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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진 생각의 시야란 어느새 한정되기 쉽다. 살면서 거치는 여러 번의 사회화를 통해 상식과 인습에 갇히고 편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보다는 익숙한 것만 섭취하는 타성에 곧잘 젖게 되는 탓이다. 사람은 언제 권태와 허무에 빠져들게 되는가? 그건 상식이 상상력을 압도할 때다. 세상의 중력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현실에 납작 엎드려 그 한없이 낮은 눈높이로 보고 헤아리는 세상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걸로도 담아내거나 꿈꾸지 못할 때인 것이다. 이제는 새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지도가 높은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소중한 것은 그래서다. 그는 전혀 다른 것을 준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는 현실보다 꿈에서 이야기의 광맥을 발견한다. 주류가 한낱 몽상으로 치부하며 무시하거나 내친 것들마저 그 주류 못지 않게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면서 헤아림의 손전등을 기꺼이 들이미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가 상상력의 건전지로 한껏 충만된 손전등으로 비춘 순간, 박제된 지식과 낡아빠진 상식 속에서 퇴락과 실망만 거듭하던 세계가 온전히 다른 모습으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그가 나눠 준, 다른 곳에선 얻을 수 없었던 시선과 생각 속에서 이전에 몰랐던 매력과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식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 생각의 폭을 확장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건,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의 쾌감을 유발해서만은 아니다. 관습과 타성에 절인 눈으로 보았을 땐 그저 척박하고 퇴색한 빛만 가지고 있었던 나를 둘러싼 일상 속 세계가 그와의 동행으로 어느덧 이루게 된 시선의 도약 속에서 얼마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색채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듬뿍 경험하게 되어 더 많이 열린 눈과 마음으로 나와 세상을 좀 더 긍정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베르베르의 매력은 최근에 나온 ‘죽음’에서도 여전하다.
‘죽음’은 제목 그대로 죽음을, 정확히는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죽음 이후를 다룬다고 하니 얼른 94년에 발표한 ‘타나토노트’와 그 후속작으로 2000년에 나온 ‘천사들의 제국’이 생각난다. ‘타나토노트’는 흔히 우리가 저승이라고 부르는, 은하 중심의 블랙홀로 존재하는 영계를 탐험하는 이야기였고 ‘천사들의 제국’은 ‘타나토노트’의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다시 등장하여 이번에는 영계에서 수호 천사가 되어가는 이야기였다. 이건 여담인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베르베르의 소설 여기저기에 인용되어 낯익을, 심지어 ‘죽음’에서도 여전히 등장하는 에드몽 웰즈의 실물을 만날 수 있다. 갓 천사가 된 이들을 지도하는 천사로 일하고 있는 그를 말이다. ‘죽음’은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사실 후속작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시리즈에 대해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타나토노트 유니버스'라는 이름을 살짝 붙여보고픈 마음도 생긴다. 분명 베르베르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기에 겁은 좀 나지만서도. 그렇다고 해도 작품들이 다루는 영역은 같지 않다. 서로 다르다.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은 저승의 중심 영역이라 할만한 영계를 다뤘지만 ‘죽음’은 아직 그 영계로 가지 않은 '떠돌이 영혼'들이 주로 부유하고 있는 연옥의 세계를 다루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연옥은 영계처럼 지구 저 편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오롯이 겹쳐 있다. 다가 올 환생을 기다리거나 그걸 거부하는 떠돌이 영혼들이 바로 우리 주위에서 우릴 지켜보며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위치 상의 연접은 '죽음'이 구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으로 말하겠지만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영매가 중요한 등장인물이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고 삼아 타나토노트 2권에서 가져온 영계의 지도.>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이야기인지 줄거리부터 간단하게 언급해 보려 한다. 프랑스의 문단 주류를 차지하는, 그래서 흔히 <공식>문학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한없이 천대받는 장르 문학을 주로 쓰는 작가, 가브리엘 웰스는 늘 그랬듯이 꿈에서 건진 첫 문장인 <누가 날 죽였지?>를 어떻게 하면 한 편의 소설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일상을 시작한다. 그 때만 해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으나 갑자기 자신이 아무런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들른 주치의 대기실에서 우연히 만난 뤼시 필리피니란 이름의 여성이 자신에게 이런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한다. 그가 이미 죽어 유령이 되어 있다고. 웰즈 자신의 이상형인 실존했던 헐리우드 배우 헤디 라마를 빼다 박은 외모 때문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던 뤼시는 알고보니 죽은 자와 소통할 수 있는 영매로 결국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게 증명된다. 갑자기 사망할 아무런 사건도, 이렇다할 병력도 없었던 그이기에 그의 죽음에는 오직 단 하나의 이유만 남게 되는 셈이어서 자신이 곱씹었던 첫 문장은 그대로 이제 무엇보다 풀어야 할 숙제와 같은 질문이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해답을 얻고 싶다. 그가 소설의 첫머리로 삼아 볼까 했던 문장, 이제 그의 머릿속을 점령한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나는 왜 죽었지?’ (p. 69) 소설은 이 때부터 ‘아버지들의 아버지’처럼 추리 소설 형식을 따라간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가 주연했던 영화 ‘고스트’와는 다르게 현실 세계에 아무런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고 그저 관찰자만 되어야 하는 떠돌이 유령인 가브리엘 웰즈는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아무래도 살아 있는 존재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뤼시에게 협력을 구하게 된다. 내가 대단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내 삶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챕터를 알고 싶다는데, 내 입장에서는 정당한 요구 아닌가요? 누가 날 죽였는지 알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나와 주변인들에 대한 정보를 주면 재능과 혈기를 가진 당신이 분명히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난 확신해요. 범죄 수사가 전공이었으니까 내가 저승에서 당신을 잘 안내해 줄게요.(p. 117 ~ 8) 사실 뤼시는 보여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그리 평탄한 인생을 보내지 못했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자인 사미 다우디가 맡긴 가방에서 마약이 나와 무려 8년을 교도소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웰즈의 소설, ‘죽은자들’을 우연히 만나고 영안이 열려 지금의 영매가 된 인연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도와주면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그 때 뤼시에게 가방을 맡기고 그대로 사라져버린 사미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범죄 수사 지식을 동원하여 찾아주겠다는 웰즈의 약속에 뤼시는 그를 대리하여 수사에 나서기로 한다. 그 결과, 웰즈가 24시간 안에 특별하게 제조된 독극물로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지고 이제 웰즈와 뤼시는 웰즈를 살해할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네 명의 용의자들, 그러니까 늘 그가 이루고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해 강한 질투를 가지고 있었던 쌍둥이 형인 토마, 그를 작가로 데뷔시켜주고 현재도 그의 작품을 전담하여 편집하고 있는 출판인 알렉상드르 드 발랑브뢰르, 차갑게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한 미련을 드러내고 있는 과거의 연인이자 여배우 사브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작품들을 무시하며 맹렬한 비난만 해댔던 평론간 장 무아지를 개인적으로 만나 추려가면서 진범을 색출해 나간다. 그러나 여기엔 이 하나의 이야기만 있지 않다. 이와 병행하여 다른 이야기 하나가 더 겹쳐진다. 그건 바로 이제 떠돌이 영혼이 된 웰즈가 살아 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그래서 한없이 낯설 수밖에 없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 이런저런 우연곡절 속에서 점차 적응해 나가는 이야기다. 연옥이 자리한 위치에 뒤이어 이야기 형식 또한 이렇게 '겹침'을 지향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베르베르가 왜 겹침의 설정을 반복하는가에 대해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서 거기에 대해 거듭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겹침이 그 어느 대상도 배제하지 않는, 서로 대등하게 공존하는 상태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온전한 평등의 상태가 바로 '겹침'이란 걸 말이다. 영매인 뤼시의 존재는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건 무엇보다 뤼시가 하는 일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산 자와 죽은 자를 교통시키는 것만 하지 않는다. 그런 수동적인 전달자 역할에 더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등을 빚을 경우 되도록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 또한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경계에 서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고루 보살피는 존재다. 그는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내치지 않는다. 어느 날, 자신을 <상부의 일원>이라고 소개하며 한 존재가 접촉해 왔어요. 이름이 드라콘이라고 했어요. 그가 저승에 양립하는 두 조직에 대해 설명해 줬어요. 하나는 환생을 위해 올라가는 영혼들을 관리하는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에 머무르길 원하는 영혼들을 보살피는 조직인데, 이 둘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천상의 관리들>에 의해 운영된다고 했어요. 인간들의 영혼을 관리하고 거르고 안내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기본적으로 비슷하다고 말이죠. 그가 내게 지상에서 이 상부를 대표하는 일종의 대리인이 되어 보지 않겠냐고 하길래 주저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p. 104) 이러한 영매가 웰즈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로 등장한다는 것은 소설 '죽음'이 무엇보다 지향하고 있는 게 바로 공존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개체가 어떤 자리나 어떤 모습, 어떤 성향을 하고 있든지간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고 헤아려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여기엔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여러 면에서 드러난다. 먼저 수사 과정이 그러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용의자들을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차례차례 추려나가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이 여정 속에서 독자는 용의자 자신의 고백을 통해 그들의 삶을 오롯이 경험한다. 그들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마치 그 몸에 빙의하듯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엔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지 말라는 베르베르의 마음이 담겨 있다.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의 금지는 무엇보다 가브리엘의 이상형이기도 한, 실존했던 여배우인 헤디 라마에서 한껏 나타난다.
헤디 라마 소설에서도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그녀에겐 야누스적인 면모가 있었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헐리우드의 여배우였지만 그녀에겐 그 모습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 때만 해도 사람들은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은 지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고 여겼었는데, 헤디 라마는 뛰어난 외모만큼 지적인 것도 탁월했던 것이다. 그녀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과학자였다. 실제로 그녀는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어뢰가 독일이 쉽게 무선 통신 주파수를 알아내는 바람에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자, 주파수 보안을 철저하게 하여 독일의 방해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기술까지 개발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주파수 도약'이란 기술이다. 일정한 함수 처리로 주파수를 마음껏 변화시킬 수 있는 이 기술은 현재의 와이파이와 GPS 그리고 블루투스를 가능하게 하였다. 한 마디로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의사소통이 가능한 현실을 창출한 장본인인 것이다. 헤디 라마가 탄생한 지, 101년이 되는 2015년엔 구글이 '헤디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라는 캐치 프레이즈까지 내걸었을 정도로 말이다. 이토록 굉장한 업적을 이뤘지만 그녀는 살아 생전에 단 한 번도 그것을 인정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쁜 여배우는 지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과학자로서의 그녀를 깡그리 무시해 버렸고 이뤄놓은 업적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러한 처사는 소설에서 장르 소설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을 읽지도 않은 채 덮어놓고 비난부터 하는 평론가 장 무아지의 태도와 그대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문단 주류인 <공식> 문학을 대표하며 그만한 권력도 가지고 있는 그는 늘 같은 소재와 주제로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만 써대면서도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걸 오로지 대중이 그만큼 덜 계몽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웰즈의 소설이 대중에게 인기 있는 것도 웰즈가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타협한 결과라며 폄하한다. 상대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 보면서 스스로 잘못된 것을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모습은 그야말로 헤디 라마를 지적인 것이 결여된 예쁜 인형으로만 보고 다른 건 모조리 무시했던 모습 그대로다. 타자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한 모습만 보고서 그것을 전부라고 판단하는 것. 이건 우리들도 일상에서 사람과 사건을 만나며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자기 중심적인 시각과 판단이야말로 실은 공존을 가장 많이 무너뜨리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베르베르는 온전한 공존을 위해 자기 중심주의를 허물고자 한다. 굳이 '<죽음>은 절대적 타자'라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나 타자의 영역이라 생각하게 마련인 죽은 자의 세계를 독자 앞에 끌고 온 것이다. 그 타자의 세계를 독자에게 온전히 경험시키기 위하여.
(내 멋대로 이름붙인) 타나토노트 유니버스를 이루는 세 작품들... 따라서 소설이 원하는 건 독자인 우리가 단순히 떠돌이 영혼의 세계를 주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보다 진정한 목적은 그것을 통해 현재 내 일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그 세계를 흠뻑 체험토록 하여 나와 세계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시야와 생각으로 보고 담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소설에서 비행 장면이 많이 나오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영혼이 된 웰즈는 무엇보다 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전과 순전히 달라진 자신을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땅에 붙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바닥에 붙어 움직이는 무거운 동물이지만 이제 그는 공중에 떠 있는 가벼운 존재가 되었다. 가브리엘 웰즈는 새로운 존재 조건을 활용해 곡예비행에 나선다.(p.132) 여기에서 보듯, 비행은 현실의 중력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력은 한 마디로 어떤 존재가 다른 대상을 끌어당기는 힘. 그대로 세계가 개체가 가진 고유한 개성을 억누르고 세계가 허락한 틀에 자신을 길들이게 만드는 것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사회는 틀을 만들어 각자의 자리를 구획하고 거기서 쉽게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을 들뢰즈는 '영토화'라 부른 바 있다. 영토화를 통해 틀에 갇힌 주체는 자기 자신의 시야를 가지지 못하고 사회가 허용한 시야로만 모든 걸 바라본다. 자신마저 그렇다. 우리가 고유한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기 보다는 항상 타인의 모습과 비교해 우월감과 열등감에 젖는 것처럼. 시야가 좁으면 생각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고 폭이 협소해지면 질수록 자신에 대한 긍정 또한 줄어들게 된다.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자기 안정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바라는 것 보다는 대다수가 바라는 것을 더 쫓게 되고 그렇게 다들 똑같은 것만 쫓게 되니 그것을 얼마나 이뤘느냐에 따라 절로 서열화가 이뤄져 늘 비교 우위나 열위를 통해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타자는 공존의 대상이기 보다는 질투와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내 뜻을 따르지 않는 대상에게 쉽게 증오를 표출하게 된다. 나와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고집하는 타자는 언제든 내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탈영토화'할 것을 권한다. 사회가 구획하여 우리를 심어놓은 곳에서 탈주하라고 말이다. 어느 것에도 고정되지 않는, 본향이란 게 없는 유목민이 되어 머무르게 되는 모든 곳을 고향으로 삼고 만나는 모든 이를 가족처럼 여기도록. 그렇게 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경계란 오직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베르베르가 소설에서 섬세하게 묘사하는 비행이 바로 이러하다. 그 어떤 경계도 넘나들고 그 어떤 장벽도 막을 수 없으며 생각 아니 상상하는 만큼 빠르게 날 수 있는('타나토노트'에선 심지어 광속마저 초월할 수 있다고 한다.) 비행은 그만큼 사회가 형성한 나와 그것을 기반으로 굳건히 형성된 자기중심주의로부터의 이탈의 중요한 상징 행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행이 베르베르가 꿈꾸는 문학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브리엘 웰즈는 자신이 <이야기꾼>이 된 것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 때부터 문학은 내게 한바탕의 마술로, 풀리는 난해한 수수께끼로 다가왔어요. 당신처럼 나도 부모님이 권유하는 세계가 싫었어요. 학교도 나와 맞지 않았죠. 그래서 가출을, 육체의 가출이 아니라 정신의 가출을 감행했어요.(p. 150) 그래서 나는 <이야기꾼>이라는 나만의 자리를 찾았어요.(p.151) 그런 웰즈는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문학이며 다양성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장 무아지에게 이렇게 항변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건 바로 문학의 다양성이에요. 그 자체로 나쁜 문학 장르가 있는 게 아니라, 장르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 따로 있을 뿐이에요.(p.40) 작가인 우리의 목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만다는 것, 이것뿐이에요. 책 읽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똑똑한 사람도 많아지겠죠.(p. 41) 창작을 하는 방법과 태도에 있어서 여러모로 실제의 베르베르와 유사한 점(심지어 책에 자주 소개되는 웰즈의 책 제목 역시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을 살짝 비튼 것이다.)을 보여주는 웰즈는 사실 베르베르의 분신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에 대한 웰즈의 소망은 베르베르 자신의 것이라 여겨도 무방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웰즈의 사후, 편집자 발랑브뢰르가 계획하는 A.I, <가브리엘 웰즈 버추얼>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문학이 마주하게 될 미래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고유하며 제한없는 상상력이 빚어내는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언제든 쉽게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A.I인 <버추얼>이 하는 일은 <공식> 문학 작가들이 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은 마치 정해진 공식을 따르듯이 기존의 소재와 주제, 형식을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한 채 쓰고 있을 뿐이니까. 이건 작가가 기존에 썼던 것을 데이터화 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최대한 그와 비슷하게 소설을 산출하는 A.I와 거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베르베르가 왜 그토록 <상상력>을 중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상상력이 창출하는 다양성을 구현하는 사람의 능력을 A.I가 대체할 수 없다고 본다면 상상력,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증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베르베르는 무엇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아무런 제한 없는 상상력을 중시하니, 이건 그대로 아무런 영토와 경계에 좌우되지 않는 비행과 마찬가지고 동시에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언제든 다른 나가 될 수 있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르베르가 상상력을 중시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너무 단순하고 성급하며 오만에 찬 판단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려 말해 본다면, 바로 그 상상력이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변화를 만들거나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커다란 내부 동력이 되어주기에 베르베르는 중시하며 독자에게도 마음껏 향유해 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특히 2권 후반에 가서 펼쳐지는 장면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가득 자극하고 마음껏 뛰놀게 하는 마당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꼭 말해둬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앞서 슬쩍 언급한 적도 있는 <경험>이란 단어다. 소설 '죽음'은 얼른 보면 한계 없는 상상력처럼 자유분방한 전개라고 느껴지지만 사실 이 <경험>이란 말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보면 꽤 유기적으로 형성된 작품이란 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것이 이 소설이 하필이면 모든 용의자의 총체적인 삶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나 헤디 라마의 경우와 같이 타자의 한 면만 보고 전부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그리고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행과 베르베르가 중시하는 상상력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주가 된다는 것이다. 소설은 대상을 단정하기 보다는 먼저 가서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눈으로 그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이는 용의자에게만 그치지 않고 웰즈가 떠돌이 영혼의 세계에 적응할 때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전 면모를 가늠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오래도록 깊은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행은 또 어떠한가? 소설은 누누이 날면서 느끼는 감각, 보여지는 풍경을 묘사하고 강조한다. 상상력 또한 그렇다. 그것은 과정 중에만 재현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처럼 소설이 가지는 중요한 형식과 테마 모두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바로 <경험>인 것이다. 그 <경험>에 대해 베르베르는 드라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 봐야 고칠 수 있는 거예요. 단시간에 변혁을 이루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작은 변화와 성과를 소중히 여겨요. 진화는 덜컹거리고 요동치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니까. (…)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은 해야겠지만 절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데는 모종의 숨겨진 의도가 있으리라는 걸 기억하라는 말이에요. 실수 없이 앎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요. 경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 우리는 누구나 경험을 해봐야 해요. 그러고 나서 그 경험의 결과물을 확인해야 비로소 행동을 바꿔야겠다는 자각이 오죠. 그래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돼요.(p. 198) 여기서 잘 알 수 있듯, 그가 이처럼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자기중심주의에서 탈주하여 무한한 변화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오직 경험을 통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절대 머리 속 지식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몸을 통해 실제 느끼고 실수와 잘못을 절감하며 그를 통해 스스로 바꿔야겠다는 의지로만 구현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베르베르가 2권 후반에서 가브리엘 웰즈로 하여금 뤼시에 빙의토록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웰즈는 뤼시의 몸에 빙의되어 여자 가브리엘 웰즈로 살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과 상관없이 오직 외모만으로 멋대로 규정 당하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지도 않고 무턱대고 유혹부터 해오는 것 하며 그야말로 뤼시의 영혼이 아닌, 오직 뤼시의 육체만이 전부인 반응을 잇달아 만나는 것이다. 헤디 라마가 살아있을 당시 당했던 그대로 말이다. 그제서야 가브리엘 웰즈는 여성의 삶이 자신의 머리로 상상했던 것보다 많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여성이 되는 과정이 없었다면 결코 몰랐을 진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자신과 다른 견해를, 삶을, 타자를 더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말에 이르러 웰즈가 놀라운 반전과 함께 밝혀진 진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뤼시가 드라콘의 말에 따라 복수하려는 마음을 접고 보다 커다란 대의에 따라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과정의 경험이 가져다 준 힘 때문이었다.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의 말마따나 현대는 '죽음 혐오의 시대'다. 우리가 그토록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이 끝,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고 권한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나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물론 그렇게 여기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파스칼의 내기>처럼 억지로라도 한 번 믿어보자고 말한다. 누가 아는가? 소설에서 소개한 <백 번째 원숭이 이론>처럼, 한 마리의 원숭이가 우연히 고구마를 물에 씻어서 먹었던 것이 나중에 백 마리의 원숭이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도록 만들고 마침내 그 지역에 서식하는 모든 원숭이의 행동을 변화시켰듯이, 비록 나 혼자만이라 하여도 그렇게 믿고 나를 둘러싼 상황과 타자를 함부로 판단하려는 성급함을 접어두고 내가 아니라 타자를 중심으로 그와 이루는 관계의 과정에 충실하며 그 경험을 소중히 하면서 다가오는 변화에 온전히 나를 내맡긴다면 언젠가 나라는 작은 동심원에서 시작된 파문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 변화시킬지... 이것이 소설에서 웰즈가 말한 대로 '우주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행복을 위해 비밀리에 결탁하고 있다고 믿는' <프로노이아>일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베르베르의 모국 프랑스를 포함하여 세계 곳곳에서 번지고 있는 혐오와 적대의 불길이 어떤 비극을 자아내고 있는지 보노라면 그래도 베르베르가 내민 손을 잡고 가브리엘 웰즈가 헤디 라마와 그랬듯이 그를 따라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부탁하고 싶어진다. 당신도 얼른 이 손을 잡고 변화를 위한 부름에 뛰어들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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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아직 경험하진 못하였지만,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그 단어 자체로도 공포는 물론 금기시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표현으로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공포는 쉽게 불식시킬 수 없다. 생(生)에 대한 집착과 전혀 알지 못하는 죽음 이후의 상황에 홀로 놓여진다는 점이 죽음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죽음에 직접적으로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입대 후 첫날밤 어둠 속에서 취침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문득 눈물을 흘린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죽음과 달리 막연한 군생활에 대한 두려움 및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 시간동안 나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그 생각은 죽음 이후에 드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왜 나만 여기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의 시작 부분에서 눈길을 끄는 문장은 단연 '누가 날 죽였지?'일 것이다. 죽음 자체에서 공포는 물론 회피하려는 보통의 사람에게 이 문장은 주인공인 가브리엘 웰즈의 죽음 자체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문장을 시작으로 작품을 구상하던 가브리엘이 영매 뤼시와의 만남을 통하여 실제로 자신이 죽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초반부의 장면은 이후 어떠한 내용이 펼쳐질지 기대감을 갖게 된다. [식스센스]와 같은 반전일까, 아니면 [사랑과 영혼]과 같은 달콤한 멜로로 흘러갈지 말이다. 또한 '누가 날 죽였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추리소설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가브리엘 웰즈 역시 추리소설 작가가 아니었던가? [죽음]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야기는 확실히 경쾌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 영매 뤼시는 가브리엘을 대신하여 누가 그를 죽였는지 수사하고, 반대로 가브리엘은 뤼시의 사라진 과거의 연인을 찾는 이야기의 구조와 그 과정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의 전개는 장르물의 흥행 요소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의 상상력과 조합한 이러한 스토리의 전개는 그 나름으로도 재미있지만, [죽음]의 진가는 바로 작품에 부여된 다양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장르 작가 가브리엘 웰즈의 행적을 보면 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존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가브리엘이 관상동맥이 막혀있고, 그것을 수술이 아닌 운동과 식습관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베르나르 역시 동일한 상황이라고 한다. 그래서, [죽음]은 작중 죽음을 맞이한 가브리엘을 통하여 현재 살아있는 베르나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작가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인하여 더이상 글씨를 쓸 수 없다는 것에서 절망하는 모습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 다가오며, 특히 비평가 무아지와의 갈등 구조는 현재 그가 프랑스 문학계에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웰즈는 <한마디로> 작가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죠. 그가 이런 방송에 출연하고 문단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문제예요. 다수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선동이 아니고 뭐겠어요. (중략) 미래 세대에 어필하겠다는 건 그의 공상에 불과해요. 나는 고전만이 유일한 가치를 지닌 수준 있는 문학이라고 믿고 그것만을 옹호할 뿐이에요. (중략) 좋은 소설이라면 응당 지금 여기를, 현실과 현재를 말해야죠. 작가의 앎과 경험에서 나와야 좋은 소설이지, 환상의 결과물은 좋은 소설이될 수 없어요." - 2권, p 38 ~ 39 中에서 -
장르 소설에 대한 무아지의 이러한 신랄한 비판은 자신의 작품을 프랑스가 아닌 한국에서 더 잘 이해해주는 것 같다는 베르나르의 생각을 염두해 보면 베르나르에게 향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오로지 순문학이 가치가 있다는 프랑스 문단의 현실은 베르나르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이지만, 죽음 이전에 가브리엘이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본다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토가 프랑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역시 크게 틀리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베르나르는 이 시점에서 죽음을 통하여 가브리엘이 할아버지에 뒤이어 조력자로 코난 도일을 등장시킴으로써 프랑스 문단에 대한 극복의 의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드루이드의 강림 의식 '사모니오스'에서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들을 소환하여 작중 캐릭터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자신의 글에 대한 베르나르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그 대결의 끝은 단순히 장르 문학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책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문학계가 지향해야 하는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미래 세대가 책과 가까워지게 만드는 게 핵심이라는 걸 잊지 말아. 절대 적을 혼동하지 말게." - 2권, p. 260 中에서 -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내용이 활발하게 인용되는 구성 역시 눈에 띄는 작품이다. 과거 [개미]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의 창작의 보고 역할을 한 이 책의 내용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상상력이 공상이 아닌 현실과 기술에 기반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죽음의 다양한 형태와 관념을 다양한 지식을 통하여 전달함으로써 그가 이 작품에서 만들어내는 세계가 단순히 동떨어진 개념으로만 볼 수 없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의 '폭스 자매'의 심령술이라든지 일본의 '소쿠신부쓰(즉신불)', 강령술에 대한 코난 도일과 해리 후디니의 견해 차이와 같은 지식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의 상상력이 단순한 허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날개를 달 수 있고, 또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관점을 한 곳에 모아 놓음으로써 그 누구라도 공감하는 대목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사실에 대한 베르나르의 가공을 거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그의 창작에 대한 원동력이자 독자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이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문장이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의 몰입의 단초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 전개에 따라서 이 문장이 단순히 추리 소설의 클리셰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전 작품 [잠]은 수면을 통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음에 반하여 [죽음]은 그 자체의 반복을 통하여 생사(生死)를 넘나들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가 날 죽였지?'라는 물음은 그러한 영역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관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물음이 있기에 여전히 가브리엘은 생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단순히 죽음이라는 상태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말미에 이러한 질문이 다른 질문으로 바뀌는 부분은 그러한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왜 죽었지?>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신비로운 질문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왜 태어났지?> - 2권, p. 313 中에서 -
이쯤되면 [죽음]은 베르나르가 가브리엘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의미를 다루면서 동시에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의 시간을 가져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죽음에 대한 가정 및 체험 의식을 통하여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우리로서는 그의 시도가 낯설지 않다. 그래서, 프랑스 문단에서의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함께 그의 창작의 보고인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동원하여 완성된 이 작품은 죽음을 그저 막연한 공포 또는 외면하는 상황 속에서 유쾌한 이야기를 통하여 오히려 죽음 안에서 나름의 철학을 구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누가 날 죽였지?'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내용과 함께 죽음을 통한 삶의 오묘한 진리를 이끌어내는 이 이야기는 '과연'이라는 찬사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면 우리는 아마도 가브리엘의 묘비명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살아 있고 당신들은 죽었다.> - 1권, p. 227 中에서 -
과거의 한 모임에서 죽음 이후에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단호하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며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 과학도의 대답을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죽음]에서도 가브리엘의 형인 토마가 죽음에 대한 단호한 부정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죽음을 그저 종교가 만들어낸 공포의 일종이라 말하는 이도 작품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이 작품에서 생각하는 죽음은 삶의 끝이자 완성으로의 죽음이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시 각자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인하여 잠시나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올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막연한 삶에 대한 의문을 갖고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보다 명확한 기준선을 그으면서 그것을 기점으로 현재와 과거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그러한 것이 익숙하지 않기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통하여 베르나르가 도출한 삶에 대한 철학에도 귀를 기울여 보면 이 작품은 단순히 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더불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오히려 제목과는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책으로 다가오게 된다.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은 유일무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다. 비교하지 말고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 2권, p.311中에서 : 죽음을 통한 가브리엘의 배움 중 여섯 번째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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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날 죽였지?>
<죽음>의 첫 문장이다. 작품 속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인기 있는 소설 작가이다. 자다 깨서 머릿속에 남은 책의 첫머리를 열어젖힐 단순하지만 두근거리는 첫 줄을 찾아낸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에서는 다시 마지막 문장을 찾으며 극을 구성하려고 한다. <누가 날 죽였지?>와 <나는 왜 죽었지?>를 고민하며 작품을 계속 구성해 나간다. 그러다 자신의 후각이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병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우상 여배우 헤디 라마를 닮은 영매 뤼시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질문은 소설 속 첫 문장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에 팬 층이 두터운 베르나르 베르베르. 책의 재미는 걱정도 하지 않고 예약 구매를 했다. 역시 그답게 책을 잡는 순간부터 2권까지 단 번에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이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여서 그런지, 그를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가로서의 고민, 어려움에 대해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작가로서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풀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낄 수 있었다.
1. 죽었지만, 슬프지 않은..
죽음=슬픔. 당연한 공식이라 여겼는데, <죽음>에서는 죽음이 슬프거나 괴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작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도 모르는데도 극도의 감정으로 슬픔, 좌절, 분노를 내뱉지 않는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자신의 죽음을 궁금해는 하지만, 자신의 죽음의 원인을 찾는 태도는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잡는 정도의 궁금함과 비슷해 보였다.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마음껏 떠도는 상태도 즐기는 듯하다. 죽고 싶은데 죽지도 못하게 해서 괴로워했던 그의 할아버지 이냐스도 그러했다.
죽음=이별. 이 공식도 깨진다. 오히려 죽었기에 가브리엘은 할아버지도 만나고, 사랑스러운 여인 뤼시도 만날 수 있게 된다. 또 살아있을 때와는 다른 시각으로 주위 사람들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동경했던 작가들, 배우들, 유명한 인물들까지 만나고 그 상황을 충분히 즐긴다.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영혼만 떠돌게 된 상황.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죽기 전에 해야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쪽에 조명이 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죽은 사후 세계도 '지금, 여기, 이 순간'으로 여기며 떠도는 영혼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는 모습이 눈에 더 들어온다. p.232
죽음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과 연결 짓고 출생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정반대야. 죽음은 우리를 모든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해 주는 거니까.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되지. 가벼워지는 거야. 반대로, 곰곰이 따져 보면 태어나는 게 그리 조은 것은 아니야. (생략) 태어나 최소한 13년 동안은 가족과 선생님, 친구들에 의해 네 정신적 틀이 형성되니까.
p.232
저승에서 살다 보니 갈수록 그런 확신이 드는구나. 죽음은 해방인 반면 출생은 자신을 꽃피우기 힘든 억업적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믿음이 확고해져. 결국 내가 진정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채 실패한 삶을 살 위험이 큰 거지.
환생을 거부하고 계속 떠돌고 있는 주인공의 할아버지 야나스를 통해서 작가가 생각하는 죽음과 탄생, 삶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그들을 보며 권태야말로 떠돌이 영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p.264 영매인 뤼시는 영혼들의 환생을 돕는 일도 한다. 괜찮은 조건으로 환생하는 것을 선택한 수 있는데도 떠도는 영혼으로 있는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가브리엘 역시 환생이 아닌 영혼으로 자유로이 사는 것을 선택한다. 죽음은 선택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면 그 이후의 삶은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이는 읽는 사람들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나 죽음은 선택이 아닌 필수과정이다. 그 죽음을 너무 슬프게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죽던 살던 그 과정을 잘 수행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2.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상상력' 넘치는 스토리가 아닐까? 두렵고 알 수도 없는 사후 세계를 마음껏 그려낸 <죽음>. 자유롭게 공간 이동을 하고, 다른 이의 몸에 들어가 보고, 유명 연예인을 훔쳐 보고 하는 정도는 이제 상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도 식상한 느낌이다. 이 정도 상상을 살짝 넘어 나폴레옹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인슈타인을 불러내 상상을 초월하는 기계를 만드려고도 한다. 주인공 가브리엘은 자신의 소설에서 이러한 상상력을 담아내려 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그가 죽은 이유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상력이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p.287-288 '자네는 단순히 SF 소설 한 편을 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네가 수집한 자료와 자네의 상상력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거라는 얘기야. 진짜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분야에 매몰되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이 자네는 해답을 찾아냈으니까.' (생략) '그냥 소설인걸요. 허구잖아요.' '물론. 하지만 다시 말하네만, 누군가 자네의 공식을 테스트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분명히 자네 책에 나온 <불로장생의 샘> 연구소를 세우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는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또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상상에도 책임이 따를 수 있다는 메시지가 이 책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이라면 가상이라고 하더라도 책임감 없이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 말이다.
3. 산다는 일
결국, 죽음을 이야기 하면 할 수록 사는 것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책 첫 질문이 <누가 날 죽였지?>였다면, 마지막 질문이 <나는 왜 태어났지?>이다. 죽고 나서야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주위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가브리엘. 우리도 무엇인가를 잃고 난 후에야 소중한 것에 대해 되돌아 보게 되고 거기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하기 전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내게 주어진 사명과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가는 자세가 필요함을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1.
P.71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만들려면 육체를 잘 보살펴야 한다.
p.265 이 육신이 전부인 줄 알았으니...
산 자들에게 소리쳐 경고해 주고 싶다. <당신들은 정신을 가진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정신이다.>
죽음2.
P.9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P.198
'체념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돌로레스가 반기를 든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은 해야겠지만 절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데는 모종의 숨겨진 의도가 있으리라는 걸 기억하라는 말이에요. 실수 없이 앎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경험은 오랜 기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 우리는 누구나 경험을 해봐야 해요. 그리고 나서 그 경험의 결과물을 확인해야 비로소 행동을 바꿔야겠다는 자각이 오죠. 그래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요.'
P.301 주인공이 말하는 거야. <지난 삶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웠나?>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는 메시지, 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생각하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남는다. 죽음을 이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게 한 <죽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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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 초 만에 죽음의 일곱 단계를 겪는다. 충격, 부정, 분노, 타협, 슬픔, 체념, 수용. 각각의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욕이 후렴구처럼 따라붙는다. (…) 그는 망연자실한다. 그리고 일곱 단계를 순서가 조금 다르게 다시 겪는다. 분노, 부정, 수용, 체념, 슬픔, 타협, 충격. (1권 p. 32~33)
언제인가 “후회 없는 삶”이라는 주제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교육생의 자격으로 자리에 앉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 기억에 선명히 남기도 했으나, 그날 각 조별로 분배되었던 주제가 참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남기도 했다. 6개의 조에 분배된 후회 없는 삶은 “부모”, “성취”, “명성”, “사랑”, “기여” 그리고 “죽음”이었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느껴졌던 죽음이란 내용의 토의를 하다가 순간 순간 울컥했던 감정, 남겨두고 갈 것들에 대한 미련 등을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이 책을 읽으며, 그날의 감정을 고스란히 떠올린 것은 과연 우연일까 그렇지 않을까. 나는 죽음을 만나게 되면, 어떤 순서로 일곱 개의 단계를 겪게 될까. 이 책을 읽는 순간마다 나는 그렇게 일곱 단계를 고민해보았다. 문득 가브리엘의 마음은 이렇게도 알아채려 노력하면서, 정작 나는 내 마음은 알려고 노력해왔는지 고민이 들었다.
- 죽음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과 연결 짓고 출생은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정 반대야. 죽음을 우리를 모든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해 주는 거니까.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되지. 가벼워지는 거야. 반대로, 곰곰이 따져 보면 태어나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니야. 정신의 가족을 떠나 네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모인 육신의 가족에 안착하는 일이니까. (1권 p. 232) 아마 내가 최근 죽음과 관련된 몇 몇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공감하지 못했을 말일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올해 초에 죽음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었다. 그 후 내가 얻은 결론은 <제대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제대로 살았다는 증거>였다. 혹은 정 반대로 삶이 지긋지긋했거나. 가브리엘의 할아버지는 제대로 살았었기도 했고, 삶이 지긋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3일간 쉬지도 않고 날아다녔다고. 물론 죽음이 모두에게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비통한 상태인 사람이 더욱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죽음의 순간을 맞아 세상을 떠나는 날엔 이냐스처럼 홀가분히 훌훌 터는 사람 이길 바란다. 물론 그 바람에는 엄마 없이 혼자 남게 될 내 아이가 부디 안정적인 상태 이길, 나와의 이별로 죽을 듯 힘겨워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는 통증이 오거나 쾌감을 느끼는 순간에만 자신의 육체를 의식하게 된다. 내향성 발톱 때문에 고생을 해봐야 발톱이 자란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위장염을 앓아봐야 내장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러한 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1권 p. 38) - 멈추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과연 진보일까? (1권 p. 212) 이 책을 읽으며 어떤 문장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장이 맞나 싶을 만큼 낯선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떤 문장은 아프게 내 마음을 때리기도 했다. 특히나 멈추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삶의 무의미를 고민하는 내용은 마음이 아팠다. 책을 다 읽은 후에 그가 연명치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사실은 그 단서가 없이도 그의 글에서 이미 연명치료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안락사를 반대하는 이들이 말하는 “존엄성”을 위해 연명치료는 본인이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더욱 공감하고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안락사를 선택한 누군가가, 멈추고 난 자신의 육체를 돌아보며 그때서야 뼈저리게 아프다면? 그 아픔은 결국 죽음을 선택한 사자 본인이 감내해야 할 몫인 것일까? 결국 우리 역시, 죽음을 겪지 않는 한 그 어떤 것조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고 인간의 유한성을 돌아보게 될 뿐이다.
- 악인들은 운만 좋은 게 아니야. 발 벗고 나서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니 어쩔 도리가 없는 거지. (2권 p. 172) - 정의. 정의라, 참 말은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지! 당신들이 정의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죠? / 우리는 산 자들의 법정들에서 저지르는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해 죽은 자들의 법정을 만들고 싶은 거에요. (2권 p. 195)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이 답답해졌던 부분을 고르라면 나는 고민 없이 이 부분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여자들은 대개가 남자들보다 똑똑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180도 달라져 어린아이보다 더 순진해지기도 하지(2권 p. 137) 라는 문장에서는 아직도 세상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언제 인가부터 당연한 듯, 악인들에게 행운이 따르고, 그들을 지키는 견고한 사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가 하는 마음에 씁쓸함도 느껴졌다. 글쎄,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책에서만은 그런 세상을 안 만날 수는 없나. 하는 막연한 “비합리적 평화주의” 사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제인가 나에게 누가 그런 말을 했다. 나 같은 애가 하나라서,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거라고. 하지만 문득 생각해본다. 분명 어딘가에는 나 같은 생각으로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이 분명 있으리라고. 그래서 산 자들의 법정에서 저지르는 실수를, 죽은 자들이 바로 잡으려 하는 일이 없기를, 산 자의 실수는 산 자들이 충분히 알아서 해결하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을 읽었다.
- 인간의 삶은 짧기 때문에 매 순간을 자신에게 이롭게 쓸 필요가 있다. /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는 도리어 우리를 완성시킨다. 실패할 때마다 뭔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 유일무이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다. 비교하지 말고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2권. p. 311) 어쩌면 저자가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말은 이 말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뤼시가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 되뇌던 말처럼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권 p. 142)>라고 되뇌며, 우리도 오늘을 소중히 살라고, 그저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라고. 가브리엘의 입을 빌려 그가 전한 말들 모두가 마음에 울림을 주었으나, 특히나 나는 비교하지 말고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가장 가슴에 닿았다. 나는 내 스스로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종종 바닥 치는 자존감을 만났고, 자격지심으로 잘난 이들을 그대로 봐주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마음에 닿은 이 감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적어도 내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어느 날,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2권 p. 301)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사람이 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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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버린 책. 죽음.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품을 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뇌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때론 진실보다 사랑이 중요하듯. 작품의 의미보다 재미가 더 가치 있을 때가 있는게 아닐까? 죽음을 이야기 하는데 슬프거나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게 아니라 홀가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게하는 글. 살아있음이 즐거운 일임을 느끼게하는 소설이었다. 고전을 아주 쬐금 읽고 이런 이야기는 우습지만, 계속 느끼는 점은 신이 인간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하고 있고 천재적인 이들이나 작가들이 그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작가로서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대목들이 있었다. 죽음을 종착지로 생각하고 두려워 하며 가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라고 말이다. 그렇게 한 세대가 끝나고 또 새로운 세대가 생겨나고. 다만 함께 존재하는 다른 종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배려심도 가지고서 살아가라고. 너무 과거를 궁금해 하지도 말고 말이다. 결국 지금 살아있는 순간을 사랑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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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사후 세계를 다룬 소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작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로 저자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때문에 <죽음>이 보여준 상상력이 창의적이지는 않다. 사실 저자의 신작들 중 몇몇은 이전의 소재를 답습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맛보기는 어려워진 것일까.
비슷한 시기 정유정 작가의 신작 <진이 지니>가 비슷한 소재인만큼 비교도 되었다. 어느 소설이 우위에 있다 할 수는 없다. <진이 지니>는 읽다보면 작가의 화려한 말솜씨에 놀라게 되고 <죽음>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폭넓은 지식 스펙트럼을 맛 볼 수 있다. 공통점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다.
‘누가 날 죽였지?’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가 뱉은 첫마디다. 인기 추리 작가 가브리엘은 죽음에 관한 소설을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평소 작업하는 비스트로로 가던 중 갑자기 아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서둘러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거울에 자신이 비치지 않고 창문으로 뛰어내려도 이상이 없다. 죽은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매 뤼시 필리피니와 협업해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추리 소설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숨막히는 긴장감이 아닌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영혼 세계 묘사는 경쾌하고 흥미롭다. 토마스 에디슨, 코난 도일 등 역사적 유명인물들의 영혼으로 만나는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저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불교의 윤회사상처럼 한 세대가 끝나면 새로운 세대가 생겨나니 죽음을 두려워 말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며 한낱 미물인 인간으로 다른 생태종에 피해를 주기 말라고도 한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교조주의에 빠진 평론가와 순수문학 작가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만의 필력과 전개능력은 명불허전이다. 그의 팬이라면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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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베르나르 베르베르 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누가 날 죽였지?> 베르베르의 ‘죽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일 것이다. 이렇게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독자의 기대와 동시에 걱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옮긴이의 우려처럼 인상적인 첫마디에 비해 실망스러운 결말을 가진 소설들을 실제로 많이 접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베르는 그런 나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흥미로운 반전과 부드러운 결말로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렇듯 인상적인 첫 마디로 시작하는 죽음은 본래 프랑스어로 ‘저승으로부터’라는 제목이었다고 한다. ‘죽음’과 ‘저승으로부터’, 모두 내용에 적합한 이상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부터 인간의 죽음, 정확히 말하면 사후세계에 대한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모든 인간이라면 필히 겪게 되는 것이 죽음이고 그 뒤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 마냥 뚝, 하고 꺼지는 것일까?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래서인지 딱히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사후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때문에 사후세계를 다룬 수많은 웹툰, 영화, 소설 등의 작품을 봐왔지만 이번 베르베르의 ‘죽음’은 어쩌면 비슷한 작품들 중 현실과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들 사이에서 꽤나 인상적인 이미지가 남았다.
‘죽음’이 이렇게 인상적인 이미지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리얼한 영혼세계 묘사가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가브리엘이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의 뼈대를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 안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혼들의 세계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무대는 웹툰 ‘죽음에 관하여’나 ‘신과 함께’와 같이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 아닌 가브리엘이 살고 있던 그 세계를 그대로 작품 전반에 걸쳐 사용하였다. 때문에 우리는 큰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인간의 사후를 다룬 이 작품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영혼들의 세계를 굉장히 디테일하게 구상하였다. 작품 내에서 영혼들의 세계는 상위 아스트랄계, 중위 아스트랄계, 하위 아스트랄계로 구성되어있으며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영혼 사이에도 ‘오라’라는 경계선이 존재해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서로 접촉 할 수 없는 매커니즘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 모두가 알만한 유명인을 영혼의 형태로 등장 시키는 장면들도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서 코넌 도일이 처음 등장 했을 때는 책을 잡고 있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러한 디테일들이 나를 더욱 깊게 이 소설로 끌어들였다.
이번 소설이 저자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 소설인 만큼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소설에 많이 녹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문학과 과학, 그리고 죽음과 성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문학에 관해서는 저자자신과 흡사한 주인공이 등장한 만큼 주인공의 생각=저자의 생각 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1 p.18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강요받는 일이다. 선택은 곧 포기를 의미하며, 포기는 후회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가브리엘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문장이다. 실제로 우리는 글을 쓰며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주인공의 행동 하나가 소설의 판도를 뒤집어 버리기도 하며 글을 끝까지 다 쓴 후 ‘여기서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기서 저렇게 하는 게 맞았을까? 하고 되돌아보며 포기한 선택지에 대해 후회를 들어내기도 한다. 저자 또한 많은 소설을 쓰며 이러한 고민들을 접해왔으리라는 것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죽음1 p.98 책이라면 으레 따분한줄 알았는데 글자와 단어, 문장의 경계를 뛰어넘자 머릿속에서 영화 스크린이 펼쳐지더니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며 말하기 시작했어요. 평행세계로 들어간 기분이었죠.>-리쉬
소설에 푹 빠진 적이 있다면 이 또한 큰 공감을 살 수 있는 문장이다. (죽음을 포함해서)정말 잘 쓴 소설이나 흥미로운 소설을 읽을 때면 내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다. 정신없이 소설을 읽다보면 ‘아 내가 책을 읽고 있었지’하며 2,3시간 만에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저자는 우리에게 이러한 소설의 매력을 알려주고, 또 그러한 자신의 소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문학과 더불어 작품 속에서는 과학, 특히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가브리엘이 죽고도 그의 소설을 출판하길 바라는 편집자의 바람이 담긴 인공지능 프로그램, 가브리엘 웰즈 버추얼, 즉 GWV가 그것이다. GWV는 가브리엘의 문체를 따라하고 실제로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지만 결국 가브리엘(인간)을 대신하여 소설을 쓰지 못한 채 폐기된다. 이는 최근 들어 수많은 분야에 기계(인공지능)가 활용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리를 위할 뿐 기계(인공지능)가 인간의 생산 활동(특히 문학적인 부분)을 대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낸 모티프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작가가 우리에게 가장 전달하고 싶던 메시지는 여기서 들어나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인간의 죽음,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이다. 우선 죽음. 사전적으로는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챕터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때문에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이와 조금 달랐다. 실제로 저자는 최근 한국에서 진행한 강연회에서 ‘나는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밝힌바가 있다. 더불어 ‘나의 묘비명을 짓는다면 <나는 곧 돌아올 것이다>라고 짓고 싶다.’며 정말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죽음’은 주인공인 가브리엘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로 저자가 우리에게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서 더 나아가 저자는 소설 속에서 죽음에 관한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바로 ‘자살’과 ‘생명 연장(연명치료)’이다. 이 관점은 가브리엘의 할아버지인 이냐스의 입장에서 서술 되었는데, 이냐스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순간이 너무 괴로웠다고, 때문에 연명치료를 받는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바랐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이냐스에게서 얻은 가장 큰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 ’ 대부분의 죽음은 불현 듯,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들의 삶에 들이닥친다. 하지만 그런 죽음이 아닌, 마치 이냐스처럼 서서히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죽음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한다면?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이 그저 죽음에 가까워지는 삶을 유의미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아직 살 수 있음에도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가. 이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정답이 없을 것 같은 이 문제에 대해, 판단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누가 날 죽였지?”로 시작하여 “나는 왜 태어났지?”로 마무리된다. 저자는 ‘죽음’에서 죽음만큼이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와 성찰에도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죽음1 p.57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지?>-가브리엘 <죽음1 p.58 “마지막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죽은 자들이 더 살 수 있다면>-가브리엘 <죽음2 p. 182 ”살아있는 게 행운임을 깨닫는 건......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지.>-가브리엘 <죽음2 p.313 “나는 왜 태어났지?”>-가브리엘
가브리엘은 죽음을 경험한 이후 자신의 삶에 대한 수많은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또한 영혼이 된 초반부에는 지난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우리가 죽은 후, 지난날들에 대한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할까? 이 또한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 역시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영매 리쉬의 집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만들려면 육체를 잘 보살펴야 한다.>
또한 리쉬는 매일 아침 이런 문장을 되뇐다.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리쉬는 산 자들과 영혼들 사이에 존재하며 살아있다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꾸준한 운동과 채식주의 등 많은 노력을 하며 자신의 삶을 대한다. 저자 본인 역시 몸에 이상을 느낀 이후 꾸준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상위 아스트랄계에 다녀온 가브리엘의 깨달음 중 첫 번째 깨달음에서 완벽한 형태의 문장으로 나타났는데
<인간의 삶을 짧기 때문에 매 순간을 자신에게 이롭게 쓸 필요가 있다.>가 그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의 형태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이상적인 태도를 이야기에 부드럽게 풀어 넣었다.
저자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외에 내가 ‘죽음’을 다 읽고 주목한 것은 <죽음1 p.17>에서 가브리엘이 생각해내는 ‘지극히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 ’이다. 가브리엘의 머릿속에 떠오른 내러티브 구조는 크게 4가지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위대한 러브 스토리’, ‘서서히 밝혀지는 비밀’, ‘실현 불가능한 목표의 추구’, ‘배신에 뒤따르는 복수’까지. 나는 ‘죽음’에서 이 4개의 내러티브 구조가 전부 들어났다고 생각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위대한 러브 스토리는 자신의 우상인 헤디 라마를 닮은 리쉬를 바라보는 가브리엘이, 서서히 밝혀지는 비밀은 가브리엘을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과 범인의 실체를, 실현 불가능한 목표의 추구는 작품 속 가브리엘의 소설인 ‘천 살 인간’에서 나타나며 배신에 뒤따르는 복수는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사미에게 배신당한 리쉬와 그녀의 복수가 각각의 내러티브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저자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이외에 작가로써 가지게 되는 플롯에 대한 고민, 혹은 고전적인 내러티브에 대한 다양한 시도 등을 소설 속에 함유 하여 작가라는 직업이 가지게 되는 고뇌를 풀어냈다.
베르베르의 이번 소설인 ‘죽음’을 통해 또 하나의 사후 세계에 관한(그것도 매우 사실적인) 관점을 보았다. 아까도 말했듯, 꽤나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기에 오래도록, 어쩌면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이 작품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구절 하나를 적으며 이번 리뷰를 마무리하겠다. 죽음1 p.94에서 사미가 리쉬에게 건네는 대화중 일부이다.
<사람은 어릴 때 받은 사랑만큼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어릴 때 부모한테 받은 뽀뽀가 마치 포커 칩과 같아서, 어른이 되어 사랑이라는 포커 게임을 할 때 그걸 쓸 수 있다고 했어요. 어릴 때 받은 포커 칩이 많을수록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개인적으로 너무 기억에 남아 저자와의 만남에서 꼭 질문 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저자 본인도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인지. 혹시 내가 다음에 다시 베르베르 작가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 부분에 대해 꼭 질문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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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과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아우르는 또하나의 역작 <죽음>이 출간되었다. 작 가만의 상상력의 세계, 즉 저승의 다양한 형태들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이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와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한 작품. 책을 읽는다는 즐거움을 알게 한 작품이었다.
'누가 날 죽였지?'라는 첫 문장으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소설가 가브리엘 웰즈. 작가는 가브리엘 웰즈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 프랑스 장르문학계를 비판하고 그가 꿈꾸는 상상력의 세계를 다시한번 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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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리뷰 중반 이후는 소설을 읽은 분만 읽어 주세요)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난 이 순간의 행복과 고통만으로도 충분 아니 벅차다. 그러나 인류 역사와 신화, 종교를 보면 불멸에 대한 열망은 쉽게 사라질 것이 아니다. 불로장생약을 찾는 고전적 해법부터 천국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해법, 노화 방지와 냉동 보존이라는 과학적 해법까지 인류는 다각도로 방법을 찾고 있다. 이건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제프리 웨스트는 『스케일』에서 포유류, 어류, 조류, 식물, 세포, 생태계의 망 전체의 생물이 일정 수명을 살다 죽는 메커니즘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인간의 수명이 100년 안팎에 놓이는 것은 생태학적 생물역학?기하학?동역학 한계 때문인데, 한마디로 죽음은 진화의 최적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귀결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이 소설에서 과학적 통찰을 최대한 담았다. ①“사람들을 구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 그건 대단한 오만이에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닿을 수 없는 세상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소꿉놀이하듯 사소한 정의를 구현하려는 짓은 이제 그만둬요.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 봐야 고칠 수 있는 거예요. 단시간에 변혁을 이루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작은 변화와 성과를 소중히 여겨요. 진화는 덜컹거리고 요동치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당신들 위에 있는 상부를 믿어요. …(중략)…각자의 자리에서 노력은 해야겠지만 절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세계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데는 모종의 숨겨진 의도가 있으리라는 걸 기억하라는 말이에요. 실수 없이 앎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요. 경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 우리는 누구나 경험을 해봐야 해요. 그러고 나서 그 경험의 결과물을 확인해야 비로소 행동을 바꿔야겠다는 자각이 오죠. 그래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돼요.”(드라콘) ②“난 과학자예요. 무수한 경이를 선사하는 실험을 믿죠. 세계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예요. 반박할 수 없는 물리 법칙과 생물 법칙에 따라 움직이죠. 이 세상에 초자연적인 건 존재하지 않아요. 무지해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요. 그래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자신들이 만들어 낸 망상을 믿으면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죠. 하지만 확고부동한 사실이 존재해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확인 가능하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 말이에요. 우리는 태어나, 늙고, 죽고, 썩어 먼지가 된다는 사실, 그렇게 결국 언젠가는 모두에게 잊힌다는 사실. 이게 바로 그 진실이에요. 좋은 일이죠. 우리의 존재로 지구가 비좁아지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마법처럼 남아 있는 영역은 단 하나, ? 이것만도 어디예요! ? 바로 꿈이에요. 눈을 감기만 하면 되죠. 게다가 공짜이기까지 해요.”(토마스) ③“지금까지 우리는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 즉 화학과 물리만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나는 물질의 표현 형태에 이것 말고 한 가지가 더 있다고, 다시 말해 세 번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해요. 말러의 교향곡 디스크를 예로 들어 볼게요. 당신이 이 디스크라는 물체를 집어 산산조각 낼 수 있어요. 하지만 분자 속 어디에서도 교향곡의 음은 발견할 수 없죠. 당신한테 물어볼게요. 대체 디스크 속 어디에 음악이 있는 거죠?” “글쎄요.” “비물질 파동이기 때문이에요. 새를 예로 들어 볼까요. 새의 뇌세포나 DNA 어디에서도 새가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는 찾을 수 없어요. 그리고 정확히 똑같은 DNA를 가진 쌍둥이 새들도…….” “……노랫소리가 다르다는 말이죠?” “내가 하려는 말을 금방 이해했네요.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아인슈타인의 뇌세포를 분석해 봐도 E=mc2이라는 공식은 찾을 수 없어요. 당신의 뇌와 DNA 속을 뒤져 봐요, 당신이 꾸는 꿈이 나오는지. 이게 내가 발견한 거예요. 어떠한 물리학과 화학의 도구를 사용해도 감지할 수 없는 다른 것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 이 세 번째 형태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 “그게 파동이라는 거예요?” “그래요. 입자성은 없지만 물질에 작용할 수 있는 파동 말이에요. 가령, 말러의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나한테서 엔도르핀이 분출돼요. 새 노랫소리는 짝짓기 욕망을 일으켜 교미를 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알이 태어나죠. E=mc2 공식은 원자력 발전소를 짓게 해줘요. 거기서 전기를 만들어 우리 집에 불을 켜게 해줄 수도 있고, 원자 폭탄을 제조해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깊이 따져 보면, 이 모든 것의 출발은 바로 하나의 생각이에요.” “그건 다름 아닌 파동이죠.”(토마스와 뤼시의 대화) 삶의 추동도 되고 반동적 결과이기도 한 죽음은 베일에 싸여 있어 우리에게 늘 이야깃거리다. 정말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일까. 베르베르는 영매, 소설가, 과학자를 현실계의 주요 캐릭터로 잡고 삶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를 살펴봤다. 과학자와 배우라는 양면의 삶을 산 헤디 라마를 닮은 영매 뤼시는 인류가 지금껏 취해온 오랜 역사를 대변한다. 합리주의자 토마스는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는 기계인 네크로폰을 개발해 의문을 풀려 한다. 네크로폰은 에디슨이 개발하려 했던 거라 과학과 초자연적 영역이 멀리 있지 않다는 함의도 보여준다. 과학자 토마스와 소설가 가브리엘이 쌍둥이인 것도 이런 맥락의 연장선으로 베르베르가 설정했다고 본다. 인간의 상상력을 담당하는 작가 가브리엘 웰즈는 쌍둥이 형 토마스의 과학적 분석을 조합해 소설로 구현해보고자 했다. 네크로폰도 가브리엘의 소설 『천살 인간』도 완성되지만 현실에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에 따라 폐기된다. 비밀을 알아내고 미래를 내다보는 게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 (베르베르 작가에 의한) 신의 결정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누가 날 죽였지?”의 질문을 감당할 존재는 ‘신’이라는 작가의 이 설정과 결정이다. 인본주의에 대한 비판, 정통 문학과 비주류 문학으로 재단되지 않는 문학의 다양성 추구, 죽은 자와 산자 또 남녀 구분 없이 이해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고루 담은 소설이 이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처리되는 건 너무 쉬운 방법이고 진부하다. 신(이 소설에서는 '메트라톤'으로 언급) 가브리엘 소설의 단점으로 거론한 것들이 사실은 베르베르가 자신의 핸디캡으로 직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선수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영리한 작가!). “자네가 내 최애 작가는 아니야, 그건 인정하겠네. 그래, 절대 그렇지 않아. 난 자네 문체가 마음에 안 들어, 너무 건조하지. 문장도 너무 짧고. 게다가 독자들에게 소설 속 장면들에서 거닐 시간을 주지 않고 본론으로 직행하지. 은유도 서정성도 부족해. 결말은 또 어떻고! 아이고, 가브리엘! 마지막 장면들을 조금만 더 다듬고 매만지지 그랬어! 자넨 상상력이 강점인 사람인데 어쩌면 그렇게 과감하게 결말을 쓰지 못하나! 결말이 너무 뻔해! 소설마다 내가 마지막 장면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지. 자네가 마지막에 가서 터뜨리는 사실들이 나한테는 하나도 새로울 게 없었다고.”(메트라톤) 그럼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똑똑하고 재기 발랄한 작가다. 사실과 허구를 맛있게 버무려 요리하고, 프랑스 문학계뿐 아니라 문학 판의 부조리함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며, 가상의 캐릭터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과학 에세이와 동명 제목)을 삽입해 과거의 역사와 비교하며 최근 주목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과학 기술이 우리 삶에 접목될 여러 가정들을 구현해보고, 죽음 뒤가 어떨지ㅡ육신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비교, 궁금한 인물(나폴레옹, 코난 도일, 토마스 에디슨, 짐 모리슨 등)과의 조우, 성별 바꾸기, 여러 모험, 원수에게 복수하는 계획 등ㅡ 마음껏 추리해가며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이 삶의 소중함을 반추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문단에서는 평가 절하되는 작가인 가브리엘 웰즈는 “제가 인정하는 비평가는 단 하나뿐이에요. 바로 시간이죠. 작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건 시간이에요. 고만고만한 작가들을 사라지게 하고 혁신적인 작가들만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건 시간이라는 비평가가 지닌 힘이죠”라고 말했다. 그 말을 인간 삶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살아남아서 인간의 위대함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굴곡 속에서 종결된 어떤 삶이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모습. 그게 인간에게 어울리는 모습 아닐까. 흔적도 사라짐도 의미로는 같다. 의미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산사람의 선택적 행위에 지나지 않다. 베르베르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딜레마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영매 뤼시는 “우리는 스스로 만든 자신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통찰도 있고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대단한 능력자임에도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 믿고 찾았던 사람이 사기꾼이었다는 것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영원히 산다고 인간의 이런 허점이 완벽히 개선될 리 만무하니 삶은 늘 문제 해결의 연속일 것이다. 가브리엘의 『천살 인간』의 메타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유령들은 시간을 견디는 소일거리를 찾는 게 가장 고민인데 가브리엘은 그것이 시간의 무한성이 지닌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베르베르는 할아버지 이지도르 베르베르의 연명 치료와 죽음을 겪으며 『타나토 노트』, 『천사들의 제국』, 이 소설까지 집필하게 됐다. 이 소설 속에서 가브리엘의 창작 영감의 조력자이자 가브리엘 살인 사건 추적의 도우미로 나오는 할아버지가 과거의 답답한 삶을 한탄하며 환생을 코믹하게 선택하는 건 작가의 애정 어린 배려였을 수도 있겠다. 삶과 죽음의 본질을 자주 생각한다. 최근 아끼는 친구의 죽음을 겪고 여전히 심경이 복잡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어떤 치료冊처럼 선택했다. “이야기 첫 머리부터 해결책이 숨어 있는데 독자들은 모르고 지나가는” 건 작법이나 마술뿐 아니라 삶에서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 정해진 대로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친구와 식사를 하는 평범한 일상부터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나날, 만지고 냄새 맡고 많은 것을 느끼는 감각의 기쁨, 살면서 체험한 행복한 기억들이 우리를 한순간에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단 한 번이기에 영원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생각의 전환으로 지금 이 삶을 즐겁게 살자는 말은 뻔해서 말의 힘도 없다. 스스로를 매 순간 깨우는 각성은 각자의 몫이다. 베르베르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스스로도 점검해본 거라고도 생각한다. 현실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죽음 이후의 삶은 더 나을까. 삶과 죽음은 함께 가고 끝나는 여정.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비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자연스럽다. 오늘에 더 충실하며 오늘을 사랑하며 눈 감고 싶다. 내가 나 이거나 아니거나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행복하고 싶은 욕구를 계속 잇고 싶은 거겠지. 오늘은 너무 더워서 내가 나인지 아닌지 혼미하다. 죽은 가브리엘이 무척 먹고 싶어 한 시원하고 달콤한 음식을 먹으며 우선 오늘 밤을 음미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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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시작부터 죽고, 영혼인 상태로 자신을 죽인 사람을 찾는다는 플롯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누가 자신을 죽였을지 주위 사람들을 살피고 탐색하고 하는 것도요. 하지만.... 2권으로 갈수록 재미도가 급 하락해요.. 여자주인공의 몸에 들어간 남주인공이 자기 이상형의 몸에 들어오다니 하며 즐거워하는 부분이 별로였고, 죽인 사람이 밝혀지는 과정은 더 더 별로였어요. 범인의 존재는 특히나..... 이게 뭔가 싶은 정도 ㅋㅋㅋㅋㅋ 그냥 그렇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