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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의 책을 읽는데 근 한달반은 걸린 듯 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이 책 덕분에 즐거웠던 것 같다. 누군가 말했듯이 책을 읽을 때 다시는 보지못할 대상을 대하듯이 하라고... 피에르, 볼론스키, 나타샤, 니콜라이.. 덕분에 즐거웠으나 아쉽군요. 내가 이 장편을 언젠가 다시 손에 들것같지는 않으니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겠군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은 왜 책을 읽을까?" 또 그 중에서 "소설은 왜 읽을까?"에 대한 질문을 하게된다. 웹을 뒤져보니 몇몇 좋은 설명 글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Waren이 설명한 글이 마음에 들었다. 누구나 자기의 인생은 어떻게 막을 내릴지 모르나 소설은 어떤 형태로던 결말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호기심이 따르게 된다. 글을 읽으면서도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를 긴장속에 기다리게 된다. 나도 책을 한 때는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본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책에 어떤 말이 나온다 등등. 사람의 기억력으로는 책의 내용을 다 기억할수도 없는데 왜 우리는 책을 볼까? 하여간 책을 소유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다고 느껴진다. 그럼 난 "전쟁과 평화"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느꼈을까? 우선 한명이 주인공이 아닌 여러 명의 주인공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묘사하고 상호 교차하는 이런 plot이 톨스토이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각 주인공이 처하게 되는 갈등속에 난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또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되묻는 과정을 겪게 된다. 늘상 주인공과 동감을 하게되는 건 아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유럽 역사에 대해 나 자신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역사라는 것이 단순히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했다고 생각을 했으나 이 소설을 보면서 그 안에도 많은 편향과 다른 시각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됐다. 좋은 고전 소설이 주는 의의는 단순히 삶을 어찌어찌 살아야 한다라는 1차원적인 기술이나 지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리혀 막연한 듯 하고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듯 하지만 이 소설을 접한 내 자신의 경험이 삶을 살아가는데 바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방향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여간 톨스토이가 왜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로서 칭송을 받는지 이 소설 만으로도 느낌이 온다. 3대 걸작 중 시대순으로 첫번째에 해당하고 안나카레리나, 부활도 읽어볼 생각이다. 작가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하던 시점에 쓰인 소설이다 보니 그의 후반부 소설에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해진다. 3/1/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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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페이지에 달하는 부담스런 4권의 책을 선뜻 구입해서 읽기 시작한 것은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함이요,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에 대한 당연한 관심 때문이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면, 이같은 장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전쟁에 대해서 가슴속 깊이 어필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렇지만 힘들여서 다 읽고 났을때, 그와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작품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작품해설과 전문가의 비평을 보면서, 나의 읽기법이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줄거리로 읽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나와, 핵심 인물들이 아닌 경우에는 대강 넘어갔다. 그리고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들도 이름이 혼동되서 노트에다 적어 놓으면서 읽었다. 이렇게 공들여 읽어야 하는 것이 대작을 읽는 고충인가 보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과, 작품의 이면을 살피며 행간의 내용을 파악하며 읽는 것 사이의 격조높은 수준 차이를 실감한 작품이다. 단테의 <신곡>을 가리켜 읽혀지지 않은 채로 영원히 고전으로 추앙받는 작품이라고 평한 괴퇴의 말같이, 고전이란 그 찬란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읽기에는 힘든 책임이 사실인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이유가 있기에 세계의 명작으로 자리잡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평생의 각고끝에 집필한 것처럼 읽는자도 정성을 다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맛보기에 실패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몇가지 얻을 수 있었던 교훈으로 위안을 삼으며, 후일 나폴레옹 시대의 역사를 살펴볼 기회가 있을때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나의 형편없는 문학적 수준에 상관없이 톨스토의 작품을 위대한 고전으로, 가치있는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한다. 상업성 위주로 쉽게 씌여진 책들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작가의 탁월한 사상과 시대 정신이 스며있는 고전의 깊은 맛을 느껴보기 원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바람은 자고, 검은 먹구름은 지평선에서 초연과 한데 어울려 싸움터 위에 나지막하게 드리워졌다. 차츰 어두워졌지만, 두 군데서 비치는 붉은 불빛은 더욱 뚜렷하게 떠올라 보였다. 포격은 차츰 약해졌지만, 소총의 울림은 뒤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더욱더 빈번하게 가까워졌다. 투쉰이 포를 끌고 부상자들을 비켜 돌아가기도 하고, 그 위로 부딪히기도 하면서 포화 속에서 나와 골짜기로 내려 갔을 때, 상관과 부관들이 그를 맞았다. 그 가운데에는 당직 장교도, 두 차례나 투쉰의 중대에 파견 되었으면서도 한 번도 도착할 수 없었던 제르코프도 섞여 있었다.신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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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개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있으며, 신의 은총에 감사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이 복받은 인생이다.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야기와 러시아 귀족사회 인간군상들이 펼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며 인간의 삶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글이다.
저자에게 역사란 나폴레옹 같은 위인이나, 권력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커다란 흐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영웅이란 그 흐름을 알고 그에 따라 인민들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삶이란 신의 의지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것에서 충만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한 볼꼰스끼와 삐에르, 이 둘은 각자의 운명에 따라 한 명은 피안의 세계에서 또 한 명은 현실의 세계에서 신이 주는 평안을 얻는다. 사교계의 꽃이었던 리자와 엘렌은 뜬 구름 속에서 죽음을 맞지만, 생명력 넘치는 나따쉬아와 신을 따르는 마리아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
우선 전쟁이야기를 살펴보자. 저자는 역사가 무엇인지, 누가 역사를 이끌어 가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상세한 역사적 기록을 통해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우선 영웅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실제 영웅들의 행태을 보여주면서 부정한다. 나폴레옹의 여러 면모 특히, 중요한 특정사안에 대한 모순적인 행동를 보여주면서 유럽의 역사가 순간순간 생각이 변하는 나폴레옹 일 개인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음을 보인다. 또한, 현실의 전투 역시 사령부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우연이 결정한다. 전투현장은 순간순간 긴박하게 변하고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바뀌는데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적절한 명령을 내리는 지휘부는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의 큰 흐름은 전투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정신적 수도 모스끄바가 함락되지만, 그것이 프랑스의 몰락 즉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되는 소리임을 프랑스군인과 러시아군인 공히 알고 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전쟁의 흐름이 이미 러시아로 쪽으로 넘어가고 프랑스군에게는 오직 후퇴만이 남아있음을 대부분 알고 있다. 사람들이 때로는 나태하게 때로는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그런 고요와 호들갑에 관계없이 전쟁은 정해진 길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이러한 흐름은 민중의 역사를 말하는 것인가? 민중 개개인의 의지가 모여서 하나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인가?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개별 병사들의 모습을 보라, 그 어디에 역사를 끌고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그들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흐름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역사란 신의 의지 혹은 초자연적인 의지이며, 인간은 그 의지를 당연히 느낄 수 있을 뿐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지의 흐름인 역사는 객관적 사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급해 할 필요가 없으며, 그 길에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다. 러시아 장수인 꾸두조프는 이러한 흐름을 잘 느끼는 대표적 인물이다. 자신의 뜻과 노력으로 성공을 이루려고 하기 보다는 정해져 있는 길로 가는 도중에 사람들이 덜 다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도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우선 삶의 목적을 찾는 두사람이다. 첫째 인물은 니꼴라이 안드레예비치 볼꼰스끼 공작이다. 그는 사교계의 아름다운 여인인 리자와 결혼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근엄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한 퇴역 장군으로 전형적인 귀족이며, 누이는 종교에 빠져 순례자들을 만나면서 경건하게 산다. 국가의 개선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며, 사교계에서 관계도 무난하다. 편안하고 안락해 보이는 그의 삶은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훌륭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행복이 충만하지 못해 무엇인가를 찾을 수 밖에 없는 부족한 삶이었다. 건강한 젊은 귀족으로서 사교계의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지만 겉보기와 달리 결혼 생활은 무미건조하며, 그는 아내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마음의 안식을 집에서 얻지 못하고 떠돌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선다.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우연히 서쪽 하늘에 지는 노을을 보며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영적으로 풍부해져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죽은 줄 알었던 집안 사람들은 그의 귀환을 무척 반기지만 불행히도 그의 아내는 바로 그 날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그는 농장의 경영에 힘쓰며 농노 해방 등 개혁조치들을 실행하며 일에 열중한다. 그러던 중 청순하고 밝은 나따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달콤함은 그를 행복으로 이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늦추어진 결혼은 나따쉬아의 배신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나따쉬아가 젊은 남자의 꼬임에 빠져 야반도주를 기획했던 것이다. 그는 큰 상처를 받고, 더욱 일에만 몰두한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전장으로 떠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큰 부상을 입고 혼수 상태에 빠진다. 후송되던 그를 다행히 나따쉬아가 발견하고 열심히 간호한다. 나따쉬아와 누이 마리아의 극진한 간호로 육신은 어느정도 치유가 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곳에 있었다. 그는 피안의 평온한 세계를 마음의 눈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현세의 삶을 관조의 눈으로 바라본다. 두 여인 심지어 아들까지도 피안을 향하는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육신은 비록 현세에 있으나 영혼은 내세의 영원한 삶으로 떠난 것이다. 영원한 평화 속에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영생의 길을 떠난다. 볼꼰스끼는 시대의 움직임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활동적인 인물이다. 귀족가문에서 자라고, 아름다운 사교계의 여인과 결혼하고, 전투에 참가하여 공훈을 세우고,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영지에 실현하고,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 하지만 그가 얻고자하는 삶의 아름다움 혹은 진실은 이러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아 그는 늘 부족함에서 살았다. 왕성한 사회적 활동과 성실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부족함을 느낀다. 화려한 세속의 삶은 영혼의 자유나 감사, 은총과 같은 것을 줄 수 없고 오히려 그러한 삶을 방해할 뿐이다. 진지하고 성실했던 그에게 주어진 길은 피안의 행복이었고, 그는 현세의 짐을 내려놓고 피안에서 충일한 행복을 얻었다. 이것이 그에게 맞는 신의 은총이었다.
삐에르 뾰뜨르 끼릴로비치는 볼꼰스끼와 달리 열심히 사는 성실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편하게 살지만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다. 원래는 형편이 좋지 않았으나, 갑자기 돈 많은 귀족의 상속자가 되어 큰 부자가 된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다가온 부와 이에 따르는 명성은 그의 삶을 흔든다. 무엇인가 아니다고 느끼면서도 사교계의 여인 엘렌과 결혼한다. 그녀는 돈 많은 배우자가 필요했고 사교계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삐에로의 영혼의 배우자로 어울리지 않았기에 둘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남처럼 산다. 부유함 속에 지쳐가던 그의 영혼은 신앙심을 지키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프리매이슨 단원을 만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헌신적인 생활과 경건함에 정신적 감화를 받아 프리매이슨 단원으로 가입하며 이를 위해 주술적인 밀교적 가입의식을 치른다. 가입 후 초기에는 영혼의 변화를 느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프리매이슨으로 해야 할 일만 할 뿐 나태한 생활로 돌아간다. 영혼은 다시 빈곤함에 허덕인다. 자신의 부를 기부하는 등 프리매이슨 활동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듯 하지만 실상은 무의미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중 전쟁이 일어나고 비현실적인 그는 홀로 나폴레옹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프랑스가 점령한 모스크바 거리로 나선다. 길을 가다 불에 타 죽을 위기에 처한 아이를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구한다. 정신없이 다니던 그는 프랑스군에게 잡혀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후에도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게 무심하게 생활하여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본다. 그러던 중 까라따이예프라는 농부를 만나 큰 변화를 겪는다. 까라따이예프는 신의 의지에 따라 충만한 삶을 사는 농부였고 삐에르는 그 농부의 모습 속에서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본다. 까라따이예프는 모든 것을 신의 의지로 돌리고 신에게 무엇이든지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신의 은총 속에 즐겁게 살아간다. 삶의 행복이란 지식과 연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자연과 사람들이 주는 행복을 얻는 것임을 깨달은 삐에르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한다.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전에는 복잡한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면 무엇인가 불편하고 어찌할 줄 몰랐는데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차분히 들어주고, 상황에 맞게 할 일을 편하게 한다. 자신이 한 일처리를 타인들이 어떻게 볼지 고민하지 않으며 최선이었는지 돌아보며 애타하지 않는다. 비록 타인에게 이득을 주지 못해 상대가 나를 비난할 지라도, 자신이 한 일이 객관적 현실에 맞는 것이면 잘한 것이다. 그의 아내 엘렌은 병으로 사망하고, 그는 연정을 느꼈던 나따쉬아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꾸린다. 낙천적인 그의 성품 안에 영혼의 안식을 얻고 현세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가 처음 접했던 영혼의 삶, 프리매이슨은 고매하고 신에게 헌신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은 현실을 벗어난 은자의 길일 뿐이었다. 프리매이슨의 활동은 일상의 삶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현세의 삶을 사는 이에게는 일탈에 가까운 것이었고, 남들을 도우는 등 외양이야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삶에서 출발하지 않아 근본적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즉 프리매이슨이 삶의 충만함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를 실현하고 싶은 관념에서 출발하기에 그 헌신은 신의 뜻이 아니었다. 신께서 우리들에게 내려준 선물은 삶 그 자체인데, 그 삶을 신을 위해 살겠다고 하면서 타인을 위해 사는 것으로 변화시킨다면 신의 은총을 어찌 얻을 있겠는가? 자신의 삶의 일상에서 신의 은총을 보지 못하면서 어찌 영원한 삶을 살겠는가. 단순한 지혜, 신이 주신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고 일상의 삶을 그 의지에 따라 사는 것이 영원한 행복의 삶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서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할 문제들 역시 있는 그대로 보고 해결하면 족한 것이다. 인후했던 삐에르는 현세의 삶에서 영생을 얻었고 나따쉬아 등 주변사람들과 신의 은총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볼꼰스끼와 삐에르가 진정한 삶을 찾아 헤맨다면, 그냥 진정한 삶을 사는 두사람은 나따쉬아와 마리아이다.
나따쉬아는 밝고 명랑하며, 러시아의 대지를 달리고 춤추며 노래할 줄 아는 여인이다. 동생과 사냥을 나가고 농부의 집에서 음악을 즐기는 장면은 그녀의 생명력을 잘 보여준다. 멋진 귀족 볼꼰스끼와 달콤한 사랑의 언어를 속삭였다. 일순간 나쁜 남자의 꾀임에 빠져 잘못된 길로 들어 비탄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슬픔을 힘들게 넘기고 다시 건강한 삶을 산다. 큰 부상을 입은 볼꼰스끼 공작을 진심으로 간호할 기회를 얻어 마음의 빚을 덜고, 또한 옛 연인의 마음이 피안의 세계로 떠나고자 할 때, 상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볼꼰스끼가 죽고난후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마음이 끌리던 삐에르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가정의 버팀목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고 행복을 만들어간다. 신이 주신 육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고 가족들의 평온과 안녕의 담지자가 된다. 마리아는 경건한 여인이다. 어릴 때부터 마음을 신에게 의탁하였으며, 그 삶은 늘 신을 따랐다. 어려서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순례자들을 만나고 신을 경배하였다. 근엄하고 시키는 것이 많은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 하며 그런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사랑한다. 동생의 아내가 죽자 조카를 헌신적으로 키우고, 전쟁중에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집안을 이끌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당당하게 헤쳐나간다. 젊고 순수한 청년 니꼴라이를 만나 마음을 빼앗기는데, 다행히 니꼴라이도 순수함과 경건함이 주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연모의 정을 느끼며 둘은 결혼에 이른다. 외모가 출중하지 못한 그녀였지만, 평소에 신심이 깊고 선한 생활을 하며 자신에게 닥쳐온 일을 당당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여인의 영혼이 풍기는 아름다움을 니꼴라이가 본 것이다. 그녀는 조카와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한다.
이 글에서 저자는 사교계의 무의미함을 본다. 그래서 사교계에서 이루어진 결혼은 파탄으로 끝이 난다. 겉보기에 평온했지만 생기를 찾을 수 없는 볼꼰스끼와 리자의 결혼이 그러했고, 겉과 속 모두 파탄난 삐에르의 결혼이 그러했다. 둘의 차이는 전자가 둘이 좋아해서 한 결혼이라면, 후자는 서로의 계산에 의한 결혼인 것 정도였다. 결혼에 이르지 못했지만 사교계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던 볼꼰스끼와 나따쉬아의 관계도, 나따쉬아가 사교계에서 만난 딴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파탄으로 끝이 났다. 당시 유럽을 풍미했던 사교계라고 불리는 곳에는 진정한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행복한 결혼인 삐에르와 나따쉬아, 니꼴라이와 마리아의 만남은 모두 사교계가 아닌 곳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니꼴라이와 마리아의 결혼의 출발점은 전쟁 중에 사람들이 각자의 진면목을 보이는 그 순간이었다.
저자는 각 민족의 특성에 대해서도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곳곳에 번뜩이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각 민족의 자신감에 대한 3권에 있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독인일만이 추상적인 관념, 과학, 즉 진리의 가공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자신을 가질 수 있고, 프랑스인은 자신이 절대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가지며, 영국인의 자신은 자기야말로 온세계에서 가장 완전히 조직된 국가의 공민이라는데서 오고, 이탈리아인의 자신은 곧잘 흥분하고 자기도 남도 손쉽게 잊기 일쑤인데서 온다. 러시아인의 자신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고 싶지도 않으며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서 온다. 그중에 가장 싫은 것은 독일인의 것이다. 그들은 완고하고 귀찮으며 자기가 생각해낸 그 과학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 각 나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아도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다. 저자는 과학을 굳게 믿는 독일인들의 사고방식을 싫어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고 나 자신을 알기도 어려운 인생인데, 어찌 과학에 빠져 많은 것을 안다고 하고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과학도 하나의 이야기거리에 불과한 것임을 모르는가? 과학을 있는대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것에 빠져 영혼과 자유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21세기 물질 문명으로 풍요가 넘쳐나지만, 그것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함을, 풍요가 지금보다 수백배로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삶을 알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몇 페이지의 감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대작이지만, 인상깊게 느낀 점을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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