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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세일즈맨의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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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여름에 읽는 것은 고되다. 그리고 힘겹다. 그가 쓴 여러 작품들이 독해하기 어려운 비유로 되어 있어서 웬만한 집중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수께끼같은 알레고리를 한 가닥 풀었을 때의 기쁨! [변신]은 그나마 카프카의 작품 중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납득할만한 평가도 이미 상당히 이루어져 있어 감상하는 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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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여름에 읽는 것은 고되다. 그리고 힘겹다. 그가 쓴 여러 작품들이 독해하기 어려운 비유로 되어 있어서 웬만한 집중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수께끼같은 알레고리를 한 가닥 풀었을 때의 기쁨! [변신]은 그나마 카프카의 작품 중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납득할만한 평가도 이미 상당히 이루어져 있어 감상하는 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듯한 줄거리 구조를 지니고 있는 이 소설에서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어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해충으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가족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작가가 그를 변신시킨 까닭은 매우 간단하다.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들에게 소외되어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변신 이후에야 그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변신은 현대인이 해충처럼 타인으로부터 얼마든지 소외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작품을 읽어가면서 어떻게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할 것인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 학생은 현대산업사회에서 경제적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복지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학생은 인간의 물욕을 정신적인 차원으로서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적극적인 사회의 참여과 공동체 문화의 확산도 이야기되었다. 아무튼 카프카의 변신은 많은 사회적 함의를 현재에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인간소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어 학생들과 토의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e***a 2000.08.14.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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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그레고르...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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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의 변신을 단순히 황당무계한 공상으로 취급할 수 없다. 이는 변신 후, 변신에 대한 잠자와 그의 주변인들의 반응이 그의 그로테스크한 변신을 마치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처럼 꾸며 주기 때문이다. 잠자는 자신이 벌레가 된 사실쯤은 회사에 지각해서 해고를 당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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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의 변신을 단순히 황당무계한 공상으로 취급할 수 없다. 이는 변신 후, 변신에 대한 잠자와 그의 주변인들의 반응이 그의 그로테스크한 변신을 마치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처럼 꾸며 주기 때문이다. 잠자는 자신이 벌레가 된 사실쯤은 회사에 지각해서 해고를 당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로 가족 일원인 잠자가 벌레로 변한 사실 그 자체를 끔찍하게 여기기보다는 벌레로 변해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귀찮고 짐스러운 존재가 된 잠자를 끔찍해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설정은 적어도 소설 안에서의 현실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독자인 내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변신>의 배경인 1910년대의 프라하와 <변신>을 읽고 있는 내가 살고있는 1990년대의 서울이 닮아있다는 데에 있다. 해고에 대한 두려움, 회사에 지각하는 것에 대한 압박감, 불경기, 가족 부양에의 부담감, 자신의 직업에 대한 한탄, 부모의 빚 등 80년 전 독일과 한국의 상황이 너무나 같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자기를 잠자와 동일시 할 수 있는 것이다. 잠자가 처한 현실이 충격적이고 불가사의적으로 다가오는 동시에 그 현실에의 비극을 잠자가 되어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변신>의 작가, 카프카 역시 그레고르가 느끼는 소외감을 체험한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프카가 자신의 체험을 그레고르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고 이야기해야겠다. 카프카의 짧은 생애에서 중요한 점은 프라하에서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나 독일어로 교육을 받은 서방적 유대인이었다는 카프카의 위치이다. 서방적 유대인은 동방적 유대인처럼 절망적 가난에 허덕이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고, 유대교에서 혐오하는 유럽의 개인주의 영향 아래 있었고, 소수의 독일인이 지배하던 프라하에서 유대인은 경시되었다. 그 당시 민족 해방을 주장하던 체코인들도 독일 교육을 받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또한 노동자 재해보험협회의 직원으로서 시민 계급도 아니었고 상인의 아들로써 노동자 계급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카프카는 조국이라든가 공동 사회라는 관념보다는 이방인, 국외자라는 관념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방인, 국외자가 느끼는 소외감이 <변신>에서 잘 드러나 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되어 그레고르가 변한 벌레가 되어 그 소외감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현실적 배경 속에 가장 있을 법하지 않는 일을 그려 넣음으로서 현실이 가지고 있는 허위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작지만 단란한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카프카의 사회에 대한 깊은 불신을 느낄 수 있다. <변신>의 비극은 단순히 잠자가 벌레로 변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 슬퍼할 여유조차 잠자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우선 회사 걱정을 해야하고 가족 걱정을 해야만 하기에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벌레로 변한 잠자는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급기야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불행하게 죽는다. <변신>은 타인이 아닌 가족으로 받은 상처를 다루고 있다. 카프카 는 이 소설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가족 관계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연결된 것만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 역시 사회 구성원처럼 각자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을 경우에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 역할 여하에 따라서는 각자의 삶의 의미가 상실될 위험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나 역시 타인에게 받은 상처보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더 아물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한 지붕 밑에 잠드는 가족이란 것은 얼마나 머나먼 존재들의 섬이라는 전경린의 표현에 공감이 간다. '머나먼 존재들의 섬' 적절한 표현이다. 가족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고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가족들에게 위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가족 사이 깊은 곳에서의 단절감이 더욱 더 극복되기 힘든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족 간의 단절, 이 고립감은 누구나 느낄 것이다. 따뜻한 가정 환경 안에서 자산 사람이건, 그 반대이건 그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고 가족 사이에서 이방인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프카 역시 그렇다. 그는 자신을 작가하고 생각했지만 완고했던 아버지 때문에 계속 다녀야 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작가도 그렇다고 직장인도 아닌,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것은 카프카로 하여금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의식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낄 수 있는데 카프카는 그레고르처럼 그의 부친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부친 가까이서 머물러 사랑 받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인한 소외의식 역시 <변신>의 모티브가 되었다.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던 아들이 벌레로 변해 그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변하자 연민과 동정 대신 경멸과 비난을 보낸다. 끔찍한 벌레를 한 가족으로 인정해야 하고 마치 불치병에 걸린 환자처럼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벌레를 위해 모든 시중을 들어야하는 상황만을 절망한다.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아버지는 그의 죽음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까지 한다. 이렇게 비정한 가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인간 소외가 만연한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차가운 시선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구성원사이에서도 물질, 이익이라는 것을 앞세워 현실의 폐해를 극명하게 비극을 그리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그런 다음 그들은 함께 집을 나섰다. 수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세 사람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전차 안에는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고 따뜻한 햇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로 앉아 세 사람은 앞으로의 일을 이것저것 상의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의 장래도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따. 왜냐하면 세 사람의 직업은 모두가 괜찮은 편이었고, 이제까지 서로 털어놓고 물어 본 일은 없었지만 장래가 매우 밝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 가장 신속하고 유효한 환경의 개선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집을 옮기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그들 가족은 그레고르가 마련한 집에서 계속 살아 왔는데, 세 사람은 현재의 그 집보다는 작고 집세가 싼 그러나 위치가 좋고, 무엇보다도 전체적으로 좀더 살기 편한 집이 필요했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잠자 부부는 차츰 생기가 돌아오는 달의 모습을 보고ㅡ 딸이 최근 안색이 나빠질 정도로 근심과 고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탐스러운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성장해 있음을 동시에 깨달았다. 잠자 부부는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딸아이를 위해서 마땅한 신랑감을 구해 주어야 할 때가 곧 오리라
0*****o 2001.04.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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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같이 잠을 자면 벼룩이 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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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같이 잠을 자면 벼룩이 옮는다] 유대인 스승 뢰비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한 28살의 카프카에게 아버지가 주는 경고다. 유대인인 아버지가 유대인 아들에게, 개라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모욕적 호칭으로, 그에게 유대의 정신이라는 벼룩이 옮겨왔다고 이야기한다. 유대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이제 유대인이 아닌 존재로 뿌리내려 주길 원했다. 유대의 정신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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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같이 잠을 자면 벼룩이 옮는다] 유대인 스승 뢰비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한 28살의 카프카에게 아버지가 주는 경고다. 유대인인 아버지가 유대인 아들에게, 개라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모욕적 호칭으로, 그에게 유대의 정신이라는 벼룩이 옮겨왔다고 이야기한다. 유대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이제 유대인이 아닌 존재로 뿌리내려 주길 원했다. 유대의 정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카프카는 이제 스스로 커다란 벼룩, 한 마리 벌레가 되어간다.  정작 유대인의 피를 물려준 아버지의 이 선언은 이작크 뢰비와의 만남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발견하여 가는 그를 스스로 벌레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레고르이자 카프카인 그는 어느날 아침, 벌레임이 드러났다. 그의 유대인으로의 주장, 혹은 그 주장으로 말미암은 변신은 그에게 죽음 혹은 격리를 뜻한다. 그는 소통을 꿈꾸며, 그의 존재를 그대로 가진 채로 그의 가족과 직업, 이웃과의 관계가 지속되길 원한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이미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해답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기대 당하고 있는 것]이다. 벌레인 식구를 가졌다는 고통을 더 이상 주지 않기 위해 가족의 눈앞에서 사라져줌 혹은 죽어줌. 이야기는 예기된 결론에 다다르고, 다시 가족에겐 평화가 찾아온다.

 

어느날 모임에서 미국에 산지 이제 20년을 넘어가는 어떤 분에게 들은 얘기다. 이민자의 자녀들이 느끼는 혼란. 아이들이 5, 6학년이 되며 불현듯 스스로가 한국인임을 발견하게 될 때, 혹은 친한 아이들이 피부색, 인종에 대한 사회적 압력으로 멀어져 갈 때, 아이들은 자신이 한국인인걸 너무 싫어하게 되는 때가 있다고 한다. 주위 사람과 똑같은 나였는 줄 알았는데, 다른 종족의 일원임을 알게 될때, 아이들이 느끼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더 크면 조금씩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상처도 아물며 조금은 위축되었지만 다시 부모와의 관계도 회복된다고 한다.

 

어쩌면 이 일은 굳이 이방인으로 사는 이민자 혹은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문득 자신의 본래 모습을 소스라치듯 놀라며 발견하는 우리 각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삶, 깨끗한 삶, 지리멸렬한 구세대와 다른 삶을 꿈꾸던 자신에게서 갑자기 버러지와 같은 삶을 사는 자신을 본다. 나일리가 없는 모습의 나를 주위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벌레. 악다구니가 되어가는 무명인, 밥벌이 존재. 그런 아저씨. 그런 아줌마. 나만 나를 더 나은 존재로 생각했던 것인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주홍글씨를 각자의 가슴에 새긴, 자신만 모를 뿐이다. 점점 남을 욕할 수 없어지고, 스스로에게 기대할 것이 없어지는걸 깨닫는다. 혼란을 이겨낸 아이들처럼 언젠가는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나며 웃게 될 수 있을까?

s***y 2007.11.17.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