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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무척이나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그가 말하는 방언을 하며 신앙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 첫째 사도행정의 마가다락방의 오순절 성령 사건의 방언은 성경에서도 기록된데로 두번째 은사주의자들이 말하고 인용하는 고린도전서의 12~14장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한다. 그렇다면 신전에서 나오는 방언과 같은 방언이 교회에 있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언이라는 것이다. 세번째 방언은 분명 언어인데, 현대의 방언은 언어의 규칙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 네번째 하나님은 신도들의 인격이 있는 기도를 원하시는데, 자기도 이해못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다섯번째 방언은 해석이 되어야 하는데, 분석해 본 이들에게서 나온 점은 해석하는 이들마다 각각 다름이 이 글에 대해 나는 판단을 못하겠다. 저자는 분명 현대의 방언은 하늘의 방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본인이 말씀에 근거한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방언이 아닌 한국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기도를 하면되리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앞에 순종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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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애착과 독자의 외면 사이에 낀 방언 논란
'저자의 사랑은 가장 많이 받았지만, 정작 독자의 사랑은 가장 덜 받은 책(p.4)'으로 저자 스스로가 소개하고 있는 옥성호의『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현대 교회의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인 '방언' 에 대해 노골적으로 건드렸다는 자체에서부터 궁금한 독자와 불편한 독자로 지지층을 가르고 있는 독특한 책이다. 하나님의 계시서인 성경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완벽하게 해석하는 일 자체가 애초에 한계가 보이는 시도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강요된(일반화된) 교리에 각자의 신앙을 짜맞추려는 것 또한 우매한 태도라 여기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반갑고 흥미로운 책이었다.
축복의 은사인가?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인가?
저자의 고백처럼 나 역시 한때는 방언의 은사를 사모한 나머지 부흥회나 간증집회에서 여기저기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상대적 결핍감과 위축감을 느껴 기도 중에 주위를 둘러보곤 했던 경험이 있다. 게다가 나보다 뒤늦게 신앙생활을 한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따발총처럼 퍼붓는 방언으로 주위의 눈길을 사로잡는 일을 목격했을 때는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성경 구절이 꼭 나를 두고 지적하는 것만 같아 주눅이 들기도 했다. 간절히 갈구하는 내게는 왜 방언의 은사가 내리지 않는지, 내 신앙의 정체성은 아직도 유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하나님은 왜 나를 가둬두고 계신지 많은 의문과 절망감이 물밀 듯 찾아와 영적 방황 속에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품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간절함은 말씀의 본질을 사모하고 온전히 경배하는 섬김의 자세보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가와 비교에 더 큰 부분을 할애하며 인간적 기준에서의 등급을 마음 속에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향하는 은사가 아닌 인간을 향한 은사로서 말이다.
인간의 언어인가? 하나님의 언어인가?
저자는 아버지 옥한흠 목사의 격려와 충고 속에 이 책을 저술하면서 저명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해 방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한편 방언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구절을 꼼꼼하게 되짚어가며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방언의 본질과 역할은 무엇인지, 성경적 방언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쳐 들어간다. 오로지 성경에 초점을 둔 해석이야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짓는 유일한 잣대라는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저자는 오늘날 집단적 최면제 내지는 신비 체험 위주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을 성경적 방언이 아니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방언에 절대적인(호의적인) 이들에게 다소 불편한 도전을 하고 있다. 흔히 하늘의 언어(?)라고 높이 평가되는 방언의 폐해가 교회의 안과 밖에서 어떤 유형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지적해주고 있어 방언에 대한 맹목적적인 믿음을 지닌 이들에게 분별의 호소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
사도행전 속에 언급된 방언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사건과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고넬료 회심 사건,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등 총 4번에 걸쳐 방언이 등장한다. 저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의 공통적 특징이 '외국어'라는 점과 각각 독특한 대상들(예루살렘에 모여든 세계 각지의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 구약적 사고에 젖어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을 향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이 전파되고 새로운 교회 시대가 자리잡도록 하는 데 방언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방언이야말로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의 완성에 기여한다고 보고 있다. 즉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에게 복음이 세계를 향해(이방인 포함) 전파되어야 할 넓이와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사도를 중심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한 표적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불순종과 교만의 대가로 인해 각기 다른 언어로 흩어졌던 인류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다시 '한 언어(방언)'로 통합됨을 보여주는 표적으로서도 방언은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입으로 '믿는다' 고백함에도 여전히 구약적 사고에 젖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령에 대해 모르고 있던 제자들(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바로 알게 한 표적이 방언이며,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 복음을 전파하는 데 제자들이 앞장서도록 기인한 것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초대 교회의 성립에 필요한 표적으로 기능한 방언이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도구였다면 완성된 계시서인 성경이 존재하는 오늘날, 그밖의 또 다른 표적이 과연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제기됨과 동시에 믿음의 척도로써 인식되는 요즈음의 방언에 대해 독자로서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속에 언급된 방언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방언은 사도행전 속 방언과 달리 외국어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언어인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출발점에서부터 고심하게 된다. 즉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이 한 가지인가 두 가지인가라는 논의는 방언의 기능이 각각 나뉘게 된다는 측면으로 이어지는데 성경은 그 점에 있어 어떤 암시도 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고린도 지역의 특수한 배경을 감안해 볼 때 사도 바울이 그 점에 대해 충분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다. 교통의 요지이자 도덕적 타락으로 유명한 고린도 지역은 상업 중심지로 이교도주의, 신비주의에 의한 전통적 습관이 배어 있는 곳으로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방언과 같은 뜻 모를 소리로 이뤄진 주문과 기도가 유행했다고 한다.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낯설지 않은 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 은사의 장면과 일정 부분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자극적인 멘트, 잔잔한 음악과 혼이 나갈 것만 같은 압도적 분위기, 신과의 교접을 구하는 듯한 울부짖음, 엉덩이를 들썩거리거나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일정한 소리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소리 등등이 그러하다. 구약 시대 부터 이방 종교의 특징이 광란과 무절제로 나타났음을 생각해볼 때 경건한 질서가 깨진 위와 같은 모습은 결코 성경적 예배의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독자로서도 공감하는 바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방언 역시 통역 가능한 언어임을 전제로 하여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교회와 공동체를 위한 방언이 아닌 개인의 경건을 위한 생활 도구로 전락된 방언에 대해서는 분별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잘못된 방언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언급이 없음에도 그리 생각하는 것은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분노, 빈정거림, 책망, 교정, 그리고 교훈으로 점철되어 있다(p.115)'는 조지 가디너 교수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방언은 과연 성경적인가?
방언을 특별 은사로 여겨 개인의 신앙심을 등급화하는 척도로 삼거나 하나님과의 직통 연결 도구로 삼아 방언삼매경에 빠질수록 성경에서 멀어진다는 허점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개인의 신비 체험에 매료될수록 말씀은 시시하게 다가올 것이며, 극단적으로는 방언이 성경보다 위에 서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행함을 자랑 삼아 교만에 빠져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될 수 있음을 떠올려볼 때 과연 체험이 우선인가? 성경이 우선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리라 본다.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저자는 결국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요지 그대로를 우리에게로 다시 전하고 있는 셈이다. 체험 아래에 말씀이 놓이는지 말씀 아래에 체험이 놓이는지를 놓고 벌이는 영적 전투의 중심(p.30)에 방언이 있다고 가정해볼 때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닌, 이방 종교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종교심의 발로에서 나온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체험적인 것으로써 교회공동체를 튼튼히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세우려는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적을 통해 믿음을 확인하려는 이들에게 사탄의 치밀한 계략이 하나님을 그럴싸하게 모방하는 신기술로 '방언'을 악용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지적이다.
체험에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소박한 외침일 뿐!
저자의 시도는 참/거짓 또는 긍정/부정 등의 이분법적 정의를 떠나 모든 것을 말씀에 비추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행17장)' 묵상하던 베뢰아인처럼 방언 또한 개인적인 체험 이전에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닌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만으로도 이 시대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지에 대한 경건한 힌트를 주고 있다. 명절 때마다 과다포장으로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는 선물세트처럼 혹 우리의 신앙도 직분과 각종 은사들로 믿음을 과대포장한 채 거추장스런 포장재로 둘러싸여 본질이 축소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살펴볼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전인격적 기도여야 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신비한 체험을 가져다 준다는 이유로 방언을 하늘의 언어라고 가르치고 권장하는 움직임은 중지되어야 한다(p.266)는 저자의 단호한 입장이 억지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구원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자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신비 체험은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믿음의 증거물로 목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감사와 은혜의 삶보다 교회 안에서의 나의 위치와 직분은 어떠한지를 각종 은사로 확인해보려는 테스트 용품으로 혹 방언을 사모하고 있다면,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라는 소박한 외침으로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특정은사를 달라고 떼쓰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깨달아 필요한 곳에 온전히 쓰이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진정성있어 보이지 않을까? 세례증서를 받았다고 하여 언약백성의 자격을 온전히 획득했다는 증거물이 아니듯 방언 또한 아무 때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능력 과시용의 마패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짚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닮기 위한 말씀임을 절실히 깨닫는 가운데 성령에 대한 오해와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본문 속 구절을 소개하며 서평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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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라는 제목에서 '방언이 하늘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다음 대목에서 이 책이 하나님의 선한 영과 마음으로 쓴 책이 아님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3년 전쯤 교회를 몇 달 안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때 교회 구역 집사님과 몇 명의 구역 식구들이 저자의 집에 심방을 와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장난을 쳐 볼 마음으로 과거의 배운 방언 기도를 시작했고 그런 다음 눈을 뜨고 그들을 한참 구경했다고 한다. 구경하고난 저자의 소감은 '전혀 방언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던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있었다'는 것. 이 대목에서 나는 두가지 이상함을 느꼈다.
둘째는, 방언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던 사람들이라니... 방언을 한다는 것이 신앙의 등급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것에 대해 경계하던 저자가 아닌가? 무엇을 가지고 그런 판단했을까? 스스로의 논리에도 맞지 않다.
저자의 요지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 다르고 그 속에 의미가 없어서 통역될 수 없으며 마음과 생각이 담기지 않은 기도이기 때문에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방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수단이 되는 광경에 대한 우려의 마음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바이다. 그리고 이 책(241P)에서 저자가 말한바와 같이 학습에 의해 생겨났거나 혹은 다른 의도에서 생겨난 가짜방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이 모두 가짜라고 말하는 저자의 생각은 부분을 전체로 간주하고 있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령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중에 임하는 방언에 대해서 무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장 11~13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싶은 분이시다.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 그 때 어찌 가짜 방언을 주시겠는가?
가끔 어이없는 성경 해석 때문에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웃음을 주기도 한다. 이런 웃음을 기대하고 이 책을 사보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간곡히 만류하고 싶다. 그가 자의적으로한 성경의 해석은 웃음보다는 지루함이 더 많기 때문이다. 중간에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끝까지 꼼꼼히 읽었다. 이 책은 서평을 위해 제공받은 책이기에 오직 서평을 쓰기 위해서. 이 책을 읽다가 방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목사님께 부탁하여 추천받은 책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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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믿는 방식이나 지향하는 바가 달라 종교서적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래 종교서적을 탐독하는 편이 아닌지라 저자의 이름 자체가 생소한 나는 생각보다 몸사림이 없는 호방한 성격의 글을 보고 정말 열정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방언에 대해서는 기존에 경험도 없고 주변인의 체험도 들어본 적이 없어 뚜렷한 견해가 없는 편인지라 저자가 가진 방언에 대한 사고방식이 그리 거슬린다거나 하지 않는데 방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불편한 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책을 꼼꼼히 읽는다면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방언에 대한 체험 자체를 신봉하고 본질을 흐리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저술한 것 같다.
성경말씀을 토대로 신앙을 지켜가야 한다는 의도란 게 중요하다.
배우기를, 듣기를 사랑하라 하고 믿으라 하고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지라 교회에 필요이상으로 자금이 융통된다거나 왜곡된 전도활동을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째서 사람이 사는 곳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모였어도 조직이 커지면 어쩔 수 없이 편리를 위해 구축한 시스템에 휘둘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건 앞으로 우리 교인들이 점점 반성을 토대로 고쳐나가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워낙 전도활동에서 전해지는 모습에 실망하면 오히려 내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 두려워 그 관계에 깊이 빠지려 하지 않아 모르는 것이 많은 편인데 이렇게 책으로라도 접하게 되면 역시 한숨이 나온다.
지식이 부족한 교인들을 격려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방언을 목적으로 집전되는 모임이 있을 정도라니 주님이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간다기 보다는 본인들의 신앙에 대한 도취를 심화시키기 위한 데 관심이 더 높은 것 같다.
그래도 방언에 대해선 막연히 신기하다, 나도 체험해 보고 싶다 정도의 선망은 있었다.
저자가 꼬집었듯이 방언에 대한 체험이 신앙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진 데도 왠지 그러지 못한 자신에 비해 방언을 한 사람들은 더 신실한 게 아닐까 자책하는 부분이 생긴다는 건 잘못인 것 같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의 형태는 다 다르고 뭘 받기 위해 우리가 믿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경험이 중요하다면 종교에 대한 믿음은 허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저자는 종교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논거를 펼칠 정도로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짧은 생각으로는 미처 알아차리기 힘든 고린도전서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서 상당한 전달력을 볼 수 있다.
애초에 서문부터 고루하지 않은 타고난 문장으로 누구나 편히 접근할 수 있게하는 데서 종교란 어려운 것이 아니요 언제나 누구나 편하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느끼게 한다.
더불어 애매하고 쉽게 이해하기 힘든 성경말씀을 알기 쉽게 전하겠다는 의도 역시 확연히 느껴진다.
방언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딴지를 걸고 싶은 부분이 상당하겠다.
하지만 그건 달을 보라고 손짓했더니 달은 보지 못하고 손끝의 거스러미를 보고 탓하는 것 밖엔 안 된다.
책은 그저 책이다. 싫다고 죽자 사자 배척할 것이 아니다.
좋은 부분은 받아들이면 되고 나의 사상과 다르다고 하면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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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옥성호는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방언은 더 이상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라고, 성경적 방언은 뜻 모를 ‘신비한 하늘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로서의 언어였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방언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본문들을 철저히 연구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 사건(행2:1~22),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행8:12~17), 고넬료 회심 사건(행10:43~48), 그리고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의 회심 사건(행19:1~7)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 사건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시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마무리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방언은 사도들의 사역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모두 ‘외국어’였다고 주장합니다. 오순절의 방언은 분명 외국어였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듣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고넬료의 집에서의 방언이나 세례 요한 제자들의 회심 사건에서 일어난 방언이 모두 ‘외국어’였을까요? 본문은 그런 암시조차 없으며, 외국어일 필요도 없습니다.
한편, 저자는 고린도전서 12, 13, 14장도 진지하게 살펴봅니다. 그는 먼저 고린도 교회의 배경적 연구를 통해 고린도 도시의 이방 종교에 이미 혼란스러운 방언 현상이 넘쳐났는데, 바울은 교회 밖의 방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외국어로서의 방언만을 염두에 둔 채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모든 종교에 방언이 존재하고, 플라톤도 그 ‘혼란스러운’ 방언을 신의 선물이라고 인정했다면, 바울도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저자가 지적하듯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확연하게 평가절하하고 있다면(p. 141), 이것은 바울이 외국어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신비한 체험으로서의 방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요? 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라는 권면이 방언이 통역할 수 있는 외국어라는 뜻일까요? 오히려 사도행전의 오순절 방언은 통역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들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통역이 필요하다는 뜻은 오히려 일반적인 외국어로는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통역의 은사를 받은 자의 통역이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어쨌든 오늘날 교회에서 유행하는 방언들이 성경적 방언이 아니고, 그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저자는 방언에 대한 깊은 회의 속에 성경을 연구한 듯합니다. 저자가 옳게 지적했듯, 오늘날의 방언은 학습과 훈련으로 습득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모든 종교와 이단들에서도 방언이 있다는 점에서, 방언을 모두 성령의 은사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방언은 모두 외국어 방언이었고, 또 그 방언은 사도의 표시로 이미 끝났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편협하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나도 방언이 신앙생활에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오직 말씀에 따라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성경해석과 주장에 동의하든 안하든, 방언을 경험하고 그 경험으로 믿음이 깊어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잘못된 방언의 위험을 인식하고 성경적 방언이 지금도 가능한지 고민하는 분들, 모두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방언에 대한 고민과 진지하게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훌륭한 모습이 잘 담겨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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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조금이라도 다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언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 방언을 들으면 무섭다. 사람의 언어가 아닌 다른 음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에서 통성기도 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 방언은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씨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은사중지론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책으로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 다르다는 것이다. 책의 뒤편에는 “방언은 인간의 근원적 불안감을 잠재우는 매우 효과적인 마취제다”라는 표현은 정신을 번쩍 나게 만든다. 참방언과 거짓방언 중에 회색지대는 없다고 말한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방언을 강조하고, 장로교 계통의 교회들은 방언을 금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헤맬 수밖에 없다. 김우현 감독은 도리어 방언은 하늘의 언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극과 극이 대치되는 영적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아마 이 토론은 1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마치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과학자와 철학자의 대담과 같이 느껴진다. 결론이 나지 않는 이유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신학은 과학처럼 검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이 주는 유익이 있다. 또한 방언이 주는 피해도 존재한다. 이 둘 사이에서 어떤 신앙을 취해야 할지는 정말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나는 불신자로서 살아가다가 교회에 와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방언을 받고 회심한 형제를 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회심시키는 방법으로 방언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믿는 자들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분들 중에는 강력한 중보기도의 용사들을 보아왔다.
반면 너무 시끄럽게 새벽에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보았다. 방언의 은사만을 너무 강조하는 불균형적인 신앙인도 보았다. 방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은사중지론자의 입장에서 쓰인 책이다. 반대로 방언을 강조하는 책도 보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논쟁보다 화평을 통한 균형 잡힌 신앙을 원하실 것이다.
방언에 대한 말씀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말씀은 고전 14:19절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방언을 사모하고 기도하길 원한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이웃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방언으로 기도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방언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쏟기보다 어린이 한 명을 전도하기 위해 오늘도 전도의 현장으로 나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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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교회는 유난히 부흥회가 많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시골에서 처음 도시로 올라와 아버지 손을 잡고 갔던 그 교회는 성전건축헌금 을 걷고 있었던 개척교회였었다. 꽤 오랫동안을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4층짜리 예배당이 신축되었고, 초창기부터 함께 했던 탓인지 학생회는 유난히 활발했고, 신앙심도 유별났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더 열심히 부흥회를 쫓아다녔던 이유는 나보다 1년 선배였던 한 자매님 때문이었다. 그 분은 항상 옆에서 보기에도 성령충만해 보였으며 정말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나도 믿음이 좋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교회에서 자주 열었던 심령대부흥회는 꼭 찾아다녔다. 부흥회에서는 꼭 통성기도를 빠뜨리지 않는 것 같다. 통성기도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같이 기도를 하던 사람이 울면서 기도하던 중 방언이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나중에는 나도 방언기도를 한 번 받아봤으면 원이 없겠다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하지만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자취방을 이리저리 옮기다보니 한 군데 적을 두고 교회를 다니기 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지 못했었다. 그러다 교회를 다시 다니기 시작한 건 결혼 후 아가씨가 다니던 교회를 나가면서부터였다. 여전히 난 스스로를 사이비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어다. 성경책도 잘 읽지 않고 주일만 왔다갔다하는 그런 사이비신자.
그러던 내가 바뀌게 된 건 오랜 병원 생활을 하면서 나를 위해 매일 병원에 와 주었던 고등학교때의 그 언니였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 분은 사모님이 되셨다. 오산에서 구로까지 거진 3,4개월을 매일 꾸준히 오셔서 성경말씀을 읽어주고 기도를 해주고 가셨다. 처음에는 좋았던 그 방문이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성경말씀을 전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던 것이다. 처음엔 2,30분이던 것이 나중엔 1시간을 거뜬히 넘겼던 것이다. 그 당시에 내 몸 상태는 많이 안 좋았고, 특히나 뇌수술을 한 뒤라 한 시간씩 휠체어에 앉아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하는 주일 예배도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채신 사모님께서 나중에 필요하면 전화를 주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퇴원하고 몇 년이 지난 뒤 갑자기 사모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전화를 드렸다. 그냥 신약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으니 한번이라도 통독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다음주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목사님과 함께 우리 집에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나와 사모님, 목사님의 성경공부는 1년간 지속되었다.
신약성경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 재미없을거란 생각에 한 번도 읽어볼 생각도 안 했는데,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성경말씀이 얼마나 신기하고 마음에 쏙쏙 와 닿았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힘든 일이 생겼고, 마음이 힘드니 성경말씀이 와 닿지가 않았다. 성경공부를 시작한 지 일년 정도 되었고, 신약성경을 여러 번 통독했으니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성경공부를 하던 중 경기를 일으켜 정신을 잃게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병원을 원래 수술 받았던 구로병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한 달 뒤 다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방언을 받게 되었다. 난 내가 하는 게 방언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방언이라고 하셨다. 방언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경공부는 끝이 났다. 사모님은 공부를 끝내고도 계속 성경을 소리내어 읽고 방언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내가 했던, 아니,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그것이 방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순절날 다락방에서 방언을 받았던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말을 하지 않았던가. 방언이란 전혀 배우지도 않았던 다른 나라 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저자는 이 책을 시작했다. 사도행전에서 나온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서 나온 방언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오늘날의 방언 열풍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한다.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에 나오는 그 방언이 아니라고,...
매사에 의심이 많은 나는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주장에 백 번 공감을 했다. 어쩌면 믿음이 깊은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불경스럽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꼭 한 번쯤은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이 다일까? 과연 내가 다니는 교회는, 교파는, 목사님은 믿을 수 있는가? 여전히 난 의문에 휩싸여있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내가 했던 방언은 진짜 방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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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막연한 마음도 있었는데 저자가 제시한 '멕시코 어느 동네에서 제주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라는 가상의 상황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놔두더라도 기분만큼은 이해가 쏙 되는 느낌이다. 주변에 신앙생활을 제법 한 사람들은 방언을 은근 한다. 그런데 반대로 신앙생활에 제법 긴데도 방언을 못하면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방언이 정말 신앙심을 구별하는 척도라도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저자는 방언을 필요이상으로 높게 보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다. 은사중의 하나가 방언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조금 충격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럼 교회신도들이 하고 있는 방언은 뭘까? 저자 말에 따르면 오늘날의 방언은 단지 집회인도자의 영력에 따라, 얼마나 귀찮게 조르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무의미한 언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 속에 의미가 없어서 통역될 수 없고 마음과 생각이 담기지 않은 기도 라는 것이다.
제대로 충격이다. 물론 저자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방언으로 신앙을 가늠하려하고 입이 자동으로 말하는 방언에 너무 기대어 정작 자신의 기도는 소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본질과 그 수단(?)이 주객이 전도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같다. 하지만 그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의 방언은 방언이 아니라는 결론은 뭔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같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교회에서 가만히 보면 방언을 해석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에 옆에서 해석하는 것은 자기가 지어서 한다는 말인지 궁금하다.
신학에 대해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어느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정면으로 파헤치고 성경으로 고증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은 박수쳐주고 싶다. 무조건 지금의 주된 성향과 다르다고 해서 아니라고 제껴버린다면 또 그만큼 무서운 아집도 없을 것이다. 방언에 맹신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오늘날 방언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형성되는지 성경적으로 풀어본 것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말씀이 기초한 믿음이지 맹목적으로 방언을 맹신하면 안된다는 경고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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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제 자체가 상당히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옥성호 씨 특유의 말솜씨가 책장을 쉽게 넘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서평을 쓰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유는, 이 책의 주장이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이다. 한국인 4사람 중 한 명은 교회에 등록해 있다고 한다. 그만큼 기독교 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기적 중 하나가 '방언'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방언'은 놀라운 기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받기를 소망한다. 그러한 소망에는 그들을 이끄는 목사 또는 부흥사들의 영향이 깔려있다. 교회의 사람들은 '방언'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며 이는 마치 '계급'과 같다라는 옥성호씨의 말은, 한국교회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대개 끄덕거릴 내용이다. 자, 좋다. 정경 중 하나인 사도행전에 분명히 '방언'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오순절'의 기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여러나라의 말을 쏟아냈고, 여러 언어에 능하던 바울이 그것을 증언했다. 성경무오설에 따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틀릴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방언'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셈이다. '방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시 나타난다. 아예 한 장을 방언에 대한 이야기로만 가득채웠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설교되는 '방언'에 대한 내용은 주로 이 부분을 인용한다. 옥성호씨는, 성경중심으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그는 사도행전의 '방언' 기술과 고린도전서의 '방언' 기술의 목적이 다르다고 차근차근히 설명한다. 아울러, 고린도전서의 '방언'장은 방언을 반드시 해야한다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이 책은 나에게 적지 않은 숙제가 될 듯 하다. 그러한 숙제를 끌어안다보니 서평을 쓰기까지 시간이 오래걸리게 되었다. 아직도 그 숙제는 해결하지 못했지만, 일단 삶의 한부분으로 생각하고 기록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언젠가는, 이 숙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 사족 : 그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이 이런 책을 쓴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