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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이여, 젊은 예술가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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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자 리뷰가 이미 많이 붙어 있는 책에는 리뷰를 굳이 쓰지 않는다. 너무가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공감을 했고 굳이 나까지 그 이름을 더 하지 않더라도 그 가치가 충분히 입증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검색 해보고 좀 놀랐다. 어떻게 한 편의 독자 리뷰도 올라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위대한 책에 대하여... 나에게 이 책은 내 청춘의 숙제였다. 내가 너무나 사랑
"청춘들이여, 젊은 예술가들이여!" 내용보기
나는 독자 리뷰가 이미 많이 붙어 있는 책에는 리뷰를 굳이 쓰지 않는다. 너무가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공감을 했고 굳이 나까지 그 이름을 더 하지 않더라도 그 가치가 충분히 입증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검색 해보고 좀 놀랐다. 어떻게 한 편의 독자 리뷰도 올라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위대한 책에 대하여... 나에게 이 책은 내 청춘의 숙제였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시인 김승희가 이 책을 문학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필독서로 추천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오히려 그 무렵에는 예술보다 더 급한 일들이 많아서 이 책을 언젠가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마음 속에 새겨두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공부하는 마음으로 외국 소설 몇개를 고른 것 가운데 하나가 이 책이었다. 물론 줄거리 위주의 독서에 익숙한 요즈음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소설이라는 단어를 떠 올릴 때 흔히 떠 오르는 통속적인 연애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대부분을 이루는 내용은 주인공 디덜러스의 심리적 변화를 따라가는 묘사와 친구들과 나누는 예술과 학문에 대한 토론들로 이루어져 있다. 궁핍한 가정의 장남이며 총명하고 감수성 예민한 청년이기도 한 디덜러스가 신부가 되어 가정을 일으키기를 꿈꾸지만 한 순간 동정을 잃고 고민을 하고 세상과 가족 사이에서 방황을 하다가 마침내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이 책의 기둥 줄거리다. 약간의 오독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 줄거리는 그렇다. 나는 스티븐 디덜러스의 고민이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고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풍요를 맘껏 누리는 듯 해 보이지만 지금의 청년들의 고민도 결국은 책임과 자유의 한계, 도덕과 비도덕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고통, 거짓 꾸밈이 아닌 진짜 예술과 진짜 사상에 대한 갈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러하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덧붙여 범우 비평판의 장점은 조이스라는 매력적이고 훌륭한 작가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알 수 있고 소설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가 풍부하다는 점을 들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이것 봐, 크랜리, 그는 말했다. 너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또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를 물었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면 또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를 말해주마. 나는 내가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섬길 수는 없어. 그것이 비록 나의 가정이건, 나의 조국이건, 나의성당이건 말이야; 그리고 나는 될 수 있는 한 자유롭게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인생 또는 예술의 어떤 양식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도록 노력하겠어. 또한 나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무기들--침묵, 유랑 그리고 奸智(간지)를사용토록 할 거야.
l********t 2002.04.25.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예술과 자유라는 이름의 한 ''고행''(苦行)
"예술과 자유라는 이름의 한 ''고행''(苦行)" 내용보기
그러고 보니 문학책을 안 읽은지 너무나 오래된 것 같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역사 아니면 철학, 과학에 머물러 있었다. 언어를 빌려 생각 위에 껴입는 것 말고, 언어 자체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언어의 심장이다. 나의 언어가 무미건조해졌다면 순전히 그것은 문학을 멀리한 까닭이다. 다행히 교양 과학과 교양 철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문학적 수준이 빼어나므로
"예술과 자유라는 이름의 한 ''고행''(苦行)" 내용보기
그러고 보니 문학책을 안 읽은지 너무나 오래된 것 같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역사 아니면 철학, 과학에 머물러 있었다. 언어를 빌려 생각 위에 껴입는 것 말고, 언어 자체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언어의 심장이다. 나의 언어가 무미건조해졌다면 순전히 그것은 문학을 멀리한 까닭이다. 다행히 교양 과학과 교양 철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문학적 수준이 빼어나므로, 최악의 ''결핍''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문학 리뷰''를 하나 써보려고, 예전에 읽었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하루 종일 뒤적였다. 의식의 흐름, 늘어지는 장문의 문장, 비타협적인 인생, 과작, 마음에 안 맞으면 원고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화끈함 같은 키워드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태생은 우리와 흡사한 점이 있다. 영국이라는 나라 주위에는 스코틀랜드도 있고 아일랜드도 있는데,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 주위에 조선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단한 문제 의식을 담은 그의 문장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인 것을 배척한다. 자신의 문학이 독립운동의 일환인 문화운동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역시 자신의 완성된 문학을 위해 절대 고독의 오지 속으로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크랜리는 다시 정색으로 돌아와 걸음걸이를 늦추면서 말했다. “고독, 진정한 고독, 자네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정말 무슨 의민지 아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친구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야.” “그래도 난 해." 스티븐은 말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도 친구 이상이 될, 아니 일찍이 어느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가장 고귀하고 진실한 친구 이상이 될 그런 사람마저 갖지 않겠다는 말인가.” 크랜리는 말했다. 이 말은 그의 본성 깊이 숨어 있던 어떤 마음의 금선(琴線)을 건드린 듯이 느껴졌다. 이 친구는 자기 자신에 대해, 현재의 자기나 장차 되었으면 하는 자기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닐까? 스티븐은 잠자코 얼마 동안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싸늘한 슬픔이 거기 고여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못내 두려워하는 자신의 고독을 말한 것이었다. “자넨 누구 얘기를 하고 있나?” 스티븐은 이윽고 물었다. 크랜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크랜리는 극중 주인공인 스티븐 디달로스의 동료이자 젊은 시인이다. 주인공 스티븐 디달로스는 장인 다이달로스의 정신적 아들이자, 아일랜드의 민족적 아들이며, 가톨릭의 종교적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껴안는다. 그의 아버지들은 각각이 너무나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의에 맞게 아들을 몹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스티븐이 아일랜드의 독립투사였더라면, 오직 가톨릭을 숭앙하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면 이 이야기의 갈등은 1/10로 확 줄었을 것이다. 크랜리는 별안간 솔직하고 분별 있는 어조로 물었다. “솔직히 얘기해줘. 내가 말한 것에 조금이라도 놀랐나 말이야.” “약간은.” 스티븐은 말했다. “그럼 왜 놀랐나? 우리네 종교가 가짜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말이야.” 크랜리는 같은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그런 확신은 전혀 없어.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라기보담이야 하느님의 아들 같지.” 스티븐은 말했다. “그게 성찬을 받지 않는 이유란 말이지. 즉 거기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니까, 면병은 단순한 빵 조각이 아니라 성자의 살이며 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혹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크랜리는 물었다. “그래. 그런 느낌도 들고 또 거기 대한 두려움도 있어.” 스티븐은 찬찬히 말했다. “알겠네.” 스티븐은 크랜리가 그만 따지려 하는 기색을 느끼고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했다. “난 두려운 게 많아. 개, 말, 총포, 바다, 뇌우, 기계, 밤의 시골길.” “그렇다면 빵 한 조각이 뭐가 무서워?” “그건 아마 내가 무서워한다는 그런 것 뒤에 무슨 악의에 찬 진실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그럴 거야.” 스티븐은 말했다. “그럼 공경하지 않는 영성체를 받으면 로마 가톨릭의 신이 자네에게 벼락을 내리고 지옥에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란 말이지?” 크랜리는 물었다. “로마 가톨릭의 신은 지금이라도 그쯤은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배후에 2천 년의 권위와 숭배를 쌓아올린 상징에 대한 거짓 예배를 함으로써 내 영혼 가운데 일어날 화학 반응이야.” 스티븐은 말했다. …… “나는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말했지만 자존심까지 버렸다는 말은 안 했어. 논리적이고 전후 일관한 부조리를 버리고 비논리적이고 전후가 일관하지 않은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게 해방이 될 수 있어?” - 본문 중에서 어린 시절, 학창 시절,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오면서 문체는 그에 걸맞게 변모한다. 환상과 호기심, 경건함으로 이루어진 유년 시절에 보았던 그림들과 들었던 이야기는 미래를 향한 지표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스티븐은 그 지표와 다시 맞닥뜨린다. 욕정과 종교적 금기 사이에 짓눌려 압사의 위기에 처했던 학생 시절의 처참한 몸부림은 아직도 독자인 나를 피로하게 한다. 젊은 시절의 우정과 사랑, 자유와 예술, 사상과 자조의 단계들은 누가 설정하는 것인가. 스티븐은 자신에 맞게 하는데 얼마나 커다란 희생을 치렀던가. 이 책은 여러 개의 문장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한 압축을 시도하였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석서''가 또 이 분량으로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문학적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는 기회로 삼고, 얼른 ''율리시스''로 치닫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문학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성과 같으며, 거기에 사는 언어들은 뭐가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다르다.
d*****7 2006.02.03.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탈출 또는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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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스티븐 더덜러스의 성장 소설이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모든 성장이 기록할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계층적인 문제를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왕의 성장이 재미있는 것은 아닌 것 처럼, 모든 예술가의 성장이-그나마 왕의 성장 소설보다는 낫겠지만- 소설로 쓸 만큼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록물로 다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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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스티븐 더덜러스의 성장 소설이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모든 성장이 기록할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계층적인 문제를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왕의 성장이 재미있는 것은 아닌 것 처럼, 모든 예술가의 성장이-그나마 왕의 성장 소설보다는 낫겠지만- 소설로 쓸 만큼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록물로 다루어지는 것은 어떤 분야의 전형-대표이거나, 정해진 길에서 너무 많이 멀어진 이단적인 것이다.(그러나 이단은 백년이나 이 백년 후에는 또 다시 무언가를 대표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그의 성장과정이 소설로 쓸 가치를 지니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린 시절의 스티븐에게는 파넬을 위한 녹색 벨벳을 댄 옷솔과 마이클 대비트를 위한 적갈색 벨벳의 등을 댄 옷솔을 준비하고 있는 댄티 아줌마가 있었다. 어른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심하게 다투었다. 종교적인 논쟁도 어른들의 대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스티븐의 아버지 더덜러스 씨는 아일랜드인을 '신부들에게 시달리고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종족'이라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일랜드의 복잡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미래가 그가 알고 있던 세계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가 만나게 되는 현실의 세계도 그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클론고우즈 학교에서 스티븐은 체구가 작은 소년이기에 때로 학우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경쟁에서는 뒤지는 때가 많았다. 학급을 반으로 나누어 붉은 장미와 흰 장미팀이 경쟁하도록 하는 수업방식은 신부님이 보기에 효과적인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어리고 감성적인 소년 스티븐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학감인 놀런 신부는 안경을 깨뜨려 글을 읽을 수 없는 스티븐에게 부당한 체벌을 했다. 어린 스티븐이 만난 세계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부조리에 최초로 반기를 들게 된다. 교장선생님께 학감신부님이 자신에게 부당한 일을 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다. 그는 결코 경솔한 마음에서 행동한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치밀한 예상을 세우고 각오를 다진 뒤에 교장선생님 앞에 섰다. 일탈은 학우들의 함성과 하늘로 던져올린 모자로 멋지게 마무리된다. 사고의 확장은 스티븐의 정체성의 문제는 소속을 결정하는 것으로 심화된다. 아일랜드 인에서 신으로 연결되는 나의 존재감을 생각하며 바로 해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해답을 얻을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준다. 스티븐은 커다란 머리를 가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구원의 약속. 죽은 후의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죽기 전의 삶에서 많은 부분들을 포기할 수 있도록 했다. 세속적인 쾌락, 탐욕과 성욕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약속이다. 어린 시절의 스티븐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기도를 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아이였다. 스티븐은 성장하면서 점점 더 진지하게 신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게 된다. 기독교적 원죄의식은 스티븐이 여자와의 관계를 가진 뒤에는 자책감으로 변하게 된다. 스티븐의 죄의식은 성체를 앞에 두고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 존재의 거부로 나아간다. '스티븐은 영성체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엘리트에게만 주어지는, 예수회의 신부가 되겠냐는 교장선생님의 제의도 거절하고 만다. 신은 우리가 셀 수 없는 범위에 있다. 혹은 우리가 셀 수 없는 것이 있기에 신이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절대로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신은 마치 수학에서의 허수(虛數)와 같이 존재한다. 실재(實在)하지 않는데 단지 계산을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수, 수직선 위에 어는 곳에 세울지 알 수 없는 수. 신앙은 이런 종류의 편리함을 가져다 주곤 한다. 계산 상의 편의는 일상의 안도감-고해성사를 통한 속죄-과 사후 세계에 대한 보장-구원의 약속-을 의미한다. 확실히 신을 믿는 것은 그렇지 않는 것 보다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스티븐이 선택하고자 한 것은 행복과는 아주 거리가 있는 '아름다움'의 존재였다. 스티븐의 믿음은 신 보다도 더 허망할 지 알 수 없는 미(美)를 향했다. 그는 예술을 향해 '무서운 젊음의 날개'를 뻗어간다. 이것은 신으로부터 벗어나 예술로 떠나는 길이다. 미를 섬기는 것은 스티븐이 추구한 진정한 자유인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이냐 예술이냐의 문제에서 예술을 선택하기란 보통의 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정신적 해탈과는 많이 다르다. 스티븐은 아마도 종교적, 사회적인 고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 다시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끌어 안게 될 것이다. 즉 얻기 위해 버리는 것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스티븐의 떠남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의 삶은 Joyce가 이 작품을 서술한 것으로, 이 책 자체로 나타난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예술이다 라고.

[인상깊은구절]
"스티븐 더덜러스-기초반-클론고우즈 우드 칼리지-샐린즈-킬데어주-아일랜드-유럽-세계-우주 하느님은 언제나 같은 하느님으로 남아있고, 하느님의 진짜이름은 여전히 하느님이었다." 그는 재빨리 가슴에 십자가를 그은 뒤 침대로 기어올라 갔다. 그리고 잠옷 자락을 발 아래로 밀어넣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차갑고 하얀 시트 아래로 옹크려 넣었다. 하지만 그가 죽더라고 지옥에는 가지 않으리라. 그러자 떨림이 멈췄다. 잃어버린 순결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y******h 2003.10.01.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