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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구산 스님 문하에서 4년간 선불교를 공부했으며 오랫동안 불교 명상 지도자이자 자유 저술가로 활동해왔다. 저자는 [붓다는 없다], [연꽃 속의 보석 이여]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단다. 그는 불교 경전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불교도임에도 특정한 종교 단체나 학문에 얽매이거나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어떤 종교적 구원에 대한 희망에 의지하는 대신, 그들은 혁신적인 작품들 속에서 아주 찰나적인 순간이나마 세속적인 구원을 성취한다. 그들의 절망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절망으로 승화된다. 보들레르 역시 [악의 꽃] 서문에서 이렇게 자백하고 있다. "악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 만했고, 편안한 즐거움이었다."-68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들 모두에게는 선과 악 혹은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이 늘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스티븐 배철러는 ‘세상의 고통은 악마의 지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질 속에 ‘악’이 내재되어 있어 인간은 ‘악마’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숙명이며, 따라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배철러는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고 사랑과 자비의 길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악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에 이르는 거의 모든 종교와 신화, 그리고 보들레르, 카프카, 막스 베버 등의 문학, 사회, 철학 등을 통해 ‘선과 악’의 패러다임이 인간 사회를 어떻게 지배해왔는지 펼쳐 보여주고 있다. 마라에 대한 붓다의 투쟁과 사탄을 물리치는 예수의 투쟁,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과 티베트 불교 역사서에 전해오는 신화 속 악마와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에 등장하는 사탄의 모습을 비교하고 공통점을 찾는다. 흥미롭게도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은 매우 닮아 있었다. 우리는 책에서 들려주는 파스칼, 밀란 쿤테라, 카프카 등의 작품과 성경들을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선과 악의 본질에 대해서 조금 더 쉽게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알것도 같고 또 헷갈리기도하는 시간이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삶에서 매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 갈등, 고통, 공포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면서 좀 더 깊이 있는 사고를 하도록 이끌어주는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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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선과 악의 얼굴-스티븐 배철러 인간의 본성인 선과 악을 깊이 있게 탐구하다.
인간의 본성은 선인가? 악인가? 오랜 시간에 걸친 이 논쟁은 인간의 삶의 근원을 파헤치고 답하는데 많은 답변을 제공해 왔습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이해를 위해 저자 스티븐 배철러는 불교적 관점을 중심으로 인문학과 과학 그리고 고대종교와 유일신교를 예로 고통의 근원을 바라봅니다. 삶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중도적 입장에서 전하는 깊이 있는 성찰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변화와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잠시 살펴 봅니다. ![]()
<고통과 쾌락이 주는 삶의 악마적 딜레마가 선과 악의 얼굴에서 발견된다.>
스티븐 배철러는 영국 출신의 불교 명상 지도자이자 자유 저술가입니다. 저자는 한국 삼보 사찰 가운데 승보사찰의 방장 구산 스님 문하생으로 4년간 선불교를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선과 악의 두 얼굴>에서 불교적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중도적 자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피력하고자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입장은 특별히 어느 종파와 종교성에 구애 받지 않는다를 우선적으로 하되 종교적 이해와 인문학과 과학적 개념에서의 수반되는 선과 악의 개념은 수용한다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저자는 각각의 종교의 구별하되 하나의 통합적 개념인 고대 종교관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선과 악의 개념이 각각 어떻게 이해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성찰합니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선과 악의 특징을 형상화 시키고 인격이 반영된 '마라'와 '사탄'의 특징 가운데서 선악의 개념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이는 단순히 선과 악을 추상적 개념으로만 이해하는데서 오는 선악의 개념 이해에 대한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독자로서 저자의 이러한 비교종교학 및 사상의 통합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 정신은 미처 삶의 본질과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에게 폭 넓은 개론적 의미로서의 선악의 개념을 배우는데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대종교로부터 그 뿌리를 모두 연결시키는 작업은 종교적 특징과 더불어 각 종교의 고유한 발상에 대한 이해를 연결하는데 있어 무리함이 따르는 부분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하나의 예로 욥기의 욥의 고난과 선과 악의 대화 목록에서 욥기의 전체적인 주제와 사상적 반응보다는 이를 하나의 인간적 딜레마에 미치는 선악의 영향력으로 축소한것은 종교적인 주제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부족한 부분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숙명' 혹은 '운명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인간의 본질은 악하다'라는 생각에 근거한 '선과 악의 의미'와 인간의 고통의 근원에 접근하는 색다른 접근법이 흥미로운 재미있는 책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한 극단적 위치를 고민하면서 이 둘이 서로 공존하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주장들은 '악'을 수용하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한계가 결국 또 다른 인간의 삶의 지평으로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이를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행복을 추구하는 요즘의 시대적 삶의 소망과 어느정도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권의 책이 모든 삶의 근본적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악'과 '인간'의 관계와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많은 생각의 길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 봄직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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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배철러의 선과 악의 얼굴은 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읽기 쉽지 않다. 불교에서도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동시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스티븐 배철러는 대승불교인 티벳불교와 우리나라 선불교의 수행자였고, 나중에 환속한 이후에는 초기불교에 대해 재가가 입장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책에서 두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쉼없이 등장한다. 불교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그의 다른 책인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과 붓다는 없다를 먼저 읽으면 이 책을 읽기가 수월할 듯하다. 스티븐 배철러는 종교가 아닌 회의주의 또는 불가지론 적인 관점에서 불교를 바라본다. 불교에서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요소를 걸러내고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불교의 수행 및 태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부처에게 나타난 마라는 부처에게 무엇을 왜 시험하는가? 이에 대한 저자만의 독특하고 설득력있는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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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6 모욕을 모욕으로 되갚으며 서로 미워하는 감정을 부채질하는 대신, 상처 주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타인의 절실한 부탁을 경청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 친밀감을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자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도 깜짝 놀랄 방법으로 자유롭게 열린 공간 속에서 타인을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곤경에 처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을 쉽게 다시 회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타인과 고통을 공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 타인의 느낌과 감정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타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가 그 자신을 알고 있는 방식으로 내가 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줄긋기가 어렵다. 내용이 연결되어 줄을 그으면 한 단락을 다긋게 된다. 내가 불교일 뿐 아니라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받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고민했다. 저자 스티븐 배철러는 마치 내 질문을 알고 있다는 듯이 책에서 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위에 인용했던 176쪽, 177쪽은 가장 와닿은 페이지이다. 이 두페이지는 거의 모든 문장에 줄을 그었다. 그리고 내 생각을 적었다. 그래서 두번째 읽을 때는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다시금 되새기며 읽게 되었다. 저자는 영국에서 태어나 인도로 출가했다. 티베트에서 8년, 한국에서 4년간 선불교를 공부했다. 오랫동안 불교명상지도자이자 자유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p.177 우리는 타인과의 대면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타인과의 만남은 결코 어떤 '불변의 사실'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친밀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의 만남이다. 흔히 우리는 '닫힌 사람' 또는 '열린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 사람이 '입고 있는 갑옷의 틈새'를 찾아 서로 '통하려고' 노력한다. 사람은 하나의 길과 같다. 그리고 사람은 저마다 초대할 수 있고 초대받을 수도 있는 열린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모르는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항상 서먹함을 개고 서로 친밀하고 신뢰하는 사이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타인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나도 타인을 나의 삶 속으로 초대하면 된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상호 이해를 추구하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삶의 제1장이 되고, 꿈속의 등장인물이 될 것이다. 배철러는 인간의 자아야말로 악마의 본질로 본다. 존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악마의 유혹에 의지해왔다. 우리의 강박적인 행동, 탐욕과 폭력, 타인에 대한 파괴적인 행위 등은 악을 조장하는 마라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악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선과 악은 대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한 존재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다른 이보다 더 깨치게 되는 것이니 타인을 더 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간단하게 말하면 "너는 책도 많이 읽으면서 이것 밖에 못하니?" 그것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해탈을 바라는 것이다. 단지 책을 많이 읽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은 해탈과 관련이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을 볼 기회가 더 많아지는 것 뿐이다. 이 책 또한 그러하다. 나를 들여다볼 기회를 주는 책. [선과 악의 얼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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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얼굴>은 소담출판사의 꼼꼼평가단을 하면서 읽게 된 책이다. 왠지 낯설게 다가오는 표지는 마치 야누스를 연상시킨다. 먼저 이 책을 쓴 스티븐 배철러에 대해 좀 알아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기에, 어떤 사람인지 미리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력이 화려한데, 조금은 특이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단히 소개해보자면,영국에서 태어나 10대에 인도로 출가, 티베트에서 8년, 한국 송광사 구산 스님 문하에서 4년간 선불교를 공부했다. 송광사 출가 시절에 만난 마틴 배철러와 결혼해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불교 명상 지도자이자 자유 저술가로 활동해왔다. 최근에는 테라와다 불교의 니카야 경전을 새롭게 해석, 종교화 우상화되기 이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인간으로서의 붓다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붓다는 없다>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작가라고 한다. 태철러는 불교도로서 불교 경전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지만, 특정한 종교 단체나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불교적 무신론자이자 명상 지도자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연구했고, 이러한 결과물이 <선과 악의 얼굴>이라는 책으로 남은 것이다. <선과 악의 얼굴>은 인간의 본성인 '선', 그리고 '악'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여, 인간의 고통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해낸 책이다. 그는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 세상의 혼돈과 갈등 등 모든 고통의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악마의 지배 때문이라고 본다. 이를 이해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데,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 같다. 맹목적인 신앙이나 명상 수행 대신,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이해를 통해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추상적이고 조금은 어려운 얘기들이라서 깊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도움이 되는 얘기들이라 하나하나 생각하고 새기면서 읽었던 것 같다. 굳이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는데 거부감이 들지는 않을 것 같다.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종교와 신화, 그리고 카프카, 막스 베버 등의 문학, 사회, 철학, 진화 생물학 등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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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내면에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리 낯설지 않다. 저자 스티븐 배철러는 10대에 인도에서 출가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송광사에서 선불교를 공부했기 때문에 기독교적 악인 사탄보다 불교적 악인 마라(마)에 집중하여 악을 설명한다. 사탄과 마라는 의인화 된 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악마를 뜻하는 '디아블로diablo'가 '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인 것처럼, 저자는 악이 우리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우리를 방해하는 요소들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자아는 우리의 상상의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념 또한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나온 것이라는 점을 소통의 장애물로 여기기도 한다. 그는 타인이 없는 자신은 무의미하다고 보기 때문에 글의 후반부에서는 소통을 강조한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타인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배려하며 이해하고자 할 때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악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치거나 외면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
저자도 번역가도 종교 서적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하고 있고 저자 본인이 굳이 따지자면 불교적 무신론자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신론자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한 내게는 아무래도 종교적으로 읽혔다. 꽤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음에도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고 저자의 생각이나 뒷받침 하기 위해 들여온 이야기들에 크게 감흥을 얻지도 못했다. 하지만 평소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를 여러 종교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은 꽤 의미있게 느껴졌다.
'나'라고 하는 것이 '영원하고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자아'라고 하는 과장된 믿음은 상대적인 영원성에 불과하다. 그것은 변화와 불확정성의 테러로부터 나는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듯하다. 나의 영혼은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절대적인 존재로서, 이번 생은 그저 잠시 몸을 받아 살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그저 실존적 여정(삶)의 모순들을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영원하다고 여겨지는 자아는 무언가 가장 중요한 결핍을 채워줄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고민과 갈등의 산물이다. (77쪽)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변하며(無相), 불안정하여 결국엔 괴로움이 되고(苦), '나'라고 할 만한 자아의 실체가 없다(無我)는 사실을 체득하고 나면, 이 세상의 모든 실체는 영원하거나 확정적인 것이 없으며, 불확정적인 '공(空)'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 '나' 혹은 '나의 것'이라 분명하고 확실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갈애와 집착의 이유도 사라진다. (104쪽)
영원한 안정성과 행복을 추구하는 자아 혹은 사회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없다. 다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상이 그런 행복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이 뿌리 깊은 환상에는 생물학적이며 심리학적인 근거가 있다. 인류의 진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미래를 기대하고 계획할 수 있었던 개념화의 능력이며, 이를 통해 인류는 동족과 친족들이 살아남고 번창하기를 기대해왔다. (149쪽)
누군가를 나의 삶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놀라운 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친밀함은 타인이 당신에게 신비한 존재로 계속 남아 있을 때에 한해서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가까운 사이로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은 모르는 부분은 남겨두고 서로 존중하며,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며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간격 때문에 만남은 늘 새롭고 소중할 수 있다. (177쪽)
자아에 대한 실천적 개념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각자의 행위가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는 자신의 역할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똑같이 개방적이고 관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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