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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고병권과 함께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 ‘북클럽 자본 시리즈’ 제5권은 마르크스 [자본]의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중 5장~7장 읽기이다. 5장의 제목은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이고 6장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7장은 ‘잉여가치율’이다. 4장에서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사용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음을 추론한 마르크스는 제3편에서 그것을 검증하고 있다. 고병권은 책을 읽기에 앞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통해 허삼관이 살기 위해 매혈을 했듯 노동자들도 생존을 위해 노동에 자신의 생명을 짜 넣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생명을 짜 넣는 노동]이다.
잉여가치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마르크스는 먼저 노동의 합목적성, 노동의 대상화 등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필요한 말의 개념을 정리한다. 노동이란 인간이 어떤 수단을 가지고 대상에 작용을 가해 그것을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맞게 변형하는 일을 말한다. 인간은 처음 노동을 시작한 이래로 노동을 하면서 설정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충동이나 본능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노동은 합목적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바로 노동의 합목적성이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들어 주었다. 노동대상은 원료를 말하고, 노동수단은 도구를 의미한다. 생산물이라는 목적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이 된다.
노동의 대상화란 노동과 노동대상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생산물 안에는 인간의 노동이 굳어진 채로 대상화되어 있다. 즉 원료란 과거 원료를 생산하는데 소요된 노동이 담긴 대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노동에 현재의 노동을 더하는 노동과정은 노동을 대상화하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 앞에 선 노동자의 노동을 ‘살아있는 노동’이라 불렀는데, 노동자의 노동이 살아있는 노동이기 때문에 죽어있는 사물인 생산수단을 살려내고,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사용가치를 현실화시킨다고 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일상에서 노동생산물을 사용했다. 그러나 노동과정이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이 되면 두 가지 독특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가의 통제아래서 이루어진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노동생산물이 직접 생산한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소유물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노동력을 판매한다는 것은 노동력 사용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상실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마치 처분 가능한 사물처럼 외화(外化)해서 타인에게 넘겨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이 노동자의 생산 활동이 아니라 자본가의 상품소비과정으로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의 합목적성이 최대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노동대상과 관련해서는 원료를 조금도 낭비하지 않도록, 노동수단에 대해서는 최대한 손상을 입히지 않도록 신경 쓰며, 노동과정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효율성을 의미한다.
자본가가 원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이윤이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잉여가치일 뿐이다. 가치의 이전과 증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사용가치가 생산되어야 하고, 생산과정에서 사용한 것들의 가치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맞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를 논하면서 사회적이란 말은 평균을 의미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잉여가치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을 사용해서 생산한 가치의 차이라고도 했다. 생산물의 가치는 이전되는 가치와 형성되는 가치의 합계이다. 이전되는 가치는 노동과정에서 소모되는 생산수단의 양과 관련 있고, 형성되는 가치는 가치증식과정에서 더해진 노동량과 관련 있다. 생산수단에 들어있는 가치는 과거 노동이 대상화된 것이지만 그것을 생산물로 이전하는 것은 현재 노동의 몫이다. 즉 노동력은 새로운 가치를 더하면서 과거의 가치를 보존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산한 노동력의 가치는 새로 생산된 것이라 하여 이를 본원가치라 했다. 또 여기서 생산수단으로 전환된 자본은 그것을 사용할 때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전되는 가치라 했고 마르크스는 변하지 않는 자본이라 하여 불변자본이라 불렀다. 반면에 노동력으로 전환된 자본은 가치가 변한다. 노동력의 가치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사용을 통해 그 가치 이상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가변자본이라 했다.
이를 수식화하면 C(자본) = c(불변자본) + v(가변자본) + m(잉여가치)으로 나타낼 수 있다. 생산물의 가치는 생산요소들의 가치 합계(c+v)보다 크다. 잉여가치(m)로 인한 가치증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변자본은 가치증식이 일어나지 않고 가치가 재현될 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생산과정에서 산출된 가치생산물은 v+m이다. 오늘날 우리가 부가가치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잉여가치율을 계산할 수가 있다. 잉여가치는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이므로 m/v이 된다. 마르크스는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가치는 노동이 대상화된 것일 뿐이고, 잉여가치는 잉여노동이 대상화 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잉여가치율은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도가 된다. 자본가가 계산하는 이윤율은 m/(c+v)이다. 이 책의 저자 고병권은 잉여가치율을 착취도라 부르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느냐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 사람의 당파성이 나타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알게 해주는 전복자라고 강조한다.
이 책의 저자를 따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으면서 쉽게 이해하는 것 같다. 일단은 저자의 안내를 따라 이 시리즈를 전부 읽어보려 한다. 시리즈 한권이 끝날 때마다 해당되는 장(章)을 읽으려 했는데, 처음 읽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도 마르크스 [자본 1-2]권(강신준 역/길)이 일시품절 상태다. 그래서 아예 통째로 읽기로 하고 뒤로 미루었다. 그때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나도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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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신성한 노동'이라는 의미가 자본가들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들이란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장'이나 '도구'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 노동자들도 '인간'인데,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도구'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노동자가 사회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바로 '빈곤' 말이다. 빈곤에 허덕이는 노동자들에게 '최악의 노동환경'과 '최저의 근로계약'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장 일할 수 있고 하루를 벌어서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던 거다. 반면에 이런 비참한 사회환경이 자본가들에게는 '노동착취'를 하는데 아주 적합했던 거다. 정말 '자본주의'는 끔찍한 환경에서 더욱 밝게 빛났던 셈이다.
그럼에도 '노동'은 아름다운 일이다. 꿀벌이 집을 짓는 것처럼 사람도 부지런히 노동을 함으로써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살아있는 노동'으로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집'을 만들어낸 거다. 이처럼 '노동'은 신성하며, 살아있는 것들을 더욱 활기 넘치게 만들어 준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자연에서 얻은 '재료(살아있는 것)'을 더욱 값진 물건(가치)으로 재생산해내는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힘'을 주목했다.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또한 '살아있는 것(노동의 가치)'으로 평가할 수 있을 만큼 높이 평가한 셈이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이런 노동자들의 '생산물'을 죽어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만들고 말았다.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이 더는 '노동자의 것'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고 지적한 셈이다. 왜냐면 자본가는 계약을 통해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제공받기로 하였고, 노동자는 계약에 따라 '노동시간'만큼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해 '임금'을 받는다. 허나 자본가는 '빈곤'에 허덕이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아주 값싸게 후려쳐서 싸게 부려먹었다. 가난한 노동자는 많았고 더 싼 값에 '노동력'을 제공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노동자는 자신의 유일한 '생산도구'인 몸뚱이와 건강마저 저당 잡히며 생명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게 된다. 몸을 혹사한 노동자들의 건강이 날로 악화될 것은 뻔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혹사 당한 뒤에 몸을 다치거나 병에 걸리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그냥 내던져 버려지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때문에 실천하는 철학자인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위한 <자본론>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위한 '이론'을 만들어 '자본가'와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상적 도구'를 써내려갔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서, 왜 노동자들이 열심히 노동하면 할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혹사시키면 시킬수록 부를 쌓아가는지 밝혀낸다. 그건 바로 '잉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해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쉬거나 노닥거리는 꼴을 그냥 넘기지 않는단 말이다. 왜냐면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이 곧 자신들의 '부의 원천'이기 때문이었단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학적 기법'을 동원한다. 즉, [원료+생산수단+노동력=상품의 원가]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원료'나 '생산수단'에는 더하거나 뺄 '가치'가 없으므로 '노동력'을 쥐어짜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이득(잉여가치)'을 얻으려 하는 거다. 원래 노동자가 제공한 '노동시간'이 12시간이라면 '6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본전을 뽑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6시간'을 더 일하도록 함으로써 '잉여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셈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제공하는 하루 노동시간 중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분할 수 있고, '필요노동'만으로 원래의 계약한 노동력을 충분히 제공했음에도 '잉여노동'을 추가로 더하므로써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챙길 수 있도록 한 셈이다. 그런데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쉼없이 혹사시키곤 한다. 왜냐면 본전은 이미 뽑았으므로 손해볼 것은 없지만 '노동자'가 쉬는 만큼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을 안겨주는 '잉여가치'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인 거다.
이건 '노동착취'라고 볼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제대로 주지도 않고, 노동자들의 복지나 건강을 더 챙겨주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쥐어짜고도 모자라 또 쥐어짜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정치경제학자들이 자본가들을 옹호하는 '경제이론'을 내세울 때마다 마르크스는 조목조목 비판하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특히, 노동자들이 1시간 쉴 때마다 자본가들이 겪는 손실이 막대하다며 근면성실하지 않은 노동자를 비난할 때나, 18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12시간의 노동은 너무 가혹하니 10시간 노동으로 줄이는 정책에 반대하며, "청소년에게 자유시간을 줄수록 나태해지고 방탕한 생활만 할 뿐이니, 부모들이 앞장 서서 청소년을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정책 반대를 주장해야 한다"며 여론몰이까지 해댔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청소년'을 위한 정책이었을까? 그런데 현실은 '나태=죄악'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몫하며 청소년을 공장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이 통과되고 만다. 오직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정리하면, 자본가가 챙기는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잉여노동'에서 생겨난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생산가치'만큼의 노동을 하고도 더 많은 노동을 '강요'받으며 '잉여노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잉여노동'으로 발생한 '잉여가치'는 고스란히 자본가의 몫이 된다. 왜냐면 자본가가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자본가의 노력에 대한 보상인 '잉여가치'를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가당치 않다고 단언한다. '잉여노동'을 노동자가 '추가'로 한 노동이기 때문에, 여기서 발생한 '이윤'은 노동자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도 녹록치 않다. 자신이 '불변자본'인 생산도구를 제공했고, 노동자는 이 생산도구를 이용해서, 역시 자본가가 투자한 '가변자본'으로 생산하였기에 '이득'이 발생한 것이므로 자신들의 몫이 정당하다는 거다. 만약 '불변자본'이 없었더라면 노동자들은 결코 '이득'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고, 자본가는 이미 노동자들과 합법적인 방법으로 노동계약을 해서 '하루치 일당'을 지급했으므로 노동자들을 쉼없이 일하도록 지시한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과연 맞는 말일까?
마르크스는 [ 자본=생산수단에 투자한 불변자본+노동력에 투자한 가변자본 ]이라고 분석했고, 노동자의 '생산과정'을 마치고 나면, '원래의 자본'에 '잉여가치'가 생겨난다. 그래서 처음 투자한 자본보다 더 늘어난 '잉여가치'가 더해진 자본이 생성된다. 다시 말해, [ 나중 자본=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란 말이다. 허나 '불변자본'에서는 아무런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의 '노동력'이 투입되었을 때만 '잉여가치'가 발생할 뿐이다. 그리고 그 '노동력'은 '가변자본'에서만 작용할 뿐이다. '불변자본'은 원래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조금 낡거나 망가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를 어려운 용어로 '감가상각 비용'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따지도록 하자) 암튼, 노동력을 제공받은 '가변자본'에서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므로 노동자의 몫이라고 본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이 늘어났으면 '임금'을 더 올려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자본가는 '애초에' 계약한대로 임금을 지급했으니 '노동시간'이 늘어난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 거다.
자본가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잉여가치'를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거다"라며 칭송해마지 않았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쥐어 짠 결과면서도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업적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따지면, '사기꾼'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우리들이야 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면서 말이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이 닮긴 했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이런 뻔뻔스러움에 '노동착취의 근거'를 조목조목 내세우며 반박하였다. 실제로 <자본론>에는 실제 공장의 '재무재표'를 내보이며 자본가들의 '노동착취'의 현장을 낱낱이 보고한다. 바로 단짝 친구인 엥겔스의 공장을 '증거'로 내민 것이다. 거기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노동자들이 직접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습문제'까지 직접 써내려가면서 '자본가들의 노동착취 현황'을 낱낱이 까발린다. 이것이 <자본론>을 쓴 본래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인과 경제인을 비롯한 권력가들은 '노동착취'를 뻔히 알면서도 대놓고 자본가의 편을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들조차 자신과 같은 노동자의 편에 서지 않고 자본가의 편을 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민주주의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의 99%인 '노동자'가 뽑는데, 왜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의 '정치인'을 뽑지 못하는 걸까? 이는 노동자들이 심각하게 고려해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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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병권님은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고, 경제학의 핵심중의 핵심을 명쾌하고 알기 읽기 쉬우면서도 짜임새 있게 서술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점은 바로 착취받는 자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본의 생리는 고통받는 이웃이 더욱 고통받더라도 더 많은 이윤만 짜낼 수 있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것입니다. 없는 자들이 서로 싸우고, 이웃 국가들의 국민들로부터도 짜내고, 이웃국가들의 기후가 지옥처럼 변해가도,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비통함과 고통과 피눈물을 흘려도, 오로지 이윤 바로 이윤만 추구된다면, 이놈의 자본가들은 ㅠ 하지만, 세상의 변혁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어떤 전망을 세울 것인지에 집중 해야 할 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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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시리즈의 책을 여덟권 읽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8권 중에서 5편에 속하는 '생명을 짜 넣는 노동'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목부터 마음이 이끌렸는데 직접 읽어봐도 역시 첫느낌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이 제목에 그토록 마음이 빼앗겼던 이유는 제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이기 때문이겠지요. 인생으로 따지면 인간에게는 다양한 시절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도 있고 청년시절도 있고 중년시절과 노년시절도 있고 그렇게 인생은 쉼 없이 연결되며 흘러가지요. 어느 한 순간 소중한 내 인생이 아닌 경우란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생애란 '취업부터 퇴직까지'라는 저자의 서문에서의 글이 참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요 참 마음이 아프더군요.. 취업에서 퇴직에 속하지 못한 시기는 부정당하고 배제당하고 설령 취업에서 퇴직의 시간 속에 머물러있어도 늘 노동 속에 내 생명을 쥐어짜넣으며 결과적으로는 생명을 소진시키고 있는 운명이라니 이보다 더 서글픈 일이 또 어디있을까요? 그러니 사실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담당하는 노동 속에서 개인은 소외당하고 그것이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 파괴하는 수순을 밟는 것은 너무 당연해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지않은 사람들도 많지요. 너무 극단적인 경우만 바라볼 필요는 없겠지만 노동과 노동자의 이러한 어긋남? 이러한 불일치?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도 누릴 수가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