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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2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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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을 하는지 사무실위에서 들려오는 드릴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이미 읽고 있는 책이 있음에도 도서관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신간코너에 서서비행이라는 재미난 제목을 단 책이 눈에 띕니다. 생계독서가, 매문기라는 발칙하고도 자학적인 부제는 취미독서가의 호기심을 자극하네요. 인터넷 서점 인문분야 MD를 하다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싶어서 서평가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그를 보면 정작 도서관 사서와 책방 점원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입니다.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게 좋다"는 보네커트의 천명에도 불구하고 전문 서평가의 길을 걸어가며 쓴 글을 골라 책 한 권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성인들이 책을 년간 몇 권 안 읽는다고 하는데도 직업적 서평가뿐 아니라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걸 보면 독서에도 양극화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업계나 도서판매업에 종사하는 것도 아닌 제 입장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서평을 남긴 책에 대하여 또 하나의 독후감을 더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독서기록을 남기고자 한다면 비공개로 하는 것이 겸손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개하는 이유는 이웃들에게 공감의 지원을 받고 생각을 교환하고 이웃의 리뷰가 아니면 알지 못했을 책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전직 인터넷 서점 MD출신이라 보았던 업계의 뒷이야기도 살짝 전하고 있는지라 인터넷 서점에서 대부분의 책을 구입하고 책을 읽은 소감을 그 곳에 올리기도 하는 입장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 좋고, 지겨운 책에는 지겨운 서평, 재미난 책에는 재미난 서평을 쓰는 것이 서평가의 윤리랍니다. 동네 책방과 달리 온라인 서점이 가진 장점이 진열공간의 제한이 없는지라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독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출판사에서 절판되면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콜렉션》은 저자의 우려대로 아름다운 장정으로 소유욕을 자극했음에도 절판되었고 낱권으로 몇 권만 판매중인 것을 저도 확인했습니다. 저자가 맛깔스럽게 소개한 김수영과 박인환, 헤밍웨이와 피츠제랄드의 애증의 관계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봤더니 《헤밍웨이 vs. 피츠제랄드》도 유감스럽게 절판입니다. 저자의 서명이 들어간 초판본을 소장해야겠다는 열심은 없지만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보다는 진주같은 책이 진흙속에 묻혀버리지 않도록 독서가에게 관심을 환기시키는 서평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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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내가 읽은 책은 총 110권이다. 그렇게나 부지런히 읽었는데, 이것밖에 못 읽었어. 하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혀를 내두른다. 수치로 보면 거의 3일에 한권 꼴로 매일같이 책을 봤다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우리 나라 직장인들의 1년 평균 독서량이 5권도 안되는 걸 아냐고 말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인데, 아무리 계산해봐도 1년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제한되어 있고 그렇다면 나의 남은 생애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이란 고작 3,000여권 내외일 거란 말이다. 하루에도 수백권씩 쏟아지는 책들, 매일같이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고, 서점에라 가지만, 내가 읽어야할 그 수많은 책들 속에서 어딘가 슬픈 기분이 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 없다는 것.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것 정도.
자, 당신이 올해 처음 읽은 책은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읽는 책이, 바로 당신을 규정한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단언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매혹적인 마술같기도 하다. 아직까지 올해 아무런 책도 보지 않았다면, 자신의 한해 운을 만들어줄 멋진 책을 하나 골라서 읽어보라. 내년 이맘 때 즈음에 어쩌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미소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지금 당장 책을 집어들어라.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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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상에서 꽤 유명한 책, 알고보니 읽은 사람은 많지만 구매한 사람은 적은, 다른 사이트에서 작가 결혼기념 반값 행사로 구매했다. 그런데 왜 예스에 리뷰를 남길까? 그야말로 예스의 서평단들이 꼭 읽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 우연히 발견한 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서평 쓰는 형식에 관한 강의였다. (카페 회원들에게 강의하는 글이었던것 같다) 우선 줄거리를 적는다, 그리고 본문의 문장을 2~3개 정도 적는다. (적기 싫으면 사진으로 찍고) 그리고 감상을 2~3줄로 마무리. 아니 서평이라는 건 이미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보고 읽지 않은 사람이 어 재밌겠네?해서 구매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미 책 표지에서도 줄거리를 말하고 온라인 서점 서평란에도 줄거리만 가득하니 이미 읽기도 전에 흥미를 잃어 버리고 만다. 이 책은 그런 이상한 서평세상에서 '서평이란 사실 이렇게 쓰는 거에요' 라고 알려준다. 단지 문체가 하루키 에세이와 비슷하다고 말하면 작가가 싫어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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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줄거리들
구글, 네이버 그리고 오랜만에 다음에서 '후장사실주의자'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 엊그제는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었으며, 덧붙여 작가와 관련된 몇몇 시시껄렁한 인터뷰도 찾아보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한 번 poptrash의 트위터 타임라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소득이라고는, 후장사실주의자의 후장이 바로 그 '후장'이라고 얼버무리는 정지돈의 인터뷰 답변 하나와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속 주인공들이 스스로 '내장사실주의자'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 돌아다녔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 1,2권은 몇 달 째 책장 속 가장 눈에 띄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읽고는 싶은데 선뜻 손을 못 대고 있는 상황. 같은 처지에 있는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역시 읽어야 하는 책이기는 한데, 과연 21세기안에 이 책들을 다 읽는게 가능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겉표지만 익숙했던 나로서는 '내장사실주의자'와 '후장사실주의자'간의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짧은 추측만 가능할 뿐. 그 이상은 가늠할 수 없었다. 도저히 모르겠다. 그놈의 '후장사실주의자'가 뭔지 말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인 것 마냥 달고 다니는 그들 패거리만의 무언가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지금까지도 이렇게 집착하고 있다. 가끔 보통의 남자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끈기와 열정을 다시금 확인하고는 한다. 찌질해보여도 어쩔 수 없다. 무슨 소리냐고? 같은 남자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럼 정정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애시당초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지도 않고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을 펼쳐본 게 화근이었다. 물론 당장 나에게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군지 묻는다면 서슴없이 '볼라뇨'라고 답할 수 있기는 하다. 지난 반 년간 <아이스링크>를 시작으로 <칠레의 밤>, <먼 별>, <부적>, <전화>까지 꾸준히 읽어왔다. 가장 유명한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을 마지막 목표로 삼아 하나씩 읽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이쯤이면 나와 볼라뇨를 처음 만나게 해준 2,666원의 책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을 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수 많은 볼라뇨 감염자들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대표작들을 먼저 읽고 오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감염자들은 나만 쏙 빼고 자기들끼리 아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던 중 나는 볼라뇨 감염자를 자처하는 또 한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름은 금정연이라고 한다. 그가 이 책에 남긴 <2012년 7월 10일, 서울 은평구 진흥로 3길>이라는 제목의 글. 이게 서평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책을 언급하고 있으니 서평이라고 해야 할 듯한 글. 이 글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줄거리 대신 그는 자신과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맴돌았던 이야기를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한 간증법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문득 나도 이 사람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는 서평을 남기면서 콕 집어 누구처럼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금정연의 글은 내가 막연하게나마 생각해오던 글쓰기의 스타일과 닮아 있었다. 이내 그의 다른 서평들이 궁금해졌다. 필자 소개란에 따르면 그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인문 분야 MD로 일했으며, 다행히도 그의 서평들을 모아 낸 <서서비행>이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 책이 잘 됐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를 수식하는 이 표현만큼은 못보고 지나쳤어도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후장사실주의자'였다. <서서비행>이 경유지인 옥천 HUB를 거쳐 성남 금광동의 한 아파트에 당도하기까지는 총 이틀이 걸렸다. 그리고 도착한 책을 다 읽기까지 다시 또 일주일이 걸렸으니 총 10일 정도의 긴 여정이었던 셈이다. 만족스러웠다. <서서비행>과 함께 한 여행(혹은 실린 글들)은 무척이나 프랜들리했다, (진짜로 그가 후장사실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LG트윈스의 오랜 팬이라는 사실은 알게 됐으니까) 그가 책의 줄거리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도 여기서 <서서비행>의 내용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책 내용이야 다른 사람들이나 사이트가 세세하게 다 말해주고 있을 테니, 원한다면 여기보다는 그리로 가보는 게 좋겠다. 계속 말하지만 나는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진짜로 그래서 이 글도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 한 가지만 부탁드린다. 혹 후장사실주의자에 대해서 뭐라도 아시는 분 있으시면 댓글로 좀 알려주십사 하고 말이다. 사례는 답글로 두둑하게 드릴테니. 거기에 원한다면 이 책 <서서비행>도 답변자에게 넘겨드릴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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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 있고, 그 책을 읽은 듯이 만드는 서평이 있고, 그 책이 왜 팔리는지 알게 만드는 서평이 있다. 이 서평들은 모두 책으로부터 내용을 길어와 책에 직결된 형태로 쓴 서평이다. 한 권의 책을 주인공으로 두고 관련한 다른 책들을 조연들로 등장시키는 형태도 있고, 두 권의 책을 대조하여 쓴 서평도 있다. 한편 책으로부터 내용이 아니라 영감을 길어와 쓴 서평도 있다. 책을 소개하거나 책 내용을 간추리거나 책의 특징과 의미를 설계하는 대신 에세이를 지어놓은 형태가 이런 서평이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중략) 평균 4일이 걸린다고 하자. 그렇다면 [봄피아니 작품 사전]에 실린 모든 작품에다 4일을 곱하면 65,400일이 된다. 365일로 나누면 거의 180년이 된다. 이런 계산은 틀림없다. 그 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
표지에 대놓고 매문기賣文記라고 적힌 이 책은 금정연 저자가 쓴 서평의 모음집이다.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수많은 서평문 사이에 틈틈이) ‘왜 서평을 읽냐?’를 물어보는데, 움베르토 에코가 이미 답을 했다. 사람이 살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의 한계, 독서가능영역의 국경선 위로 가뿐히 날아오르고 싶으니까 [서서비행] 같은 서평모음집에 몸을 맡기기 마련이다.
[서서비행]의 저자 금정연은 온라인 서점 MD로 일하다 현재는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중이다. 이 책은 책을 팔다가 글을 팔게 된 저자가 서평문을 기고하면서 느낀 ‘독서의 기쁨과 슬픔’이다. 저자에게 독서는 오롯하게 취미, 재미, 의미의 온실 속에만 머무르지 못한다. 왜냐면 책 읽은 소감을, 책에 대한 소개를, 책 읽기를 추천하는 바를 글로 써서 팔아야 하거든. ‘먹고 사는 게 다 뭔지‘ 싶다가도 ’먹고 사는 게 전부지, 뭐‘하고 마무리하게 되는 세상살이가 읽기와 쓰기를 생계 수단으로 삼게 되면 어떤 의식의 흐름을 보이는지 이 책이 잘 보여준다. 시종일관 마감과 생계의 족쇄를 여과 없이 보여주며, 그 무겁고 차가운 현실을 마주 두드리는 실로폰 놀이라도 하듯 쓴 서평이 이어진다.
사실, 초반부에 저자가 온라인 서점 MD로 일할 때의 경험들, 구체적으로 병아리 고르듯이 무감하게 수십 편의 서평을 본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내 서평도 그런 취급을 받겠구나 하는 자괴감에 ‘이거 더 읽어야 해, 말아야 해?’ 하기도 했다. 이 책의 초반부는 그 정도의 현타를 감수하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 마시길. 비행준비를 거쳐 이륙 초반을 지나면 이 비행飛行은 참으로 흥미진진해진다. 재밌다. 야간비행과 악천후 따위도 문제없다. “희망 같은 건 없는 좇같은 상황”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딱 맞는 경로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야간비행>과 <악천후> 꼭지에서 소개하는 책들은 현실에 대한 염증을 더하기는커녕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다. 낭만주의의 엔진을 꺼보면 진짜 현실로 우리는 착륙한다.
이 책의 제목은 비행이지만 어쩌면 이건 메트로놈이다. 빠르기를 맞추기 위하여 피아노 위에서 연이어 손가락을 흔들던 그 놈.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을 즐긴다면 메트로놈 같은 건 불필요하다. 메트로놈은 나의 연주가 어느 정도 밸런스를 갖추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만 기능한다. 서평가는 그래서 독서 그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안될는지 모른다. 우리 시대에 ‘책’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원고가 팔려야 원고를 쓰는 사람이 계속 생기고, 책을 팔아야 원고를 사서 책을 만드는 사람도 계속 생긴다. 독서는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소비하는 일과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일이 교차한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읽는 행위 자체에만 매진하는 독서가는 어쩌면 자기가 연주를 했다는 일에만 만족하는 연주가에 그칠 밖에. 소비자인 동시에 판매자였다가 이제는 생산자가 된 저자가 쓴 서평은 그런 면에서 메트로놈으로 기능한다. 책은 많이 팔릴수록 좋고, 어떤 출판사도 손해를 보거나 적자가 안 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나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말도 안 되는 책들을 팔거나 독자에게 권하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빠르지만 다정하고 위엄있게’ 라든지 ‘느리지만 경쾌하고 산뜻하게’ 연주하라는 세상에 없을 밸런스를 요구하는 피아노 악보를 연주하는 일, 까다로운 세상 속에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는 건 이런 것이다.
서평이라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의 기록은 메트로놈이 될 수 있겠지만 메트로놈이 필요치 않은, 독서 그 자체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상술한 움베르토 에코의 글처럼 우리가 제아무리 부지런히 독서를 한다고 해도 현실은 언제나 빡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을 놓쳐버리고 마는지. 저자 금정연은 눈 밝은 독자들을 위한 선견자다. 설령 허점이 분명한 책, 참으로 읽기 난해한 책이더라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먼저 발견하여 일러준다. 저자의 소개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책을 알게 되는 기분 좋은 일이 바로 이런 서평을 읽을 때에 일어난다. 특히 이 선견자가 ‘설탕을 입힌 것처럼 달콤한 일반론을 경계하는’ 눈 밝은 독자라면 어찌 믿을만하지 아니한가. 독자에게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비非지식인, 비非문명인이라는 흑백논리를 들이대거나, 자신의 화려한 문장이나 문체에 도취되거나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는 등 별의별 서평이 온라인에 가득하다. 믿을만한 책을 소개해달라거나, 참고가 될 만한 서평문을 가르쳐달라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한 권으로 대답이 되겠다.
p.s. 2)
p.s. 3) 저자 금정연은 좋은 서평의 기준은 어쨌든 좋은 글이어야 한다고 에필로그에 썼는데, 전지적 독자의 솔직한 마음으로서는, 책을 정성스럽게 읽고 공들여 솔직하게 썼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썼든 읽어볼만한 서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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