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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을 지키기가 이렇게도 어려운데 왜 우리는 최대한의 욕망에 휘둘려 혼란에 빠지는 것일까.
아! 시작부터 나를 사로잡은 건 저 문장이었다. 생각이 많아진다. 최소한, 최대한은 나도 모르게 즐겨 쓰는 말이다. 최대한을 위하여 그리도 최소한에 집착하고 얽매여 있는지도 모른다. 최대한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다면 최소한이라도 해야 삶에 미안하지 않을 거라는 그럴듯한 변명을 갖다 붙인 채 말이다. 이 소설의 제목에서 보이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가 아니다. 굳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에도 제목에 사랑을 노출한 건 사랑을 잃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꼭 사랑이라 불러야 한다면 가족 간의 사랑, 내 삶을 대면하는 사랑이라는 게 적합 할 듯싶다. 사람들과 마주하는 법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각성제와 다름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상의 범주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 있다. 가족의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타인의 집합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가족이라는 울타리만 있다 뿐이지 실상은 남과 다를 바 없는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이라서 그랬을 테다.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가족도 많다는 걸 안다. 남보다 못한 무관심 속에서 필요 때문에 구명줄을 잡듯 연명해가는, 핏줄이라 이름 붙이고 허례허식을 갖다 붙인 모순적인 관계 말이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자기의 사랑을 지키는 사람과 자신의 미움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사람."-78쪽
버렸기에, 그 죄책감으로 어떤 것도 온전히 갖지 못한 여자가 희수였다. 희수는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관하는 사람. 딸의 앞날도, 남편의 바람도, 새엄마의 건강도... 그 습성은 새엄마가 들어오고부터였다. 엄마가 죽고 그 자리를 새엄마라는 낯선 여자가 냉큼 꿰찬 것이 증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희수의 무관심은 똬리를 틀었다. 삶에도 무관심했고 세상을 관조하듯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여인이 되어있었다. 너덜너덜, 마음이 해진 사람. 촘촘히 박혀있어야 할 마음의 단추가 모두 떨어지고 어긋나있는 쓸쓸한 사람이 희수였다.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는, 첫단추부터 다시 끼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이 어긋난 지점을 찾아가야 한다. 소설은 새엄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녹내장,치매,고관절 손상 등 상할 대로 상해버린 건강상태에 있는 새엄마는 요양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있어 거짓말같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녀의 유언이나 마찬가지인 마지막 부탁이 희수에게 전해진다. 살아서도 남처럼 소원했던 새엄마지만 차마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 오빠와 자신이 버리고 도망쳤던 새엄마의 친딸을 찾아달라는 노쇠한 늙은이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친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느닷없이 나타난 새엄마의 등장은 12살 어린 소녀의 가슴에 증오라는 미움의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했다. 도화선은 불꽃이 번지듯 그녀의 딸 유란에게 옮겨붙었고 그 아이를 버린 시점부터 희수의 마음에는 복합적인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엄마의 마지막 부탁이기 이전에 오랜 시간 자신을 장악해왔던 돌이킬 수 없는 자책이 더 컸기에 거절할 수 없었던 거라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외면하면 그뿐이었지만 실은 그녀도 궁금했으리라. 자신과 오빠가 버렸던 그 시절 7살 소녀는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이었으리라. 죽은 사람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옹색한 변명을 가장한 이기심의 발로發露 비슷한 것.
그래서 찾아간 곳이 북쪽 끝 접경지대, 유란이 종적을 감춘 곳이다. 희수는 유란이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집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감내하기로 한다. 어쩌면 그녀도 도망치듯이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해서 무작정 머물기로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새엄마의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속 상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그곳에서 마주치는 버려진 사람들, 더는 갈 곳이 없기에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북쪽 끝까지 밀려온 사람들 속에서 나이 40이 넘은 희수는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버려진 사람들, 잊힌 사람들, 외면당한 사람들, 길을 잃고 절망한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 불행에 침잠해 있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그곳에서 최소한의 가치를 본다. 최소한의 사랑, 애정, 관심, 관용, 포용, 이해, 이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산소를 얻을 수 있는 이들일 텐데 그 최소한이 충족되지 못해 외로이 세상과 단절된 채 등 떠밀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현주소라 해도 될법하다. 춥고 황량하고 가난한 곳, 그곳에서 촘촘한 가지가 자라나듯 사람들의 이야기는 파생된다. 목적지 없이 떠나온 사람들, 잠시 머물다 떠나갈 사람들, 안에서 비루한 삶의 총체를 보고 유란의 삶을 전해 듣는다. 동시에 자신의 유실물, 지나온 세월을 본다. 왜 찬란해야 할 삶을 이토록 부질없이 흘려보내는가. 난 자신의 삶에 대해 남의 일인 것처럼 무덤덤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의 욕심에 부합하는 삶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다 제각각 나사가 빠진듯 한 두가지, 그 이상으로 마음에 차지 않는 것 투성이가 삶의 참모습이다. 삶에 대해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꼴보기 싫지만, 자신의 삶을 방관하는 삶은 더 꼴보기 싫다. 네 삶이잖아, 다른 누구의 삶도 아닌, 내 삶. 부끄러워해야 한다. 삶을 놔버린 그대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충족되지 못했기에, 그 무언가를 찾고자 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렸기에 찾아가야만 한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나아가는 게 각자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다. 희수는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안에 삶에 대한 결핍이 있으리라. 삶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 상대를 애정으로 대하는 마음, 나와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 마음 이 모든 걸 잃었기에 접경지대 그곳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더는 잃을 게 없던 사람들, 속 편한 사람들은 차라리 잃을 게 없는 삶이 더 낫지 않느냐 말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잃을 게 없는 삶은 곧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만족도에 기인한다. 만족이 없고 애정도 없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삶, 그 삶이 진정 당신이 원하는 삶이라면 그렇게 살아도 좋다.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한 번이라도 주위에 시선을 건네보길 바란다. 누가 당신만큼 삶을 덧없이 흘려보내는지...
"이렇게 다른데도 내가 너를 한눈에 알아보다니, 이건 눈으로 알아보는 게 아닐 거야. 우리가 모르는 다른 방식이 있는거야. 심장이 발산한다는 자기장으로 서로 알아보는지도 몰라. 너 아니? 심장에 기억이 있다는 거. 심장이 발전기처럼 전기를 만든다는 거. 심장이 자기장을 2미터 이상이나 멀리 보낼 수 있다는 거."-208쪽
점차 기억에 기대기는 어려워도 감각이 먼저 반응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언젠가 옆에 있지 않은데도 나의 향기가 맡아졌다던 누군가의 말처럼 심장에 새겨진 상대방과의 감각은, 그 상대가 누구라도 기억이 부재함에도 먼저 알아챌 수 있는가보다. 이성 간의 사랑은 아니지만 희수에게 유란은 심장에 새겨진 흉터와 같아서 그녀가 그토록 잊히지 않았던걸지도 모른다. 자책, 죄책감 이전의 또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유란이 거처했었고 현재 희수가 머무는 전셋집의 의미는 커진다. 집이라는 건 인간에게 있어서 최후의 쉼터, 보루와 같은 존재다. 방은 많으나 좁디좁은 작은 부엌이 있는 이곳에서 유란이 꿈꿨던 로망을 희수 또한 꾼다. 마당 한가운데에 커다란 부엌을 짓는 일. 누구나 드나들며 삼삼오오 모여 따뜻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곳. 이들이 부엌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잃어버렸던 엄마의 온기를 찾고자 해서 아니었을까. 둘 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었고 부엌이란 엄마의 공간이라 해도 무방한 곳이기 때문이다. 밖은 따사로운 석양이 내리고 부엌에서는 가족을 위해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장만하는 엄마, 그런 엄마의 모습을 목을 길게 빼고 눈으로 좇는 아이들.... 이들이 원했던 건 엄마의 모성과 함께 최소한의 온기, 가족이, 사람들이 전해주는 최소한의 부대낌이었다.
인생도 그래. 다 지어내는 거지. 사랑도 다 지어내는 거야. 하지만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지어낸 것을 사실로 만들어가는 일이지.-245~6쪽
내가 찾고 있는 건 무엇일까? 절실하게, 간절하게... 찾고 있는 건 누구일까? 희수와 유란, 이들에게 가장 최소한의 지켜야 할 것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아니었을까? 서로 감싸고 포용해야 할 관계(가족)에서 미움과 애증으로 변질한 관계(타인)로 속개되면서 이 어그러짐이 이들을 비극적 관계로 이끈 것이나 같다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잃어버린 건 무엇이고 찾는 건 무엇일까.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대상은 有形에서 無形의 존재로 탈바꿈했고 그 안에서 너라는 無形을 찾고 있다. 有形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잃어버린 것을 알고 그것을 찾기 위해 뛰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을 껴안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대를 바라보는 욕심에 최소한도 갖지 못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한다. 껴안아야 한다, 내 삶을. 최대로 껴안지 못한다면 최소한만이라도 살아내는 것, 삶에 있어 가장 필요한 답안 아닐까. 삶은 최소한의 관심으로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근간이 될 수 있다. 최대를 얻으려는 욕망의 무지함으로 최소한의 가치를 상실한 채 아파하는 이들이 더는 없기를 바란다.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지 않아도 된다. 최소한의 이해와 사랑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최소한의 관심으로도 살아가는 게 한결 힘이 날 때가 있다. 내가 찾고 있는 것, 그게 무엇이든 내 삶을 껴안으며 끝까지 가보면 알게 되겠지.
당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당신이 잃어버린 것,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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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제목이 끌렸다. '풀밭 위의 식사'를 통해 처음 대면했지만, 왠지 더 만나보고픈 느낌이 강했다. <이책은> 신간을 냉큼 사서는 한 달 여 지나서 읽었는데 이제야 느낌을 정리해 본다. <저자는>
<책 내용 맛보기>
<책 읽은 소감> 그렇다. 그랬던 것이다. 내가 전경린 이름은 알았어도 단 한 번도 책을 접하질 않은 상태에서 '풀밭 위의 식사'를 만났다.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 불린다는 말을 한 권의 책으로 가늠하기에는 이 찬사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사랑도 있을 수 있구나,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풀어내는 방식에서 공감대 형성이 되었기에 신간을 주저없이 선택, 자세한 검색을 해보고 구매했더라면 실망감이 작았을텐데 라는 미련이 남았다. 이 책은 남녀간의 사랑 얘기가 아닌, 가족내 사랑이지만 일종의 치유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죄책감을 가진 채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왠지 찜찜한 상태로 지내는 상황. 그건 너무나 가슴 밑바닥에 있는 감정인지라 자신의 것인지도 잘 분간이 안가는 상태서 세월 따라 지나온 감정이다. 희수도, 오빠도.
희수는 딸 하나만을 둔 맞벌이였다가 그럴 수 없이 지겹다 느낄 즈음에 마침 새엄마를 요양원에 모셔야 하는 입장이 되자 사표를 냈다. 자신을 많이 닮았다 느끼는 딸은 호주의 고모네로 내빼었다. 아마도 미술을 못하게 말리는 아빠를 피해 다시는 오지 않을 작정이다. 자신의 미술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한 남편은 그 모습이 싫어서 바람을 피운다.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잘도 지낸다. 여러 여자가 있었는데 최근의 여자는 꼭 단추 하나를 주머니에 넣어 보낸다. 그건 가위로 잘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방 구석에 쌓인 와이셔츠가 몇 개인지를 모른다. 남편에게 어떻게 할까 물으니 알아서 하랜다. 그렇게 쌓아두자니 자꾸 더 많아진다. 남편의 불륜이 괘씸하지도 않고 분노도 안 일고 질투도 안난다. 그건 남편 인생이다.
새엄마를 모신 요양원서 정신없는 노인네인 줄만 알았더니 희수의 옷소매를 붙잡고 유란이를 찾아달라며 애원한다. 제정신으로 보여지니 왠지 가책이 된다. 사표도 내고 새엄마와 아버지가 살았던 집으로 가서 장농에 있다는 사진과 주소, 통장을 찾아낸다. 유란은 배다른 동생인데, 새엄마가 데려왔을 때 오빠와 함께 골려주려 장난을 쳤었다. 그렇게 큰 잘못인 줄을 몰랐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건 아니지 싶었는지 가위 눌리는 경험을 종종 한다. 유란이는 그 일 이후 외할머니집으로 보내졌고, 아무일 없다는 듯 살아온 세월인데, 새삼스레 이제와서 유란일 찾아달라는 애원을 묵살하기엔 책임감이 묵직하다. 딱히 자신에게나 오빠에게나 더구나 아버지에게 잘 못한건 없는 새엄마다. 유란일 일부러 안 찾겠다 생각한 적도 없지만, 꼭 찾아야한다는 어떤 명제도 없었다.
인간의 '최소한의 사랑'을 위해 유란일 찾아나서는 희수. 유란이라는 이름과 주소만 가지고 간 그 곳에서 유란인 없다. 유란일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시간들. 어느새 희수는 가정은 없는 사람이 되어 유란일 찾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매우 참을성 있게 그 시간들을 인내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유란이라는 아이. 이 아이가 어찌 지냈는지를 주위 사람들을 탐색하면서 자신이 명색이 이복언니지 알고 있는 사실이 이리도 없을 수 있나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만 하다. 많지도 않은 유란의 지인들을 통해 전해듣게 되는 사실들은 희수로 하여금 자책하게 만든다.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 북쪽 도시의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이 가세해 더욱 시리고 아리게 한다. 감정이 배제된 여자 희수가 남편의 불륜 앞에서도 그저 무덤덤한데, 이복동생 유란의 행적을 알게 되면서 조금은 감정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게 이상하다.
난 감정이 있는 책이 좋다. 그 감정선을 적절히 터치하여 울어도 좋고, 울게 해도 좋고, 그냥 웃게 해도 좋다. 기막혀서 분노도 할 줄 알며 억울하여 씩씩대도 좋다. 무미건조한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지리하게, 지루하다 못해 짜증나게, 짜증나서 열통 터지는 건 딱 질색이다. 냉소적이고 뭐라해도 감정의 변화가 없는 상태는 목이 마른다. 사람을 지치게 한다. 난 이 책을 읽으며 많이도 지쳤다. 이런 이상한 여인은 보다 처음 본다. 참으로 적응 안되는 캐릭터다. 좋게 말해서 감정 조절을 잘해서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런 사람이 숨막힌다. 이런 책은 도리도리다. 결말도 애매하다. 잘 못 선택한 책은 괜시레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삼 세 번이라고 다음번에 기회를 만들어 그녀의 베스트셀러를 접해보리라.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불러주는 연유를 알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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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을 찾아달라는 새엄마의 말과 함께 나는 주인공, 희수가 유란을 만나게 되는 것을 고대했다. 희수는 언제, 어디서 유란을.. 어떻게 만나게 될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이제나 만날까~ 저제나 만날까~ 그렇게 오매불망 희수와 유란의 만남을 기다렸다. 유란은 어떤 모습일까??
반짇고리 파는 노인과 세상만사 상담소의 상담사가 꽤 인상적이었다. 노인이 내 옷들을 기워주면 나의 근심, 걱정, 또 쓰잘데기 없는 온갖 생각까지도 모두 기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단 돈 5000원으로 내 가슴 속 짓누르는 무거움을 조금씩 조금씩 가벼이 흘려보내게 해줄 세상만사 상담소의 상담사가.. 혹, 현실에서도 있지 않을까~ 괜한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무거워보이는 겉테두리와는 달리..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깔끔했다. 뭐랄까.. 모든 군더더기를 뺀 최소한의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따스하고 등이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습관처럼 들리는 집 근처 서점에서 여러 달 동안 내내 내 눈길을 잡아끌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ㅋ
p.35 "양아, 너를 서두러 키우려고 한 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알아, 넌 지금도 어려. 당연히 어리지. 어른스러우려고 애쓰지만 어린 거 알아. 하지만 양아, 그거 아니? 어른들도 마찬가지라는 거. 누구나 그렇다는 거."
p.78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자기의 사랑을 지키는 사람과 자신의 미움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사람."
p.168 그러다가 고개를 들면 유리창에 반사된 어떤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낯선 역의 2층 도넛가게에 덧없이 홀로 앉아 있었다. 내장을 다 드러내고 석탄으로 속을 채운 것 같은 여자였다. 차갑고 공허하고 검고 무거운 그 여자는 유란이었다가 나였다가 했다. 유리창에 비친 그 여자는 욕망을 금지당한 여자였다. 욕망을 하면 쇼크가 오는 여자, 고독과 잠을 처방받은 여자,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무력한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여자, 세속적인 삶을 방어해야 하는 여자였다. 열두 살 이후로 나는 무엇을 가지려고 한 적이 없었다. 무엇을 가지려고 하면 죄책감에 휩싸이며 몸이 아프고 성모상에 가위 눌렸다. 죄책감에서 놓여나기 위해 손을 벌린 채로 살아왔다. 벌어진 손아귀 사이로 모든 것이 모래처럼 숭숭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와 새엄마, 그리고 남편과 아이…….
p.186 냉장고 앞에 앉아 있던 칠월이 문득 깜짝 놀라며 우리를 쳐다보더니 가벼이 걸음을 옮겼다. 머리 위로 높이 세운 꼬리가 허공과 교감하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마치 내 영혼을 만지는 것 같았다. 칠월의 풀을 돌로 짓찧은 듯한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깨끗한 아몬드 형태의 눈이었다. 고양이는 주인에게 다가오지 않고도 주인의 영혼과 사귀는 위험한 동물 같았다.
p.205 매일 같은 일을 너무 오래하니까, 실은 머릿속이 기계와 비슷해. 가끔, 인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박하게 들 때가 있어. 잠시라도 인간을 하고 싶다……. 너무 견딜 수 없을 때면, 역에 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가곤해. 승객들은 스쳐가듯 잠시 모여들었다가 한꺼번에 사라져버리지. 여긴 텅 비고 조용해서 좋아.
p.245 인생도 그래. 다 지어내는 거지. 사랑도 다 지어내는 거야. 하지만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지어낸 것을 사실로 만들어가는 일이지…….
p.292 독립적이면서도 약간 히피적으로 살려는 의지는 고양이를 키우며 혼자 사는 여자들이 가진 공통점이었다. 그들은 최소한만 이 땅에 살고, 최소한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36도의 체온이 정제시키는 여백 안에서 가능한 한 자유롭게 존재하고 싶어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곁에서 사는 동물들이나, 다른 대륙에 사는, 전혀 모르는 타인들과도 최소한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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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작바작 타요. 얼굴이 거울 표면처럼 깨지는 것도 같고요. 너무 미워서 내 얼굴이 아파요.
결핍. 나도 모르게 결핍된 사람들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고 공감하고 빠져드는 것을 내향적인 성격 탓으로 여겼었다. 『최소한의 사랑』 이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나 역시 결핍된 사람인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들속으로 빠져드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핍,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장미아파트에 살던 시절 저녁상을 무를때쯤이면 출근하는 아빠를 배웅하며 지켜보던 아빠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복도식 아파트 대문이 열리고 어둠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작고 왜소한 중년 남자의 뒷모습. 나에겐 아빠가, 어둠이, 뒷모습이 결핍인 듯 싶다.
순간, 두피 아래에 차갑고 끈적한 액체가 쏟아진 것 같았다.-p.14
척박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 접경지대에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을 때면 어김없이 희수와 그녀의 의붓동생 유란이 떠오를것만 같다.
나는 은밀한 죄의식을 뱃속에 꿀꺽 삼켰다. 헛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었다.
실컷 쪼이고 후비고 쑤셔놓고도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그곳에 있는 존재이다. 라고 말하는 작가 전경린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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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은 어렵다. 그것도 이미 자기 영역에서 대가를 이룬 사람이 한 단계 성장을 위해 변신을 시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장점을 잘 지켜나가면서도 새로움에 부딪혀봐야 하는 것이니까.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데뷔 초기작을 갖고 있는 소설가들에게는 그것이 더욱 부담스럽고 어려운 숙제이다. 예전 작품만큼 못하다, 는 소리를 듣는 작가들이 어디 한둘인가.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글 쓰는 일도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의 베스트 작품과의 치열한 싸움.
그런 점에서 전경린의 <최소한의 사랑>은 많은 일간지 서평들이 설명하듯, 전경린 작가의 일대 전화점이 될 작품이다. 사랑 이야기를 죽도록 써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사랑 아닌 이야기. 기존에 보여준 섬세함과 통찰력이 이번엔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보다 더 큰 인간의 의무, 존엄성 등에 초점을 맞춘다. 더구나 미스터리하고 환상적인 장치로 작품을 읽는 내내 몽환적인 기분에 빠져들게 한다. <최소한의 사랑>은 분명 전경린의 장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변신이자, 작가의 성장의 흔적이 보이는 작품이다.
<최소한의 사랑>은 주인공 희수가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는 척 성당에 버려두고 온 배다른 여동생 유란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일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쉽게 떨어져버리고 마는 단추처럼 모든 것에 의욕이 없이 손을 놓아버릴 때, 희수는 여동생을 찾아달라는 죽어가는 새엄마의 부탁을 일생일대의 미션으로 삼는다. 그리고 여동생을 찾는 과정을 통해 소중한 것들을 붙들어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가장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지 못해 세상엔 이토록 많은 고통과 상처가 얽히는 것이다"는 작가의 말. 그가 보여주는 섬뜩한 통찰력에 가슴 한 구석이 새파랗게 시리겠지만, 이는 내 인생의 소중한 것을 되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서로 끈을 놓아버린 인연, 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마구 생각이 난다.
의욕이라는 게 다시 절실히 필요해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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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남쪽에서 이 곳으로 온 여자는 단지 동생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 의붓동생, 새엄마의 딸. 어린 마음에 그 아이로 인해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는다 여겼고,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질 여유없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었다. 그 일이 이토록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마음을 짓누르며 그녀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될 줄은. 특별히 동생을 생각하며 산 것은 아니었으나 새엄마의 죽음은 여동생을 다시 그녀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였고 남편과 소원해지고 딸마저 자유롭게 훨훨 날아간 지금, 그녀는 동생의 집에서 동생을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첫 문장을 읽고 그 다음 문장을 읽어내리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아마도 처음부터 요양원이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주인공, 우울한 분위기, 상실의 고통. 내 마음은 아직도 어린아이라서 아프고 힘든 부분은 책이라도 쉽게 넘겨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책이기 때문에 더. 책만큼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므로 슬픔과 괴로움에 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 재미난다. 크게 자극적이지도 않고 엄청난 소설적 장치가 들어있는 것도 아닌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동생이 사는 곳에 발을 딛고 생활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 그리고 종내는 만나게 될 여동생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그녀가 과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갈 지 궁금했다.
이 작품은 굳이 정의하자면 '치유의 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녀는 동생이 살고 있는 도시에 머물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자연스럽게 그곳에 동화될 뿐. 성스럽게 추앙받는 성모상은 그녀에게 죄책감의 상징이고, 마음 한 켠에 새겨진 주홍글씨이며,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벌이었다. 그런 그녀가 반짇고리 노인을 만나고, 고양이 칠월을 만나고, 세상만사 상담소의 상담사를 만나고, 동생의 지인들을 만나며 동생을 맞아들일 준비를 한다. 아무런 꿈도 없던 미래에 그녀의 흔적을 벌써부터 남겨놓은 채.
일본문학에서 엿볼 수 있었던 형식에 우리의 정서를 담아낸 따스한 작품이다. [최소한의 사랑]이라는 제목처럼 작품 안에는 간간히 '최소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러하다. 최소한. 그녀의 인생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고,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던 대학 동기조차 과도한 표현으로 그녀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으니 존재할 뿐,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정도로.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세계였는데, 마치 유토피아 같으면서도 실제로 존재할 듯한, 아무것도 아닌 듯 하나 굉장히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세상이었다.
최소한이라는 단어는 '아주 조금'이 아닌 '당연히 지켜야 할' 로 귀결된다. 사랑에서, 인연에서, 생활 속에서. 억지로 큰 것을 얻으려 하지 않고 최소한의 것을 바라며 최소한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 아름답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힐링은 최소한에서부터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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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소한을 지키기가 이렇게도 어려운데 왜 우리는 최대한의 욕망에 휘둘려 혼란에 빠지는 것일까." 전경린의 책 <최소한의 사랑>은 이 문구로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전경린의 예전 단편들을 짜임새있는 글로 읽었었기에 이 책도 호감을 갖고 선택했는데. 인간 내면의 어둠이나 우울을 너무 깊게 그린 소설은 읽는 동안이나 읽고 난 후에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 글에는 많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화자로 등장하는 희수, 바람피는 남편, 부모로부터 멀리 벗어나려는 딸, 그리고 어렸을 적 들어온 새엄마, 새엄마의 딸 유란, 그밖에 유란을 찾아나선 곳에서 만난 이들...
어렸을 적 겪게 된 상처들-인간 내면에 생긴 결핍들이 성년이 되어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어 이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인생 내내 자기속박의 동인으로 남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소설이다.
또한 반짇고리 파는 노파나 고양이의 설정등에서 이루어지는 미스테리한 이야기들은 비록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한밤중 읽다가 후다닥 덮게 되던 소설이기도 했다. 지금도 영적인 세계에 대한 표현이나 장면들은, 무섭다. 정신체계가 아직도 견고하게 여물지 못한 탓인지. 그 부분이 밤에 소설읽기가 망설여지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게는. 그런 문구, 단어를 보게 될까봐.
이야기의 흐름이 비현실적인 부분과 섞여 전개되다 보니 주인공들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았고 분단선의 접경지대를 선택해 인간 내면의 결핍과 박탈, 고립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작가가 자신의 관념에 너무 함몰되어 있는 듯 여겨져 오히려 그 속에 함께 빠져들지 못했던 책이다.
***밑줄 긋다 10 이젠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병원에서 태어나고 산후조리원에서 첫 시기를 보내고 요양원에서 죽는다면 그런대로 무난한 일생이다.
16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사람의 머릿속에는 저마다 깊은 우물에 종이배 하나가 까닥까닥 떠 있는 게 아닐까.
20 우물 속에 큰 돌덩이가 떨어진 것처럼 가슴이 철렁 흔들렸었다. 무슨 일이든 저지르게 될 것처럼.......
38 사람이 쇠약해지면 불결해지고 흐트러지고 집안 살림살이와 함께 몸도 마음도 주저앉는다.
80 그런 바람소리는 전에도 문득문득 들은 적이 있었다. 대체로 오후6시 무렵이었다. ...... 낮과 밤의 틈새가 벌어지며 제정신 들듯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찾아드는 익숙한 슬픔.......
88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가면 가나보다, 떨어지면 떨어지나보다 하고 무엇이든 쉽게 놓아버리지. 아무것도 붙들지 않잖아."
124 단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가장 낯선 사람이 되어 방이나 거실이나 도서관이나 공원이나 역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 그 외에는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생활, 시장을 보고 간단한 음식을 해먹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산책을 하고 그리고 또 책을 보는, 그런 생활을 상상해본 사람이 나뿐은 아닐 것이다. 의외로 누구나 하는 흔한 상상인지도 모른다. 한 계절쯤 혹은 1년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169 열두 살 이후로 나는 무엇을 가지려고 한 적이 없었다.
249 "그 사람은 자꾸만 확인하려고 해요. 자기를 사랑하는냐고. 아니면 자기만 나를 사랑하는 거냐고요. 전 그게 두려워요. 전 사람들이 말하는 뜨거운 사람을 모르겠어요. 그냥 함께 생활하는 것이 사랑이면 좋겠어요. 그 사람도 그 정도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열렬해요."
280 누가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사람은 견딜 수 있다고 하잖아요.
342 "나는 모든 문제를 최소한의 것들을 되찾게 해서 풀지요. 난마처럼 얽히는 이 많은 고통과 상처가 실은, 가장 최소한의 것을 지키지 못해 생기거든요. 자신 속에서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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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유폐된 삶들이 있다. 그들 스스로 떠나왔으나,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는 삶들. 자기 안에 내재된 운명같은 것. 혹은 욕망이라 이름을 붙이기엔 희미하지만 그것에 무심한 듯 살아갈 수 없고, 그저 욕망이라 치부하고 저버릴 수만은 없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고 마는 어떤 방향성 같은 것. 자신의 내부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하나, 그 자연스러움을 결코 타인에게서는 이해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작가는 공간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다. 접경지대라는 공간 안에서 작가는 그 접경지대까지 자신을 유폐시킨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희수는 어린 시절 오빠와 공모해 새엄마의 딸을 유폐시키고 그 행동에 대해 이해는 받았으나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세월을 살다가, 새엄마의 유언 속에 다시 등장한 새엄마의 딸을 찾아나선다. 단란한 가정이나 사랑 같은 달콤한 것을 욕망하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신체를 부여잡고, 그 무엇도 욕망하면 안되는 금기의 삶 속에서 외로워하는 새엄마의 딸 유란이 흘러간 곳은 38선 접경지역이다. 유란이 비운 집을 지키며 유란을 기다리는 희수는, 흘러흘러 그곳까지 떠밀려온 사람들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 속에 합류한다. 자신 역시 그렇게 일상성 밖으로 밀려나와 있었으므로 그들의 삶이 낯설지 않다. 희수는 엄마의 직감으로, 자신의 꿈을 위해 부모에게서 멀어지려는 미양의 욕망을 읽었으나 자기 품 안에 미양을 가두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 하나를 굳이 껴안으려드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마치, 자신을 버려두고, 자신이 버려둔 자신의 존재감을 가족이라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지 못할까봐 조바심내다가 그 안에서 결국 너덜너덜해지고 마는 중년의 낡은 생을 이미 건너와버린 사람처럼, 다 겪어봐서 안다는 듯이 초연하다. 억지를 부리지도 서운해하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강요하지 않는다. 희수는 그런 엄마다. 대부분의 엄마와는 다르다. 조금 다른 곳, 조금 더 멀리 있는 곳에서 온 듯한 초월적인 “엄마”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 “엄마”라는 존재는, 그러니까, 엄마도 아니고 새엄마도 아니면서 자신과 유란을 연결시키고, 자신과 미양을 이어주는 존재다. 쉽게 정의내려지며 선명하게 보여지는 관계 그 너머를 꿰뚫는, 보다 근원적인 관계망으로 엮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다. 그 자신 스스로 멀리 유폐되어진 듯한 삶 속에서 잠시 자기 삶의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느라 의식을 잃기도 하지만 실은 그 유폐된 삶 속에서 한가닥씩 제각각 흘러가는 여인들을 품어내는 “여성성”을 보여준다. 이제 여성은, 자신을 집안에 버려둔 채로, 혼자서 기만의 세월을 살아내며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내에게서 스스로 멀어져가는 남편 앞에서 그저 상처받는 삶 이상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다. 자기의 욕망만을 보고 앞으로 가면서 그 길을 막아선다면 부모마저도 기꺼이 소외시키는 자신의 어린 혈육 앞에서, 그저 미안함에 쩔쩔매는 엄마를 넘어선다. 한 세월을 건너며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운명으로 인해 상처받으며, 무거운 자기 삶을 등에 메고 힘겹게 떠나와서도 그 어떤 곳, 그 누구의 마음 안에서도 제가 짊어진 짐을 풀어 놓을 수 없어 외롭게 살아가는 삶들을 품어내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다. 그건 <엄마의 집>을 만들어내느라 아프도록 노동하고, 희생하며 어렵게 사랑을 얻어내고 지켜내던 ‘엄마’와는 또다른 모습의 엄마다. <최소한의 사랑>에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모성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여성성’의 정체를 보여준다. 부모를 살릴 약을 구하는 길을 막아서는 무상 신선 앞에서 가사노동과 출산 모티프를 통해 부모구원을 가능하게 했던 ‘바리데기’가 지니는 여성성과 비슷하다. 부모 구원과 동시에 궁궐 안에서의 편안한 삶이 가능했으나,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 있던 고단한 삶들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외로운 혼들을 저승으로 이끄는 ‘오구신’의 삶을 선택한 바리데기의 삶을, <최소한의 사랑> 안에서 희수가 살아내는 듯했다. 나는 무엇보다,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나를 매혹시키는 그 순간이 좋다. 보여지는 너머의 것들, 삶 너머의 생을 그려내는 전경린의 문장들이 참 좋다. 일상에 묶여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생. 멀리 유폐되어진 삶 속에서야 비로소 보여지는 생. 그것이 떠나왔으며, 더는 떠날 수 없는 한계지점에서, 꾸려온 마음의 짐들을 채 내려놓지도 못하고 펼쳐지는 삶들 속에서 비로소 보여진다. 반짇고리를 파는 노인을 만나면서부터, 혹은 일상이 흘러가는 속도감을 놓치기 시작하면서부터, 혹은 늘 거기 있었으나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밀쳐내지는 내 생의 남루함을 봐버린 순간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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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이후 근 2년 반만에 그녀의 장편을 다시 만났다. 이상한 일이지만 전경린 작가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녀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읽고 있던 대학시절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치 제3자의 시선으로 한 장의 스틸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에 와서는 그 책의 줄거리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내용의 어떤 부분이 내게 상당한 충격이었던지 책 제목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경린이라는 이름만 봐도 나는 기분이 묘해진다. 꽤나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피할 수 없는 인연을 마주한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그렇게 이번 신작 <최소한의 사랑> 역시 <풀밭 위의 식사> 때처럼 읽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그녀의 손에 이끌려 파주로 향했다.
기간제 미술 교사로 일하는 주인공 희수는 새엄마의 유언과도 같았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복동생 유란을 찾아 나선다. 표면 상으로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속정을 주지 못하고 살뜰히 보살피지 못했던 새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벗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린시절 오빠와 공모하여 유란을 버린 것에 대한 죄의식도 한 몫하고 있었다. 당시에 느꼈을 유란의 공포와 상처, 친모에 대한 배신감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희수와 그녀의 오빠 역시 그 사건에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외도 중인 남편과 부모에게서 도피하려는 사춘기의 딸 미양과 소원해진 희수는 무엇이든 마음 붙일 일이 시급했다. 계약 만료로 직장도 잠시 쉬고 있던 참에 미양마저 끝내 호주로 떠나자 더이상 거리낄 게 없었던 희수는 유란을 어떻게 마주해야 좋을 지 모를 두려움을 안고서 그녀가 사는 곳으로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 유란은 없었다.
서른 다섯이 된 유란이 마지막으로 머물고 있던 곳은 파주였다. 작품에서 묘사된 파주는 내가 상상했던 도시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나는 파주하면 우선 북시티를 떠올리고, 그 다음에는 헤이리, 영어마을, 아울렛, 영화 '파주' 등으로 생각의 줄기가 뻗어 나간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사랑>에서 보여주는 파주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그곳이 어디건 상관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내리는 버스 종점과도 같았다.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데도 작품 곳곳에서는 이 도시가 분단 국가의 국경 도시임을 꾸준히 상기시킨다. DMZ, 철책, 이산가족, 평화...이런 낱말들이 파주를 설명하고 있고, 이로써 파주를 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독자들처럼 희수도 처음에는 낯선 이방인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곳의 주민이 되어가고 비로소 난파된 배처럼 흔들리던 삶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유란이 없는 빈 집을 지키듯 머물며, 희수는 유란이 알던 사람들-염을, 문신하는 여자, 명서, 현지, 은경, 혜지-을 만나 유란과의 간격을 좁혀 나간다. 그 과정 속에서 희수는 내팽개치듯 버려둔 자신의 인생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제목이 <최소한의 사랑>이어서 멜로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이 작품은 드라마 장르에 가깝다. 굳이 이 책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상처 치유 소설"이라 하고 싶다. 공효진, 신민아 주연의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보고난 후에 들었던 느낌과도 비슷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만난 적은 없어도 두 자매의 정신적인 화해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희수가 그토록 찾고 기다린 사람은 유란이었지만 유란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은 희수 자신이기도 했다. 끝으로 희수가 기다렸던 또 다른 사람, 반짇고리 파는 노인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꽤나 심심했을 것 같다. 작품에서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던 이 노인의 사연이 밝혀졌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현실로 믿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웠던 상황도 있었으나 그 마저도 작품의 분위기와 잘 융화되어 매력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전경린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만큼 나이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
덧붙임 말 : 진짜 오자인지 작가의 치밀한 의도인지 분간은 어렵지만 오자가 맞다면 다시 찍을 때 고쳐지면 좋겠다. 지자제(p.197) -> 지자체 / 윤미양(p.228) -> 신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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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새엄마가 죽으면서 새엄마의 딸 유란을 찾아달라는 유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희수는 유란을 찾으러 파주로 간다. 오빠와 자기가 성당에서 버린 유란을... 집에 없는 유란의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이야기... 유란의 집에서 엄마한테 버림받아 상처받은 그녀를 알게 되고 더욱 죄스러워 한다. 남편의 외도로 상처받은 희수의 상처 또한 서서히 치유된다.
또 한 번 느끼는 거지만 감수성이 뛰어난 작가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나를 느낄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것을 세밀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이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내면을 잘 안다.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다들 자신을 잘 안다고 할까... 자기의 마음을 포장(?)해서 잘 말한다. 다 시인이고 작가다... 자기의 깊고 잔잔한 이야기, 감수성을 말하며 살기는 참 힘든데...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는 나만의 이야기... 그게 소설을 읽는데 약간의 거리감을 준다. 반짇고리 노파는 신비로웠다. 현실인가 싶게... 역시나 소설을 읽고 한 사람과 같이 사는 건 참으로 힘겹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다 서로를 무시하지만.... 모두 다 서로에게 성실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여성이라면 집에 있는 옷을 다 꺼내 단추를 다시 단단하게 달지 않을까... 단추가 달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40~50대 중년남자를 묘사하는 부분에선 좀 가슴이 아팠다. 세상에 닳고 달아 순수를 잃고 살 수도 있다는... 그도 그렇게 될까...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망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남편은 내가 지치고 무겁고 무뚝뚝해진 이유를 몰라 한동안 답답해했다. 증상으로 볼 때 권태기라고 진단했다가 우울증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자 원래부터 그런 여자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그냥 아주머니가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주머니, 남편은 밤늦게 들어와 문득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비극 뒤에 자초하는 고도그이 엄정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고 슬픔의 깊고 쓴 달콤함과 우수의 가벼움과 평온을 모르는 사람이다. 상처에서 염증이 걷히며 단단하게 응결되는 비극의 자긍심을 모르는 사람이다.
삶에 대한 헛된 선망과 있지도 않은 것을 향한 욕망들, 빈약한 이유로 사랑하고 빈약한 이유로 미워했던 얄팍하고 집요한 감정들...
삶과 추억은 허공의 비눗방울처럼 얼마나 잃어버리기 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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