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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 읽기, 이제야 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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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키스 젠킨슨(1991) 100913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 읽기, 이제야 이해하다           역사.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다. 역사를 중요시하는 이유 또한 익숙하다. 일례로 ‘역사(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미래를 모색할 수 있다’ 정도는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으리라. 해서, 우리는 꼭 역사를 공부해야 한단다. 헌데, 여기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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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키스 젠킨슨(1991)

100913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 읽기, 이제야 이해하다

 

 

 

 

 

역사.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다. 역사를 중요시하는 이유 또한 익숙하다. 일례로 역사(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미래를 모색할 수 있다정도는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으리라. 해서, 우리는 꼭 역사를 공부해야 한단다. 헌데, 여기서 공부의 대상’으로 삼는 '역사'란 무엇일까? 어떤 단어나 마찬가지겠지만, 작심하고 정의를 밝혀보자면 심히 머리가 아파온다. 하지만 힘들다고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다핵심적인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은 지적 성장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니까.

 

역사의 정의를 밝힌다는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궁구해본다는 것과 상통할 것이다. 내가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집어 든 책은 지금 리뷰의 소재인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였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조금 의아스럽다. 얼핏 제목으로 판단한다면, 역사의 본질보다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책인 듯 하다. 사실 내용이 그렇다. , 그럼 역사의 정의를 파악하기엔 다소 협소한 논의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기실 역사라는 담론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기능에 대한 논의는 역사의 본질에 대한 논의와 조응한다.

 

역사 담론이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슬쩍 봐서는 이해가 될 듯 말 듯 하다. 그럼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고찰해보자. 역사라는 담론은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조사와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조사의 대상이 되는 과거의 사실들은 파편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가는 파편화된 과거의 사실들 중 필요한 것들을 선택한다. 이때 선택은 취사 선택이라고 해도 좋고, 선별이라고 해도 좋다. 핵심은 이러한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역사가가 지닌 이데올로기가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역사가가 사실들을 역사 이야기로 엮을 때 사용하는 방법론 또한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엮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때, 출판과 발표 등에서 여러 가지 제약들을 당하는데, 이러한 제약은 특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가해진다. 이 외에도 여러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산물을 받는다. 한 마디로 순수한 역사, 객관적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가의 마음의 역사이다. 곧, 역사는 필시 주관적 담론이다. 그리고 역사가의 마음은 이데올로기의 영향하에 있다. 곧, 역사는 현-시대적 담론이다. 또한 역사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경로는 이데올로기의 영향하에 있다. 결국 역사는 태생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담론인 것이다.

 

위의 논의로 미루어볼 때, 역사는 절대로 객관적인 진실의 모음도 일반적인 사실들의 집합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가의 마음이 100% 반영된 이야기도 아니다. 단지 현실의 이데올로기에 조응하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다들 이런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근원을 낱낱히 파헤치고 나니 불쑥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특정한 이해관계가 반영된 이데올로기적 담론일 뿐인데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역사는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모색하는데 유용하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공부 방법이 달라야 한다. 일단 역사를 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인식하는 것이 출발이다. 현실에 유포된 역사 담론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담론들이 중첩적으로 그리고 다면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역시 단 하나가 아니다. 한 사회에는 중심적인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그 주변부에 다종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존재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각기 누군가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 역사는 항상 그 누군가를 위한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접할 때마다 물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이런 의문을 품고 역사를 읽어나간다면, 곧 역사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곧 현실의 권력관계와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는 법. 이런 공부는 현재를 알고, 미래를 예견하는 통찰력을 길러 줄 것이다. 꾸준한 역사 탐구를 통하여 내공이 단단히 다져진다면, 언젠가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지지하는, 자신만의 역사 담론을 직접 생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일천했던 나. 정말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이었다. 무려 6개월 간, 네 번에 걸쳐 읽어댔다. 겨우 180p밖에 안 되는 책인데.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그나마 근래에 푸코나 롤랑 바르트에 대해 조금 익숙해졌고, 덕분에 이번에 어찌어찌 정리해낼 수 있었다. 책 내용은 역사학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나는 역사학도가 아닌지라, 책에서 제기하는 이데올로기 문제에 천착해봤다. 곧 홉스봄의 저서들을 읽을 작정이다. 이번 고심의 결과물들을 실천적으로 적용해봐야겠다.

 

 

 

 

구절

 

실제로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진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 과연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역사는 그저 제멋대로 해석되는 것일 뿐인가?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들이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게다가 그런 것들이 정말로 있기는 한가?”(p35)

 

역사에 부여된 의미란 원래부터 과거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과거에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결단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항상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역사가는 특정한 사회구성들에 의해 특정한 입장을 전달해 줄 것을 요망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가들에 의해 전달되는 우세한 입장은 사회구성 내에서 보다 강력한 지배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p70)

 

역사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권력관계에 다양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재정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배자뿐 아니라 피지배자도 각각 자신들의 실천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독자적으로 각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이 각색한 과거를 부적절한 것으로 취급하여 지배적 담론의 공간에서 배제시켜 버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제 세계의 지배자 또는 피지배자의 필요는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그 때문에 전달될 내용은 계속 재정리된다.

그래서 이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무엇누구로 대체하고, ‘위하여를 뒤에 덧붙여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꾸어야 제대로 된 물음이 될 것이다.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역사란 다른 집단에게는 상이한 의미를 갖는 논쟁적 용어 혹은 담론이며 따라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p70)

 

나는 역사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 담론, 즉 사람과 계급과 집단이 말 그대로 자신들을 위해 과거의 해석을 자서전적으로 구성해내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이해의 차이는 바로 이 곳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어떤 역사든 이러한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일시적인 합의라는 것은 지배적인 힘이 공공연한 권력이나 은밀한 개입을 통해 다른 사람을 침묵시킬 수 있을 때만 달성된다. 역사는 이론이고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이며 이데올로기는 바로 물질적 이해일 뿐이다.”(p74)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오히려 적극적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해방의 의미를 갖는다. 낡은 확신을 내동댕이칠 수 있으며, 그 낡은 확신을 통해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들의 역사를 해체하는 작업은 곧 여러분 자신의 역사를 세우기 위한 전제가 된다. 이 작업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역사란 항상 누군가를 위한 역사라는 점을 되새기게 해 준다. (…) 지식이란 항상 권력과 연관되기 때문에 사회구성 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기 이해에 부합하는 지식을 최대한 퍼뜨리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권력을 분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론적 상대주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여러분은 상대주의적 관점을 통해 절망으로 빠지기보다는,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재평가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해방의 의미다. 반성을 통해서 여러분 또한 역사를 만들 수 있다.”(p86~p87)

 

저 사람은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가? 저 사람은 왜 저런 답변을 받아들이는가? 저 사람은 왜 여타의 다른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저 방식으로 묻고 답변하는가? 이러한 과정은 과연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러한 반성들을 통해 우리가 연구하는 담론인 역사가 표면적인 연구대상인 과거와 상관없이 강요와 압력에 의해 어떻게 쓰여져 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p160)

 

역사는 그 어떤 것도 필연적인 영속성을 갖지 못한다. 곧 실체를 제대로 표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분명한 것은 완전히 우연적인 읽기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다. 가령 어떤 해석이 문화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하다거나 방법론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지배담론의 실천과 결합, 즉 권력과 지식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p180)

 

우리는 역사를 그저 과거에 대한 진실한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학문분야로 고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마음을 그대로 갖고 과거로 들어가서 과거를 깊이 탐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적절하게 재조직하는 담론적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역사는 문화비평가 토니 베네트가 주장했듯이, 이전에 감추어졌거나 비밀 속에 파묻혀 있던 과거, 혹은 간과되었거나 소홀히 되었던 과거의 여러 측면들을 확연히 밝혀내는 적확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실제로 해방을 가져오고 현실 안에서 현재와 다른 중대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참신한 통찰력이 생겨난다. 이 곳이 바로 모든 역사가 시작되는 곳인 동시에 다시금 되돌아오는 곳이다.”(p184~p185)

b******a 2010.09.13.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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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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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원제명은 ‘Re-thinking History’이다. 책을 처음 접하면서 왜 직역하여 ‘역사 다시 생각하기’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역자의 의도를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 Jenkins에 의하면 역사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고 따라서 역사(history)란 사실상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역사들'(histories)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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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원제명은 ‘Re-thinking History’이다. 책을 처음 접하면서 왜 직역하여 ‘역사 다시 생각하기’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역자의 의도를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 Jenkins에 의하면 역사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고 따라서 역사(history)란 사실상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역사들'(histories)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와 ‘역사’는 다른 것이며, 따라서 서로 동일시 될 수 없다고 한다. 즉 역사란 과거에 대한 하나의 담론이며 범주상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과거는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사라진 것들은 역사가들을 통해서 다시 살아난다. 즉 역사는 역사가 또는 역사가인양 자처하는 사람들의 수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는’ 과거란 항상 우리 자신의 관점, 즉 우리 자신의 ‘현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각색되거나 날조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모든 정치인들이 그러하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서 근현대사의 역사 교과서 개정에 대한 갈등이 매스컴에 흔히 오르내리는 현상을 우리는 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역사를 문학에 즐겨 비유하고 있다. 즉 역사와 창작물인 문학은 서로 비슷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배워왔던 역사와는 다른 접근인 것이다. 신선한 충격 속에 ‘과학’보다는 ‘예술’로서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균형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가? 또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저자는 ‘회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1) 많은 ‘과거들’과 ‘진실들’이 있을 수 있다. 사실 비근한 예로서 시청 앞 광장의 시위자 통계도 경찰의 발표와 시위 관계자의 발표가 큰 차를 보이고 있음을 우리는 많이 접한 바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지만 오히려 전쟁을 경험한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가장 이데올로기의 피해자 층이라 생각한다. 국민학교-이제는 초등학교라 부르지만-에서는 뿔난 도깨비로 북한군을 그리곤 하였고, 대학에 와서는 국제정치에 눈뜨면서 절대적인 ‘우리’라 생각했던 미국에 대한 배신감에 몸서리를 쳤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의 혼돈과 혼란 그리고 그 무엇에 대한 분노…….

 

지금도 우리는 일본만큼이나 독일에 대해서 적대감을 느끼곤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독일을 접한 바 있던가? 미국 허리우드 영화와 서구식 교육 탓이라 본다.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이자 패전국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역사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ABBA의 노래 제목과 같이 “Winner takes all."이며, 역사 역시 마찬가지리라.

 

초등학생에게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퀴즈를 던지면 무엇이라 답할까? 아마도 상당수의 답은 ‘콜럼버스’일 것이다. 왜 우리는 이 퀴즈의 답으로서 ‘콜럼버스’라고 배웠던 것일까? 누가 무엇을 발견한다는 말인가? 이는 누구의 시각이며,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우선 첫째로 나는 우선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즉 우리의 생각과 의식의 크기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로서 ‘유신헌법’에 대한 지식인들의 저항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둘째로 균형 잡힌 사고를 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언급한 ‘중립적 입장’2)을 취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주관을 명확히 하되, 극단적이지 않음, 즉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그저 과거에 대한 진실한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학문분야로 고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마음을 갖고 과거로 들어가서 과거를 깊이 탐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적절하게 재조직하는 담론적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역사는 문화비평가 토니 베네트(Tony Bennett)가 주장했듯이, 이전에 감추어졌거나 비밀 속에 파묻혀 있던 과거, 혹은 간과되었거나 소홀히 되었던 과거의 여러 측면들을 확연히 밝혀내는 적확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실제로 해방을 가져오고 현실 안에서 현재와 다른 중대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참신한 통찰력이 생겨난다. 이 곳이 바로 모든 역사가 시작되는 곳인 동시에 다시금 되돌아오는 곳이다. 


 


1) 저자는 이를 ‘반성을 통한 적극적인 회의주의(a positive reflexive scepticism)이라 표현함. 160쪽.

2) 저자는 이를 ‘입장이 부여되지 않은 중심’으로 표현하며, 사실 언어상의 모순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피력함. 187쪽.



k******o 2011.03.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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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키스 젠킨스(2017.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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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키스 젠킨스(2017.01.18.)   책의 무게는 얼마되지 않지만,내용의 무게는 상당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명확한 관점과 일관성 있는 논조로글을 진행해 나가서 읽기 불편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역사란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누구나 한번은 들었지만,누구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드문 그 책 말이다.우리집에
"34.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키스 젠킨스(2017.01.18.)" 내용보기

34.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키스 젠킨스(2017.01.18.)

 

책의 무게는 얼마되지 않지만,

내용의 무게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명확한 관점과 일관성 있는 논조로

글을 진행해 나가서 읽기 불편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

누구나 한번은 들었지만,

누구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드문 그 책 말이다.

우리집에도 있고 나도 3~4번 읽었지만

아직도 잘 이해안되다.

역사는 현재와 대화이다

이 문장을 잘 풀어 설명할 수 있다면

꽤 높은 역사철학과 역사학에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원제는 <Rethinking History>이다.

다시 역사를 생각해보자.

 

먼저 역사와 과거를 구별짓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 언어에서 과거와 역사는 크게 구별짓지 않아도 괜찮지만,

학문적으로는 다르다.

그리고 과거와 다른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역사들은 과연 무엇인가 

믿을 수 있는가 

모든 역사 사료에는 저자 및 구성한 사람이 있다.

저절로 생긴 역사는 없다.

누군가의 글이고, 누군가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록한 사람을 100%로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여기까지 고민했다면 이미 절반은 왔다.

이탈리아의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는 이야기로

역사적 객관성에 의문을 제시했다.

 

젠킨스도 비슷한 선상에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의 이데올로기나 권력 등 사회적 위치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서술되어지며 보여진다고 한다.

역사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에 의해 불러와지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무엇인가를 넘어서 어떤 의도로 역사가 불려오게 되었는지

누구를 위한 역사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역사가가 사료를 해석하고 서술할 때, 역사적 방법의 차이보다는 자신의 이념과 가치 방향에 영향을 더 받을 수 밖에 없고, 현실적인 권력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였다.

우리가 속한 환경의 중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다른 배경의 스펙트럼에 따라 중간이 중간이 아닌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의 중도파가 사회전체의 중도와 같을까?)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이런 것으로 인해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에 대한 감정이입은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역사적 감정이입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무수히 많은 논쟁의 대상이며, 학자에 따라 다릅니다. 혹시 역사교육을 공부하시는 분은 추가적 공부가 필요합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닌 역사를 읽는(to read)이며, 역사가의 이데올로기나 관점의 영향을 받으므로 이런 점에 유념하며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두껍지 않은 책입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읽어볼만하고 번역도 나름 괜찮습니다.

 

s*****n 2017.01.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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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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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역사는 다른 것이다. 과거 중에서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끼쳤다고 역사가에 의해 판단되어, 분석의 과정을 거쳐 기록된 것만이 역사가 된다. 따라서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다. 역사가의 해석을 거친 경우에만 역사로서의 의미를 부여받아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역사도 이데올로기의 구성물이므로 지배집단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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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역사는 다른 것이다. 과거 중에서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끼쳤다고 역사가에 의해 판단되어, 분석의 과정을 거쳐 기록된 것만이 역사가 된다. 따라서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다. 역사가의 해석을 거친 경우에만 역사로서의 의미를 부여받아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역사도 이데올로기의 구성물이므로 지배집단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재구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역사는 결코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다소 음습하고 불쾌한 냄새가 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는 반드시 누군가를 위한 역사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대사에서 보면 국가가 정치적으로 획기적인 발전기에 들어섰을 때 역사를 서술하였다. 우리도 가끔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사를 말한다. 역사를 보는 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런 생각없이 읽을 경우에는 역사책이 다 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어떤 안목이 형성되었을 경우에는 다르다.도올 김용옥 선생님은 식민사관의 본질을 사대주의와 분열이라고 하셨다. 일본 역사가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안목 없이 그들을 비판할 능력도 생겨날 까닭이 없다. ''민족''의식이 18세기 이후에 형성된 관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민족의식을 중심에 놓고 기술된 역사는 우리 조상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 이 책을 읽으면 평소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에도 의문을 갖게 된다. 감정이입, 원인과 결과, 연속과 변화, 유사성과 차이 등은 여전히 역사의 주요 개념이 될 수 있는가? 역사는 예술인가 과학인가? 역사에 이르는 바람직한 접근방법은 반성적 방법론과 자신의 역사 해석에 적합한 내용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통하여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왜 역사가 필요한지 의문을 가져본다면 이 작은 책의 무게가 새삼 크게 느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인상깊은구절]
역사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 구성물이며 그것은 ''이야기 주체''인 역사가의 관점이 표명된 것이다.
c*****8 2004.01.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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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물음으로...
"'역사란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물음으로..." 내용보기
현대는 이른바 포스트 모던의 시대이다. 포스트 모던의 유행은 모든 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학문 분야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영화를 비롯한 tv 방송, fashion까지 그 영향은 바로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바람은 인문학에도 강하게 불고 있고 역사학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학의 포스트 모던의 가장 선두 그룹에 속해 있
"'역사란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물음으로..." 내용보기
현대는 이른바 포스트 모던의 시대이다. 포스트 모던의 유행은 모든 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학문 분야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영화를 비롯한 tv 방송, fashion까지 그 영향은 바로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바람은 인문학에도 강하게 불고 있고 역사학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학의 포스트 모던의 가장 선두 그룹에 속해 있으며, 가장 논쟁의 핵심에 서 있는 학자가 바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원제: Rethinking History)"의 저자 Keith Jenkins 이다. 그는 역사학의 입문서이자 논쟁서로서 이 책을 저술하였고, 이른바 역사학 해체주의를 선언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역사와 과거는 별개의 문제이고 역사는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가의 담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 그러한 개념정의에 대한 논쟁의 문제로, '진실', '사실과 해석', '편견', '감정이입','증거와 자료' 등에 대해 차례로 고찰하면서, 결론적으로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그 회의주가 반성을 통한 회의주의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천과 사고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이야 말로 역사학의 해방을 의미하고 새로운 발전과 희망을 던져주는 방향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은 19세기 모더니즘의 영향이 가장 길게,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불고 있는 곳이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모더니즘의 산물로 우리는 남북분단을 겪어야 했고, 이데올로기의 대립하에 학문 역시 군사정권의 통제를 받아야 했으며 그러한 배경 가운데 역사학계에서는 이데올로기나 권력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서구에서 이미 포스트 모던이 주류로 떠오를 무렵, 우리 사학계에서는는 '민중사학'이라는 정치적, 당파적이 심한 또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적인 역사학이 사학계의 주류가 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포스트 모던에 대해 많은 부분이 수용 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볼 때,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는 사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역사라는 학문을 단지 tv의 사극 드라마로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특징과 최근의 연구동향을 알려주는 최고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l********t 2002.12.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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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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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History" E.H. Carr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마치 진리처럼 받들어지는 하나의 역사에 대한 입장을 대변한다.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을 넘어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주장은 여전히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굿바이 E.H. Carr라는 출판되고 있는것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사관을 뛰어넘는 또 다른 역사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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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History" E.H. Carr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마치 진리처럼 받들어지는 하나의 역사에 대한 입장을 대변한다.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을 넘어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주장은 여전히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굿바이 E.H. Carr라는 출판되고 있는것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사관을 뛰어넘는 또 다른 역사에 대한 입장이 나오는것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역사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새로운 입장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에게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작은 책은 정말 커다란 도움이 될것이다. 저자는 먼저 역사는 과거라는 것과 전혀 별개의 성격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역사는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실증주의 사관을 시작으로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주장한 카를 넘어 이제 젠킨스는 역사는 과거와는 상관이 별로 없고 실제로는 과거라고 하는 흘러간 시대를 해석하는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실제로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철저히 받은 역사가의 담론을 공부하는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역사는 반드시 어느 한 주장을 대변하는 '누군가를 위해야만 성립될 수 있는' 역사가 되고 만다. 이런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젠킨스는 과거의 사람들에게 감정을 이입해 그들을 이해한다고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감정이 이입되는 것은 역사가의 마음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과거에 대한 철저한 회의주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연구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중심들의 죽음'과 '메타 이야기들에 대한 불신'으로 규정지어지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 역사연구는 객관적 과거라는 믿음을 버리고 좀더 민주적인 해방공간에서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통 역사책을 읽고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역사교양서가 사실 책의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젠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과거를 보는것이 아니라 역사책을 지은 역사가의 사관을 받아들이는것일 뿐이다.    좋은 역사서를 많이 읽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번쯤은 우리가 읽는 역사서에 대한 근본적 접근을 시도한 책을 읽어보는것도 중요할 듯 싶다. 그렇다면 젠킨스의 이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역사라는것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c******3 2006.01.0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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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화' 그리고 역사가 마음(대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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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제목을 대했을때 나는 작가가 "바야흐로 민중사가 도래했음"을 말해주길 은근히 기대했다. 작은 인간들의 작은 역사들을 얘기할 때가 왔다는 얘기... 하지만 책장을 몇장 넘기지 않아 나의 기대가 무색해지는 저자의 역사인식에 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추구를 일찌감치 포기한다. 오히려 모든 역사서술은 역사가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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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제목을 대했을때 나는 작가가 "바야흐로 민중사가 도래했음"을 말해주길 은근히 기대했다. 작은 인간들의 작은 역사들을 얘기할 때가 왔다는 얘기... 하지만 책장을 몇장 넘기지 않아 나의 기대가 무색해지는 저자의 역사인식에 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추구를 일찌감치 포기한다. 오히려 모든 역사서술은 역사가의 창작물이고 지식의 가설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역사는 단지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고 어떤 특정 역사가 '정당화'되고 지배담론이 되는 것은 그것이 권력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고 그 권력은 이데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란, 지식이란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사람들이 자기 이해에 부합되는 '지식'을 최대한 퍼트리고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역사관은 그가 분명 포스트모던에 경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저자 케이스 젠킨스는 포스트모던 역사연구 분야의 권위자이다. 포스트모던의 역사인식에서 출발하는 그의 결론, 즉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역사는 "역사가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역사가는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 역사서술을 할 것을 제안한다." 그에게 있어 포스트모던 역사의 가능성은 그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이제 역사는 쓰는 자와 읽는 자의 다양한 해석 앞에 자신을 개방했으며 하나의 역사가 아닌 역사들의 다양한 쓰기와 읽기의 가능성은 우리 앞에 무한히 열려있는 셈이다. 그의 이 시작과 결말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해본다. 그렇다면 저자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압력, 입장 아래에서 쓰여졌던, 권력자들을 위한 하나의 역사였던 '역사의 역사'를 극복하고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극복한 역사가 나름의 역사를 쓰라는 것인가? 그의 결론이 그렇다면 역사서술에 대해 그가 내린 성격정의와 앞으로의 역사서술의 제안이 뭔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쨌건, 이제 나는 누구를 위한 역사를 쓸것인가?

[인상깊은구절]
나는 역사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 담론, 즉 사람과 계급과 집단이 말 그대로 자신들을 위해 과거의 해석을 자서전적으로 구성해내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이해의 차이는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어떤 역사든 이러한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일시적인 합의라는 것은 지배적인 힘이 공공연한 권력이나 은밀한 개입을 통해 다른 사람을 침묵시킬수 있을 때만 달성된다. 역사는 이론이고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이며 이데올로기는 바로 물질적 이해일 뿐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성 가운데 전적으로 이데올로기라는 목적을 위해 구분된 제도, 특히 대학에서 행해지는 역사만들기의 일상적 관행을 포함한 모든 역사의 구석구석에까지 파고든다.
d******3 2000.04.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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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균열과 '해방'의 통찰력.
"이데올로기적 균열과 '해방'의 통찰력." 내용보기
아마도 사학입문 수업시간 따위에 최초의 화두가 될법한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E.H.카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규정할 수 있거니와, 이 책의 저자는 그러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와 '과거'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역사'란 객관적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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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학입문 수업시간 따위에 최초의 화두가 될법한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E.H.카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규정할 수 있거니와, 이 책의 저자는 그러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와 '과거'는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역사'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하므로, 지배담론/주변화된 담론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에 다름아니란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온 대전제들 -역사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라는 관념- 의 주요지반들을 해체시키는 작업을, 저자는 명쾌한 논리로 진행해나간다. 권력과 지식의 연계로 구성되는 지배담론의 실체, '중심' 이동의 맥락(context)적 고려 등을 제시하면서 저자가 전개해나가는 주된 내용은 존재론/인식론적으로 '순수하고 객관적인' 방법론은 없다는 것, 하여 그 이데올로기를 적확하게 분석하는 것만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밝히는 명징한 과정-노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그 연원을 따지자면, 포스트모더니즘에 그 기반을 두고있는 이 책은 미셸 푸코, 롤랑 바르뜨, 테리 이글턴의 논의들을 다수 빌어오면서, 해석의 해체와 역사화, 그리고 반성적 방법론을 통한 대안적 읽기-주체적 체계화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또 새롭게 만들어나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주변화된 담론의 다시읽기, 지배담론과 확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균열내기의 작업들은 '파괴적이고 혼돈스럽기만 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곧 '절대적 상대주의'의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닌 '해방'의 통찰력을 동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지금 이순간에도 '누구를 위한 역사'인지를 되묻고 선험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동적(動的)인 텍스트의 재조직-자기담론의 규정과 실천이 잇따르도록 해야할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긍정성을 유효적절하게 이끌어낼 수 있을 통로이기에.
b********g 2003.07.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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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으로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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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에서 Jenkins는 현재를 포스트모던 시대로 규정하고 포스트모던 세계의 역사연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Jenkins는 기존의 모더니즘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포스트모던 세계라는 관점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재정의 하고 있다. 그는 역사란 세계를 해석하는 담론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여기서 '담론'이라는 용어는 역사가 스스로 존재하거나 순수하게 얘기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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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에서 Jenkins는 현재를 포스트모던 시대로 규정하고 포스트모던 세계의 역사연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Jenkins는 기존의 모더니즘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포스트모던 세계라는 관점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재정의 하고 있다. 그는 역사란 세계를 해석하는 담론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여기서 '담론'이라는 용어는 역사가 스스로 존재하거나 순수하게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곧 역사는 누군가를 위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 Jenkins는 역사를 '과거'와 역사서술로 구성된 것으로 보고 이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과거는 '읽기'를 통해 얻어지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 과거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읽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담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읽는 다양한 방법들은 특정한 사람, 계급 혹은 집단의 이해를 포함한다. 따라서 역사는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역사란 있을 수 없다. 실천이라는 부분은 역사가의 역사서술을 의미한다. 역사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의 이해관계와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역사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연구장소 그리고 출판사 등에서 요구하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에 의해 서술되는 '과거'이므로, 역사가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연구의 주제와 범주를 정하고 개념, 자료, 연구방법을 선택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서술이라는 완결에 이르기까지 개입한다. 역사가의 연구는 그것이 소비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독자의 이데올로기를 투영한다. 이렇게 계속되는 이데올로기의 투입은, 역사가가 처음에 의도한 바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고 하나의 연구에 대한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역사는,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며 이 해석은 다양함을 넘어 무한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으로 나누어지고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해석을 얽매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권력'이다. 역사를 포함한 지식이란 권력과 연관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집단은 자신의 이해에 부합되는 지식을 유포하고 정당화시킨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해석은 제한되어지고 일치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역사란 권력을 가진 누군가를 위한 역사인 것이다. Jenkins의 주장은, 과거란 실재하는 것이며 역사가는 객관적 입장을 지켜야 한다는 모더니즘 역사학의 대전제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의 비판은 역사 교육에서 이루어지는 문제들과 역사 연구의 수용에 있어서 일어난 문제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세계의 역사연구라는 극단적 입장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 또한 안고 있다. Jenkins의 비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역사란 '누군가를 위한 역사'라고 언급한 데에서 보여지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있다. '누군가를 위한 역사'라는 표현은 역사가 실재가 아니며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는 이 양자의 관계를 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한계를 드러낸다. 만약 그의 주장을 옳다면 포스트모던적 역사학은 권력에 대한 연구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식과 권력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면 양자의 관계를 폭로하는 것이 어떻게 해방으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과거를 다루는 '담론'이라는 그의 지적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담론으로서의 역사는 과거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그에 따른 다양한 방법론을 인정하여 역사의 지평을 확장시켜 줄뿐만 아니라 역사와 현실이 가지는 필연성을 내포함으로써 역사가의 실천이라는 부분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i******s 2004.04.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