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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작가가 스스로 밝혔듯이, 이 소설은 이른바 실존주의(實存主義)문학의 영향을 받고 인간의 존재가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문학적으로 소화시켜 보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그러기 때문에 작가의 철학적 사상적 깊이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잘 전달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가 6.25전란이라는 이 참혹한 전쟁 경험에서 얻은 존재에 대한 회의와 자학과 비정을 하나씩 하나씩 파고드는 그 거친 육성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동호와 누혜이다. 이들은 다같이 공산주의자도 아니면서 전쟁터에 끌려 나와 포로가 되고 만다.
그때부터 이들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노예 아닌 노예가 되어 온갖 수모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는 중에 누혜가 수용소 철조망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소설 첫머리에서 토끼가 감방을 탈출하려다 죽는 것처럼, 누혜도 그렇게 죽고 마는 것이다. 결국 누혜는 자유를 갈망하다 죽음으로써 다시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동호는 누혜의 죽음으로 하여 자유를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 제명(題名)을 <요한 시집>이라 한 것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요한을 구세주라 믿었지만 정말 예수가 나타났을 때 요한은 길을 닦고 죽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갈망하는 <자유>도 그 뒤에 올 그 무엇을 위해서 길을 준비하는 존재에 불과하므로, 그 무엇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자유>도 죽어야 한다. 즉 요한적인 것이다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여기는 땅의 끝, 땅이 시작되는 곳. '온 시간'과 '올 시간'이 이어진 매듭. 발톱으로 설 만한 자리도 없다. 여기는 경계(境界)였다.그러나 얼마나 넓은 세계이냐. 이 옥토(沃土), 생산(生産)의 안뜰.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여기서 흘러나가는 온돈(溫沌)…….이 세계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없다. 무수의 율(律)이 마치 궁륭(宮隆)의 성좌(星座)처럼 서로 범함이 없이, 고요한 시(詩)의 밤을 밝히고 있다. 왕자(王者)도 없고 노비(奴婢)도 여기에는 없다. 우려(憂慮)가 없다. 그러니 타협(妥協)이 없다. 풍습(風習)이 없으니 유폐(幽廢)가 없다. 만물(萬物)은 스스로가 자기의 원인(原因)이고, 스스로가 자기의 자[尺]이다. 태양(太陽)이 반드시 동쪽에서만 솟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는 없다. 늘 새롭고 늘 아침이고 늘 봄이다. 아아 젊은 대륙(大陸)…….언제면 왜인(倭人)의 섬에 표류한 걸리버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날 것인가. 탈출(脫出)할 수 있을 것인가……. 파괴(破壞)해야 할 것은 바스티유의 감옥(監獄)이 아니라, 이 섬을 둘러싼 해안선(海岸線)이다. 나는 다시 기다릴 수 없다. 즉시 나는 나를 보아야 한다. 마지막 승리(勝利)를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