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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양분하고 있는 북쪽에 있는 나라로 추정되는 국가에서) 리나는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어 '대륙'으로만 표현되는 국가에 도착한다. 극도의 긴장과 불안 속에서 굶주리고 신발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이동해서 대륙의 서남쪽 국경 지대에 다다를 즈음 리나에게는 현실이라기에는 너무도 허구같은 삶의 문이 열린다.
얼마전 본 중국내 탈북자를 다룬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대륙을 떠도는 처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보자니 푸근한 오리털 이불을 덮고 두 다리 쭉 뻗고 TV를 시청하는 내 자세가 몹시도 불편해져왔다. 이내 연예인들이 나와서 웃고 떠드는 채널로 돌려버렸는데, 한껏 치장한 세련된 'P국'(소설 속에서 탈북자들이 최종 정착지로 생각하는 나라-남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과 방금전 다른 채널에서 보았던 두려움에 사로잡힌 추레한 모습의 사람들 사이에 닿을 수 없는 듯한 거리가 느껴졌다. 시사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모자이크하고 음성 변조한 그들의 삶은 논픽션이자 픽션이었고, 리나의 삶도 픽션이자 논픽션이었다.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까봐 불안에 떨며 숨어지내고, 탈북 과정에서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모르고, 농촌으로, 술집으로 팔려가 죽도록 일만하다가 자식마저 버리고 도망쳐나온 여자가 있는가 하면, 탈출 과정에서 몸은 이미 골병이 들대로 들었지만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한 채 남쪽 나라행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현실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지만 '리나'를 탈북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을 듯싶다. 모든 정황이 탈북자임을 적시하고 있지만 실상 소설 속에서는 리나 일행이 어디서 탈출했는지, 어디로 가려는지, 어디에 머물렀는지 등 국명과 지명은 거의 등장하지 않은 채 대륙, P국, 대륙의 북쪽 나라, 일년 내내 추운 나라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아무리 숨기려해도 독자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가늠된다. 그런 점에서 모르면 모르는대로 픽션이 되고 알면 아는대로 논픽션이 되는, 소설도 되었다가 (조금 억지스럽게 주장하자면) 르포라이터 비스무리한 글도 될 수 있다.
탈출(탈북)이라는 특정한 상황을 제외하면 결국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매매춘, 노동력착취, 환경오염, 다국적기업의 횡포, 양극화현상, 살인범죄, 마약, 난민의 인권실태 등-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일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탈출(혹은 탈북)'은 이런 문제들을 바라보기 위한 열쇠와 같은 장치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탈출자(혹은 탈북자) 리나를 통해 본 '지금-여기'의 모습 말이다.
난민... 참혹한 컷. 한 손엔 좌절을 품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희망을 잡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 <리나>는 '탈출'이라는 강줄기를 따라 무수한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그 이야기들은 리나의 열두권도 더 쓸 수 있는 인생역경이 압축된 에피소드의 연결이다. 리나는 바닥으로 떨어진 생(生)일지언정 어떤 상황에서도 좋든 나쁘든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구축해나간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외부적 요인으로 수동적으로 전락해버린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한 탈출(북)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리나에게서는 비관하나 포기하지 않는 자기애를 느낄 수 있다. 국경을 넘어 대륙을 한바퀴 돈 듯한 여정을 거쳐 부모형제가 있는 P국 대신 한때 유럽정복의 야심을 품었던 대륙의 지붕같은 나라로 월경하는 리나에게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이길 바라는 것은 싸구려 동정이려나!
리나와 비슷한 인생 철로를 밟은 소녀로 바리(황석영의 <바리데기>)를 들 수 있겠다. 고향땅을 떠나 가진 것 없이 타국을 떠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역일 테지만 십대 소녀들에게 더욱 가혹할 것이다. <바리데기>의 마지막 문장에서 바리의 앞날에 안도감을 느꼈다면 짖궂고 호기심 많은 입체적인 인물인 리나에게는 또 어떤 시련과 역경이 펼쳐질까 살짝 불안해지기도 한다.
눈앞의 현상을 그대로 찍은 후 보정 및 편집 과정을 거치지 않은 컷들 같은 문장이 리나의 얼어붙은 삶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강영숙 작가님의 다른 책에도 슬쩍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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