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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내용보기
며칠 전부터 집에 텔레비젼이 생겼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문제는 아이들이 텔레비젼을 보면서 무언가를 자꾸 사자고 조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에서 소개하는 광고를 보며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진다. 물론 미남미녀들만 등장하며 이쁘고 멋진 모습으로 소개하는 상품소개는 아이들에게 제품의 신뢰를 주기에는 충분하다. 문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내용보기

며칠 전부터 집에 텔레비젼이 생겼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문제는 아이들이 텔레비젼을 보면서 무언가를 자꾸 사자고 조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에서 소개하는 광고를 보며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진다. 물론 미남미녀들만 등장하며 이쁘고 멋진 모습으로 소개하는 상품소개는 아이들에게 제품의 신뢰를 주기에는 충분하다. 문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어도 아이들은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왜? 라고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다. 아이들과  한참을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 역시도 쓸데없는 소비를 많이 하고 있는 과잉소비자였다. 


1,소비자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사회. 소비의,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사회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만들어지는 상품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품들이다. 실제로 없어도 일상에 불편함은 없는 상품들이다. 소비를 목적으로 만든 상품은 강한 유혹으로 외관이 아름다워야 하며, 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한다. 본질은 같음에도 말이다.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고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변해야 한다. 우리들이 좇으려고 안달하는 패션들과 우리의 주목을 받는 대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또한 우리가 꿈꾸는 것들과 무서워하는 것들,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과 몹시 싫어하는 것들, 심지어 희망을 품는 이유와 염려하는 이유조차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래야만 하는 지금의 이 시대를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표현을 한다.

 

'유동하는 근대세계'는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저자 바우만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제도, 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다. 바우만은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유동하는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은 후기 근대의 불확실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자, 동시에 공포와 결부되는 개념이다. 바우만은 이처럼 근대를 '견고한 근대'와 '유동하는 근대'로 나누고 견고성에 유동성을 대비시킨다.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용어를 현대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했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2,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소비자사회는 이렇게 보여지는 것,모든 것이 전시의 목적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판단기준은 미와 추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보여지는 것이 이제는 상품이 아닌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게 된다고 한다. 소비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웹서핑은 점차 확대되어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까지 장악하게 되었고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사귀는 만남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촉하게 되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이런 것들로 의사 소통의 기회는 더욱 많아졌지만 이런 온라인으로의 의사소통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아닌 피상적인 대화속의 피상적인 만남을 부추긴다. 오로지 보여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만남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가지는 어떤 친밀함이나 심원함, 영속성에 상처를 주고 있다. 

 

"어째서 의사소통 기술이 개선을 거쳐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정작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 다시말해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이어주는 진정한 의사소통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이처럼 여전히 서로 엇갈리는 혼란 속에 빠져 있어야 하는가. 더구나 은폐되어 있는 측면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측면에 있어서도 분명 정직하지 못하며 실상 참다운 의사소통의 환상에 불과한 그런 광장(인터넷광장)을 지니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

주제 사라마구는 그의 소설에서 아무리 의사소통 기술이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인간 고유의 특성-진정한 미궁을 통해서 서로 대면하게 될 때의 당혹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가지는 독특한 특성들은 온라인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3,김씨표류기가 보여주는 잉여사회

영화 <김씨표류기>를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불량소비자 남여 두 김씨가 나온다. 은둔형 외톨이의 여자는 오로지 온라인에서만 여왕대접을 받는다. 이 가상의 공간에서 아름답고 행복하며 완벽한 여자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부모에게 의존해 사는 은둔형 외톨이일 뿐이다. 미와 추의 기준으로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추의 여자이다. 끊임없이 성형수술을 해야하고 온 몸을 아름답게 꾸며야하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서의 삶으로 실제로 그녀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불량소비자일 뿐이다. 신용불량자인 남자가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한 후 강물에 떠밀려 표류하게 된 곳은 밤섬이라는 외딴섬이다. 이 밤섬은 도시의 외딴 섬으로 도시의 쓰레기가 밀려와 도착하는 잉여의 공간이다. 김씨가 떠밀려온 것처럼..도시의 모든 쓰레기가 강물로 떠내려와 도착한다. 이 밤섬은 그렇게 쓰레기 즉 잉여의 공간이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 살아가며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는 여자와 잉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 이들은 모두 바우만이 말한 도시에서의 잉여적 삶의 형태 -불합격품,불량품,폐기물,찌꺼기- 이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쓰레기의 재사용이다. 쓰레기는 다시 쓸수 없는 버려진 물건이다. 잉여의 삶인 두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란 쓰레기를 다시 재사용함으로써 보여주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는 사용자로서의 '독립된 면모'를 발휘할 때 잉여적 삶에 희망이 비춰진다는 메세지와 함께 두 주인공들의 삶은  비극이 아닌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명명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운 편지와 같은 맥락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4,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

폴란드의 노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에 띄운 44통의 편지는 노학자다운 삶의 혜안과 번뜩이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사회학이자 철학이 숨쉬고 있다. 가장 먼저 온라인이 장악하게 된 사회에서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무분별한 정보에 휩쓸리게 되면서 거짓말과 환영,쓰레기, 폐기물 같은 껍질들을 분리해내서 읽을 만한 낟알과 진리의 낟알을 뽑아내도록 도와주는 탈곡기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첫번째 편지를 시작으로 세대 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주는 의사소통의 한계,점점 프라이버시가 없어지며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섹스, 부모와 아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교육 문제 등을  냉철한 판단과 노학자의 근심어린 조언을 들을 수 있다.  노학자의 가장 큰 우려는 모두가 이 '유동하는 근대'의 모습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유동하는 근대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살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위험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로지 속도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앉아 있는 것보다는 걷는 편이 낫고, 걷는 것보다는 뛰는 편이 나으며, 뛰는 것보다는 오히려 서핑(파도타기같은 )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 어쨋거나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한 형태가 언제 어떤 식으로 고체화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 고체화된다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토록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으며, 언제든지 위험으로부터 구출해내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통신 수단은 최첨단을 걷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어 몸살을 앓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정신을 뺏어갈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의 일상에는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 말했듯이 지금은 필요에 의한 상품들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름하여 소비자사회가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며 넘쳐나는 물질문명에 익숙한 세대로 낡은 우리 부모세대들을 점점 더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과 일상에서 철학할 줄 모르는 사유가 쏙 빠진 고독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져 갈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불투명한 미래에  한줄기 투명한 희망의 빛 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YES마니아 : 로얄 k********2 2012.10.17. 신고 공감 15 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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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독을 찾아 나설 때..
"다시 고독을 찾아 나설 때.." 내용보기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잡지에 편지를 게재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2년에 걸쳐 온라인, 신용카드, 세대차이, 프라이버시, 교육, 종교, 쇼핑, 유행, 불평등 등 일상에서 우리들이 흔히 만나는 주제를 통하여 현대인이 가지는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기술을 알려주고 있다.   지
"다시 고독을 찾아 나설 때.." 내용보기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잡지에 편지를 게재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2년에 걸쳐 온라인, 신용카드, 세대차이, 프라이버시, 교육, 종교, 쇼핑, 유행, 불평등 등 일상에서 우리들이 흔히 만나는 주제를 통하여 현대인이 가지는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기술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거나, 술을 마실 때 예전의 우리들은 다 함께 동참하고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비록 그 대화가 시시콜콜한 일상의 내용이거나, 혹은 그 자리를 떠나면 쉽게 잊혀질 것일망정 말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도중에 묘한 정적이 흐르는 것을 느낄라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각자의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각기 제방에 틀어박혀 휴대폰 하나만을 가지고도 하루를 보내는데 전혀 지겨워하지 않는다. 대화라도 할라치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tv를 보거나, 게임 혹은 인터넷 서핑 하는 것을 더 좋아라 한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불편해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나처럼 기성세대라 불리는 일부 사람들만이 불편해하고, 부자연스러워 할 뿐이다. 사람들은 만남에 대해, 교유에 대해,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에 대해 허기가 진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고스란히 들어나는 오프라인의 만남보다도 익명성을 보장하고 자신을 다시 창조할 수 있는 온라인을 선호한다. 인터넷의 발달은 이러한 만남을 더욱 쉽게, 그리고 다양하게 만들어 주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바우만은 이것들을 우리들이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먼저 현대사회를 유동하는 근대 (liquid modern)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포스트 모던 (post modern)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생산자와 군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였던 기존의 견고한 근대 (solid modern)사회의 대척점으로 바라본 것이다. 기존의 근대사회는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이었다. 그렇기에 사회는 제도, 풍속, 도덕 등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기존의 제도와 도덕, 관념들은 해체되어 흘러 다니는 액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출렁거린다. 더욱이 그러한 유동의 속도들은 우리가 지닌 의식의 속도를 간단하게 추월해 버린다. 모든 것이 불안해지고 예측 불가능함에 따라 사람들은 불안해 하고 또한 피곤한 삶을 살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또한 유동하는 근대세계는 모든 것들이 연결된 세상이다. 스마트폰의 자판을 터치하는 것 만으로도 만남과 선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 온라인의 대중 속으로 함몰되어 간다. 그곳에는 본래의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나도 잘 모르는 또 다른 나만이 존재한다. 이를 두고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개인들이 보여주는 삶의 궤적이라고 말한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쳐 나가는 바로 그 길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의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개인들은 외로움 혹은 고독과 직면하지를 못하고, 그런 세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서야 비로소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안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독과 대면하지 못한다면 과연 나다운 나, 참된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나에 대한 성찰은 고독과 대면하고, 그 속에서 사유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나에 대한 성찰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유동하는 근대의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해체되어 버린 견고한 근대사회의 덕목들이 오히려 유동하는 근대사회를 살아가는데 더 힘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싶다. 서로 외로움을 참지 못하는 소통이 아니라, 유동하는 근대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온갖 불안에 대응하는 소통이, 그러한 불안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함께하는 소통이, 바로 이런 세계를 살아가는 자세일 듯하다. 또한 그런 자세와 소통은 고독과 스스럼없이 대면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삶의 태도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바우만의 두번째 편지 제목이다. 유동하는 근대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비단 고독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움을 못 참아 고독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자본이 주는 불안과 불확실성에 시달리며 자신마저 잃어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라도 잃어버린 고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우만이 이 책에서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란 생각이 든다.



k*****1 2013.01.09. 신고 공감 12 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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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적 피해와 벌받는 시지프스
"부수적 피해와 벌받는 시지프스" 내용보기
21세기 들어 전세계인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 두 가지 사건은 9.11 사태와 뉴욕발 금융위기로 시작한 경제 붕괴이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의 심장에서 시작하여 전세계로 그 영향이 파급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위기감과 중산층도 언제든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 매우 견고한 줄 알았던 우리 사회 그리고 이 세계가 실은 매우 불안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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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전세계인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 두 가지 사건은 9.11 사태와 뉴욕발 금융위기로 시작한 경제 붕괴이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의 심장에서 시작하여 전세계로 그 영향이 파급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위기감과 중산층도 언제든 몰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 매우 견고한 줄 알았던 우리 사회 그리고 이 세계가 실은 매우 불안정하다는 자각은 모든 개인들을 공포에 빠뜨렸다. 더욱이 9.11 사태 이후에도 굳건하게 유지되던 금융이라는 요새마저 뒤흔든 신용 붕괴라는 대지진은 삶의 전반에 걸쳐 거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불안정성은 도처에 있다.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은 단지 은행 시스템이나 증권 거래 지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생활 계획과 행위 방식, 심지어 성공의 기준과 행복의 이상에 대한 확신 등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들이 추구할 만한 가치로 여겼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 권위와 매력을 상당 부분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호주 멜버른 라 트로브 대학의 마크 펄롱이 지적한 대로, “모든 것들이 순간 빠르게 물이 내려가듯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고 (…)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가장 최고이며 가장 찬란했던 것’, 소위 말해 세상에서 제일 잘나가던 놈들이 그야말로 극적으로 잘못된(p.281) 것이다.

 

이것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천착한 소위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 age)’가 가진 유동하는 공포의 문제이다.

근대의 이성은 인간에게 통제가능성과 확정성을 선물로 안겨주었다. 알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느꼈던 공포를 제거하고, 스스로의 삶을 지배하며 자연계와 사회적 세계에 도사리는 통제 불능의 힘을 길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자연재해와 테러 등 예고 없이 일어나는 위험 앞에 불안감과 공포는 느낀다. 이전까지 탈근대,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불렸던 이 시기는 모든 개인에게 이전 시기에는 누릴 수 없었던 자유를 주었지만, 자유의 대가에 대처해야 하는 과제도 남긴 셈이다. 이 시기의 속성인 과도한 유동성은 모든 불확정성, 불안정성, 불안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이는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이 되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왜 나는 밤새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가? 왜 나는 머리를 가득 채운 불길한 예감 때문에 잠에서 깨어야 하는 것일까? 아마 현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혹은 매일 고민하는 문제일 텐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유동하는 근대를 사는 개인들의 삶의 조건인 셈이다.

 

폴란드 출신 작가 리사 아피냐네시는 우울증이 전 세계적으로 곧 심장병에 버금가는 심각한 질병이 될 것이며, 더 발달한 세계에서는 가장 최고의 질병이 될 것이라고주장한다. 환상을 상실한 데 대한 반응이자 달콤했던 꿈들이 소멸되어 버린 데 대한 반응이 바로 우울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주위의 세계가 쉴새 없이 변화되는 유연한상황에서 개인은 싫든 좋든 그러한 세계와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 그를 위해 원치 않게 타락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사회 변화에 저항할 방법이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에 대해 자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는 진단이다.

 

노동 시장 안에 위치하고 있는 개인들은(그나마 이들은 노동 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비해서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파산 상황들이나 조직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 자행되는 여러 조치들이나 대량 정리해고 등을 통해 언제든 길바닥에 내쫓길 위험에 처해 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노동 시장 안에서 굴욕적인 행위들을 겪어야 하고, 해고가 될 경우 사회적인 배제로 인해 궁핍한 상황을 겪거나 무직이라는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는 미래에 직면해 있다. 비정규직이나 실업, 그리고 이를 통한 빈곤 문제 등은 더 이상 불운한 타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든 내가 당면할 문제이다.

 

경제 침체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팽배한 정치적인 불안정성인데, 이 둘의 치명적인 조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유동하는 근대의 위기는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가 보여주는 여러 문제들과 테러리즘, 그리고 공동체적 정체성이 종종 폭력적으로 변질되는 급진화 현상 등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불길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결국 오랫동안 괴롭혀온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유혹들과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두려움 자체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포보포비아(phobophobia) , 공포에 대한 공포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심각한 실업, 비정규직, 해고, 이주 노동자, 빈곤 문제 등을 다룰 때 정치계나 경제계에서는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이것은 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이나 공포, 그로 인해 발생하는 우울증도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일 따름이다.

 

대체로 이러한 문제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과 발전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부수적 문제 정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사회 불평등에 기반한 필연적 문제이다. , 사회 계층의 밑바닥에 있을수록, 계급이 낮을수록 피해자가 될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부수적 피해'라는 역설적 개념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논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는 몇몇 개인들의 도덕적 해이나 행정적 관행 등에 의한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하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소위 부수적인 피해였다는 관점에서 접근 가능하기 때문이다. 차후에라도 세월호 참사는 급속한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부수적 피해'였다고 푸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사실 이 부수적 피해는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부수적일지 몰라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사회 불평등이 가진 심각성,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인간 고통을 증가시키는지 보여준 뼈아픈 사건이다. 부수적 피해는 오늘날 사회 불평등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뚜렷한 관점을 제공한다.

요컨대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한 바 21세기는 유동하는 근대인데, 유동하는 근대가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개인들은 공포를 느낀다.

 

그렇다면, 개인은 그저 무력한 존재일 따름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공포를 해결하는 주체 역시 유동하는 공포를 만든 장본인인 인간이라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일어나는 일의 실체가 무엇인지 해석하고 답을 제출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는, ‘공위기,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상태이다. 공위기는 오래된 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기를 일컫는데, 문제는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모두 죽음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실질적인 위기감이다.

이런 시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다. 세계화된 권력이 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쥐락펴락 할 만큼 불안이 강력해졌는데도 속수무책할 수밖에 없다. 고용불안과 소비 환경, 교육 등 개인 생활과 가장 밀접한 부분들부터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변덕스럽고 쉽게 헤어지는 대부분의 가상적인 네트워크와는 다른 형태를 갖는 집단의 연대를 상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그문트 바우만은 안토니오 그람시를 환기시킨다.

미래를 예측하는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고, 또한 미래를 바람직하지 않은 시나리오와는 확실하게 다른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서 노력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유동하는 근대를 사는 개인들은 시지프스처럼 홀로 힘겹게 돌을 굴리면서 한층 더 외로워진다. 바우만은 각자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공동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함께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불안정하고 공포스러운 유동하는 근대를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의 끝에서 한 장을 통째로 카뮈에 대해 할애하면서 이런 자신의 주장을 공고히 한다. 자신만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홀로 무겁게 돌을 굴려야만 하는 시지프스가 이제는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마주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벌 받는 시지프스에서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로. 이것이 이 책을 통해 바우만이 제시하는 결론이다.

 




c*****g 2014.04.29.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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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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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보편성을 추론할 수 있는 몇몇 클러스터(cluster), 예컨대 문화, 국가, 주권, 민족,가정 등 동질적이고 영속적이며 심원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클러스터들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파괴되거나 해체되어 그 형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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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보편성을 추론할 수 있는 몇몇 클러스터(cluster), 예컨대 문화, 국가, 주권, 민족,가정 등 동질적이고 영속적이며 심원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클러스터들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파괴되거나 해체되어 그 형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는 현대의 이러한 특성을 '액체성'(liquid)으로 규정하고 있다.  바우만 교수가 말하는 '액체성'이란 우리 삶의 기준이 소멸하고, 국가기능 약화로 인해 시장의 장악력이 강해지는 일련의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던 국가 장치가 축소되고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는 결과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소비시장의 중심에서 언저리로 내몰리는 현대인들에 대한 자각과 그 대안을 모색하는 지표가 될 수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한번에 끝나는 일년 정도 걸리는 실험을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특별한 계획이나 기획 없이, 그리고 내가 무엇을 논의하겠다는 논제에 대한 일람표도 만들지 않고 실험을 시작했다.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을 기록하고자 했고, 사건들이 부각되었다가 사라지는 발전 과정을 지켜보고자 했다. 그 사건들을 요약하고,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읽고 흐르는 ‘사물의 질서’에서 장소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처방이기도 한 ‘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라’는 말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우리 시대의 본성을 연역하는 것은 일 년 동안 일어난 사건의 연대기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그 사소한 것에 남겨진 총체성의 성격이다. 때때로 참으로 사소하고 겉으로 보기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파편들일지라도….”

난파선의 작은 파편처럼 유동하는 액체의 세상에서 부유하는 현대인에게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현대의 모습을 44편의 편지로 옮긴다.  의미없이 제각각 떠도는 작은 파편에서 세계의 질서를 읽어내려는 노력의 산물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 확대하는 일반화의 작업은 사회학자로서의 저자가 취할 수 있는 추상적 사유의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땅 위에 굳건히 선 농사꾼이 출렁이며 떠도는 뱃사람들을 바라보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나에게 또는 내가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살면서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조금은 낡은 사고방식의 틀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에야 비로소 변화를 감지하듯이.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농사꾼인 동시에 어부인 셈이다.

 

"삶을 선택하는 일들에는 차근차근 읽고 하나하나 잘 따라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설명서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면, 로마의 시인 루칸이 사랑에 관해 남긴 아주 기억할 만한 의견까지 동의하자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일처럼 운명에 인질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삶이란 정말 불쾌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무서운 것일까?  그럴 것이다.  더구나 틀림없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말 곤란한 문제는 살아가는 일에는 또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P.374)

 

나는 가끔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며 의문을 던질 때가 있다.  '나는 절대적이고도 확고하게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 인생의 경로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을 실감하고 생생히 기억하며 미래의 변화를 대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스무 살 때에도 그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으며, 인생의 반을 허비한 지금의 시점에서도 그렇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어쩌면 그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지식이란 이성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는 말은 이 책에서도 유용하다.

 

"즉 교육은 표면에 드러나는 각양각색의  인간 경험 밑바탕에는 분명 불변하는 세계의 질서가 놓여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분명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들이 있다는 가정 또한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가정은 지식이란 분명 선생들로부터 학생들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으며 또 이런 방식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정당화시켰다.  또한 두 번째 가정은 선생들이 다음과 같은 자기 확신에 물들게 만들었다.  선생인 자신들은 반드시 자기의 학생들이나 피보호자들이 따라하고 모방하기를 바라는 본보기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만큼 타당성을 갖는 그러한 본보기다운 태도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는 확신 말이다."   (P.201)

 

 유동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영원하다고 확신하는 어떤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의 확신과 상반되는 어떤 실재를 현실에서 보게 될 때 그 고체성의 확신은 비수가 되어 나의 가슴에 꽂힌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학과 같은 미련함을 버리지 못한다.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하기는커녕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며 때로는 분노한다.  액체에 떠있는 고체는 쉽게 뒤집혀지고 떠밀리기 마련이다.  두 발을 뻗대고 힘을 쓸 수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힘만 낭비할 뿐이다.  사소하고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할 것이며, 이 세계의 이상함과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했던 카뮈의 확신을 믿기로 하자.

 

2012년에 우리는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선택을 했다.  어차피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좋든 싫든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작은 변화의 일면에는 언제나 불만과 실망이 섞이게 마련이고 부지불식 간에 그렇게 쌓인 실망과 불만이 예고도 없이 새로운 변화를 몰고올 것이라는 점이다.  작은 사건의 면면을 살펴 미래의 또는 현재의 큰 변화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어 이 책은 그 바탕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상을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말이다.   

s*****l 2013.02.11. 신고 공감 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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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에 띄우는 44통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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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떠나서, 원문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를 떠나서, 번역을 너무 잘 한 것 같다. 읽다 보면 문장도 꽤 긴데, 그 긴 문장을 정말 유려하고 읽기 쉽게 잘 번역했다. 이런 평가가 객관적인 평가는 아닐 지라도, 적어도 번역자들의 우리말 실력이라도 충분히 칭찬해주고 싶다. 덕분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첫 만남이 무척 유쾌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지는 얼마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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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떠나서, 원문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를 떠나서, 번역을 너무 잘 한 것 같다. 읽다 보면 문장도 꽤 긴데, 그 긴 문장을 정말 유려하고 읽기 쉽게 잘 번역했다. 이런 평가가 객관적인 평가는 아닐 지라도, 적어도 번역자들의 우리말 실력이라도 충분히 칭찬해주고 싶다. 덕분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첫 만남이 무척 유쾌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지는 얼마 안 됐다. '모두스 비벤디'인가 뭔가하는 책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고, 보고 있는 신문에서 꽤 크게 다루어서 호기심이 동한 기억은 있다. 결정적으로 읽게 된 계기는 프레시안 북에서 발간하는 무료 종이 잡지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이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썼는 데, 시인의 글도 그렇고 책 제목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다.

 

이 책은 바우만이 어느 잡지에 연재한 44편의 글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왜 44편인가에 대해 글의 서문에서 길게 얘기하고 있는 데, 결론은 저자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만큼 이 시대가 글로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 많은 만큼 혼란스러운 시대라는 뜻일 게다.

 

바우만의 글에서 중요 개념은 '유동하는 근대'이다. 근대 세계로 넘어 오면서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한 것이 없고 급속도로 변하여 현재도 미래도 마음 편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런 전제하에 저자는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할 할 것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있는 시선을 제시한다. 그가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분야는 거의 전방위적이다. 교육, 인터넷, 금융위기, 실업문제, 빈부격차 등등. 그 중 특히 인터넷 시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눈에 띄고, 자본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강렬하게 남는다.

 

이 책의 제목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도 급속도로 발전하는 인터넷 기술에 대한 사회문화적 문제제기에서 가져 왔다. 우리는 끊임없이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와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우리는 얘기하고 있는가. 그럼,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고독한가. 저자는, 이런 네트워크 상의 유대가 확실한 공동체적 안락도 절대적 고독도 주어지지 않은, 그래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액체 위에서 붕 떠 있는 상태로 인간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에따라, 고독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 창의성이나 성찰 능력과 같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신영복 선생의 글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은데, 조금 덜 문학적이고, 조금 더 길다. 공통점도 있다. 자본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무척 사변적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고 표현할 만큼 달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g********m 2012.11.06. 신고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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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누릴 자유조차 박탈하는 세계속에 살고 있다 (11.14~12.11)
"고독을 누릴 자유조차 박탈하는 세계속에 살고 있다 (11.14~12.11)" 내용보기
사무실에 두고 짬짬이 읽은 책이다. 편지글 한편 혹은 두편씩.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는 말은, 폴란드출신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시대를 명명하는 말이다. 2008년에서 2009년까지 이탈리아의 주간지에 편지 형식으로 보낸 글들을  모아 엮은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바우만은, 2000년대 전반부터 시작된 서구의 물결을 '유동하는 근대 세계'로 본다.   현대
"고독을 누릴 자유조차 박탈하는 세계속에 살고 있다 (11.14~12.11)" 내용보기

사무실에 두고 짬짬이 읽은 책이다.

편지글 한편 혹은 두편씩.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는 말은, 폴란드출신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시대를 명명하는 말이다.

2008년에서 2009년까지 이탈리아의 주간지에 편지 형식으로 보낸 글들을  모아 엮은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바우만은, 2000년대 전반부터 시작된 서구의 물결을 '유동하는 근대 세계'로 본다.

 

현대 세계의 모든 것들은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지 못하고 액체처럼 끊임없이 유동한다.

액체는 유연하다. 스리슬쩍 모든 것을 하나로 흡수한다.

그러면서도 그 형태나 파장을 짐작하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유동하는 세계의 흐름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화의 물결을 타야 한다.

여기에서 현대인들의 불행은 비롯된다.

유동하는 근대는, 

세계속 문화나 체계를 하나로 획일화해 나가면서 그 형태나 파장은 짐작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세계로 치닫고.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점차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며 세계의 거대한 조류에 떠밀려 부유한다.

 

이 책에서 진단하는-부유하는 현대인의 양상중에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 오프라인의 세상보다는 온라인 세상에서 더 자유롭다.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휴대전화를 통해 끊임없이 상대방에 노크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길 원한다.

온라인 그물망속에서는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박탕당하면서도 그 끈을 놓지 못한다. 

오프라인의 관계보다 온라인 관계에 몰입하는 현대인들의 저변에는 

오프라인 세상에서 부딪히는 모순과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회피성 편리함과 이기심이 깔려있다.

온라인 세계에 빠져들수록 오프라인에서의 인간관계는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온라인 세상에서 친구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오프라인의 세상에서는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

 

둘째, 낯선 사람을 단지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만 낙인한다.

그래서 부자들은 '피해 출입 제한 주택'을 만들어간다.

낯선 사람을 차단하기 위해 담장을 높게 두르고 안전장치를 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런데 안전장치가 고장이 난다면? 불안은 두배 세배로 고조되어 버린다.

불안에 불안이 거듭되는 사회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세째, 소비지상주의를 꿈꾸는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에 유혹되어 쇼핑 중독자가 되어간다.

쇼핑몰은 소비자라는 신도를 위해 설계된 사원이며

기업과 카드회사는 소비자들의 충동구매를 원동력으로 왕성하게 성장한다.

경제활동능력이 없는 어린 소녀도 소비지상주의 사회에서는 VIP 소비자로 재탄생되어지고

카드회사는 자발적 빚쟁이를 양성하며 소비지상주의 사회의 충실한 조력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렇듯 유동하는 근대세계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세계의 흐름은 이러한 현상을 각자 개인들의 문제로 축소하여 주입하려 하는데

실은 사회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공동체 의식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래알처럼 이기적으로 개별화되고 인간의 본성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온라인 세상에서 빠져나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이루며 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자면, 오프라인 세상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며 살자는 이야기이다.

c*******7 2013.12.19. 신고 공감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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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근대세계를 사는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유동하는 근대세계를 사는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내용보기
당신은 현재를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파악하거나 읽어내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위를 걷기 위해 무엇을 지불하고 있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기는 하는가. 스터디를 하며 바우만을 읽었다. 현대사회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수 있을만한 인문학 도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유동하는 근대세계를 사는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내용보기

 당신은 현재를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파악하거나 읽어내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위를 걷기 위해 무엇을 지불하고 있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기는 하는가. 스터디를 하며 바우만을 읽었다. 현대사회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수 있을만한 인문학 도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개념인 '유동하는 근대 세계(Liquid Modern World)'라 명명한다. 바우만은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유동하는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견고한 근대에는 예측이 가능하고 공동체가 존속했다면, 유동하는 근대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개인주의로 가득한 시대다. 이 유동성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자 동시에 공포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당신들 앞으로 불확실성과 공포에 대한 44통의 편지를 보낸다.

 

 

보여지는 것에 매달리는 사람들

 네트워크 시대, 사람들은 자신 혹은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만 알아도 되는 이야기들─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나 은밀한 이야기들─을 스스로 꺼내기 시작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스스로 포기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버시 영역을 유지하며 누릴 수 있는 주권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는 희미해졌고 그 결과 사람들은 보여지는 것에 매달리게 되었다.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과 같은 SNS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몰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신속하게 업데이트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업데이트 한 이야기를 받아보며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시킨다. 즉,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가면처럼 꾸미고 가꾸는 것이다. 페이스북만 봐도 그렇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페이스북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계정을 만들고 자신의 일상을 업데이트하기에 이르렀다. 오늘 만난 사람,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 그 사람에게 받은 선물, 방문했던 장소, 함께 누린 시간과 추억과 같은 것들은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업데이트되었다. 그것은 일상을 기록하는 미니 블로그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주변 지인들과 함께 일상을 나누는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업데이트 한 자료들에 의해 '정의'되어지기 시작하고, 화두에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페이스북에 올린 정보만을 가지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규정짓기에 이르른다. 매번 업데이트하던 주제에 대해 어느 순간 당신이 업데이트를 하지 않게 되면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것도 그런 이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혼자일 권리를 내던지고 감시 받기를 자처했다. 자신의 정보(그것이 진실된 정보이든 거짓된 정보이든간에)를 업데이트하면 할수록 감시 받는 쪽은 오히려 당신이다. 언제나 신속하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가며 스스로 고독하기를 포기한 이들은 보여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가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유명인'이 될 수도 없고, '유명인'들이 등장하는 패션 잡지나 타블로이판 신문에 등장할 수도 없다. 오직 '유명인'이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대니얼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잘 요약해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유명인이란 바로 그가 유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사람"이다. …내가 점점 더 자주 트위팅을 하게 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트위팅을 올린 미니 블로그에 방문할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나는 그러한 유명인들처럼 잘 알려진 부류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유명인들의 경우에서처럼 내가 무엇을 트위팅 하고 있는지는 실제로 별 상관없는 일이다. 요컨대 우리가 뮤여인들에 관해 읽고 듣는 것은 대게 그들의 아침식사와 데이트, 하룻밤의 섹스, 기이한 쇼핑 스타일과 관련된 최근의 뉴스들에 불과할 뿐이다. 그처럼 한 개인의 현재 모습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바로 '유명함'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에 나의 트위팅 역시 나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한 가지 방식인 셈이다. …물론 사람들은 중요한 것이 바로 '보여지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는 환영을 믿도록 주입받고 배우기 때문에 기꺼이 그 환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처럼 환영을 받아들이게 된 본인들은 정작 자신들을 '보여지는 부류'와 '보여지지 않는 부류'로 나누어서 그런 구분을 통해 '볼 수 있는' 쪽에 머무르게 하는, 그런 실제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패션 잡지와 타블로이판 신문에 접근할 수도 없다. (53쪽)

 

 

 

 


 

 

순간을 소비하는 사람들

 무언가를 향유하기 위해 소비하는 시대는 지났다. 아주 어린 친구들부터 나이 지긋한 사람들까지 어떤 물품을 구입할 때 돈을 모아 구입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소수의 소비자들만이 자신이 목표로 하는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차근히 돈을 모으고, 그 물품을 손에 넣었을 때 축하하고 기념하거나 신께 감사드릴 만큼 커다란 감동을 받지도 않는다. 또한 그렇게 구입한 물건은 소중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소비형태는 10대들의 소비문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다. 예전에는 꿈의 대상이자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물품들(MP3, 핸드폰, 영화 관람 등)은 요즘의 10대들에겐 언제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소비품이자 필수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물건이나 문화를 즐긴다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적인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패턴들은 물건에 대한 애착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소비주의문화를 부추겼다. 더 이상 사람들은 물품과의 우정을 위해 고심하며 소비하지 않는다. 소비하는 순간 느껴지는 희열과 행복감을 지속적으로 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행이 지났거나, 인기가 없어져 매력이 떨어진 물건들은 구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더라도 곧바로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그러한 물건들은 확 인기를 끌다가도 유행에 뒤쳐지만 급속도로 사라진다. 재빨리 얻고, 또 빠르게 버려지고 없어지는 소지품들의 물결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마음속으로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소유물'로 돋보이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더구나 설령 그처럼 소중한 소유물로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쉴 새 없이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특정한 활동을 위해 요구되는 그 용품이 아니라 바로 그 스타일이다. 게다가 그러한 스타일에 맞춰 요구되는 부대용품이 언제나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점차 가속화되는 속도만큼 더 필요하게 되기 마련이다. (98쪽)

 

 

 아이들은 소비주의에 침범당한 하나의 영역에 불과하다. 소비주의는 다양한 영역들을 침범했고, 그 영역에 속한 이들은 이 엄청난 소비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소비를 하면서 '최신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다면 사실상 우리 삶은 실패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경험하는 신제품 취득의 감동을 본인만 느껴보지 못한다면 좌절적이고 비판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두가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데 본인만 홀로 피쳐폰에 머물러 있는 이들의 심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국가는 국민에게 "쇼핑하기를" 권한다. 소비지상주의는 대재앙이나 테러와 같은 끔찍한 일을 당한 국민들이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길 바라며 쇼핑을 권한다.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테러로 인해 무너졌을 때 조지 부시 대통령은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는 말을 건넸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정산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라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모든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으로 쇼핑을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재난으로부터의 구제는 소비자들의 결단으로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나라의 경제침체를 구해내거나 벗어나게 하는 것도 소비자의 몫이라는 사실은 암묵적이고 독단적인 신조로 자리하게 되었다. 시민권과 애국심의 의미는 순종적인 소비자가 성심성의껏 쇼핑에 임하는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공포에 떠는 사람들

 현대사회의 키워드는 건강이다. 건강해지기 위해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지갑을 연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불확실한 공포다. 내가 어느 순간 질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걸릴 확률을 무시할 수도 없는 질병을 막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급하고 약을 챙겨 먹는다. 사람들은 질병이 권해지고 있는 이 사회의 시스템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쉽게 망각한다. 제약사에서 약을 판매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약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약들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질병을 홍보하면서부터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질병에 대한 위협과 공포 때문에 기꺼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질병이 아닌 다른 공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볼까.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는 건강 못지 않다. 낯선 사람을 조심해라,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함부로 대꾸하지 말아라, 누가 같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면 안 된다. 이런 말들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입을 통해 끈질기게 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낯선 사람'이라기 보다는 '유괴범'을 조심하라는 말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그저 '타인'을 조심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다른 누군가, 특히 그게 성인이라면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는 강해진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들의 선택을 뒤따르는 것이 요즘의 유행이자 결정 양식이다. 바우만은 그러한 선택(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뒤따르는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믹소포비아'라고 주장한다. 이질공포증, 뒤섞임에 대한 공포증으로 읽을 수 있는 믹소포비아는 유사성과 동일성으로만 이루어진 섬들을 세우려는 충동이라 할 수 있다. 리처드 세넷은 "서로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표현하는 '우리'라는 감정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더 깊이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회피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우리'라는 말은 친밀감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공동체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말이었으나 요즘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친밀감 보다는 침밀감을 강요하고 그룹짓는 말처럼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들',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그룹지어지는 순간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의 차이나 다름을 비교하며 인정하고 이해 할 시간을 잃어버린다. 하나의 테두리 안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 안에 있는 당신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는 책이다. 사회를 읽는 시선을 키우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필요한 일이다. 『액체근대』와 같은 책을 읽어보아도 좋겠지만 실사례들과 함께 읽고 싶다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추천한다.

 

b*****l 2014.01.15.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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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프로메테우스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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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이라는 기묘한 기계 장치가 있다. 이 기계 장치는 스스로 움직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즉, 운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투입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페르페투움 모빌레는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꿈의 기계 장치였다. 꿈은 희망인 동시에 환상이다. 희망이 많다고 하면 꿈은 실현 가능하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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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이라는 기묘한 기계 장치가 있다. 이 기계 장치는 스스로 움직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즉, 운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투입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페르페투움 모빌레는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꿈의 기계 장치였다. 꿈은 희망인 동시에 환상이다. 희망이 많다고 하면 꿈은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꿈이 환상적이라고 하면 실현이 불가능하여 기묘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그토록 어려웠던 문제도 사회학에서는 가능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러한 고민 때문에 사회학을 다루는 넓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액체 근대』,『유동하는 공포』라는 망각하기 쉽지 않은 책을 통해 알게 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고는 근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탐색한다. 바우만은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액체 근대의 주체는 자유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대가로 개인의 불안, 불행에 대해 홀로 무한책임을 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다루고 있는 통찰력 있는 사회적인 이슈들은 하나같이 주목할 만하다. 앞서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바우만은 사회적 삶은 물리학이 다루는 현상이 아니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면서 열역학 제 2법칙(엔트로피)가 적용되지 않는 힘을 지닌 놀라운 기계장치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를 모든 과학의 제 1법칙이라고 했다. 간략하면 엔트로피는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에너지가 손실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제러미 러프킨은『엔트로피』에서 엔트로피를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고 지적했다.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액체가 되는 것이며 무질서의 상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독은 액체일까? 고독은 단단하다. 결코 유연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다. 고독을 저울질하는 생각의 정도에 따라 고독은 얼마든지 유연해질 수 있다. 이것이 곧 고독의 액체화이며 고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고독이 유동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일분일초라도 손 안에 스마트폰이 없다고 하면, 트위터와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답답함은 고독보다 더 단단하다. 어쩌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립에서 오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트위터의 속성상 새들처럼 지저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우리의 생명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140글자의 유행이라는 것이다. 유행이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더 이상 어떤 해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물리학 용어를 사용하면서 유행이라는 운동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 ‘잠재적인 에너지’ 즉, 그 자신의 운동량만으로도 계속해서 무한정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우만의 견해에 따르면 유행이야말로 사회학적으로 가능한 페르페투움 모빌레가 된다.

 

유행은 두 가지 인간의 욕구와 열망이라는 운동 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의 욕구는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것이며 인간의 열망이란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것이다. 좀 더 살펴보면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안전’과 ‘자유’다. 안전과 자유는 서로 모순된다. 그래서 안전과 자유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코스트 최소화(cost minimization)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하지만 코스트 최소화는 불확실하고 위태로워 오히려 자신을 고갈시키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유행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창조적인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개성의 상실이라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유행을 소비할수록 인간 상실이라는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동하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존재’에 대한 욕망은 프라이버시를 해체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프라이버시를 개인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사적이며 닫힌 공간이 된다. 만약 누군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주권(sovereignty)이 없게 된다. 주권은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네트워크된 사회에서 끊임없이 접속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공적이며 열린 공간에서 프라이버스를 해체 당하고 있다. 겉만 보면 네트워크는 인간들 상호 간의 강력한 유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밀이 없는 유대 관계는 오히려 인간들 상호 간의 우대들이 모두 약화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개인은 집단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잠시 인터넷을 차단하고 휴대 전화도 끄는 등등 디지털 도구에서 자유로워지면 완전한 고독을 만끽할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의사소통의 기술은 환상에 불과할 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인터넷으로 일상화된 의사소통의 기술의 단념과 절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유동하는 근대를 산책하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44개의 편지를 보냈다. 44개 편지에 담긴 사유의 주체는 고독, 세대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질병 권하는 사회, 공포에 대한 공포, 경계 긋기, 운명과 성격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저자는 유동하는 근대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어떻게 얄팍하게 하는지 규명하고 있다. 가령, 유동하는 근대에서 플렉서블(flexible) 존재로 사는 방식은 하나의 질서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가『순수와 위험』에서 말한 것처럼 질서란 바로 ‘적절한’ 사물들이 그 어떤 다른 자리가 아니라 바로 정확히 있어야 하는 그 ‘제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들의 적절한과 제자리를 판단하는 것이 ‘경계’라는 것이다. 경계는 ‘질서를 보전하거나 복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하는 ‘청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의 양면성에 따라 ‘바람직한 사람’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직한’에 대해 반항하게 된다. 반항의 본질은 카뮈의『시지프 신화』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보게 된다. 즉,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통해 자신만의 구원하고 싶어 한다. 행복한 시지프는 부조리한 운명에 맞선 자기애이며 자긍심이다. 행복한 시지프는 자신의 고통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면서도 강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바우만은 반항하는 인간으로 행복한 시지프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을 주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는 벌로 고통을 받는 존재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얼마든지 돌과 불의 문제에 부딪칠 수 있다. 돌이 자신을 위한 문제라고 한다면 불은 타인을 위한 문제다. 이때 우리가 유동하는 세상에서 선택해야 할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유동하는 삶의 위기에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여러모로 한 평생의 지식이 될 만큼 놀랍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장석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의 껍질이 아니라 진리의 낟알들을 찾고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인데 완전히 고독한 순간까지 그렇다는 것이다.



p******0 2013.02.1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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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에 사라져가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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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두발을 편히 딛기도 비좁은 공간. 앞에 서있는 여자가 넘기는 머리칼도, 옆에 선 남자의 팔꿈치도, 뒤꼭지를 자꾸만 밀어대는 뒷사람의 가방도 불편을 넘어 불쾌로 이어질 정도이다. 그처럼 비좁은 틈을 비집고 선 그들은 모두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이나 노트만한 패드를 꺼내들고 제마다 밀린 tv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도 아니라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개중에는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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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두발을 편히 딛기도 비좁은 공간. 앞에 서있는 여자가 넘기는 머리칼도, 옆에 선 남자의 팔꿈치도, 뒤꼭지를 자꾸만 밀어대는 뒷사람의 가방도 불편을 넘어 불쾌로 이어질 정도이다. 그처럼 비좁은 틈을 비집고 선 그들은 모두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이나 노트만한 패드를 꺼내들고 제마다 밀린 tv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도 아니라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개중에는 열심히 '팡'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화난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보는 그들의 얼굴에선 혹여 누가 자신의 발을 밟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비장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한 여자가 웃고 있다. 입꼬리를 격하게 올려가며 가끔은 '풋'하는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그녀가 팔아프게 들고있는 패드에서는 노홍철의 노란머리와 커다란 입이 보인다. 나는 그녀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히죽일때마다 힐끗거리며 그녀를 본다. 그때마다 내속에서는 어떤 경멸의 감정이 울컥 솟곤 한다.

 

화면에 머리를 박은채로 두팔과 두다리에 불끈 힘을 주고 선 그들은 어쩐지 모두 고독해 보인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흘겨보고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나조차도 숨쉬기 힘들만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고독을 느낀다. 그러나 바우만은 현대의 우리들은 고독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고독할 자유를 잃었다고.

만원전철의 사람들 속에서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장그르니에가 말한 '우리는 혼자 살다 혼자 죽을 수 밖에 없는 섬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독감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다. 바우만의 표현으로 하자면 '유동하는 근대'를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접속할 수 있는 많은 네트워크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혀 혼자라고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개인의 사적인 비밀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같은 채널에 의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독하다. 채널을 닫고나면, 접속을 끊고나면 우리는 여전히 혼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네트워크가 다양하지 않았던 그 시절보다 우리는 몇배는 더 외롭게 된다. 가상의 대중들에 둘러쌓였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의 가상세계는 실제 개인이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나는 관계망에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주변인들을 확장시키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과의 관계는 지속적이지 못하다. 그러한 피상적인 관계속에서 각 개인은 외롭다고 느끼지 않지만, 실제의 자신은 외로움으로 몹시 고통스럽다. 그건 삶의 감미로운 기쁨과 이유모를 슬픔을 이해하기 위한 장 그르니에가 말하는 '절대고독'의 시간과는 다른 종류의 고독으로, 관계를 거듭할 수록 실제의 나는 더 외룁게 된다. 관계를 통한 만족감이 물건을 사들이는 순간의 기쁨처럼 반복되면서 온라인 속의 관계들은 손쉽게 무한 확장되지만 그 속에서 정작 나를 채워주는 친구를 만나기란 불가능하다. 재빨리 얻고 재빨리 버려지는 소비사회는 인간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는 인터넷, 휴대전화, 아이팟, 게임기기라는 스피드와 편리함을 얻었지만, 대신 '절대고독'의 권리를 잃었으며, 기기들을 통한 다량의 다양한 즐거움을 얻었지만, 즐거움의 질을 놓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평범한 우리들은 대때로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와 같은 괴물이 될 가능성이 깊어지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 실린 44통의 바우만의 편지는 2008년 부터 2009년까지 2년에 걸쳐 씌여진 것으로 세대차이, 신용카드, 신종 플루, 교육, 종교, 성격 등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 주제는 '사적인 자유'를 암시하는 '고독'으로 귀속된다.

사적인 영역을 공적장소로 끌어냄으로서 고독의 시간을 거부하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이제와서 어떻게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에는 본질적인 것을 되찾자는 것일텐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을 좇아 돌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인 수레바퀴를 멈출수 없다면, 수레바퀴의 원심력에 휩쓸리지 않도록 각자가 강해지는 방법말고는 달리 해법이 없을 듯하다.  문명을 되돌릴 순 없지만 문화를 되돌리기는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닐까, 바우만을 통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의의가 될 것이다.

a*****0 2012.12.2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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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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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그가 계몽하려는, 좀 더 약한 표현으로는 꾸중하려는 대상이 바로 ‘젊은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젊은이’라는 연령 코호트는 일반적으로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는 것을 더 좋아하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현상들은 (내가 보기에) 거의 대부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마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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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그가 계몽하려는, 좀 더 약한 표현으로는 꾸중하려는 대상이 바로 ‘젊은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젊은이’라는 연령 코호트는 일반적으로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는 것을 더 좋아하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현상들은 (내가 보기에) 거의 대부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젊은이들만 있는 게 아니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비판하는 젊은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젊은이 중 하나가 ‘나’일거라는 자만심 같은 것도 섞여 들어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일반적인 편지와는 다르게) 어떤 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대 일반, 혹은 젊은이라는 이름의 연령 코호트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일반화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급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라는 생각까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는 우리 젊은이들을 비판하려던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이렇게 된 까닭, 더 나아가 거의 대부분의 세대가 유동하는 근대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미시적인 관점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책의 구성이 후반부에 갈 수록 거시적인 관점으로 나아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닌 세계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 이전에 비해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바뀐 결과로 우리가 어떤 것을 잃어버렸는가의 문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다시 더 좋은 방향으로 이것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동하는 근대>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대두되고 있는 맑스를 중심으로, 벤야민, 루카치, 지젝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바우만 등등. 그리고 이런 이론적인 토대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가, 경제학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비판한다. 그리고 후쿠야마가 선언했던 역사의 종언이 미국 발 금융 위기로 인해 어쩌면 무효일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지금의 21세기는 불안전한 토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고 얘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가 그렇듯 이 책에서도 매우 중요하면서도, 날카로운 현미경이 되어 세상의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친다. 즉, 그가 비판하는 근거는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인데, 44개의 편지에서 한 번씩은 등장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는 지금과 전 시대를 막스 베버의 언어를 사용하여 ‘가벼운 외투’, ‘강철 외투’로 비유하고 자신의 언어인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 후 액체성을 띄기 때문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그래서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시대라고 말한다. 액체가 가지고 있는 유동성이라는 특성이 표면적으로 긍정적인 외양을 띄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심점이 없는, 그렇기에 그 끊임없는 변화가 불변성에 대한 회의를 낳는 결과로의 귀결이다. 불변성의 대한 회의는 지식의 내물림을 불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진리’를 불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윗세대들이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더 이상 ‘지식’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마치 토대 없이 집을 짓는 건축가처럼 계속 해서 허물어 질 수밖에 없는 집을 짓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말하는 유동하는 근대는 자본의 흐름이라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띠는데 자본 역시 한 곳으로 귀착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흐르면서 새로운 착취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런 규정 속에서 우리(젊은이)는 ‘시대를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유동하는 근대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유동하는 근대의 액체성에 휘말릴 수밖에 없음을 여러 가지의 일례들을 제시하면서 우리(젊은이)는 어쩌면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 즉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의 의미는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내미는 협력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표제인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처럼 각 편지에서 그는 우리의 세계가 변함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술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리는 고독(편지2), 정체성(편지4;정체성이 인터넷에 의해 언제든 처분 가능한 것이 되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유의 가능성(편지5; 글자 제한이 있는 트위터의 주기적 사용으로 인한), 노력의 가치(편지6;인스턴트 섹스; 섹스를 위한 유혹이 오히려 섹스보다 더 결정적인 구성요소라는 사실), 사적 공간(편지 7~9) 등등의 것들이다. 이 모든 분실된 것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시대의 발전이라고 칭송해왔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과학기술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한 조금 더 나아가 소비지상주의에 의해 문화적, 경제적, 신체적으로 우리는 소비할 수 밖에 없음을, 그것도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스컴이나 유행이 만들어낸 흐름에 따라 소비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함으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물질로 변화한다고 얘기한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는 자본이 명령하는 유행에 따라 옷을 구매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함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옷’이라는 물질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편지44편 내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가치의 분실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삶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비본래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해야할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되찾기, 혹은 전복하기>

 

 결론적으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카뮈처럼 반항하기. 그렇다면 그 반항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는 편지20(신종 플루 공포)에서 자본의 책략에서 발버둥치기, 편지 26(새해 소망)에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등을 권한다. 그는 지금 시대가 이러 이러한 식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주시하고 그 어떤 욕망(만들어진 욕망)에도 휘둘리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옳은 길일지라도 충분한 길일까? 예컨대 조금 더 나아가 지젝이 말한 것처럼 (물론 나는 그의 텍스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지만)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충분한 길이 아닐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자본주의 자체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그래서 지젝의 전복적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구독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프레데리크 로르동이란 학자가 쓴 ‘푸조-사트로앵, 사회적 파장과 변혁의 시점’이란 칼럼에서 자본주의 내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꺼내놓았다. 이 해결책이란 것이 어조 상 조롱적인 면이 있어서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이런 방법도 있다, 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현된다면 자본주의 내에서도 삶을 이야기 하고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들었다. 결국 지젝이 옳다고 믿는 나의 마음은 자본주의 내에선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무사유성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특별히 지젝처럼 어떤 근거도 없으면서 말이다.)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제시한 유토피아적 해결책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찬양할 주장(물론 그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에 동의하지만)이란 점에서가 아니라, 그와 같이 자본주의 내에서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또 다른 가능성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 가능성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 이것이 바우만이 말하는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w********2 2012.09.2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