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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실색 - 백수는 허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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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실색 - 백수는 허기를 느낀다   1.   백수가 일요일에 읽는 서대경 시인의 시집에서는 목욕탕 냄새가 난다. 다만 소박한 삶을 꿈꿀 뿐인 아가씨가 생선가게에서 사온 푸른 정어리들을 침실에 집결시켜놓고 낮잠을 잔다. 꿈에 흡혈귀라도 다녀간 걸까, 목덜미에 남은 키스 마크가 저녁 햇살을 받아 붉어진다. 그녀를 먼 곳으로 데려다 줄 파일럿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단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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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실색

- 백수는 허기를 느낀다

 

1.

 

백수가 일요일에 읽는 서대경 시인의 시집에서는 목욕탕 냄새가 난다. 다만 소박한 삶을 꿈꿀 뿐인 아가씨가 생선가게에서 사온 푸른 정어리들을 침실에 집결시켜놓고 낮잠을 잔다. 꿈에 흡혈귀라도 다녀간 걸까, 목덜미에 남은 키스 마크가 저녁 햇살을 받아 붉어진다. 그녀를 먼 곳으로 데려다 줄 파일럿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단칼에 끝내 줄 닌자도 되지 못하는 그 남자는 오늘도 오지 않는다. 이젠 당연한 일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가 오지 않는다는 것, 그녀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중요하다. 요나, 너를 사랑. 달콤했던 그의 밀어는 향기를 잃은 지 오래되었고 자정경계를 넘어선 늦은 가을밤, 혹시나 하고 기다려보지만 그는 오지 않는다. 죽고 싶어, 그녀는 중얼거리고 그때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 첫눈이다.

 

2.

 

그는 요즘은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두꺼운 파일을 펼쳐놓고 바틀비처럼 컴퓨터 키보드로 모니터에 필사한다. 피로해지면 잠시 무협게임을 불러내 검은늑대강을 건너고 여우계단을 오르내리며 단검을 휘두른다. 게임 오버, 겨우 서른인데 벌써 이렇게 한심한 인생이라니. 그도 한때는 시인을 꿈꾸던 문청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하얗게 분칠한 첫사랑에게 메모지에 적은 시를 검문당하고 나서 그는 시를 버렸다. 이따위 미학이 부끄럽지도 않니?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그의 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가 되었다. 춥고 배고프고 어지럽지만 그는 밤이 늦어서야 겨우 사무실을 빠져 나온다. 전철역 플랫폼에 망연히 서 있는데 문득 얼굴에 닿는 서늘한 감촉. , 첫눈이다. 눈송이들을 바라다보며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을 떠올린다. 아주 휘황한 서커스의 밤이었지. 내려다 본 불빛들이 꼭 이런 눈송이들 같았지. 그때 사다리에서 추락하지만 않았더라면. 기억 속 러시아의 숲을 지나 불 꺼진 공장지대를 지나가는 철도의 밤, 그는 참 오랜만에 그녀의 집으로 귀가한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알 수 없는 열기에 들떠 골렘은 인적 드문 전철역을 나선다.

 

3.

 

그는 철둑길 차단기 기둥 곁에서 잠시 멈춰 서서 철길 건너편 집 창문을 바라다본다. 입춘(立春)처럼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아직 안 자고 있구나. 허클베리 핀을 만난 톰 소여처럼 그는 신이 난다. 생각해 보니 늦은 , 기차를 타고 낮달과 함께 근교 유원지를 다녀온 이후론 처음인 것 같다. 거미처럼 그 동안 내 둥지에서만 맴돌았구나. 동지(冬至)는 아직 멀었는데 내 사랑이 너무 일찍 어두워졌구나. 그가 가벼운 자책감에 시달리는 동안 사랑도 변한다, 그들이 말한다. 벽장 속의 연서는 펼칠 때마다 항상 지워져 있고 교수대에 목매달린 산체스 벨퓌레의 두 눈은 차마 눈감지 못하고 아직도 널 응시하고 있지. 이제 곧 눈보라와 함께 은하 철도를 타고 외눈박이 거인 압둘 키리한이 도착할 거야. 그러니 어서 돌아가, 그녀의 집이 아니라 너의 집으로.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그의 뜨거운 뇌수를 채찍질하는데, 샤갈의 그림에서처럼 그녀가 날아와서 그를 껴안는다. 크게 놀란 그녀는 정신을 놓은 그를 포옹한 채 흐느낀다. 색깔을 잃어가는 두 사람의 잔등에 고요히 쌓이는 첫눈이 겨울 산을 이룬다. 그리고 여기까지 다 읽고서, 난 네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라고 중얼거리지만 마음 속으로는 백수는 허기를 느낀다.

c*****t 2014.10.20.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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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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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시인. 2004년 등단하고 2012년에 8년만에 첫 시집을 냈단다.제목도 독특하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라는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의 시가 수록되어 있을지 감도 못잡겠다.대부분의 시가 호흡이 좀 긴 산문시다. 딱히 어렵지 않고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라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던 편.내가 서대경 시인의 시로 처음 본 시가 3부의 제목으로도 쓰인 '차단기 기둥 곁에서'이다. 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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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시인. 2004년 등단하고 2012년에 8년만에 첫 시집을 냈단다.

제목도 독특하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라는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의 시가 수록되어 있을지 감도 못잡겠다.


대부분의 시가 호흡이 좀 긴 산문시다. 

딱히 어렵지 않고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라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던 편.


내가 서대경 시인의 시로 처음 본 시가 3부의 제목으로도 쓰인 '차단기 기둥 곁에서'이다. 

염소가 되어 염소의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을 쓴 시인데

처음 읽었을 때 왠지 너무 슬프게 느껴져서 몇번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시인의 시집을 사보자 싶어 찾아봤었고.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가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차단기 기둥 곁에서


'나는 필경사이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쓴다'는 서대경 시인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없지만 시를 쓰고 있는 내가 있고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려나.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고 얼마전에 황유원 시인과 함께 밥 딜런의 노래를 시로 번역한 책이 나왔던데 읽어보고 싶다. 

또한 시인의 두번째 시집도 빨리 봤으면 싶다. 

e*****e 2017.02.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