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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부모를 찾겠다며 대한민국을 찾는 입양인들을 접한다. 생김새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한국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그네들을 접할 때마다 기분이 야릇하다. 잘 사는 나라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 지금껏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해본다. 정체성의 혼란이 무엇인지, 이 땅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헤아릴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예전에는 정말 가난했다. 전쟁이 막 끝났고, 사방이 황무지였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특히 살기 힘들었던 이들이 있었다. 단일민족 신화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차별을 가했다.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결코 우리나라 사람이 될 수 없는, 혼혈 아이들은 차라리 외국에서 성장하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껏 막연히 짐작해왔던 입양에 대한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입양이 하나의 사업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해오긴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와 같은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이야기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아가 넘쳐나는 이 땅은 미군들이 박애를 베풀기에 적절했다. 궁한 처지의 아이들은 고사리 손을 내밀어 초콜릿, 사탕 따위를 구걸했고, 몇몇 미군들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어줄 정도로 정의감에 불탔다. 운이 좋은 아이들은 미군의 마스코트가 됐다. 그들은 잘 다려진 군복을 제공받았고, 규칙적이면서도 깔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주어진 역할은 별로 없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군인들 앞에서 재롱을 피우는 게 아이들의 일이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마스코트들을 데리고 가 자녀 삼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기도 했다. 개개인의 우호적인 관심 차원에서 진행되던 일들은 점점 더 몸집이 커졌다. 전 세계 수호자로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땅을 구원하는 사명감이 미국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모두가 가난하지만 혼혈 아동들은 견고한 순혈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에서 살아가기 힘들 게 분명했기에 입양의 대상으로 부각됐다. 일정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나마 그들을 제약 없이 구제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됐다. 하지만 기회의 땅 미국이 모두에게 천국이었던 건 아니어서,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 중 일부는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인정받질 못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아니 한 회색분자 혹은 디아스포라는 꾸준히 양산됐다. 여느 나라보다도 한국은 충실한 아동 수출국으로서의 역할을 꽤 오래도록 수행해왔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누가 보아도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을 시기에도 해외로 나아가는 아동들의 수는 결코 줄지 않았다. 한국은 아이들을 버렸다.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이지 않아야 국가 경쟁력이 강화된다는 식의 사고는 어딘지 모르게 나치즘을 연상시켰다. 형태는 다르지만 한국 정부는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입양 보냄으로써 순혈주의를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물론 모든 입양 아동이 혼혈이었던 건 아니다. 미국에 가면 지금보다 훨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자녀를 입양 보낸 부모들이 있었다. 제 자녀를 영원히 못 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입양을 결심한 이들은 버젓이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없는 걸로 만들어가면서까지 자녀의 해외 입양에 앞장섰다. 입양 기관의 실적쌓기가 한동안 유행해 몹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입양을 보낼 수 있는 아동을 찾았고, 부모를 만나 설득을 가했다. 내용이 어딘지 모르게 협박과도 닮았다. 너는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포기하라는 식의 말은 부모를 무기력으로 밀어 넣기에 적절했다. 그건 자본의 논리였다. 사람보다 실적이 앞선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지금껏 참 많았다. 아직도 아이를 수출하냐는 손가락질이 부끄러웠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국내 입양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움직임도 예전에 비한다면 많이 강화됐다. 어쩌면 이 또한 하나의 유행과도 같은 흐름일지도 모른다. 정책에는 정답이 없다. 지금은 해외 입양에서 국내 입양으로 목소리가 변화했지만, 앞으로는 아마도 원가족으로부터 분리하지 아니 하는, 미혼 부모 지원 쪽으로 무게추가 옮겨가지 않을까 싶다.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연령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 중 일부는 나보다도 훨씬 어리다. 기억에도 없는 한국을 다시 찾은 그들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부모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들, 입양기관이 지어준 한국 이름마저 잊으면 자신의 뿌리를 잃을까봐 두려운 양 서툰 발음으로 제 이름을 말하는 그들 앞에 서면 왠지 내 자신이 죄인 같단 느낌이 들것만 같다. |