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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웰즈! 법학을 전공했으나 작가로 데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자국인 프랑수 문단의 평론가에게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매년 꾸준한 리듬으로 신간을 발표해 대중에게는 사랑을 받고있는... 이 책을 쓴 베르나르와 매우 흡사한 경우다. 혹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가? ㅎㅎ
이 작가, 가브리엘 웰즈가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눈을 뜬다. 그런데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해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창문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이상이 없다.
죽은걸까? 그럼, 누가 날 죽인걸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 뤼시 필리피니를 만나 소설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얼핏 오래전 영화 '사랑과 영혼"을 연상시키는 도입부지만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이에 그치면... 실망이 아닌가?
장르문학가로 자국 프랑스에서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가-우리나라는 이외수, 류시화 정도(?)-로서 섭섭한(?) 마음이 소설 곳곳에 프랑스 문단에서 벌어지는 장르문학과 순수 문학의 대립을 거의 전쟁 수준으로 묘사해 놓았는데, 이는 장르문학가로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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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었다. 나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편집증있는, 평단과 정반대의 대중의 인기를 가진, 비순수문학인 장르문학을 쓰는, 플레이보이지만 미국여배우이자 발명가였던 헤디 라마만을 동경하던 작가 가브레일 웰즈는 어느날 죽었다. 그리고 만난 인물은, 건강염려증에 한 남자 (사미)만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헤디 라마를 똑닮은 영매 뤼시 필리피니와, 폴란드 이민자였고 사진사이다가 경찰이 된 할아버지 이냐스 웰즈를 만난다. 그러면서 각자 누가 살인범이고 사미는 어디있는지를 알아내는 조건으로 서로 협력을 하게 되고....
이야기는 범인을 찾는 후더닛인듯 보이나, 많은 내용은 문학평단에 대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풍자와, 죽음과 생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다. 다소 직설적인 내용으로, 문단과 대중의 평가가 반대이고 장르문학은 인정받지못하는 등의 문단의 실태와 함꼐, 어려운 소설보다 쉬운소설을 더 좋아하면서도 반대로 대답하는 현학주의 독자들에 대한 풍자를 섞으며 그 중간에 간혹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인용하며 진지와 유머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
...나는 살아있고 당신들은 죽었다....1권, 227 ...인류가 가진 많은 문제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죽음이 두렵지않다고 주장하는 성직자들이 심약한 영혼들을 통제하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2권.27
죽음은 부정적인 것, SF나 장르문학은 소모적인것 그러나 반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해방이며 삶은 족쇄이고, 과학적 상상력을 촉진시킨 SF는 실제 과학의 모태가 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이렇듯 정반대의 것들이 계속적으로 나오지만, 반대로 보는 경우엔 그 상태가 정반대가 된다. 그리고 또한 서로를 보완하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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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처음 만났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뇌>를 읽으면서 우리의 사고와 생각, 컴퓨터와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민했고, <개미>를 읽으면서 정말 대단한 작가다. '지금까지 이런 작가는 없었다. 이 사람은 작가를 가장한 개미학자인가, 개미학자를 가장한 작가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에도 <아버지들의 아버지>, <타나토노트> 등을 읽으면서 우리의 기원, 인류의 조상에 대한 기발한 그의 상상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 한동안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읽을 수 없었다. <신1-6>을 그의 명성에 기대어 샀지만 나는 결국 다 읽지 못했다. 우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회사일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경제,경영서적을 읽고, 내가 좋아하던 역사책 정도만 겨우 읽었지, 업무 외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소설은... 그러다가 이번에 나온 <죽음1>을 친구에게 선물 받았다. 사실 나는 책이 굉장히 많다. 책을 정말 좋아해서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 책 선물을 잘 안 해줬는데 친한 친구가 '요즘 소설은 잘 못 읽지? 대학교 때 이 작가 책 많이 읽었잖아. 신작 나와서 사 봤어'라고 하면서 책을 선물 받았다. 그 의미가 고마운 책이었다. 문득 소설이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정말 빨려 들어갔다. 아, 이 사람 소설은 이런 재미가 있었지! 사실 소설 책을 봤는데 재미가 없거나, 뭔가 얻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우선 재미가 있었고, 읽으면서 무언가 얻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40년을 조금 모자라게 산 내 인생을 한 번 돌아봤다.
사실 소설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하는 생각을 했다. 개인 SNS에는 조금 더 많은 책 내용을 썼는데,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리뷰에서 스포일러가 된다면 <열린책들>판매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리뷰를 하고자 한다. ![]()
베르베르는 1권 처음에서 이 말로 시작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믿는가 믿지 않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상상하고, 꿈꾸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멋진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 소설은 이런 마음으로 읽으면 되리라!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무언가 지식이나 지혜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재밌게 술술 읽히고, 그안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가면 된다. 물론, 이 책은 중간중간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인용하는 형식을 빌려 어디가서 써먹을만한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알려주기도 한다.
<누가 날 죽였지?>라는 강렬한 메시지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 책의 주인공 가브리웰 웰즈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주간지 기자로 다양한 기획 기사를 쓰다가 작가로 데뷔했다. 베르베르는 한국을 참으로 좋아하는 작가로 유명한데, 사실 한국이 그의 소설의 진가를 먼저 알아봤고 한국만큼 그를 좋아하는 나라도 없다.
이 책은 중간중간 죽음에 대한 재미있는 상식을 많이 넣는, 작가 특유의 전개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작가는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듯이 우연히, 또 언제나, 또는 황당하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뉴스를 보면 사실 아, 저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구나 하는 순간이 나올만큼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누구나 그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알지 못하고, 또 죽음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바라고 있다.
폭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영매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은 영매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가 되기 때문에 그녀를 믿게,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작품에 중요하다.
저자의 전작인 <고양이>처럼 유럽에는 고양이를 영혼을 보는 존재로 설정하는데 이 책에서도 고양이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다작하는 작가로 조금은 폄훼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누구도 창의성이란 것이 0에서 시작하는 것은 없다. 누구는 1에서 누구는 20에서 누구는 85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그 순간이 다를 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많은 작품에서 영감을 얻고, 그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또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장점이자 그만의 창작 방법이리라.
베르베르의 작품을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는 순간이 많은데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이 조금은 적을 수도 있는데, 베르베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나온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 보면 프랑스 적인 언어 유희 젠장(merde)와 엄마(maman)과 비교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아재개그도 간간히 나오고, 영국인 상담가를 교활한 아저씨 정도로 묘사하는 것도 프랑스 사람 특유의 영국인을 싫어하는 마음이 나온 것 같다.
물론 2권에서 영혼계는 프랑스어, 영어의 구별이 없어 다 이야기가 되고, 서로 화해하는 것으로도 나온다.
<죽음>에서는 죽음 못지 않게, 아니 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같기도 한(아, 스포일러인가, 소설 리뷰는 조심해야 한다) 프랑스 문학계를 비판한다. 작가를 대변하는 사람이 가브리웰 웰즈라면(쌍둥이 형이 있는 걸로 나오는데 베르베르는 그렇지 않겠지?) 적대적인 평론가 장 무아지는 여기서 악역으로 나온다. 그는 '좋은 문학을 수호해야 한다'라면서 장르 문학 작가들을 무시한다. '좋은 SF 작가는 죽은 작가'라는 막말까지 한다.
가브리엘을 이승에서 공격하는 장무아지와 저승에서 공격하는 알렝 로트브리에는 베르베르를 비판하는 프랑스 문학계, 평론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장무아지의 소설 <배꼽>은 베르베르의 전작인 <잠>에서 주인공 자크가 불면증을 떨치기 위해(즉, 자기 위해서) 일부러 고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설로도 등장한다.
'제가 인정하는 비평가는 단 하나뿐이예요. 바로 신간이죠. 작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건 시간이예요. 고만고만한 작가들을 사라지게 하고 혁신적인 작가들만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건 시간이라는 비평가가 지닌 힘이죠.' ---<죽음 2> ---p.37
베르베르가 프랑스 문학계에 던지는 이야기리라.
가브리엘이 누비는 저승에는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 FBI 국장, 유명 작가들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2권 후반부에는 가브리엘이 왜 죽게되었는지 등 소설의 끝이 풀려나가므로 여기서 부족한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소설에서 많은 걸 기대하기 보다는 재밌게 읽고, 중간중간 내가 영감을 얻고, 의미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이번 소설도 재미있고, 술술 잘 읽히고, 중간중간 생각을 하게도 만든다. 쉽게 잘 읽힌 소설이었다.
번역소설을 볼 때 역자를 많이 본다. 어찌보면 오늘날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있게 한 것은 유명 번역가인, 그의 소설을 너무나 재밌게 잘 번역해 낸 이세욱 번역가의 힘이 크리라. 이 책을 번역한 전미연 역자도 책을 잘 읽게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역자가 번역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도 재밌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번역 역시 좋다.
이번 소설도 나에게는 너무나 재밌었다. 처음 문장과 끝 문장을 통해 이 책의 의미를 알려준다. 뒤에 나온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들었던 음악과 역자의 이야기도 의미있었다. 이 책 죽음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통해 주제의 무거움을 벗고, 시종일관 경쾌하고 빠른 필치로 흥미진진하게 전개한다.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수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주인공등과 함께 용의자들을 추적하다보면 놀라운, 또는 재밌는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 전개와 비슷한 느낌도 받았는데, 역자의 말처럼 이 책은 베르베르의 초기 저작과 비슷한 이야기 전개 등이 그의 소설을 읽으며 대학생활을 보낸 나의 향수를 자극했다.
다시 20대로 돌아간 기분을 가졌다. 그걸로 고마웠다.
오랜만에 읽은 베르베르의 소설은 역시나 좋은 느낌을 주었다. 그의 최근 작품인 <고양이>와 <잠>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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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눈을 뜬다. 웰즈는 죽음에 관한 장편 소설의 출간을 앞둔 추리소설 작가다. 평소 자신이 작업하던 비스트로 향하던 웰즈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으로 향하지만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지만 보이지 않고 창문에서 뛰어내려도 아무렇지 않다.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이, 누군가 자신을 죽인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고 몇몇 용의자가 떠오른다. 이런 웰즈에게 다행히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 뤼시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1편에서 계속)
웰즈는 영매 뤼시와 함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아가고 뤼시는 웰즈 덕분에 자신의 첫사랑을 찾게 된다. 하지만 그 남자의 진짜 모습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추하다. 웰즈는 영혼이 된 할아버지를 만나 자신을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는데...
인간이 죽음을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인간은 과학의 발달로 천 살까지 살 수 있을까? 그게 만약 소설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가능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단초가 된다면, 그런 상상력은 없어져야 하는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죽음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기에, 지금 현재로는 아프지 않게 건강을 관리하려고 한다. 오래 살기 위한 관리가 아니라. 적어도 내 의지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그리고 생각한다. 죽음을 맞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국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하는 마음으로. 크고 작은 굴곡들과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들이 있었다. 그런 모든 일들의 상처가 완전하게 아물지는 않았지만 때론 덮는 것으로, 때론 폭발하는 것으로 분출하며 살았던 것 같다. 왜 사람은 죽을까? 와 같은 말은 왜 사람은 태어났을까? 와 같은 말이지 싶다. 태어남도,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살아가는 동안 그 숙제들을, 그 고통들을, 그 즐거움을 각자의 방식대로 견디고 살아가는 게 인생 일 테니까.
개인적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가 상상하는 세계를 즐거워하고 그가 글로 표현하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가 말하는 죽음에 완전히 100% 동의 할 수는 없지만 작가 덕분에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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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지식이 쌓이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미지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지만 인간이 아마도 살아있는 한은 절대 알 수 없을 분야는 아마도 '죽음', '사후세계' 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제일 큰 영향을 미친다. 지금 하는 행동이 알 수 없는 사후 세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눈 딱 감고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사후세계'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전 작품부터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항상 그럴듯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는 인간의 조상에 대해, <타나토노트>에서는 영계 탐사에 대해, <신>에서는 신들의 세계를 그렸다. 이번 작품 <죽음>은 <타나토노트>와 연장선으로, 죽은 자의 시각에서 첫 단계 사후 세계를 묘사했다. 이전 작품에서 이미 소개한 개념의 연장이지만, 이제 막 차가운 시체가 되어버린 순수한 영혼이 겪는 상황 묘사는 역시나 그럴듯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를 많이 닮은 듯 보이는 '가브리엘'은 추리소설 작가다. 어느 날 아침 '누가 나를 죽였지'라고 시작하는 소설을 쓸 영감을 가지고 깨어났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사람은 자신이고,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혼으로 존재하게 된 가브리엘은 영매 '뤼시'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죽였을지 모르는 주변 인물들을 탐색하게 된다. 누가 그를 죽였을까? 추리 작가이고, 그의 작품이 되었을지 모르는 소설처럼, 이 소설도 '누가 나를 죽였지'로 시작한다. 소설은 이미 죽은 영혼인 가브리엘을 누가 죽였는지 찾아내는 과정을 따라 흘러가지만 사실 그건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 수수께끼 보다 오히려 죽은 영혼의 세계, 그와 영매 간의 대화, 남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아마도 작가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문학 전쟁도. 죽은 다음 영혼이 되었다고 모든 것이 한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공간을 초월하게 되어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혼의 눈에 인간들의 욕심, 배신, 복수는 상당히 근시안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괜히 그런데 낭비할 것 없이 인생을 좀 더 즐기라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변화할 수 있는 기대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의미일 뿐만 아니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와 상관없이 누구나 겪는 삶의 고통에 대한 보상,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 도덕적 선의 추구를 위한 필요성 등 다양한 이유일 수 있다. 어떤 쪽에 끌리던 인간은 죽음이 허망한 끝이 아니길 아마도 기대하고 믿고 싶은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후세계가 현생 인간들을 어느 정도 컨트롤하기 위한 장치로 두려움의 영역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면 이 소설은 그 역할을 약간은 허물어 버린 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작정 두려운 영역으로 남겨둔 것보다는 두려움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런 세계를 상상함으로 현재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주는 게 감사한 일일지 모른다. 소설은 아마도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지막 장에 친절하게 요약해주고 끝이 난다. 소설은 소설일지라도 이 메시지를 거부할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다. 삶은 소중하다. 첫째, 인간의 삶은 짧기 때문에 매 순간을 자신에게 이롭게 쓸 필요가 있다 둘째,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남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 선택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우리가 지는 것이다. 셋째,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는 도리어 우리를 완성시킨다. 실패할 때마다 뭔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넷째,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대신 사랑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다섯째, 만물은 변화하고 움직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물건이든 억지로 잡아 두거나 움직임을 가로막아선 안 된다. 여섯째,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은 유일무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다. 비교하지 말고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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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이어집니다. ☞바로가기 : 1권 리뷰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권은 뤼시가 외우는 주문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 부분은 작가가 『죽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첫째, 인간의 삶은 짧기 때문에 매 순간을 자신에게 이롭게 쓸 필요가 있다.
깨진 도자기를 수선하는 '긴쓰기'는 물건에 제2의 삶을 불어넣는다.
나는 에드몽의 백과사전에서 유독 ‘긴쓰기(金繼ぎ)’에 눈길이 갔다. 긴쓰기는 깨진 도자기를 수선할 때 이음매에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혀 일종의 장식으로 활용한 것이다. 물건에 제2의 삶을 불어넣는 이런 긴쓰기 방식에는, 비극을 겪는 과정에서 부서졌다 회복된 인간이 삶의 풍파를 전혀 모르는 온전한 인간보다 훨씬 매력적이라는 생각 또한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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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위트가 넘치는 죽음에 관한 소설 타나토너트에서 죽음 여행이라는 소재였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작가 자신을 죽음의 대상이자 소재로 삼았다. 소설의 첫 문장은 “누가 날 죽였지” 라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시작된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그것보다도 흥미로운 건 자신이 죽게된 상황 자체를 기억 못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음 이후에는 내세의 삶을 완전히 잊은 채로 환생한다는 설처럼. 중간중간 나타나는 문학계의 거장과 역사 속의 인물들과의 만남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전개에 양념을 뿌려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지루할 틈 없이 숨막히게 전개되어 단숨에 읽긴 했지만 리뷰를 보고 책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더이상의 스포는 생략하겠다. 예스24에서 보내준 사은품은 우연한 계기로 인지하게 되었다. 새벽에 잠이 깨어 불을 켜지 않은채로 서가에서 책을 찾으려는데 어두운 가운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만이 밝게 비추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야광 책커버. 밤에 읽을 때 빛을 발한다. 이 역시 역설적인 상황이다. 책을 읽으려면 불을 켜야 되는데 야광 커버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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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1편의 리뷰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님의 책을 처음 접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말씀 드렸는데 작가님의 글을 쓰는 성향을 주위에 이 분의 책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것을 기반으로 저에게 맞게 해석하여 이 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결론 내리기에는 이르지만 테르나르 베르베르님은 글을 재미나게 잘 쓰는 유명 작가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완벽한 적응은 못했지만 다른 책 읽을 때도 그래듯이 여러번 정독하면서 작가님의 내면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책 읽는 능력도 한 걸음 나아가겠죠...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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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가님의 심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건지... 그동안 작가의 책은 모두 사서 읽었고 이런 소재를 이런 내용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며 감탄하며 그 아이디어와 창작성에 놀라워하며 책을 읽었었고 그래서 이번 책도 기대하고 샀는데요 전 너무 재미가 없어서 2권은 아예 군데군데 건너띄며 읽고 있는중이에요 이젠 70페이지정도 남았네요....이번 책은 전 너무 재미엊ㅅ게 읽었어요 나중에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면 또 다를수있으니 다시 읽어보려구요 언젠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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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까지 매우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빨리 끝을 보고 싶어 2권도 빠르게 읽기 시작했는데 후반부터는 조금 힘이 빠진다. 마냥 미스터리하게 진행되지 않고 죽음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어 추리소설(?) 같은 느낌이 덜 해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후반으로 갈수록 처음과 달리 힘이 빠지고 결말은 조금 허무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느꼈던 흥미진진함을 뒤로 하고 죽음이 가지는 의미,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산다는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건 이것대로 그만큼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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