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49)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7%
  • 리뷰 총점8 43%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8.0
  • 40대 8.0
  • 50대 9.0

포토/동영상 (10)

리뷰 총점 종이책
언젠가는 빛바랜 추억이 될 엄마『잘가요 엄마』
"언젠가는 빛바랜 추억이 될 엄마『잘가요 엄마』" 내용보기
많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앞에서 지레 겁을 먹었던가 봐요. 왜 그렇잖아요. '엄마'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마주 할 때면 읽기 전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라 눈물부터 차오르고 한숨이 새어나오는 경험, 다들 해보셨을 거예요. 하지만 뜻밖에도 책 자체는 참 덤덤히도 읽혔어요. 그건 아마도 엄마와의 직접적인 대면보다는 과거
"언젠가는 빛바랜 추억이 될 엄마『잘가요 엄마』" 내용보기

 

많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앞에서 지레 겁을 먹었던가 봐요. 왜 그렇잖아요. '엄마'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마주 할 때면 읽기 전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라 눈물부터 차오르고 한숨이 새어나오는 경험, 다들 해보셨을 거예요. 하지만 뜻밖에도 책 자체는 참 덤덤히도 읽혔어요. 그건 아마도 엄마와의 직접적인 대면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서술 방식에서 기인한 거라고 봐요. 그리고 그건 소설 초반부터 엄마의 '죽음'을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르죠.

 

사람은 그래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냉정하리만치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곤 하죠. 만약에 경원의 엄마가 힘겨운 투병생활 중이셨다면 저의 반응은 또 달라졌을 겁니다. 경원과 함께 많이도 아파 했을 것이고 제발 엄마가 살아주기를 바랐을 거에요. 하지만 경원의 엄마는 안개처럼 씨앗처럼 떠나버린 뒤였기에 그에 따른 아픔은 조용히 묻어둘 수밖에요. 여기서 저는 누구에게로 향하는지도 모를 물음을 던졌습니다. 과연 죽는다는 건 무엇이고 산다는 건 또 무엇인가. 경원의 엄마 인생에서 죽음이 두렵기나 했을까요. 자신보다는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거나 다름없는 인생을 사셨잖아요. 여자이기보다는 엄마의 인생을 사신 거죠. 소설 속에서는 두 아들이 어머니의 핸드백 속에서 찾은 립스틱을 보고 대화를 하죠. 어머니가 립스틱 바른 모습을 본 적 있느냐고... 여자는 엄마가 되고부터는 여자로 사는 삶은 온데간데없어지나 봐요. 경원의 엄마 역시 그러했고 세상의 많은 엄마가 자식만 바라보고 살아간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본인의 삶을 포기한 건 아니죠. 대신에 그 시간을 자식들에게 건네는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 어쩌면 자식들에게 빼앗긴 엄마의 시간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엄마와 자식 간의 사이에는 쌍방통행이기보다는 대부분 엄마의 일방통행만이 존재하는걸요.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나 당신도, 경원도 없었겠지요. 자라오면서 누구라도 한 번쯤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경원처럼 형제가 있는 경우 자신에게보다 다른 형제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준다고 서운해하기도 하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옛말이 있지만, 더 아프고 덜 아픔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거에요. 아버지가 다른 경원과 동생 중, 엄마의 더 아픈 손가락은 틀림없이 경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엄마를, 고향을 떠나버렸죠. 대신 덜 아픈 손가락이었던 동생은 반평생을 고향에서 지냅니다. 그런 동생에게서 자신이 몰랐던 엄마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경원의 심정은 후회와 자책과 눈물로 멍울 집니다. 엄마의 인생에서 제 발로 뛰쳐 나가버린 자식이지만 당신의 삶에는 여전히 일방통행의 존재로 남아있는 아픈 손가락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내려간 고향에서 그는 지나온 엄마의 삶을 하나하나 추적합니다. 그리고 떠나지요. 애정도 없고 의욕도 없던 일과 가족을 등지고 15살에 집을 뛰쳐나갔던 그때처럼 60이 넘은 중년 남자는 그렇게 또 떠나갑니다. 15살 시절에는 무작정 걸어서였다면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풍경을 바라보면서요.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하얗게 떠오르는 엄마의 얼굴을 그리면서요...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진정 내가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엄마뿐인가 봅니다. 여전히 '엄마'라는 단어는 슬픔의 조합이기도 하고 저의 절대적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엄마께는 왜 이리도 못되게만 굴까요. 아마도 내 모든 허물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받아줄 단 한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이 책은 그런 엄마, 어머니에 대한 기록인 거고요. 무더운 여름밤 평상에 누워 엄마의 다리 베개를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식은 그렇게 엄마에 대한 추억 하나를 또 만들어 갑니다. 엄마와의 시간도 언젠가는 빛바랜 추억이 될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시간이 조금은 더디 오길, 그렇게 바라고 또 바라는 것뿐이겠지요...

 



w*****8 2013.06.07. 신고 공감 13 댓글 15
리뷰 총점 종이책
[잘 가요 엄마] 슬픔도, 눈물도 없을 이별을 준비하며...
"[잘 가요 엄마] 슬픔도, 눈물도 없을 이별을 준비하며..." 내용보기
책날개 안쪽 흑백사진 속 저자의 모습이 참 해맑다. 너무나도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고 홀가분하다고 표정으로 대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럴 수밖에, 저자가 가슴 속 깊은 곳의 돌덩이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하던 그 순간 그가 가지고 있던 돌덩이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을 터이니 어찌 아니겠는가.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할 그 뒤늦은 후회의 마
"[잘 가요 엄마] 슬픔도, 눈물도 없을 이별을 준비하며..." 내용보기
 

 

책날개 안쪽 흑백사진 속 저자의 모습이 참 해맑다. 너무나도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고 홀가분하다고 표정으로 대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럴 수밖에, 저자가 가슴 속 깊은 곳의 돌덩이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하던 그 순간 그가 가지고 있던 돌덩이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을 터이니 어찌 아니겠는가.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할 그 뒤늦은 후회의 마음을 저자의 글이 대신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그러고 나니, 저자 자신이 짐을 덜어내듯 풀어놓은 이 책이 담고 있었던 그 무게가 이제는 이 책을 읽은 나의 몫으로 고스란히 넘어오더라.

 

“내려오셔야 하겠습니다.” 새벽 세시에 걸려온 전화가 예사로울 리는 없었다.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대개 늦은 시간의 전화 한통이 반가운 소식일리 없다. 밤이라는 시간이 주는 것은 주변의 어두움뿐만 아니라 소식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오는 것도 어두움으로 올 때가 많다는 것을 나 역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분위기였다. 엄마의 죽음이란 소식에 슬퍼할 것도 같건만 저자는 오히려 담담한 모습의 경원을 그리고 있었다.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고향으로 내려가는 경원에게 죽은 엄마를 만나러 가는 일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도 아니었고 그저 일상을 보내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처럼 태연하게만 보였다. 내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경원의 태도에 묻고 싶었다. 당신의 엄마가 죽었다는데, 슬프지 않아?

 

엄마의 장례식을 위해 내려가던 그 길은 엄마의 부재가 슬픈 일인 것에 앞서 오랜 시간 해묵은 엄마와의 화해를 위해 가는 시간이었기에, 경원이 보여주었던 그 행동은 슬픔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태연하게까지 보일 수 있었던 담담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기다려왔다는 듯이……. 도망치듯이 떠나온 고향과 엄마에게로 되돌아가는 끔찍함이 아닌, 이제야 비로소 엄마와 화해를 하고 제대로 된 이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기에 늦었지만 꼭 필요한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던 엄마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싸늘하게 누워있던 노구와 조우하던 그 자리, 장례식 후에 아우와 동행했던 자취들이 진정한 화해의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건 아마도 작중의 인물인 경원과 이 책의 저자, 그리고 나에게 동시에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담겨있던 그 “엄마”에 대한 마음을 ‘이해’라는 이름으로 풀어내야 할 시간.

 

모든 원망을 담은 화살을 쏠 과녁이 필요했던 순간에 마침 만만한 엄마가 거기 있었을 뿐이다. 역마살이 낀 듯 살아온 시간들이 모두 엄마 탓인 게다. 월사금도 못 내고 학교에 다녀야 했을 정도로 지독했던 가난, 새아버지가 생긴 것, 도망치듯 집을 떠난 일, 지독하게 외로웠던 많은 시간들이 모두 엄마 탓이다. 자수성가한 지금의 위치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 것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냥 모든 원인은 엄마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들이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시간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아내듯이 가방과 우산을 사들이는 습관마저도 엄마 때문인 거다. 왜? 엄마는 그래야만 하니까.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 엄마는 자식의 모든 것을 받아내는 존재로 둔갑했던 것이다. 엄마처럼 살기 싫었다고, 지금의 힘겨움이 다 엄마 때문이라고 악다구니를 써가며 퍼붓는 딸의 독설 앞에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던 당신은, 엄마니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우습게도, 자식이 미처 다 알지도 못한 엄마의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그 순간 마법처럼 눈물은 흘러내린다. 엄마의 죽음을 전해 받던 그 순간에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그때서야 비로소 엄마의 죽음에 동참한 것이다. 짝퉁 측에도 끼지 못할 악어가죽을 빙자한 검정 가방과 오래된 립스틱은 이제야 맞춰지고 끼워지는 조각들이었다. 엄마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의 감춰진 모습이었으며, 장춘옥에서 보았던 희미한 화장의 흔적이었으며, 엄마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온 증거였다. ‘내’가 엄마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자식을 보려하지 않았기에 그 미움과 원망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덧없는 시간만을 탓할 뿐이다. 살아가는 순간들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남아 있는 귀금속 하나도 없이 먼지만 쌓여있는 보석함을, 손가락에 그 흔한 결혼반지 하나 없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시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못난 자식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동생이 자신의 결혼 선물로 엄마에게 전한 순금 쌍가락지를 물만 닿아도 닳아 없어질 거라고 제대로 껴보지도 않고 고이고이 모셔두는 그 마음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무허가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버리고, 누군가 찾아올 무덤도 없이 산기슭에서 바람 따라 날아가 버린 당신의 흔적을 이제는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다. 가는 길마저 그런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가버린 당신을, 당신의 아들은 차마 그렇게 보낼 수 없음에 울부짖는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갇힌 듯이 살다가 그때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는지 모를 당신의 이름을 ‘나’는 이제야 제대로 소리 내어 부를 수 있게 된 것이기에.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시간들을, 당신의 죽음으로 겨우 화해를 하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까지 더해져서 눈물 어린 사모곡만 줄기차게 불러댈 뿐이다. “잘 가요, 엄마......”

 

이제야 만나러 갑니다, 당신의 진심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말이다. 언니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집에 온 날, 엄마가 유일하게 한 일은 아무 말 없이 밥상을 차리고 집안의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일이었다. 언니를 밥상으로 이끌어 따뜻한 국물에 밥을 먹게 하고, 언니가 밥을 먹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방에 들어가서 주무셨다. 그때는 왜 아무 말이 없으셨는지 잘 몰랐는데, 지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엄마는 하고 싶었던 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저, 당신 딸에게 닥친 슬프고 아픈 시간이 그렇게 조용히 흐르기를 바라셨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 따뜻한 국물과 함께 한 저녁으로 시렸던 가슴 속을 데우고 따뜻한 방에 누워 오랜만에 단잠을 자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게 그때의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당연하게 그래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대개는 죽음이 자신과는 당장 상관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금 염습대 위에 누워 있는 어머니처럼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란 생각이 가슴을 쳤다.

종합병원 진료차트에 주기적으로 출석체크를 하듯이 마냥 건강한 몸이 아니신 엄마는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거지.’ 라고 본인 입으로 말씀하신다. 하지만 엄마도 사람인데 어찌 육체의 아픔과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 내 눈에는 자식들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주는 것이라 여기면서 매번 병원 문턱을 부담스럽게 넘나드시는 모습으로 더욱 생생하게 각인될 뿐이다. 바람 잘 날 없는 가지 많은 나무의 든든한 뿌리 역할을 참 오랜 시간 해오셨으면서도 아직도 그 흔들리는 가지들을 붙잡아 주어야 할 많은 일들이 남아있음을 알기에, 본인의 몸이 조금은 더 건강하게 살아갈 시간이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게 지금의 나의 엄마다.

 

지금까지 내 안에 저장된 “엄마”라는 단어는 눈물과 동의어였다. 저자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도 살아온 많은 순간을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동시에 그리워하면서 지내왔다. 나뿐만 아니라 육남매의 모든 원망을 다 들으면서 살아오신 엄마다. 몰랐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알려 고조차 하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시간들이 아직도 내 안에 가득하다. “엄마”라고 부르면 눈물이 오랜 단짝처럼 함께 다가오는 순간이 그만큼 많았는데 이제 더 이상은 엄마를 떠올리면서 슬픈 눈물은 흘리고 싶지가 않다. 저자는 엄마와의 이별식에서 참회의 눈물로 함께 한 사모곡을 불렀지만, 내가 바라는 엄마와의 이별식은 웃으면서 ‘안녕’ 하는 눈물을 흘리고 싶은 거다. 아쉽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그 순간을 인정하는 눈물.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지금은 저자의 눈물 젖은 사모곡을 같이 불러본다. 세상 모든 자식이 가지는 “엄마”라는 존재에게 고개 숙여 이야기하는, 고백 같은 저자의 사모곡을 같이 불러야만 하는 이유, 충분히 있다.

 

 



n******i 2012.07.04. 신고 공감 13 댓글 140
리뷰 총점 종이책
나무비녀로 평생을 산 엄마와 결별하며 당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나무비녀로 평생을 산 엄마와 결별하며 당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내용보기
부부로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 부모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서둘러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며 숱한 번민에 휩싸여 방황하던 풋내기 부부 시절이 떠올라 멋쩍게 웃고 말았다. 첫애를 낳고 직장에 복귀하여 좌충우돌하며 지내느라 큰 애에게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해 아이가 혹독한 사춘기를 보낸 것은 아닌지 자책할 때가 있다. 생계를 도맡아 바깥으
"나무비녀로 평생을 산 엄마와 결별하며 당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내용보기

  부부로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 부모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서둘러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며 숱한 번민에 휩싸여 방황하던 풋내기 부부 시절이 떠올라 멋쩍게 웃고 말았다. 첫애를 낳고 직장에 복귀하여 좌충우돌하며 지내느라 큰 애에게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해 아이가 혹독한 사춘기를 보낸 것은 아닌지 자책할 때가 있다. 생계를 도맡아 바깥으로 나돌던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우며 지내면서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 크게 자리해 불편할 때가 많았다. 여느 아이처럼 부모가 울타리처럼 자리하여 지원군 역할을 하고, 먹을 것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는 형제자매들이 모여 사는 집에서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동경하며 지냈다. 보호막이 필요할 때 고립무원의 상태로 지내 본 이들은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온정에 좌절하며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철이 들기도 전에 세상은 홀로 감내하며 자신을 바로 세우느라 진통을 겪는 통과의례 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유리창 너머 고개를 내밀고 아이가 비 맞을까 봐 우산을 가져다주는 식구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외톨이의 서글픔을 삼키고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아흔 넷인 엄마의 사망 소식을 접한 큰 아들 경원은 모자 지간의 애틋한 정이나 살가운 추억을 떠올리기보다는 유년시절부터 장성한 어른으로 살아오는 동안 가슴 속에 켜켜이 사려 둔 원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감지하였다.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갖은 고생을 감내하며 살아내느라 힘겨웠던 그는 속에 응어리를 키우며 고향을 등지고 고립된 채로 지내왔다.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큰아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뒤에도 줄곧 고향과는 거리를 두고 무덤덤하게 그럭저럭 살아왔다. 30년 전 늦여름 단 한번 늙은 아들 집을 다녀간 뒤 하룻밤도 아들 집에서 보내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 간 어머니는 4월 중순 이승의 모진 고통을 거두고 피안의 세상으로 향했다. 촌로(村老)를 달가워하지 않던 며느리의 가식적인 친절을 간파한 어머니는 늙은 아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아 하룻밤도 머물지 않고 집으로 향하였을 정도로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큰아들은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의붓동생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부부 중심의 삶을 이어왔지만 헛헛한 마음을 부여 안고 일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채 관계를 이어왔을 뿐이다.

 

 

 

  친부에게 버림받고 엄마의 사랑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엄마는 계부를 맞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남편을 둘이나 맞았으면서도 옹색한 살림이 펴지기는커녕 외삼촌 집 살림까지 전담했던 엄마는 신세한탄을 일삼을 수도 있었지만 타인을 비방하며 질책하는 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입이 무거웠던 사람이다.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어머니는 평상심을 간직하고 결연함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고,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당신의 주검을 화장하여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일을 선택하였다. 전화로만 소통하며 지냈던 큰아들은 어머니의 주검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어 지체하여 고향을 찾았지만 동생은 어머니가 가는 마지막 길에 형이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새아버지의 출현 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큰아들은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왔고 본질적으로는 고향을 떠나 거짓투성이로 세상을 속이며 살아왔다.

 

 

 

  무허가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시신을 화장한 뒤 동생과 함께 찾은 장소는 아동기의 열패감과 수치심이 자리를 틀고 앉은 소풍지였다. 월사금을 못 내고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수돗물을 배로 채우던 시절 소풍이나 운동회가 열리는 날에는 도시락을 싸 갈 수 있는 특정한 날로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동생은 쉽사리 치유하기 힘든 상처의 온상으로 기능하는 추억의 공간으로 형을 이끌었다. 새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은 어떤 완충 공간도 없이 집안의 은밀한 세계가 까발려져 다채로운 열등감을 심어 줬고 존재감도 없이 지내던 공간을 탈출하듯 떠난 형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생전 큰아들과 전화로만 소통하던 어머니는 궁상스러운 삶을 이어오는 애옥살이에서도 큰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동생의 고백은 장춘옥과 권 씨 집을 들러 그동안 비밀리에 부쳐졌던 일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큰아들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희생물이 되었던 어머니는 친부와의 사이에 오누이를 두었지만 홀몸으로 자식을 돌보는 일이 힘들어져 외삼촌에게 누이를 의탁하고 드난살이로 외삼촌 가족의 생계를 거들어 왔다. 몸이 바스러지도록 힘에 부치는 노동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이웃의 조소와 경멸을 참아냈던 어머니는 외로움에 갇혀 멀어져 간 큰아들에게 미안함을 간직한 채 평생을 묵묵히 견뎌 왔다. 어려서부터 두터운 정을 나눴던 애숙이 누나의 야반도주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모정(母情)은 그동안 어머니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한 채 지냈던 자신의 삶을 반성케 하는 화해의 물꼬를 틔워 줬다. 있는 그대로의 배경원을 인정하여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소통해 왔던 정태와의 단절은 경원이 자유로움 속에 자립하여 살아가는 삶의 근간을 마련해 줬다.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받기보다는 사람들로부터 멸시 당하면서도 불평을 늘어놓기는커녕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자식의 안위를 염려하며 살아 온 어머니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한평생을 지탱해 왔다. 어려서부터 가슴에 자리란 분노의 씨앗은 싹을 틔워 모자 지간의 정을 끊고 살게 하였지만 아흔 넷으로 신산한 삶을 마감한 엄마와의 이별은 큰아들이 간과하고 살아온 삶에 전기를 마련해 준다. 골이 깊을 대로 깊어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엄마의 피폐한 삶을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받아들이며 아파하는 동안 큰아들과 엄마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사랑과 이해로 메워 가는 길에 누나 애숙이 함께 하였다. 불가피함으로 자식을 오롯이 거두지 못한 엄마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집 떠난 이들이 자꾸만 밟혀 한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며 혈육의 정을 확인하는 표상으로 자리보전하며 지냈는지도 모른다.

 ‘잘 가요, 엄마’

   큰아들은 숨죽여 흐느끼며 엄마의 사랑이 그리울 때마다 가슴에 쌓아뒀던 응어리를 하나씩 내려놓고는 엄마에게 보이지 않는 손을 내민다. 그동안 자신에게 준 무한한 자유로 데면데면한 모자간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길에 서기라도 하는 것처럼...............



n*****9 2012.07.02. 신고 공감 10 댓글 13
리뷰 총점 종이책
당신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잘 가요 엄마'
"당신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잘 가요 엄마'" 내용보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나이만 많았던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리바꿈을 하였다. 이는 내 됨됨이와 상관없이 부모 잃은 자에게 주어지는 슬픈 영예의 자리였다. 아버지의 부재는 컸다. 저녁만 되면 떠오르는 아버지 생각에 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살아계실 때는 의무나 부담으로 생각됐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감당 못할 그리움으로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때 처음으로
"당신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잘 가요 엄마'" 내용보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나이만 많았던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리바꿈을 하였다. 이는 내 됨됨이와 상관없이 부모 잃은 자에게 주어지는 슬픈 영예의 자리였다. 아버지의 부재는 컸다. 저녁만 되면 떠오르는 아버지 생각에 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살아계실 때는 의무나 부담으로 생각됐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감당 못할 그리움으로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부모와 내가 개별적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됐고, 아버지가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자각에 가슴이 터질 듯 했다. 또한 상실의 아픔이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상실의 아픔을 김주영이 '잘가요 엄마'란 자전적 소설에서 발가벗듯 그려낸다. 작중 화자인 나는 아버지가 다른 아우로부터 새벽에 온 전화를 받는다. 짐작했듯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나는 무책임하고 뻔뻔한 언사로 어머니의 죽음을 대한다. 위악을 가장한 나의 대응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작가의 아픔을 반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누구보다 어머니를 잘 알고 있고, 가장 비루했던 시기를 함께 한 자식으로서 내가 보이는 기이한 반응은, 어머니를 외면했던 자신에 대한 질책이자 그 나름의 사랑법이었다. 누군들 부모의 죽음이 슬프지 않겠냐먄 그만큼 슬프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대응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비난할 수 없었다.

 

젊어서는 두 남편을 거느렸다는 이유로 손가락질과 업신여김을 당했고, 큰 아들이 장성해서는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던 어머니는 죽어서도 설움을 당했다. 자신의 당부라고는 하나 예식절차도 없이 입관하자마자 화장터로 가야하는 그네의 처지가 더없이 가련했다. 무능한 남편들을 만난 탓에 평생을 허리가 휘도록 일만 했던 그네였다. 장례를 마친 후 서울로 떠나려는 나를 아우가 붙잡는다.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둘을 이어주었다.

 

나의 회상은 계속된다. 울타리도 없는 집에서 살아야했던 어머니와 나는 마을에서도 가장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외삼촌네까지 거두어야했다. 하루 종일 일만 했던 어머니는 어린 나를 제대로 돌봐줄 수 없었고, 방학 때만 되면 외삼촌의 집에 머물게 했다. 외삼촌의 두 딸중 맏이인 애숙이 누나는 친누나처럼 나를 아껴주었다. 어머니는 마을의 유지인 권씨 댁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고 나는 배냇병신으로 알려진 정태와 만나 재미있는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정태와의 만남은 길지 못했고, 정태와 애숙이 누나를 결혼시키려는 외삼촌의 간계는 어머니가 애숙이 누나를 멀리 빼돌리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서올로 올라가려는 마지막 날 나는 애숙이 누나가 친누나였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가까이서 점집을 하고 있었고, 나는 집을 떠나 처음 일했던 빵집이 어머니의 부탁에 의해 연결됐음을 알게 된다. 어머니를 떠난 나의 삶은 거짓과 위선과 원망과 고통으로 첨절되었지만, 그 시간 동안에도 어머니의 사랑은 나를 떠나지 않고 지켰던 것이다. 지금껏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채 살아온 나는 누나와의 만남을 통해 사랑하지 못하고 살았던 자신을 발견하고는, 삶을 새롭게 살기로  마음 먹는다.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부모 생전에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우리네 인생이 미련하여 그렇게까지는 안되는 것 같다. 생전에 다하지 못했던 말과 사랑, 그리고 회환이 老 작가의 글에 들어있었다. 회한만 있지 않아 고마웠다. 언젠간 나도 삶의 옷을 벗고 한줌의 먼지가 될것이다. 그 때 하늘로 소풍가신 아버지를 만나 인사드릴 꿈을 꾼다. 그러나 오늘은 지금 이 곳에서 나와 시간을 함께하는 엄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엄마,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려요.  

 

 

 

d*********2 2012.07.04. 신고 공감 9 댓글 16
리뷰 총점 종이책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내용보기
새벽 세 시에 아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했던 전화였지만 경원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아우와 대화를 나누는 경원은 엄마의 죽음에 무심해 보였다. 속울음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우와 이리도 담담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인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타인의 죽음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리움의 대상이라고는 하나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내용보기
새벽 세 시에 아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했던 전화였지만 경원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아우와 대화를 나누는 경원은 엄마의 죽음에 무심해 보였다. 속울음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우와 이리도 담담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인가.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타인의 죽음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리움의 대상이라고는 하나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그녀가 죽었다고 해서 나의 감정까지 평정을 잃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우에게 소식을 들은 후 거실에서 대형 LCD 스크린에서 터져나오는 섹스 장면들을 보는 그에게 불신의 감정을 품는다.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자가 봤을까봐 걱정하는 그를 보며 나이든 노모를 돌보는 일은 아우에게 맡겨두고 자기 편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단정짓고 만다. 그때서야 내 안에 소용돌이치던 감정들이 하나둘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어떤 이야기든 나도 시종일관 무심하게 그를 바라보기로 한다.
 
엄마의 얼굴에 남아 있는 화장의 흔적, 외삼촌의 자전거, 장춘옥의 짜장면, 경원은 그 어디에서 엄마와 둘 뿐이던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 본 것일까. 엄마와 외삼촌과 함께 먹은 짜장면은 늘 배고픔에 허덕이는 경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을텐데, 이것을 뱉어내게 할 정도로 그를 무섭게 만든 사건이 무엇일까. 누구든 짐작 가능한 일일테지만 경원 나이의 어린 소년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을 감지해 낸다는 것이 놀랍다. 엄마에게 남편이 생긴다는 것은 경원에게 울타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경원에게 새아버지가 생긴다는 것은 엄마를 빼앗긴다는 위기감 뿐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엄마가 사라질까 두려워 권씨 집으로 달려 갔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고 머리에 흰머리가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살아가면서도 엄마의 그림자를 떼어내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아우에게 듣고서야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던 못난 아들은 핸드백에 넣어두고 바르지 않은 엄마의 립스틱을 보면서 무너져 내린다.  
 
경원과 아우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두 사람의 기억이 합쳐져서야 온전한 엄마의 모습이 된다. 두 아들이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억척스러운 여인의 모습이다. 운명이 무엇일까 철학적인 고민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터이지만 분명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살아낼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다. 엄마의 삶은, 그저 그때 그 시절이 그랬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경원의 외할아버지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사연 많은 세월까지 풀어내자면 긴긴 밤이 부족할 지경이다. 
 
엄마의 몸짓, 손짓하나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아들이 엄마가 죽고 나서야 그 뜻을 알고 속울음으로 써 내려간 글인 '잘가요 엄마'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못난 자식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한 번도 아우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가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가족의 의미를 알아간다. 새아버지가 생기고 아우가 태어난 후 엄마를 끊임없이 그리워했던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애숙이 누나를 만난 후에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언제부터였을까. 경원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책을 잡은 손가락에 시선을 두자니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볼 수 없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의 첫 인상을 나쁘게 봐 버렸던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엄마와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세월이 있었고 그의 아우조차 발을 디밀지 못했던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감히 내가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만이 가득했다. 
y*****6 2012.06.24. 신고 공감 5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뒤엉킨 상처의 매듭을 풀어내는 일.
"뒤엉킨 상처의 매듭을 풀어내는 일." 내용보기
결혼 후 유독 관심이 많이 가는 TV프로그램들이 있다. ‘~~달라졌어요’와 ‘그 남자 그 여자’ 등 ‘가족 내 갈등’의 내용이 담긴 프로그램들을 유심히 본다. 부부간, 부모간, 고부간 갈등 모두 본질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결국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상처’의 문제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언과 폭력, 위압적 행동을 일삼던 남편이 최면치료를 통해 어린 시
"뒤엉킨 상처의 매듭을 풀어내는 일." 내용보기

결혼 후 유독 관심이 많이 가는 TV프로그램들이 있다. ‘~~달라졌어요’와 ‘그 남자 그 여자’ 등 ‘가족 내 갈등’의 내용이 담긴 프로그램들을 유심히 본다. 부부간, 부모간, 고부간 갈등 모두 본질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결국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상처’의 문제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언과 폭력, 위압적 행동을 일삼던 남편이 최면치료를 통해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편은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어린 시절의 그 상처와 대면하고 그것에서 분리된다. 그러고 난 후 놀랍게도 남편의 일상이 바뀐다. ‘해결된 상처의 문제’는 더 이상 그 가족을 괴롭히지 못한다.

 

김주영의 장편 「잘가요 엄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영화 [똥파리]를 연상케 했다.

 

 

 

 

“세상은 엿 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라는 영화 포스터의 카피에 눈이 멈춘다.

 

영화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과 소설 「잘가요 엄마」의 주인공 경원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점철된 상처로 비틀어져버린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상훈’과 ‘경원’은 둘 다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상처’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가정에서 내쳐져 황량하고 가차 없는 세상에 나뒹굴었다. 가만히 앉아 ‘내 어린 시절 상처가 무엇이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따위의 배부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1. 어머니 - 상처에 짓눌려 버렸다.

중요한 것은 ‘나’만 상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경원’이 아우와 가진 마지막 술자리에서 어머니의 지난날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처절한 가난에 찌든 외조부는 장남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딸을 줘버린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팔려 간 어머니는 평생을 서슬처럼 또렷하게 상처를 부둥켜안은 채 살았다. 가난의 대물림, 상처의 대물림을 피하고자 남의 집 밥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아는 좁은 시골동네에서 이웃의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을 감수하고서라도 혼인신고도 없는 재가를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장녀인 ‘애숙’을 자기 손으로 거두지 못하고 남동생네 집에 살게 하고 장남인 ‘경원’이 새아버지와 새동생의 출현으로 집을 뛰쳐나갔을 때에도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그랬던 것처럼 권씨댁에 품을 팔러 갈 뿐이었다. 애비가 다른 이복형제의 사이가 좋지 않고 그 며느리들, 손주들에게서도 살가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신처럼 원치 않는 시집을 가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될 것이 두려워 야반도주시킨 장녀에 대한 소식도 끊겨버린 노년의 삶은 여전한 ‘상처로 점철된 삶’이었다.

 

“어머니는, 두 번이나 사내를 갈아치운 여자를 감당해야 할 이웃의 조소와 경멸을, 모질고 벅찬 노동으로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극복하려는 것 같았다.” (p.195)

 

 

 

2. 경원 - 상처는 대물림 된다.

가난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야속하기만 한 선생님의 차별과 아이들의 못된 장난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서 내쳐지는 신세는 참을 수 없었다.

권씨댁 식모살이로 자신은 물론 외삼촌댁까지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구차함을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섭섭해 하지도 않았다. 새아버지라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을 닮은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궁벽진 집에서 뛰쳐나와 권씨댁 모자란 외아들 정태와 산으로 들로 냇가로 뛰어다녔다. 정태만은 경원의 마음대로, 뜻대로 요리할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렬한 후회와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까. 어머니의 가슴속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욕의 못을 박아줄 수 있다면, 학교 따위,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었다.” (p.205)

“아마도 어머니에게서 나를 떼어 내던져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겠지……. 나를 보면 언제나, ‘나는 많이 먹었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라’ 했었던 어머니를 이제는 바랄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감에 치가 떨렸다.” (p.135)

 

15살 되던 해 집을 뛰쳐나와 수십 년을 연락도 두절한 채 살았다. 나름 성공한 위치에 이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거둔 성공만큼 가정 내의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닌 듯하다. 30년 전 어머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에 다녀가셨을 때, 고부간 갈등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오던 터라 큰며느리인 아내는 어머니와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았고 손주 녀석들은 냄새난다며 할머니 곁에조차 가지 않았다.

경원이 꾸린 가족 또한 ‘상처 입은 자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당신의 처절한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 재가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경원에게 상처가 되었던 것처럼 15살 때 집을 나와 자수성가한 경원이지만 자신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와는 다른 형태로 자신의 가정 내에서도 ‘상처가 만연해’있었던 것이다. 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이미 주워 담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모르는, 아니 관심도 없을 아내는 며칠만의 통화에서 경원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 경원과의 연락이 닿지 않아 자신에게 전화가 재차 오도록 만든 책임을 따지고 힐난하기 바빴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경원과 아내의 관계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경원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승강장으로 내던지는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 아우 -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경원의 동생과는 아버지가 다르다. 15살 때 집을 뛰쳐나오게 만든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향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장남 노릇을 했다.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며 수발하고 병상을 지킨 것도 아우뿐이다. 경원의 10대, 사춘기를 혼란으로 이끈 이가 아우였다면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까지 아우를 혼란과 열등감, 상처로 뒤덮어 온 것은 형, 바로 경원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것은 서울 경치도, 며느리도, 손자나 손녀도 아닌 바로 평생 당신께 부담만 주었던 당신의 늙은 아들이었다.” (p.23)

“형님 제대할 때까지 겨울이 되면 어머니는 아랫목에다 잠자리 보는 일조차 마음이 불편해 잠결에 헛소리를 할 정도였어요.” (p.152)

 

돌아가시기 직전 까지도 어머니의 관심은 경원에게 쏠려 있었다. 15살 때 집을 뛰쳐나갈 때부터 줄곧 그래왔다. 결국 어머니를 끝까지 모신 건 아우였지만 어머니의 마음에 끝까지 남은 건 형, 경원이었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경원의 상처는 오롯이 아우에게 전가되었다. 물론 이것이 경원의 책임은 아니다. 지구상 존재하는 생물 중 가장 생명력이 좋다는 바퀴벌레보다 더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 상처다. 들러붙어 괴롭히고 또 괴롭힌다.

 

“그런데도 정작 나는 관여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도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우가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p.61)

“그런 말을 대중없이 지절거렸다간 당장이라도 아우의 주먹이 날아들 것 같았다.” (p.94)

 

아우가 보기에 경원은 마뜩찮다. 장남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우는 늘 깍듯하게 형을 대우해 왔다. 가족 간에 유지되는 일정한 수준의 긴장의 선이 고착되면서 조금이라도 이 선을 넘게 되면 완전한 난장판이 될 것이 불 보듯 뻔 하기 때문이었다. 꾹꾹 눌러 담아 참아 오다가 어머니를 화장하고 경원을 좀 더 머물게 한 마지막 날 밤 [장춘옥]에서 아우는 경원에게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상처가 낳은 또 다른 상처를 뱉어낸다. 경원은 놀라지만 제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던 전화에서부터 소설 내내 아우는 경원에게 빈정거린다. 예를 갖춘 빈정거림이다. ‘왜? 덤벼보시지! 건드려봐~ 다 폭발해버릴테니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경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줄곧 빈정거리고 원망하는 아우에게 단 한마디도 화내지 않는다. 어쩌면 경원은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자신의 상처가 의도치 않게 아우에게 전가되고 또 다른 상처의 양태로 깊게 생채기 냈음을.

 

결국 상처는 모두에게 대물림되고 전가되며 전염된다. 상처의 쓴뿌리를 도려내어 고름을 짜내고 약을 발라 치료하지 않는 한 이것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또 다른 상처를 낳고 또 다른 상처를 낳을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게 된 경원은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적절한 수준으로 의지하고 관계해 온 가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아이들은 이미 장성했고 아내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열차가 도착해 서울로 상경하는 레일위에 몸을 싣기 전에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신 어머니를 위하는 길이고 그 어머니와의 반목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l****h 2012.07.03. 신고 공감 5 댓글 15
리뷰 총점 종이책
인사를 잘하는 법에 대하여
"인사를 잘하는 법에 대하여" 내용보기
한 번도 엄마를 보내드린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내게 복역 중이시다.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딸이다. 허나 엄마에게 잘 가시라 인사하는 일, 그것은 곧 내게 다른 삶을 살라는 말과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살라는 뜻과 같았다. 엄마는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 알았고 그렇기에 지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고 믿는다. 엄마와 헤어지는 날
"인사를 잘하는 법에 대하여" 내용보기

 

 

한 번도 엄마를 보내드린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내게 복역 중이시다.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딸이다. 허나 엄마에게 잘 가시라 인사하는 일, 그것은 곧 내게 다른 삶을 살라는 말과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살라는 뜻과 같았다. 엄마는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 알았고 그렇기에 지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고 믿는다. 엄마와 헤어지는 날이 아마 내겐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이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나는 기쁠까 슬플까. 엄마는 나를 반겨주실까 꾸짖으실까...

 

 

소설을 사다 놓고 여러 번 읽기를 주저하곤 했다. 책을 덮으면 어쩐지 나 역시 작가처럼 엄마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의 의미도 결론도 앞으로의 갈 길도 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럭저럭 삶의 핑계를 대고 이유를 만들어 작별을 보류한지 벌써 5년째. 몇 주째 소설의 제목을 스치기만 해도 나는 아직 엄마의 부재를 메꾸어 볼 다른 무엇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했다. 부끄럽고 옳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엄마의 품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는 순간이면 엄마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엄마의 한마디 대답과 격려, 혹은 잔소리, 아니면 말없는 미소를 찾게 된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없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나는 이미 죽은 엄마를 그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보내드리지 못한 듯하다. 둘 중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으니 엄마와 나는 사실 그 날 이후 같은 자리에서 몇 년째 대치중인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이년반 동안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기꺼이 엄마를 팔고 죽음의 사연을 과시하며 슬픔을 전시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내 특별한 사연을 되도록 많이 떠들고 싶어 안절부절 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극복한다는 구실로 더욱 엄마의 죽음을 말하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내 글이 지향하는 결론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사람을 잊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결국은 더욱 그리워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뿐. 이 소설은 일흔 넷 작가가 아흔 넷의 어머니와 작별하는 심경을 기록한 고백록이다. 뼛속에 사무친 그리움이 증오와 원망과 분노로 대체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의 시신 앞에 돌아와 비로소 자신과 어머니, 가족과 화해하는 순간을 아프게 그려내었다. 열다섯 이후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나와 객지를 떠돌던 아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혹시 ‘잘가요, 엄마’ 그 한마디는 너무 짧은 인사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다 하지 못한 말이 넘쳐흐르고 그렇기에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최후의 신음소리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한 점 먼지로 날려버리도록 그리하여 더 이상 강 건너 불 보듯 구경꾼을 사임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들을 따라 장례식을 다녀오는 길은 걸음걸음마다 힘겨웠다. 아내가 여행 간 사이 마치 자신도 여행을 떠나듯 고향을 향한 여정이 곧 내 원망과 분노를 돌이켜보고 내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한평생 드난살이와 품팔이로 살아온 어머니의 죽음이 절망만은 아니었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나를 강렬하게 흔들었기 때문일까. 소설 속 사람들은 끈질기게도 내게 그만 엄마를 놓아주라 단체로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다. 그들이야 말로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듯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작별 과정을 지켜보며 나만의 은밀한 이별식을 치룬 것이다. 소설 속 어머니의 죽은 표정에서 내 어머니의 보랏빛 시신을 겹쳐볼 수 있었고 그 곁에 선 작가의 결연한 얼굴 위로 내 붉은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다. 무허가 화장장에서 어머니가 연소될 때 소멸되어가는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꼭 내 가슴속 불타버린 새까만 그것만 같았다. 나를 안아주고 먹여주던 세상 유일한 살결과 체온의 어머니가 모두 타 버릴 때 작가는 무엇을 태웠을까. 오래 세월 피할 수 없었던 결핍과 수치심,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허세, 위선을 견디기 위해 자학해온 고통의 시간들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토록 생존하기 위해 질기게 부여잡아온 세상과 어머니에 대한 복수는 한 줌 재로 남아 버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머니의 허물도 치욕스런 가정사도 개인의 누더기 같은 치부도 아니었다. 구십 평생 끝내 다 치르고 만 어머니의 죄값도 아니었다. 당신은 위대하진 않았지만 장한 어머니였고 삶이 눈부시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허물이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다 갚고 가기 위해 모진 삶을 살았다고 자식에게 모진 삶만을 남기는 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도 자식을 등에 업는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토록 그 어머니의 안온한 등허리를 기억하며 세상과 당당히 마주해온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니 어머니를 등져온 건 세상을 속여 온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눈을 감자 이제야 뒤돌아 있던 등을 다시 돌린 것이었다. 우릴 향해 열어젖힌 작가의 앞모습은 한없이 엄숙했고 목메인 광경이었다.

 

 

소설엔 어머니 사후 성이 다른 아우가 형을 고향으로 이끌며 지난 시절 추억의 장소를 돌아보는 과정을 담았다. 형제는 살아생전 어머니집과 가족 내 서글픈 추억이 어린 중국집, 어머니가 방아를 찧고 국수를 말던 권씨네 고택, 방학마다 떠나있던 외갓집을 차례로 돌아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잔해가 된 어머니를 흩뿌리며 형은 아우와 화해한다. 마을 산기슭 위로 사라지는 어머니를 향해 그들은 인사한다. 순간 엄마야 누나야를 외치며 달려가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힘겨울 때마다 뛰는 것이 유일한 용기였고 위안이었던 작가가 어린 시절 ‘꼬질꼬질하고 암울한 애옥살이가 불길하게 노출되는 비애가 서린 그 집’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어머니를 태우고 온 그 날도 달려가 옹기전 항아리 속에서 새우잠을 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살아계신 동안 내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에 죄책감이 들면서도 세상과 부모에 속절없이 화풀이만 해댄 세월 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엄마는 내게 진짜 나만의 삶,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엄마의 목숨값은 결코 나를 향한 죄값도 내게 지게 된 빚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실체를 발견하고 나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나의 진실을 바로 보게 한 엄마는 죽음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잘가요, 엄마. 몇 십 번, 몇 백번을 더 말해야 정말로 엄마를 잘 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엄마와 헤어지는 일만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보다 더 씩씩하게 인사를 잘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지금부터 한 살 두 살, 새롭게 나이 먹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진짜 엄마를 만나는 날이 가까워 질 것 같다. 잘가란 인사는 하지 못했다. 대신 후회 같은 인사를 지금 할 수는 있다. 그날까지 잘 있어요, 엄마.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j***o 2012.07.04. 신고 공감 4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잘 가요 엄마
"잘 가요 엄마" 내용보기
'엄마' 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 가슴을 답답하고, 먹먹하게 만들어 온다. 존재를 부정하기엔 그럴 수도 없고, 행복하게 맞이하기에도 나에겐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엄마'라는 존재이다. 더욱이 내가 나이를 먹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키우고 있는 이 시점에선 젊은 날에 가졌던 엄마에 대한 반항심이나 답답함들이 안쓰러움과 나도 생각지도 못한 나에게서 찾아보게
"잘 가요 엄마" 내용보기

'엄마' 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 가슴을 답답하고, 먹먹하게 만들어 온다.

존재를 부정하기엔 그럴 수도 없고, 행복하게 맞이하기에도 나에겐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엄마'라는 존재이다.

더욱이 내가 나이를 먹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키우고 있는 이 시점에선 젊은 날에 가졌던 엄마에 대한 반항심이나 답답함들이 안쓰러움과 나도 생각지도 못한 나에게서 찾아보게 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섬뜻함과 쓸쓸함을 안게 된다.

 

김주영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그것을 넘어 존경하는 작가이다.

'객주'를 읽을 때면 우리말의 아름다움의 끝은 어디인지를 갈음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 후부터 계속되는 작가에 대한 나의 외사랑....

'잘가요 엄마'는 발간되자 마자 구입해서 한참을 이런저런 핑계로 손에 들기를 꺼려했다.

이런 내 모습이 조금은 별나기도 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책에서의 주인공 경원이가 가진 엄마에 대한 부정과 미움과 안타까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또한 엄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느 정도의 부정이 있기에 선뜻 읽지를 못했었다.

 

역시나 책장을 덮는 순간 작가의 명필로 그려진, 어디에 존재할 우리네 엄마에 대한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질기게 다가왔다.

한평생을 엄마의 곁에 있지만 먼 바라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경원이의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서운한 앙금이 왜 엄마가 돌아가시는 순간에야 가라앉게 되고 치유가 되는 걸가.

'삶에서 소중한 것들은 늘 한 박자 늦게 알아지고 안타까워지는 아이러니는 무엇일까?'

 

어릴 적 도망해 온 고향으로부터의 적대감에 대한 화해를 엄마의 장례를 통해 하나하나씩 그 연유를 알아가게 되고 그러한 적대감과 화해를 하게 되는 경원이의 마음이 잘 그려진 작품이다. 어릴 적 엄마로부터 사랑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늘 주변만 맴돌았던 시간들이 훗날 도회지에서의 삶에서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그래서 거짓으로 점철되는 그의 삶이 엄마의 죽음으로 그제서야 진실된 마음을 알아가게 되고, 무엇이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가슴 시리지만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 순간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방향을 알 수 없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주인공의 행동은 이제까지 어린시절 집을 떠나 살았던 도회지에서의 그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행위로 읽어도 될까?

그제서야 삶에서의 가장 소중함을 깨닫고, 거짓과의 단절을 위해 지금에서 세상과의 소통의 최대 방법인 휴대폰을 던져버리는 것으로 의식을 대시하고고 있다. 좀 더 진실되게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m******9 2012.07.16. 신고 공감 4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아직 안 돼요, 우리 곁에 더 머물러 주세요.
"아직 안 돼요, 우리 곁에 더 머물러 주세요." 내용보기
이런 말이 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가슴 아프고 헤아릴 수 없이 깊다는 생각을 새록새록 하게 되는 걸 보면 이제 비로소 철이 드는가 보다. 어릴 적에는 그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 본 적이 없다. 자식들이 속 썩일 때 부모님이 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너 같은 자식 낳아서
"아직 안 돼요, 우리 곁에 더 머물러 주세요." 내용보기

  이런 말이 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가슴 아프고 헤아릴 수 없이 깊다는 생각을 새록새록 하게 되는 걸 보면 이제 비로소 철이 드는가 보다. 어릴 적에는 그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 본 적이 없다. 자식들이 속 썩일 때 부모님이 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너 같은 자식 낳아서 키워봐라.

 

  곧 있으면 나도 엄마가 된다. 내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무겁고 참으로 힘들다. 먹는 거 하나에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태교를 위해 좋은 생각만 해야 한다는데, 몸은 힘들고 날씨는 덥고 잠도 잘 못 자다 보니 짜증도 나고 좋은 생각만 하기도 참 힘들다. 이렇게 힘든 열 달을 버티고도 엄마처럼 잘 키울 생각을 하니 참으로 걱정되고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어렸을 때 종종 나도 언니처럼 예쁘게 낳아주지.’라고 많이도 투정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네가 얼마나 예쁜데 그러니.’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모든 엄마들은 고슴도치과라서 자신의 자식들은 미워도 고와 보이는가 보다. 지금 나는 밉든 곱든 제발 건강하게만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 드린다. 나의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의 이런 마음을 미처 모르겠지. 과거의 철없던 나처럼.

 

  ‘잘 가요, 엄마를 읽으면서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나는 아직 엄마를 작가처럼 순순히 보내드릴 수 없다. 내가 갚아야 할 은혜의 빚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베푼 만큼의 은혜를 모두 받고 가시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만은, 난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이처럼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엄마보다는 나의 뱃속의 아기에게 더 신경 쓰고 있으니. 내가 아기에게 보내는 사랑의 반의 반이라도 엄마께 보여드렸다면 효녀소리 들었을 것 같다. 참으로 얄궂게도 내가 엄마가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야 나의 엄마를 자꾸 생각하게 되고 더 잘해 드릴 걸 후회하게 되는 것은 조금은 늦은 감이 없진 않다. 좀더 빨리 깨달았다면 엄마 좋고 딸 좋고, 얼마나 좋았을까.

 

  요즘 우리나라 사망률 1위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살이다. 특히 성적비관이라든가 집단 따돌림으로 인한 청소년 자살이 많은 걸 보면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걱정스럽다. 아기를 가졌을 때의 그 열 달 뿐만 아니라, 잘 먹이고 잘 키우고 잘 가르치기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많은 자살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해서 머리카락 자르는 것도 불효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몸과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절실할 때가 아닐까 한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주제로 한 책들을 읽으면 참으로 애잔하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그만큼 고생을 하시고 자식들을 위해 희생을 하신 세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자꾸 글 속의 부모님에게 우리 부모님을 대입해 보면서 읽다 보니 조금만 슬퍼도 눈물이 쏟아진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아직 나의 엄마가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엄마께 잘 해드려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m*******4 2012.07.04. 신고 공감 4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어머니라는 무거운 추억이 따뜻함으로 변할때
"어머니라는 무거운 추억이 따뜻함으로 변할때" 내용보기
잘가요 엄마를 읽으려고 펼쳐드니 김점선의 <속삭임>이라는 그림이 파랗게 눈에 들어 왔다. 마치 엄마와 아들인듯 모든것을 추억하고 모든것을 사랑하듯 그렇게 웃고 있는 백마가 푸른 산들 속에서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다. 작가가 데뷰한지 만 41년만에 써내린 잘가요 엄마는 요즈음 신경숙님의 엄마를 부탁해가 여성 버전이라면 남성버전 엄마를 부탁해요 라면서 사람들의
"어머니라는 무거운 추억이 따뜻함으로 변할때" 내용보기

DSCF0817.JPG

 

잘가요 엄마를 읽으려고 펼쳐드니 김점선의 <속삭임>이라는 그림이 파랗게 눈에 들어 왔다. 마치 엄마와 아들인듯 모든것을 추억하고 모든것을 사랑하듯 그렇게 웃고 있는 백마가 푸른 산들 속에서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다.

작가가 데뷰한지 만 41년만에 써내린 잘가요 엄마는 요즈음 신경숙님의 엄마를 부탁해가 여성 버전이라면 남성버전 엄마를 부탁해요 라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엄마라는 화두는 누구나 하나씩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이지만 누구나 다 같지 않은 무게와 추억이 색색깔의 오묘한 빛깔을 띤 색들의 모습처럼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작가는 이이야기속 엄마의 모습은 자신의 엄마의 모습을 얼추 많이 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엄마의 모습을 담은 지라 그 모습이 그 이야기가 적잖은 무게로 와 닿는것 같다.

 

DSCF0819.JPG

 

객주나 홍어 아리랑 난장 빈집등의 작품을 배출한 김주영 작가의 자전적 냄새가 베인 잘가요 엄마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의 배다른 동생에게서 전해 듣고 초상을 치르러 내려간 고향에서의 며칠 동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소설이 끝날즈음 작가는 집에 오르는 길에 작가의 엄마에 대한 회환과 추억과 사랑과 연민이 녹아 먼지처럼 흩뿌려 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치 엄마의 뼈가루가 흩뿌러져 마을 어귀를 날아가듯. 주인공의 눈앞에 먼지인듯 엄마의 흔적인듯 그렇게 마무리 되고 있다.

'한평생 무겁고 가혹한 삶의 중턱에서 벗어날 날 없었던 어머니는 결국 한줌의 먼지였다. 라는 표지의 한줄 글에서

고단하며 한편 슬프고 희생만한 팍팍한 삶이 나타나고 있었다.

한 여자의 인생이 어느새 엄마라는 굴레를 쓰고 보면 이것은 인간도 사람도 아닌 막중한 가면을 눌러 쓴 기분이 나는 것 같다. 어머니도 한때 살랑살랑 대는 봄바람에 가슴 설레이던 소녀였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두 볼 붉히며 단장하던 여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애써 까먹으려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어머니에게 주어진 삶은 너무 팍팍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오신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대비적으로 등장하는 주위의 남자들은 어머니의 작고 작은 체구에 얹어진 기생충 같다는 생각 바위같은 무게로 기생충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삶을 더 뒤틀리게 하고 힘들게 하고 거머리처럼 한 여인의 팍팍한 삶에 얹혀지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처럼 보였다.

큰아들의 징용을 막아 보겠다고 유부남에게 딸을 시집보낸 외할아버지나 누나의 딸을 거둬들인다는 명목으로 놀며 배불리 먹는 작은 외삼촌 결국 그 딸을 말하자면 조카를 병신 정태에게 민며느리 넣으려고 계락을 꾸미고 그것이 피붙이 외삼촌의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첫번째 남편은 모습도 없이 남매만 남겨두고 가 버렸고 그런 누나를 돌보아 주기는 커녕 자신의 이득을 위해 빈둥빈둥 놀고 먹는 서방을 옆에 부치는 댓가로 또 빌어 먹은 작은 외삼촌의 행태 그리고 늘 자신을 벌주고 폭력을 휘두르던 학교 선생님 그리고 어머니의 두번째 서방 또한  매한가지 덩치만 크지 누워 놀고 먹기는 똑같은 행태. 엎친데 겹친 격으로 남동생 하나를 더 얻게 해서 어머니에게 덕지 덕지 달라 주위에 붙은 남자들이 어머니의 등꼴을 빨아먹고 한평생을 이용하고 희생시키고 무시하고 굴곡진 삶을 만들게 한 원인으로 어머니를 괴롭혔다.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딸을 야밤도주 시킬수 밖에 없었던 그 아픔이 피 절절 흘리는 그 상처에 소금밖에 뿌려 댈줄 몰랐던 그 어머니의 남자들이 비단 소설속 주인공 뿐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DSCF0820.JPG

 

여성이라서 여자라서 아무것도 할줄 모르고 가르치지 못해 모르는 무지랭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많은 이야기와 역사 속에서 그런 여성을 그렇게 내 몰고 파렴치한의 모습으로 피 빨아 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남정네들은 우째 그리 많은지.

이런 소설을 접하면 나도 모르게 답답해져 온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속에서 작가는 그렇게 원망하고 부끄럽고 사랑받기보다 늘 사랑에 목말라하던 자신과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이 엄마라는 생각에서 비로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지켜내고 사랑했던 엄마의 모습을 찾아낸다.

고단하고 숨가쁜 삶속에서 가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어머니는 언제나 더 큰 품으로 끌어 안으시는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굴곡진 삶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자신의 인생속에서 끝끝내 지켜내고 사랑했었던 그 마음을 작가는 마지막 먼지가 되어 자신을 감싸는 어머니의 손자락을 바람을 통해 느꼈을 것 같다.

이야기속에서 문득문득 과거로 갔다 현재로 왔다 하면서 풀지못한 의문표가 궁금증이 환하게 풀려가면 갈수록 작가는 내 심장을 덮고 있던 미세한 먼지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아프고 들추기 싫은 과거의 기억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다시한번 보고 싶고 아련해지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그렇게 주인공의 눈물속에 떨구어지고 있었다.

이책을 읽으면서 어머니라는 단어를 입속에서 되내어 본다.

나도 엄마가 되고 보면 녹녹찮은 무게에 한숨 쉴때도 있지만 우리네 어머님 그 위의 어머님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투덜대고 투정만 부릴줄 알았지 어머니의 삶에 대해 그 여자의 삶에 대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h*********a 2012.07.03.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