니까.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1980년대 헝가리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시민들이 해방된 역사가 증거하듯, <사탄탱고>는 외따로 살기보단 서로 함께 연대하고 소리내며 자유로운 무대를 만들어 나가야함을 은연중에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연말리뷰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라슬로 #알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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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노벨문학상은 헝가리 현대문학의 거장 크러스터호르커이 라슬로에게 돌아갔다.『사탄탱고』는 헝가리 출신 벨라 타르 감독이 1994년에 만든 영화 <사탄탱고>(러닝타임은 438시간) 원작 도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헝가리의 공산권이 해체(1989년)되기 이전(198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공산주의의 몰락을 앞서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작가의 데뷔 소설이란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소설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1장부터 6장까지, 2부에서는 6장부터 1장까지 역순으로 진행되는 방식이다. 원을 그리며 추는 춤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소설의 목차를 ‘춤의 순서’라고 한 점이 인상적이다. 악마와 춤을 추는 집단 농장 사람들과 그들에게 영웅 혹은 메시아적 인물로 비치는 이리미아시가 추는 춤을 상상해본다. 춤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귀추가 주목되지 않는가.
몰락한 농장 사람들이 이리미아시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이리미아시는 ‘희망없는 사람들의 가망없는 상황을 구제해 줄 목자’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리미아시는 일 년 하고도 반 년 전에 죽었다고 소문이 났으나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치 메시아를 기다리듯 희망에 차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앞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처한 상황을 보여준 바 있다. 정부의 정보원 노릇을 하다가 의심을 받아 그들에게 내쳐졌다.
이리미아시는 왜 농장 사람들에게 메시아처럼 여겨지는가. 그 또한 농장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데 말이다. 서투르고 사기꾼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엇에 씐 것처럼 이리미아시를 기다리는 장면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다. 농장 사람들은 누구라도 붙잡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의사만 유일하게 이리미아시를 가리켜 사기꾼이라고 일컫는다. 농장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하여 각자의 기록을 남긴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의사의 시선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주요 인물을 보자. 먼저 슈미트 부인은 타락을 상징하는 인물에 가깝다. 다르게 보면 몰락한 집단 농장의 배경과도 비슷하다. 후터키며 술집 주인 등을 유혹해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리미아시다. 이리미아시가 나타나는 순간 순한 양이 되어 불평불만이 사라진다. 그저 이리미아시를 위해 묵묵히 따를 뿐이다. 이리미아시의 존재가 아이러니다.
에슈티케는 호르고시네 막내 아이다. 호르고시의 두 자매 머리, 율리와 서니 그리고 엄마는 어린 에슈티케를 보살피지 않는다. 서니가 거짓말로 에슈티케가 모아둔 돈을 갈취한다. 이를 알게 된 에슈티케는 자기가 죽인 고양이를 데리고 저택으로 가 쥐약을 먹고 죽는다. 에슈티케의 죽음은 불온한 세상에 대한 외침이다. 악마와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에슈티케가 죽기 전 술집을 들여다보아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진창길에 빠진 의사만 걱정할 뿐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어린 여자애는 혼자 죽음을 맞이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저물어가는 공산 체제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이리미아시가 농장으로 돌아온 이유는 명백하다. 농장 사람들이 힘들게 벌어온 돈을 가로채겠다는 의도였다. 더군다나 술집에 도착했더니 모두 다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에슈티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에슈티케의 죽음을 이용한다.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며 그들의 죄책감을 일깨운다. 에슈티케의 죽음을 미래에 대한 희생자라고 표현할 정도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현혹해 그들이 가진 돈을 갈취하고 그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듯했다. 리더에게 의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리미아시를 맹목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작품 홍보 글에서는 작가를 가리켜 ‘현존하는 묵시록의 대가'라고 했다. 헝가리의 공산 체제를 비판하는 묵시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메시지는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한 인간을 '미래를 여는 메시아'로 보는 건 여러 종교에서도 나타났다.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나 결국은 사기꾼일 수밖에 없는 것. 공산 체제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 같다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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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도 그랬다. 벨라 타르가 이 책을 영화화한 방식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가 책을 보증하고 책이 다시 영화를 보증하면서 서로를 좋은 친구로 가진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부터 영화는 소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고 소설도 영화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하는데, 충분히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서로를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그런 생각을 밝혔을 때 근거를 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 책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책 읽는 내내 비가 내리는줄 알았다. |
| 뭐 노벨문학상 그 까이꺼 러는 말은 얼토당토 않다. 한강 작가처럼 댜단한 업적을 이룩한 크러스너 라슬로의 글이 가득. 그런데 언제나 처럼 내게 소설은 너무 너무 어렵다. 지독하게 어렵다 제대로 읽히질 않는다. 나는 매순간 한 눈에 상황을 파악하는 훈련을 30 년 가까이 해왔다. 그런 내가 복선이 깔려있고 자잘한 사연도 놓치지 않고 읽어내야 맛이 살고 감 잡을 수 있는 소설은 너무 강한 적이다. 그래도 #너와함께라면독서도여행이다 #독서모임 덕분에 소설 읽기가 진일보를 이룬 셈. 이번 #연말리뷰 에서 소설을 다룰 수준까지는 올라섰다. #물고기는없다 나 다른 소설처럼 그냥 읽기. 그게 최강의 해결책. 한강 #소년이온다 도 아직 모르겠지만 최소한 집어던지지는 않게 되었다. 이제 찬찬히 여유있게 음미하고 떠올리면 된다. 그러니 강요하지는 말아다오. 이 수상작아 |
| 길고 쉽게 끊이지 않는 문체는 마치 한없이 이어지는 삶을 체화한듯하다. 물론 굉장히 읽기는 어렵지만, 라슬로만의 통찰과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읽기 위해 구매했고 제본도 깔끔해 보기 좋다. 영역본이지만 번역가의 애정이 느껴져 마음에 든다. 계속 이 작가의 작품디 번역되었으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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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체는 어렵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조여오는 긴장감과 압박감에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작가 잘 모르고, 국내에 번역본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는 사실과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정도만 안다. 이 책도 영문 중역본이라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런 것 따져가며 볼 수준은 안되는 것 같고, 이렇게라도 나와준 것이 어쩌면 고맙다. |
| 시네필이라면 벨라 타르의 벽 앞에서 번번히 좌절했을 것이다. 벨라 타르의 영화 문법은 최대한 늘어지는 숏에 있으니까. 보통 영화와 소설 중 원작이 있는 경우라면 영화가 접근하기 좋다. 대부분 두 시간안에 이미지로 보여주니까. 하지만 사탄 탱고는 소설이 더 접근성이 좋다. 벨라타르의 영화의 상영 시간은 무자비하니까. 하지만 왜 벨라 타르의 그 무자비한 숏의 길이가 이 책과 공명 했는 지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사탄 탱고의 디스토피아은 기다림의 디스토피아다. 언제 어디서에 대한 기대가 거세된 기다림은 삶을 기나긴 자살로 만들게 한다. 영화를 보고 책을 한번 읽어 보는 것을 쉽지 않겠지만 추천. 표지 색깔을 고른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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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가 출간된 것은 1985년이고 헝가리의 어느 농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85년이라면 동구권의 몰락이 가시화되기 직전이다. 우리는 몰랐지만 오히려 그들은 (그러니까 동구권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진행이 음울하기 그지없는 것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소설의 구석구석이 환영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아직 작가가 동구권이라는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 조원규 역 / 사탄탱고 (Satantango) / 알마 / 408쪽 / 2018 (19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