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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무가 있다 <나무가 있다>를 읽고 윤동주 시인의 서거 81주기를 맞아 그를 그리며 <나무가 있다>를 읽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 (일 년의 시간을 들여 몇 줄의 글을 이루어낸 시인과 달리 고작 몇 시간 안에 '쉽게 씌여진') 서평을 올리려 한다. 책은 윤동주(이하 ‘동주’라 부른다. 그러니 한결 더 가깝게 느껴진다)가 쓴 시가 아닌 「종시」, 「달을 쏘다」, 「별똥 떨어진 데」, 「화원에 꽃이 핀다」 등 네 편의 산문에 대하여 저자가 해석하고 해설한 것들이 담겨 있다. 대체로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요즘과 비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 감각이 뛰어나 곱씹다보면 시나브로 그의 낯선 산문에 익숙해진다. 「종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종점(終點)이 시점(始點)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 날마다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를 오가며 전차를 타고 내린 뒤 다시 기차로 갈아타던 동주에게 ‘종시’는 일상이자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라는 시간과 탈것들이 서고 멈추는 정거장이라는 공간처럼 시점과 종점을 동시에 가진 시공간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를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의 눈에 비친 전차 안 사람들ㅡ아이부터 어른까지ㅡ과 정류장에서 일터로 가려는 여공들의 표정에는 근심, 걱정과 삶의 고단함만이 가득할 따름이다. 경성(지금의 서울) 거리 한가운데 난 터널을 보면서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터널을 지나 마주한 노동자(를 그는 ‘건설의 사도(使徒)’라 부른다)에게서 새 빛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름답고도 잔혹한 세계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쓰며 그것을 글로 써내려갔던 동주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달을 쏘다」는 어느 가을날, 잠 못 이루는 밤에 기숙사 방에서 룸메이트의 숨소리를 배음으로 깔고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 같으면서도 소중한 우정에 대하여 생각하던 동주가 마음이 달떠서 밖으로 나와 달과 맞서는 글이다. 시 「자화상」의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는 구절을 변주하여 산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이라고 저자는 짐작한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三更)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 이 문장에도 ‘나무’가 등장하나 이 글에서는 ‘달’에 초점을 맞춰보자. 못 속에 비친 달을 향해 돌을 던져 ‘산산이 부서’트린 후 느낀 ‘통쾌’함도 잠시, 밤하늘에 여전히 떠 있는 달을 보고 나뭇가지에 띠로 줄을 매어 재차 활을 쏘는 동주의 심정을 이렇게 읽어낸다. 자기 내면에서 깨어 부수어야 할 대상 혹은 거짓된 희망같이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라고. 「별똥 떨어진 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살아생전 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의 동시 「별똥」의 “별똥이 떨어진 곳 / 마음에 두었다 / 다음 날 가 보려 / 벼르다 벼르다 / 이젠 다 자랐소”에서 착상하여 글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저자는 추측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서시」를 다시 읽으면서 새벽이 오면 사라지는 별과 죽음을 향해가는 우리의 삶과 닮은 꼴임을 떠올린다. 여기서 핵심은 유한한 삶을 얼마나 유의미하게 살아내느냐가 아닐까 싶다. 별의 ‘떨어짐’에 주목한 저자 덕분에 아무 준비 없이 이 땅에 ‘피투(彼投)’된 인간이 살면서 무언가를 기획하며 자기 몸을 던지는 ‘기투(企投)’하는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을 덤으로 배우게 된다. 밤이 지나 별이 지는 새벽이 와도 암담함은 사라지지 않지만, 동주는 자신의 오랜 이웃이자 벗인 “나무가 있다”며 안도한다. 「나무」에서 “나무가 춤을 추면 / 바람이 불고 / 나무가 잠잠하면 / 바람도 자오”라고 말한 바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춤출 수 있는 능동성을, 하늘(태양)을 향하는 ‘향일성’을 나무로부터 본받고자 한 것이다. 이는 ‘관념적’임을 넘어 나무처럼 ‘현실’에 깊이 뿌리내렸던 동주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저자의 해석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 동주가 휴강시간을 '먹을 때'면 화원에서 꽃들과 대화하며 생각한 것들이 피어난다. 그가 화원을 즐겨 찾은 까닭은 교실이나 책이 아닌 그 밖, 그러니까 자연에서 소소한 행복과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꽃이 피듯, 자신의 글도 다듬기를 거듭한 끝에 겨우 몇 줄을 이뤄낼 수 있다고 토로한다. 저자는 이런 동주의 ‘온몸으로’ 글쓰기 자세를 철학자 니체와 시인 김수영의 그것과 견주기도 한다. 특히 동주가 배운 동양사상 가운데 음양의 조합에 따라 우주의 구조를 설명한 『주역』의 영향이 이 글에 배어 있다는 저자의 견해가 퍽 흥미롭다. 글의 시작과 끝을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라는 문장으로 구성하여 수미상관을 이루는데, ‘우주의 순환 속에서 인간이 살아갈 길을 밝히려는(236쪽)’ 『주역』의 특징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라고 덧붙인다. 문득 '코스모스(꽃)'가 '코스모스(cosmos, 우주)'로 읽힌다. 동주가 애정한 '별'처럼 우리 인간도 결국 사라져 우주먼지의 일부로 되돌아가지만, 그것이 우리의 그리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살펴본 산문에는 일제에 저항하며 고뇌했던 예술가와 더불어 젊음과 낭만이 가득한 대학생이 공존한다. 동주하면, 저항 시인의 이미지가 강한데 그가 남긴 산문이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 것 같다. 윤동주가 만일 시인이 아니라 '나무'라면, 그가 쓴 산문이 뿌리를 이루고 시가 열매로 맺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무가 있다>에 대하여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운다. 윤동주라는 세계를 여는 '문(門)'을 '만들어(產)'줄 산문을 모아놓은 책인 동시에, 윤동주라는 짧지만 강렬한 생을 살다간 '나무'를 그려볼 수 있는 책이라고. 책을 덮으며 그에게도 나무라는 동무가 있었고, 시대를 초월하여 나에게도 '윤동주'라는 동무가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든든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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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여러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가쓴 시도 좋아하고, 그가 자란 명동 촌이야기도 좋아한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산문을 누리며 읽을 차례가 왔다. 나무가 있다는 동주가 써내려간 하늘의 향기나는 산문들이 모아져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생각이 깊어지고, 그 생각속에서 동주가 그렇게 노래하던 빛과 하늘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볼수 있다. 이따금씩 가을이 찾아오는 이 계절에 이 책을 읽을수 있는 여유와 그리고 시간 그리고 동주가 원하는 주어진 길이 있으니 내게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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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무만 있는게 아니라 나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서 오히려 생활과 사고를 통찰하게하는 철학책으로서도 모자람이 없는 책이었습나다 근래에 들어 참으로 책다운 책을 읽었숩니다. 모둔 분께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하게 하는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사고와 보는 관점이 많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