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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책이다. 조성택 교수님의 다른 책을 찾아 보니 없다. 논문을 찾아 읽기는 부담 된다. 글을 잘 쓰신다. 김용옥 선생처럼 독자들을 촉발시키는 문제제기를 책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마치, 42.195km를 전력질주하는 능력과 비슷한 것 같다. 학문적 엄밀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독자를 끝까지 잡아 끄는 능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공부야 다들 열심히 하셨겠지만, 많은 부분 선천적인 것에 기인한다고 말한다면, 너무 수동적인가.
불교사를 되짚어 보며 불교를 재검토하고 있다. 그 역사는 기존 불교사 책들이 제시하는 정형화된 역사가 아니다. 초기불교부터 근대 한국 불교, 미국의 불교를 쭉 훑어 보고 있는 데, 단순 나열이 아니라, 쟁점이 되는 문제는 콕콕 짚어 내고 있다. 내가 기억에 남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1) 오늘날 불교 연구가 서양의 시각을 빌리고 있지 않은가 ? 2)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초기불교 경전에 대한 이해 문제다.
먼저, 근대 불교 연구가 서양의 연구 방법을 빌려 왔기 때문에 우리는 동양의 불교를 서양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 시각이라는 것은 합리적 이성적 시각이다. 서양적 합리성의 바탕은 과학이다. 과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학문이 아니다. 그런데, 불교의 생각을 철학으로 보든 종교로 보든, 서양처럼 합리적 추론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라 명상이라는 특수체험에 의해 나온 것으로 본다면, 그것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 이해나 왜곡이 되기 싶다. 예를 들어, '고'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단순히 인생은 다 고통이라고 이해해서 애 낳는 것도 고통이고 출근하는 것도 고통이라고 이해하면 편하겠지만, 이는 불교가 단지 처세술을 다루는 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부처나 수많은 선사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을 했겠는가.
두번째, 초기불교 경전에 대한 문제이다. 최근에 우리나라도 불교 연구자들의 능력이 커지며 초기 경전인 빨리어 삼장을 직접 우리말로 번역해 내 놓고 있다. 또 남방불교 수행 전통인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치는 곳이 급속도로 늘어 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생기는 오해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온전하게 보전된 원전이 있는 데, 이것이 역사가 흐르면서 왜곡되고, 결국 동아시아에서 읽고 있는 대승경전은 그 왜곡의 결과물이며 부처님의 말씀으로부터 한참 멀어졌다는 오해이다. 그러니, 어서 빨리, 부처님의 원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문제는 부처님의 원래 말씀이 그대로 기록된 원전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빨리어 경전이 먼저 기록되었고, 나중에 이것이 번역되어 대승경전이 나왔다고 이해하지만, 이런 증거는 단적으로 말해 없다. 부처님 당시에는 지금 수행처에서 수행자들에게 주고 있는 간단한 팜플렛 정도의 수행 안내서 정도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빨리어 경전이나 대승경전이 생겨난 시기도 거의 비슷한 시기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자신의 처음 제자 60여명이 수행을 끝났을 때, 각자 자기의 길로 가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했다. 이 때 말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접한 진리를 각 지역의 언어로 전하라는 말이다. 그러니, 부처님이 원래 말씀하신 진리를 적은 경전은 단 하나가 아니라 다수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불교의 전승 방식이다. 불교는 인도의 베다처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암송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불교는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종교이다. 과거의 종교를 오늘날에 원형 그대로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제시하신 수행법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것을 당대에 맞게 변형하여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과연 소승경전이 대승경전보다 부처님의 말씀에 가깝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더구나 있지도 않은 원전을 찾는 노력 자체가 불교라는 진리로 가는 배를 경직시키는 길이 될 수가 있다. 그렇더라도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빨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원전 번역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칫 원전에 대한 강조가 살아 있는 불교가 아닌 죽은 불교로 만들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얘기가 길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 많았던 책이다. 21세기 불교를 이해하고 앞으로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는 책이다. 기복적인 신앙도 좋겠지만, 이 책 정도의 이해를 전제에 둔 신앙 생활도 더 충실한 종교 생활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너무 길어져 급하게 끝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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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자 조성택은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근대 불교학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근대 이전 우리에게 불교는 있었지만 불교학은 없었다. 불교학은 근대의 산물이다."오늘날 '불교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불교철학 담론은 근대 유럽중심적 시각의 산물이다. 즉 근대 불교학은 태생적으로 식민주의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불교에 대한 유럽적 해석은 근대 학문의 한 상징으로 20세기 초 일본을 기점으로 동양에 역수입되었다. 오늘날 불교와 불교사에 대한 우리의 인문 교양적 지식의 대부분은 유럽으로부터 수입되었던 근대 불교학의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는 우리의 ‘오랜 전통’이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지식은 유럽에 의한 비교적 '최근의 전통'인 셈이다.
그럼 동아시아 전통 교학과 유럽적 해석의 근대 불교학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저자는 전통 교학 체계와 불교학은 불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동아시아 교학 전통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일미 혹은 일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은 붓다의 가르침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전통 교학은 불교 텍스트와 교리의 역사적 형성이라든가 다른 지역 불교 전통과의 상이점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에 근대 불교학은 문헌학과 고고학에 기초하여 다양한 불교 고전 문헌의 수집과 편집 그리고 번역을 통해 고타마의 본래 가르침과 역사적인 모습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근대 불교학은 계몽 이성이라는 프리즘과 유럽적 상상력을 통해 불교 경전을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재해석했다.
"불교 경전은 근대적인 합리적 이성으로 재해석되었으며, 불교의 깨달음은 근대적 계몽이성에 유비되었다. 번뇌는 식혀야 할 '열정'으로 이해되었으며, 깨달음은 일종의 '정신적 계몽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붓다는 신화적 존재에서 역사적 존재로 복원되었을 뿐 아니라 '열정'을 차갑게 식힌 이성적이며 이지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 인간'으로 재해석되었다."(18쪽)
불교는 대승불교와 밀교 전통이 있고 대승 전통 안에서도 반야, 열반, 정토, 법화, 유식, 화엄 등과 함께 선종이 있다. 동아시아 대승 불교는 한마디로 한문 불교다. 한문 불교는 인도 불교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번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역 경전을 인도 원전 텍스트의 왜곡이나 그림자 정도로 취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역 불전을 하나의 독립된 불교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
조선 500년 '산중 불교'의 소극성에서 벗어나 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가령 만해 한용운의 염불당 폐지와 대처식육론은 전통과의 과감한 단절을 시도한 예다. 일각에서는 한용운의 대처식육론을 조선 불교의 왜색 불교화란 관점에서 비판하는데, 저자는 대처식육론을 조선 불교의 왜색화로 매도하는 것은 한국 근대 불교의 개혁 의도를 고려하지 않은 경솔한 처사라고 본다. 한편, 근대 불교를 항일과 친일의 도식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한국 학계의 편향성이 한극 근대 불교사 기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항일과 친일이란 이분법에 근거한 근대 한국 불교사의 민족주의적 역사 기술의 문제는 왜색 불교 대 민족 불교의 문제로 단순화되었다.
저자는 열암 박종홍과 뇌허 김동화의 근대적 불교연구비판을 통해 탈근대 불교학을 전망하고 있다. 열암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상의 외연으로서의 불교 연구와 인도 및 동아시아 불교를 포함하는 불교학으로서의 뇌허의 불교 연구는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불교 연구의 두 가지 모델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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